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 16년 (純祖 十六年)은 1816년 (병자), 배에 탄 암허스터 경은 영국의 외교관이자 그 항해 후 인도 총독(1823~1826)이 된 인물로 그가 건네 준 것은 영어 성경 3책이었다. 이수정은 중국을 경유하여 유입된 한문본에 토를 다는 데서 번역을 시작하였는데.....

신약 누가복음 한문본

구약성경 한문본 

국한문혼용문 구약 사무엘 上

 

https://www.bskorea.or.kr/prog/trans_feature.php

 

대한성서공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기독교 단체

www.bskorea.or.kr:443

개정 배경

1961년에 최종적으로 개정하여 사용하고 있는 「성경전서 개역한글판」은 역사적으로 한국 교회의 사랑을 받아 온 자랑스러운 성경이다.
그러나 이 성경을 그대로 계속해서 쓰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학교 교과서와 일반 출판물에서 쓰는 한글 맞춤법이 변하였고, 사람들이 사용하는 현실 언어도 많이 변하였으며, 성서학 및 관련 학문들도 눈부시게 발전하여, 성경을 개정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대한성서공회에서는 가능한 한 현재의 「개역」성경의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최소한으로, 꼭 필요한 부분만 개정한다는 원칙 하에 개정 작업을 시작하였다.

개정원칙

▶ 문법상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
▶ 어휘 선택이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
▶ 개역당시 어휘 선택이 현재 그 의미가 바뀌어 오해가 있을 경우 현대 어휘로 고친다. 과거에는 통용되었으나
     현재에는 잘 쓰이지 않거나 어려운 말은 쉬운 말로 바꾼다.
▶ 제3인칭 대명사 ‘저’와 ‘저희’는 각각 ‘그’와 ‘그들’로 고친다.
▶ 사투리는 표준말로 바로잡는다.
▶ 준말은 그 원말로 바꾼다.
▶ 수치감이나 혐오감을 유발시키는 말은 다른 말로 대치한다.
▶ 명사나 대명사에서 의미 전달에 꼭 필요한 경우 소유격과 복수형을 밝힌다.
▶ 오역임이 확실한 것은 바른 번역으로 고친다.

 

https://www.youtube.com/watch?v=R6dc-VAAjVo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4856

 

이수정(李樹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세례를 받은 뒤 「요한복음」 13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신앙고백서’를 발표, 윤치호의 ‘신앙고백서’와 함께 한국 기독교 초기 신자의 신앙 양태를 대표해 주고 있다.

기독교에 입교한 뒤 한글성서 번역사업에 착수, 일본주재 미국 성서공회 총무였던 루미스(Loomis, H.)의 권유와 협력에 따라 먼저 한문성서에 토를 단 『현토한한신약전서(懸吐韓漢新約全書)』를 간행하였다.

이어서 순한문성서인 『신약마가젼복음셔』를 번역했는데, 이 한글성서가 1885년 4월 처음 입국한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 H.G.)와 아펜젤러(Appenzeller, H. G.)에게 주어졌다. 이 밖에 몇 편의 교리서를 번역하고 한국 문학과 천주교 관계 저서와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1883년 12월 13일 미국에서 발간되던 선교잡지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한국의 선교를 호소하는 글을 기고, 외국선교본부에서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1884년 7월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 맥클레이(Maclay, R. S.)를 김옥균(金玉均) 등과 만나게 하여 입국을 실현시켰다.

1885년 1월에는 일본에 도착한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게 내한에 앞서 간단한 한국말을 가르치기도 하는 등 한국 개신교 수용에 교량적 구실을 다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남으로써, 1886년 귀국 뒤에 수구파의 음모에 휘말려 처형된 것으로 전하여진다.

 

https://christianlife.nz/archives/4428

 

한국에 전래된 성경의 발자취 - 크리스천라이프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대로, 주님의 제자들은 마가 다락방에서 오순절 성령을 체험한 후에 성령의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하였다. 복음을 전해 듣고 믿은 사람들 중

christianlife.nz

초기 한반도의 복음전래
오래 전 서기 635년부터 845년, 통일신라 시대에 당나라를 통해서 경교가 한반도에 전래되었다고 일부 학자들이 말한다. 서기 1253년에는 몽고를 통해서 로마 선교사인 ‘루브루크’에 의해 고려(Core’e)시대에 카톨릭이 접촉되었다고 하며, 조선시대인 서기 1592년과 1598년도 임진왜란과 정유왜란 당시에는 일본군의 종군신부인 ‘세스페데스’가 조선에 참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1627년과 1653년에는 당시 기독교 국가였던 화란인 ‘벨트브레’(박연)와 ‘하멜’이 무역하던 배가 파선되어 조선에서 활동한 일이 있었다.

18세기는 한국 천주교 형성기로 실학운동이 왕성하였고, 이승훈(세례명; Peter)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은 해인 1784년부터 1884년까지 100년 기간을 조선시대의 ‘천주교 선교세기’라고 부른다.

조선 조정에서는 1784년 4월에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시작하여, 1791년(신해박해)와 1801년(신유박해)에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조선에 선교사로 와있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천주교도인 수 천명이 신분고하를 불문하고 죽임을 당했다.

이런 박해 가운데서도 천주교 일부 지도자들은 ‘텬쥬공경가’, ‘성교요지’, ‘성교전서’, ‘쥬교요지’ 같은 신앙서적을 저술하여 민간에게 널리 알렸다.

1815년부터 1839년(기해박해)과 1866년(병인박해)까지 조선 조정에서는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계속하여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죽임을 당했다. 1845년에는 중국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신부가 된 ‘김대건’ 신부가 평안도 의주로 월경하여 활동하던 중 발각되어 그 이듬해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순교하면서도 전달한 성경과 존 로스의 한국어 성경
개신교 선교사인 영국인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는 1866년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따라 올라오다가 순교를 당했다. 토마스 선교사는 죽는 순간까지도 주변의 조선인들에게 한문 성경을 나누어 주었다. 이 성경으로 인하여 조선 평양에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설립되었다.

1872년에 만주지역에서는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 소속인 존 로스(1841~1915)와 존 매킨타이어(1837~1905) 선교사가 한국선교를 위한 체계적인 선교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존 로스 선교사는 압록강 상류 부근까지 가서 한 사람의 한인에게 한문 성경 몇 권을 전하고 돌아왔는데 수년 후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또한 존 로스는 1874년에 한중 국경에 있는 고려문에 가서 노방선교와 설교를 하며 한국어 성경을 제작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에 의주 출신인 이응찬을 만나게 되었다.

