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kydong77.tistory.com/19751
自寫眞贊[자화상 찬]
俯視李賀
(부시이하) 이하(李賀)*도 내려다 볼 만큼
優於海東
(우어해동) 조선에서 최고라고들 했지.
騰名謾譽
(등명만예) 높은 명성과 헛된 칭찬
於爾孰逢
(어이숙봉) 네게 어찌 걸맞겠는가.
爾形至眇
(이형지묘) 네 형체는 지극히 작고
爾言大閒
(이언대동) 네 언사는 너무도 오활하네.
宜爾置之
(의이치지) 네 몸을 두어야 할 곳은
丘壑之中
(구학지중) 금오산 산골짝이 마땅하도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9751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茸長寺有懷(용장사 유회)
ㅡ 김시습
茸長山洞幽
용장산동유, 용장산 골짜기 깊고 깊어서
不見有人來
부견유인래, 사람이 오는 것이 보이지 않네.
細雨移溪竹
세우이계죽, 가랑비는 시냇가 대나무를 찾아가고
斜風護野梅
사풍호야매, 스쳐가는 바람은 들의 매화를 감싸주네.
小窓眠共鹿
소창면공록, 작은 창에서 잠드니 꿈은 사슴을 따라 나서고
枋椅坐同灰
방의좌동회, 낡은 의자에 앉으니 몸과 마음 식은 재로다
不覺茅簷畔
부각모첨반, 초가집에 딸린 밭두둑이 알지 못하는 사이
庭花落又開
정화낙우개, 뜨락의 꽃밭에는 꽃이 지고 또 피누나.
https://kydong77.tistory.com/19751
https://kydong77.tistory.com/19660
<금오신화>의 '금오'는 경주 남산의 주봉을 지칭하고, 신화란 새로운 이야기의 뜻인데, 소설은 기본적으로 소재든 주제든 문체든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굳이 금오를 덧붙인 것은 작품을 창작한 장소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21세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과거시험 준비중 세조의 왕위찬탈 소식에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20대엔 방랑생활의 연속이었고, 31세때 7년간 정착한 곳이 위의 거대한 마애불이 있는 경주 남산에 위치한 용장사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은 용장사 거처에서 집필되었다.
그가 선택한 新話는 명나라 구우의 <剪燈新話>에서 시도했던 人鬼交歡說話였다. 인귀교환이란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영혼인 귀신이 만나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다.
<전등신화>의 '전등'이란 등불 심지에서 그을음이 나서 심지를 자른다는 의미다. 다시말하면 밤이 깊도록 잠도 안 자고 읽는 재미난 이야기를 기술한 소설이란 의미다.
<금오신화>의 경우엔 귀신과 시를 수작하는 장면이 잦은 걸로 보면, 그와 시를 수작할 만한 사람이 현실에 없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라고 운영자는 추정한다.
https://kydong77.tistory.com/19751
1449년(세종 31년)
1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외가에서 양육을 받았다.
1454년(단종 2년) 20세 때,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1455년(세조 1년) 21세에,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글을 읽다가 단종(端宗)이 왕위를 빼앗겼다는 변보를 듣고
문을 닫고 3일 동안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읽던 서적을 다 불에 태우고 거짓 미친 채 변소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1458년(세조 4년) 24세 때,
관서지방을 여행하였다.
가을에 <탕유관서록후지>를 저술하였다 .
1463년(세조 9년) 28세 때
방랑 여행으로 호남지방을 여행하였고 그해 가을에 <탕유호남록후지(宕遊湖南錄後志)>를
저술하였다. 가을에 서적 구입차 서울에 올라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고를 받아 열흘 동안 법화경(法華經)을 교정하였다.
1465년(세조 11년) 31세 때,
경주(慶州)에 정착하였고, 봄에 남산의 주봉인 금오산 용장사 아래 계곡에 금오산실을 지어 살았다.
용장사 서실에서 7년간 ‘금오신화’ 5편 창작함.
3월말에 효령대군의 초청을 받아 서울로 나와 원각사(圓覺寺)의 낙성식에 참석하였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316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9660
자세한 년보는 아래 글 참조.
https://kydong77.tistory.com/8088
김시습 년보
매월당 김시습기념관>학습마당>매월당
1435년(세종 17년)
시울 반중 북쪽에 있는 충순위(忠純衛) 일성(日省)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 (江陵)이요, 자는 열경(悅卿), 휘는 시습(時習), 호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청한자(淸寒子), 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법호는 설잠(雪岑)이다. 대대 무인의 집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문장이 뛰어나 귀여움을 받았다.
