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당시인은 삼당(三唐)으로 줄여 부르기도 하며 이들의 시를 삼당시(三唐詩)라 한다. 삼당이라는 명칭은 임상원(任相元)이 ≪손곡집 蓀谷集≫의 서(序)에서 이들 세 사람의 문집을 합간(合刊)하여 삼당집(三唐集)이라 하였다는 기록에서부터 보인다. 이후 신위(申緯)가 <동인논시절구 東人論詩絶句>에서 다시 “재천삼당최백이(才擅三唐崔白李)”라 하였고, 그 주에 이들 세 사람을 세상에서 삼당이라 일컬는다고 하였다. 삼당시인의 가장 큰 의의는 고려 전기 이래 지속되어 온 송시풍(宋詩風)을 당시풍으로 전환하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주(李冑), 김정(金淨), 신광한(申光漢), 나식(羅湜), 김인후(金麟厚), 박순(朴淳) 등이 나와 당시풍의 시를 썼으나 이러한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는데, 이들에 이르러 당시풍이 시단에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은 송시(宋詩)의 관념적이고 이지적인 면 대신, 흥취와 여운을 중시하며 내용에 있어서도 낭만적인 경향을 띠는 것이 많다.
이달이 박순(朴淳)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교유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후 남원 광한루(廣寒樓)와 대동강의 부벽루(浮碧樓) 등에서 시회(詩會)를 가지면서 시사(詩社)로서의 성격이 형성되었다. 특히 봉은사(奉恩寺)에서 시재를 자주 겨루었다고 한다. 이달은 처음부터 당시풍을 지향한 것은 아니어서 송시풍을 선호하다가 최경창과 백광훈을 만나면서 당시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고도 한다.
이들 세 사람이 모두 당시를 배웠지만, 최경창은 청경(淸勁)하고 백광훈은 고담(枯淡)하며 이달은 부염(富艶)하다는 개성의 차이는 있다. 또 이들이 성당(盛唐)의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만당(晩唐)의 기미(綺靡)에 머물렀다는 한계도 아울러 지적되고 있으며, 모두 그 생애가 불우하여 맹교(孟郊)와 가도(價島)의 유(類)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또 율시보다는 절구에 능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출처 : 네이버고전문학사전, 권영민교수 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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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당시인(三唐詩人)의 시풍(詩風) 개괄(槪括)

◈ 삼당시인(三唐詩人)의 시풍(詩風) 개괄(槪括) 삼당시인(三唐詩人)이란 조선 중기에 세 사람의 당풍시(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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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훈(白光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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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훈은 박순(朴淳)의 문인으로 13세 되던 해인 1549년(명종 4)에 상경하여 양응정(梁應鼎)·노수신(盧守愼) 등에게서 수학하였다.

1564년(명종 19)에 진사가 되었으나 현실에 나설 뜻을 버리고 강호(江湖)에서 시와 서도(書道)로 자오(自娛)하였다. 1572년(선조 5)에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을 따라 백의(白衣)로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시재(詩才)와 서필(書筆)로써 사신을 감탄하게 하여 백광선생(白光先生)의 칭호를 얻었다.

백광훈은 1577년(선조 10)에 처음으로 선릉참봉(宣陵參奉)으로 관직에 나서고, 이어 정릉(靖陵)·예빈시(禮賓寺)·소격서(昭格署)의 참봉을 지냈다. 그는 최경창(崔慶昌)·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리었다. 송시(宋詩)의 풍조를 버리고 당시(唐詩)를 따르며 시풍을 혁신하였다고 해서 그렇게 일컬었다.

송시냐 당시냐 하는 시비는 아주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삼당시인들은 송시가 자연스런 감동에서 멀어지고 인정이나 세태의 절실한 경험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을 지적하고, 방향전환을 위해서 당시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백광훈의 시는 당풍(唐風)을 쓰려고 노력하였고, 풍류성색(風流聲色)을 중시하여 자못 낭만적이고 염일(艶逸)한 시풍(詩風)을 지녔던 것이다. 이정구(李廷龜)는 그의 문집 서(序)에서 백광훈은 손꼽히는 호남시인으로 특히 절구(絶句)를 잘하여 당나라의 천재시인 이하(李賀)에 비견된다고 하였다.

또한 그의 시는 천기(天機)로 이루어진 것이라 평하였다. 백광훈은 이산해(李山海)·최립(崔岦) 등과 더불어 팔문장(八文章)의 칭호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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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창(崔慶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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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창은 백광훈(白光勳) · 이후백(李後白)과 함께 양응정(梁應鼎)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555년(명종 10) 17세 때에 을묘왜란으로 왜구를 만나자, 퉁소를 구슬피 불어 왜구들을 향수에 젖게 하여 물리쳤다는 일화가 있다.

1561년(명종 16) 23세 때부터 상상(上庠)에서 수학했다. 1568년(선조 1)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북평사(北評事)가 됐다. 예조 · 병조의 원외랑(員外郎)을 거쳐 1575년(선조 8)에 사간원정언에 올랐다. 1576년(선조 9) 영광군수로 좌천됐다. 이때에 뜻밖의 발령에 충격을 받고 사직했다. 그 뒤에 가난에 시달렸다.

다음해에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복직했다. 1582년(선조 16) 43세에 선조가 종성부사(鍾城府使)로 특별히 제수했다. 그러나 북평사의 무고한 참소가 있었고 대간에서 갑작스러운 승진을 문제 삼았다. 그래서 선조는 성균관직강으로 고치도록 명했다. 최경창은 상경 도중에 종성객관에서 죽었다. 저서로 『고죽유고』가 있다.

최경창은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이이(李珥) · 송익필(宋翼弼) · 최립(崔岦) 등과 무이동(武夷洞)에서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또한 정철(鄭澈) · 서익(徐益) 등과 삼청동에서 교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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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李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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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은 당시의 유행에 따라 송시(宋詩)를 배우고 정사룡(鄭士龍)으로부터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다. 그러나 박순(朴淳)은 그에게 시를 가르치면서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로써 으뜸을 삼아야 한다. 소식(蘇軾)이 비록 호방하기는 하지만, 이류로 떨어진 것이다.”라고 깨우쳤다. 그리고 이백(李白)의 악부(樂府)·가(歌)·음(吟)과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近體詩)를 보여주었다.

이에 그는 이백·왕유·맹호연의 시를 보고 시의 오묘한 이치가 그들의 작품에 있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와 당시를 열심히 익혔다. 『이태백집(李太白集)』과 성당십이가(盛唐十二家: 당나라 때의 유명한 열두 명의 시인)의 글, 유우석(劉禹錫)과 위응물(韋應物)의 시, 양백겸(楊伯謙)의 『당음(唐音)』 등을 모두 외웠다고 전한다. 이렇게 5년 동안 열심히 당시를 배우자, 시풍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비슷한 품격의 시를 쓰던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과 어울려 시사(詩社)를 맺어, 문단에서는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봉은사(奉恩寺)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지방을 찾아다니며 시를 지었는데,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모였다. 임제(林悌)·허봉(許愼)·양대박(梁大樸)·고경명(高敬命) 등과도 자주 어울려 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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