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世祖)와 효령대군(孝寧大君), 한계희(韓繼禧) 등이 참여하여 불경(佛經)인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을 언해한 책.
개설
『반야바라밀다심경언해(般若波羅密多心經諺解)』는 세조 대에 한계희 등이 엮은 불경 언해서이다. 이 책은 흔히 『반야심경언해(般若心經諺解)』 또는 『심경언해(心經諺解)』라고 줄여서 부른다. 간경도감(刊經都監) 도제조(都提調)황수신(黃守身)의 『진금강경심경전(進金剛經心經箋)』과 책의 말미에 붙어 있는 한계희(韓繼禧)의 발문의 내용을 볼 때, 이 책은 세조가 손수 구결을 달고 효령대군과 한계희 등에게 명을 내려 언해하도록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편찬/발간 경위
당(唐)나라 현장(玄裝)이 649년 한역(漢譯)을 한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密多心經)』에 702년 법장(法藏)현수(賢首)가 약소(略疏)를 달아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般若波羅蜜多心經略疏)』를 편찬하였다. 이어 1044년 송(宋)나라의 중희(仲希)가 주해하여 『반야심경소현정기(般若心經疏顯正記)』를 만들었는데, 『반야바라밀다심언해』는 세조와 효령대군, 한계희 등이 참여하여 이 책을 언해한 것이다.
『반야바라밀다심경』은 신라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에서도 통용되었다.(『세종실록』 13년 9월 2일) 비록 조선은 배불숭유(排佛崇儒) 정책을 국가의 이념으로 삼았으나, 조선 초기에 불교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며 왕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세조는 효령대군과 한계희 등을 동원하여 1464년(세조 10) 간경도감에서 『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와 함께 『반야바라밀다심경』을 언해하게 하였다.
한편 『반야바라밀다심경』은 권수 1행에 소자(小字)로 ‘반야심경소현정기(병서)(般若心經疏顯正記(幷序))’, 5행에 대자(大字)로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병인)(般若波羅蜜多心經略疏(幷引))’이라 하였고, 14뒷면 8행에 대자로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이라 하였는데 다른 불경 언해의 통칭에 비추어 『반야바라밀다심경언해』라 하였다.
서지 사항
1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간행도감에서 간행하였다. 책의 크기는 세로 21.4㎝, 가로 14.7㎝이고, 지질은 한지이다.
여러 본이 전하고 있는데, 서울대학교 규장각 일사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책은 본문(67장)과 한계희의 발문 2장을 포함하여 모두 69장으로 되어 있다. 책의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771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 1211호로 지정된 동두천시 자재암(自在庵)에 소장된 책에는 책의 앞쪽에 『진금강경심경전(進金剛經心經箋)』 3장과 조조관(雕造官)의 제명(題名)이 2장 더 있어서 모두 74장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책이 김병구씨 소장으로도 전한다.
중간본은 원간본을 복각한 것으로 간기에 ‘가정삼십이년계축오월일황해도황주사자비산심원사개판(嘉靖三十二年癸丑五月日黃海道黃州土慈悲山深源寺開板)’이라 되어 있어, 1553년(명종 8) 심원사(深源寺)에서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구성/내용
『반야바라밀다심경』은 대승 불교 반야사상(般若思想)의 핵심을 담은 경전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독송되는 경으로 완전한 명칭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인데, 그 뜻은 ‘지혜의 빛에 의해서 열반의 완성된 경지에 이르는 마음의 경전’으로 풀이할 수 있다. ‘심(心)’은 일반적으로 심장(心臟)으로 번역되는데, 이 경전은 크고 넓은 반야계(般若系) 여러 경전의 정수를 뽑아내어 응축한 것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반야바라밀다심경』은 수백 년에 걸쳐서 편찬된 반야 경전의 중심 사상을 260자로 함축시켜 서술한 불경으로, 불교의 모든 경전 중 가장 짧은 것에 속하며, 한국 불교의 모든 의식(儀式) 때 반드시 독송되고 있다. 『반야바라밀다심경』의 중심 사상은 공(空)이다. 공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는 뜻에서 시작하여 “물질적인 존재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변화하는 것이므로 현상으로는 있어도 실체·주체·자성(自性)으로는 파악할 길이 없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이 경전의 한역본으로는 현장의 것이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데, 그의 번역에 의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은 널리 알려진 구절이다. 산스크리트본을 그대로 번역하면 “현상에는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현상일 수 있다.”가 된다. 현상은 무수한 원인과 조건에 의하여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것이므로 변하지 않는 실체란 있을 수 없고, 또 변화하기 때문에 현상으로 나타나며, 중생은 그것을 존재로서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다.
