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영탑비명/ 최치원 사산비명(四山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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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 통일신라학자 최치원이 지은 비문 가운데 자료적 가치가 높은 4편을 모아 엮은 금석문집.
네 편의 비문은
①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성주사 터에 있는 대낭혜화상탑비(국보, 1962년 지정),
②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 경내에 있는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국보, 1962년 지정),
③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면 말방리 대숭복사에 있었던 초월산대숭복사비명,
④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면 원북리 봉암사 경내에 있는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국보, 2010년 지정)를 가리키며,
위의 네 군데 산 이름을 취하여 일반적으로 ‘사산비명’이라 일컫는다.
신라 불교사에서 우뚝한 위치를 차지하는 세 선사(禪師)의 일생 행적과 화엄종 계열의 왕실 원찰(願刹)인 대숭복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문으로서, 사비명(寺碑銘)의 찬술은 『문선(文選)』에 보이는 왕건(王巾)의 ‘두타사비명(頭陀寺碑銘)’에서 그 선례를 찾을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전에 유례가 없었던 일이다.
네 비 모두 왕명에 의해 찬술되었으며,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귀국한 뒤로부터 은거하기 이전에 걸쳐 찬술되었다.
현재 대숭복사비를 제외한 세 비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전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절과 함께 파괴된 것으로 알려진 대숭복사비는 1931년 이후 그 잔편(殘片)이 몇 차례 발굴되었다.
진감선사비와 대숭복사비는 최치원이 직접 글씨까지 썼으며, 대낭혜화상비는 화상의 종제(從弟)인 최인연(崔仁渷, 뒤에 崔彦撝로 개명)이, 지증대사비는 분황사(芬皇寺) 승려 혜강(慧江)이 썼다. 『사산비명』은 우리나라 금석문의 신기원을 여는 웅문거편(雄文巨篇)으로서, 화려한 수사(修辭)에다 함축미와 전아(典雅)함을 잘 갖추고 있다.
『계원필경집』주1)이 재당시(在唐時)에 이룩한 대표적 저술이라면 『사산비명』은 귀국한 이후에 남긴 저술 가운데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사산비명』의 자료적 가치와 중요성은 종래 불교학인들 사이에서 과외독본(課外讀本)으로 널리 읽혀져 왔다는 점과 함께 다수의 주해본이 계속해서 나올 만큼 식자층의 관심이 높았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사산비명』은 조선 선조 · 광해군 때 명승(名僧) 해안(海眼: 鐵面老人 · 中觀)이 처음으로 『고운집(孤雲集)』에서 네 비문을 뽑아 책으로 엮고 주석을 붙인 이래, 연담 유일(蓮潭有一) · 몽암(蒙庵) · 홍경모(洪景謨) 등의 주해가 이어졌으며, 근세까지 십 수종의 주해본이 나왔다. 이 가운데 정주(精註) · 정교본(精校本)으로는 『문창집(文昌集)』(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과 『계원유향(桂苑遺香)』(崔完秀 소장), 『사산비명주』(梵海 覺岸註), 『정주사산비명(精註四山碑銘)』(石顚 朴漢永註) 등이 꼽힌다.
이 『사산비명』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연대상으로 훨씬 앞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생생한 사실(史實)을 담은 제1차 자료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우리의 고대사 연구, 특히 신라의 선종사를 비롯한 불교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는데, 이덕무(李德懋) · 정약용(丁若鏞) · 성해응(成海應)과 같은 저명한 실학자들이 『사산비명』을 신라시대의 귀중한 사료로 여겨 중시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사산비명』의 문체는 만당(晩唐) 시기에 크게 유행했던 변려문체(騈儷文體)로서, 육조풍(六朝風)의 기어(綺語)주2)와 묘구(妙句)주3)가 많고, 변려문에서 구사(驅使)되는 각종 수사기법과 기교, 그리고 중국 역대 금석문의 법식(法式)이 풍부하게 활용되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기교에 흐르거나 나열식의 기술로 꾸며진 것이 아니고, 매우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서술되었다.
또한 문의(文意)가 창달, 원만하고 음조(音調)가 잘 맞으며, 전고(典故)의 사용이 적절할 뿐 아니라, ‘화려함이 많지만 부박(浮薄)하지 않다’는 평을 받고 있다. 비문이라는 제약된 형식 때문에 문학적 가치를 충분히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명(銘)을 비롯하여 문학으로 접근할 수 있는 단서가 적지 않다. 문체적 특성 역시 당시의 문풍(文風)과 문장 스타일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또 『사산비명』은 글의 성격이나 형식상 최치원의 사상과 철학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것은 아니지만, 여느 비문과는 달리 찬자(撰者)의 사상적 · 철학적 편린들을 많이 담고 있으므로, 그것을 통해 최치원의 철학사상까지도 추론(推論)할 수 있다. 특히 당시 학인(學人)들의 삼교관(三敎觀)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최치원 철학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동인의식(東人意識)과 동방사상(東方思想)을 고찰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자료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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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당 신라국 고 강주 지리산 쌍계사 교시 진감선사 대공영탑비명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大空靈塔碑
전서국 도통순관 시어사 내봉공 사 자금어대 신 최치원은 교지를 받들어 찬술함.
