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왕의 문장은 반드시 범인(凡人)을 초월하게 마련이다. 우리 역대 임금의 작품들이 대개는 《대동시림(大東詩林)》에 보이는데 그 밖에는 전하는 것이 없다. 현재 임금은 하늘이 낸 어진 임금으로 무릇 교유(敎諭)하는 말을 손수 지었는데, 질박하고 엄숙하여 기백(氣魄)이 있었다. 그러나 시는 있다는 소리를 못 들었다. 그러던 차에 신묘년(1591, 선조24) 가을에 외간(外間)에 임금의 작품이라고 전하는 절구(絶句)가 있었으니 다음과 같다.

撫劍中宵氣吐虹 무검중소기토홍

壯心曾欲奠吾東 장심증욕전오동

如今事業邯鄲步 여금사업감단보

回首西風恨不窮 회수서풍한불궁

한밤에 칼 어루만지니 호기가 무지개를 토해라

웅장한 마음은 우리 동방을 안정시키고자 했더니

이제껏 그 사업은 한단의 걸음

가을 바람에 고개 돌리니 한스럽기 그지없네

시격(詩格)이 노련하고 건장하여 시인에 못지 않았는데, 어찌 그 이듬해 변고가 있을 줄을 알았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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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자주]<성수시화>에 이어 허균이 25세 때에 지은 시화집 <학산초담>을 109조로 나누어 싣는다.

그 내용을 <성수시화>에 그대로 옮겨 놓은 것도 여러 편이지만 그대로 두었다.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 원본에는 없던 것을 번역서에는 부록으로 실었다.

<학산초담>의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국역성소부부고3,민족문화추진회,1967/1989. 고전국역총서228.

허균의 시화[학산초담 성수시화],허경진역, 민음사,1982.

[학산초담 발문]

내가 어려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여러 형님들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겨

차마 다그치거나 나무라지 않았기 때문에 게을러 빠져서 독서에 힘쓰지 않았다,

차츰 자라서는 남들이 과거하는 것을 보고 좋게 여겨 덩달아 해 보았으나,

글치레나 하는 것이 장부의 할 짓은 아니었다.

이제 어지러운 세상을 만났으니, 세상에 나갈 뜻은 이미 사그라졌다.

10년 글읽기로 작정했으나, 아, 그 또한 늦었도다.

《학산초담(鶴山樵談)》 1부(部)를 짓는다.

명 신종(明神宗) 21년 계사년(1593, 선조26) 양월(陽月) 연등(燃燈)한 뒤 사흘 만에

교산자(蛟山子)는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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