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쓰리(鐘約) 계곡에서의 족욕(足浴)

협궤열차로 왕복 이동,열차를 타고 계곡을 따라 이동하며 숲속 경치를 감상하고 맑은 공기를 호흡하는한나절 코스였다. 도회인들을 위한 상품으로 보였다. 가네쓰리 계곡물은 급류로 흘렀지만 냇가엔 족욕을 즐길 수 있는 온천수가 솟구쳤다.



















겐로쿠엔 (兼六園 ,겐로쿠엔) 정원

일본 3대정원 중의 하나로 가나자와의 대표적인 명소로 약 3만평의 넓은 부지를 자랑하는 아름다운 정원이다. 인공이 가해지지 않으면 정원이 안되는 줄 아는 사람들, 인공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일본의 한 공동묘지 구역에서 재일 한인들에 의해 기려지는 윤봉길 의사의 자취를 찾았다. 암장 장소 표지석과 기념비에 참배했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사내 대장부가 집을 나가면 뜻을 이루지 않고서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그의 장렬한 행적에 그저 숙연한 마음으로 부끄러움을 곱씹을 따름이었다. 그의 행적을 보며 실천을 앞세우는 한문교육의 우수성을 실감한다. 한말 열강들이 발호할 때도 의병을 일으키고 나라와 목숨을 함께 한 이들은 그 고리타분하다고 비난받는 한학자들이었다. 말만 앞세우는 서양 교육을 받은 이들, 일제식민지 시대에 활개치던 사람들은 서둘러 망명길에 앞장섰다. 말만 전인교육이지 지식의 전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한국 교육의 현주소 아닌가?

아울러 이참에 농촌 마을의 입구마다 마련된 공동묘지도 소개한다. 9월 초순인데 벌써 나락이 익은논이 보이는 사진 이하는 마을의 공동묘지다. 그 위의 사진들은 도시인들의 공동묘지일 것이다. 농촌의 공동묘지는 그모습이 너무나 이채로웠다. 논 한 뙤기를 떼어 마을에 살던 사람들의 유해를 안장하는 방식이었다. 국민 대다수가 불교신자이니 화장한 유해일 것이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수구초심 (首丘初心)이라 하여 고향에 묻히기를 소원하지만 일본인들은 죽어서도 그 마을을 떠나지 않고 후손들과 함께 한 마을에 거주하는 셈이다.

살아서 남을 위해 한 일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죽어서는 산자락 하나를 차지하고, 큰 비석과돌로 만든 제상[상석]에 망주석 [ 望柱石 ] 까지 갖춘 무덤을 목도한다면 일본인들은 아마도 국가가 기리는 영웅으로 알지 않을까 걱정된다.

아래창에서 윤봉길 의사의 출생과 의거 이후의 사적을 발췌하였다.

http://kin.naver.com/open100/db_detail.php?d1id=11&dir_id=110101&eid=I6X+HYzWfWEOlfKtkeY7MhDL/TZ06ldo&qb=wLG6wLHmwMe75w==&pid=fuAXtdoQsCVssbwDK/Ksss--405591&sid=SCiuBXJbKEgAAGwlHKA


윤봉길의사 연보 중 출생과 의거 부분 발췌


1908년 6월 21일 (음력 5월 23일) 오후 8시 경,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의 일명' 목바리'라고도 하는 마을 178번지에서 5남 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윤 황 공은 평범한 농부였고, 어머니 김원상님은 친정에서 [소학]등의 한학을 배웠다. 윤의사를 낳을 당시 20세였다. 윤의사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고려때 여진 정벌에 큰 공을 세운 윤 관(尹瓘)장군의 27대손이다. 본명은 우의(禹儀)였고, 이밖에 회의도 썼으며, 자는 용기(鏞起)였다. '봉길'(奉吉)은 별명으로 불리웠으며,아로는'매헌(梅軒)'이라하였다.


1932년(25세)

4월 29일, 한인 교포인 김해산(金海山)집에서 백범과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친 다음, 조국이 있는 방향을 향해 무릎을 끓고 기도한다. 윤의사는 새로 장만했던 시계를 백범의 헌시계와 교환 후, 물통형의 폭탄은 오른쪽 어깨로부터 왼쪽 옆구리에 메고, 도시락 모양의 것은 준비해 두었던 모슬린 보자기에 싸서 들고 홍구 공원으로 출발한다.