현재 알려지고 있는 이 불경에 대한 한국인의 주석서로는 신라시대 승려 원측(圓測)의 『반야심경소(般若心經疏)』 1권과 『반야바라밀다심경찬(般若波羅蜜多心經贊)』 1권, 원효(元曉)의 『반야심경소』 1권, 태현(太賢)의 『반야심경고적기(般若心經古迹記)』 1권과 『반야심경주(般若心經註)』 2권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현존본은 원측의 『반야심경소』 1권뿐이며, 원효의 소는 최근에 복원되었다. 또한 최근에는 수십 종의 번역본 및 해설서가 간행되어 있다.
판본(版本)으로는 고려대장경의 반야부에 있는 것이 대표적이며, 번역된 것으로는 1463년(세조 9)에 한계희 등이 세종의 명에 의해 번역하여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반야바라밀다심경』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전문과 한계희(韓繼禧)의 발문에 의하면 구결은 세조가 달고 번역은 한계희 등이 하였다고 한다. 책의 체재와 번역에 나타난 국어는 당시의 간경도감 간행 언해서와 같다. 기본적으로 표기법도 그러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변화된 형태를 보인다. 이 책의 국어사 자료로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방점은 정음과 한자가 함께 쓰였는데, 언해문의 정음과 동국정운(東國正韻)식 한자음에만 표기하고, 본문과 약소 구결문의 쌍행으로 된 정음 구결에는 표기하지 않았다.
‘ㅸ’은 쓰이지 않고, ‘오,우’로 나타나며, ‘ㆆ’은 주로 한자음 표기에 썼고, ‘ㅭ+전청자형’은 ‘ㄹ+전탁자형’으로 바뀌었으며, ‘ㅿ’은 대부분 그대로 사용되었다. 각자 병서 ‘ㄲ ㄸ ㅆ ㆅ’가 쓰이고, 합용병서도 ‘ㅼ, ㅽ, ㅳ, ㅄ, ㅴ’이 쓰였다. 종성은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의 규정대로 썼으며, ‘ㆁ’은 분철되기도 하고 연철되기도 했다. 사잇소리 글자는 대부분 ‘ㅅ’으로 단일화하였으나, ‘ㅭ’이 쓰인 경우가 가끔 있다.
문법적으로는 종결접미사가 대개 서술형인 ‘-니라’로 끝나며, 주체존대법으로 ‘-으시-/-으샤-’, 객체존대법으로 ‘-ᄉᆞᆸ-/--’, ‘-ᄌᆞᆸ-/--’, ‘--/--’, 상대존대법으로 ‘--/--’의 쓰임이 없다. 그 외에도 단어의 형성, 조사의 사용, 용언의 활용, 종결접미사, 연결접미사 등에 많은 특색을 보인다.
의의와 평가
이 책에 나타나는 언어 사실은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다른 불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본에 따라서는 묵서로 약체구결이 기입되어 있는 것이 있어 조선전기의 구결 연구 자료로 쓰일 수 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
『세조실록』
『예종실록』
박종국, 『한국어 발달사』, 세종학연구원, 1996.
小倉進平, 『증정 조선어학사(增訂朝鮮語學史)』, 도강서원(刀江書院), 1940.
안병희, 「중세어(中世語)의 한글 자료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考察)」, 『규장각』 3, 서울대학교 도서관, 1979.
