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룡비어천가>의 해동 六龍 : 이안사-목조, 이행리-익조, 이춘-도조, 이자춘-환조/ 태조, 태종

2대왕 정조는 누락. 태조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대표함. 太字 시호(세종 생각)

*  선조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여진인이 살고 있던 남경(南京: 간도지방)에 들어가 원나라의 지방관이 되었고,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李行里), 손자 이춘(李椿), 증손 이자춘이 대대로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서 벼슬했다.  천호(千戶)  벼슬이란 필요시 천명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TrDXTflOc0Q

 

 

https://www.youtube.com/watch?v=mLAJVskb4yA

 

 

 

https://www.youtube.com/watch?v=gLlSjLuLhD8

 

https://kydong77.tistory.com/21168

 

준경묘(이태조 5대조) 영경묘(그 부인)/ 삼척 활기리

https://www.youtube.com/watch?v=Sy6VH5SpKOQ https://kydong77.tistory.com/19420 삼척 준경묘(濬慶墓)와 적송/ 道의 10가지 특징 https://www.youtube.com/watch?v=BLlVLJlQ64Y 모든 가치관의 기준이나 세상에 대한 비판은 사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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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준경묘(濬慶墓)와 적송/ 道의 10가지 특징

https://www.youtube.com/watch?v=BLlVLJlQ64Y 모든 가치관의 기준이나 세상에 대한 비판은 사실성에 바탕합니다. 허구로 규정짓는 소설조차도 그 바탕은 현실이고 사실성입니다. 그래서 나는 자연에 바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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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의 10가지 특징

https://kydong77.tistory.com/18655?category=883650

 

任法融, 道德經釋義/ '道'의 十種 특징

/164 釋「道」的十大特徵 道的特徵頗多,其中有十個主要方面,現分述於下: 一、虛無 虛無是大道的本體常態,一切形象世界都是從虛無中化生出來的,最後仍歸於虛無。 「實」、「有」只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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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虛無    二、自然    三、清靜    四、無為    五、純粹

六、素樸    七、平易    八、恬淡     九、柔弱    十、不爭

*념담허무(恬淡虛無) - 염담(恬淡)이 말하는 것은 마음의 평안함과 사적인 욕망을 줄이라는 것이고, 허무(虛無)는 더 높은 단계로 마음이 순수함을 회복하여 불순물이 제거된 단계를 말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Og-ag6_Mb7g&t=25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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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이씨 - 나무위키

시조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말기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이한(李翰)이다. '재미있는 성씨 이야기'라는 출처에 의하면 이한의 조상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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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선원본계 종주(조선 왕조) 참조