(국보 제 47 호)
夫道不遠人。人無異國。
대저 도가 사람에게 멀지 아니하고
사람은 다른 나라가 없다
是以東人之子。爲釋爲儒。
[此人爲釋。與我之爲儒同其勞。]
이르므로 동방사람의 아들이
석(釋)이되고 유(儒)가 되는 데는
必也西浮大洋。重譯 通語不一 從學。
命寄刳木。[黃帝刳木爲舟。]心懸寶洲。
[水中可居地曰洲○洲亦作主。西域記。南贍部州地有四主。南衆편001主。北馬主。東人主。西寶主。衆편002卽交趾。馬卽匃奴。人卽震旦。寶卽西域。今指中原曰寶洲。]
반드시 서쪽으로 큰 바다에 떠서
이중 삼중 통역을 거쳐 유학할 제
목숨은 조각배에 부쳤고
마음은 보배의 고장으로 행하였다.
虛往實歸。先難後獲。亦猶采玉者不憚崑丘之峻。
[治水經云。崑崙山。高五萬里。河源出其東。日月相碍而隱。其中多寶玉。]
빈것으로 갔다가 채워서 돌아오고
어려움을 먼저 한 뒤에 소득이 있었으니
마치 옥을 캐는 자가 곤륜산의 높은 것을 꺼리지 아니하고
探珠者不辭驪壑之深。
[說文。河上翁之子。沒川而得千金之珠。翁曰。珠在驪龍頷下。汝遭其睡。若悟則當爲虀粉。]
진주를 찾는 자는
용이 잠든 물속의 깊은 것을 피하지 아니함과 같았다.
遂得慧炬。則光融五乘。
[聲聞,緣覺,菩薩,人乘,天乘。]
嘉肴則味飫六籍。[六經。]
드디어 지혜의 횟불을 얻어서 빛이 오승에 통하고
아름다운 음식을 얻어 맛이 육경에 배불렀다.
競使千門入善。能令一國興仁。
다투어 청문으로 하여금 선으로 들어오게 하고
능히 일국으로 하여금 인에 흥기되게 하였다.
而學者或謂
身[音干]毒[印度別名。佛所生地。]與闕里[孔子所居里]之說敎也。
分流異體。
학자들이 혹 말하기를,
인도와 궐리의 교를 설하는 것이
흐름이 나누이고 체(體)가 달라서
圓鑿方枘。[鑿枘。本相入之物。惟方枘圓鑿。則不相入]。
互相矛盾。[韓子曰。有賣矛與盾者。譽其矛曰。犀革無所不入。譽其盾曰。矢戟不能入。傍人曰。以子之矛。刺子之盾。入耶。不入耶。]
守滯一隅。
둥근 구멍에 네모난 나무자루를 박는 것이라 하여
서로 모순되어 각기 한 모퉁이만 고집한다.
嘗試論之。
說詩者不以文害辭。不以辭害志。
禮所謂言豈一端而已。夫各有所當。
내가 시험삼아 논하건대
시를 설하는 자는 문으로서 사(辭)를 해하지 아니하고
사로서 뜻을 해하지 아니할 것이니
예기에 이른바 말이 어찌 일단뿐이리요
대저 각기 마땅한 바가 있다.
故廬峯慧遠著論。
謂如來之與周孔。發致雖殊。
所歸一揆。體極 [體達至極之理]
그러므로 여산의 혜원이 논을 지어서
여래와 주공 공자가 출발한 것은 비록 다르나
돌아가는 바는 한가지이니 지극한 이치에 통달하였다.
不能兼者。[釋不兼儒。儒不兼釋。]
物不能兼受故也。
능히 서로 겸하지 못하는 것은
물이 능히 겸하여 용납하지 못하는 때문이다.
沈約有云。
孔發其端。釋窮其致。
眞可謂識其大者。
始可與言至道矣。
[慧遠許沈約之言也]
심약의 말에
공자는 발단(發端)을 하였고
석씨는 극치가 된다 하였으니
참으로 그 큰 것을 아는 이로서
비로소 더불어 지극한 도를 말 할 수는 있다 하겠도다.
至若佛語心法。玄之又玄。
名不可名。說無可說。
雖云得月。指或坐忘。
[見月休觀指。歸家罷問呈。]
終類係風。影難行捕。[言佛說虛無]
불이 말한 심법은 현(玄)하고 또 현(玄)하여
이름으로 이름할 수 없고 설하려 하여도 설할 것이 없어서
비록 달(月)을 얻었다 이르나 손가락을 혹 잊어버려
마침내 바람을 매고 그림자를 포착하기 어려움과 같다.
然陟遐自邇。取譬何傷。
그러나 멀고 높은 데로 오르자면 가깝고 낮은 데서부터 하는 것이니
여기서는 비유를 취한들 무슨 해로움이 있으리오?
