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찬(自寫眞贊)

自寫眞贊

(자화상 찬)

ㅡ 김시습

俯視李賀

(부시이하) 이하(李賀)*도 내려다 볼 만큼

優於海東

(우어해동) 조선에서 최고라고들 했지.

騰名謾譽

(등명만예) 높은 명성과 헛된 칭찬

於爾孰逢

(어이숙봉) 네게 어찌 걸맞겠는가.

爾形至眇

(이형지묘) 네 형체는 지극히 작고

爾言大閒

(이언대동) 네 언사는 너무도 오활하네.

宜爾置之

(의이치지) 네 몸을 두어야 할 곳은

丘壑之中

(구학지중) 금오산 산골짝이 마땅하도다.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0323023002&wlog_tag3=naver#csidx5cb1eef2c190ffca8ad78f9df6ab14d

*[운영자 주]

번역에 '금오산'은 경주 남산.

산골짝은 경주 남산 삼릉계곡.

그래서 '自寫眞贊' 을 기존 번역의 제목인 '나의 초상에 쓰다'를 바꾸어 '자화상 찬'이라 했다.

작품집 이름에 '금오'를 얹은 것은 금오산에서 유래함.

新話란 구우의 전등신화에서 아이디어를 모방한 人鬼交歡설화를 말함,

김시습은 34세 때 경주 남산 삼릉계곡 용장사 거소에서 <금오신화> 5편을 창작함.

*이하 李賀, Li He (791-817)

26세에 요절한 당대 천재시인.

 

[주]세조의 왕위찬탈로 파탄난 인생, 그는 장부의 표상이라며 수염을 기른 중으로 일생을 방랑했다.

47세때 환속하여 조부신께 사죄문도 올렸지만 충신불사이군의 유교적 이데올로기는 태생의

역마살을 자극하여 집을 나서 걷고 또 걷게 만들었다.

년보와 함께 사후 89년 뒤 선조의 명에 의하여 율곡 이이(李珥) 선생이 지으신

<김시습전>도 읽어본다.

 

 

 

https://kydong77.tistory.com/21173

 

김시습, 금오신화 5편 총정리/ 同安常察,十玄談/ 김시습,십현담요해 & 한룡운, 십현담주해

[상단은 젊은 날의 초상화, 하단은 "자사진찬"까지 쓴 주름진 늙으막의 초상화] 자화상 찬(自寫眞贊) -위 사진. 俯視李賀 (부시이하) 이하(李賀)*도 내려다 볼 만큼 優於海東 (우어해동) 조선에서

kydong77.tistory.com

 

 

김시습 년보

http://www.maewd.com/

1435년(세종 17년)

시울 반중 북쪽에 있는 충순위(忠純衛) 일성(日省)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 (江陵)이요, 자는 열경(悅卿), 휘는 시습(時習), 호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청한자(淸寒子), 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법호는 설잠(雪岑)이다.

대대 무인의 집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문장이 뛰어나 귀여움을 받았다.

 

고려조 (高麗朝) 시중 김태현(金太鉉)의 십삼세 손이다.

그이 외조가 맡아서 글을 가르쳤는데 말은 가르치지 않고 천자만 가르치어

어려서부터 말로 하는 것보다 글로 표현하는 것이 더 빨랐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논어(論語)에 [자왈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子曰 學而時習之 不亦悅(設)乎)]에서 시습(時習)을 따서 휘(이름)로 하고 경(卿)자를 넣어서 열경(悅卿)이라고 자를 지었다고 한다.

세살 때 한시를 능히 지었다.

 

유모가 맷돌에 보리 가는 것을 보고 ,

 

[無 雨 黃 雲]

[비도 없이 천둥소리 어디서 나나,

누런 구름 조각이 각 사방에 흩어지네]

 

하고 소리 높이 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신기하게 여겼다.

 

1439년(세종 21년)

5세 때에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서 중용과 대학을 배워 능통하였다.