고려조 (高麗朝) 시중 김태현(金太鉉)의 십삼세 손이다. 그이 외조가 맡아서 글을 가르쳤는데 말은 가르치지 않고 천자만 가르치어 어려서부터 말로 하는 것보다 글로 표현하는 것이 더 빨랐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논어(論語)에 [자왈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子曰 學而時習之 不亦悅(設)乎)]에서 시습(時習)을 따서 휘(이름)로 하고 경(卿)자를 넣어서 열경(悅卿)이라고 자를 지었다고 한다. 세살 때 한시를 능히 지었다.
유모가 맷돌에 보리 가는 것을 보고 ,
[비도 없이 천둥소리 어디서 나나,
누런 구름 조각이 각 사방에 흩어지네]
하고 소리 높이 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신기하게 여겼다. [無 雨 黃 雲]
1439년(세종 21년)
5세 때에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서 중용과 대학을 배워 능통하였다.
정승 허 조 (許稠)가 그를 찾아가서 불러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늙을 로(老)자로 운을 달아 지어라]라고 하니 곧 [늙은 나무가 꽃 피는 것은 마음이 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니 허 조는 문득 무릎을 치면서 [정말 신동이구나!]하고 탄복하였다 한다.
세종께서 이 소문을 듣고 시습을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그의 재주를 시험하게 하여 [동자의 학문하는 태도가 흰 학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 것 같구나( 子之學 白鶴 靑空之末)]
란 싯귀를 주어 댓귀를 지으라 하니
[성스러운 임금님의 덕은
누런 용이 푸른 바다속에 꿈틀거리는 것 같습니다.(聖主之德 黃龍 海之中)]
고 답하여, 세종께서는 크게 칭찬하시고 비단 50필을 상으로 내렸다. 이로부터 이름은 온 나라에 떨쳐 사람들에게서 5세 신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5세부터 13세까지
이웃에 사는 대사성(大司成) 김 반(金泮)의 문하에서 논어(論語).맹자(孟子).시경(時經).춘추(春秋)를 배웠으며, 이웃에 사는 사성(司成) 윤상(尹祥)에게 나아가 역경(易經).예기(禮記)와 여러 사서(史書)에서 제자백가(諸自百家)에 이르기까지 배웠다.
1449년(세종 31년)
1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외가에서 양육을 받았다.
1454년(단종 2년) 20세 때,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1455년(세조 1년) 21세에,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글을 읽다가 단종(端宗)이 왕위를 빼앗겼다는 변보를 듣고 문을 닫고 3일 동안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읽던 서적을 다 불에 태우고 거짓 미친 채 변소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1458년(세조 4년) 24세 때,
관서지방을 여행하였다.
가을에 <탕유관서록후지>를 저술하였다 .
1463년(세조 9년) 28세 때
방랑 여행으로 호남지방을 여행하였고 그해 가을에 <탕유호남록후지(宕遊湖南錄後志)>를 저술하였다. 가을에 서적 구입차 서울에 올라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고를 받아 열흘 동안 법화경(法華經)을 교정하였다.
1465년(세조 11년) 31세 때,
경주(慶州)에 정착하였고, 봄에 남산의 주봉인 금오산 용장사 아래 계곡에 금오산실을 지어 살았다. 3월말에 효령대군의 초청을 받아 서울로 나와 원각사(圓覺寺)의 낙성식에 참석하였다.
1468년(세조 14년) 34세 때,
겨울에 금오산에 거처하고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저술하였다.
이즈음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저술하다. 경주 남산의 주봉이 금오산이다. 명나라 구우의 『전등신화』를 모방하여 인귀교환설화를 수용하여 ‘신화’라 붙이다.
1471년(성종 2년) 37세 되던 해
봄에 금오산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와 도성 동쪽 수락산 기슭에 폭천정사를 짓고 은거하였다.
1476년(성종 7년) 42세 때,
<산거백영후지(山居百詠後志)>를 저술하다.
1481년(성종 12년) 47세 때,
다시 속인이 되었다. 고기를 먹고 머리를 기르며 안씨(安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다.
1482년(성종 13년) 48세 때,
이 해 이후부터 세상이 쇠진해짐을 보고는 세상일에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1483년(성종 14년) 49세 때,
육경(六經).자사 등의 많은 서적을 싣고 관동유람의 길을 떠났다.
1485년(성종 16년) 51세 때,
봄에 <독산원기(禿山院記)>를 지었다.
1493년(성종 24년) 59세 때,
3월에 충청도 홍산현(鴻山縣, 현재는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無量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후>
1511년 (중종 6년)
세상을 떠난지 18년만에 왕명으로 유집(遺集)을 찾아 모아서 간행케 하였다.
1582년 (선조 15년)
세상을 떠난 지 89년만에 선조께서 이 이(李珥)에게 영을 내리어 김시습전(金時習傳)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1703년 (숙종 29년)
세상을 떠난지 210년만에 유생 곽억령 등이 김시습 등 6인의 절의를 추모하여 사우를 세울 것을 상소하여 대왕께서 윤허하였다.