이응찬은 존 로스의 한국어 어학선생이 되는 한편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세 명의 의주 청년과 함께 존 로스의 한국어 성경 번역 작업에 협력하였다.

1879년 네 사람 모두 메킨타이어 선교사에 의해 세례를 받게 되었으며, 또한 같은 해에 만주 우정에서 존 로스 선교사에 의해 서상륜이 1883년에는 김청송이 세례를 받았다.

1878년에는 존 로스와 이응찬 김진기 백홍준 공역으로 누가복음 초역이 완료되었고, 1879년에는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로마서 원고가 작성되었다.

1891년에 존 로스는 매킨타이어가 수정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검토하여 최종원고를 완성하고, 1881년에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로부터 지원을 받아 인쇄소를 봉천에 설치하여 한글로 된 첫 개신교 문서인 “예수성교문답”과 “예수성교요령”을 인쇄했다.

이듬해인 1882년에는 첫 성경인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셔”와 “예수성교요안니 복음전셔”를 발행했다 이후 1887년에는 신약 전권인 “예수성교전셔”가 완간되었다.

일본에서의 이수정의 성경번역
이와 같이 중국에서 존 로스와 몇 명의 한국인에 의해 복음이 준비되고 있는 동안 일본에서는 이수정에 의해서 복음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수정이 40세 되던 해 1883년에 미국 선교사 조지 낙스(George William Knox) 에게서 세례를 받은 소문이 퍼지자 일본에 와있던 외국 선교사들에게 한국 선교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일본주재 미국 성서공회 헨리 루미스(Henry Loomis) 선교사로부터 한국성서 번역을 의뢰받은 이수정은 작업에 착수하여 1883년 7월 30일에 요한복음 일부가 인쇄되어 미국 성서공회 본부에 보내졌다.

한문성경에 토(주석)를 단 현토성경<신약성경 마가전>이 1884년 11월에 출판되었고, <현토한한신약전서>가 1887년에 출판되었다.

이수정은 모든 조선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성경으로 1884년 4월에 완성하여 다음해 2월에 <신약 마가복음서언해> 1천부를 발행했다.

1885년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 이 성경을 가지고 왔었다. 이어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번역도 완성했으며, 이수정의 번역은 로스 역본과 함께 한글성경 번역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번역 초본들이었다.

한국의 선교는 성서 번역에서부터 출발했으며 한국인에 의해서 스스로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며, 또한 교회가 한국인 스스로에 의해서 자립의 틀을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이미 개신교 신자들이 국내에 생겨나고 있었고, 회심한 이들이 여러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으며, 성경이 대량으로 반포되고 있었고, 그리고 특별한 것은 기독교가 만주에 흩어진 한인들 사이에 놀랍게 확산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만주지역에서는 1895년 한국인에 의해 교회 건축이 이루어진 이후, 무려 1,500개의 교회가 건립되었으며, 복음을 접한 한국인들은 매서인이 되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은 한국인들 사이에 조용히 저변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성경번역과 전달은 오늘날의 한국복음화의 밀알이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2JrVZUm0lk

 

 

https://kydong77.tistory.com/20563

 

시편 150편 개관, 시편 문학유형에 따른 분류 7가지/ 구약성경 제23권

천지창조(창세기)/천장화 최후의 심판/ 벽화(세로벽) 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reenmint153&logNo=220963395069&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구약성경 제23권: 시편(150편) 개관 구약성경 제23권: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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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4%B1%EA%B2%BD

 

성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성서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성서 (동음이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5세기 중반 최초로 인쇄된 판본인 구텐베르크 성경. 성경 또는 성서(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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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이 부분의 본문은 구약성경입니다.
-오경(토라)- 역사서
시서와 지혜
예언서- * 이사야예레미야

신약성경

 이 부분의 본문은 신약성경입니다.
괄호를 표기한 부분은 해당 성경의 저자이다. 알려지지 않은 경우에는 '익명'으로 표기하였다.


복음서
  • 마태복음서(마태오 복음서. 마태오, 성경학자들은 헬라어에 능통하며 율법에 대해 잘 아는 익명의 유대기독교인이 쓴 복음서로 이해하며, 교부들의 교훈에 따라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세리 마태가 쓴 것으로 이해해왔다.)
  • 마가복음서(마르코복음서, 마르코(마가)라 불린 요한)
  • 누가복음서(루가복음서, 루카(누가)로 불리는 그리스인 의사)
  • 요한복음서(대부분은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요한의 것으로 보나, 어떤 성서학자들은 복수 저자의 작품으로 이해한다.[3])
역사서
  • 사도행전(루카(누가)로 불리는 그리스인 의사)
서신서
묵시록
기독교에서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는 외경 복음서
  • 유다 복음서 - 예수를 배반한 이스카리옷 유다가 저술한 복음서라는 이유로 인정되지 않았다.
  • 마리아 복음서 - 일부가 유실되었다. 막달라 마리가 저술한 복음서로서 저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노시즘 색채 때문에 배척되기도 하였다.[4]
  • 도마 복음서 (토마스 복음) - 인정된 공관 복음서가 예수의 말과 행적에 천착한다면, 도마복음은 예수의 말에만 집중한다. 공관복음서와 내용이 비슷한 부분이 많은 편이다.[5]

[유다서] 한국 기독교는 부정함.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54204

 

시대순? 성경 66권 ‘배열 순서’가 중요한 이유

구약-신약 개념, 예레미야 31장과 누가복음 22장 ‘새 언약’ 단어에서 유대인들 ‘구약’ 용어에 심한 반발 2. 구약의 구조적 특징 1) 성경의 종류 (1) 타낙(Tanakh)과 구약 ‘구약’과 ‘신약’이라

www.christiantoday.co.kr

▲타낙(Hebrew Bible; Tanakh)의 구조.

 

[참고]

* 기독(교)'이라는 용어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중국어 음역어의 축약형인 '基督(敎)'를 한국어식 발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기독이란 그리스도를 한자어로 번역한 말.

그리스도란 기름부은 자, 곧 세례를 의미한다.

예수는 세례요한으로부터 셰례를 받았다.

유대인들을 구원할 그리스도의 출현은 유대인들의 전례적 희망사항이었다.