정승 허 조 (許稠)가 그를 찾아가서 불러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늙을 로(老)자로 운을 달아 지어라]라고 하니

[늙은 나무가 꽃 피는 것은 마음이 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니

허 조는 문득 무릎을 치면서, [정말 신동이구나!]하고 탄복하였다 한다.

 

세종께서 이 소문을 듣고 시습을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그의 재주를 시험하게 하여

[동자의 학문하는 태도가 흰 학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 것 같구나( 子之學 白鶴 靑空之末)]싯귀를 주어 댓귀를 지으라 하니

 

聖主之德 黃龍 海之中

[성스러운 임금님의 덕은 누런 용이 푸른 바다속에 꿈틀거리는 것 같습니다.]라

답하여, 세종께서는 크게 칭찬하시고 비단 50필을 상으로 내렸다.

이로부터 이름은 온 나라에 떨쳐 사람들에게서 5세 신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5세부터 13세까지

이웃에 사는 대사성(大司成) 김 반(金泮)의 문하에서 논어(論語).맹자(孟子).시경(時經).춘추(春秋)를 배웠으며, 이웃에 사는 사성(司成) 윤상(尹祥)에게 나아가 역경(易經).예기(禮記)와 여러 사서(史書)에서 제자백가(諸自百家)에 이르기까지 배웠다.

 

1449년(세종 31년)

1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외가에서 양육을 받았다.

 

1454년(단종 2년) 20세 때,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1455년(세조 1년) 21세에,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글을 읽다가 단종(端宗)이 왕위를 빼앗겼다는 변보를 듣고

문을 닫고 3일 동안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읽던 서적을 다 불에 태우고 거짓 미친 채 변소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1458년(세조 4년) 24세 때,

관서지방을 여행하였다.

가을에 <탕유관서록후지>를 저술하였다 .

 

1463년(세조 9년) 28세 때

방랑 여행으로 호남지방을 여행하였고 그해 가을에 <탕유호남록후지(宕遊湖南錄後志)>를

저술하였다. 가을에 서적 구입차 서울에 올라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고를 받아 열흘 동안 법화경(法華經)을 교정하였다.

 

1465년(세조 11년) 31세 때,

경주(慶州)에 정착하였고, 봄에 남산의 주봉인 금오산 용장사 아래 계곡에 금오산실을 지어 살았다.

3월말에 효령대군의 초청을 받아 서울로 나와 원각사(圓覺寺)의 낙성식에 참석하였다.

 

1468년(세조 14년) 34세 때,

겨울에 금오산에 거처하고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저술하였다.

이즈음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저술하다. 경주 남산의 주봉이 금오산이다.

명나라 구우의 『전등신화』를 모방하여 인귀교환설화를 수용하여 ‘신화’라 붙이다.

 

1471년(성종 2년) 37세 되던 해

봄에 금오산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와 도성 동쪽 수락산 기슭에 폭천정사를 짓고 은거하였다.

 

1476년(성종 7년) 42세 때,

<산거백영후지(山居百詠後志)>를 저술하다.

 

1481년(성종 12년) 47세 때,

다시 속인이 되었다. 고기를 먹고 머리를 기르며 안씨(安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다.

 

1482년(성종 13년) 48세 때,

이 해 이후부터 세상이 쇠진해짐을 보고는 세상일에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1483년(성종 14년) 49세 때,

육경(六經).자사 등의 많은 서적을 싣고 관동유람의 길을 떠났다.

 

1485년(성종 16년) 51세 때,

봄에 <독산원기(禿山院記)>를 지었다.

 

1493년(성종 24년) 59세 때,

3월에 충청도 홍산현(鴻山縣, 현재는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無量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후>

1511년 (중종 6년)

세상을 떠난지 18년만에 왕명으로 유집(遺集)을 찾아 모아서 간행케 하였다.