1782년 (정조 6년)
세상을 떠난 지 289년만에 이조판서(吏曺判書)에 추증하였다.
1784년 (정조 8년)
세상을 떠난 지 291년만에 청간(淸簡)이란 시호를 내렸다.
[참고]
무량사 영정
무량사 (無量寺)에 선생의 부도(浮屠)가 있고 또 영정이 있다.
경주시 기림사 일주문 안에도 사찰 경내에 경주 남산에서 옮겨온 사당이 중수되어 있다.
기림사 경내 입구의 매월당 영당, 경주에서 이전함.
이 영정은 선생이 자신의 초상을 자필로 그리셨다는 설이 전해 온다 .
선생은 유학과 불교에 능통한 저명한 학자이시다.
http://blog.naver.com/kwank99?Redirect=Log&logNo=30029487601
http://m.gjnews.com/view.php?idx=75073
5세 신동. 세종은 지신사를 통해 그의 재주를 칭찬했다.
童子之學 白鶴舞靑空之末
(동자지학 백학무청공지말) - 동자의 공부가 백학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 듯하도다.
성주지덕 번황룡번벽해지중
聖主之德 黃龍飜碧海之中
성주지덕 번황룡번벽해지중, 임금님의 덕은 황룡이 푸른 바다의 물을 뒤집는 것 같습니다.
https://m.cafe.daum.net/hanmunsalang/6axp/1236?listURI=%2Fhanmunsalang%2F6axp
*召致承政院(소치승정원)하사 試之曰(시지왈)
= 승정원에 불러와서, 시험해 보고자 말씀하시기를,
*童子之學(동자지학)은 白鶴(백학)이 舞靑松之末(무청송지말)이로다 하니
= "동자의 학문은 흰 학이 푸른 소나무 끝에서 춤추는 것과 같도다" 하시자
*時習(시습)이 對曰(대왈), 시습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聖主之德(성주지덕)은 黃龍(황룡)이 飜碧海之中(번벽해지중)이니이다 하다
= "임금님의 덕은 누런 용이 푸른 바다 가운데서 꿈틀거리는 것 같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五歲神童'
*卽賜帛五十匹(즉사백오십필)하여, 즉시 비단 오십 필을 하사하시며
*使自運去(사자운거)한대, 스스로 운반해 가도록 하니
時習(시습)이 遂結其端(수결기단)하여 引之而出(인지이출)하다.
=시습이 마침내 그 끝을 묶어 끌고 나갔다.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9510
용장사서 7년간 ‘금오신화’집필
문의 안과 밖이 따로 없는 선(禪)의 이치를 아는 매월당은 초현실을 통해 현실을 비판하고자 했을 것이다. 명나라 ‘전등신화’의 모방작이라고 했던 금오신화는 이제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전기소설을 이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인물이나 배경 설정에 작자의 독창성이 두드러지고 무대가 우리 국토라는 점에서도 ‘금오신화’의 의의는 더욱 분명해진다.
‘내가 보현사에 오고서부터
마음 한가하고 형평도 편안해
돌솥에 새 차 끓이고
쇠향로에 푸른 연기 피어오르네
나 같은 국외인으로서
속세 떠난 선사 따라 놀면서…’ (보현사 중)
잡다한 세속의 번뇌를 씻어낸 그는 50대에 접어들자, 자연에 의탁하여 유유히 자적한 방랑인으로 충남 부여 무량사에 머문다. 이곳에서 친구와 시화답을 하고 후학을 지도하다 5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다.
‘싯귀는 매양 한가로움 속에서 얻고
선심은 모두 고요함 가운데 끌리네’
라며 시선일여(詩禪一如)의 경지를 보였던 그는 세인의 평가야 어떻든 자성을 깨친 선승의 반열에 둘 수있을 것이다.
부여 무량사에서 입적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https://kydong77.tistory.com/21259
[주]금오신화 5편중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은 인귀교환설화를 소재로 하였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영혼과 생시처럼 육체적 관계를 나누는 것을 인귀교환설화라 한다. 얼마나 지독한 사랑이기에 그런 판타지를 만들어 낸 걸까?
우리나라 최초의 것은 <최치원 설화[or쌍녀분설화]>이고, 명나라 구우의 <전등신화>에도 상당수 작품이 이 설화를 사용하였다. 금오신화 중 두 작품을 읽어본다. 분량이 길어 2회로 나누어 수록한다.
만복사저포기 萬福寺摴蒲記 上
-만복사에서 저포놀이하다
1]양생, 만복사에서 처자 환신(幻身)을 만나다
1)양생, 조실부모하고 혼자 만복사 동쪽 방에서 살다
南原有梁生者, 早喪父母, 未有妻室, 獨居萬福寺之東.
남원유량생자, 조상부모, 미유처실, 독거만복사지동.
