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찬(自寫眞贊)
*이땅에서 자화상을 그리는 것도 드문 일이거니와 스스로 '贊'을 붙여 자신을 예찬한다는 건 자신이 당당하게 살아온 길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自讚'에서 겸양의 미덕도 보였지만 최치원 이후 자신의 천재성과 독창성, 그리고 정의로운 삶의 드러난 궤적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고 감히 단언한다. 물론 만해 한룡운 선생께서 佛心에 기초한 시적 천재성과 정의로운 삶의 바톤을 이어 받으셨지만.
俯視李賀
(부시이하) 이하(李賀)*도 내려다 볼 만큼
優於海東
(우어해동) 조선에서 최고라고들 했지.
騰名謾譽
(등명만예) 높은 명성과 헛된 칭찬
於爾孰逢
(어이숙봉) 네게 어찌 걸맞겠는가.
爾形至眇
(이형지묘) 네 형체는 지극히 작고
爾言大閒
(이언대동) 네 언사는 너무도 오활하네.
宜爾置之
(의이치지) 네 몸을 두어야 할 곳은
丘壑之中
(구학지중) 금오산 산골짝이 마땅하도다.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 이하 李賀, Li He (791-817)
26세에 요절한 唐代 천재시인.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008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573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금오신화 5편 한문 5편 vs 국역 목록/ 구우(瞿佑), 전등신화(剪燈新話) 2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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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茸長寺經室有懷
(용장사 경실에서의 감회)
ㅡ 김시습
茸長山洞窈
용장산동요, 용장산 골짜기가 아주 고요해서
不見有人來
불견유인래, 사람의 왕래를 볼 수 없구나.
細雨移溪竹
세우이계죽, 가랑비가 시냇가 대나무를 일깨우고
斜風護野梅
사풍호야매, 저녁바람이 들판의 매화를 감싸는구나.
小窓眠共鹿
소창면공록, 집안의 작은 창도 잠에 빠져 있고
枯椅坐同灰
고의좌동회, 마른 가래나무도 여전히 회색을 띠고 있네.
不覺茅簷畔
불각모첨반, 초가 처마 쪽 밭두둑이 알지 못하는 사이
庭花落又開
정화락우개, 마당 꽃밭에 꽃이 지고 또 피는구나.
<금오신화>의 금오는 경주 남산의 주봉을 지칭하고, 신화란 새로운 이야기의 뜻인데, 소설은 기본적으로 소재든 주제든 문체든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굳이 금오를 덧붙인 것은 작품을 창작한 장소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21세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과거시험 준비중 세조의 왕위찬탈 소식에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20대엔 방랑생활의 연속이었고, 31세때 정착한 곳이 위의 거대한 마애불이 있는 경주 남산에 위치한 용장사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은 용장사 거처에서 집필되었다.
그가 선택한 新話는 명나라 구우의 <剪燈新話>에서 시도했던 人鬼交歡說話였다. 인귀교환이란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영혼인 귀신이 만나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다.
<전등신화>의 '전등'이란 등불 심지에서 그을음이 나서 심지를 자른다는 의미다. 다시말하면 밤이 깊도록 잠도 안 자고 읽는 재미난 이야기를 기술한 소설이란 의미다.
<금오신화>의 경우엔 귀신과 시를 수작하는 장면이 잦은 걸로 보면, 그와 시를 수작할 만한 사람이 현실에 없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라고 운영자는 추정한다.
참고로 한국 인귀교환설화의 효시는 신라인으로 중국에서 관직까지 한 최치원의 <최치원설화> [or 쌍녀분설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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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년보
1435년(세종 17년)
시울 반중 북쪽에 있는 충순위(忠純衛) 일성(日省)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 (江陵)이요, 자는 열경(悅卿), 휘는 시습(時習), 호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청한자(淸寒子), 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법호는 설잠(雪岑)이다.
대대 무인의 집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문장이 뛰어나 귀여움을 받았다.
고려조 (高麗朝) 시중 김태현(金太鉉)의 십삼세 손이다.
그이 외조가 맡아서 글을 가르쳤는데 말은 가르치지 않고 천자만 가르치어
어려서부터 말로 하는 것보다 글로 표현하는 것이 더 빨랐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논어(論語)에 [자왈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子曰 學而時習之 不亦悅(設)乎)]에서 시습(時習)을 따서 휘(이름)로 하고 경(卿)자를 넣어서 열경(悅卿)이라고 자를 지었다고 한다.
세살 때 한시를 능히 지었다.
유모가 맷돌에 보리 가는 것을 보고 ,
[無 雨 黃 雲]
[비도 없이 천둥소리 어디서 나나,
누런 구름 조각이 각 사방에 흩어지네]
하고 소리 높이 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신기하게 여겼다.
1439년(세종 21년)
5세 때에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서 중용과 대학을 배워 능통하였다.
