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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담장은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경계다. 담장 안은 이생이 경험하지 못한 이상세계였다. 담장을 넘어 최랑과 시를 창수하니 신선세계에서 선녀를 만난 기분이었다. 어떻게 빠져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이생이 담장 안을 엿본 이야기
-김시습(金時習)
1]이생, 최랑집 담장 안에서 최랑을 만나다
1)이생, 담장 너머 최랑과 시를 수작하다
松都有李生者
(송도유이생자) : 송도에 이생이라는 자가 있는데
居駱駝橋之側
(거낙타교지측) : 낙타교 옆에 살고 있었다
年十八
(년십팔) : 나이는 열 여덟이었다.
風韻淸邁
(풍운청매) : 풍운이 맑고
天資英秀
(천자영수) : 재주가 뛰어나
常詣國學
(상예국학) : 일찍부터 국학(國學)에 다녔는데,
讀詩路傍
(독시로방) : 길가에서도 시를 읽었다.
善竹里'
(선죽리) : 선죽리
有巨室處崔氏
(유거실처최씨) : 귀족집에서는 최씨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年可十五六
(년가십오륙) : 나이는 열대 여섯쯤 되었다.
態度艶麗
(태도염려) : 태도가 아리땁고
工於刺繡
(공어자수) : 수도 잘 놓았으며,
而長於詩賦
(이장어시부) : 시와 문장도 잘 지었다.
世稱
(세칭) :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이렇게 칭찬하였다.
風流李氏子
(풍류이씨자) : 풍류로워라 이씨 집안 총각
窈窕崔家娘
(요조최가낭) : 아리따워라 최씨 집안 처녀여
才色若可餐
(재색약가찬) : 그 재주와 그 얼굴 [한 번 보면]
可以療飢腸
(가이료기장) : 주린 창자 채운 둣하지.
李生嘗挾冊詣學
(이생상협책예학) : 이생은 일찍부터 책을 옆에 끼고 학교에 다닐 때에
常過崔氏之家北牆外
(상과최씨지가북장외) : 언제나 최씨네 집 북쪽 담 밖으로 지나다녔다.
垂楊裊裊
(수양뇨뇨) : 간들거리는 수양버들
數十株環列
(수십주환열) : 수십 그루가 그 담을 둘러싸고 있었다.
李生憩於其下
(이생게어기하) : 이생이 그 나무 아래에서 쉬다가
一日窺牆內
(일일규장내) : 어느 날 담 안을 엿보았더니,
名花盛開
(명화성개) : 이름난 꽃들이 활짝 피고
蜂鳥爭喧
(봉조쟁훤) : 벌과 새들이 다투어 재잘거리고 있었다.
傍有小樓
(방유소루) : 그 곁에는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隱映於花叢之間
(은영어화총지간) : 꽃떨기 사이로 은은히 보였다.
株簾半掩
(주렴반엄) : 구슬발이 반쯤 가려 있고
羅幃低垂
(라위저수) : 비단 휘장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는데,
有一美人
(유일미인) : 한 아리따운 아가씨가
倦繡停針
(권수정침) : 수를 놓다가 지쳐 잠시 바늘을 멈추며
支頤而吟曰
(지이이음왈) : 턱을 괴고 시를 읊었다.
獨倚紗窓刺繡遲
(독의사창자수지) : 사창(紗窓)에 홀로 기대앉아 수놓기도 귀찮구나.
百花叢裏囀黃鸝
(백화총리전황리) : 온갖 꽃 떨기 속에 꾀꼬리 소리 다정도 해라.
無端暗結東風怨
(무단암결동풍원) : 부질없이 마음속으로 봄바람을 원망하며
不語停針有所思
(불어정침유소사) : 말없이 바늘 멈추고는 생각에 잠겼어라.
路上誰家白面郞
(로상수가백면랑) : 저 길 위의 저 총각은 어느 집 도련님일까.
靑衿大帶映垂楊
(청금대대영수양) : 푸른 옷깃 넓은 띠가 늘어진 버들 사이로 비쳐 오네.
何方可化堂中燕
(하방가화당중연) : 이 몸이 죽어 가서 대청 위의 제비 되면
低掠珠簾斜度墻
(저략주렴사도장) : 주렴 위를 가볍게 스쳐 담장 위를 날아 넘으리.