4복음서를 통해 예수는 자신이 유대인들이 고대하는 구원자임을 선포하였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2%BC%EC%9C%84%EC%9D%BC%EC%B2%B4

 

삼위일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삼위일체(三位一體, 고대 그리스어: Τριάδος 트리아도스[*], 라틴어: Trinitas 트리니타스[*])란 그리스도교에서 성경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

ko.wikipedia.org

삼위일체(三位一體, 고대 그리스어: Τριάδος 트리아도스[*], 라틴어: Trinitas 트리니타스[*])란 그리스도교에서 성경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교리이다. 하나님은 본질에서 한 분이시며 위격(位格, 고대 그리스어: ὑπόστασις 휘포스타시스[*])에서는 세 분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1] 삼위일체에 대해서 동방교회는 본질에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세 위격으로 되는 신비를 지지했고, 서방교회는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동일본질로 한 분 하나님이 되는 신비를 지지하며 신학적 관점의 차이를 보였다.[2]

 

<신학대전>  삼위일체설 완성자

토마스 아퀴나스(영어: Thomas Aquinas, 이탈리아어: Tommaso d'Aquino, 1224년/1225년? ~ 1274년 3월 7일)는 서방교회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이다. 또한 자연신학의 으뜸가는 선구자이며 서방교회에서 오랫동안 주요 철학적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는 토마스 학파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교회학자 33명 중 하나이며, 현재 로마가톨릭교회는 그를 신학자요 박사로 존경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이름을 딴 학교나 연구소 등이 많이 있다.

 

https://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3088149

 

[이정은의 역사칼럼] 성경의 전래 - 천지일보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1816년 이양선, 언어불통 속의 첫 만남1816년 9월 5일 낯선 이양선 두 척이 충남 서천 마량진 해안에 나타났다. 마량진은 조선

www.newscj.com

1816년 이양선, 언어불통 속의 첫 만남

1816년 9월 5일 낯선 이양선 두 척이 충남 서천 마량진 해안에 나타났다. 마량진은 조선시대에 수군 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있던 군영이었다. 두 배는 영국 정부가 청국에 파견한 사신 로드 암허스트(Sir Jeffrey William Pitt Amherst) 경과 수행원들을 실은 순양함 알세스트(HMS Alceste)호와 호위함 레이어(HMS Lyre)호였다.

알세스트호 함장 멕스웰(Captain Sir Murray Maxwell, 1775~1831)은 영국 왕실해군 장교로서 나폴레옹 전쟁 때 명성을 떨친 인물이었다.

배에 탄 암허스터 경은 영국의 외교관이자 그 항해 후 인도 총독(1823~1826)이 된 인물이었다. 그를 태우고 중국을 방문한 후 배는 조선 서해안과 류우큐제도를 방문했다. 이들은 영국으로 돌아가다 대서양의 세인트 헬레나섬에 들러 유배 중이던 나폴레옹을 만나기도 했다.

알세스트호 함장 머레이 맥스웰(Sir Murray Maxwell)과 레이어 호의 바질 홀 함장이 이끄는 두 배는 북경 방문을 마치고 귀환 길이었다. 배는 발해만을 돌아 조선을 발견하고 측량을 했다.

이양선 두 척이 해안 멀리에 정박한 것을 발견한 마량진(鎭)의 첨사 조대복(趙大福)과 비인 현감(庇仁縣監) 이승렬(李升烈)이 병졸과 현민들을 동원하여 배를 나포하려다 배가 커서 불가능하자 정탐차 배를 방문하였다. 이때 성경이 전달되었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성경 전래로 기록되는 이 방문에 관하여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있다.

첨사와 현감이 (큰) 배에 내릴 때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가지고 굳이 주었는데, 작은 배에서 받은 두 권과 합하면 세 권입니다.”

- <조선왕조실록> 순조 16년 7월 19일(병인)조

* 순조 16년 (純祖 十六年)은 1816년 (병자)


알세스트 호의 항해 중 성경 전달 장면(p.36) ⓒ천지일보 2023.12.06.
이때 전달한 책 3권이 영어 성경이었다. 한국인이 처음 성경과 만났던 이 사건은 한국인은 영어를 모르고, 영국 측은 한문이나 한국어를 몰라 소통되지 않은 채 이루어졌다. 알세스트호의 군의관 존 맥레오드(John Mc’Leod)는 영국으로 돌아가 항해기를 남겼다. 그의 기록은 <알세스터의 항해-코레아 해안을 따라서- (Voyage of His Majesty's Ship Alceste, Along the Coast of Corea)>로 1818년 런던과 필라델피아에서 발간되었다. 책에서 성경을 전달하는 장면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출처 : 천지일보(https://www.newscj.com)

 

 

 

 

https://kydong77.tistory.com/18027

 

창덕궁 비원의 단풍

10/25(목) 여기가 워디래유? 창덕궁 비원요. 후원으로 부르기도 하죠. 단풍이 아지매들인가, 아지매들이 단풍인가? 구분이 잘 안 되네요. 산스크리어로 '아지미'는 요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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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0/25(목) 여기 워디래유?

창덕궁 비원요. 후원으로 부르기도 하죠.

단풍이 아지매들인가, 아지매들이 단풍인가? 구분이 잘 안 되네요.

산스크리어로 '아지미'는 요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는데,

단풍으로 요리하면 어떤 맛일까요?

물론 고궁의 정취까지 더해진, 국화 향기 그윽한 가을맛이겠지요?

 

고갯마루길에서 옥류천으로 내려가면,

옥류천 소요암에는 인조가 쓴 '玉流川' (옥류천)이라는 어필 위에 숙종이 쓴 오언절구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飛流三百尺,

비류삼백척, 옥류천 폭포 삼백척

遙落九天來

요락구천래, 저 멀리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하네

看是白虹起,

간시백홍기, 돌아보니 흰 무지개 일고

飜成萬壑雷  

번성만학뢰, 골짜기마다 천둥소리 가득차네

실제 폭포 높이는 일 미터 정도이고  물줄기는 어린애 오줌줄기 정도지만.

 

왕이야 뻥튀기해도 누가 시비를 걸 수 있나요. 뒤지고 싶어 환장했다면 모를까? 물론 이백의 칠언절구〈망여산폭포()〉의 ", "을 흉내냈지만 사실과 너무 동떨어진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나마 '河'를 빼느라고 오언시로 쓴 것이 천만다행.

그곳에는 왕이 농사짓는 것을 재현한 너댓걸음이면 끝나는 논빼미도 마련했습니다.

농사 시범 보이다가 왕이 과로하면 불충의 죄를 물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참고]

 망여산폭포()

ㅡ이백

 

日照香爐生紫煙

(일조향로생자연) :
해가 향로봉을 비추니 자주빛 안개가 피어나고

遙看瀑布掛長川

(요간폭포괘장천) :
멀리 폭포를 바라보니, 긴 강이 걸려 있네.