전라도 남원에 양생이 살고 있었는데, 일찍이 어버이를 잃은 데다 아직 장가도 들지 못했으므로 만복사(萬福寺)의 동쪽에서 혼자 살았다.
房外有梨花一株, 方春盛開, 如瓊樹銀堆,
방외유리화일주, 방춘성개, 여경수은퇴,
방 밖에는 배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마치 봄이 되어 꽃이 활짝 피었다. 마치 옥으로 만든 나무에 은 조각이 쌓여 있는 것 같았다.
生每月夜, 逡巡朗吟其下. 詩曰:
생매월야, 준순랑음기하. 시왈:
양생은 달이 뜬 밤마다 나무 아래를 거닐며 낭랑하게 시를 읊었다.
一樹梨花伴寂廖,
일수리화반적료, 한 그루 배꽃이 외로움을 달래 주지만
可憐辜負月明宵.
가련고부월명소. 휘영청 달 밝은 밤은 홀로 보내기 괴로워라.
靑年獨臥孤窓畔,
청년독와고창반, 젊은 이 몸 홀로 누운 호젓한 창가로
何處玉人吹鳳簫.
하처옥인취봉소. 어느 집 고운 님이 퉁소를 불어 주네.
翡翠孤飛不作雙,
비취고비불작쌍, 외로운 저 물총새는 제 홀로 날아가고
鴛鴦失侶浴晴江.
원앙실려욕청강. 짝 잃은 원앙새는 맑은 물에 노니는데,
誰家有約敲碁子,
수가유약고기자, 바둑알 두드리며 인연을 그리다가
夜卜燈花愁倚窓.
야복등화수의창. 등불로 점치고는 창가에서 시름하네.
吟罷, 忽空中有聲曰:
음파, 홀공중유성왈:
시를 다 읊고 나자 갑자기 공중에서 말소리가 들려 왔다.
“君欲得好逑, 何憂不遂.”
“군욕득호구, 하우불수.”
"그대가 참으로 아름다운 짝을 얻고 싶다면 어찌 이뤄지지 않으리라고 걱정하느냐?"
生心憙之,
생심희지,
양생은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2)부처님과 저포놀이하여 이기다
明日卽三月二十四日也.
명일즉삼월이십사일야.
그 이튿날은 마침 삼월 이십 사일이었다.
州俗燃燈於萬福寺祈福, 士女騈集, 各呈其志.
주속연등어만복사기복, 사녀병집, 각정기지.
이 고을에서는 만복사에 등불을 밝히고 복을 비는 풍속이 있었는데, 남녀들이 모여들어 저마다 소원을 빌었다.
日晩梵罷人稀,
일만범파인희,
날이 저물고 법회도 끝나자 사람들이 드물어졌다.
生袖摴蒲, 擲於佛前曰:
생수저포, 척어불전왈:
양생이 소매 속에서 저포를 꺼내어 부처님 앞에다 던졌다. (소원을 빌었다.)
“吾今日, 與佛欲鬪蒲戱,
“오금일, 여불욕투포희,
"제가 오늘 부처님을 모시고 저포놀이를 하여 볼까 합니다.
若我負, 則設法筵以賽,
약아부, 칙설법연이새,
만약 제가 지면 법연(法筵)을 차려서 부처님께 갚아 드리겠습니다.
若不負, 則得美女, 以遂我願耳.”
약불부, 칙득미녀, 이수아원이.”
만약 부처님이 지시면 아름다운 여인을 얻어서 제 소원을 이루게 하여 주십시오."
祝訖, 遂擲之, 生果勝,
축흘, 수척지, 생과승,
빌기를 마치고 곧 저포를 던지자, 양생이 과연 이겼다.
卽跪於佛前曰:
즉궤어불전왈:
그래서 부처 앞에 무릎은 꿇고 앉아서 말하였다.
“業已定矣, 不可誑矣.”
“업이정의, 불가광의.”
"인연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속이시면 안 됩니다."
遂隱於几下, 以候其約.
수은어궤하, 이후기약.
그는 불좌(佛座) 뒤에 숨어서 그 약속에 이루어지기를 기다렸다.
3)불전에서 배필을 구하는 처자 환신(幻身)을 만나다
俄而有一美姬, 年可十五六,
아이유일미희, 년가십오륙,
얼마 뒤에 한 아름다운 아가씨가 들어오는데, 나이는 열대 여섯쯤 되어 보였다.
丫鬟淡飾, 儀容婥妁,
아환담식, 의용작작,
머리를 두 갈래로 땋고 깨끗하게 차려 입었는데,
如仙姝天妃, 望之儼然,
여선주천비, 망지엄연,
아름다운 얼굴과 고운 몸가짐이 마치 하늘의 선녀 같았다. 바라볼수록 얌전하였다.