生聞之
(생문지) : 이생은 그 여인이 읊은 시를 듣고
不勝技癢
(불승기양) : 마음이 근질근질하여 참을 수가 없었다.
然其門戶高峻
(연기문호고준) : 그러나 그 집의 담이 높고도 가파르며
庭闈深邃
(정위심수) : 안채가 깊숙한 곳에 있었으므로,
但怏怏而去
(단앙앙이거) : 어쩔 수 없이 서운한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還時以白紙一幅
(환시이백지일폭) : 그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흰 종이 한 장에다
作詩三首
(작시삼수) : 시 세 수를 써서
繫瓦礫投之曰
(계와력투지왈) : 기와 쪽에 매달아 담 안으로 던져 넣었다.
巫山六六霧重回
(무산육육무중회) : 무산 열두 봉우리 첩첩이 쌓인 안개 굽어도는데
半露尖峰紫翠堆
(반로첨봉자취퇴) : 반쯤 드러난 뽀죽한 봉우리가 붉고도 푸르구나.
惱却襄王孤枕夢
(뇌각양왕고침몽) : 양왕의 외로운 꿈을 수고롭게 하지 마오.
肯爲雲雨下陽臺
(긍위운우하양대) : 구름 되고 비가 되어 양대에서 만나 보세.
相如欲挑卓文君
(상여욕도탁문군) :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되어 탁문군(卓文君)을 꾀어내려니
多少情懷已十分
(다소정회이십분) :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은 이미 다 이루어졌네.
紅粉墻頭桃李艶
(홍분장두도리염) : 붉은 담머리의 복사꽃과 오얏꽃은
隨風何處落繽紛
(수풍하처락빈분) : 바람에 날려서 어디로 떨어지나.
好因緣邪惡因緣
(호인연사악인연) : 좋은 인연되려는지 나쁜 인연 되려는지
空把愁腸日抵年
(공파수장일저년) : 부질없는 이 내 시름 하루가 일 년 같아라.
二十八字媒已就
(이십팔자매이취) : 스물 여덟 자로 황혼의 기약을 맺었으니
藍橋何日遇神仙
(남교하일우신선) : 남교에서 어느 날 신선을 만나려나.
崔氏
(최씨) : 최씨가
命侍婢香兒
(명시비향아) : 몸종 향아(香兒)를 시켜서
往取見之
(왕취견지) : 그 편지를 주워다 보니,
卽李生詩也
(즉이생시야) : 바로 이생이 지은 시였다.
披讀再三
(피독재삼) : 최랑이 그 시를 펼쳐서 두세 번 읽고는
心自喜之
(심자희지) : 마음속으로 혼자 기뻐하였다.
以片簡
(이편간) : 종이 쪽지에
又書八字
(우서팔자) : 여덟 자를 써서
投之曰
(투지왈) : 담 밖으로 던져 주었다.
將子無疑
(장자무의) : "그대여. 의심 마오.
昏以爲期
(혼이위기) : 황혼에 만나요."
2)이생 황혼에 최랑집 담장을 넘어 시를 창수하다
-신선세계에서 선녀를 만난 기분이었다
生如其言
(생여기언) : 이생이 그 말대로
乘昏而往
(승혼이왕) : 황혼이 되자 최랑의 집을 찾아갔다.
忽見桃花一枝
(홀견도화일지) : 갑자기 복사꽃 한 가지가
過墻而有搖裊之影
(과장이유요뇨지영) : 담 위로 넘어오면서 하늘거리는 그림자가 나타났다.
往視之則以鞦韆絨索
(왕시지칙이추천융삭) : 이생이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그네줄이
繫竹兜下垂(계죽두하수) : 대바구니를 매어서 아래로 늘어뜨려 놓았다.
生攀緣而踰
(생반연이유) : 이생을 그 줄을 잡고 담을 넘었다.
會月上東山
(회월상동산) : 마침 달이 동산에 떠오르고
花影在地(화영재지) : 꽃 그림자가 땅에 비껴
淸香可愛(청향가애) : 맑은 향내가 사랑스러웠다.
生意謂已入仙境
(생의위이입선경) : 이생은 자기가 신선 세계에 들어왔다고 생각하여
心雖竊喜
(심수절희) : 마음은 비록 기뻤지만,
而情密事秘
(이정밀사비) : 자기의 마음이나 지금 하려는 일이 비밀스러워서
毛髮盡竪
(모발진수) : 머리칼이 모두 곤두섰다.