1582년 (선조 15년)

세상을 떠난 지 89년만에 선조께서 이 이(李珥)에게 영을 내리어 김시습전(金時習傳)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1703년 (숙종 29년)

세상을 떠난지 210년만에 유생 곽억령 등이 김시습 등 6인의 절의를 추모하여 사우를 세울 것을 상소하여

대왕께서 윤허하였다.

1782년 (정조 6년)

세상을 떠난 지 289년만에 이조판서(吏曺判書)에 추증하였다.

1784년 (정조 8년)

세상을 떠난 지 291년만에 청간(淸簡)이란 시호를 내렸다.

 

[참고]

무량사 (無量寺)에 선생의 부도(浮屠)가 있고 또 영정이 있다.

경주시 기림사 일주문 안에도

사찰 경내에 경주 남산에서 옮겨온 사당이 중수되어 있다.

이 영정은 선생이 자신의 초상을 자필로 그리셨다는 설이 전해 온다 .

선생은 유학과 불교에 능통한 저명한 학자이시다.

 

http://blog.naver.com/kwank99?Redirect=Log&logNo=30029487601

 

김시습전(金時習傳)

-이이(李珥)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이고 관은 강릉(江陵)이다. 신라 알지왕(閼智王)의 후손에 주원(周元)이라는 왕자가 있어 강릉을 식읍(食邑: 공신에게 내리어 조세(租稅)를 받아쓰게 한 고을)으로 하였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눌러 살아 관향으로 하였다.

 

그 후에 연(淵)이 있고 태현(台鉉)이 있었는데 모두 고려의 시중(侍中)이 되었다. 태현의 후손 구주(久住)는 벼슬이 안주목사(安州牧使)에 그쳤는데, 겸간(謙侃)을 낳았으니 그의 벼슬은 오위부장(五衛部將)에 그쳤다. 겸간이 일성(日省)을 낳으니 음보(蔭補: 벼슬을 조상의 음덕으로 얻는 것)로 충순위(忠順衛)가 되었다.

 

일성이 선사 장씨(仙사 張氏)에게 장가들어 선덕 10년(宣德十年: 世宗 17년, 1435) 시습을 한사(漢師: 지금의 서울)에서 낳았다.

특이한 기질을 타고나 생후 겨우 여덟 달에 스스로 글을 알아보았다. 최 치운(崔致雲: 본관 강릉(江陵). 세종 때 평안도 도절제사(都節制使) 최윤덕(崔潤德)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야인 정벌에 공을 세웠다.)

이 보고서 기이하게 여기어 이름을 시습이라고 지었다.

말은 더디었으나 정신은 영민하여 문장을 대하면 입으로는 잘 읽지 못하지만 뜻은 모두 알았다.

3세에 시를 지을 줄 알았고 5세에는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통달하니 사람들은 신동이라 불렀다. 명공(名公) 허조(許稠) 등이 많이 보러갔다.

 

장헌대왕(莊憲大王: 세종대왕의 시호)께서 들으시고 승정원으로 불러들여 시로써 시험하니 과연 빨리 지으면서도 아름다웠다. 하교(下敎)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친히 보고 싶으나 세속의 이목(耳目)을 놀라게 할까 두려우니, 마땅히 그 집에서 면려(勉勵)하게 하며 들어내지 말고 교양을 할 것이며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리라" 하시고 비단을 하사하시어 집에 돌아가게 하였다.

 

이에 명성이 온나라에 떨쳐 오세(五歲)라고 호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시습이 이미 임금의 장려하여 주심을 받음에 더욱 원대한 안목으로 학업을 힘썼다.

 

그런데 경태(景泰: 명 태종의 연호 1450-1467)의 연간에 영릉(英陵: 세종대왕)ㆍ현릉(顯陵: 문종대왕을 이름.)이 연이어 돌아가시었고, 노산(魯山: 단종)은 3년 되는 해에 왕위를 손위(遜位)하였다.

이 때에 시습의 나이 21세로 마침 삼각산(三角山)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서울로부터 온 사람이 있었다.

