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최경창(崔慶昌)의 자는 가운(嘉運)이니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 무진년(1568, 선조1)에 진사(進士)를 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종성 부사(鍾城府使)가 되었는데, 어떤 일로 강등(降等)되었다가 국자 직강(國子直講)을 제수받고는 세상을 떠났다.

언젠가 북경(北京)에 가 조천궁(朝天宮)에서 시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午夜瑤壇埽白雲 오야요단소백운

焚香遙禮玉宸君 분향요례옥신군

月中拜影無人見 월중배영무인견

琪樹千重鎖殿門 기수천중쇄전문

한밤이라 구슬단에 백운을 쓸고

향 피우고 멀리 옥신군에게 절한다

달 아래 절하는 모습 보는 이 없고

아름다운 나무만 겹겹이 궁문 가리웠네

또,

三淸露氣濕珠宮 삼청로기습주궁

鳳管裵廻月在空 봉관배회월재공

苑路至今香輦絶 원로지금향련절

碧桃紅杏自春風 벽도홍행자춘풍

삼청의 이슬기운 주궁을 적시고

봉피리 부는 신선 달밤에 배회했건만

동산길에 지금은 향기로운 수레 끊기고

푸른 복사 붉은 살구 봄바람 한창일세

하였다.

어떤 도사(道士)가 있었는데 성은 진씨(秦氏)이고 이름은 지금 기억에 없다. 그 또한 시를 잘 지었다. 이 시를 크게 칭찬하여 통주(通州) 하청관(河淸觀)까지 쫓아와 그 책에 제(題)해주기를 청하였는데 시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碧宇標眞界 벽우표진계

玄壇近太淸 현단근태청

鸞棲珠圃樹 란서주포수

霞繞紫微城 하요자미성

寶籙三元秘 보록삼원비

金丹九轉成 금단구전성

芝車人不見 지차인불견

空外有簫聲 공외유소성

벽우는 진계를 상징하고

현단은 태청과 가깝네

난새는 주포수에 깃들고

노을은 자미성을 감돌았네

삼원의 보록은 비장되어 있고

금단은 구전으로 이루어졌네

난초수레탄 사람 보이지 않고

공중 저 밖에 피리 소리만

이 시가 중국에 전파되어 왕봉주(王鳳洲)[명(明) 왕세정(王世貞)의 호] 선생이 대단히 칭찬하였다.

충장공(忠壯公) 양조(楊照)의 무덤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日沒雲中火照山 일몰운중화조산

單于已近鹿頭關 단우이근록두관

將軍獨領千人去 장군독령천인거

夜渡遼河戰未還 야도료하전미환

운중에 해 지자 불빛이 산을 비치니

선우는 이미 녹두관에 다가왔네

장군이 홀로 천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서

한밤에 요하 건너 싸우다 돌아오지 않았구려

이 시는 당인(唐人)의 수준에 못지 않으니 중원(中原)에서 사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4.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ㆍ이달(李達) 3인의 시는 모두 정시(正始)의 법을 본받았는데, 최씨의 청경(淸勁)과 백씨의 고담(枯淡)은 귀히 여길 만하나, 기력(氣力)이 미치지 못하여 다소 후한 결점이 있었다.

이달의 부염(富艶)함은 그 두 사람에 비하면 범위가 약간 크긴 하나, 모두 맹교(孟郊)와 가도(賈島)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최경창ㆍ백광훈은 일찍 죽었고, 이달은 늙어서야 문장이 크게 진보하여 자기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어, 그 기려(綺麗)를 거두고 평실(平實)로 돌아갔다.

나의 중형이 자주 칭찬하기를,

“수주(隨州: 당(唐)의 유장경(劉長卿)을 가리킴)와 어깨를 겨룬다고 하더라도 큰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하므로

내가,

“문장이란 세상의 흥망을 따르는 것이니 송(宋)은 당(唐)만 못하고 원(元)은 송만 못한 것은 형세상 어쩔 수 없는데, 어찌 이대(二代)를 뛰어넘어 당시의 작가와 우열을 다툴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중씨는,

“한퇴지(韓退之)는 당 나라 사람인데 유자후(柳子厚)가 ‘곧장 자장(子長: 사마천(司馬遷)의 자)과 함께 달린다.’고 하였으니, 자후가 어찌 헛말을 할 사람인가? 이달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하였다.