手携油甁, 添燈揷香,
수휴유병, 첨등삽향,
그 여인은 기름병을 가지고 와서 등잔에 기름을 따라 넣은 다음 향을 꽂았다.
三拜而跪, 噫而歎曰:
삼배이궤, 희이탄왈:
세 번 절하고 꿇어앉아 슬피 탄식하였다.
“人生薄命, 乃如此邪?”
“인생박명, 내여차사?”
"인생이 박명하다지만, 어찌 이럴 수가 있으랴?"
遂出懷中狀詞, 獻於卓前. 其詞曰:
수출회중상사, 헌어탁전. 기사왈:
그리고는 품속에서 축원문을 꺼내어 불탁 위에 바쳤다.
“某州某地居住, 何氏某,
“모주모지거주, 하씨모,
아무 고을 아무 동네에 사는 소녀 아무개가 (외람 됨을 무릅쓰고 부처님께 아룁니다.)
竊以曩者, 邊方失禦倭寇來侵,
절이낭자, 변방실어왜구래침,
지난번에 변방의 방어가 무너져 왜구가 쳐들어오자,
干戈滿目, 烽燧連年,
간과만목, 봉수련년,
싸움이 눈앞에 가득 벌어지고 봉화가 여러 해나 계속되었습니다.
焚蕩室廬, 盧掠生民,
분탕실려, 로략생민,
왜놈들이 집을 불살라 없애고 생민들을 노략하였으므로,
東西奔竄, 左右逋逃,
동서분찬, 좌우포도,
사람들이 동서로 달아나고 좌우로 도망하였습니다.
親戚僮僕, 各相亂離,
친척동복, 각상란리,
우리 친척과 종들도 각기 서로 흩어졌었습니다.
妾以蒲柳弱質, 不能遠逝,
첩이포류약질, 불능원서,
저는 버들처럼 가냘픈 소녀의 몸이라 멀리 피난을 가지 못하고,
自入深閨, 終守幽貞,
자입심규, 종수유정,
깊숙한 규방에 들어 앉아 끝까지 정절을 지켰습니다.
不爲行露之沾, 以避橫逆之禍,
불위행로지첨, 이피횡역지화,
윤리에 벗어난 행실을 저지르지 않고서 난리의 화를 면하였습니다.
父母以女子守節不爽,
부모이녀자수절불상,
저의 어버이께서도 여자로서 정절을 지킨 것이 그르지 않았다고 하여,
避地僻處, 僑居草野, 已三年矣.
피지벽처, 교거초야, 이삼년의.
외진 곳으로 옮겨 초야에 붙여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런지가 벌써 삼 년이나 되었습니다.
然而秋月春花, 傷心虛度,
연이추월춘화, 상심허도,
가을 달밤과 꽃 피는 봄날을 아픈 마음으로 헛되이 보내고,
野雲流水, 無聊送日,
야운류수, 무료송일,
뜬구름 흐르는 물과 더불어 무료하게 나날을 보냈습니다.
幽居在空谷, 歎平生之薄命,
유거재공곡, 탄평생지박명,
쓸쓸한 골짜기에 외로이 머물면서 제 박명한 평생을 탄식하였고,
獨宿度良宵, 傷彩鸞之獨舞,
독숙도량소, 상채란지독무,
아름다운 밤을 혼자 지새우면서 (짝 잃은) 채란(彩鸞)의 외로운 춤을 슬퍼하였습니다.
日居月諸, 魂銷魄喪,
일거월제, 혼소백상,
그런데 날이 가고 달이 가니 이제는 혼백마저 사라지고 흩어졌습니다.
夏日冬宵, 膽裂腸摧,
하일동소, 담렬장최,
(기나긴) 여름날과 겨울밤에는 간담이 찢어지고 창자까지 찢어집니다.
惟願覺皇, 曲垂憐愍,
유원각황, 곡수련민,
오직 부처님께 비오니, 이 몸을 가엽게 여기시어 각별히 돌보아 주소서.
生涯前定, 業不可避,
생애전정, 업불가피,
인간의 생은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져 있으며 선악의 응보를 피할 수 없으니,
賦命有緣,
부명유연,
제가 타고난 운명에도 인연이 있을 것입니다.
早得歡娛, 無任懇禱之至.”
조득환오, 무임간도지지.”
빨리 배필을 얻게 해주시길 간절히 비옵니다.
女旣投狀, 嗚咽數聲.
녀기투상, 오열수성.
여인이 빌기를 마치고 나서 여러 번 흐느껴 울었다.
生於隙中, 見其姿容,
생어극중, 견기자용,
양생은 불좌 틈으로 여인의 얼굴을 보고
不能定情, 突出而言曰:
불능정정, 돌출이언왈: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으므로, 갑자기 뛰쳐나가 말하였다.
“向者投狀, 爲何事也?”
“향자투상, 위하사야?”