조선이 건국되기 이전의 이성계 직계 가문은 전주 이씨 종가가 아니었다. 종가는 장남의 직계 후손인데 이성계의 직계 조상은 이한의 장남 후손 즉 종가가 아니었다. 심지어 이성계조차 위로 이복 형 이원계(李元桂)가 있었다. 그러다가 이성계 가문이 조선을 건국하고 왕가(王家)가 되면서 종가, 종주 자리를 가져와서 현재 전주 이씨 종주는 대한제국 황제위 요구자 이원(李源)이다.
    • 1대 목조 이안사(1255년 ~ 1274년) - 시조 17세손
    • 2대 익조 이행리(1274년 ~ ?) - 시조 18세손
    • 3대 도조 이춘(? ~ 1342년) - 시조 19세손
    • 4대 완창대군 이자흥(1342년 ~ 1342년) - 시조 20세손
    • 5대 환조 이자춘(1342년 ~ 1361년) - 시조 20세손
    • 6대 태조 이단(1361년 ~ 1398년) - 시조 21세손
    • 7대 정종 이경(1398년 ~ 1400년) - 시조 22세손
    • 8대 태종 이방원(1400년 ~ 1418년) - 시조 22세손
    • 9대 세종 이도(1418년 ~ 1450년) - 시조 23세손
    • 10대 문종 이향(1450년 ~ 1452년) - 시조 24세손
    • 11대 단종 이홍위 (1452년 ~ 1455년) - 시조 25세손
    • 12대 세조 이유(1455년 ~ 1468년) - 시조 24세손
    • 13대 덕종 이장(추존) - 시조 25세손
    • 14대 예종 이황(1468년 ~ 1469년) - 시조 25세손
    • 15대 성종 이혈(1469년 ~ 1495년) - 시조 26세손
    • 16대 연산군 이융(1495년 ~ 1506년) - 시조 27세손
    • 17대 중종 이역(1506년 ~ 1544년) - 시조 27세손
    • 18대 인종 이호(1544년 ~ 1545년) - 시조 28세손
    • 19대 명종 이환(1545년 ~ 1567년) - 시조 28세손
    • 20대 선조 이연(1567년 ~ 1608년) - 시조 29세손
    • 21대 광해군 이혼(1608년 ~ 1623년) - 시조 30세손
    • 22대 원종 이부 (추존) - 시조 30세손
    • 23대 인조 이종(1623년 ~ 1649년) - 시조 31세손
    • 24대 효종 이호(1649년 ~ 1659년) - 시조 32세손
    • 25대 현종 이연(1659년 ~ 1674년) - 시조 33세손
    • 26대 숙종 이순(1674년 ~ 1720년) - 시조 34세손
    • 27대 경종 이운(1720년 ~ 1724년) - 시조 35세손
    • 28대 영조 이금(1724년 ~ 1776년) - 시조 35세손
    • 29대 진종 이행(추존) - 시조 36세손
    • 30대 장조 이훤(추존) - 시조 36세손
    • 31대 정조 이성(1776년 ~ 1800년) - 시조 37세손
    • 32대 순조 이공(1800년 ~ 1834년) - 시조 38세손
    • 33대 문조 이영(추존) - 시조 39세손
    • 34대 헌종 이환(1834년 ~ 1849년) - 시조 40세손
    • 35대 철종 이변(1849년 ~ 1864년) - 시조 39세손
    • 36대 고종 이형(1864년 ~ 1907년) - 시조 40세손
    • 37대 순종 이척(1907년 ~ 1926년) - 시조 41세손
  • 순종 사후
    • 38대 의민황태자 이은(1926년 ~ 1970년) - 시조 41세손
    • 39대 회은황세손 이구(1970년 ~ 2005년) - 시조 42세손
    • 40대 황사손 이원(2005년 ~ 현재) - 시조 43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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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이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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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조
  • 익조
  • 도조
  • 환조
  • 태조
    • 진안대군파(鎭安大君派) 이방우(李芳雨)
    • 익안대군(益安大君派) 이방의(李芳毅)
    • 회안대군파(懷安大君派) 이방간(李芳幹)
    • 의안대군파(宜安大君派) 이방석(李芳碩)
    •  
    • 이성계는 고려 말의 홍건적의 난과 왜구 격퇴에서 무공을 세워 유명해졌으며,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정치적·군사적 실권을 한 손에 쥐었다. 신흥 정치세력과 연계하여 고려를 대체하는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하였다. 통상적으로는 묘호를 따라서 태조라고 부른다. 1392년부터 1398년까지 7년간 재위하였으며 왕자의 난을 계기로 제2대 임금인 정종에게 양위하였다.

 

조선 개국

정몽주 등을 제거함으로써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건하게 하여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92년 이성계가 태조로 등극함에 따라 이방원은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6]

원래 장자로 왕세자를 세워야 하는 것이 원칙이나, 조선 개국의 중요한 논리 중 하나였던 우창비왕설에 연관된 태조의 장남인 진안대군 방우를 제치고, 신하들은 나이와 공로를 감안해 신의왕후 소생 실질적 장남 영안군 이방과 또는 이방원을 세자로 세우라고 주청을 올렸다. 개국의 공로를 따지면 이방원이 태조의 아들 중 가장 많은 공을 세웠으나, 당시 "왕권(王權)보다 신권(臣權)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국정이 안정된다"라는 신권을 주창하던 정도전은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 신권을 주장하는 자기들을 제거할까 봐 두려워 결국 왕세자로 태조의 막내아들이자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의안대군 방석을 선택하였다.[7]

1394년 그는 전직 몽골 관료였으며 조선의 외교관이었던 조반 등을 따라 연경과 남경을 방문하여 주원장을 대면하였고, 후의 영락제와도 만났다.[8]

왕자의 난

제1차 왕자의 난

태조 이성계의 형인 이원계의 아들이자 이방원의 사촌 형으로 이방원을 지지하였다.