〔한문〕 -----【「사」는 하여금 하는 말이다. 「인」은 사람이다. 「이」는 쉽다는 것이다. 「습」은 익힌다는 것이다. 「편」은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어」는 아무 거기에 하는 입겾에 쓰는 글자이다. 「일」은 날이다. 「용」은 쓴다(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따름이라 하는 뜻이다.】
〔한문〕 -----【「사」는 하여금 하는 말이다. 「인」은 사람이다. 「이」는 쉽다는 것이다. 「습」은 익힌다는 것이다. 「편」은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어」는 아무 거기에 하는 입겾에 쓰는 글자이다. 「일」은 날이다. 「용」은 쓴다(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따름이라 하는 뜻이다.】
『월인천강지곡』은 세종이 석가의 공덕을 찬송하여 지은 노래이다. 1446년(세종 28)에 세상을 떠난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 이듬해인 1447년(세종 29)에 수양대군(首陽大君, 훗날의 세조)이 산문 형태의 『석보상절』을 편찬하였다. 세종은 『석보상절』의 내용을 토대로 찬불가 형식의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은 하나의 달이 천 개의 강물에 비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부처의 자비가 달빛처럼 모든 중생에게 비춘다는 뜻으로, 책 앞부분에 ‘부처가 백억세계에 화신하여 교화하심이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치는 것과 같으니라.’‘라는 주석이 있다.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은 매우 밀접하게 관련 있는 문헌으로, 1459년(세조 5)에 세조는 두 책의 내용을 합쳐 『월인석보(月印釋譜)』를 짓도록 했다. 신미(信眉), 수미(守眉), 학조(學祖) 등의 승려와 김수온(金守溫)과 같은 관료가 참여하여 『월인천강지곡』의 각 절을 본문으로 삼고, 그에 해당하는 『석보상절』의 내용을 주석이 되도록 편집하였다. 『월인석보』도 전권(全卷)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월인천강지곡』에서 전해지지 않는 내용의 상당 부분을 보완해주는 사료이다.
현재 『월인천강지곡』은 상권, 중권, 하권 중에서 상권과 중권의 낙장(落張)이 전해지고 있다. 상권에 실린 노래가 모두 194곡이므로, 책 전체로는 대략 600곡에 가까운 노래가 실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월인석보』에 실린 것을 합하면 400여 곡의 노래가 알려져 있다.
2 세종의 숭불과 『월인천강지곡』
『월인천강지곡』은 세종이 직접 지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방대한 양의 찬불가를 세종이 직접 지었다는 것에 의문을 갖는 연구자도 있지만, 『월인석보』의 석보상절서(釋譜詳節序), 어제월인석보(御製月印釋譜序)에 세종이 직접 지었다는 기록이 있고, 『세조실록』에도 세조가 부왕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듣다가 눈물을 흘렸다고 서술되어 있다.
세종은 『월인천강지곡』의 저자일 정도로 불교에 대한 이해와 신앙이 깊었다. 편찬 무렵에도 세종은 승려들을 모아 불경을 대자암(大慈庵)으로 옮겨두고, 유학자들을 동원하여 성녕대군(誠寧大君)의 집에서 불경을 금자(金字)로 쓰게 하였는데 수양대군과 안평대군(安平大君)에게 감독하게 하였다. 대군과 제군(諸君)이 참여한 불교 법석(法席)은 막대한 비용을 들여 2천 명의 승려가 7일 동안 행하였다.
이러한 세종의 숭불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다양하다. 세종이 노년기에 점차 쇠약해진 데다 소헌왕후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불교에 대한 믿음이 독실해졌다는 견해, 『석보상절』의 편찬과 『월인천강지곡』의 저술은 국가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개인 신앙의 표현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 등이 있다.
그러나 세종이 직접 찬불가를 지었다는 것은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삼국시대 이래 이어져왔던 불교사회의 면모를 부정하기 쉽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편찬의 배경과 의의를 개인 신앙에 국한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숭유억불‘을 기조로 하였던 조선에서 불교가 아무런 역할을 못했던 것도 아닐 뿐 아니라, 『월인석보』의 석보상절서에서는 『월인천강지곡』의 제작 이유가 석가모니의 성불을 한글로 번역하여 사람들에게 알림으로써 불교에 귀의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서술이 있다.
한편, 『월인천강지곡』의 편찬을 통해 세종이 불교의 권위에 기대어 왕실의 위상을 높이려 했다는 의견도 있다. 『월인천강지곡』에는 부자간의 인연을 주제로 하여 가족의 소중함을 강조한 부분이 많은데, 이를 세종의 애민 정신과 연결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3 한글 창제와 『월인천강지곡』
1443년(세종 25)에 한글 문자가 창제되었고, 1446년(세종 28)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만들어졌다. 그 과정에서 한글 사용과 보급을 위한 여러 사업도 행해졌다. 한글로 조선 건국의 유래를 밝히고 태조 이성계가 조상의 성덕을 찬송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가 편찬되었고, 한자음을 표음문자인 한글로 표기하는 방식과 체계를 담은 『동국정운(東國正韻)』이 완성되었다.