回眄左右
(회면좌우) : 이생이 좌우를 둘러보았더니,
女已在花叢裏
(여이재화총리) : 최랑은 꽃떨기 속에서
與香兒(여향아) : 향아와 같이
折花相戴
(절화상대) : 꽃을 꺾어 머리에 꽂고는,
鋪罽僻地
(포계벽지) : 외진 곳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見生微笑
(견생미소) : 최랑이 이생을 보고 방긋 웃으면서
口占二句
(구점이구) : 시 두 구절을
先唱曰
(선창왈) : 먼저 읊었다.
桃李枝間花富貴
(도리지간화부귀) : 복사와 오얏 가지 사이로 꽃송이 탐스럽고
鴛鴦枕上月嬋娟
(원앙침상월선연) : 원앙새 베개 위엔 달빛도 고와라.
生續吟曰
(생속음왈) : 이생이 뒤를 이어 시를 읊었다.
他時漏洩春消息
(타시루설춘소식) : 다음날 어쩌다가 봄소식이 새나간다면
風雨無情亦可憐
(풍우무정역가련) : 비바람 무정하니 더욱 가련하리라.
女變色而言曰
(여변색이언왈) : 최랑이 얼굴빛이 변하면서 말하였다.
本欲與君
(본욕여군) : "저는 본디 당신과 함께
終奉箕帚
(종봉기추) : 부부가 되어 끝까지 남편으로 모시고
永結歡娛
(영결환오) : 영원히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어요.
郞何言之若是遽也
(랑하언지약시거야) : 그런데 당신은 어찌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妾雖女類
(첩수여류) : 저는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心意泰然
(심의태연) : 마음이 태연한데,
丈夫意氣
(장부의기) : 장부의 의기를 가지고도
肯作此語乎
(긍작차어호) :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他日閨中事洩
(타일규중사설) : 다음날 규중의 일이 누설되어
親庭譴責
(친정견책) : 친정에서 꾸지람을 듣게 되더라도,
妾以身當之
(첩이신당지) : 제가 혼자 책임을 지겠습니다."
香兒可於房中
(향아가어방중) : "향아야. 방 안에서
賫酒果以進
(재주과이진) : 술과 안주를 가져오너라."
兒如命而往
(아여명이왕) : 향아가 시키는 대로 가버리자,
四座寂寥
(사좌적요) : 사방이 고요하여
闃無人聲
(격무인성) :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生問曰
(생문왈) : 이생이 최랑에게 물었다.
此是何處
(차시하처) : "이곳은 어디입니까?"
女曰
(여왈) : 최랑이 말하였다.
此是北園中小樓下也
(차시북원중소루하야) : "이곳은 뒷동산에 있는 작은 누각 아래이지요.
父母以我一女
(부모이아일녀) : 저희 부모님께서는 제가 외동딸이기 때문에
情鍾甚篤
(정종심독) : 여간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別構此樓于芙蓉池畔
(별구차누우부용지반) : 그래서 연못가에다 이 누각을 따로 지어 주셨지요.
方春時
(방춘시) : 봄이 되어
名花盛開
(명화성개) : 이름난 꽃들이 활짝 피면
欲使從侍兒遨遊耳
(욕사종시아오유이) : 몸종 향아와 함께 즐겁게 놀라고 하신 거지요.
親闈之居
(친위지거) : 부모님이 계신 곳은
閨閤深邃
(규합심수) : 여기서 멀기 때문에
雖笑語啞咿
(수소어아이) : 아무리 웃으며 크게 이야기해도
亦不能卒爾相聞也
(역불능졸이상문야) : 쉽게 들리지는 않는답니다."
女酌綠蟻一巵
(여작녹의일치) : 최랑이 술 한 잔을 따라
口占古風一篇曰
(구점고풍일편왈) : 이생에게 권하면서 고풍(古風)으로 한 편을 읊었다.
曲欄下壓芙蓉池
(곡란하압부용지) : 부용못 푸른 물을 난간에서 굽어보다
池上花叢人共語
(지상화총인공어) : 꽃떨기 속에서 님들이 속삭이네.
