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룡비어천가>의 해동 六龍 : 이안사-목조, 이행리-익조, 이춘-도조, 이자춘-환조/ 태조, 태종
2대왕 정조는 누락. 태조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대표함. 太字 시호(세종 생각)
* 선조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여진인이 살고 있던 남경(南京: 간도지방)에 들어가 원나라의 지방관이 되었고,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李行里), 손자 이춘(李椿), 증손 이자춘이 대대로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서 벼슬했다. 천호(千戶) 벼슬이란 필요시 천명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TrDXTflOc0Q
https://www.youtube.com/watch?v=mLAJVskb4yA
https://www.youtube.com/watch?v=gLlSjLuLhD8
https://kydong77.tistory.com/21168
https://kydong77.tistory.com/19420
道의 10가지 특징
https://kydong77.tistory.com/18655?category=883650
一、虛無 二、自然 三、清靜 四、無為 五、純粹
六、素樸 七、平易 八、恬淡 九、柔弱 十、不爭
*념담허무(恬淡虛無) - 염담(恬淡)이 말하는 것은 마음의 평안함과 사적인 욕망을 줄이라는 것이고, 허무(虛無)는 더 높은 단계로 마음이 순수함을 회복하여 불순물이 제거된 단계를 말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Og-ag6_Mb7g&t=252s
https://namu.wiki/w/%EC%A0%84%EC%A3%BC%20%EC%9D%B4%EC%94%A8
5.1. 선원본계 종주(조선 왕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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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사후
https://ko.wikipedia.org/wiki/%EC%A0%84%EC%A3%BC_%EC%9D%B4%EC%94%A8
- 정종
- 의평군파(義平君派) 이원생(李元生)
- 순평군파(順平君派) 이군생(李群生)
- 선성군파(宣城君派) 이무생(李茂生)
- 종의군파(從義君派) 이귀생(李貴生)
- 진남군파(鎭南君派) 이종생(李終生)
- 수도군파(守道君派) 이덕생(李德生)
- 임언군파(林堰君派) 이녹생(李祿生)
- 석보군파(石保君派) 이복생(李福生)
- 덕천군파(德泉君派) 이후생(李厚生)
- 임성군파(任城君派) 이호생(李好生)
- 도평군파(桃平君派) 이말생(李末生)
- 장천군파(長川君派) 이보생(李普生)
- 정석군파(貞石君派) 이융생(李隆生)
- 무림군파(茂林君派) 이선생(李善生)
- 정종(定宗, 1357년 7월 26일(음력 7월 1일) ~ 1419년 10월 15일(음력 9월 26일), 재위: 1398년 ~ 1400년)은 고려 말기의 무신이자 조선의 제2대 국왕이다. 성은 이(李), 초명은 방과(芳果),
- 태종
조선 개국
정몽주 등을 제거함으로써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건하게 하여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92년 이성계가 태조로 등극함에 따라 이방원은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6]
원래 장자로 왕세자를 세워야 하는 것이 원칙이나, 조선 개국의 중요한 논리 중 하나였던 우창비왕설에 연관된 태조의 장남인 진안대군 방우를 제치고, 신하들은 나이와 공로를 감안해 신의왕후 소생 실질적 장남 영안군 이방과 또는 이방원을 세자로 세우라고 주청을 올렸다. 개국의 공로를 따지면 이방원이 태조의 아들 중 가장 많은 공을 세웠으나, 당시 "왕권(王權)보다 신권(臣權)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국정이 안정된다"라는 신권을 주창하던 정도전은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 신권을 주장하는 자기들을 제거할까 봐 두려워 결국 왕세자로 태조의 막내아들이자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의안대군 방석을 선택하였다.[7]
1394년 그는 전직 몽골 관료였으며 조선의 외교관이었던 조반 등을 따라 연경과 남경을 방문하여 주원장을 대면하였고, 후의 영락제와도 만났다.[8]
왕자의 난
제1차 왕자의 난
태조 이성계의 형인 이원계의 아들이자 이방원의 사촌 형으로 이방원을 지지하였다.
세자 자리를 두고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의안대군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자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이에 크게 불만을 나타냈으며 그것은 누구보다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이방원도 마찬가지였다. 태조는 개국 이후 군권분장정책을 통해 영안군 이방과, 정안군 이방원, 무안군 이방번, 세자의 매제 흥안군 등에게 절제사 직임을 수여해 군권을 분할했으며, 이것은 종친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는 원칙에 위배되고 군권을 국왕의 통제 아래에 놓는 일원적 지배 체제에 위배되었으므로, 개국 초부터 태조의 지시 아래 정도전은 사병 혁파를 추진하고 있었다. 이에 반발한 이방원은 1398년에 부왕 태조가 와병 중임을 틈타 아내 민씨의 후원과 이숙번·하륜·조영무 등 사병 혁파 반대 세력, 이화·사촌 이천우·처남 민무구·민무질 등 종친, 외척과 결탁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의 개국공신들과 이복 동생인 무안대군 방번·세자 방석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안 가 태조는 권력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영안군 방과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떠났다. 왕위를 물려받은 태조의 둘째 아들 방과가 바로 조선의 제2대 국왕 정종이다.[6] 이때 아버지 이성계의 서형인 이원계의 아들들이 그를 지지하고 정안군 이방원이 국정을 장악한다.
제2차 왕자의 난
하지만 형제들 간에 다시 한번 분란이 발생하는데, 이방원의 넷째 형인 회안대군 방간이 박포의 꼬드김에 넘어가 왕위에 오를 목적으로 1400년에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때에도 이화·이천우 등이 그를 도왔고, 상대적으로 우수한 장수들과 병사들을 가지고 있던 이방원은 쉽게 이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다. 이후 박포 등을 처형하고 회안대군 부자를 황해도 토산으로 귀양보냈다. 이때에도 회안대군을 죽여야 된다는 여론이 나왔으나 그를 유배시키는 선에서 불문에 부쳤다.
그해 음력 2월에 정종으로부터 왕세자[9]로 책봉되었고, 책봉된 지 9개월 만에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10] 이후 1401년 음력 6월 12일, 명나라로부터 권지고려국사가 아닌 조선 국왕으로 책봉받았다.[11]
https://m.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010010600011#c2b
https://www.youtube.com/watch?v=-MO1BzAjgaM
https://www.yna.co.kr/view/AKR20150422059100005
세종대왕은 무려 22명의 자녀를 뒀다. 그중 첫번째 왕비인 소헌왕후 자녀만도 8남 2녀에 이른다. 두 번째 왕비 등이 낳은 아들은 모두 10명. 세종의 자녀는 이들을 포함해 모두 18남 4녀였다.
https://namu.wiki/w/%EC%84%B1%EC%A2%85(%EC%A1%B0%EC%84%A0)/%EC%83%9D%EC%95%A0
성종은 38세라는 이른 나이에 승하했는데, 그 나이에 28명이나 되는 자식을 얻었다는 건 시대적 상황을 감안한다 해도 이 분야의 권위자라 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 거느린 후궁의 숫자를 보면 성종은 12명, 태종은 12명, 세종은 6명, 중종은 10명이다. 성종 때는 일종의 교조주의(敎條主義)가 팽배해, 서예(書), 활쏘기(射) 같은 육예(六藝)[64]도 나라를 올바로 다스리는 데에 방해된다며 대간들이 상소를 올렸을 정도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48P99pq2zzI
https://www.youtube.com/watch?v=o3yLNXAVI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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