且尼父謂門弟子曰。
予欲無言。天何言哉。 [子曰。予欲無言。子貢曰。子如不言。
則小子何述焉。子曰。天何言哉。四時行焉。萬物生焉。]
또한 공자가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는가?” 라고 했으니
則彼淨名之默對文殊。[文殊問。何等是不二法門。淨名默然不應。文殊曰。善哉善哉。乃至無有言語文字。直入不二法門。]
善逝之密傳迦葉。[善逝。涅槃也。卽佛之十號中一數也。世尊在靈山會上。拈花示衆。獨迦葉微笑破顏。]
곧 저 정명이 침묵으로써 문수를 대한 것과
선서(善逝)가 비밀히 가섭(迦葉)에게 전한 것은
不勞鼓舌。能叶印心。
혀를 놀리지 아니하고
능히 마음에 새기게 하는 것이다.
言天不言。[二字缺] 奚適而得
하늘이 말하지 아니한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어디에 가서 얻으리오?
遠傳妙道。廣耀吾鄕。
亦豈異人哉。禪師是也。
미묘한 도를 멀리 전하여 우리 고장에 널리 빛낸 이가
어찌 다른 사람이겠는가? 선사가 그분이시다.
禪師法諱慧照。俗姓崔氏。
其先漢族。冠盖山東。 [卽華山之東。六國在焉。]
선사는 법휘는 혜조요 속성은 최씨이다.
그 선대는 한족으로 산동의 명문이었는데
隋師征遼。多沒驪貊。
수나라가 요동을 칠 때에
고구려에서 많이 죽고
有降志而爲遐者。爰及聖唐。囊括四郡。
[唐高宗遣蘇定方。與新羅合攻百濟滅之。又遣李繢等。合攻高麗滅之。置安東都護府。以嶭仁貴爲統官。]
今爲全州金馬人也。 [金馬。今益山。舊屬全州。]
뜻을 굽혀 그곳의 백성이 된 자가 있었으니
당에 이르러 사군을 점령하매
지금은 전주 금마 사람이 되었다.
父曰昌元。在家有出家之行。
아버지는 창원인데
재가 하면서 출가의 행이 있었다.
母顧氏。嘗晝假寐 [不脫衣冠而眠。]
夢一梵僧謂之曰。
어머니 고씨가 일찍이 낮잠을 자는데
꿈에 한 중이 와서 이르기를,
吾願爲阿㜷之子。
[㜷音彌。楚人呼母曰阿㜷。江南人稱母曰阿嫗。]
以琉璃罌爲寄。
未幾娠禪師焉
“내가 어머니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
유리 항아리로서 표적을 삼더니
얼마 안되어 선사를 임신하였다.
生而不啼。
乃夙挺銷聲息言之勝芽也。
나면서 울지 아니하였으며
곧 일찍부터 소리없고 말없는 깊은 도의 싹을 타고났던 것이다.
曁齔[改齒也]從戲。
必燌葉爲香。采花爲供。
칠팔세가 되자 유회할 때에
반드시 잎을 태워서 향을 삼고
꽃을 따서 공양을 삼았으며
或西向危坐[跪也。]
移晷未嘗動容。
혹 서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시간이 지나도록 몸을 움직이지 않았으니
是知善本
固百千劫前所裁植。
非可跂 [舉足望也] 而及者。
이것은 선의 뿌리가
실로 백천겁(百千劫)전에 심어진 바이요
배워서 따라갈 수 없는 것이었다.
自丱泉弁。[丱音貫。束髮在後也。弁。冠也。男二十而冠。]
십여세로부터 이십세에 이르기 까지
志切反哺。[烏哺其雛。五十日而後。雛還哺其母。]
跬步不忘。
부모를 봉양하기에 뜻이 간절하여
잠깐도 잊지 아니하였으나
而家無斗儲。又無尺壤
집에 저축이라곤 없었고
또 농사지을 만한 땅도 없어서
可盜天時者。
[列子。齊之國氏大富。宋之向氏問術焉。國氏曰。吾善爲盜也。向氏歸家。無所不盜。以藏獲罪而怨之。國氏曰。若只知爲盜之言。而不知爲盜之意也。吾乃盜天地之時與利。而生吾禾。植吾榢。築吾垣。建吾舍。陸盜禽獸。水盜魚鱉。此皆天之所生。非吾所有。然吾善盗天時。故富而無殃。]
천시를 이용하여
口腹之養。惟力是視。
생계를 자력으로 돌보았으니
乃裨販陬隅。[南蠻人以靑魚謂陬隅。郝隆詩云。陬隅躍淸池。]
爲贍滑甘之業。[以苦澁者自養。滑甘者奉親。乃孝子之事。]
생선을 팔아
좋은 음식으로 부모를 봉양하였다.
手非勞於結網。
心已契於忘筌。[網。捉兔具。筌。捕魚器。網筌喻能詮。
兔魚喻所詮。言不假文字而得旨之意。]
손으로는 그물을 맺지 아니하였으며
마음은 이미 통발을 잊는 데 부합하였다.
能豐啜菽之資。
[檀弓。啜菽飮水。能盡其歡。不違其志。故能令親歡。]
允叶采蘭之詠。[詩云。循彼南山。言采其蘭。此是孝子養親之事。]
콩죽을 끓여먹어도
부모의 기쁨을 다할 수 있었고
洎鍾艱棘。[居喪也。詩云。棘人欒欒。]
負土成墳。迺曰。
상을 당하자
스스로 흙을 저다가 성분하고는 말하기를,
鞠育之恩。聊將力報。
希微之旨。盍以心求。
[道經云。目之不見曰希。搏之不得曰微。言至道玄玄。]
길러준 부모 은혜는 힘으로 갚았으나
미묘한 도리는 어찌 마음으로 구하지 아니하랴.