香霧霏霏春融融
(향무비비춘융융) : 향그런 안개 깔린 속에 봄빛이 화창해서
製出新詞歌白紵
(제출신사가백저) : 새 가사를 지어내어「백저사(白紵詞)」를 부르는구나.
月轉花陰入氍毹
(월전화음입구유) : 꽃그늘에 달빛이 비껴 털방석에 스며들고
共挽長條落紅雨
(공만장조락홍우) : 긴 가지 함께 잡으니 붉은 꽃비가 떨어지네.
風攪淸香香襲衣
(풍교청향향습의) : 바람이 향내를 끌어와 옷 속에 스며들자
賈女初踏春陽舞
(고녀초답춘양무) : 첫봄을 맞은 아가씨가 햇살 속에 춤추네.
羅衫輕拂海棠枝
(나삼경불해당지) : 비단 적삼 가볍게 해당화를 스쳤다가
驚起花間宿鸚鵡
(경기화간숙앵무) : 꽃 사이에 졸고 있던 앵무새만 깨웠네.
生卽和之曰
(생즉화지왈) : 이생도 바로 시를 지어 화답하였다.
誤入桃源花爛熳
(오입도원화난만) : 도원에 잘못 들어와 복사꽃이 만발한데
多少情懷不能語
(다소정회불능어) : 많고 많은 이 내 정회(情懷)를 다 말할 수가 없네.
翠鬟雙綰金Ꟃ低
(취환쌍관금차저) : 구름같이 쪽찐 머리에 금비녀 낮게 꽂고
楚楚春衫裁綠紵
(초초춘삼재록저) : 산뜻한 봄 적삼을 모시 베로 지었구나.
東風初拆竝帶花
(동풍초탁병대화) : 나란히 달린 꽃가지를 봄바람에 꺾다니
莫使繁枝戰風雨
(막사번지전풍우) : 하많은 꽃가지에 비바람아 부지 마소.
飄飄仙袂影婆婆
(표표선몌영파파) : 선녀의 소맷자락 나부껴 그림자도 하늘거리고
叢桂陰中素娥舞
(총계음중소아무) : 계수나무 그늘 속에선 미녀가 춤을 춘다
勝事未了愁必隨
(승사미료수필수) : 좋은 일이 끝나지 않아도 시름이 따를 테니
莫製新詞敎鸚鵡
(막제신사교앵무) : 함부로 새 곡조 지어 앵무새에게 가르치지 마오
3)이생, 최랑의 누각 내실에 들어 마음껏 정을 나누다
-비경의 그림과 화제(畵題) 속에서 황홀경을 헤매다
吟罷
(음파) : 술자리가 끝나자
女謂生曰
(여위생왈) : 최랑이 이생에게 말하였다.
今日之事
(금일지사) : "오늘의 일은
必非小緣
(필비소연) : 반드시 작은 인연이 아니랍니다.
郞須尾我
(랑수미아) : 당신은 저를 따라오셔서
以遂情款(이수정관) : 정을 나누는 것이 좋겠어요."
言訖(언흘) : 말을 마치고
女從北窓入
(여종북창입) : 최랑이 북쪽 창문으로 들어가자
生隨之
(생수지) : 이생도 그 뒤를 따라갔다.
樓梯在房中
(루제재방중) : 누각에 달린 사다리가 있었는데,
綠梯而昇
(록제이승) :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더니
果其樓也
(과기루야) : 과연 그 다락이 나타났다.
文房几案
(문방궤안) : 문방구와 책상들이
極其濟楚
(극기제초) : 아주 말끔했으며,
一壁展煙江疊嶂圖
(일벽전연강첩장도) : 한쪽 벽에는「연강첩장도(烟江疊圖)」와
幽篁古木圖
(유황고목도) : 「유황고목도(幽篁古木圖)」가 걸려 있었는데,
皆名畵也
(개명화야) : 모두 이름난 그림이었다.
題詩其上
(제시기상) : 그 그림 위에는 시가 씌어 있었는데,
詩不知何人所作
(시부지하인소작) : 누가 지은 시인지는 알 수 없었다.
其一曰
(기일왈) : 첫째 그림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何人筆端有餘力
(하인필단유여력) : 어떤 사람의 붓끝에 힘이 넘쳐
寫此江心千疊山
(사차강심천첩산) : 이 강 속에다 겹겹이 쌓인 산을 그렸던가?
