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amu.wiki/w/%ED%99%A9%ED%9D%AC%28%EC%A1%B0%EC%84%A0%29

 

황희(조선) - 나무위키

君登靑雲去 그대는 청운에 올라 떠나가고子望靑山歸 나는 청산을 향해 돌아가네雲山從此別 청운과 청산이 이에 갈라서니淚濕碧羅衣 눈물이 벽라의를 적시는구나정건천 황희가 조선 개창에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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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의 문신 및 정치가조선의 정승이다.

조선에서 가장 영의정을 오래 역임한 사람으로 영의정 18년, 좌의정 5년, 우의정 1년 합쳐서 총 24년을 정승의 자리에 있었다. 이렇게 재상을 오래 한 것은 누구도 의도한 바가 아니었는데 왕이 원하기도 했지만 본인이 뜻밖에 장수했기 때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DMs_7PMW_rU

 

 

<룡비어천가>의 해동 六龍 : 이안사-목조, 이행리-익조, 이춘-도조, 이자춘-환조/ 태조, 태종

2대왕 정조는 누락. 태조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대표함. 太字 시호(세종 생각)

*  선조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여진인이 살고 있던 남경(南京: 간도지방)에 들어가 원나라의 지방관이 되었고,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李行里), 손자 이춘(李椿), 증손 이자춘이 대대로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서 벼슬했다.  천호(千戶)  벼슬이란 필요시 천명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TrDXTflOc0Q

 

 

https://www.youtube.com/watch?v=mLAJVskb4yA

 

 

 

https://www.youtube.com/watch?v=gLlSjLuLhD8

 

https://kydong77.tistory.com/21168

 

준경묘(이태조 5대조) 영경묘(그 부인)/ 삼척 활기리

https://www.youtube.com/watch?v=Sy6VH5SpKOQ https://kydong77.tistory.com/19420 삼척 준경묘(濬慶墓)와 적송/ 道의 10가지 특징 https://www.youtube.com/watch?v=BLlVLJlQ64Y 모든 가치관의 기준이나 세상에 대한 비판은 사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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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ydong77.tistory.com/19420

 

삼척 준경묘(濬慶墓)와 적송/ 道의 10가지 특징

https://www.youtube.com/watch?v=BLlVLJlQ64Y 모든 가치관의 기준이나 세상에 대한 비판은 사실성에 바탕합니다. 허구로 규정짓는 소설조차도 그 바탕은 현실이고 사실성입니다. 그래서 나는 자연에 바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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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의 10가지 특징

https://kydong77.tistory.com/18655?category=883650

 

任法融, 道德經釋義/ '道'의 十種 특징

/164 釋「道」的十大特徵 道的特徵頗多,其中有十個主要方面,現分述於下: 一、虛無 虛無是大道的本體常態,一切形象世界都是從虛無中化生出來的,最後仍歸於虛無。 「實」、「有」只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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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虛無    二、自然    三、清靜    四、無為    五、純粹

六、素樸    七、平易    八、恬淡     九、柔弱    十、不爭

*념담허무(恬淡虛無) - 염담(恬淡)이 말하는 것은 마음의 평안함과 사적인 욕망을 줄이라는 것이고, 허무(虛無)는 더 높은 단계로 마음이 순수함을 회복하여 불순물이 제거된 단계를 말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Og-ag6_Mb7g&t=252s

 

https://namu.wiki/w/%EC%A0%84%EC%A3%BC%20%EC%9D%B4%EC%94%A8

 

전주 이씨 - 나무위키

시조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말기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이한(李翰)이다. '재미있는 성씨 이야기'라는 출처에 의하면 이한의 조상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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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선원본계 종주(조선 왕조) 참조