세자 자리를 두고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의안대군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자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이에 크게 불만을 나타냈으며 그것은 누구보다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이방원도 마찬가지였다. 태조는 개국 이후 군권분장정책을 통해 영안군 이방과, 정안군 이방원, 무안군 이방번, 세자의 매제 흥안군 등에게 절제사 직임을 수여해 군권을 분할했으며, 이것은 종친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는 원칙에 위배되고 군권을 국왕의 통제 아래에 놓는 일원적 지배 체제에 위배되었으므로, 개국 초부터 태조의 지시 아래 정도전은 사병 혁파를 추진하고 있었다. 이에 반발한 이방원은 1398년에 부왕 태조가 와병 중임을 틈타 아내 민씨의 후원과 이숙번·하륜·조영무 등 사병 혁파 반대 세력, 이화·사촌 이천우·처남 민무구·민무질 등 종친, 외척과 결탁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의 개국공신들과 이복 동생인 무안대군 방번·세자 방석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안 가 태조는 권력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영안군 방과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떠났다. 왕위를 물려받은 태조의 둘째 아들 방과가 바로 조선의 제2대 국왕 정종이다.[6] 이때 아버지 이성계의 서형인 이원계의 아들들이 그를 지지하고 정안군 이방원이 국정을 장악한다.

제2차 왕자의 난

 제2차 왕자의 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하지만 형제들 간에 다시 한번 분란이 발생하는데, 이방원의 넷째 형인 회안대군 방간이 박포의 꼬드김에 넘어가 왕위에 오를 목적으로 1400년에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때에도 이화·이천우 등이 그를 도왔고, 상대적으로 우수한 장수들과 병사들을 가지고 있던 이방원은 쉽게 이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다. 이후 박포 등을 처형하고 회안대군 부자를 황해도 토산으로 귀양보냈다. 이때에도 회안대군을 죽여야 된다는 여론이 나왔으나 그를 유배시키는 선에서 불문에 부쳤다.

그해 음력 2월정종으로부터 왕세자[9]로 책봉되었고, 책봉된 지 9개월 만에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10] 이후 1401년 음력 6월 12일, 명나라로부터 권지고려국사가 아닌 조선 국왕으로 책봉받았다.[11]

 

https://m.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010010600011#c2b

 

'18남 4녀' 세종의 자식들…공주도 왕자도 똑똑했다

흔히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재위 1400~1418)은 왕권을 강화하고 신생국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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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조
  • 이하 생략. 위 포스트 원문 참조.
 

태조 (조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태조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탁구 선수에 대해서는 이태조 (탁구 선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한제국 추존황제 국보 《태조 어진》 제1대 조선 국왕 재위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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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MO1BzAjgaM

 

https://www.yna.co.kr/view/AKR20150422059100005

 

단종문화제 계기로 본 조선왕들의 자녀수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비운의 단종(재위 1452-1455년). 고작 열여섯 해를 살고 유배지나 다름없는 강원 산간의 영월 땅에서 한...

www.yna.co.kr

세종대왕은 무려 22명의 자녀를 뒀다. 그중 첫번째 왕비인 소헌왕후 자녀만도 8남 2녀에 이른다. 두 번째 왕비 등이 낳은 아들은 모두 10명. 세종의 자녀는 이들을 포함해 모두 18남 4녀였다. 

https://namu.wiki/w/%EC%84%B1%EC%A2%85(%EC%A1%B0%EC%84%A0)/%EC%83%9D%EC%95%A0

 

성종(조선)/생애 - 나무위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열무(閱武)하고, 드디어 경복궁(景福宮)에 나아가서 삼전(三殿)에 문안하고 궁으로 돌아왔다. 영돈녕(領敦寧) 이상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대전(臺諫)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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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은 38세라는 이른 나이에 승하했는데, 그 나이에 28명이나 되는 자식을 얻었다는 건 시대적 상황을 감안한다 해도 이 분야의 권위자라 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 거느린 후궁의 숫자를 보면 성종은 12명, 태종은 12명, 세종은 6명, 중종은 10명이다. 성종 때는 일종의 교조주의(敎條主義)가 팽배해, 서예(書), 활쏘기(射) 같은 육예(六藝)[64]도 나라를 올바로 다스리는 데에 방해된다며 대간들이 상소를 올렸을 정도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48P99pq2zzI

 

 

https://www.youtube.com/watch?v=o3yLNXAVI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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