壯哉方壺三萬丈
(장재방호삼만장) : 웅장해라. 삼만 길의 저 방호산(方壺山)은
半出縹緲烟雲間
(반출표묘연운간) : 아득한 구름 사이로 반쯤만 드러났네.
遠勢微茫幾百里
(원세미망기백리) : 저 멀리 산세(山勢)는 몇백 리까지 뻗어 있는데
近見崒嵂靑螺鬟
(근견줄률청라환) : 푸른 소라처럼 쪽진 머리가 가까이 보이네.
滄波淼淼浮遠空
(창파묘묘부원공) : 끝없이 푸른 물결 공중에 닿았는데
日暮遙望愁鄕關
(일모요망수향관) : 저녁노을 바라보니 고향이 그리워라.
對此令人意蕭索
(대차령인의소삭) : 이 그림 구경하며 사람 마음이 쓸쓸해져
疑泛湘江風雨灣
(의범상강풍우만) : 소상강 비바람에 배 띄운 듯하여라.
其二曰
(기이왈) : 둘째 그림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幽篁蕭颯如有聲
(유황소삽여유성) : 쓸쓸한 대숲에선 가을 소리가 들리는 듯
古木偃蹇如有情
(고목언건여유정) : 비스듬히 누운 고목은 옛정을 품은 듯해라.
狂根盤屈惹苺苔
(광근반굴야매태) : 구부러진 늙은 뿌리엔 이끼가 가득 끼었고
老幹夭矯排風雷
(노간요교배풍뢰) : 굵고 곧은 가지는 바람과 천둥을 이겨 왔네.
胸中自有造化窟
(흉중자유조화굴) : 가슴속에 간직한 조화가 끝이 없으니
妙處豈與傍人說
(묘처기여방인설) : 미묘한 이 경지를 누구에게 말할 텐가.
韋偃與可已爲鬼
(위언여가이위귀) : 위언(韋偃)과 여가(輿可)도 이미 귀신이 되었으니
漏洩天機知有幾
(루설천기지유기) : 천기를 누설할 자가 그 몇이나 되려나.
晴窓嗒然淡相對
(청창탑연담상대) : 갠 창가 그윽한 곳에서 말없이 바라보니
愛看幻墨神三昧
(애간환묵신삼매) : 삼매경에 든 필법이 못내 사랑스러워라.
一壁貼四時景
(일벽첩사시경) : 한쪽 벽에는 사철의 경치를 읊은 시를
各四首
(각사수) : 각각 네 수씩 붙였는데,
亦不知爲何人所作
(역부지위하인소작) : 역시 누가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其筆
(기필) : 그 글씨는
則摹松雪眞字
(칙모송설진자) : 송설(松雪)의 서체를 본받아
體極精姸
(체극정연) : 자체가 아주 곱고도 단정하였다.
其一幅曰
(기일폭왈) : 그 첫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芙蓉帳暖香如縷
(부용장난향여루) : 연꽃 그린 휘장은 따뜻하고 향내는 실같은데
窓外霏霏紅杏雨
(창외비비홍행우) : 창밖에 붉은 살구꽃이 비 내리듯 하는구나.
樓頭殘夢五更鐘
(루두잔몽오경종) : 다락 머리에서 새벽 종소리에 남은 꿈을 깨고 보니
百舌啼在辛夷塢
(백설제재신이오) :신이화핀 언덕에 백설조가 우짖네.
燕子日長閨閤深
(연자일장규합심) : 제비새끼 커 가는데 안방 깊숙이 들어앉아
懶來無語停金針
(라래무어정금침) : 귀찮은 듯 말도 없이 금바늘을 멈추었네.
花底雙雙飛蝶蛺
(화저쌍쌍비접협) : 꽃 아래로 쌍쌍이 나비들 짝 지어 날며
爭趰落花庭院陰
(쟁이락화정원음) : 그늘진 동산으로 지는 꽃을 따라가네.
嫩寒輕透綠羅裳
(눈한경투록라상) : 꽃샘 추위가 초록 치마를 스쳐 가면
空對春風暗斷腸
(공대춘풍암단장) : 무정한 봄바람에나의 애가끊어지네.
脉脉此情誰料得
(맥맥차정수료득) : 말없는 이 심정을 그 누가 안다더냐.
百花叢裏舞鴛鴦
(백화총리무원앙) : 온갖 꽃 만발한 속에 원앙새가 춤추는구나.