조선이 건국되기 이전의 이성계 직계 가문은 전주 이씨 종가가 아니었다. 종가는 장남의 직계 후손인데 이성계의 직계 조상은 이한의 장남 후손 즉 종가가 아니었다. 심지어 이성계조차 위로 이복 형 이원계(李元桂)가 있었다. 그러다가 이성계 가문이 조선을 건국하고 왕가(王家)가 되면서 종가, 종주 자리를 가져와서 현재 전주 이씨 종주는 대한제국 황제위 요구자 이원(李源)이다.
    • 1대 목조 이안사(1255년 ~ 1274년) - 시조 17세손
    • 2대 익조 이행리(1274년 ~ ?) - 시조 18세손
    • 3대 도조 이춘(? ~ 1342년) - 시조 19세손
    • 4대 완창대군 이자흥(1342년 ~ 1342년) - 시조 20세손
    • 5대 환조 이자춘(1342년 ~ 1361년) - 시조 20세손
    • 6대 태조 이단(1361년 ~ 1398년) - 시조 21세손
    • 7대 정종 이경(1398년 ~ 1400년) - 시조 22세손
    • 8대 태종 이방원(1400년 ~ 1418년) - 시조 22세손
    • 9대 세종 이도(1418년 ~ 1450년) - 시조 23세손
    • 10대 문종 이향(1450년 ~ 1452년) - 시조 24세손
    • 11대 단종 이홍위 (1452년 ~ 1455년) - 시조 25세손
    • 12대 세조 이유(1455년 ~ 1468년) - 시조 24세손
    • 13대 덕종 이장(추존) - 시조 25세손
    • 14대 예종 이황(1468년 ~ 1469년) - 시조 25세손
    • 15대 성종 이혈(1469년 ~ 1495년) - 시조 26세손
    • 16대 연산군 이융(1495년 ~ 1506년) - 시조 27세손
    • 17대 중종 이역(1506년 ~ 1544년) - 시조 27세손
    • 18대 인종 이호(1544년 ~ 1545년) - 시조 28세손
    • 19대 명종 이환(1545년 ~ 1567년) - 시조 28세손
    • 20대 선조 이연(1567년 ~ 1608년) - 시조 29세손
    • 21대 광해군 이혼(1608년 ~ 1623년) - 시조 30세손
    • 22대 원종 이부 (추존) - 시조 30세손
    • 23대 인조 이종(1623년 ~ 1649년) - 시조 31세손
    • 24대 효종 이호(1649년 ~ 1659년) - 시조 32세손
    • 25대 현종 이연(1659년 ~ 1674년) - 시조 33세손
    • 26대 숙종 이순(1674년 ~ 1720년) - 시조 34세손
    • 27대 경종 이운(1720년 ~ 1724년) - 시조 35세손
    • 28대 영조 이금(1724년 ~ 1776년) - 시조 35세손
    • 29대 진종 이행(추존) - 시조 36세손
    • 30대 장조 이훤(추존) - 시조 36세손
    • 31대 정조 이성(1776년 ~ 1800년) - 시조 37세손
    • 32대 순조 이공(1800년 ~ 1834년) - 시조 38세손
    • 33대 문조 이영(추존) - 시조 39세손
    • 34대 헌종 이환(1834년 ~ 1849년) - 시조 40세손
    • 35대 철종 이변(1849년 ~ 1864년) - 시조 39세손
    • 36대 고종 이형(1864년 ~ 1907년) - 시조 40세손
    • 37대 순종 이척(1907년 ~ 1926년) - 시조 41세손
  • 순종 사후
    • 38대 의민황태자 이은(1926년 ~ 1970년) - 시조 41세손
    • 39대 회은황세손 이구(1970년 ~ 2005년) - 시조 42세손
    • 40대 황사손 이원(2005년 ~ 현재) - 시조 43세손

 

https://ko.wikipedia.org/wiki/%EC%A0%84%EC%A3%BC_%EC%9D%B4%EC%94%A8

 

