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경호 교수의 해석 '천재의 광기'에 대한 운영자 단평.
'천재'는 맞지만, '광기'는 오류다. 그는 다만 자신의 세계관(가치관)을 실현한 분이셨다. 재평가하면 '영원한 자유인'이셨다.
Do-Re-Mi - Julie Andrews
https://www.youtube.com/watch?v=L1l1KUuTNlk
Do-Re-Mi - Julie Andrews [가사번역 자막]
https://www.youtube.com/watch?v=b7Slk-6CYd4
https://www.youtube.com/watch?v=jITsImZdlMQ
에델바이스(Edelweiss) [가사 번역]
https://www.youtube.com/watch?v=hX7almtjEQA
The Sound of Music (1/5)
https://www.youtube.com/watch?v=AePRD1Ud3Lw
The Sound of Music (2/5)
https://www.youtube.com/watch?v=pcj4boVT4fc
The Sound of Music (3/5)
https://www.youtube.com/watch?v=DGABqdbtQnA
The Sound of Music (4/5)
https://www.youtube.com/watch?v=pLm07s8fnzM
The Sound of Music (5/5)
https://www.youtube.com/watch?v=kxjwb5cXTI0
1:37:45 이후에 명시 <謔浪笑(학랑소)>를 자세히 설명하네요. 내일 다시 한 번 보시기로 하죠.
위 사진은 김시습 자신이 그린 자화자찬의 젊은 시절과 노년의 초상화로,
그는 관습이나 남의 시선에 구속받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일생을 방랑한 영원한 자유인이었다.
스님이면서도 수염을 기른 초상화에는 이맛살이 찡그려져 있다.
노년의 초상화에는 이마의 주름이 더욱 깊게 찡그려져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잘못된 역사에 대한 치욕과 분노 때문일 것이다.
그의 방황과 평생 동안의 방랑은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로부터 비롯되었다.
마소에 팔다리를 묶어 찢어 죽인 사육신들의 시신을 거두어 매장한 분도 김시습이었다.
그래서 그가 얻은 건 역사상 생육신의 한 분이라는 영예뿐이었다.
먼저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수락산의 매월정부터 올라 볼까요?
그의 자호 매월당은 그가 스님이 되어 경주 남산 용장사에 계실 때 거실의 당호로 사용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신라인처럼 매화 향기 그윽한 달밤을 그리워한 듯하다.
그는 인귀교환설화로 그림움을 달랬다.
아래 포스트에는 인간 김시습에 대한 심경호 교수의 상세한 설명을 보고 들을 수 있다.
지루해지면 동영상 하단의 시각바를 적어 놓고 여유로운 시간에 읽으면 된다.
심교수의 김시습 강연은 바른 삶을 추구하는 분들에게 삶의 지침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블로그의 참고글
카테고리 "한문학> 금오신화 & 전등신화"
천재의 광기, 매월당집과 금오신화(심경호 교수)
https://www.youtube.com/watch?v=HDSfozlsM3w
매월정 사진은 아래 포스트에도 올린 바 있다.
http://kydong77.tistory.com/11872
http://kydong77.tistory.com/10062
매월당 김시습에 대하여는 아래 블로그에 자세히 소개하였다.
카테고리 - 한문학> 금오신화
카테고리 - 한문학>전등신화도 인귀교환설화 이해를 위해 필독이 요구된다.
김시습 년보 참조
http://kydong77.tistory.com/2582
1468년(세조 14년) 34세 때,
겨울에 금오산에 거처하고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저술하였다.
이즈음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저술하다.
경주 남산의 주봉이 금오산이다.
명나라 구우의 『전등신화』에 자극받아 인귀교환설화를 수용하여 ‘신화’라 붙이다.
인귀교환설화란 산 사람[사내]과 죽은 사람의 혼령[여인]이
현실적 공간에서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귀교환설화는 아래의 최치원설화다. 쌍녀분설화라고도 한다.
http://kydong77.tistory.com/8611
김시습 년보
1435년(세종 17년)
시울 반중 북쪽에 있는 충순위(忠純衛) 일성(日省)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 (江陵)이요, 자는 열경(悅卿), 휘는 시습(時習), 호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청한자(淸寒子), 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법호는 설잠(雪岑)이다.
대대 무인의 집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문장이 뛰어나 귀여움을 받았다.
고려조 (高麗朝) 시중 김태현(金太鉉)의 십삼세 손이다.
그이 외조가 맡아서 글을 가르쳤는데 말은 가르치지 않고 천자만 가르치어
어려서부터 말로 하는 것보다 글로 표현하는 것이 더 빨랐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논어(論語)에 [자왈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子曰 學而時習之 不亦悅(設)乎)]에서 시습(時習)을 따서 휘(이름)로 하고 경(卿)자를 넣어서 열경(悅卿)이라고 자를 지었다고 한다.
세살 때 한시를 능히 지었다.