시습은 즉시 문을 닫아걸고 3일 동안 나오지 않다가 이에 크게 통곡하고 서적을 몽땅 불살라 버렸으며,

광증을 발하여 변소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자취를 불문(佛門)에 의탁하고 승명(僧名)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그리고 여러 번 그 호를 바꾸어 청한자(淸寒子)ㆍ동봉(東峯)ㆍ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ㆍ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그의 생김생김은 못생기고 키는 작았다.

뛰어나게 호걸스럽고 재질이 영특하였으나 대범하고 솔직하여 위의(威儀)가 없고 너무 강직하여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못했다.

시대를 슬퍼하고 세속을 분개한 나머지 심기(心氣)가 답답하고 평화롭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 세상을 따라 어울려 살 수 없다고 생각하여 드디어 육신에 구애 받지 않고 세속 밖을 노닐었다.

국중(國中) 산천은 발자취가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고 좋은 곳을 만나면 머물러 살았으며, 고도(故都)에 올라 바라볼 때면 반드시 발을 동동 구르며 슬피 노래하기를 여러 날이 되어도 마지 않았다.

 

총명하고 영오(穎悟)함이 남달리 뛰어나서 사서(四書)와 육경(六經: 시ㆍ서ㆍ역ㆍ예기ㆍ주례ㆍ춘추)은 어렸을 때 스승에게서 배웠고 제자백가(諸子百家)는 전수(傳受)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섭렵(涉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번 기억하면 끝내 잊지 아니하므로, 평일에는 독서하지 않고 또한 서책을 싸가지고 다니지도 않지만 고금의 문적(文籍)을 빠짐없이 관통하여 사람들이 질문을 하면 의심할 여지없이 즉시 응대하였다.

 

돌무더기가 뭉쳐 있는 듯 답답하고 의분과 개탄으로 차있는 심흉(心胸)을 스스로 시원하게 풀어볼 도리가 없었기에 무릇 세상의 풍ㆍ월ㆍ운ㆍ우(風月雲雨), 산림천석(山林泉石), 궁실의식(宮室衣食), 화과조수(花果鳥獸)와 인사(人事)의 시비득실(是非得失), 부귀빈천, 사생질병, 희노애락(喜怒哀樂)이며, 나아가 성명이기(性命理氣)ㆍ음양유현(陰陽幽顯: 음은 유하고 양은 현하다)에 이르기까지 유형무형(有形無形)을 통틀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면 모두 문장으로 나타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문장은 물이 솟구치고 바람이 부는 듯하며 산이 감추고 바다가 머금은 듯 신(神)이 메기고 귀신이 받는 듯 특출한 표현이 거듭거듭 나와 사람으로 하여금 실마리를 잡을 수 없게 하였다.

 

성률(聲律)과 격조(格調)에 대하여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지만 그중에서 빼어난 것은 사치(思致: 생각의 운치)가 높고 멀어 일상의 생각에서 뛰어났으므로 문장이나 자질구레하게 다듬어 수식하는 자로서는 따라 갈 수 없는 터이었다.

 

도리(道理)에 대해서는 비록 완미하여 탐색하고 존양(存養: 존심 양성)하는 공부가 적었지만 탁월한 재능과 지혜로써 이해하여, 횡담(橫談)ㆍ수론(竪論)하는 것이 대부분 유가(儒家)의 본지를 잃지 않았다.

 

선가(禪道)와 도가(道家)에 대해서도 또한 대의를 알았고 깊이 그 병통의 근원을 탐구하였다.

선어(禪語: 禪門의 말) 짓기를 좋아하여 현모하고 은미한 뜻을 발휘 천명하되, 날카로워 훤해서 막히는 것이 없었으므로 비록 이름 높은 중으로서 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도 감히 그 칼날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그의 타고난 자질이 빼어났음을 이것을 가지고도 징험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명성이 일찍부터 높았는데 하루아침에 세상을 도피하여 마음으로는 유교를 숭상하고 행동은 불교를 따라 한 시대에 괴이하게 여김을 당하였다고 여겼으므로 그래서 짐짓 미쳐서 이성을 잃은 모양을 하여 진실을 가렸다. 글을 배우고자하는 선비가 있으면 나무나 돌을 가지고 치거나 혹은 활을 당기어 쏘려는 듯이 하여 그 성의를 시험하였으므로 문하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적었다.