이처럼 한글을 활용한 여러 편찬 사업 중에서도 세종은 불경을 한글로 간행하는 일에 의욕적이었다. 세종이 불경을 한글로 짓게 된 배경에는 한글의 유통과 확산을 꾀했던 목적도 있었고,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불교 대중화의 소산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은 모두 한글 문헌이다. 특히, 『월인천강지곡』은 문자를 되도록 한자보다 한글로 표현하려 했던 세종의 노력이 엿보이는 문헌이다. 한글을 위주로 문자를 표기하였고, 한자는 협주로 처리하였다. 한자를 먼저 쓰고 한글을 그 아래에 달아놓은 『월인석보』의 「월인천강지곡」 부분과도 대조적일 뿐 아니라 중세의 거의 모든 한글 문헌이 한자를 큰 글자로 먼저 배치하였던 것과도 차이가 있다.
한편,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의 간행은 그 구체적인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한글 금속활자로 인쇄한 최초 문헌들 중 하나라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때의 한글 활자가 갑인자(甲寅字) 주조 이후에 만들어졌음은 『월인천강지곡』에 쓰인 활자의 기술력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점이다. 갑인자는 1434년(세종 26)에 만들어진 20여만 개의 대·소자 동활자이다. 그리고 『월인천강지곡』의 한글 활자는 갑인자 주조 이후 활자 인쇄의 수준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에 만들어졌다. 기존 연구에서는 이 한글 활자를 ’갑인자 병용 한글활자‘로 이름지었는데, 현재는 활자 자체가 남아있지는 않다.
4 『월인천강지곡』의 내용
『월인천강지곡』은 현재 상권만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석가의 일대기라는 특성에 따라 석가모니의 탄생, 출가, 성불, 열반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시간 순으로 서술되었고, 일부는 주제별로 정리되었다. 기본적으로 편찬 차례가 석가의 팔상(八相)을 따르고 있다. 불교에서는 석가의 일생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을 여덟 개로 구분하여 팔상이라고 이른다. 일반적으로 도솔내의(兜率來儀, 도솔에 온 일), 비람강생(毘藍降生, 남비니원에 탄생한 일), 사문유관(四門遊觀, 출가 전 태자 때 카필라성의 동서남북 4문 밖에 나가 인생의 네 가지 괴로움을 보고 출가를 결심한 일), 유성출가(逾城出家, 성을 넘어 집을 나간 일), 설산수도(雪山修道, 눈 덮인 산에서 도를 닦은 일), 수하항마(樹下降魔, 나무 밑에서 악마를 항복시킨 일), 녹원전법(鹿苑轉法, 녹야원에서 설법을 한 일), 쌍림열반(雙林涅槃, 쌍림에서 열반에 든 일) 등의 내용이다. 『석보상절』이 팔상을 토대로 하여 석가모니의 일생을 산문체로 서술했고, 세종은 이를 보고 찬불가 형식의 『월인천강지곡』을 만들었기 때문에, 두 문헌의 서술 내용은 일부 다른 점이 있지만 비슷하다.
『월인천강지곡』 상권은 성불(成佛)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교만심, 재물욕, 색욕 등을 버리게 하여 불법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석가모니의 설법 내용이 서술되었다. 그리고 삽화가 있어 석가모니와 여러 부처가 설법으로 중생을 가난, 죽음, 이산 등의 각종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 모습을 표현하였다. 이어 성불의 방법으로 보시와 효도가 제시되었고, 석가모니가 비록 열반했지만 그의 가르침은 항상 이 세상에 머무르고 있음을 서술하였다. 이와 같이 『월인천강지곡』에서는 불교의 위대함, 불교 교화를 통한 갈등의 해소, 불사의 필요성과 타당성, 도덕적 윤리 등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특히 성불의 방법으로 효행이 매우 강조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아직 『월인천강지곡』의 중권·하권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나마 『석보상절』에 끼인 낙장본과 『월인석보』에 실린 「월인천강지곡」을 통해 그 내용을 헤아릴 수 있지만,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다만 『석보상절』의 내용이 『월인석보』에 실리면서 많이 수정된 반면, 『월인천강지곡』은 일부 주석, 독음 표기 등 몇 가지 외에는 거의 그대로 수록되었기 때문에 『월인석보』를 통한 내용의 복원에는 용이한 편이다.