飛流直下三千尺

(비류직하삼천척) :
하늘 높이 솟구쳤다 직하강하는 폭포 높이 삼천 척이니

疑是銀河落九天

(의시은하락구천) :
은하수가 구천에서 떨어지는 듯!
 

이 시구는 이백의 또 다른 시 〈추포가(秋浦歌)〉의 한 구절인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과
더불어 중국 시인들이 흔히 사용한 과장법의 전형적인 예로 꼽힌다.

* 여산(廬山) 삼첩천(三疊泉)  3단으로 떨어지는 폭포는 총길이가 155m라네요.

 

*추포가(秋浦歌)

ㅡ 이백(李白)

* 추포에서 *추포는 안휘성 남부, 양쯔 강(扬子江)의 남쪽에 있는 도시.



白髮三千丈 

(백발삼천장)  백발이 삼천 길이니

緣愁似箇長

(연수사개장) 시름 때문에 올올이 희어졌구나

不知明鏡裏

(부지명경리)   알 수 없구나. 밝은 거울 속의 저 몰골은

何處得秋霜

(하처득추상) 어디서 가을 서리를 저다지도 맞았는고?

 

[낙선재 회억]

낙선재는 대학시절 여름방학 때 김기동 선생님의 고소설 과제로, 한지에 쓴 붓글씨 원본 국문소설도 읽었던 곳이었지요. 한문표기가 지식인 선비들을 위한 것이라면 언문본 소설은 궁녀들의 심심풀이 땅콩이었지요. 궁녀 출신의 할머니께서 자모가 불분명하게 흘려쓴 글씨를 해독해 주셔서 문맥을 잡을 수 있었지요, 나이든 편입생 여학생들은 고소설 과제는 뒷전이고, 동물원의 호랑이랑 원숭이 똥구녕 구경하러 가기에 바빴지요.

건데, 남의 나라 궁궐을 동물원으로 만들고 지네 국화인 벚꽃으로 뒤덮어 버린 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갈리는 일이지요. 60년대엔 창경원 밤벚꽃놀이로 시름을 풀었으니 되돌아 보면 개판인 세상이었습니다. 꽃이야 무슨 죄가 있겠어요. 언제나 세상물정 모르고 소명감도 역사의식도 없는 제 앞가림조차 못하는 통치자들 때문이지요. 실상 그 책임의 절반 이상은 국민들에게 있습니다. 지네들이 뽑아 놓고 지도자들만 바가지로 욕하는 것도 어불성설이잖아요.

1983년 창경궁복원계획에 따라 동물원은 과천으로 이사가고, 벚꽃나무들은 여의도 윤중로와 서울대공원에 이식했어요. 여의도와 대공원의 고목이 된 벚꽃나무는 창경궁에서 옮겨심은 것들이랍니다.

아래에 소개한 묘족은 한국인과 뿌리가 같은 동이족입니다. 목조가옥만 다를 뿐 농촌 풍경도 한국과 흡사하네요. 처마 끝에는 옥수수도 매달고, 베도 짜네요. 서역에서 신라에 베를 사러 히말라야 설산을 넘어오던 실크로드 시절이 그립습니다. 자동차 등 기존의 수출 상품들이 적자를 낸다니 걱정이 태산입니다.

 단풍구경 흥취를 위해 <경복궁타령>부터 듣지요.

 

https://kydong77.tistory.com/21968

 

여의도 벚꽃축제 윤중로 벚꽃길/ 김소월, 오는 봄/花無十日紅 勢不十年長

https://www.youtube.com/watch?v=45fCvCnN5FI YouTube에서 보기 를 클릭하세요. 오는 봄 ㅡ 김소월 봄날이 오리라고 생각하면서 쓸쓸한 긴 겨울을 지나보내라. 오늘 보니 백양(白楊)의 뻗은 가지에 전(前)에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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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mdnPo7GsyxE

 

 

창덕궁 비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BMIRYQiaZfg

 

https://www.youtube.com/watch?v=MmuSZZHy9f0

묘족은 한국인과 같은 동이족입니다. 동이족의 특징은 가는 곳마다 토작하여 거주지를 일구며, 춤 노래 무예에 뛰어난 DNA를 물려 받아 그 분야에 특별한 재능을 타고 났습니다. 한국인들이 올림픽 스포츠에서, 음악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것도 이 DNA를 타고 난 덕분입니다. 알라스카를 건너 미주 대륙의 원주민을 누르고 잉카문명을 일구며 멕시코까지 이른 사람들도 모두 유태인과 함께 탁월한 재능을 지닌 동이족들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vP26TOysUg

 

https://www.youtube.com/watch?v=IICHacZ981c

 

 

 

https://www.youtube.com/watch?v=-0_aDalDqIs

 

https://www.youtube.com/watch?v=Wm8_Gq3jkWA

 

 

 

위의 향나무는 수령 750년으로 추정된다고 해설문에 적었다.

우리도 750살이 되면 저 꼬라지 된다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농담도 해보았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027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https://www.youtube.com/watch?v=Wm8_Gq3jkWA

 

 

https://www.youtube.com/watch?v=dB0aoJN17ic

 

https://www.youtube.com/watch?v=rMAnNT3zx_I

 

 

四時

ㅡ도연명(陶淵明, 365년~ 427년)

 

春水滿四澤 

(춘수만사택) 봄물은 사방의 못에 가득하고

夏雲多奇峰 

(하운다기봉) 여름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가 많기도 하다

秋月揚明輝

( 추월양명휘) 가을 달은 밝은 빛을 드날리고

冬嶺秀孤松 

(동령수고송) 겨울 산마루엔 외로운 소나무가 빼어나도다

 

 

 

 

 

자경전- 한중록 집필한 곳

 

https://kydong77.tistory.com/22275

 

한중록, 혜경궁 홍씨 1부 & 혜경궁 홍씨 2부/수원화성;융릉·홍씨·양위후 거처

https://blog.naver.com/kydong47/223232035147 혜경궁 홍씨, 한중록/4편 종합본 「한듕록」·「한듕만록」 & 수원화성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가 지은 회고록.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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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ydong77.tistory.com/22260

 

혜경궁 홍씨, 한중록/4편 종합본 「한듕록」·「한듕만록」 & 수원화성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가 지은 회고록.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974 한중록(閑中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모두 4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은 작자의 회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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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4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은 작자의 회갑해에 쓰여졌고, 나머지 세 편은 1801년(순조 1)∼1805(순조 5) 사이에 쓰여졌다.