전주 이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전주 이씨全州李氏전주 이씨의 종문나라한국관향전라북도 전주시시조이한(李翰)집성촌전라북도 전주시·부안군전라남도 나주시함경북도 길주군함경남도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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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조
  • 익조
  • 도조
  • 환조
  • 태조
    • 진안대군파(鎭安大君派) 이방우(李芳雨)
    • 익안대군(益安大君派) 이방의(李芳毅)
    • 회안대군파(懷安大君派) 이방간(李芳幹)
    • 의안대군파(宜安大君派) 이방석(李芳碩)
    •  
    • 이성계는 고려 말의 홍건적의 난과 왜구 격퇴에서 무공을 세워 유명해졌으며,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정치적·군사적 실권을 한 손에 쥐었다. 신흥 정치세력과 연계하여 고려를 대체하는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하였다. 통상적으로는 묘호를 따라서 태조라고 부른다. 1392년부터 1398년까지 7년간 재위하였으며 왕자의 난을 계기로 제2대 임금인 정종에게 양위하였다.

 

조선 개국

정몽주 등을 제거함으로써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건하게 하여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92년 이성계가 태조로 등극함에 따라 이방원은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6]

원래 장자로 왕세자를 세워야 하는 것이 원칙이나, 조선 개국의 중요한 논리 중 하나였던 우창비왕설에 연관된 태조의 장남인 진안대군 방우를 제치고, 신하들은 나이와 공로를 감안해 신의왕후 소생 실질적 장남 영안군 이방과 또는 이방원을 세자로 세우라고 주청을 올렸다. 개국의 공로를 따지면 이방원이 태조의 아들 중 가장 많은 공을 세웠으나, 당시 "왕권(王權)보다 신권(臣權)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국정이 안정된다"라는 신권을 주창하던 정도전은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 신권을 주장하는 자기들을 제거할까 봐 두려워 결국 왕세자로 태조의 막내아들이자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의안대군 방석을 선택하였다.[7]

1394년 그는 전직 몽골 관료였으며 조선의 외교관이었던 조반 등을 따라 연경과 남경을 방문하여 주원장을 대면하였고, 후의 영락제와도 만났다.[8]

왕자의 난

제1차 왕자의 난

태조 이성계의 형인 이원계의 아들이자 이방원의 사촌 형으로 이방원을 지지하였다.

세자 자리를 두고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의안대군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자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이에 크게 불만을 나타냈으며 그것은 누구보다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이방원도 마찬가지였다. 태조는 개국 이후 군권분장정책을 통해 영안군 이방과, 정안군 이방원, 무안군 이방번, 세자의 매제 흥안군 등에게 절제사 직임을 수여해 군권을 분할했으며, 이것은 종친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는 원칙에 위배되고 군권을 국왕의 통제 아래에 놓는 일원적 지배 체제에 위배되었으므로, 개국 초부터 태조의 지시 아래 정도전은 사병 혁파를 추진하고 있었다. 이에 반발한 이방원은 1398년에 부왕 태조가 와병 중임을 틈타 아내 민씨의 후원과 이숙번·하륜·조영무 등 사병 혁파 반대 세력, 이화·사촌 이천우·처남 민무구·민무질 등 종친, 외척과 결탁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의 개국공신들과 이복 동생인 무안대군 방번·세자 방석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안 가 태조는 권력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영안군 방과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떠났다. 왕위를 물려받은 태조의 둘째 아들 방과가 바로 조선의 제2대 국왕 정종이다.[6] 이때 아버지 이성계의 서형인 이원계의 아들들이 그를 지지하고 정안군 이방원이 국정을 장악한다.