5 『월인천강지곡』의 사료적 가치
『월인천강지곡』은 『용비어천가』와 함께 가장 오래된 국문시가로, 수려한 한글 문체로 어우러져 있다. 또한 최초의 한글 금속활자본이다. 이에 불교사상사, 국문학, 서지학 등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월인천강지곡』은 현재 상권만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석가의 일대기라는 특성에 따라 석가모니의 탄생, 출가, 성불, 열반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시간 순으로 서술되었고, 일부는 주제별로 정리되었다. 기본적으로 편찬 차례가 석가의 팔상(八相)을 따르고 있다. 불교에서는 석가의 일생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을 여덟 개로 구분하여 팔상이라고 이른다.
일반적으로
1.도솔내의(兜率來儀, 도솔에 온 일),
2.비람강생(毘藍降生, 남비니원에 탄생한 일),
3.사문유관(四門遊觀, 출가 전 태자 때 카필라성의 동서남북 4문 밖에 나가 인생의 네 가지 괴로움을 보고 출가를 결심한 일),
4.유성출가(逾城出家, 성을 넘어 집을 나간 일),
5.설산수도(雪山修道, 눈 덮인 산에서 도를 닦은 일),
6.수하항마(樹下降魔, 나무 밑에서 악마를 항복시킨 일),
7.녹원전법(鹿苑轉法, 녹야원에서 설법을 한 일),
8.쌍림열반(雙林涅槃, 쌍림에서 열반에 든 일) 등의 내용이다.
『석보상절』이 팔상을 토대로 하여 석가모니의 일생을 산문체로 서술했고, 세종은 이를 보고 찬불가 형식의 『월인천강지곡』을 만들었기 때문에, 두 문헌의 서술 내용은 일부 다른 점이 있지만 비슷하다.
『월인천강지곡』 상권은 성불(成佛)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교만심, 재물욕, 색욕 등을 버리게 하여 불법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석가모니의 설법 내용이 서술되었다. 그리고 삽화가 있어 석가모니와 여러 부처가 설법으로 중생을 가난, 죽음, 이산 등의 각종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 모습을 표현하였다. 이어 성불의 방법으로 보시와 효도가 제시되었고, 석가모니가 비록 열반했지만 그의 가르침은 항상 이 세상에 머무르고 있음을 서술하였다.
이와 같이 『월인천강지곡』에서는 불교의 위대함, 불교 교화를 통한 갈등의 해소, 불사의 필요성과 타당성, 도덕적 윤리 등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특히 성불의 방법으로 효행이 매우 강조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아직 『월인천강지곡』의 중권·하권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나마 『석보상절』에 끼인 낙장본과 『월인석보』에 실린 「월인천강지곡」을 통해 그 내용을 헤아릴 수 있지만,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다만 『석보상절』의 내용이 『월인석보』에 실리면서 많이 수정된 반면, 『월인천강지곡』은 일부 주석, 독음 표기 등 몇 가지 외에는 거의 그대로 수록되었기 때문에 『월인석보』를 통한 내용의 복원에는 용이한 편이다.
내불당(內佛堂)은 불교에 심취했던 세종이 경복궁 내 문소전(文昭殿) 옆에 지은 불당이다. 1504년(연산군 10) 내불당을 조선 왕실의 능침사찰인 흥천사(興天寺)로 옮기면서 사라졌다. 내불당이라는 명칭은 세종대에는 내원당(內願堂)과 혼용해서 사용되었고, 시기에 따라 내도량(內道場), 내원(內院)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체로 세종이 설치한 불당을 지칭할 때는 내불당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세종이 즉위할 당시 창덕궁 안에는 문소전의 부속 불당으로 내원당이 있었다. 1433년(세종 15) 문소전이 경복궁으로 이전되면서 세종은 문소전 불당을 없애고 불상과 잡물을 흥천사로 옮기게 하였다(『세종실록』 15년 1월 30일). 이에 따라 궁궐 내에는 더 이상 불당이 존재하지 않다가, 1448년(세종 30)에 다시 설치하도록 명하였다(『세종실록』 30년 7월 17일). 당시 세종이 내세운 명분은 "내원당이 선왕이 세운 것이므로 효자의 도리로 이를 잇는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상 세종이 불교에 깊이 심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1448년에 발표된 내불당 건립 계획은 조정 신료들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세종이 불당 건립을 발표한 7월 17일부터 8월 3일까지 약 보름간 대간에서 7차례, 집현전에서 3차례, 영의정이 1차례, 의정부와 육조 당상이 1차례, 생원 등이 1차례 상소를 올렸다. 신료들이 집요하게 반대해오자 세종은 수차례 반찬을 물리는 철선(撤膳)을 했고, 결국에는 세자를 대전으로 불러들여 선위(禪位)할 뜻을 비친 다음 임영대군의 집으로 이어(移御)하기까지 했다(『세종실록』 30년 8월 4일).