吾豈匏瓜。壯齡滯跡。[論語曰。吾豈匏瓜哉。焉能係而不食。]
내가 어찌 박과 오이가 둥글에 매인 것처럼
젊은 나이에 한구석에 박혀 있으리오? 하고
遂於貞元二十年。[唐德宗年號。新羅元聖王元年。]
詣歲貢使 [至使也]
求爲枋人。[舟長也。]
드디어 정원 이십 년에
당나라로 가는 세공사에게 찾아가서
선장이 되기를 청하여
寓足西泛。
多能鄙事。視險如夷[平也。]
몸을 의탁하여 서쪽으로 바다를 건널 적에
고된 일을 많이 하고
험한 풍파를 평지와 같이 여겼다.
揮楫慈航。超截苦海。
자비의 배에 노를 저어서
고해를 질러 건넜다.
及達彼岸。告國使曰。
피안에 도달하자
국사에게 고하기를
人各有志。請從此辭。
“사람마다 각각 뜻이 있는 것이니
나는 여기서부터 하직하겠소” 하고
遂行至滄洲。
謁神鑑大師。[馬祖傍傳。鹽官齊安之嗣。]
投體方半。
드디어 행하여 창주에 이르러
신감대사를 뵈옵고
절하기를 마치기도 전에
大師怡然曰。
戲別非遙。喜再相遇。
[通載。杯度在彭城。聞羅叶入關中。嘆曰。吾與此子戲別三百餘年。]
대사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장난삼아 이별한 지가 멀지 아니하였는데
두번 서로 만남이 기쁘구나” 하고
遽令剃染。頓受印戒。
문득 머리를 깍고 가사를 입히고
심인과 계를 함께 주니
若火添燥艾。水走卑邍。
마른 쑥에 불을 부치고
물이 낮은 데로 흐르는 것 같았다.
然徒中相謂曰。
東方聖人。於此復見。[前見道義。今見禪師。]
무리들 가운데서 서로 이르기를,
“동방의 성인을 이에 다시 보겠다.” 하였다.
禪師形貌黯然。
衆不名而目爲黑頭陀。
선사의 얼굴빛이 검으므로
모두가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고 지목하여 흑두타라 했으니
斯則探玄處默。眞爲漆道人後身。
[道安法師貌黑。故人謂之漆道人。亦曰黑頭陀。]
이는 곧 현묘함을 탐구하고 묵묵히 행함이
진정 칠도인의 후신이었으니
豈比夫邑中之黔。能慰衆心而已哉。
[左傳。宋皇國父爲平公築臺。子罕請候農隙。築者謳曰。澤門之白。實興我役。邑中之黔。能慰我心。盖子罕貌黑而居邑中。]
어찌 읍중의 검은 사람인 자한(子罕)이
백성의 마음을 위로한 데에 비할 수 있겠는가?
永可與赤髭靑眼。以色相顯示矣。
[佛陀耶舍赤髭。達麽靑眼。]
영원토록 수염이 붉은 불타야사나 푸른 눈의 달마와 함께
색상으로써 나타내 보인 것이다.
元和五年。[唐憲宗年號]
원화 5년에
受具於嵩山少林寺。
[嵩山。中岳也。寺之窟前。有二株桂樹。故曰少林寺。]
琉璃壇側。
구족계를 숭산 소림사의 유리단 곁에서 받으니
聖善[詩云。母氏聖善。]前夢。
完若合符。
어머니의 전일의 꿈이 완연히 부합했다.
旣瑩戒珠。復歸黌海。
이미 계주가 밝았으매 다시 경을 배웠다.
聞一知十。茜絳藍靑。[出淮南子。]
하나를 듣고는 열을 알매
강색이 꼭두서니에서 나와 꼭두서니 보다 붉었고
청색이 쪽에서 나와 쪽보다 푸르렀다.
雖止水澄心。
[人莫鑑於流水。而鑑於止水。]
而斷雲浪跡。
비록 고인 물처럼 맑은 마음이나
조각구름 같이 떠다니며 배우는 자취였다.
粤[於也]有鄕僧道義。
先訪道於華夏。
고향의 중 도의라는 이가
먼저 중원으로 도를 물으러 왔었는데
邂逅適願。西南得朋。
[易坤卦。東北喪朋。西南得朋。邂逅相遇。適我願兮。]
四遠參尋。證佛知見。
우연히 서로 만나 바라는 바가 일치하였으니
서남쪽에서 벗을 얻은 것이다.
사방으로 멀리 찾아다니며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증득하였다.
義公先歸故國。
禪師卽入終南。[長安山名]登萬仞之峯。
餌松實而止觀。
寂寂者三年。
도의 는 먼저 고국으로 돌아오고
선사는 바로 종남산에 들어가 만길 봉우리에 올라가서
솔씨를 따먹으며
적적하게 선정과 지혜의 지관법을 익힌 지 삼년이었다.