"조금 전에 글을 올린 것은 무슨 일 때문이신지요?"
見女狀辭, 喜溢於面, 謂女子曰:
견녀상사, 희일어면, 위녀자왈:
그는 여인이 부처님께 올린 글을 보고 얼굴에 기쁨이 흘러 넘치며 말하였다.
“子何如人也, 獨來于此?”
“자하여인야, 독래우차?”
"아가씨는 어떤 사람이기에 혼자서 여기까지 왔습니까?"
女曰: “妾亦人也, 夫何疑訝之有,
녀왈: “첩역인야, 부하의아지유,
여인이 대답하였다.
"저도 또한 사람입니다. 대체 무슨 의심이라도 나시는지요?
君但得佳匹, 不必問名姓, 若是其顚倒也.”
군단득가필, 불필문명성, 약시기전도야.”
당신께서는 다만 좋은 배필만 얻으면 되실 테니까, 반드시 이름을 묻거나 그렇게 당황하지 마십시오."
4)처자와 절안 판자방에서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나누다
時寺已頹落, 居僧住於一隅,
시사이퇴락, 거승주어일우,
이 때 만복사는 이미 퇴락하여 스님들은 한쪽 구석진 방에 머물고 있었다.
殿前只有廊廡, 蕭然獨存,
전전지유랑무, 소연독존,
법당 앞에는 행랑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고,
廊盡處, 有板房甚窄.
낭진처, 유판방심착.
행랑이 끝난 곳에 아주 좁은 판자방이 있었다.
生挑女而入, 女不之難,
생도녀이입, 녀불지난,
양생이 여인의 손을 잡고 판자방으로 들어가자, 여인도 어려워하지 않고 들어왔다.
相與講歡, 一如人間.
상여강환, 일여인간.
서로 즐거움을 나누었는데, 보통 사람과 한 가지였다.
將及夜半, 月上東山, 影入窓柯,
장급야반, 월상동산, 영입창가,
이윽고 밤이 깊어 달이 동산에 떠오르자 창살에 그림자가 비쳤다.
忽有跫音, 女曰:
홀유공음, 녀왈:
문득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여인이 물었다.
“誰耶? 將非侍兒來耶?”
“수야? 장비시아래야?”
"누구냐? 시녀가 찾아온 게 아니냐?"
兒曰: “唯. 向日娘子, 行不過中門, 履不容數步,
아왈: “유. 향일낭자, 행불과중문, 리불용수보,
시녀가 말하였다.
"예. 평소에는 아가씨가 문 밖에도 나가지 않으시고 서너 걸음도 걷지 않으셨는데,
昨暮偶然而出, 一何至於此極也?”
작모우연이출, 일하지어차극야?”
어제 저녁에는 우연히 나가셨다가 어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女曰: “今日之事, 蓋非偶然,
녀왈: “금일지사, 개비우연,
여인이 말하였다.
"오늘의 일은 우연이 아니다.
天之所助, 佛之所佑,
천지소조, 불지소우,
하느님이 도우시고 부처님이 돌보셔서,
逢一粲者, 以爲偕老也.
봉일찬자, 이위해로야.
고운 님을 맞이하여 백년해로를 하게 되었다.
不告而娶, 雖明敎之法典,
불고이취, 수명교지법전,
어버이께 여쭙지 못하고 시집가는 것은 비록 예법에 어그러졌지만,
式燕以遨, 亦平生之奇遇也.
식연이오, 역평생지기우야.
서로 즐거이 맞이하게 된 것은 또한 평생의 기이한 인연이다.
可於茅舍, 取裀席酒果來.”
가어모사, 취인석주과래.”
너는 집으로 가서 앉을 자리와 술안주를 가지고 오너라."
5)처자는 술자리를 마련하고 시를 수작하다
侍兒一如其命而往,
시아일여기명이왕,
시녀가 그 명령대로 가서
設筵於庭, 時將四更也.
설연어정, 시장사경야.
뜨락에 술자리를 베푸니, 시간은 벌써 사경(四更)이나 되었다.
鋪陳几案, 素淡無文,
포진궤안, 소담무문,
시녀가 차려 놓은 방석과 술상은 무늬가 없이 깨끗하였으며,
而醪醴馨香, 定非人間滋味.
이료례형향, 정비인간자미.
술에서 풍기는 향내도 정녕 인간 세상의 솜씨는 아니었다.
生雖疑怪, 談笑淸婉,
생수의괴, 담소청완,
양생은 비록 의심나고 괴이하였지만, 여인의 이야기와 웃음소리가 맑고 고우며
儀貌舒遲 意必貴家處子, 踰墻而出, 亦不之疑也.
의모서지 의필귀가처자, 유장이출, 역불지의야.