제2차 왕자의 난

 제2차 왕자의 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하지만 형제들 간에 다시 한번 분란이 발생하는데, 이방원의 넷째 형인 회안대군 방간이 박포의 꼬드김에 넘어가 왕위에 오를 목적으로 1400년에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때에도 이화·이천우 등이 그를 도왔고, 상대적으로 우수한 장수들과 병사들을 가지고 있던 이방원은 쉽게 이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다. 이후 박포 등을 처형하고 회안대군 부자를 황해도 토산으로 귀양보냈다. 이때에도 회안대군을 죽여야 된다는 여론이 나왔으나 그를 유배시키는 선에서 불문에 부쳤다.

그해 음력 2월정종으로부터 왕세자[9]로 책봉되었고, 책봉된 지 9개월 만에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10] 이후 1401년 음력 6월 12일, 명나라로부터 권지고려국사가 아닌 조선 국왕으로 책봉받았다.[11]

 

https://m.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010010600011#c2b

 

'18남 4녀' 세종의 자식들…공주도 왕자도 똑똑했다

흔히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재위 1400~1418)은 왕권을 강화하고 신생국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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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조
  • 이하 생략. 위 포스트 원문 참조.
 

태조 (조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태조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탁구 선수에 대해서는 이태조 (탁구 선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한제국 추존황제 국보 《태조 어진》 제1대 조선 국왕 재위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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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MO1BzAjgaM

 

https://www.yna.co.kr/view/AKR20150422059100005

 

단종문화제 계기로 본 조선왕들의 자녀수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비운의 단종(재위 1452-1455년). 고작 열여섯 해를 살고 유배지나 다름없는 강원 산간의 영월 땅에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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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은 무려 22명의 자녀를 뒀다. 그중 첫번째 왕비인 소헌왕후 자녀만도 8남 2녀에 이른다. 두 번째 왕비 등이 낳은 아들은 모두 10명. 세종의 자녀는 이들을 포함해 모두 18남 4녀였다. 

https://namu.wiki/w/%EC%84%B1%EC%A2%85(%EC%A1%B0%EC%84%A0)/%EC%83%9D%EC%95%A0

 

성종(조선)/생애 - 나무위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열무(閱武)하고, 드디어 경복궁(景福宮)에 나아가서 삼전(三殿)에 문안하고 궁으로 돌아왔다. 영돈녕(領敦寧) 이상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대전(臺諫)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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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은 38세라는 이른 나이에 승하했는데, 그 나이에 28명이나 되는 자식을 얻었다는 건 시대적 상황을 감안한다 해도 이 분야의 권위자라 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 거느린 후궁의 숫자를 보면 성종은 12명, 태종은 12명, 세종은 6명, 중종은 10명이다. 성종 때는 일종의 교조주의(敎條主義)가 팽배해, 서예(書), 활쏘기(射) 같은 육예(六藝)[64]도 나라를 올바로 다스리는 데에 방해된다며 대간들이 상소를 올렸을 정도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48P99pq2zzI

 

 

https://www.youtube.com/watch?v=o3yLNXAVI4c

 

 

시편 119:105
당신의 말씀은 나를 안내하는 등불이며 내 길을 비춰 주는 빛입니다.
Your word is a lamp to my feet and a light for my path.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https://www.youtube.com/watch?v=BLhpG8_TwV8

 

 

https://ko.wikipedia.org/wiki/%EC%A0%84%EB%8F%99%EC%84%B1%EB%8B%B9

 

전동성당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전동성당(殿洞聖堂)은 전라북도 전주시에 위치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이다. 1981년 9월 25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88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전주시 안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성당이자, 호남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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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성당(殿洞聖堂)은 전라북도 전주시에 위치한 로마 가톨릭교회 성당이다. 1981년 9월 25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88호로 지정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을 선언했다. 윤지충(1759~ 1791)유교식 제사를 거부하다 처음으로 순교한 조선후기 천주교인이다.