 

또 산전(山田)을 개간하기 좋아하여 비록 부귀한 집안의 자제라도 반드시 김을 매고 거두어들이는 일을 시키는 등 매우 괴롭혔으므로 끝까지 학업을 전수받는 자는 더욱 적었다.

 

산에 가면 나무껍질을 벗겨 하얗게 하여 시 쓰기를 좋아 하였으며 외워 읊조리기를 얼마동안 하고 나서는 번번이 통곡하고 깎아버리곤 하였다. 시를 혹 종이에 쓰기도 하였으나 남에게 보이지 아니하고 대부분 물이나 불 속에 던져벼렸다. 혹은 나무를 조각하여 농부가 밭갈고 김매는 모양을 만들어 책상 옆에 벌려놓고 하루 종일 골똘히 바라보다가는 통곡하고 불태워 버리기도 하였다.

때로는 심은 벼[禾]가 아주 무성하여 잘 여믄 모습이 완상(玩賞) 할만하면 술에 취해 낫을 휘둘러 온 이랑을 다 베어 땅에 내어 버리고서는 큰 소리로 목놓아 통곡하기도 하였다.

행동거지가 종잡을 수 없었으므로 크게 세속사람들의 비웃어 손가락질하는 바 되었다.

 

산에 살고 있을 때 찾아오는 손을 보고서 서울 소식을 물어, '마구 비웃고 꾸짖는 사람이 있더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으례 기쁜 빛을 하고 만일, '거짓으로 미쳤으며 속에 포부가 있다고 하더라'하면 문득 눈살을 찌푸리면서 기뻐하지 않았다.

사령을 받은 고관이 혹 인망이 없는 사람이면 반드시 통곡하여 이르기를,

"백성이 무슨 죄 있길래 이 사람이 이 자리를 맡는가" 하였다.

그 당시에 명경(名卿: 이름있는 공경) 김 수온(金守溫)과 서 거정(徐居正)은 국사(國士: 나라의 모범되는 선비)로 상찬(賞讚)되었다. 거정이 바야흐로 행인을 물리치고 바삐 조회에 들어가는데,

시습이 남루(藍縷)한 옷차림에 새끼줄로 허리띠를 두르고 폐양자(蔽陽子: 천한 사람이 쓰는 백죽립(白竹笠)를 쓰고서 저자에서 만났다. 시습은 앞에서 인도하는 무리를 무시하고 머리를 쳐들고 불러 말하기를

"강중(剛中: 거정의 자)이 편안한가"하였다.

 

거정은 웃으면서 이에 응답하고 초헌(초軒: 대부가 타는 수레)을 멈추어 서로 대화를 나누니, 온 저자 사람들이 놀라는 눈으로 서로 쳐다보았다.

조정의 선비로서 시습의 모욕을 당한 사람이 참지 못하여 거정을 보고서 상주하여 그 죄를 다스려야겠다고 하니, 거정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그만두시오, 미친 사람과 무얼 따질 것이 있겠소.

지금 이 사람을 죄주면 백대(百代)후에 반드시 공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이오."

 

하였다.

 

김 수온이 지관사(知館事)로서 "맹자 견양혜왕(孟子見梁惠王)"이라는 논제를 가지고 태학(太學: 성균관)의 유생들을 시험하였다.

어떤 상사생(上舍生: 진사나 생원)이 삼각산에 가서 시습을 보고 말하기를,

"괴애(乖崖: 수온의 별호)가 장난을 좋아합니다. '맹자 견양혜왕'이 어찌 논제에 합당하겠습니까." 하였다.