얼굴과 몸가짐이 얌전하여, '틀림없이 귀한 집 아가씨가 (한때의 마음을 잡지 못하여) 담을 넘어 나왔구나' 생각하고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觴進, 命侍兒, 歌以侑之,
상진, 명시아, 가이유지,
여인이 양생에게 술잔을 올리면서 시녀에게 명하여 '노래를 불러 흥을 도우라' 하고는,
謂生曰: “兒定仍舊曲,
위생왈: “아정잉구곡,
양생에게 말하였다.
"이 아이는 옛 곡조밖에 모릅니다.
請自 製一章以侑, 如何?”
청자 제일장이유, 여하?”
저를 위하여 새 노래를 하나 지어 흥을 도우면 어떻겠습니까?"
生欣然應之曰: “諾.”
생흔연응지왈: “락.”
양생이 흔연히 허락하고는
乃製滿江紅一闋, 命侍兒歌之曰:
내제만강홍일결, 명시아가지왈:
곧 「만강홍(滿江紅)」 가락으로 가사를 하나 지어 시녀에게 부르게 하였다.
惻惻春寒羅衫薄,
측측춘한라삼박, 쌀쌀한 봄추위에 명주 적삼은 아직도 얇아
幾回腸斷金鴨冷.
기회장단금압랭. 몇 차례나 애태웠던가, 향로불이 꺼졌는가 하고,
晩山凝黛,
만산응대, 날 저문 산은 눈썹처럼 엉기고
暮雲張繖.
모운장산. 저녁 구름은 일산처럼 퍼졌는데,
錦帳鴛衾無與伴,
금장원금무여반, 비단 장막 원앙 이불에 짝지을 이가 없어서
寶𨥁半倒吹龍管.
보⥁반도취룡관. 금비녀 반만 꽂은 채 퉁소를 불어 보네.
可惜許光陰易跳丸,
가석허광음이도환, 아쉬워라, 저 세월이 이다지도 빠르던가
中情懣.
중정만. 마음 속 깊은 시름이 답답하여라.
燈無焰銀屛短,
등무염은병단, 낮은 병풍 속에서 등불은 가물거리는데
徒收淚誰從款.
도수루수종관. 나 홀로 눈물진들 그 누가 돌아보랴.
喜今宵,
희금소, 기뻐라, 오늘밤에는
鄒律一吹回暖.
추률일취회난. 피리를 불어 봄이 왔으니,
破我佳城千古恨,
파아가성천고한, 겹겹이 쌓인 천고의 한이 스러지네
細歌金縷傾銀椀.
세가금루경은완. 「금루곡」 가락에 술잔을 기울이세.
悔昔時抱恨,
회석시포한, 한스런 옛시절을 이제 와 슬퍼하니
蹙眉兒眠孤館.
축미아면고관. 외로운 방에서 찌푸리며 잠들었었지.
歌竟, 女愀然曰:
가경, 녀초연왈:
노래가 끝나자 여인이 서글프게 말하였다.
“曩者蓬島, 失當時之約,
“낭자봉도, 실당시지약,
"지난번에 봉도(蓬島)에서 만나기로 했던 약속은 어겼지만,
今日瀟湘, 有故人之逢,
금일소상, 유고인지봉,
오늘 소상강(瀟湘江)에서 옛 낭군을 만나게 되었으니
得非天幸耶.
득비천행야.
어찌 천행이 아니겠습니까?
郞若不我遐棄, 終奉巾櫛,
랑약불아하기, 종봉건즐,
낭군께서 저를 멀리 버리지 않으신다면 끝까지 시중을 들겠습니다.
如失我願, 永隔雲泥.”
여실아원, 영격운니.”
그렇지만 만약 제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영원히 자취를 감추겠습니다."
生聞此言, 一感一驚曰:
생문차언, 일감일경왈:
양생이 이 말을 듣고 한편 놀라며 한편 고맙게 생각하여 대답하였다.
“敢不從命?”
“감불종명?”
"어찌 당신의 말에 따르지 않겠소?"
然其態度不凡, 生熟視所爲,
연기태도불범, 생숙시소위,
그러면서도 여인의 태도가 범상치 않았으므로, 양생은 유심히 행동을 살펴보았다.
時月掛西峯, 鷄鳴荒村, 寺鐘初擊,
시월괘서봉, 계명황촌, 사종초격,
이때 달이 서산에 걸리자 먼 마을에서는 닭이 울고 절의 종소리가 들려 왔다.
曙色將暝. 女曰
서색장명. 녀왈
먼동이 트려 하자 여인이 말하였다.
“兒可撤席而歸” ,
“아가철석이귀” ,
"얘야. 술자리를 거두어 집으로 돌아가거라."
隨應隨滅 不知所之.
수응수멸 불지소지.
시녀는 대답하자마자 없어졌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女曰: “因緣已定, 可同携手.”
녀왈: “인연이정, 가동휴수.”
여인이 말하였다.