後出紫閣。[函谷關外池名。]當四達之道。
織芒屩而廣施 憧憧者又三年。[芒屩。藁鞋也。憧憧。往來不絶也。]
뒤에 자각으로 다시 나와 사방으로 통하는 길에서
짚신을 삼아 보시를 널리하여 왕래하기 또 삼년이었다.
於是苦行旣已修。
他方亦已遊。
雖曰觀空。豈能忘本。
이리하여 고행을 이미 닦았고
타국의 지방도 이미 유람하였으니
비록 공(空)을 공부한다 할지라도
어찌 본국을 잊을 수 있겠는가.
乃於大和四年[唐文宗年號]來歸。
大覺上乘。照我仁域。
드디어 태화 4년(830)에 돌아오매
불교의 최상승 도리로
우리의 어진 강토를 비추었다.
興德大王 飛鳳筆迎勞曰。
흥덕대왕이 편지를 보내어 맞아 위로하기를,
道義禪師。曏已歸止。
上人繼至。爲二菩薩。
“도의 선사가 전일에 돌아왔더니
상인이 잇달아 이르렀으매 두 보살이 되었도다.
昔聞黑衣之傑。[南朝齊武帝。敕沙門法獻,玄暢爲天下僧主。會于帝前。肩輿入殿。時稱黑依二傑。]
今見縷褐之英。[縷褐。弊衣也。]
옛날에 검은 옷입은 호걸이 있었다 들었더니
지금에 누더기 걸친 영웅을 보겠도다.
彌天慈威。擧國欣賴。
하늘에 가득한 자비스런 위엄을
온 나라가 기뻐하여 의지하는구나
寡人行當以東鷄林之境。
成吉祥之宅也。[行。將也。吉祥。卽薄伽梵。六義之一也。]
과인이 장차 동쪽 계림 지경으로
상스러운 집을 만들라”고 했다.
始憩錫於尙州露嶽長柏寺。[今南長寺。]
처음에 상주 노악산 장백사에 석장을 멈췄는데
毉門多病。來者如雲。
方丈雖寬。物情自隘。
의원 문전에 병자가 많듯이 찾아오는 이가 구름 같았으매
절간이 비록 넓었으나 사람들이 자연 군색했다.
遂步至康州[今晉州]智異山。
有數於莬 [楚人稱虎之名] 哮吼前導。
避危從坦。不殊兪騎。[兪。仁也。如仁順馬在前去。書。帝曰。兪之先行騎。註。兪者。輿後相應之騎。]
드디어 걸어서 강주 지리산에 이르렀는데
몇마리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며 앞에서 인도하여
위험한 곳을 피해 평탄한 길로 가게 함이
앞에서 이끄는 기마(騎馬)와 다르지 않았다.
從者無所怖畏。豢犬如也。
따르는 사람들도 두려워함이 없어
마치 기르는 개처럼 여겼다.
則與善無畏三藏 [佛名] 結夏靈山。
곧 선무외삼장이
영산에 하안거를 하는데
猛獸前路。深入山穴。
見牟尼立像。宛同事跡。
맹수가 길을 앞서 깊이 산혈로 들어가매
모니의 입상을 본것과 사적이 완연히 같으니
彼竺曇猷之扣睡虎頭。令聽經。
亦未專媺於僧史也。
[晉沙門竺曇猷。一名法獻康居國人。在豐城赤石山石室誦經。有猛虎數十蹲在猷前。一虎獨睡。猷以如意杖扣睡虎頭。呵曰。何不聽經。俄而羣虎皆去。]
저 축담유가 자는 범을 두드려 경을 듣게 한 그것만이
홀로 승사에 미담이 될수 없다.
因於花開谷 故三法和尙蘭若遺基。
纂修堂宇。儼若化城。
화개곡에
옛 삼법화상의 절터를 그대로 인연하여
절을 지으니 엄연히 화성과 같았다.
洎開成[唐文宗年號] 三年。
愍哀大王 驟登寶位。[開成三年戊午。金明弑僖康王自立。四年己未。金陽等討金明誅之。立古微爲王。卽神武王也。追諡金明曰愍哀。]
深託玄慈。
개성 삼년에 이르러
민애대왕이 갑자기 보위에 오르자
깊이 자비에 의탁하였다.
降璽書餽齋費。而別求見願。
새서(璽書)를 내려 공양할 물자를 보내고
특별히 친견하기를 청했다.
禪師曰。
在勤修善政。何用願爲。
선사가 이르기를,
“부지런히 선정을 닦는 데 있는데
어찌 만날 필요가 있습니까?” 고 했다.
使復于王。王聞之愧悟。
以禪師色空雙泯。定惠俱圓。
사신이 돌아가 왕에게 복명하니
왕이 듣고 부끄러워하고 깨달아서
선사는 색과 공이 함께 소멸되고
정과 혜가 모두 원만하다 하여
降使賜號爲惠照。
昭字避聖祖廟諱 易之也。[廟諱。卽昭聖大王也。名俊邕。]
사신을 보내 호를 주어 혜조라 하니
소자는 성조의 어휘이므로 피하여 바꾼 것이다.
