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양[貴, 현지음으로는 구이양)*⑴ 여행코스에 묘족마을을 찾는다는 유혹에 빠져 귀양 현지 사흘간의 패키지 여행에 나섰다. 나랏 말싸미 듕귁에 달아 서로 사맞지 아니하므로 훈민정음 창제한다는 세종의 뜻에 따라 음운이론에 통달했던 신숙주*⑵는 조음기관의 형상에 따른 아설순치후의 자음과 천지인을 기본으로 하는 모음의 순열과 조합으로 적지 못하는 우리말이 없게 되었으니 한국인으로서 세계사적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굳이 한 가지 약점을 지적한다면 반드시 종성을 표기해야 한다는 의식 때문에 종성이 없은 글자엔 당시로선 음가가 없는 이응을 표기한 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문자란 오랜 세월 동안 두고두고 변형하는 것이 원칙인데 한글 창제는 인위적인 문자이니 그야말로 독창의 극치다.

*⑴우선 사성 중 두 발음으로 표현되는 상성의 한자음을 일자일음주의에 따라 한 글자로 표기한 점도 한국인의 독창적 발상이다.

*⑵신숙주는 집현전 최상의 언어학자로 중국을 왕래하며 <六書略>과 <七言四聲> 등을 들여와 한글 창제의 선구자였다. 부언하면 세종은 정책의 방향을 입안했다면 28자를 만든 분은 명분론의 측면에서 역사적 오명을 뒤집어 쓴 신숙주 선생이시다. 최근 강상원님은 28자 중 소멸된 반치음, 여린 히읕 등의 표기가 사투리에 남아있는 범어와 관련하여 우리말 표기에 꼭 필요한 문자였음을 강조하였다.

 

묘족에 끌린 이유는 그들이 한민족과 같은 동이족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칼싸움과 활쏘기의 명수들이다. 심지어 칼싸움은 궁중놀이문화로까지 발전하였다.

운영자는 평소 우리나라에 재주꾼들이 많은 것은 아름다운 강산 덕분이라고 강조해 왔지만 그 실상은 한민족이 오천년 역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동이족이라는 뿌리에 연류한다.  천지신명을 숭배하는 동이족인 이 묘족이 사는 지역은 중국의 서남방에 위치하는데 해발 고도가 높아 귀양지로도 활용되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이 지역엔 명사와 문장가들이 많았다고 한다.

나무집을 짓고 살던 묘족들은 중국의 개발정책에 따라 30만 가구가 입주한, 산 아래 고층아파트 단지로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관광용으로 남겨둔(?) 개울가의 묘족마을로 찾아가는 길엔 대단지 공원을 조성하여 개울에서 팬티 바람으로 목욕하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운영자는 개울에서 목물하는 사람들이 묘족 사람들이라 추정해 본다. 한국인들도 1960년대 전후만 해도 사내들은 멀건 대낮에, 아낙들은 해진 뒤 어둠이 밀려오면 후미진 냇가로 몰려가 목말을 했으니께.

세계의 관광객들을 불러놓고도 중국 당국이 그런 풍경을 금지시키지 않는 것은 묘족의 문화를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판단된다. 그 목적은 묘족의 보호가 아니라 관광사업의 확대에 있다. 지금은 귀양시를 중심으로 한, 2년전에 문을 연 지금동(직금동의 '직'은 입성이라 잘못된 표기임) 종유석 동굴의 세계관광산업의 확대화에 이미 성공하였고, 만봉림 서부 지역의 만봉호 인근에 사는 부이족 등 소수민족을 관광산업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도 같은 취지다.

우리나라에 원인불명의 '직금동' 종유석 동굴의 '직'표기도 [실사변에 只字를 쓴 글자는 현지 음으로는 입성 '지'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종유석 동굴운 미국에서 관광항공기를 띄울 정도로 세계 최대의 희귀한 종유석을 가장 많이 보유한 동굴이다.

저녁에 소수민족의 민요 공연이 열린 <다채귀주풍>은 묘족의 민요도 들을 수 있어 내 귀양 여행의 마지막 큰 선물이었다.

이 무대의 춤과 노래를 운영자가 몇 컷 찍은 것과 함께 유튜브이 올라온 여행사의 귀주여행 및 명풍경들을 함께 올린다.

귀양(貴陽) 은  자주 비가 내려 햇볕보기가 힘들다는 뜻이라고 한다. 첫날 조식후 버스에 올랐을 땐 흐리다 비오다를 계속했다. 그래서 해가 뜨면 낯선 풍경에 개가 짖는다는 농담까지 생겼다고 한다.

이튿날부터는 대체로 맑은 날씨였지만 개짖는 소리는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애완견밖에 없는 탓은 아닐까?

한국인들은 똥개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잡아먹기까지 했었는데.

닭의 똥집과 뒷다리살을 적당히 건조시켜 먹이며 껴안고 사는 자신을 자칭 엄마라고 부르는 애완견이 아니라, 아이의 똥과 음식물 찌꺼기를 먹으면서도 신이 나서 꼬리치는 똥개와는 판연히 다른 것도 사실이다. 종(種)은 같지만.....

 

환웅천황을 시조로 모시는 苗族묘족민요 vs 韓國경기도민요

https://www.youtube.com/watch?v=b_YBsSV2NOs

 

묘족 노래 "해가 질 때 까지 함께 노래를 해요

https://www.youtube.com/watch?v=smVuTxl_D_8

 

다채귀주풍(多彩貴州風)

https://www.youtube.com/watch?v=GYRf88qtqZ4

 

 

https://www.youtube.com/watch?v=jMmaTSXZcBc

 

 

https://www.youtube.com/watch?v=yPAM2n1wRZE

 

 

아래는 묘족 마을 유적지/ 아래의 첨탑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전망대

공원옆 쉼터에서는 애완견을 위해 묘족들은 퉁소와 피리를 불어 주었다.

초대받은 손님은 악사들을 외면한 채 그것도 소리라고 시끄럽게 하느냐는 듯, 그들 앞에 엎드린 개 한 마리뿐이었다. 아래 벽화에서 춤과 노래를 사랑한 동이족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어 가사로 빌보드차트 1위에 우뚝선 방탄소년단이나 타블로가 빌보드차트 2위를 차지한 것도 그들의 조상이 동이족이었기에 가능했다.

중언부언하면 한국인의 조상인 동이족은 옛부터 춤과 음약에 파묻혀 노동했다.

상여소리에서도 불려지는 남도 지방의 흥타령은 실상 수심가 가락과 상통한다. 그들은 모심기할 때도, 씻김궂할 때도, 초분을 다지기 위해 흙밟기할 때도 흥타령을 불렀다.

북간도 너른 벌판으로 가자는 상주함창가도 실상은 진도아리랑 가락이라 민요창하는 국악인들은 누구나 불렀다.

 

 

 

하단의 33층 빌딩군은 묘족의 주거단지로 공원화단은 고운 빛깔의 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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