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 21대 국왕 영조.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자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 [사진제공=경기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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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와 노론은 왜 사도세자를 등졌나 | 중앙일보

[유성운의 역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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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가 죽자 더 번성한 처가

혜경궁 홍씨는 1735년 홍봉한의 차녀로 태어나 1815년 81세로 생을 마쳤습니다. 아들 정조가 죽은 뒤에도 15년을 더 살았습니다. 장수했지만 삶은 평탄치 않았습니다.
왕을 이을 줄 알았던 남편은 시아버지의 손에 죽더니, 아들은 얼굴도 못 본 시아주버니 효장세자(태어난 지 2년 만에 사망한 사도세자의 형)의 아들로 입적돼 ‘대비(大妃)’의 자리에도 오를 수 없는 신세가 됐습니다.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올랐는데도 혜경궁이라는 신분으로 머무르게 된 이유입니다.

 

대비가 아니면 왕실에서의 위상은 물론 영향력에도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정조가 죽은 뒤 자신보다 10살 어린 시어머니(영조의 두 번째 부인 정순왕후)의 친정, 경주김씨에 의해 홍씨 집안이 도륙됐을 때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바라봐야 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한중록』을 남기게 된 주요 요인 중 하나가 됐습니다.

혜경궁의 친정인 풍산 홍씨 집안은 어땠을까요. 이들은 노론에 속했지만 혜경궁 홍씨가 입궐하기 전까진 그다지 주목받는 집안은 아니었습니다. 홍봉한도 딸인 혜경궁이 세자빈으로 간택된 후에야 비로소 과거(문과)에 급제했으니까요. 하지만 딸 덕분에 팔자가 180도 바뀝니다. 각종 요직을 거치다 영의정까지 오르며 노론의 핵심 인물로 거듭나게 됩니다.
참고로 그의 5대조 홍주원은 선조의 부마였는데, 광해군과 대척점에 선 정명공주의 남편이었습니다. 그러고보면 이 집안은 왕실과 혼맥 인연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도세자는 이때 혜경궁 홍씨에게 “이번엔 아마도 무사치 못할 듯하니… 나는 폐하고 세손(정조)은 효장세자의 양자를 삼으면 어찌할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미 당시 분위기가 사도세자가 무사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흘러갔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화성으로 행차하는 혜경궁홍씨의 가마를 묘사한 반차도.

이 무렵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가 세자 처소에 와서 얼마간 머물면서 모자간의 애틋한 정을 나누었다는 『한중록』의 기록도 이런 추정을 가능케 합니다.

1762년(영조 38년) 5월 15일 발표된 영조의 ‘폐세자반교문’은 총 2건인데, 이 중 한 건은 구성이 흥미롭습니다. 바로 영빈이씨의 발언을 통해 사도세자의 각종 비행과 문제점을 조목조목 밝힙니다. 이 사건이 정치적 사전 조율을 거쳐 진행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혜경궁 홍씨의 집안은 이미 영조의 마음이 떠난 사위(사도세자)를 지키며 반대파(공홍파)로부터 공격을 당하기보다는 외손자(정조)를 보호해 가문의 위상을 지키는 '플랜 B'로 방향을 설정했던 것 같습니다.
임오화변이 발생하고 3개월 가량 지난 후 사위를 떠나보낸 홍봉한이 영조에게 올린 상소문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성상의 이번의 거조(사도세자의 처분)는 진실로 부득이한 것이었고 그날의 교시(敎示)도 역시 부득이한 것이었습니다…애통해하는 마음은 애통해하는 것이고, 의리는 의리이니 사사로운 애통으로 인하여 공적인 의리를 가릴 수는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영조실록』 38년 8월 26일)

그런 점에서 혜경궁 홍씨가『한중록』에서 사도세자의 비극적 최후가 그의 '광기(狂氣)' 때문이라고 한사코 강조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도세자가 죽은 뒤 궁중엔 '죄인지자 불가승통(罪人之子 不可承統·죄인의 아들은 왕위 계승이 불가하다)'는 말이 떠돌았습니다. 사도세자의 아들을 겨냥한 정치적 모략선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세자가 그저 '미치광이'라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국법상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지만, 미치광이의 아들은 제약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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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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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장헌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뒤에 眞宗이 됨)의 후사(後嗣)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에 대리청정을 하다가 다음해 영조가 죽자 25세로 왕위에 올랐는데, 생부인 장헌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또한 세손으로 갖은 위험 속에서 홍국영(洪國榮) 등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이겨냈다.