필사본 14종이 있으며, 국문본·한문본·국한문혼용본 등이 있다. 사본에 따라 ‘한듕록’·‘한듕만록’·‘읍혈록’ 등의 이칭이 있다. 4편의 종합본은 「한듕록」·「한듕만록」의 두 계통뿐이다.

제1편에서 혜경궁은 자신의 출생부터 어릴 때의 추억, 9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에서부터 이듬해 입궁하여 이후 50년간의 궁중생활을 회고하고 있다.

중도에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할 수 없다 하여 의식적으로 사건의 핵심을 회피한다. 그 대신 자신의 외로운 모습과 장례 후 시아버지 영조와 처음 만나는 극적인 장면의 이야기로 비약한다.

후반부에는 정적(政敵)들의 모함으로 아버지·삼촌·동생들이 화를 입게 된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 편은 화성행궁에서 열린 자신의 회갑연에서 만난 지친들의 이야기로 끝난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 1년 5월 29일 동생 홍낙임(洪樂任)이 천주교 신자라는 죄목으로 사사(賜死)당한 뒤에 쓴 글이다.

제2편에서 혜경궁은 슬픔을 억누르고 시누이 화완옹주의 이야기를 서두로, 정조가 초년에 어머니와 외가를 미워한 까닭은 이 옹주의 이간책 때문이라고 기록한다.

또 친정 멸문의 치명타가 된 홍인한사건(洪麟漢事件)의 배후에는 홍국영(洪國榮)의 개인적인 원한풀이가 보태졌다고 하면서 홍국영의 전횡과 세도를 폭로한다. 끝으로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가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는 날을 꼭 생전에 볼 수 있도록 하늘에 축원하며 끝맺는다.

제3편은 제2편의 이듬해에 쓰여진 것으로 주제 역시 동일하다. 혜경궁은 하늘에 빌던 소극성에서 벗어나 13세의 어린 손자 순조에게 자신의 소원을 풀어달라고 애원한다.

정조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효성이 지극하였는지, 또 말년에는 외가에 대하여 많이 뉘우치고 갑자년에는 왕년에 외가에 내렸던 처분을 풀어주고 언약하였다는 이야기를 기술하며, 그 증거로 생전에 정조와 주고받은 대화를 인용하고 있다.

마지막 제4편에서는 사도세자가 당한 참변의 진상을 폭로한다. ‘을축 4월 일’이라는 간기가 있는데, 을축년은 순조 5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돌아간 해이다. “임술년에 초잡아 두었으나 미처 뵈지 못하였더니 조상의 어떤 일을 자손이 모르는 것이 망극한 일”이라는 서문이 있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2260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https://ko.wikipedia.org/wiki/%EC%B0%BD%EA%B2%BD%EA%B6%81

 

창경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창경원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유원지로서의 창경원 후신에 대해서는 서울대공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창경궁(昌慶宮)은 서울특별시에 있는 궁궐로 조선 성종(1483년) 때에 건축하였다. 창경궁

ko.wikipedia.org

건축

조선고적도보의 창경궁 배치도.

 

창경궁이 위치한 곳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붙어있고 남쪽으로 종묘와 통하였다. 창경궁은 조선시대 왕궁 가운데 유일하게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다.[8] 남향을 하지 않고 동향을 한 이유는 이 궁이 별궁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지며, 지형상으로도 동향이 적합하였던 듯하다.[8]

현재 창경궁에는 조선시대 건물로는 명정전(국보 제226호), 통명전(보물 제818호), 홍화문(보물 제384호), 숭문당·함인정·환경전·경춘전·양화당·집복헌·영춘헌·관덕정·월근문·선인문·명정문과 명정전 회랑(보물 제381호)이 있고, 석조물로는 옥천교(보물 제386호), 풍기대(보물 제846호), 관천대(보물 제851호), 창경궁내 팔각칠층석탑(보물 제1119호)이 있다.[12] 낙선재(樂善齊) 지역은 원래 창경궁에 소속되었었으나 지금은 창덕궁 경내에 있다.[12]

창경궁의 정전이고 명정전이고, 명정전의 출입문인 명정문은 중문이며, 궁궐의 정문은 홍화문이다.[12] 홍화문의 좌우에는 익각이 있고, 홍화문을 들어서면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 옥천에 옥천교가 있다.[12] 이 다리를 지나면 바로 명정문이 나오는데, 창경궁은 경복궁의 흥례문, 창덕궁의 진선문에 해당하는 문이 없어 홍화문에서 바로 명정문으로 들어가도록 구성된 점에서 다른 규모에 비해 규모가 작고 격식이 떨어진다.[12] 창경궁의 중심 건물인 홍화문, 명정문, 명정전은 중심축에 맞추어 놓여 있으나, 지형을 살려 건물을 배치하였기 때문에 반듯하게 좌우 대칭을 이루지 않고, 주변 행각도 이에 맞추어 약간 틀어져 있다.[12]

현재 창덕궁 경내에 위치한  낙선재(樂善齊) 는 잊을 수 없는 공간이다. 김기동 교수님은 여름방학 고소설 강좌 과제로 필사본 고소설 한 편씩을 지정해 주고 그 줄거리를 요약해 제출하게 했다. 그곳에는 궁녀였던 할머니 한 분이 계셔서  연신 흘려쓴 한글 글자 독음을 배워야 읽을 수 있었다. 물론 과제물 미제출자의 학점은 0점 처리되어 재수강의 고충을 당했다.

대학 졸업장 갖기 위해 편입한 여학생 중에는 낙선재에 와서 하는 일이라곤 바로 옆의 동물원에 가서 호랑이를 구경하거나 원숭이 똥구녕을 살피는 일로 소일하는 날이 많았다. 1960년대 후반에는 서울 소재 대학엔 편입생들이 많았다. 학생수가 정원의 4~5배는 예사고 취업이 용이한 공대는 그 2배는 되었다. 광활한 부지를 확보하고 현대식 건물로 덮인 캠퍼스를 보노라면 그분들의 공로에 감사할 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Ah9UB8i6Swc

 

금시작비(今是昨非)

https://kydong77.tistory.com/21033

 

도연명 - 귀거래사(歸去來辭),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飮酒 20수

본명은 도잠(陶潛,도연명(중국어 간체자: 陶渊明, 정체자: 陶淵明, 병음: Táo Yuānmíng 타오위안밍[*], 365년 ~ 427년)은 중국 동진 후기에서 남조 송대 초기까지 살았던 전원시인(田園詩人)이다. 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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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지금 생각이 옳고 지난 세월 잘못 산 걸 깨달았노라.