春色深藏黃四家
(춘색심장황사가) : 깊어 가는 봄빛을 뉘 집 동산에 간직했나?
深紅淺綠映窓紗
(심홍천록영창사) : 붉은 꽃잎 푸른 나뭇잎 사창에 비치었네
一庭芳草春心苦
(일정방초춘심고) : 뜨락의 꽃과 풀들은 봄시름에 겨웠는데
輕揭珠簾看落花
(경게주렴간낙화) : 주렴을 가볍게 걷고 지는 꽃을 바라보네.
其二幅曰
(기이폭왈) : 그 둘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小麥初胎乳燕斜
(소맥초태유연사) : 밀이삭 처음 베고 제비 새끼 날아드는데
南園開遍石榴花
(남원개편석류화) : 남쪽 뜰엔 석류꽃이 두루 피었구나.
綠窓工女幷刀響
(록창공녀병도향) : 푸른 창가에 앉아 길쌈하는 아가씨는 가위소리 울리고
擬試紅裙剪紫霞
(의시홍군전자하) : 붉은 비단을 마름질하여 새 치마를 지으려네.
黃梅時節雨簾纖
(황매시절우렴섬) : 매실이 익는 철에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데
鸎囀槐陰燕入簾
(앵전괴음연입렴) : 홰나무 그늘에 꾀꼬리 울고 제비는 주렴으로 날아드네.
又是一年風景老
(우시일년풍경노) : 또한 해 봄 풍경이 시들어 가니
棟花零落笋生尖
(동화영락순생첨) : 고련꽃 떨어지고 죽순이 삐죽 솟았네.
手拈靑杏打鸎兒
(수념청행타앵아) : 푸른 살구 손에 쥐고 꾀꼬리에게 던져 보네.
風過南軒日影遲
(풍과남헌일영지) : 남쪽 난간에 바람 일고 해그림자 더디어라.
荷葉已香池水滿
(하엽이향지수만) : 연잎에 향내 가시고 못에는 물이 가득한데
碧波深處浴鸕鶿
(벽파심처욕로자) : 푸른 물결 깊은 곳에서 가마우지가 목욕하네.
藤牀筠簟浪波紋
(등상균점랑파문) : 등 평상 대자리에 무늬가 물결 지고
屛畵瀟湘一抹雲
(병화소상일말운) : 소상강 그린 병풍에는 구름이 한 자락 있네.
懶慢不堪醒午夢
(라만불감성오몽) : 낮꿈을 깨고도 나른해 누웠더니
半窓斜日欲西曛
(반창사일욕서훈) : 반창에 비낀 햇살이 뉘엿뉘엿 넘어가네.
其三幅曰
(기삼폭왈) : 그 셋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秋風策策秋露凝
(추풍책책추로응) : 가을 바람이 쌀쌀해서 찬이슬이 맺히고
秋月娟娟秋水碧
(추월연연추수벽) : 달빛도 고와서 물빛 더욱 푸르구나.
一聲二聲鴻雁歸
(일성이성홍안귀) : 한 소리 또 한소리 기러기 울며 돌아가는데
更聽金井梧桐葉
(경청금정오동엽) : 우물에 오동잎 지는 소리를 다시금 듣고파라.
床下百蟲鳴喞喞
(상하백충명즐즐) : 상 밑에서는 온갖 벌레들이 처량하게 울고
床上佳人珠淚滴
(상상가인주루적) : 상 위에서는 아가씨가 구슬 눈물을 떨어뜨리네.
良人萬里事征戰
(양인만리사정전) : 만리 밖 싸움터에 몸을 바친 님에게도
今夜玉門關月白
(금야옥문관월백) : 오늘밤 옥문관(玉門關)에 달빛이 환하겠지.
新衣欲裁剪刀冷
(신의욕재전도냉) : 새 옷을 마르려니 가위가 차가워라.
低喚丫兒呼熨斗
(저환아아호위두) : 나직이 아이 불러 다리미를 가져오라네.
熨斗火銷全未省
(위두화소전미성) : 다리미에 불 꺼진 걸 살피지 못하다가
細撥秦箏又搔首
(세발진쟁우소수) : 머리를 긁으며 피리대로 가만히 헤치네.