仍貫籍于大皇龍寺。[如無染碑。編錄興輪寺奴婢田地之意。]
徵詣京邑星使。[漢書。李郃善天文。和帝遣使觀風。郃見使。問京中消息。使曰。君何以知吾爲使也。郃曰。見有二使星來向益州。故知之。]
인하여 대황룡사에 적을 옮기게 하고
서울로 오라고 불렀는데
往復者 交轡于路。
而嶽立 不移其志。
사자의 왕래가 길에 고삐가 엉길 정도였지만
산악처럼 우뚝하여 그 뜻을 옮기지 않았다.
昔僧稠非元魏之三召云。
在山行道。不爽大通。
[齊鄴西龍山雲門寺僧稠。拒元魏孝明帝之前後三召也。爽。差也忒也。]
옛날 승조법사가 원위의 세 번 부름을 거절했다 했으니
산에 있어 도를 행하매 대통에 어긋나지 않았으며
栖幽養高。異代同趣。
깊숙한데 살아서 고상함을 기르려는 것이
시대는 달랐으나 지취(志趣)는 한가지였다.
居數年。請益者。
稻麻城列。殆無錐地
두어 해를 머물매
가르침을 청하는 자가
벼와 삼대처럼 늘어서고 성같이 에워싸서
거의 송곳 꽂을 틈조차 없었다.
遂歷銓[音全。言選擇也。]奇境。
得南嶺之麓。
塽塏[地高明也]居㝡。
드디어 기이한 지경을 두루 선택하여
남령의 산기슭을 얻으니
높고 시원함이 제일이었다.
經始禪廬。
却倚霞岑。俯壓雲澗。
淸眼界者。隔江遠岳。
爽耳根者。逬石飛湍。
사찰을 창건하는데
뒤로는 노을 끼는 언덕을 의지하고
앞으로는 구름이는 시내를 굽어보니
안계를 맑게 하는 것은 강 건너 먼 산이요
귀를 서늘하게 하는 것은 돌구멍에서 솟구치는 나르는 여울이었다.
至如春谿花。夏徑松。
秋壑月。冬嶠雪。
四時變態。萬象交光。
더욱이 봄에 피는 시내의 꽃과
여름에 그늘지는 길옆의 솔이며
구렁을 비추는 가을의 달과
봉우리를 덮는 겨울의 눈들이
사시가 모습을 바꾸고
만상의 빛을 번갈으며
百籟和唫。
[凡有孔竅。皆曰籟。人籟則比竹是已。地籟則衆竅是已。天籟則人心自動者是已。見莊子齊物。]
백가지 울림소리가 어울려 읊조리고
千巖競秀。
수천 개의 바위들이 다투어 빼어났다.
嘗遊西土者。
至止咸愕。視謂
일찍이 서토에 놀던 자가
와서는모두 깜짝 놀라 보고 이르기를,
遠公東林。[晉惠遠。於廬山創東林寺。]
移歸海表。
“혜원의 동림사를 바다건너 옮겨 왔구나
蓮花世界。非凡想可擬。
壺中別有天地則信也。
연화세계는 범인의 상상으로 비겨 볼 바 아니로되
항아리 속에 별천지가 있다더니 정말이로다”고 했다.
架竹引流。
環階四注。
始用玉泉爲榜。
대로 홈을 만들어 시냇물을 끌어다가
축대에 돌아가며 사방으로 물을 대고
비로소 이름하여 옥천이라고 현판을 붙였다.
屈指法胤。則禪師迺曹溪之玄孫。
是庸建六祖影堂。[今雙溪寺也。]
彩飾粉墉。廣資導誘。
법통을 헤아려 보니 선사는 곧 조계의 현손이다.
이에 육조의 영당을 세워
분바른 벽에 단청으로 채색하여
널리 신도를 귀의시키는 데에 이바지 하니
經所謂 [法華經偈] 爲說衆生。
故綺錯繪衆像者也。
경에 이른바,
“중생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비단에 여러상을 섞어 그린다” 함이었다.
大中四年 [唐宣宗年號] 正月九日 詰旦 [平明。]告門人曰。
대중사년 정월 구일 이른 아침에
문인에게 말씀하셨다.
萬法皆空。吾將行矣。
一心爲本。汝等勉之。
無以塔藏形。無以銘紀跡。
“ 만 가지 법이 다 공이니 내 장차 떠나가려 한다.
하나의 마음이 근본이니 너희들은 힘쓸지니라,
탑에다 유해를 갈무리지 말고
명으로써 행적을 기록하지 말아라.” 하고
言竟坐滅。
報年七十七。積夏四十一。
말을 마치자 앉아서 열반에 드니
금생의 나이 77세이고
법랍이 41세였다.
于時。天無纖雲。
風雷歘欻起。
虎狼號咽。杉栝變衰。
그때 하늘에는 실구름도 없었는데
바람과 우뢰소리가 혼연히 일어나며
호랑이는 슬피 울부짖고
삼나무·잣나무가 변하여 시들더니
俄而紫雲翳空。
空中有彈指聲。
會葬者無不入耳。
이윽고 자주빛 구름이 하늘에 자욱하고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가 나서
장사에 모인 자는 듣지 못한 이가 없었다.
則梁史載
褚侍中翔。嘗請沙門
爲母疾祈福。聞空中彈指。
양나라 역사에 실려 있기를,
“저시중 상이 일찍이 사문을 청하여
어머니의 병환을 위해 복을 빌다가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가 났다.” 했으니
聖感冥應。豈誣也哉。
성스런 감응이 보이지 않게 나타났으니
어찌 거짓이겠는가.