결국 세종의 완강한 의지로 인해 내불당은 1448년 11월에 완공되었는데, 불전과 승당·선실을 포함해 약 26칸 규모로 경복궁 문소전 옆에 세워졌다. 내불당에는 황금불상 3구가 안치되고 7명의 승려가 머물게 되었다. 세종은 내불당이 완성되자 5일 동안 이를 축하하는 경찬회(慶讚會)를 베풀었다(『세종실록』 30년 12월 5일).
이후 세종은 내불당에서 세자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약사재, 석가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공양을 올리는 보공재(報供齋), 경찬회 등 각종 크고 작은 법회를 개최했다.
공공연히 승려를 불러 궁궐 안에서 법회를 보고, 신미 같은 고승과 독대를 하면서 불교를 토론한 적도 있었다. 나중에는 아예 신하들에게 대놓고 “나는 불교를 좋아하는 왕이다. 그럼 나도 이단이냐?”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이미 10여 년 간 불교에 깊이 심취해있던 세종이 재위 30년쯤 되니 신하들 눈치 볼 필요도 없고 해서 아예 궁궐 안에 불당을 짓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내불당을 건립하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왕조국가의 표상인 왕실 내에 다시 불교신앙을 허용한다는 선언이었다. 영의정부터 말단 서기까지 하나같이 반대 상소를 올리고 사직 성명을 냈다. 성균관 유생들은 아예 출강을 거부하고, 사부학당 학생들까지 수업 도중 모두 해산해버렸다.
결국 세종이 꺼내든 카드는 “왕 노릇 못해먹겠다”였다. 세종은 정말 짐을 싸들고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집으로 가버렸다. “나 이제 큰 아들에게 왕위 물려줄 테니, 함께 잘들 해보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신하들 입장에서 보면 적반하장도 유분수요,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격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결국 신하들이 잘못 했으니 돌아오라고 빌면서, “혹시 내불당 위치라도 궁궐 담벼락 바깥으로 옮길 생각 없으시냐”고 ‘타협안’을 내놓았지만, 세종은 원안 그대로 내불당을 창덕궁 안에, 그것도 원하던 날짜에 완공시켰다.
유교 국가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스스로 최고의 성군이 되길 바랐으면서도, 세종은 왜 그렇게 내불당 건립에 열심이었을까. 아니, 그보다도 왜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가 되었을까.
아마 그것은 세종이 매우 명석한 두뇌를 지닌, 높은 영성의 소유자였기 때문일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세종 또한 정치 초년병일 때는 철두철미한 유교군주임을 표방했다. 하지만 그는 재위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불경을 읽기 시작했고, 말년에 이르면 노골적으로 불교를 옹호하기에 이르렀다.
세종은 박식한 학문과 예리한 통찰력으로 성리학의 도그마를 스스로 깨뜨렸다. 세종이 가장 열심히 읽은 경전이 <능엄경>이라는 사실은 그가 선(禪)을 통해 무애의 지점을 맛보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성리학의 이분법적 사고에 한계를 느낀 세종은 불교를 통해 일원론적 세계관을 접했다. 다시 말해 세종의 내불당 건립은 자신이 경험한 사고의 전환을 대중들에게, 특히 성리학의 도그마에 빠진 관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 산스크리트어: शाक्यमुनि 샤캬무니)는 불교의 교조이며 다른 호칭으로는 세존·석존·불·여래 등 10가지 존칭과 본명인 싯다르타 가우타마가 있으며, 서양에서는 흔히 가우타마 붓다(영어: Gautama Buddha)라고 칭한다.
샤캬족의 국가인 샤캬 공화국(현재의 네팔)에서 국왕 슈도다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인간의 삶이 생로병사가 윤회하는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자각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29세 때 출가하였다. 처음에는 다른 수행자의 수행법을 따라하거나 고행을 하였으나 이는 무의미하고 중도가 긴요함을 알았다. 부다가야의 보리수 밑에서 선정을 수행하여 35세에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고 부처(Buddha, 佛陀)가 되었다. 이후 인도의 여러 지방을 편력하며, 포교와 교화에 힘썼고, 쿠시나가라에서 80세 나이로 입멸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보통 8폭을 각각 그려서 봉안하거나 2개씩 한 폭에 묶어 4폭으로 구성하기도 한다.
