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중씨[허봉]가 근래 시인을 평하되, 소재 상공(蘇齋相公:노수신)을 대가로 여기고,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을 그 다음으로 쳤다. 이익지(李益之) [익지는 이달(李達)의 자]는 중씨의 시ㆍ문이 모두 고공(高公)보다 낫다고 치는데 논란은 오래되었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다. 내가 권응인(權應仁)을 만나게 되어 물어보니, 이익지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권응인이 갑산(甲山)으로 귀양 가는 중씨를 보내는 시의 항련(項聯)에,

家居丁卯唐詩士 가거정묘당시사

降在庚寅楚逐臣 항재경인초축신

정묘교 곁에 살던 당 나라 시인이고

경인일에 태어나 내쫓긴 초 나라 신하로다

라 하니,

고사 인용이라든가 대우(對偶)가 다 적절하다.

중형이 서애(西厓:류성룡)에게 부친 시에 또,

莫言甲子泥塗日 막언갑자니도일

應値庚寅下降年 응치경인하강년

갑자년 참상을 말하지 마라

응당 경인년에 하강하는 때를 맞으리

하였다.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의 자는 과회(寡悔)니 광산인(光山人)이다.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자는 이순(而順)이니 장흥인(長興人)이다. 벼슬은 목사이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자는 이견(而見)이니 풍산인(豐山人)이다.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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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어촌(漁村:심언광)의 시는 혼후하고 부염하기가 호음(湖陰:정사룡)에 못지 않은데, 송계(松溪:권응인)가 중종 이래 대가를 평하되 그 선(選) 중에 어촌이 들지 않았으니, 도대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내가 북변의 누제(樓題)를 보다가, 공의 시를 읽고는, 눈을 씻고 장단을 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영동역시(嶺東驛詩)는 다음과 같다.

寵辱悠悠兩自驚 총욕유유양자경

飄零何處着殘生 표령하처착잔생

天邊落日懷鄕淚 천변락일회향루

寒外窮秋去國情 한외궁추거국정

雲葉亂飛山盡黑 운엽란비산진흑

月輪低照海全明 월윤저조해전명

羈愁此夜偏多緖 기수차야편다서

坐對靑燈到五更 좌대청등도오갱

총과 욕이 유유하다 두 가지 다 놀래니

표령한 남은 목숨 그 어디에 붙일까

하늘가 해질 무렵 고향 그리는 눈물

국경밖 늦가을 고국 떠나는 마음일세

구름송인 어지러이 날아 산은 온통 새까맣고

둥근 달 나직이 비치니 온 바다는 밝아라

나그네 신세 오늘밤 유난히 시름겨워서

푸른 등불 마주하여 앉아 지샜네

수성역(輸城驛)에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去國經秋滯塞城 거국경추체새성

異方雲物摠關情 이방운물총관정

洪河欲濟無舟子 홍하욕제무주자

寒木將枯有寄生 한목장고유기생

自笑謀身非直道 자소모신비직도

還慙欺世坐虛名 환참기세좌허명

曉來拓戶臨靑海 효래척호림청해

旭日昭昭照膽明 욱일소소조담명

고향 떠나 가을 지나 국경 성에 머무니

낯선 땅 풍경은 모두가 고향을 그리게 하네

넓은 강 건너고 싶으나 사공 없고

겨울나문 말라가도 겨우살인 매달렸네

일신을 도모함이 곧은 길 아님 우습고

세상 속여 헛된 이름에 붙들림 오히려 부끄럽네

새벽 문을 열고 푸른 바다 마주하니

아침해 밝고 밝아 간담을 비치네

이와 같은 작품들이 어찌 호음(湖陰)무리만 못하단 말인가? 아래 시의 제4구는 안로(安老)가 죽었지만 그의 잔당은 아직 다 죽지 않았음을 가리킨 것이다.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의 자는 사형(士炯)이니 삼척인(三陟人)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공(文恭)이다.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자는 운경(雲卿), 동래인(東萊人)이며 벼슬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이다.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은 안동인(安東人)이니 벼슬은 학관(學官)이고 이조 참판 응정(應梃)의 서제(庶弟)이다.

안로(安老)의 성은 김씨(金氏), 자는 이숙(頤叔), 호는 희락(希樂), 연안인(延安人)이고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다. 탐욕스럽고 간사하며 조정의 일을 제멋대로 하였으므로 중종 정유년(1537)에 사사되었다.

어촌[심언광]의 사과꽃 지다[來禽花落]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朱白扶春上老柯 주백부춘상노가

爲誰粧點野人家 위수장점야인가

三更風雨驚僝僽 삼경풍우경잔추

落盡來禽滿樹花 락진래금만수화

오련붉은 꽃 봄을 도와 늙은 가지에 피니

눌 위해 단장하는고 야인의 집에

한밤중 비바람에 초췌할까 두렵더니

다닥다닥 핀 사과꽃 모조리 다 졌구나

송계(松溪:권응인)의 촉석루시(矗石樓詩)는 다음과 같다.

漏雲微月照平波 루운미월조평파

宿鷺低飛下岸沙 숙로저비하안사

江閣捲簾人依柱 강각권렴인의주

渡頭鳴櫓夜聞多 도두명로야문다

구름 사이 새어나는 희미한 달이 잔잔한 물결을 비추어 주니

잠자던 해오리 나직이 날아 물언덕 모래톱에 내려 앉는다

물가 정자에 발 거두고 기둥 기대어 앉아 있으니

나룻머리 노 젓는 소리 밤이라 크게 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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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누제(樓題)에도 좋은 시구가 또한 더러 있다.

임진년에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난리를 피하여 북변으로 들어가다가 곡구역(谷口驛)에 이르니,

임형수(林亨秀)가 지은 시의 항련(項聯)에,

花低玉女酣觴面 화저옥녀감상면

山斷蒼虯飮海腰 산단창규음해요

꽃이 고개 숙이니 술 취한 미녀의 얼굴 같고

산이 끊어지니 바닷물 마시는 푸른 용의 허리 같구나

하였다.

시어(詩語)가 청절(淸絶)하니 어찌 누제라 하여 흠잡을 수 있겠는가.

형수의 자는 사수(士遂)이고, 호는 금호(錦湖)이다. 평택인(平澤人)으로 벼슬은 목사를 지냈는데, 정미년 벽서(壁書) 사건 때 원통하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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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내 생각에 누대 현판은 모조리 케케묵은 시들이라, 비록 청신한 구절이 있다 하더라도 가려내기 쉽지 않으니, 지을 필요가 없다. 임자순(林子順)이 언젠가 가학루(駕鶴樓)를 지나갔는데, 판시(板詩)가 많아 만여 개나 되므로, 그 되지 않은 잡소리를 싫어하여 관리(館吏)를 불러 말하기를,

“이 현판들은 관명(官命)으로 만든 것이냐? 아니면 안 만들면 벌을 주었느냐?” 하니,

그의 말이,

“만들고 싶으면 만들고 말고 싶으면 안 만들지요. 어찌 관명이나 처벌이 있겠습니까.” 하자,

자순이,

“그렇다면 난 짓지 않겠다.”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이들이 다 웃었다.

임진왜란에 적이 관사를 불살라 남은 게 없었으며, 불사르지 않은 곳은 현판을 철거하여 불 속에 던져버렸다. 아마 하늘도 시가 높은 벽에 걸려 있는 것을 싫어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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