그리고 ‘개유와(皆有窩)’라는 도서실을 마련해 청나라의 건륭문화(乾隆文化)에 관심을 갖고 서적을 수입하면서 학문 연마에 힘썼다.

그리하여 즉위하자 곧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해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鄭厚謙) · 홍인한(洪麟漢) · 홍상간(洪相簡) · 윤양로(尹養老) 등을 제거하였다. 나아가 그의 총애를 빙자해 세도정치를 자행하던 홍국영마저 축출해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였다.

정조는 퇴색해버린 홍문관을 대신해 규장각을 문형(文衡)의 상징적 존재로 삼고, 홍문관 · 승정원 · 춘추관 ·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성지화(作成之化)’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고 본격적인 문화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작성지화’의 명분 아래 기성의 인재를 모으고, 참상(參上) · 참외(參外)의 연소한 문신들을 선발, 교육해 국가의 동량으로 키워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우문지치’의 명분 아래 세손 때부터 추진한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수입에 노력하는 동시에 서적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였다.

곧 임진자(壬辰字)주1 · 정유자(丁酉字)주2 · 한구자(韓構字)주3 · 생생자(生生字) · 정리자(整理字) · 춘추관자(春秋館字) 등을 새로 만들어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사서 · 삼경 등의 당판서적(唐版書籍)의 수입 금지 조처도 이와 같이 자기문화의 축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왕조 초기에 제정, 정비된 문물제도를 변화하는 조선후기 사회에 맞추어 재정리하기 위해 영조 때부터 시작된 정비작업을 계승, 완결하였다.

『속오례의(續五禮儀)』 ·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대전통편(大典通編)』 · 『문원보불(文苑黼黻)』 · 『동문휘고(同文彙考)』 · 『규장전운(奎章全韻)』 · 『오륜행실(五倫行實)』 등이 그 결과였다. 이와 함께 자신의 저작물도 정리해 뒷날 『홍재전서(弘齋全書)』(184권 100책)로 간행되도록 하였다(1814).

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당쟁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가졌으며,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해 영조 이래의 기본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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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정조(正祖, 1752년 10월 28일 ~ 1800년 8월 18일, 재위: 1776년 4월 27일(음력 3월 10일)[1] ~ 1800년 8월 18일(음력 6월 28일)[2])는 조선 제22대 왕이며,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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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1752년 10월 28일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창경의 경춘전(景春殿)에서 태어났다. 형인 의소세자가 3살의 어린 나이로 먼저 요절한 뒤 태어났기 때문에 탄생 당일 영조에 의해 원손(元孫)이 되었다.[6] 의소세자의 장례를 치른지 3년이 지나 세손으로 책봉하였다.[7][8]

1755년(영조 31년), 영조는 어린 원손이 네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총명한 것을 기뻐하였으며 신하들 앞에서 경전을 읽어보도록 하였다. 원손은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 10자를 외고 부모 두글자를 썼다.[9] 영조는 이후로도 여러 차례 원손이 한번 본 사람을 구별하여 가리키는 것이나 글씨를 쓰는 것을 칭찬하였다. 1757년 영조는 직접 자서를 보고 글자를 골라 원손의 이름을 정하였다.[10]

영조는 김종수를 세자의 교리(校理)로 삼아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고 1761년 4월 14일(영조 37년 음력 3월 10일) 성균관입학하였다.[11]

대리청정

노론 벽파계열이 당론으로 세손을 제거하려 하자 세손은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하며 신경썼다. 특히 홍국영은 그에게 불리한 자료로 작용할만한 자료, 물건들을 찾아 제거했고, 세손 시절 사부인 김종수는 당론에 맞서며 택군이라며 벽파를 공격했다. 한편 김종수는 외척이 주를 이룬 벽파와는 다른 또 다른 정파 청명당 혹은 청명파를 구성한다. 1772년 청명(淸名, 청렴함과 명예)을 존중하고 공론을 회복해 사림 정치의 이상을 이루려는 노론내 청명류(淸名流)의 정치적 결사체가 드러날 때, 당파를 없애려는 영조는 이들이 오히려 당론을 조장한다고 보고 김종수를 비롯한 조정(趙晸), 김치인(金致仁), 정존겸(鄭存謙), 이명식(李命植) 등을 유배보냈다. 이때 김종수는 경상도 기장현 금갑도(金甲島)로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방면되었다.

