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昌 上院寺 重創勸善文. 조선 세조 10년(1464)에 당대의 고승인 신미대사, 학열대사, 학조대사 세 명이 세조를 위하여 오대산 상원사를 중수하며 지은 글.
현재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었고 1997년 국보 제292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
신미대사는 세종 대의 고승으로 문종으로부터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칭호를 받았다. 학열대사는 세조가 만든 불경 번역 기관인 간경도감을 지휘하며 불경을 훈민정음으로 번역, 전국에 널리 반포하였으며, 학조대사는 직지사의 주지로 역시 수많은 불경을 국어로 번역, 간행하였다.
이들 고승 세 명이 세조의 만수무강을 빌고자 상원사를 중창하면서 중창권선문을 지었다. 세조가 이 소식을 듣고 쌀, 무명, 베와 철 등을 보내면서 직접 친필로 쓴 상원사 어첩(御牒)을 전했는데, 중창권선문과 함께 월정사에서 소장 중이다.
중창권선문은 한자 원문과 한글 번역이 함께 있는데, 한글 번역본은 손글씨 한글 문서 중에서는 매우 초창기 것이라 의미가 크다. 중창권선문의 한글 번역문은 손으로 쓴 한글문서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알려졌지만, 2015년 원각사 소장 능엄경언해에서 세조 7년(1461)에 쓴 손글씨 한글이 나와 '가장 오래된 손글씨 한글'에서 밀려났다.
중창권선문에는 신미, 학열, 학조의 친필서명뿐만 아니라 세조와 세자빈, 왕세자의 수결과 도장까지 찍혔으므로, 세조 때 조선왕실의 불교 문화 포용성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또한 한글을 직접 쓴 당대 필사본 중 매우 초장기 문서로 한글 창제 극초기의 국문학 연구에도 중요한 사료이다.
이들 고승 세 명이 세조의 만수무강을 빌고자 상원사를 중창하면서 중창권선문을 지었다. 세조가 이 소식을 듣고 쌀, 무명, 베와 철 등을 보내면서 직접 친필로 쓴 상원사 어첩(御牒)을 전했는데, 중창권선문과 함께 월정사에서 소장 중이다.
중창권선문은 한자 원문과 한글 번역이 함께 있는데, 한글 번역본은 손글씨 한글 문서 중에서는 매우 초창기 것이라 의미가 크다. 중창권선문의 한글 번역문은 손으로 쓴 한글문서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알려졌지만, 2015년 원각사 소장 능엄경언해에서 세조 7년(1461)에 쓴 손글씨 한글이 나와 '가장 오래된 손글씨 한글'에서 밀려났다.
중창권선문에는 신미, 학열, 학조의 친필서명뿐만 아니라 세조와 세자빈, 왕세자의 수결과 도장까지 찍혔으므로, 세조 때 조선왕실의 불교 문화 포용성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또한 한글을 직접 쓴 당대 필사본 중 매우 초장기 문서로 한글 창제 극초기의 국문학 연구에도 중요한 사료이다.
3. 보다 이른 시기의 한글 친필 발견
https://www.youtube.com/watch?v=xs4h6LAzaDc
https://www.youtube.com/watch?v=8I_VfXgYXbc
5. 국보 제2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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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홈페이지 :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平昌 上院寺 重創勸善文세조 10년(1464) 세조의 왕사인 혜각존자 신미 등이 학열, 학조 등과 함께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고자 상원사를 새롭게 단장하면서 지은 글로,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세조가 쌀, 무명, 베와 철 등을 보내면서 쓴 글과 함께 월정사에 소장되어 전한다.
각각 한문 원문과 번역으로 되어 있는데, 신미 등이 쓴 글에는 신미, 학열, 학조 등의 수결(지금은 서명)이 있으며, 세조가 보낸 글에는 세조와 세자빈, 왕세자의 수결과 도장이 찍혀 있다. 한글로 번역된 것은 가장 오래된 필사본으로 유명하다.
세조와 상원사 및 신미와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역사적 자료이며, 당시의 국문학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가장 오래된 한글 서적이면서도 보존 상태가 완벽하여 1996년 11월 28일 보물 제140호에서 국보 제292호가 되었다.
세조와 상원사
세조는 즉위 이전부터 불경을 언해하거나 불교 관련 행사를 지원하는 등 불교에 관심이 많았다. 신미는 왕사(王師)로서 세조의 불교사상 형성에 영향을 끼쳤으며 당시 왕실 불사와 밀접하게 관련된 인물이었다. 그는 수미(守眉), 학열(學悅), 학조(學祖), 동생 김수온과 더불어 간경 사업의 핵심 세력이 되었고, 원각사 창건에도 일정 부분 참여하였다. [5] 상원사를 중창하게 된 계기는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신미, 학열 등이 세조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평창 상원사를 중창하기로 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세조의 병환이 심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상원사 중창기』에 정희왕후가 신미와 학열 등에게 사찰을 중창할 장소에 대해 묻자 신미 학열 등이 오대산의 중대에 절을 짓도록 권하였고 정희왕후가 이에 신미, 학열 등에게 일을 일임하였다는 일이 기록되어 있어 평창 상원사 중창이 세조의 병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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