7시 40분 경, 윤의사는 축제 분위기에 들뜬 공원에 입장하는데 성공하여 연단 뒤편에 자리잡는다. 11시에 관병식(觀兵式)이 끝난 수 잠시 휴식시간이 있었고 식을 마친 군대는 장외를 나갔다. 11시 반부터 예정대로 축하식이 시작되었다. 흐렸던 날씨는 식이 시작되면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국가의 합창이 거의 끝나가며 장엄한 기운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별안간 굉연한 폭음이 장내를 진동하고 섬광과 함께 식단은 허연 연기로 가리워졌다. 이때가 11시 40분, 우리 시간으로는 12시 40분 이었다. 윤의사는 기념식전의 마무리 단계로 일본국가의 제창이 끝날 무렵, 확성기의 성능이 나빠 수선하는 어수선한 틈을 타서 손에 들었던 도시락형 폭탄을 땅에 놓고 어깨에 걸었던 물통형 폭탄을 내려 발화용 끈을 잡아 당기는 동시에 식단 가까이 돌진했고 왼편 뒤쪽에서 단상을 향해 이것을 던져 연단 중앙에 명중시켰던 것이다.

상해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따와 일본의 상해 파견군 사령관 시리까와 대장 등을 살해하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에우다 주중공사 시게미스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연단의 장면을 확인하고 자폭하기 위해 남은 도시락 모양의 폭탄을 집을 겨를도 없이 윤의사는 달려드는 군중과 일본 경찰의 폭행으로 현장에서 순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체포된다. 윤의사의 의거 소식이 상해 시가를 발칵 뒤집은 것은 그날 오후 부터였다. 처음에는 사건의 진상을 중국인의 소행이라는 등 제멋대로 보도하던 신문들도 ‘조선인 윤봉길’로 보도하기 시작했고 국내에서는 [동아일보]가 재빨리 호회로 윤의사의 의거를 알렸다(4월 30일). 윤의사의 의거는 세계를 놀라게 했고 아직도 한국인이 살아 있음을 만방에 알렸다.

윤의사는 4월 29일, 30일 양일간에 걸친 무자비한 고문에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이기며 결코 임시정부 요인과의 관련은 입밖에 내지 않았다. 윤의사는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다. 이자리에서 윤의사는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는 상해에 왔다"고 떳떳이 주장한다. 이 때의 내용은 그후 일본에서 찾아낸 '사형집행시말서'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사형 확정 후 윤의사의 유서가 나돌자 헌병대에서 다시 윤의사를 호출한다. 그자리에서 윤의사는 자신이 쓴 유서를 확인해 주며, "현재는 우리나가가 힘이 약하지만 세계 대세에 의해 반드시 우리는 독립한다. 일본은 지금 열강이지만 시든 나뭇잎 같이 항복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11월 18일, 삼엄한 경비 속에 대양완(大洋丸, 우편선)으로 일본에 호송되어 이틀 후 오사카 위수(衛戍)형문소에 수감된다.

12월 18일, 가나자와 형무소에 육군형무소에 이감된다.

12월 19일, 아침 7시 40분, 가나자와 교외 미고우시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26발의 탄환을 맞고 순국하였다. 순국직전 유언은 "남아로서 당연히 할 일은 다했으니 만족하게 느낄 따름이며, 아무런 미련도 없다. 다만 어린 혈육들이 측은하다"였다. 유해는 쓰레기하치장에 버려지는 수모를 겪는다.윤의사의 부친은 손가락을 잘라 유골이나마 보내 줄 것을 탄원하는 내용의 혈서를 제출했으나 유골은 돌아 오지 않고 윤의사의 유품이 돌아 온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중장을 수여 받았고, 이같은 윤봉길의사가 이룩해 놓은 위업과 유덕을 기리고자 1965년 고택후원에 의거 기념탑이 건립되었고 1968년 의사의 존영을 모신 충의사가 창건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그동안 반역의 집으로 감시를 받아오던 윤의사의 집은 의사댁으로 일컬어지기 시작한다. 8월 16일, 덕산에서 조인원 외 3백명이 회의를 열고 윤봉길 의사 유해봉환위원회를 발촉한다.(위원장 조인원, 총무 정인영)

1946년 5월 초, 제일동포 서상한·박 열·이강운 등이 윤의사 유해를 찾게 된다. 사흘동안 이곳 저곳을 팠으나 발견하지 못했는데 윤의사 사형 당시 일본국군묘지 관리인 부인이던 노파(80여세)가 일러주는 쓰레기 하치장을 파서 가매장된 윤의사의 관, 십자가 형틀과 기타 유품을 순국 14년만에 찾아낸다.

5월 중순, 윤의사를 비롯한 이봉창·백정기 등 3열사의 유해가 부산에 도착한다. 부산 동래국민학교에 빈소가 마련되었다 5월21일,부산 대신동 공설운동장에서 3열사 추도실이 엄수된다. 정부에서 마련한 임시 특급열차 관으로 서울에 도착한 유해는 태고사(현 조계사)에 봉안되고 장례 준비위원회가 구성된다. 7월7일, 10여만의 추도인파가 참석한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이봉창·백정기 등 3열사의 유해가 처음 국민장으로 엄수, 효창공원 묘역에 안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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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들을 실어나르던 모노레일은 40도는 넘어 보이는 급경사에도 안전했다. 케이블카로 바꿔타고 구로베협곡에 이른다. 수력발전소를 지나면 협궤열차를 타고 도야마산을 하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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