그러나 나는 끝내 그렇게 여기지를 않았다.

5.

나의 중형의 시가 처음에는 동파(東坡)를 배워서 전아(典雅) 순실(純實)하고 온건(穩健) 노숙(老熟)하더니, 호당(湖堂)에 뽑히자 《당시품휘(唐詩品彙)》를 익히 읽어 시가 비로소 청건(淸健)해졌다.

늙마에 갑산(甲山)으로 귀양 갈 때, 이백시(李白詩) 한 부를 가지고 갔었기 때문에, 귀양이 풀려 돌아온 뒤의 시는 천선(天仙) 이백(李白)의 말을 깊이 체득하여 장편이고 단편이고 휘몰아치는 기세여서,

일찍이 이익지[이달]가 말하기를,

“미숙 학사(美叔學士, 미숙은 허봉의 자)의 시를 읽으면 공중에 흩날리는 꽃을 보는 것 같다.”

하더니,

중씨가 불행히 일찍 죽어 원대한 포부를 제대로 펴보지 못했고, 남긴 글마저 흩어져 미처 수습하지도 못했는데, 임진왜란에 찾아낼 겨를도 없이 다 병화(兵火)에 타버렸으니 죽어도 잊지 못할 슬픔이 어찌 끝이 있겠느냐.

내가 경호(鏡湖, 강릉(江陵)의 별칭)에 살 때, 놀라움이 우선 가라앉자, 일찍이 외던 것을 생각해 내어 보니 겨우 5백여 편이라, 베껴서 세상에 전하여 사라지지 않도록 기대하고자 한다. 그러나 다만 태산(泰山)의 일호(一毫)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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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자주] 조선조 한시의 흐름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김시습-이주-김정-삼당파시인[최경창, 백광훈, 이달]

3.

우리나라의 시학(詩學)은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을 위주로 하여 비록 경렴(景濂) 같은 대유(大儒)로도 역시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나머지 세상에 이름 날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찌꺼기를 빨아 비위를 썩게 하는 촌스러운 말을 만들 따름이니, 읽으면 염증이 날 정도이다. 성당(盛唐)의 소리는 다 없어져 들을 수가 없다. 매월당(梅月堂)의 시는 맑고 호매(豪邁)하고 세속을 초탈하였다.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서 스스로 다듬고 꾸미는 데 마음을 두지 않았다. 더러는 마음을 쓰지 않고 갑자기 지은 것이 많기 때문에 간혹 가다가 박잡한 것도 섞여 결국 정시(正始)의 시체는 아니다.

망헌(忘軒) 이주지(李冑之:이주)의 시는 침착ㆍ노련하여 나의 중씨(仲氏)가 대력(大曆 당 대종(唐代宗)의 연호)ㆍ정원(貞元 당 덕종(唐德宗)의 연호) 연간의 작품과 가깝다고 여겼다. 그러나 소식ㆍ두보(杜甫)로부터 나왔는데도 대체가 순박치 못했다. 충암(冲庵:김정)은 맑고 굳세고 기이하고 아름다워 작가라고 할 만하되, 거친 말[生語]과 중첩되는 말[疊語]이 약간 많다.

그 후에는 퇴폐한 것을 일으킨 자가 없다.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ㆍ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연간에 최가운(崔嘉運:최경창)ㆍ백창경(白彰卿:백광훈)ㆍ이익지(李益之:이달) 등이 비로소 개원(開元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시대의 공부를 전공하여 정화(精華)를 이루기에 힘써서 고인에게 미치고자 하였으나, 골격(骨格)이 온전치 못하고 너무 아름답기만 하였다. 당(唐)의 허혼(許渾)ㆍ이교(李嶠)의 사이에 놓더라도 바로 촌뜨기의 꼴을 깨닫게 되는데, 도리어 이백(李白)ㆍ왕유(王維)의 위치를 앗으려고 한단 말인가? 비록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학자는 당풍(唐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세 사람의 공을 또한 덮어버릴 수는 없다 하겠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자는 열경(悅卿), 강릉인(江陵人)이다. 처사(處士)로서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이주지(李冑之)의 이름은 주(冑)이며 고성인(固城人)으로 벼슬은 정언(正言)이다.