시복미사 강론에서 교황은 "오늘 우리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안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승리를 경축합니다. 이제 그분들의 이름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이름 옆에 나란히 함께 놓이게 되었다“며 ”이는 한국의 천주교인 여러분이 모두 하느님께서 이 땅에 이룩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며, 여러분의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과 애덕의 유산을 보화로 잘 간직하여 지켜나가기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https://ko.wikipedia.org/wiki/%EA%B6%8C%EC%83%81%EC%97%B0

 

권상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권상연(權尙然, 1751년 ~ 1791년 12월 8일)은 조선의 천주교 순교자이다. 세례명은 야고보이다. 고모상을 당하여 내종형제(4촌)인 윤지충과 함께 신주를 없애고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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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연(權尙然, 1751년 ~ 1791년 12월 8일)은 조선의 천주교 순교자이다. 세례명은 야고보이다. 고모상을 당하여 내종형제(4촌)인 윤지충과 함께 신주를 없애고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렀다는 죄목으로 구금되어 순교하였다. 이 두 사람의 순교 사건을 가리켜 '신해박해' 또는 '진산사건'이라고 한다. 2021년 9월 1일에 천주교 전주교구는 2021년 3월 초남이성지의 바우배기에서 성역화 작업을 하던 중 권상연의 유해가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1][2]

  1.  양정우 (2021년 9월 1일).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 유해 사후 200여 년만에 발견. 연합뉴스. 2021년 9월 1일에 확인함.
  2.  김종목 (2021년 9월 1일). “윤지충과 권상연, 윤지헌 유해 230여 년만에 찾았다…참수형과 능지처참의 흔적 확인. 경향신문. 2021년 9월 1일에 확인함.

 

https://www.kocis.go.kr/koreanet/view.do?seq=2872

 

교황,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선언

“막대한 부요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들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순교자들의 모범은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

www.kocis.go.kr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6806

 

시복시성운동(諡福諡聖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시복시성운동은 시복운동과 시성운동을 합친 용어이다. 신앙의 모범을 살다가 죽은 인물, 혹은 순교한 인물에게 ‘복자(福者)’라는 칭호를 수여하여 특정 교구나 지역, 국가, 혹은 수도단체 내에서 공경할 수 있도록 교황이 선언하는 행위를 시복이라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0KlpBqgcEII

 

 

https://kydong77.tistory.com/22029

 

백만 송이 장미, 전주수목원 장미정원/ 러시아 민요 &슈베르트, 들장미

https://www.youtube.com/watch?v=36MXKP3uLB0 https://www.youtube.com/watch?v=Rng4BnTpCuI 러시아 민요-백만송이 장미(원곡) https://www.youtube.com/watch?v=ESe8Ya7LAOM https://www.youtube.com/watch?v=0KlpBqgcEII 2022. 5. 19. 01:44 https://kydong77

kydong77.tistory.com

 

https://www.youtube.com/watch?v=ESe8Ya7LAOM

 

장미와 가시

ㅡ김승희


눈먼 손으로 나의 삶을 만져 보았네.
그건 가시 투성이었어

가시 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장미 꽃이 피어난다 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수 있을까
장미 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요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 투성이를 지나
장미 꽃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송이의 장미 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 주오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슈베르트, 들장미

https://www.youtube.com/watch?v=aUtf2ZHDUEA

 

베르너, 들장미

https://www.youtube.com/watch?v=s_-hrFfW3NE 

 

https://www.youtube.com/watch?v=5d4wBXMHhSU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80586

 

경기전(慶基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조선시대에는 국조인 태조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진전을 서울에는 문소전(文昭殿) 한 곳, 외방에는 전주의 경기전, 영흥의 준원전,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평양의 영숭전(永崇殿), 개성의 목청전(穆淸殿) 등 다섯 곳에 두고 유지하였다. 조선 왕실의 관향인 전주에 있던 태조의 영전에 경기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1442년(세종 24)의 일이다. 이듬해에는 새로 태조의 어진을 경기전에 봉안하였고 제위전을 두어 제사의 비용으로 쓸 수 있게 하였다.