유모가 맷돌에 보리 가는 것을 보고 ,
[無 雨 黃 雲]
[비도 없이 천둥소리 어디서 나나,
누런 구름 조각이 각 사방에 흩어지네]
하고 소리 높이 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신기하게 여겼다.
1439년(세종 21년)
5세 때에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서 중용과 대학을 배워 능통하였다.
정승 허 조 (許稠)가 그를 찾아가서 불러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늙을 로(老)자로 운을 달아 지어라]라고 하니 곧
[늙은 나무가 꽃 피는 것은 마음이 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니
허 조는 문득 무릎을 치면서, [정말 신동이구나!]하고 탄복하였다 한다.
세종께서 이 소문을 듣고 시습을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그의 재주를 시험하게 하여
[동자의 학문하는 태도가 흰 학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 것 같구나( 子之學 白鶴 靑空之末)]란 싯귀를 주어 댓귀를 지으라 하니
聖主之德 黃龍 海之中
[성스러운 임금님의 덕은 누런 용이 푸른 바다속에 꿈틀거리는 것 같습니다.]라고
답하여, 세종께서는 크게 칭찬하시고 비단 50필을 상으로 내렸다.
이로부터 이름은 온 나라에 떨쳐 사람들에게서 5세 신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5세부터 13세까지
이웃에 사는 대사성(大司成) 김 반(金泮)의 문하에서 논어(論語).맹자(孟子).시경(時經).춘추(春秋)를 배웠으며, 이웃에 사는 사성(司成) 윤상(尹祥)에게 나아가 역경(易經).예기(禮記)와 여러 사서(史書)에서 제자백가(諸自百家)에 이르기까지 배웠다.
1449년(세종 31년)
1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외가에서 양육을 받았다.
1454년(단종 2년) 20세 때,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1455년(세조 1년) 21세에,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글을 읽다가 단종(端宗)이 왕위를 빼앗겼다는 변보를 듣고
문을 닫고 3일 동안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읽던 서적을 다 불에 태우고 거짓 미친 채 변소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1458년(세조 4년) 24세 때,
관서지방을 여행하였다.
가을에 <탕유관서록후지>를 저술하였다 .
1463년(세조 9년) 28세 때
방랑 여행으로 호남지방을 여행하였고 그해 가을에 <탕유호남록후지(宕遊湖南錄後志)>를
저술하였다. 가을에 서적 구입차 서울에 올라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고를 받아 열흘 동안 법화경(法華經)을 교정하였다.
1465년(세조 11년) 31세 때,
경주(慶州)에 정착하였고, 봄에 남산의 주봉인 금오산 용장사 아래 계곡에 금오산실을 지어 살았다.
3월말에 효령대군의 초청을 받아 서울로 나와 원각사(圓覺寺)의 낙성식에 참석하였다.
1468년(세조 14년) 34세 때,
겨울에 금오산에 거처하고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저술하였다.
이즈음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저술하다. 경주 남산의 주봉이 금오산이다.
명나라 구우의 『전등신화』를 모방하여 인귀교환설화를 수용하여 ‘신화’라 붙이다.
1471년(성종 2년) 37세 되던 해
봄에 금오산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와 도성 동쪽 수락산 기슭에 폭천정사를 짓고 은거하였다.
1476년(성종 7년) 42세 때,
<산거백영후지(山居百詠後志)>를 저술하다.
1481년(성종 12년) 47세 때,
다시 속인이 되었다. 고기를 먹고 머리를 기르며 안씨(安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다.
1482년(성종 13년) 48세 때,
이 해 이후부터 세상이 쇠진해짐을 보고는 세상일에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1483년(성종 14년) 49세 때,
육경(六經).자사 등의 많은 서적을 싣고 관동유람의 길을 떠났다.
1485년(성종 16년) 51세 때,
봄에 <독산원기(禿山院記)>를 지었다.
1493년(성종 24년) 59세 때,
3월에 충청도 홍산현(鴻山縣, 현재는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無量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후>
1511년 (중종 6년)
세상을 떠난지 18년만에 왕명으로 유집(遺集)을 찾아 모아서 간행케 하였다.
1582년 (선조 15년)
세상을 떠난 지 89년만에 선조께서 이 이(李珥)에게 영을 내리어 김시습전(金時習傳)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1703년 (숙종 29년)
세상을 떠난지 210년만에 유생 곽억령 등이 김시습 등 6인의 절의를 추모하여 사우를 세울 것을 상소하여
대왕께서 윤허하였다.
1782년 (정조 6년)
세상을 떠난 지 289년만에 이조판서(吏曺判書)에 추증하였다.
1784년 (정조 8년)
세상을 떠난 지 291년만에 청간(淸簡)이란 시호를 내렸다.
[참고]
무량사 (無量寺)에 선생의 부도(浮屠)가 있고 또 영정이 있다.
경주시 기림사 일주문 안에도
사찰 경내에 경주 남산에서 옮겨온 사당이 중수되어 있다.
이 영정은 선생이 자신의 초상을 자필로 그리셨다는 설이 전해 온다 .
선생은 유학과 불교에 능통한 저명한 학자이시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9751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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