정승 허 조 (許稠)가 그를 찾아가서 불러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늙을 로(老)자로 운을 달아 지어라]라고 하니 곧
[늙은 나무가 꽃 피는 것은 마음이 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니
허 조는 문득 무릎을 치면서, [정말 신동이구나!]하고 탄복하였다 한다.
세종께서 이 소문을 듣고 시습을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그의 재주를 시험하게 하여
[동자의 학문하는 태도가 흰 학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 것 같구나( 子之學 白鶴 靑空之末)]란 싯귀를 주어 댓귀를 지으라 하니
聖主之德 黃龍 海之中
[성스러운 임금님의 덕은 누런 용이 푸른 바다속에 꿈틀거리는 것 같습니다.]라고
답하여, 세종께서는 크게 칭찬하시고 비단 50필을 상으로 내렸다.
이로부터 이름은 온 나라에 떨쳐 사람들에게서 5세 신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5세부터 13세까지
이웃에 사는 대사성(大司成) 김 반(金泮)의 문하에서 논어(論語).맹자(孟子).시경(時經).춘추(春秋)를 배웠으며, 이웃에 사는 사성(司成) 윤상(尹祥)에게 나아가 역경(易經).예기(禮記)와 여러 사서(史書)에서 제자백가(諸自百家)에 이르기까지 배웠다.
1449년(세종 31년)
1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외가에서 양육을 받았다.
1454년(단종 2년) 20세 때,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1455년(세조 1년) 21세에,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글을 읽다가 단종(端宗)이 왕위를 빼앗겼다는 변보를 듣고
문을 닫고 3일 동안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읽던 서적을 다 불에 태우고 거짓 미친 채 변소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1458년(세조 4년) 24세 때,
관서지방을 여행하였다.
가을에 <탕유관서록후지>를 저술하였다 .
1463년(세조 9년) 28세 때
방랑 여행으로 호남지방을 여행하였고 그해 가을에 <탕유호남록후지(宕遊湖南錄後志)>를
저술하였다. 가을에 서적 구입차 서울에 올라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고를 받아 열흘 동안 법화경(法華經)을 교정하였다.
1465년(세조 11년) 31세 때,
경주(慶州)에 정착하였고, 봄에 남산의 주봉인 금오산 용장사 아래 계곡에 금오산실을 지어 살았다.
3월말에 효령대군의 초청을 받아 서울로 나와 원각사(圓覺寺)의 낙성식에 참석하였다.
1468년(세조 14년) 34세 때,
겨울에 금오산에 거처하고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저술하였다.
이즈음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저술하다. 경주 남산의 주봉이 금오산이다.
명나라 구우의 『전등신화』를 모방하여 인귀교환설화를 수용하여 ‘신화’라 붙이다.
1471년(성종 2년) 37세 되던 해
봄에 금오산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와 도성 동쪽 수락산 기슭에 폭천정사를 짓고 은거하였다.
1476년(성종 7년) 42세 때,
<산거백영후지(山居百詠後志)>를 저술하다.
1481년(성종 12년) 47세 때,
다시 속인이 되었다. 고기를 먹고 머리를 기르며 안씨(安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다.
1482년(성종 13년) 48세 때,
이 해 이후부터 세상이 쇠진해짐을 보고는 세상일에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1483년(성종 14년) 49세 때,
육경(六經).자사 등의 많은 서적을 싣고 관동유람의 길을 떠났다.
1485년(성종 16년) 51세 때,
봄에 <독산원기(禿山院記)>를 지었다.
1493년(성종 24년) 59세 때,
3월에 충청도 홍산현(鴻山縣, 현재는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無量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후>
1511년 (중종 6년)
세상을 떠난지 18년만에 왕명으로 유집(遺集)을 찾아 모아서 간행케 하였다.
1582년 (선조 15년)
세상을 떠난 지 89년만에 선조께서 이 이(李珥)에게 영을 내리어 김시습전(金時習傳)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1703년 (숙종 29년)
세상을 떠난지 210년만에 유생 곽억령 등이 김시습 등 6인의 절의를 추모하여 사우를 세울 것을 상소하여
대왕께서 윤허하였다.
1782년 (정조 6년)
세상을 떠난 지 289년만에 이조판서(吏曺判書)에 추증하였다.
1784년 (정조 8년)
세상을 떠난 지 291년만에 청간(淸簡)이란 시호를 내렸다.
[참고]
무량사 (無量寺)에 선생의 부도(浮屠)가 있고 또 영정이 있다.
경주시 기림사 일주문 안에도
사찰 경내에 경주 남산에서 옮겨온 사당이 중수되어 있다.
이 영정은 선생이 자신의 초상을 자필로 그리셨다는 설이 전해 온다 .
선생은 유학과 불교에 능통한 저명한 학자이시다.
http://blog.naver.com/kwank99?Redirect=Log&logNo=30029487601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582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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