 

제1장

한문

海東六龍飛 莫非天所扶 古聖同符

해동육룡비 막비천소부 고성동부

중세국어

海東 六龍이〮 ᄂᆞᄅᆞ샤〯 일〯마〯다 天福이〮시니〮 古聖이〮 同符ᄒᆞ〮시니〮

현대어

해동(우리나라)의 여섯 마리 용이 나시어(=왕이 되시어)

(하는) 일마다 하늘의 복이니 옛 성인들과 같으니(이다)

* 목조는  전주 출신,  익조, 도조, 환조, 이성계는 함흥태생이니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9509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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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비어천가」는 조선 세종 때 선조인 목조에서 태종에 이르는 여섯 대의 행적을 노래한 서사시이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9033

 

태조(太祖)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재위 1392∼1398.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성계(李成桂)이다. 처음 자는 중결(仲潔)이다. 호는 송헌(松軒) · 송헌거사(松軒居士)이다. 등극 후에 이름을 이단(李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화령부(和寧府: 영흥)에서 태어났다.

이자춘(李子春)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최한기(崔閑奇)의 딸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다.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담대했다. 특히 활솜씨가 뛰어났다.

그의 선조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여진인이 살고 있던 남경(南京: 간도지방)에 들어가 원나라의 지방관이 된 뒤부터 차차 그 지방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李行里), 손자 이춘(李椿)이 대대로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 벼슬했다.

이자춘도 원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의 천호로 있었다. 이자춘은 1356년(공민왕 5)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 내응해 원나라 세력을 축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고려의 벼슬을 받았다. 이자춘은 1361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임명되어 동북면(東北面) 지방의 실력자가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wVLMz-Xfdw

 

 

이안사: 송도> 전주> 이자춘 삼척으로 이주> 이성계는 홍건적과 원나라 자적장을 물리침> 원나라 공격을 지시한 최영과 공민왕을 거역하고 왕위를 차지함> 조선 건국

해동6룡은 목조 익조 도조 환조 4祖에 세종의 조부 태조와 父 태종을 말함.

https://www.youtube.com/watch?v=gLlSjLuLhD8

 

https://namu.wiki/w/%EC%9C%84%ED%99%94%EB%8F%84%20%ED%9A%8C%EA%B5%B0

 

위화도 회군 - 나무위키

이 무렵 명나라와 고려의 관계는 비교적 우호적인 편이었으나, 공민왕 말기로 갈수록 점점 틈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제32대 우왕 시기에 정점을 찍었는데, 명나라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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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명나라 공격에 대한 생각이 있었던 최영은 그 이후부터는 요동 공격을 주장하는 세력의 핵심이 되어, 인척 관계를 맺은 우왕과 더불어 요동 원정을 논의했다. 우왕은 요동 공격에 대한 자문을 최영에게 구했고, 최영은 이에 대해 찬성했다. 즉 요동 공격이라는 정책의 핵심은 바로 최영이었다.

이 때문에 요동 공격을 반대하는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이 직접 최영의 집에 찾아가 요동 공격을 만류했지만, 이미 결심을 내린 최영은 이자송을 곤장으로 두들겨 패서 유배를 보낸 다음에 곧 죽여버렸다. 

사냥을 핑계로 이동하며 요동 공격 준비에 착수하던 우왕은 지금의 황해북도 봉산군인 봉주(鳳州)에 도착했을 무렵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요동 정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동안 우왕은 기본적으로 모든 일을 최영하고만 단 둘이서 논의하곤 했었으나, 이번 요동 정벌은 예외적으로 처음, 이성계에게도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워낙에 중대한 사안인만큼 이성계가 고려 말 명장으로 이름이 높았고, 임견미 등을 소탕하는데 최영과 더불어 핵심 인물이었던 만큼 우왕이 이성계에게도 동의를 구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요양을 치는데 힘을 써주라는 우왕의 말을 들은 이성계는 여기서 우왕에게 명백한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이것이 바로 한국사에서 유명한 <사불가론>(四不可論)이다.
(중략)
"만일 명나라 영토를 침범함으로써 천자로부터 벌을 받는다면 즉각 나라와 백성들에게 참화가 닥칠 것이다. 내가 이치를 들어서 회군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주상께서는 잘 살피지 않으시고 최영 또한 노쇠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제는 그대들과 함께 직접 주상을 뵙고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자세히 아뢰고 측근의 악인들을 제거해 백성들을 안정시켜야만 한다.
고려사》 우왕 14년 5월