凡志於道者。寄聲相吊。
未忘情者。銜悲以泣。
天人痛悼。斷可知矣。
무릇 도에 뜻을 둔자는 글을 보내어 멀리 조상하고
정을 잊지 못하는 이는 슬픔을 머금고 울었으니
하늘과 사람들이 애도함을 단연코 알 수 있다.
靈函幽隧。[函。棺也。隧。墓道。]
預使備具。
弟子法諒等。號奉色身。
不踰日而窆于東峯之冢。[山頂也。]
遵遺命也。
관곽과 묘혈을 미리부터 준비 했으매
제자 법량 등이 울부짖으며 색신을 모셔서
날을 넘기지 않고 동쪽 산봉우리에 장사 지내니
유언을 좇음이었다.
禪師性不散樸 [不亂不質而得其中。]
言不由機 [巧飾。]
선사는 성품이 꾸밈이 없고
말은 꾸미지 않았으며
服暖縕黂。
[列子曰。父衣縕黂。縕。久絮。黂。雄麻也。言挾纊弊麻衣。]
食甘糠麧。
[音屹。漢書晉灼註。米屑也。又音劾。說文云。堅麥。]
옷은 헌 솜과 굵은 삼베도 따뜻하게 여겼고,
밥은 겨와 보리싸라기도 달게 먹었다.
芧[音序。山栗。卽橡子也。]菽雜糅。
蔬佐無二。
도토리와 콩을 섞은 밥에
반찬도 두 가지가 없었으며
貴達時至。曾無異饌。
門人以墋腹[墋音參。不澄淸之意。]進難。
귀한 손이 가끔 왔으나
일찍이 다른 반찬이 없어
문인이 거친 음식을 귀한 손님에게 드리기 어려워하면
則曰。
곧 이르기를,
有心至此。雖糲[麤米]何害。
“마음이 있어 여기까지 왔으니
비록 거친 밥인들 무엇이 해롭겠는가?”라고 했다.
尊卑耋穉。接之如一。
높은 이나 낮은 이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접대함이 한결같았다.
每有王人[王使]乘馹傳命。
遙祈法力。則曰。
가끔 왕사가 역마를 타고 와서 왕명을 전하여
멀리서 법력을 빌면
곧 말하기를,
凡居王土而載佛日者。
孰不傾心護念。爲君貯福。
“무릇 왕토에 살고 불일을 이고 있는 자로서
누구인들 마음을 기울이고 생각을 다해서
왕을 위해 복을 빌지 않겠습니까?
亦何必遠汚綸言
[王言如絲。其出如綸。]
於枯木朽株。
[自謙之辭。]
또한 어찌 멀리서 마른 나무 썩은 등걸 같은 나에게
윤언을 더럽히려 하십니까?
傳乘之 飢不得齕。
渴不得飮。吁可念也。
전하고 말탄 일행들이 굶주려도 먹지 못하고
목말라도 마시지 못하는 것이 걱정입니다.” 했다.
或有以胡香 爲贈者。
則以瓦載煻灰。
不爲丸而焫之曰。
혹시 호향을 선사하는 사람이 있으면
질그릇에다 잿불을 담아
환을 짓지 않은 채로 태우면서 말하기를,
吾不識是何臭。虔心而已。
“나는 이 냄새가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다만 마음만 경건히 할 뿐이다.” 라고 했다.
復有以漢茗爲供者。
則以薪㸑石釜。
不爲屑而煮之曰。
또한 중국의 차로 공양하는 이가 있으면
섶으로 돌솥에 불지피고
가루를 만들지 않은 채로 끓여 마시며 말하기를,
吾不識是何味。濡服而已。
“나는 이 맛이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창자를 적실 뿐이다.” 라고 했다.
守眞忤俗。皆此類也。
진을 지키고 속을 싫어함이 다 이러하였다.
雅善梵唄。[長聲渴。]金玉其音。
側調飛聲。爽快哀婉。
평소부터 범패를 잘 불렀으니
그 목소리가 금 옥 같아서
곁들인 음조와 날아가는 소리가
상쾌하여 애완하여 슬프고 우아하여
能使諸天歡喜。永於遠地流傳。
모든 천상사람들을 환희케 하고
길이 먼곳까지 흘러 전해지니,
學者滿堂。誨之不倦。
배우려는 자가 당에 가득찼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至今東國習魚山之妙者。
[曹子建喜讀佛經。一日遊魚山。聞有空聲特異。淸颺哀婉。因倣其聲。以爲梵唄。]
지금껏 동국에서 어산의 묘한 곡조를 익히는 자가
競如掩鼻。
[謝安有鼻病。故音濁。士子愛其詠。掩鼻而效之。]
效玉泉餘響。
豈非以聲聞度之之化乎。
다투어 손으로 코를 가리고 콧소리를 내는 것처럼
옥천의 남긴 음향을 본뜨려 하니
어찌 소리로 중생을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리오?
