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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영릉(英陵) & 녕릉(寧陵)/ 신미대사, 산스크리트어> 한글창제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은 대한민국 사적 제195호로, 조선 제4대 세종과 그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능인 영릉(英陵)과 제17대 효종과 그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능인 영릉(寧陵)을 합쳐서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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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장릉

男左女右 (남좌여우)의 의미: 음양설(陰陽說)에서, 왼쪽은 양이고 오른쪽은 음이라 함. 한자 읽기는 좌에서 우 방향.

 

https://www.youtube.com/watch?v=f1wp7JT7UIY

 

* 세종대왕의 생애와 영릉(英陵)

세종대왕은 조선 제4대왕으로 1418년부터 1450년 54세로 승하하실 때까지 32년간 재위하였다. 태조6년(1397년) 음력 4월10일(양력 5월15일) 조선조 제3대 임금이신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태종8년 (1408년) 음력 2월11일(양력 3월17일)에 충녕군에 봉해지고, 같은 해 2월 16일(양력 3월22일) 우부대언 심온의 딸(소헌왕후 심씨)과 결혼하였다.

구 영릉 석물 - 세종대왕 신도비(舊 英陵 石物 - 世宗大王 神道碑)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세종대왕기념관 경내에 있는 조선시대의 비석이다. 2002년 3월 15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42-1호로 지정되었다.

이 비는 이수(螭首)를 포함한 비신(碑身)만 5.7m에 달하는 거대한 대리석비(大理石碑)로서 2년여의 공역(工役) 끝에 문종(文宗) 2년(1452년) 2월 21일 구 영릉(舊英陵) 내에 건립되었다. 앞면의 비명(碑銘)은 정인지(鄭麟趾)가, 뒷면의 비음기(碑陰記)는 김요(金銚)가 지었고, 전액(篆額)과 비명(碑銘)은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썼다. 제작에는 150여 명의 석공(石工)이 동원되었다.

 

녕릉(寧陵) :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묘

녕릉(寧陵)

*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묘, 효종대왕릉

영릉(寧陵)은 17대 효종(재위 1649∼1659)과 부인 인선왕후(1618∼1674)의 무덤이다. 처음엔 건원릉의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현종 14년 (1673)에 여주 영릉 동쪽으로 옮겼다. 영릉은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형태이고, 경종과 선의왕후의 무덤인 의릉(懿陵)도 이런 형태를 띠고 있다.

세종릉은 태종릉인 헌릉 곁에서 여주로 이전

https://www.youtube.com/watch?v=aU32rJCxTN0

 

 

 

 

https://www.youtube.com/watch?v=da4avcU_k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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