이에 장수들이 동의함으로써, 원정군의 회군이 결정되었다.

일단 회군이 결정되자, 원정군은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진군을 개시했다. 군대가 1일 30리를 간다해도 12km인데, 당시 원정군의 회군 루트에는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 예성강 등이 있어 도하 작전에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면 더욱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원정군의 총 숫자는 50,000명으로, 빠르게 움직이기에는 숫자가 많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정군은 400km를 10일만에 주파하는 괴력을 보였다. 내키지 않은 채로 북상하던 원정군이 서경에서 위화도까지 가는데 20일이 걸렸음을 고려하면, 회군 당시에는 두 배 먼 거리를 오히려 절반의 시일만에 남하했던 것이다.

12. 결과와 영향

이성계는 잠시 동안 허수아비 왕으로 어린 창왕(제33대)을 앉혔다가 공양왕(제34대)으로 갈아치운 뒤, 결국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렇게 역성혁명이 성공해 5백 년 고려 왕조가 멸망했고, 새로운 5백 년 왕조인 조선이 건국되었다.

이성계 이전에도 무신들이 고려의 권력을 쥐고 뒤흔든 사례가 없지는 않았지만, 이성계는 이전까지의 무신들과는 다르게 명망과 신흥 유신들의 지지,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모두 결합한 초유의 군벌이었다. 그 후 위화도 회군에서 함께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조민수의 도전과 정몽주(鄭夢周)의 마지막 저항이 있었으나 자신의 실력 뿐만 아니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대부들(정도전조준남은 등)의 지지를 얻은 이성계는 이 모든 도전을 이겨내면서 새로운 왕조를 개국하기에 필요한 명분과 입지를 충분히 갖추었다.

또한, 명나라가 흥하고 북원이 망해가는 역사적인 전환기에서 나올 뻔한 고려의 마지막 북진 정책인 제2차 요동정벌이 엮여 있어, 한국사 전체를 놓고 봐도 가장 극적인 사건이자 흥미진진한 논쟁 거리(만약 요동 정벌을 그대로 강행했다면?)로 회자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요동 정벌을 무산시키면서 권력을 차지하여 새 왕조를 창건한 이성계는 훗날 자신이 국왕으로 재위했던 때에 다시 요동 정벌을 추진했지만, 오히려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일으킨 반란으로 권력을 잃고 말았다. 한국사에서 요동 정벌은 '독이 든 성배'였던 셈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ShmaxRu072M

 

태조 어진전

https://www.youtube.com/watch?v=w78YLAry9zA

 

 

https://www.youtube.com/watch?v=ClgLFjQ9ngo

 

 

https://www.youtube.com/watch?v=zHYuy8lprHI

 

 

전주 풍패지관(全州 豊沛之館)

https://ko.wikipedia.org/wiki/%EC%A0%84%EC%A3%BC_%ED%92%8D%ED%8C%A8%EC%A7%80%EA%B4%80

 

전주 풍패지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전주 풍패지관(全州 豊沛之館)은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대한민국의 보물 제5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초 전주부성을 창건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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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풍패지관(全州 豊沛之館)은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대한민국의 보물 제583호로 지정되어 있다.