1775년(영조 51년) 봄, 영조는 82세의 나이로 노환에 시달려 정무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자 세손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맡겼다. 그러나 세손이 대리청정을 할 경우 입지가 궁색하게 될 것을 염려한 노론 벽파는 이를 극구 반대하였다.[31]

임금이 이르기를,“근래 나의 신기(神氣)가 더욱 피로하여 한 가지의 공사를 펼치는 것도 역시 수응하기가 어렵다. 이와 같고서야 만기(萬幾)를 처리할 수 있겠느냐? …… 두 자[주해 3]를 하교하려 하나 어린 세자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렵다. 청정(聽政)에 있어서는 우리 왕조(王朝)의 고사(故事)가 있는데, 경 등의 의향은 어떠한가?”하니, 적신(賊臣) 홍인한이 앞장서서 대답하기를,“동궁께서는 소론과 노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하였다. 임금이 한참 동안 흐느껴 울다가 기둥을 두드리며, 이르기를,“경 등은 우선 물러가 있거라.”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영조 125권, 51년 11월 20일(계사)

당시 세자의 나이는 24세였다. 영조는 홍인한을 파직시키고 옥새를 세자궁으로 옮겨 대리청정을 맡겼다. 장조(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갔던 홍계회, 김상로, 정후겸, 김귀주 등 노론 벽파는 정조의 즉위를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시도하였다. 영조는 세손에게 “김상로는 너의 원수이다.”라고 한 바 있다. 이때 세자시강원의 홍국영이 이들을 탄핵하여 세손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32] 영조 또한 순감군(巡監軍)의 수점권을 세자에게 주어 만약을 대비하였다.[33]

즉위 초기

홍국영의 득세와 몰락

정조는 홍국영을 특별히 발탁하여 동부승지로 삼았다가[45] 다시 도승지로 올렸고[46] 임금의 호위를 위한 숙위소를 설치하여 홍국영을 숙위대장에 임명하였다.[47] 전례가 없던 이러한 조치로 홍국영은 막강한 실권을 쥐게 되었다.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업고 모든 정사에 관여하여 삼사[주해 4]의 소계[주해 5], 팔도의 장첩[주해 6], 묘염[주해 7], 전랑[주해 8] 직의 인사권 등을 모두 총괄하였고 이에 따라 백관들은 물론 8도감사나 수령들까지도 그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홍국영의 이러한 득세는 실권을 쥔 세도 정치의 시작으로 평가된다.[48]

정조는 세자 시절부터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49] 정조는 즉위 초기 반대 세력에 둘러쌓여 있었기 때문에 홍국영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6월 23일 정후겸과 홍인한의 수하였던 윤약연, 홍지해 등을 친국하면서 소론이 홍국영을 제거하려고 한 시도에 대해 세자시절 “옷을 벗지 못하고 자는 수가 또한 몇 달인지를 알 수 없었으니, 저궁의 고립과 위태함이 어떠했고 국가 사세의 간난(艱難)함이 어떠했겠는가?”라며 오직 홍국영이 자신을 보호하였다고 언급하면서 “홍국영에 있어서는 궁료(宮僚)로 있을 때부터 임금의 몸을 보호해와 한쪽 손으로 하늘을 떠받치는 공로가 있었으니, 무릇 이 사람을 장해(狀害)하려는 흉계를 하는 사람은 곧 우익을 제거해 버리려는 흉심이 있는 것이다. 즉조(卽祚)한 이후 …… 오직 이 하나의 신하를 의지하여 믿고 있는데 기필코 장살하고야 말려고 하니,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장차 어느 지경까지 가려는 것인가?”라고 하여[50] 홍국영에 대한 신임을 보였다.

그러나 홍국영은 사사로운 관계에 따라 인사를 전횡하는가 하면, 영조의 계비이자 정조에게는 할머니가 되는 정순왕후가 독단적인 한글 전교를 통해 후궁을 간택한다고 하자 자신의 누이를 원빈으로 들이는 등 무리한 권력 강화를 시도하였다.

홍국영 몰락의 직접적 원인은 확실하지 않다. 원빈이 왕비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믿어 이를 보복하려고 왕비의 음식에 독약을 넣다가 발각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48][51] 그러나, 홍국영 몰락의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이 지나치게 권력을 탐한 것과, 외척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억제하는 정조의 정책에 반해 스스로가 외척이 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52] 현경왕후는 《한중록》에서 원빈이 죽자 홍국영이 효의왕후를 의심하여 내전의 나인을 함부로 국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53],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 담(憺)을 앞세워 왕위계승권에 관여하려 한 것도 정조가 홍국영을 축출한 원인이 될 것이다.[52]