 

귀거래사(歸去來辭)

ㅡ 도연명(陶淵明, 365년 ~ 427년)

 

歸去來兮                       
(귀거래혜)                       
돌아가자!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거늘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오?

旣自以心爲形役                       
(기자이심위형역)     
지금껏 내 스스로 마음을 육체에 사역하도록 하였으니

奚惆悵而獨悲                       
(해추창이독비)           
어찌 슬픔에 젖어 홀로 서러워만 할 수 있겠는가?

悟已往之不諫                       
(오이왕지불간)           
이미 지난 일을 탓했자 무슨 소용 있으랴?

知來者之可追                        
(지래자지가추)           
앞으로는 바른 길을 추구하는 게 옳다는 걸 알았도다.

實迷途其未遠                       
(실미도기미원)           
실로 인생길 잘못 접어들어 헤매었지만 그닥 멀리온 것은 아니니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지금 생각이 옳고 지난 세월 잘못 산 걸 깨달았노라.

舟遙遙以輕颺                        
(주요요이경양)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흔들리고

風飄飄而吹衣                        
(풍표표이취의)           
바람은 한들한들 옷깃을 스쳐간다.

問征夫以前路                       
(문정부이전로)           
지나는 길손에게 고향 가는 길 물을 제

恨晨光之熹微                       
(한신광지희미)           
새벽녁 희미한 빛마저 한스럽구나.

乃瞻衡宇                       
(내첨형우)                       
저만치 내 집 지붕과 처마가 바라다보인다.

載欣載奔                       
(재흔재분)                       
기쁜 마음에 뛰듯이 집에 당도하니

僮僕歡迎                        
(동복환영)                      
어린 하인들 반가이 맞이하고

稚子候門                       
(치자후문)                       
자식들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三徑就荒 (삼경취황)                       
뜰안 세 갈래 오솔길엔 잡초가 무성하나

松菊猶存                       
(송국유존)                       
소나무와 국화는 변함이 없다. 

携幼入室                        
(휴유입실)                       
어린 아들 손잡고 방으로 들어 서니

有酒盈樽                        
(유주영준)                       
술통엔 술이 가득 나를 반긴다.

引壺觴以自酌                        
(인호상이자작)           
술단지 끌어당겨 혼자 잔 부어 마시며

眄庭柯以怡顔                        
(면정가이이안)          
뜰 앞 나뭇가지 바라보고 미소짓노라.

倚南窗以寄傲                       
(의남창이기오)           
남쪽 창에 기대어 의기 도도해지니

審容膝之易安                       
(심용슬지이안)           
무릎 하나 겨우 들일 집이건만 편안키 그지없다.

園日涉以成趣                        
(원일섭이성취)           
정원은 매일 거닐어도 풍취가 일고

門雖設而常關                        
(문수설이상관)           
문은 달았건만 찾아오는 이 없어 늘 닫혀 있다.

策扶老以流憩                       
(책부노이류게)           
지팡이에 늙은 몸 의지해 발길 멎는대로 쉬기도 하고

時矯首而遐觀                       
(시교수이하관)           
때때로 고개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기도 한다.

雲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골짝을 돌아나가고

鳥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날다 지친 저 새는 둥지로 돌아온다.

景翳翳以將入                       
(경예예이장입)           
해는 뉘엿뉘엿 서산에 지려는데

撫孤松而盤桓                       
(무고송이반환)           
나는 외로운 소나무 부여잡고 서성이노라.
 
歸去來兮                        
(귀거래혜)                        
나 돌아왔도다!

請息交以絶遊                        
(청식교이절유)           
세상과의 사귐도 속세와의 어울림도 단절하리라!

世與我而相違                       
(세여아이상위)            
세상과 나 서로 인연을 멀리했으니

復駕言兮焉求                        
복가언혜언구)               
다시 벼슬길에 나간들 무엇을 얻겠는가?

悅親戚之情話                        
(열친척지정화)            
친척 이웃들과 즐겁게 정담을 나누고

樂琴書以消憂                       
(낙금서이소우)            
거문고 타고 책 읽으며 시름 달래리.

農人告余以春及                        
(농인고여이춘급)      
농부가 내게 와 봄이 왔다  알려주니

將有事於西疇                        
(장유사어서주)            
내일은 서쪽 밭에 나가서 밭을 갈리라.

或命巾車                       
(혹명건거)                        
때로는 수레 불러 몰기도 하고

或棹孤舟                       
(혹도고주)                        
때로는 조각배 띄워 노를 젓는다.

旣窈窕以尋壑                        
(기요조이심학)            
깊고 굽이진 골짝도 찾아 나서고

亦崎嶇而經丘                       
(역기구이경구)            
험한 산을 넘고 가파른 언덕길도 지난다.

 

木欣欣以向榮
(목흔흔이향영)            
물오른 나무들 싱싱하게 자라나고

泉涓涓而始流                       
(천연연이시류)            
샘물은 퐁퐁 솟아 흘러 내린다.

善萬物之得時                       
(선만물지득시)            
만물이 때를 만나 신명남을 부러워할 제

感吾生之行休                       
(감오생지행휴)            
내 생도 머지 않았음을 느낀다.

已矣乎                       
(이의호)                              
아서라!

寓形宇內復幾時                       
(우형우내복기시)     
이 몸 세상에 머물 날 얼마나 되리오!

曷不委心任去留                       
(갈불위심임거류)      
가고 머무는 건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니

胡爲乎遑遑欲何之                       
(호위호황황욕하지)
무엇 위해 어디로 그리 서둘러 가려하는가?

富貴非吾願                       
(부귀비오원)            
부귀영화 내 바라던 바 아니요


帝鄕不可期                        
(제향불가기)                  
내 죽어 신선나라 태어나기도 바라지 않을지니,

懷良辰以孤往                       
(회양진이고왕)
날씨가 좋으면 혼자 거닐기도 하고

或植杖而耘耔                       
(혹식장이운자)            
때로는 지팡이 세워 두고 김매고 북돋우기도 한다.

登東皐以舒嘯                        
(등동고이서소)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臨淸流而賦詩                       
(임청류이부시)            
맑은 시냇가에 앉아 시도 짓는다.