"인연이 이미 정해졌으니 낭군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https://kydong77.tistory.com/18316
https://kydong77.tistory.com/21173
[참고]
28세의 해가 저물어가던 무렵 그는 경주로 발걸음을 옮겨 정착할 곳을 찾기로 했던 것이다. 경주 남산인 금오산 중턱에 있는 용장사에서 경실(經室) 하나를 얻어 머물렀다. 그는 용장사 경실에 머물던 1463년, 29세 가을에 호남 지방을 유람하면서 지은 시들을 정리하여 유호남록을 엮었던 것이다.
경주에 정착한 김시습은 경주의 여러 유적을 둘러보며 인간의 역사와 삶의 문제에 대해 사색하였다. 용장사에 거처하면서 차나무를 심는 등 마음의 평정을 찾아나갔다. <유호남록>을 엮은 이후 서울로 가 효령대군을 만나 그의 추천으로 간경도감의 『묘법연화경』 언해 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그 일을 마친 후 용장사로 돌아와 생활하다가, 1465년 봄에 금오산실을 지어 생활하였다. 그러다 1465년 4월에 지금의 서울 탑골공원에 원각사가 낙성되어 김시습이 참석하였다. 이 무렵 세조로부터 도첩을 받아 정식 승려로서 신분을 보장받았다.
낙성식 이후 서울에 머물면서 서거정을 찾아가기도 하고 여러 사대부들의 연석에 참여하여 그들의 생활과 예술세계를 접하면서 만족하기도 했지만, 서울 근교에 안주하지 못하고 가을에 경주 남산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후 37세인 1471년에 변신, 출세(?)를 결심하여 서울로 향하기까지 그는 용장사 부근의 금오산실에서 주로 생활하였다. 그는 경주에서 햇수로 10년을 살았다.
김시습은 금오산실에서 생활하는 동안 단편소설집인 『금오신화』를 엮었다. 이 책에는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의 다섯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금오신화에는 김시습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겨 있다도 하며, 책 속의 고독한 인물들은 자신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평을 받는다.
그는 39세인 1473년 봄에 금오산에 은거하면서 서울을 오가거나 경상도와 관동 남부를 오가면서 지은 시들로 서울 수락산 폭천정사에 있으면서 『유금오록』으로 묶었다. 그래서 유관서록, 유관동록, 유호남록, 유금오록을 ‘사유록’(四遊錄)이라고 한다. 이 네 권의 시집에는 그의 전체 시 가운데 1/4 분량에 해당하는 450여 수의 작품이 들어있다.
출처 : 인저리타임(http://www.injurytime.kr)
[참고]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0579
[고려 때부터 흥복사(興福寺)라는 이름으로 전승되어 왔던 사찰로, 세종이 불교 종파를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한 뒤 기존 흥복사 영역이 점차 조선왕조 각 아문에 분할 귀속되었다. 1457년(세조 3)에 흥복사를 폐하고 악학도감(樂學都監)을 두었다. 1467년 사월초파일에 10층석탑이 완공되자 연등회(燃燈會)를 베풀고 낙성하였다. 이때 이 절은 법당인 대광명전(大光明殿)을 중심으로 하여 왼쪽에는 선당(禪堂), 오른쪽에는 운집당(雲集堂)을, 뒤쪽에는 해장전(海藏殿)을 지었다. 입구로부터 차례로 해탈문(解脫門) · 반야문(般若門) · 적광문(寂光門) 등 3문을 세웠고 종각(鐘閣)과 법뢰각(法雷閣), 음식을 장만하는 향적료(香寂寮), 10층석탑 등이 있었다. 이 중 10층석탑에는 분신사리와 언해본 『원각경』을 봉안하였고, 해장전에는 대장경을 두었으며, 법당은 청기와와 금칠로 꾸몄다고 한다. 또, 법당 동쪽에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서쪽에는 동산을 만들어서 화초를 심었다. 그 뒤에도 이 절의 사리가 서기를 나타내거나 분신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으며, 이때마다 신하들은 왕에게 하례를 올렸다.]
*운영자 註. 세조는 왕위 찬탈시 희생된 영령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재건한 절로 현재 삼일공원[탑골공원]으로 10층 석탑과 비각을 갖춘 거대한 원각사비석이 보존되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kPzNkvkGv4
https://blog.daum.net/leejh1938/17503446
'한문학 > 금오신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시습,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0) | 2008.08.06 |
---|---|
김시습, 이생규장전 下 (0) | 2008.08.05 |
김시습, 이생규장전 上 (0) | 2008.08.05 |
김시습, 만복사저포기 下 (1) | 2008.08.05 |
율곡 이이(李珥), 김시습전/ 김시습, 自寫眞贊 & 附.김시습 년보/ 금오신화 5편 한문 & 국역 총정리 (0) | 2008.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