중씨(仲氏)는 하곡(荷谷) 허봉(許篈)이다. 자는 미숙(美叔), 양천인(陽川人)이며 벼슬은 전한(典翰)이다.

충암(冲庵) 김정(金淨)의 자는 원충(元冲), 경주인(慶州人)으로 벼슬은 형조 판서(刑曹判書)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가운(嘉運)의 이름은 경창(慶昌), 호는 고죽(孤竹)인데 해주인(海州人)으로 벼슬은 부사(府使)이다.

창경(彰卿)의 이름은 광훈(光勳), 호는 옥봉(玉峯)인데 해미인(海美人)으로 벼슬은 참봉(參奉)이다.

익지(益之)의 이름은 달(達), 호는 손곡(蓀谷)이며 홍주인(洪州人)으로 쌍매(雙梅) 첨(詹)의 서손(庶孫)이다.

가운(嘉運:최경창)은 제고봉군산정시(題高峯郡山亭詩)에

古郡無城郭 고군무성곽

山齋有樹林 산재유수림

蕭條人吏散 소조인리산

隔水搗寒砧 격수도한침

오래된 고을이라 성곽도 없는데

산재에는 다만 수풀뿐

백성도 아전도 흩어져 쓸쓸한데

물건너 마을에 겨울 다듬이 소리

라 하였다.

창경(彰卿:백광훈)은 제화시(題畫詩)에,

簿領催年鬢 부령최년빈

溪山入畫圖 계산입화도

沙平舊岸是 사평구안시

月白釣船孤 월백조선고

문서 기록은 백발을 재촉하는데

시내와 산이 그림 속에 들었구려

모래톱 평평하니 옛 언덕이 예로구나

달빛은 하얀데 낚싯배 외로워라

하였고,

제승축시(題僧軸詩)에,

智異雙溪勝 지이쌍계승

金剛萬瀑奇 금강만폭기

名山身未到 명산신미도

每賦送僧詩 매부송승시

지리산은 쌍계가 승경이오

금강산은 만폭이 기이하다던데

명산엔 몸소 가보도 못하고서

매양 스님을 보내는 시만 짓누나

라 하였다.

익지(益之:이달)는 산사시(山寺詩)에,

寺在白雲中 사재백운중

白雲僧不掃 백운승불소

客來門始開 객래문시개

萬壑松花老 만학송화노

흰 구름 속에 절이 있으니

흰 구름이라 중은 쓸지를 않네

손이 오자 그제사 문을 여니

골짜기엔 온통 송화만 흐드러졌구나

하였고,

회주시(回舟詩)에,

病鷺下秋沙 병로하추사

晩蟬鳴江樹 만선명강수

回舟白蘋風 회주백빈풍

夢落西潭雨 몽낙서담우

병든 가을 해오리 모래밭에 내려앉고

늦매미는 강가 나무에서 울어대네

흰 물마름에 바람 일자 배를 돌리니

꿈속에 서담엔 비가 내리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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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궁(東宮)이 또한 임금 되기 전에 시[詞藻]에 뜻을 두어 고서(古書)를 많이 모았다. 언젠가 삼청동시(三淸洞詩) 한 수를 지었는데, 그것이 진사(進士) 유희발(柳希發)의 궤 속에 있다기에 그에게 삼가 청하여 읽어보았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丹壑陰陰翠靄間 단학음음취애간

碧溪瑤草繞天壇 벽계요초요천단

煙霞玉鼎靈砂老 연하옥정령사노

蘿月松風鶴未還 라월송풍학미환

푸른 이내 속에 붉은 골짜기는 그늘졌는데

맑은 시냇가 기이한 풀들이 천단을 에웠도다

노을 어린 옥솥에 단약은 익어가나

다래넝쿨에 달 비치고 솔바람 일어도 학은 아직 돌아오지 않네

시화(詩話)가 맑고 서늘하며 자법(字法)도 또한 기이하다. 임금의 제작은 저절로 세속 시인들의 구기(口氣)와는 다르다. 아, 존경할 만하다.

희발(希發)은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광해군의 처남인데, 벼슬은 이조 참판을 지냈으며 계해년(1623)에 사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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