聊乘化以歸盡                        
(요승화이귀진)            
잠시 조화의 수레를 탔다가 이 생명 다 하는날 돌아갈지니

樂夫天命復奚疑                       
(낙부천명복해의)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일소냐?

 

歸去來兮                       
(귀거래혜) 돌아가자!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거늘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오?

旣自以心爲形役                       
(기자이심위형역) 지금껏 내 스스로 마음을 육체에 사역하도록 하였으니

奚惆悵而獨悲                       
(해추창이독비)  어찌 슬픔에 젖어 홀로 서러워만 할 수 있겠는가?

悟已往之不諫                       
(오이왕지불간) 이미 지난 일을 탓했자 무슨 소용 있으랴?

知來者之可追                        
(지래자지가추) 앞으로는 바른 길을 추구하는 게 옳다는 걸 알았도다.

實迷途其未遠                       
(실미도기미원)  실로 인생길 잘못 접어들어 헤매었지만 그닥 멀리온 것은 아니니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지금 생각이 옳고 지난 세월 잘못 산 걸 깨달았노라.

舟遙遙以輕颺                        
(주요요이경양)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흔들리고

風飄飄而吹衣                        
(풍표표이취의) 바람은 한들한들 옷깃을 스쳐간다.

問征夫以前路                       
(문정부이전로) 지나는 길손에게 고향 가는 길 물을 제

恨晨光之熹微                       
(한신광지희미) 새벽녁 희미한 빛마저 한스럽구나.

乃瞻衡宇                       
(내첨형우) 저만치 내 집 지붕과 처마가 바라다보인다.

載欣載奔                       
(재흔재분) 기쁜 마음에 뛰듯이 집에 당도하니

僮僕歡迎                        
(동복환영) 어린 하인들 반가이 맞이하고

稚子候門
(치자후문)  자식들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三徑就荒                     
 (삼경취황)  뜰안 세 갈래 오솔길엔 잡초가 무성하나

松菊猶存                       
(송국유존) 소나무와 국화는 변함이 없다. 

携幼入室                        
(휴유입실) 어린 아들 손잡고 방으로 들어 서니

有酒盈樽                        
(유주영준)  술통엔 술이 가득 나를 반긴다.

引壺觴以自酌                        
(인호상이자작) 술단지 끌어당겨 혼자 잔 부어 마시며

眄庭柯以怡顔                        
(면정가이이안) 뜰 앞 나뭇가지 바라보고 미소짓노라.

倚南窗以寄傲                       
(의남창이기오) 남쪽 창에 기대어 의기 도도해지니

審容膝之易安                       
(심용슬지이안) 무릎 하나 겨우 들일 집이건만 편안키 그지없다.

園日涉以成趣                        
(원일섭이성취) 정원은 매일 거닐어도 풍취가 일고

門雖設而常關                        
(문수설이상관) 문은 달았건만 찾아오는 이 없어 늘 닫혀 있다.

策扶老以流憩                       
(책부노이류게) 지팡이에 늙은 몸 의지해 발길 멎는대로 쉬기도 하고

時矯首而遐觀                       
(시교수이하관)  때때로 고개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기도 한다.

雲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골짝을 돌아나가고

鳥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날다 지친 저 새는 둥지로 돌아온다.

景翳翳以將入                       
(경예예이장입) 해는 뉘엿뉘엿 서산에 지려는데

撫孤松而盤桓                       
(무고송이반환) 나는 외로운 소나무 부여잡고 서성이노라.
 
歸去來兮                        
(귀거래혜) 나 돌아왔도다!

請息交以絶遊                        
(청식교이절유) 세상과의 사귐도 속세와의 어울림도 단절하리라!

世與我而相違                       
(세여아이상위) 세상과 나 서로 인연을 멀리했으니

復駕言兮焉求                        
복가언혜언구) 다시 벼슬길에 나간들 무엇을 얻겠는가?

悅親戚之情話                        
(열친척지정화) 친척 이웃들과 즐겁게 정담을 나누고

樂琴書以消憂                       
(낙금서이소우)  거문고 타고 책 읽으며 시름 달래리.

農人告余以春及                        
(농인고여이춘급)  농부가 내게 와 봄이 왔다  알려주니

將有事於西疇                        
(장유사어서주)  내일은 서쪽 밭에 나가서 밭을 갈리라.

或命巾車                       
(혹명건차) 때로는 수레 불러 몰기도 하고

或棹孤舟                       
(혹도고주) 때로는 조각배 띄워 노를 젓는다.

旣窈窕以尋壑                        
(기요조이심학) 깊고 굽이진 골짝도 찾아 나서고

亦崎嶇而經丘                       
(역기구이경구)  험한 산을 넘고 가파른 언덕길도 지난다.

木欣欣以向榮          
(목흔흔이향영) 물오른 나무들 싱싱하게 자라나고

泉涓涓而始流                       
(천연연이시류)  샘물은 퐁퐁 솟아 흘러 내린다.

善萬物之得時                       
(선만물지득시) 만물이 때를 만나 신명남을 부러워할 제

感吾生之行休                       
(감오생지행휴) 내 생도 머지 않았음을 느낀다.

已矣乎                       
(이의호)  아서라!

寓形宇內復幾時                       
(우형우내복기시)  이 몸 세상에 머물 날 얼마나 되리오!

曷不委心任去留                       
(갈불위심임거류) 가고 머무는 건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니

胡爲乎遑遑欲何之                       
(호위호황황욕하지) 무엇 위해 어디로 그리 서둘러 가려하는가?

富貴非吾願                       
(부귀비오원) 부귀영화 내 바라던 바 아니요

帝鄕不可期                        
(제향불가기)  내 죽어 신선나라 태어나기도 바라지 않을지니,

懷良辰以孤往                       
(회양진이고왕) 날씨가 좋으면 혼자 거닐기도 하고

或植杖而耘耔                       
(혹식장이운자) 때로는 지팡이 세워 두고 김매고 북돋우기도 한다.

登東皐以舒嘯                        
(등동고이서소)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臨淸流而賦詩                       
(임청류이부시)  맑은 시냇가에 앉아 시도 짓는다.

聊乘化以歸盡                        
(요승화이귀진) 잠시 조화의 수레를 탔다가 이 생명 다 하는날 돌아갈지니

樂夫天命復奚疑                       
(낙부천명복해의)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일소냐?