①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상,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도솔내의상에서는 네 장면이 전개된다. 즉 탱화의 왼쪽에는 마야궁(摩耶宮)에서 마야 부인이 의자에 앉아 흰 코끼리를 탄 호명보살(護明菩薩)이 내려오는 꿈을 꾸는 장면이 묘사된다.
바로 그 위에 입태전(入胎殿)이 있어서 입태되는 장면이 묘사되고, 그 위에는 소구담이 도적으로 몰리어 죽는 장면이 묘사된다. 오른쪽에는 정반왕궁(淨飯王宮)이 있고 여기에는 왕과 왕비가 꿈꾼 내용을 바라문에게 물어보는 장면이 묘사된다.
② 룸비니 동산에 내려와서 탄생하는 상,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비람강생상에서는 여섯 장면이 묘사된다. 첫째 마야 부인이 궁전을 떠나서 친정으로 가던 도중 룸비니 동산에서 무우수(無憂樹) 나뭇가지를 잡고 서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아기를 낳는 장면, 둘째 태어난 아기가 한 쪽 손은 하늘을, 한 쪽 손은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외치는 장면, 셋째 제천(諸天)이 기뻐하면서 갖가지 보물을 공양하는 장면, 넷째 용왕(龍王)이 탄생불을 씻겨 주는 장면, 다섯째 왕궁으로 돌아오는 장면, 여섯째 아지타선인의 예언 장면 등으로 묘사된다.
③ 사문에 나가 세상을 관찰하는 상,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사문유관상에서는 네 장면이 묘사된다. 태자가 동문으로 나가 노인의 늙은 모습을 보고 명상하는 장면, 남문으로 나가 병자를 보고 노고(老苦)를 느끼는 장면, 서문으로 나가 장례 행렬을 보고 죽음의 무상을 절감하는 모습, 북문으로 나가 수행하는사문(沙門)주 01)의 모습을 보고 출가를 결심하는 장 등이다.
유성출가상에서는 보통 세 장면이 묘사된다. 첫째 태자궁에서 시녀들이 취하여 잠자고 있는 모습, 둘째 태자가 말을 타고 성문을 뛰어넘는 모습, 셋째 마부 찬다카가 돌아와서 왕비와 태자비에게 태자의 옷을 바치면서 태자가 떠났음을 보고하자 왕비와 태자비가 태자의 소재를 묻는 장면 등이다.
⑤ 설산에서 수도하는 상,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설산수도상에서는 보통 여섯 장면이 묘사된다. 첫째 태자가 삭발하고 사문의 옷으로 갈아입는 장면, 둘째 찬다카가 돌아가는 장면, 셋째 정반왕이 교진여 등을 보내어 태자에게 왕궁으로 돌아갈 것을 설득하는 장면, 넷째 환궁을 거절하자 양식을 실어 보내는 장면, 다섯째 목녀(牧女)가 우유를 석가에게 바치는 장면, 여섯째 모든 스승을 찾는 모습 등이다.
⑥보리수 아래에서 마귀의 항복을 받는 상,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수하항마상에서는 네 장면이 묘사된다. 첫째 마왕 파순이 마녀로 하여금 유혹하게 하는 장면, 둘째 마왕의 무리가 코끼리를 타고 위협하는 장면, 셋째 마왕이 80억의 무리를 모아 부처님을 몰아내려고 하는 장면, 넷째 마왕의 항복을 받아 성도하는 장면이다.
⑦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포교하는 상,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녹야전법상에는 네 장면이 묘사된다. 대개 상단과 하단으로 구분되는 경우가 많다. 상단에는 석가삼존불이 설법하는 모습이다.
하단에는 교진여 등의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설법하는 모습,기원정사(祇園精舍)주 02)를 건립하는 장면, 흙장난을 하던 아이들이 흙을 쌀로 생각하고 부처님께 보시하자 탑으로 바뀌는 장면 등이다.