풍패(豊沛) 또는 풍패지향(豊沛之鄕)이란 말은 새로운 왕조를 일으킨 제왕의 고향을 말하는 것이다. 유방이 고향인 지금의 강소성 패군 풍현에서 기병(起兵)하여 천하를 통일하고, 제위(帝位)에 오르자 고향 사람들에게 세금과 부역을 면해 준 일이 있다. 그 뒤부터 제왕의 고향은 모두 풍패라고 대칭(代稱)한다.

이성계의 실제 출생지는 함경도 영흥이지만, 조상 대대로 살던 곳이자 전주 이씨의 관향(貫鄕)으로 조선 왕조의 발상지인 전라도 전주(全州)를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 하였다. 한 고조 유방이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고향인 패군(沛郡) 풍현(豊縣) 즉 풍패(豊沛)에 들러 승리를 기념하며 고향 사람들을 모은 자리에서 대풍가(大風歌)를 읊었듯, 이성계는 왜구를 평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고향인 전주(全州)에 들러 황산대첩의 대승을 기념하며 전주 이씨 종친들을 모은 자리에서 대풍가(大風歌)를 읊으며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포부를 드러냈다.

전주는 조선 왕조의 풍패지향이고 조선시대 전라도의 위상을 말해주는 전국8도중 가장크고 웅장했던 전라감영의 건물중 외국사신등의 귀빈들을 위한 객사에 중국사신이 적어놓은 풍패지관이란 현판이 아직도 남아있다.

 

대풍가(大風歌)

ㅡ 한고조(漢高祖) 유방

大風起兮雲飛揚
대풍기혜운비양, 큰 바람 일고 구름은 높게 날아가네.

威加海內兮歸故鄕
위가해내혜귀고향, 위풍을 해내에 떨치며 고향에 돌아왔네.

安得猛士兮守四方
안득맹사혜수사방, 내 어찌 용맹한 인재를 얻어 사방을 지키지 않을소냐.

 

기원전 202년 2월 28일 ~ 기원전 195 6월 1일/ 재위  
혜제  /   후임섭정
황태자 유영(기원전 196년 ~ 기원전 195년) /  재위 
한왕 /   묘호
기원전 206년 3월 ~ 기원전 202년 2월 28일
이름
태조(太祖) / 시호  
고황제(高皇帝)
신상정보
 사천군 패현 풍읍 중양리/ 출생지 
전한 내사 장안현 장/락궁//
고황후

  사망지 下 위로 2행

 

https://ko.wikipedia.org/wiki/%EC%A0%84%ED%95%9C_%EA%B3%A0%EC%A0%9C

 

전한 고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 태조 고황제 유방(漢 太祖 高皇帝 劉邦,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95년)은 전한의 초대 황제(재위: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95년)로, 자는 계(季)이다. 패현(沛縣)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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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태조 고황제 유방(漢 太祖 高皇帝 劉邦,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95년)은 전한의 초대 황제(재위: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95년)로, 는 (季)이다.

 

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

여기 이르면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들어갈 수 없다. 여기서 '잡인'이란 일반 백성을 지칭한다.

 

 

[전주한옥마을 해설] 풍경만 감상하세요. 입맛은 각기 다르니까.

5만원 점집은 이렇게 운세를 보는군요.

https://www.youtube.com/watch?v=UaxSGqCsanU

 

 

 

12월 1일

ㅡ홍윤숙(1925~ 2015)

한 시대 지나간 계절은
모두 안개와 바람
한 발의 총성처럼 사라져간
생애의 다리 건너
지금은 일년 중 가장 어두운 저녁
추억과 북풍으로 빗장 찌르고
안으로 못을 박는 결별의 시간
이따금 하늘엔
성자의 유언 같은 눈발 날리고
늦은 날 눈발 속을
걸어와 후득후득 문 두드리는
두드리며 사시나무 가지 끝에 바람 윙윙 우는
서럽도록 아름다운
영혼 돌아오는 소리

 

https://www.youtube.com/watch?v=myI847B6LT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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