1779년(정조 3년) 홍국영은 도승지를 사임하였고[54] 정조는 홍국영에게 백마와 금전을 선물로 주며 낙향시켰다.[55] 홍국영은 낙향한 이후 탄핵 상소가 이어져 강원도 횡성 강릉 등지로 방출되었다가 1781년(정조 5년) 사망하였다. 정조는 홍국영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이 사람이 이런 죄에 빠진 것은 참으로 사려(思慮)가 올바른 데 이르지 못한 탓이다. 그가 공을 세운 것이 어떠하였으며, 내가 의지한 것이 어떠하였었는가? 처음에 나라와 휴척(休戚)을 함께한다는 것으로 지위가 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않았기에 권병(權柄)을 임시로 맡겼던 것인데, 그가 권병이 너무 중하고 지위가 너무 높다는 것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스스로 삼가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서 오로지 총애만을 믿고 위복(威福)을 멋대로 사용하여 끝내는 극죄(極罪)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이는 나의 허물이었으므로 이제 와서는 스스로 반성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라며 스스로를 탓하였다.[56]

왕권강화와 정치개혁

규장각

정조는 홍국영의 실각 후 탕평책을 바탕으로 직접 정치를 이끌었다. 그러나 집권 초기 반대파에 둘러쌓여 있던 정조에게는 친위세력이 없었다. 정조는 자신의 뜻에 따를 문신을 육성하기 위하여 규장각을 설치하는 한편 군영을 개혁하여 국왕의 병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장용영

《무예도보통지》의 삽화

"없는 군사는 도태시키고 낭비되는 군량은 줄여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여 새롭게 장용영을 세우는 대신 기존의 5군영에서 수어청 총융청의 폐지를 관철시키는 한편, 군영의 장군 임명은 병조판서를 통해 임금이 재가하도록 하여 군 인사권에 대한 국왕의 통제권을 강화하였다.[77] 기존의 5군영은 외척을 비롯한 여러 권신들에게 장악되어 있었고 인사권 또한 사실상 임금에게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조는 이를 일원화하고자 하였으나 창설의 목적과 규모가 서로 달라 이를 통합하기가 쉽지 않자 새롭게 군영을 만들게 된 것이다.[78]

정조는〈병학통〉을 직접 지어 군사 훈련을 중요시 하였고, 정기적인 훈련을 감독하는 한편 직접 군사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30 명에서 출발한 장용영은 수원으로 진영을 옮긴 뒤 18,000 명까지 늘어났다.[79] 장용영의 장교는 무과를 통하여 선발하였는데, 양반의 서얼과 평민 가운데에서도 급제자가 많았다.[78] 또한, 정예병의 훈련을 위해 규장각 검서인 이덕무, 박제가와 장용영 장교인 백동수에게 훈련교본인 《무예도보통지》를 간행하도록 하고[80], 1795년(정조 19년) 이순신의 글을 모아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하면서 이순신의 일기들을 모아 《난중일기》라고 이름붙였다.[81]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 세자의 헌릉원을 수원에 이장한 뒤 수원 화성을 축조하고, 능행을 명분으로 자주 거둥하였는데, 1795년(정조 19년) 을묘 원행에서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수원에서 과거를 열어 대소 신료와 군사를 이끌고 대규모 원행을 하였다. 장용영의 군사들을 수반한 을묘 원행은 군주의 힘을 대내외에 과시한 것이었다.[82] 이때의 원행을 기록한 그림이 〈정조 대왕 능행 반차도〉로 경기감사가 앞을 서고 채제공이 그 뒤를 이었다. 반차도에는 모두 1,779명의 인물과 779마리의 마필이 등장하고 있다.[83] 장용영은 정조의 각별한 관심 속에 정예군으로 성장하였으나, 정조 사후 순조를 대리하여 수렴청정을 한 정순왕후에 의해 해체되었다.[84]

화성능행반차도(부분). 가마에 쓰인 자궁(慈宮)이라는 표식은 현경왕후다.

배다리

문득 연산군 시대를 연상시키는 배다리를 한강에 놓는다. 연산군 시대의 배다리는 조운(漕運)에 쓰이는 한강[85] 물길을 오래도록 막는다는 평(評)이 있어서,[86] 정조는 70칸짜리[87] 창고를 지어[85] 배다리에 건설에 필요한 자제와 장비를 보관하며 재활용하여 설계를 발전시켰다.[86] 상설 기관인 주교사(舟橋司)를 설치하여 배다리를 관리하였고, 헌릉(獻陵)·영릉(英陵)·영릉(寧陵)에 갈 때 광나루에 배다리를 놓았다.[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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