⑧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상,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쌍림열반상은 보통 세 장면으로 묘사된다. 첫째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는 모습, 둘째 금관에 입관된 부처님이 가섭의 문안을 받고 두 발을 관 밖으로 내보이는 모습, 셋째 다비하여 사리가 나오자 8대왕이 차지하기 위하여 다투는 장면과 바라문이 이를 중재하는 모습 등이다.
팔상도에는 화폭의 각 장면마다 내용의 제목을 적어 놓아 그림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 것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또한 일본에서 열반을 묘사한 탱화를 많이 봉안하는 데 비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부처님의 전 생애를 모두 묘사하고 있는 것도 특징 중의 하나이다. 현전하는 탱화 중 중요한 것으로는통도사·쌍계사·운흥사(雲興寺)·개심사(開心寺)·선암사·송광사·해인사의팔상도를꼽을 수 있다.
현대어 세종어제 훈민정음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는 바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노라. 내가 이를 위해 가엽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것이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의 판본에는 한문으로 쓰여진 예의본(例義本), 해례본(解例本), 그리고 한글로 쓰여진 언해본(諺解本)이 있다. 세종실록에 실려져 있는 것을 실록본(實錄本)이라고 구분짓기도 하는데, 이는 예의본에 속한다. 이런 구분은 편의상 그리하는 것으로 이 가운데 단행본으로 완전한 책의 형태를 지닌 것은 해례본뿐이며 통상적으로 이를 《훈민정음 해례본》이라 부른다. 박승빈이 소장했던 언해본이 단행본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정밀한 조사에 의하면 『월인석보』 책머리 부분을 따로 제책한 것이다.[18] 《훈민정음 해례본》은 약 500부 정도가 인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훈민정음 해례본》의 편찬사실은 기록에만 존재할뿐, 20세기 초반경만 해도 단 한 권도 그 존재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1940년에 안동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19] 이후 2008년에 상주에서 한부가 더 발견되어 현재까지는 두 부가 존재한다.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원본》 또는《오성제자고》(五聲製字考)라고도 하는데,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기존에 알려졌던 예의(例義)편에 해례(解例)편이 추가되어 있기 때문이다.[20] 예의(例義)편은 《세종실록》과 《월인석보(月印釋譜)》에 실려 있어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해례(解例)편에 대해서는 1940년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처음으로 발견되기 전까지는 모르고 있었다.[21]
1962년에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10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22][23]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으로 책의 규격은 가로 20㎝, 세로 32.3㎝이다. 해례본은 “國之語音異乎中國(나라말 소리가 중국과 달라)……”로 시작하는 예의(例義), 해례(解例), 정인지 서문(序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종이 직접 쓴 예의 부분은[24] 4장 7면으로 면마다 7행에 매행 11자, 집현전 학사들이 쓴 해례 부분은 26장 51면 3행으로 면마다 8행에 매행 13자, 정인지가 쓴 서문은 3장 6면에 한 자씩 낮추어서 매행 12자로 구성되어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예의, 해례, 서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예의편(例義)은 훈민정음 창제목적을 밝힌 어제서문과 새 글자의 음가, 운용법을 설명한 예의로 구성되어 있다.
해례(解例)부분에는 제자원리, 제자기준, 자음체계, 모음체계, 음상 등에 대해 설명한 제자해(制字解), 초성에 대해 설명한 초성해(初聲解), 중성에 대한 설명과 중성글자의 합용법을 제시한 중성해(中聲解), 종성의 본질과 사성 등을 설명한 종성해(終聲解), 초성·중성·종성 글자가 합해져서 음절 단위로 표기되는 보기를 보이고, 중세국어의 성조에 대해 설명한 합자해(合字解), 단어의 표기례를 제시한 용자례(用字解)로 구성되어 있다.
정인지 서문부분에는 한글의 창제이유, 창제자, 한글의 우수성, 이 책의 편찬자 그리고 끝에는 ‘정통 11년(1446) 9월 상한’이라는 반포일이 기록되어 있다.[25]
今正音之作 이제 훈민정음을 만드는 것은
初非智營而力索 처음부터 슬기로 마련하고, 애써서 찾은 것이 아니라
但因其聲音而極其理而已. 다만 그 (원래에 있는)성음(의 원리)을 바탕으로 이치를 다한 것 뿐이다.
理旣不二 則何得不與天地鬼神同其用也. 처음부터 이치는 둘이 아니니 어찌 천지 자연, (변화를 주관하는) 귀신과 그 사용을 같이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