 

 

https://www.miryang.go.kr/tur/EgovTourDetail.do?nmtIdx=40&mnNo=10302180000

 

월연정

밀양시청, 문화관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www.miryang.go.kr

월연정(月淵亭)은 본래 월영사(月影寺)가 있던 곳으로 월영연(月影淵)이라 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한림학사등 여러 요직을 지내다가 기묘사화를 예견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월연 이태(月淵 李迨)선생이 중종20년(1520년)에 세운 정사(亭舍)로 처음에는 쌍경당(雙鏡堂)이라 편액(扁額)하였습니다. 그 후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던 것을 영조33년(1757년)에 8대손인 월암(月菴) 이지복(李之復)이 쌍경당을 복원하였습니다.

월연정은 가장 좌측인 남쪽에 있으며, 동향을 하고 정면 5칸, 측면 2칸의 5량(樑)구조로 팔작지붕을 한 이익공계(二翼工系) 건물입니다. 가장 북측에 위치하고 제일 높은 언덕에 있는 월연대(月淵臺)는 남동향을 하고 있으며, 월연정 주위에 건립된 제헌(齊軒), 월연대등 모두 풍치 수려한 곳에 무리를 이루어 정자의 기능을 가지며, 놓여진 지형에 맞추어 모두 각기 다른 평면을 지니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백송

 

 

기둥 위에 용머리 조각은 사찰 기둥의 용머리를 조각하거나 그것을 모방한 장인의 솜씨였다.

http://www.grandculture.net/miryang/toc/GC08702023

 

쌍경당 - 디지털밀양문화대전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용평동에 있는 조선 전기 정자. [개설] 쌍경당(雙鏡堂)은 월연(月淵) 이태(李迨)[1483~1536]가 세운 밀양 월연정(月淵亭)의 건물 중 하나이다. 밀양 월연정은 월연대, 쌍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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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경당(雙鏡堂)은 월연(月淵) 이태(李迨)[1483~1536]가 세운 밀양 월연정(月淵亭)의 건물 중 하나이다. 밀양 월연정은 월연대, 쌍경당, 제헌 세 건물을 합친 것이다. 쌍경당은 이태가 함경도 도사 재직 중 기묘사화를 예견하여 사직하고 귀향한 이듬해인 1520년 용평의 월영사(月影寺) 옛터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고 기초를 닦아 창건하였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지은 두 채의 건물 중 북쪽 절벽 위는 월연대(月淵臺), 남쪽은 쌍경당(雙鏡堂)이라 하였다. 응천 상류인 이연(梨淵)의 물결이 거울 표면처럼 맑고, 달이 중심을 비추면 물과 달이 쌍으로 맑게 보이는 절경에서 이름을 따왔다. 만월 때 연출되는 물속의 달빛 기둥 월주(月柱)가 일품이다. 월연대와 쌍경당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쌍경당은 1697년 이태의 현손 자유헌 이만백[1656~1716]이 주축이 되어 복구를 논의하여 상당한 진척이 있었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60년이 지난 1757년 봄 이태의 6세손 월암(月庵) 이지복(李之復)[1672~1759]이 사촌 형제의 아들인 수사(水使) 이홍(李泓), 육촌 형제의 아들인 자락정 이례(李澧)와 쌍경당 중건에 착수하였고, 육촌 동생이자 이례의 아버지인 이지표[1698~1763]가 설계를 맡아 1758년 공사를 마쳤다. 월연대는 쌍경당보다 100여 년 뒤 중수되었는데 이태의 10세손 일성 이장운[1820~1886]이 족질 이종증, 이종술과 함께 합심하여 소실된 지 무려 270여 년이 지난 1866년 봄 비로소 누대를 복원하였다. 이때 이태의 큰아들 이원량[1504~1567]의 유덕을 기리는 제헌(霽軒)을 쌍경당 곁에 함께 지었다. 쌍경당의 연혁은 이태의 외현손 권두인의 「쌍경당중건기」, 이의한의 「쌍경당상량문」[1758], 홍성의 「쌍경당중건기」[1766], 권사호의 「쌍경당중수기」[1798], 이장운의 「월연대상량문」, 류후조의 「월연대중건기」[1869], 이돈우의 「월연대중건기」[1871], 이지복과 이종술의 후지, 권상규의 「제헌기」[1957] 등을 통하여 알 수 있다.

 

http://www.grandculture.net/miryang/toc/GC08700321

 

용평터널 - 디지털밀양문화대전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 용평과 교동 모리를 연결하는 터널. [개설] 용평터널은 1905년 경부선이 다니던 철로였으나, 현재 자동차가 다니는 일반도로의 터널로 사용되고 있다. [명칭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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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평터널은 1905년 경부선 철로로 사용되다가, 1940년 경부선 복선화로 선로가 이설되어, 추화산의 다른 방향에 터널이 새로 생기면서 더 이상 철로로 사용되지 않고 폐철되었다. 인도로 이용되다가 현재 자동차가 다니는 일반도로 터널로 사용되고 있다. [현황]

용평터널은 1940년부터 일반도로의 터널로 사용된 이후, 폭이 4m여서 양방향 통행이 어려워 사고의 위험과 교통 소통에 어려움이 많았다. 밀양시 민선6기 출범 이후 시민과 소통하는 열린 시정 구현을 위하여 도입된 ‘사랑방 콘서트’에서 진입 차량 통제 시스템 구축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2016년 8월 터널 반대편에서 진입하는 차량을 신호를 통하여 미리 알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안전사고를 예방할 수 있게 되었다. 용평터널은 약 300m의 짧은 터널이지만 100여 년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이색 드라이브 코스일 뿐 아니라, 차량 통행이 많지 않아 터널 내부에서 사진 촬영이 가능하여 포토존으로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 터널 안에는 전구 불빛을 장식하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2003년에 개봉된 곽경택 감독의 영화 「똥개」가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인근에는 우리나라 전통 정원의 하나인 밀양 월연정(密陽月淵亭)[1985년 1월 14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지정]과 밀양아리랑길 등 명소가 자리하고 있다.


https://namu.wiki/w/%EB%98%A5%EA%B0%9C(%EC%98%81%ED%99%94)

 

똥개(영화) - 나무위키

"아부지는 갱찰, 내는 양아치." 곽경택 감독, 정우성 주연의 영화. 영화는 곽경택의 '고향영화'로 밀양시에서 촬영했다. 모자란 정우성과 주변 인물들의 경상도 소도시의 일상을 다루다가, 중후

namu.wiki

 

 

https://www.youtube.com/watch?v=iJfUlKdc7yM

 

 

 

커피잔 속의 초코렛 인물그림, 소피아 로렌이라는 분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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