 

시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 노인이 아니면 이 논제를 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고 이에 붓을 들어 재빨리 한편의 글을 만들어 주며 말하기를,

"생원이 스스로 지은 것처럼 해서 이 노인을 한번 속여 보시오."

하였다.

 

상사생이 그 말대로 따라하였더니 수온이 끝까지 읽지도 않고 급히 묻기를.

"열경이 지금 서울의 어느 절에 머물고 있는가." 하였다.

상사생은 숨길 도리가 없었으니 그 알려짐이 이와 같았다.

그의 이론은 대략 '양혜왕은 왕을 참칭(僭稱)한 자이니, 맹자가 만나서는 안 된다.'는 내용인데 지금은 그 글이 없어져서 수집하지 못한다.

수온이 죽은 뒤 그가 좌화(坐化: 앉아서 죽음)하였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시습은 말하기를,

"괴애는 욕심이 많은데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는가 설혹 있었다 하더라도 좌화는 예가 아니다. 나는 다만 증자(曾子)의 역책(易책)과 자로(子路)의 결영(結纓)을 들었을 따름이오.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 하였다.

 

아마 수온이 부처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리라.

성종(成宗) 12년(1481) 시습의 나이 47세였다.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제문을 만들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제문은 대략 이러하였다.

 

"제(帝: 순임금)께서 오교(五敎: 오륜)를 베푸심에 부자유친(父子有親)이 맨 앞에 위하고 죄가 3천 가지로 나열되지만 불효의 죄가 가장 크옵니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살고 있는 이 누구인들 부모의 길러주시고 교육하여 주신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고 미련한 소자는 본지(本支)를 사승(嗣承)하여 이어나가야 하온데 이단(異端: 불교와 노장)에 침체(沈滯)하여 말년에서야 겨우 뉘우치고 있습니다.

이에 예전(禮典)을 상고하고 성경(聖經)을 탐색하여 추원(追遠)하는 큰 의례를 강구하여 정하고, 청빈한 생활을 참작하여 간략하지만, 정결하기를 힘쓰며 성의가 담긴 제수를 차리려 애썼습니다.

한무제(漢武帝)는 70세에야 비로소 전 승상(田丞相)의 ‘선술(仙術)을 멀리하라’는 말을 깨달았고, 원덕공(元德公)은 100세에야 허 노재(許魯齋)의 ‘인의강상(仁義綱常)’의 권고에 감화하였습니다."

 

드디어 안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삼았다. 많은 사람들이 벼슬하라고 권하였으나 시습은 끝내 지조를 굽히지 않고 방광(放曠)하기를 예와 같이 하였다.

달 밝은 밤을 만나면 이소경(離騷經) 외우기를 좋아하였고, 외우고 나면 반드시 통곡하였다.

혹 송사하는 곳에 들어가 사곡(邪曲)한 것을 정직한 것으로 만들어 궤변(詭辯)을 부려서 반드시 이겼으며, 판결 문안이 이루어지면 크게 웃고 파기하기도 하였다. 뛰노는 시동(市童)들과 어울려 놀며 취하여 길가에 드러눕기 일쑤였다. 하루는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이 저자를 지나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저놈을 멈추게 하라" 고 하였다.

 

창손은 듣지 못한 체 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위험한 일로 여기어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절교하였는데

다만 종실(宗室: 왕족)인 수천부정(秀川副正) 정은(貞恩)과 남 효온(南孝溫)ㆍ안응세(安應世)ㆍ홍유손(洪裕孫) 등의 무리 몇 사람만이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효온이 시습에게 묻기를,

"나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니, 시습은 대답하였다.

"창구멍으로 하늘을 엿보는 거지."

효온이,

"동봉 그대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니 시습은 말하였다.

"넓은 뜰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는 거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아내가 죽자,

다시 산으로 돌아가 두타(頭陀)(중이 머리를 깎아 눈썹과 같게 한 것)의 모습을 하였다.