小池荷盡芭蕉黃
(소지하진파초황) : 작은 연못에 연꽃도 지고 파초 잎도 누래지자
鴛鴦瓦上粘新霜
(원앙와상점신상) : 원앙 그린 기와 위에 첫서리가 내렸네.
舊愁新恨不能禁
(구수신한불능금) : 묵은 시름 새 원한을 막을 길이 없는데
況聞蟋蟀鳴洞房
(황문실솔명동방) : 귀뚜라미 울음까지 골방에 들리네.
其四幅曰
(기사폭왈) : 그 넷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一枝梅影向窓橫
(일지매영향창횡) : 한 가지 매화 그림자가 창 앞으로 뻗었는데
風緊西廊月色明
(풍긴서랑월색명) : 바람 센 서쪽 행랑에 달빛 더욱 밝아라.
爐火未銷金筋撥
(로화미소금근발) : 화롯불 꺼졌는지 부저로 헤쳐 보고는
旋呼丫髻換茶鐺
(선호아계환다당) : 아이를 불러다 차솥을 바꾸라네.
林葉頻驚半夜霜
(임엽빈경반야상) : 밤서리에 놀란 잎이 자주 흔들리고
回風飄雪入長廊
(회풍표설입장랑) : 돌개바람이 눈을 몰아 긴 마루로 들어오네.
無端一夜相思夢
(무단일야상사몽) : 님 그리워 밤새도록 꿈속에 뒤척이니
都在氷河古戰場
(도재빙하고전장) : 빙하(氷河)가 어디런가, 그 옛날 전쟁터일세.
滿窓紅日似春溫(만창홍일사춘온) : 창에 가득한 붉은 해는 봄날처럼 따뜻한데
愁鎖眉峰著睡痕(수쇄미봉저수흔) : 시름에 잠긴 눈썹에 졸음까지 더하네.
膽甁小梅腮半吐(담병소매시반토) : 병에 꽂힌 작은 매화는 필 듯 말듯 하는데
含羞不語繡雙鴛(함수불어수쌍원) : 수줍어 말도 못하고 원앙새만 수놓는구나.
剪剪霜風掠北林
(전전상풍략북림) : 쌀쌀한 서리 바람이 북쪽 숲을 스치는데
寒鳥啼月正關心
(한조제월정관심) : 처량한 까마귀가 달을 보며 우는구나.
燈前爲有思人淚
(등전위유사인루) : 등불 앞에 님 생각 눈물 되어 흐르니
滴在穿絲小挫針
(적재천사소좌침) : 실에도 떨어지고 바늘에도 떨어지네.
一傍
(일방) : 한쪽에
別有小室一區
(별유소실일구) : 작은 방 하나가 따로 있었는데,
帳褥衾枕
(장욕금침) : 휘장 . 요 . 이불 .베개들이
亦甚整麗
(역심정려) : 또한 아주 깨끗하였다.
帳外爇麝臍
(장외설사제) : 휘장밖에는 사향을 태우고
燃蘭膏
(연난고) : 난향의 촛불을 켜놓았는데,
熒煌映徹
(형황영철) : 환하게 밝아서
恍如白晝
(황여백주) : 마치 대낮 같았다.
生與女
(생여녀) : 이생은 최랑과 더불어
極其情歡
(극기정환) : 마음껏 즐거움을 누리면서
遂留數日
(수유수일) : 여러 날 머물었다.
生謂女曰
(생위녀왈) : 어느 날 이생이 최랑에게 말하였다.
先聖有言
(선성유언) : "옛 성인의 말씀에,
父母在
(부모재) : '어버이가 계시면
遊必有方
(유필유방) : 나가 놀더라도 반드시 일정한 곳에 있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而今我定省
(이금아정성) : 이제 내가 부모님을 떠난 지가
已過三日
(이과삼일) : 사흘이나 되었소.
親必倚閭而望
(친필의려이망) : 부모님께서 반드시 대문에 기대어 기다리실 테니,
非人子之道也
(비인자지도야) : 이 어찌 아들의 도리라고 하겠소?"
女惻然而頷之
(여측연이함지) : 최랑은 서운하게 여기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踰垣而遣之
(유원이견지) : 담을 넘어 보내 주었다.
生自是以後
(생자시이후) : 이생을 이 뒤부터
無已不往
(무이불왕) : 저녁마다 최랑을 찾아가지 않는 날이 없었다.
[노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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