강릉과 양양 지방에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였고 설악(雪嶽)ㆍ한계(寒溪)ㆍ청평(淸平) 등지의 산에 많이 있었다.

 

유자한(柳自漢)이 양양의 원으로 있으면서 예로써 대접하며 가업을 회복하여 세상에 나가기를 권하자 시습은 이를 서신으로 사절했는데, 거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장차 장참(長鑱: 긴 자루가 달린 가래. 농기구의 한 가지)을 만들어 영출(笭朮: 茯笭과 蒼朮)이나 캐겠소. 온 나무가 서리에 얼어붙거든 중유(仲由)의 온포(縕袍)를 손질하고, 온산에 백설이 쌓이거든 왕공(王恭)의 학창을 매만지려 합니다. 낙백(落魄)하여 세상에 사는 것보다는 소요(逍遙)하며 한 평생을 보내는 편이 나을 것이요,

천년 후에 나의 속뜻(素志)을 알아주기 바라는 바이요."

 

성종 24년(1493)에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병들어 누워 서거하니 향년 59세였다.

우연을 하여 화장하지 말고 절 옆에 임시로 빈소차림을 하여 놓아두라고 일렀다.

3년 후에 장사지내려고 빈소를 열어보니 안색이 살아있는 것 같았다.

중들은 놀라 탄식하며 모두 부처라고 하였다. 마침내 불교식에 의하여 다비(茶毗: 불교의 화장)하고 그 뼈를 취하여 부도(浮圖: 작은 탑)를 만들었다.

생존시에 손수 늙었을 때와 죽었을 때의 두 개의 화상을 그리고,

또 스스로 찬(贊)을 지어 절에 남겨 두었다.

[찬의 완역을 아래 포스트에서 보완함]

 

 

자화상 찬(自寫眞贊) 

 

俯視李賀

(부시이하) 이하(李賀)*도 내려 볼 만큼 

優於海東

(우어해동) 조선에서 최고라고들 했지.

騰名謾

(등명만예) 높은 명성과 헛된 칭찬 

於爾孰逢

(어이숙봉) 네게 어찌 걸맞겠는가. 

爾形至眇

(이형지묘) 네 형체는 지극히 작고 

爾言大閒

(이언대동) 네 언사는 너무도 오활하네.

宜爾置之

(의이치지) 네 몸을 두어야 할 곳은 

丘壑之中

(구학지중) 금오산 산골짝이 마땅하도다.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0323023002&wlog_tag3=naver#csidx5cb1eef2c190ffca8ad78f9df6ab14d

 

 

출처:

http://kydong77.tistory.com/18008?category=484903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지은 시문은 산실(散失)되어 십분의 일도 보존되지 못하였는데

이자(李자)ㆍ박상(朴祥)ㆍ윤춘년(尹春年) 등이 선후 수집해서 세상에 인쇄하여 내놓았다고 한다.

 

신 삼가 생각컨대, 사람이 천지의 기운을 받고 태어나는데, 청하고 탁하며 후하고 박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나면서 아는 생지(生知)와 배워서 아는 학지(學知)의 구별이 있으니, 이것은 의리(義理)를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시습과 같은 사람은 문(文)에 대하여 나면서부터 터득했으니 이는 문장에도 생지가 있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미친 짓을 하여 세상을 도피한 은미한 뜻은 가상하나 그렇다고 굳이 윤리의 유교를 포기하고 방탕하게 스스로 마음내키는 대로 한 것은 무엇입니까.

 

비록 빛을 감추고 그림자마저 숨기어 후세로 하여금 김시습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한다 한들 도대체 무엇이 답답할 것 있겠습니까. 그 인품을 상상해 보건대 재주가 타고난 기량(器量)의 밖으로 넘쳐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였던 것이니, 어찌 경청(輕淸)한 기(氣)를 받기는 풍족한데 후중(厚重)한 기를 받기는 부족하였던 이가 아니겠습니까. 비록 그러나 절의(節義)를 표방(標榜)하고 윤리를 심어 그 심지를 구극(究極)하여 보면 일월(日月)로 더불어 광채를 다툴 만합니다.

그러므로 그 기풍(氣風)을 접하면 나약(懦弱)한 사람도 감흥하여 일어서게 될 것이니 비록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한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애석한 일입니다! 시습의 영특한 자질을 가지고 학문과 실천을 갈고 닦으며 힘썼던들 그 이룩한 바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아! 바른말과 준엄한 논의로 기피(忌避)해야 할 것도 저촉하며, 공(公)ㆍ경(卿)을 매도(罵倒)해 조금도 서슴지 않았는데 그 당시에 그의 잘못을 들어 말한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선왕의 성대하신 덕과 높은 재상들의 넓은 도량은, 말세에 선비로 하여금 말을 공손하게 하도록 하는 것과 견주어 볼 때, 그 득실이 어떠하겠습니까. 아! 거룩합니다.』

 

【해설】

이이(李珥)가 지은 전(傳). 김시습에 대하여 지은 전이다.

작자의 문집인 <율곡집> 권14∼16 ‘잡저’에 실려 있는 그의 유일한 ‘전(傳)’이다.

율곡의 나이 47세 7월에 지은 것으로,

대부분 김시습에 대해 있는 사실을 그대로 기술하였으며,

다만 끝에 저자의 의견을 덧붙여 절의와 윤기를 내세워 백세지사(百世之師)로 찬양하여 그의 억울한 울분의 넋을 달래주고자 하였다.

 

<김시습전>의 내용은 김시습의 선세가계(先世家系)에서 시작하여, 어린 시절 학문을 처음 익히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화와 단종의 손양(遜讓)과 세조의 즉위에서 비롯된 김시습의 행적이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특히, 불문(佛門)에 의탁하여 방외(方外)에 놀았으나 그의 중심은 언제나 유자(儒者)의 위치에 머물렀음을 지적하였다. <김시습전> 중에서 학문과 문학적 재능에 대하여 세밀히 기록하는 과정에서 더러 세상에 전해지는 이야기 등도 수록하고 있다.

 

그 중에서 김수온(金守溫)ㆍ서거정(徐居正)ㆍ남효온(南孝溫)ㆍ정창손(鄭昌孫)ㆍ유자한(柳自漢)과의 일화는 대체로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말년에 그가 안씨(安氏)를 취하여 가정을 이루었던 사실과 오늘날 이자(李秕)ㆍ박상(朴祥)ㆍ윤춘년(尹春年)에 의하여 그의 시문집이 전하게 된 내력을 밝혔다.

말미에는 이이 자신의 김시습에 대한 평을 기록하고 있다.

 

<김시습전>은 전통적인 전의 양식에 충실하여 사실을 기록하는 데에 치중하였다.

따라서 일화로 남는 김시습의 행적 정리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설화로 유전하는 그의 일생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위하여 엄격한 비평적 안목에 의하여 그를,

 

“재주가 그릇(器) 밖으로 넘쳐흘러서 스스로 수습할 수 없으리만큼 되었으니,

그가 받은 기운이 경청(輕淸: 곡조 따위가 맑고 가벼움)은 지나치고 후중(厚重)은 모자라게 마련된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義)를 세우고 윤기(倫紀: 윤리와 기강)를 붙들어서 그의 뜻은 일월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풍성(風聲)을 듣는 사람들은 겁장이도 용동하는 것을 보면 가히 백세의 스승되기에 남음이 있다.”고 한 말은 그의 내면세계를 중심으로 한 평가일 것이다.

 

또한, 이이는 김시습이 영특하고 예리한 자질로써 학문에 전념하여 공과 실천을 쌓았다면 그 업적은 한이 없었을 것이라면서 애석해하였다. 불우한 삶을 영위하였던 한 인물에 대한 올바른 기록을 전이라는 양식을 빌려 쓴 하나의 전형이다.

 

김시습 영정[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산 무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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