禪師泥洹。當文聖大王之朝。
上側僊襟。[王心也。凡人之心則塵衿。]將寵淨諡。
及聞遺戒。[坐滅時語] 愧而寢之。
선사가 열반에 든 것이 마침 문성대왕 때였는데
왕이 진정으로 슬퍼하며
청정한 시호를 내리려 하다가
그가 남긴 훈계를 듣고는 부끄러워해 그만두었다.
越三紀。
門人以陵谷爲慮。
扣不朽之緣於慕法弟子。
36년이 지난 뒤에
문인들이 세월이 오래되면 언덕이 골짜기가 될 것을 염려해서
법을 사모하는 제자들에게 길이 썩지 않게 할 인연을 의론했더니
內供奉一吉干[音汗也。一品爵。]楊進方。
嵩文臺郞鄭詢一。斷金爲心。[易曰。二人同心。其利斷金。]
勒石是請。
내공봉 일길간인 양진방과
숭문대랑 정순일이 굳게 합심하여
돌에 새기기를 주청했다.
憲康大王 恢弘至化。
欽仰眞宗。追諡眞監禪師。
헌강대왕이 지극한 덕화로 넓히고
진종을 흠양하여 진감선사라 추시하고
大空靈塔。
仍許篆刻。
以永終譽。
대공령탑이라 이름하고
인하여 전자의 새김을 허락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영구히 하도록 했다.
懿乎
日出暘谷。無幽不燭。
海岸植香。久而爾芳。
아름답다
해가 동쪽에서 나오니
깊숙한 데까지 비치지 않음이 없고
해안에 향나무를 심으니
오랠수록 더욱 꽃답도다.
或曰。
禪師 垂不銘不塔之戒。
어떤이가 말하기를,
“선사가 탑도 하지 말라 명도 하지 말라” 는 훈계를 남겼는데
而降及西河之徒[弟子。]
不能確奉先志。
求之歟。抑與之歟。
適足爲白圭之玷。
지금에 문도들이
능히 확고하게 스승의 뜻을 받들지 못했으니
그네들이 구했던가 아니면 위에서 주었던가
실로 백옥의 티가 될 만하다.”고 했다
噫。非之者亦非也。
不近名而名彰。盖定力之餘報。
슬프다
그르게 여기는 자 또한 그르다
명예를 가까이 하지 않아도 이름이 드러나니
수행의 남은 보답이다.
與其灰滅電絶。
曷若爲可爲於可爲之時。
使聲震大千之界。
저 재처럼 사라지고 번개처럼 끊어지기보다는
할 때에 할 수 있는 일을 하여
명성을 대천세계에 떨치도록 하는 것이 낫다.
而龜未戴石。龍遽昇天。[獻康王薨。]
今上[定康王也]繼興。
귀석에 비를 얹기 전에
대왕이 갑자기 승하하고
금상이 이어 즉위하니
塤篪相應。
[小雅。伯氏吹塤。仲氏吹篪。]
意諧付囑。善者從之。
질나발과 저가 서로 응하듯이
의리로 부촉한 것에 화합하여
착한 일을 따르셨다.
以隣岳招提有玉泉之號。
[卽今之晉州玉泉寺。]
爲名所累。衆耳致惑。
근처의 산에 절도 옥천이라 불렀으니
이름이 중복되어 백성들의 귀가 미혹될까 염려했다.
將俾棄同卽異。則宜捨舊從新。
같은 이름을 버리고 달리하려 하니
마땅히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좇아야 하는데
使視其寺之所枕倚。
則以門臨複澗爲對。
乃錫題爲雙溪焉。[改玉泉爲雙溪]
그 절이 자리잡은 곳을 살펴보게 하니
동구에 두 갈래의 시내가 마주했으므로
이에 제호를 내려 쌍계사라 했다.
申命下臣曰。
다시 신에게 명을 내려,
師以行顯。汝以文進。
宜爲銘。
“선사는 수행으로 나타났고
그대는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니
마땅히 비명을 지으라,” 하셨다.
致遠拜手曰。唯唯。
치원이 절한 후에
”네네” 하고 대답했다.
退而思之。頃捕名中州。
[先生十二入唐。十八登第。文名大振。二十八東還。乃僖宗光啓元年。而定康王嗣位之初載也。至翌年。僖宗遣使。特令先生撰中興功德頌一卷。]
물러나와 생각하니
얼마전에 중원에서 이름을 얻었고
嚼腴咀雋于章句間。
[腴。肥魚臠。雋。肥鳥肉。比古人典籍深奧有味也。]
장구의 사이에서 아름답고 맛난 것을 맛보았으나
未能盡醉衢罇。
[衢罇比聖人之道。杜詩云。聖人之道。猶中衢而致樽者。斟酌多少得其宜。]
미처 거리에 둔 술 항아리[성인의 정전]를 마시어 흠뻑 취하지 못했고
惟媿深跧泥甃。
[跧。就。泥。淤泥。甃。井也。言踐盡其勇。只就泥甃間。]
오직 깊이 우물에 빠져 헤어나지 못함이 부끄러울 뿐이다.
況法離文字。無地措言。
[先生自言。北學中州。未能盡得聖人之道。則況於佛家文字。無所措言。]
하물며 불법은 문자를 떠났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임에 있어서랴.
苟或言之。北轅適郢。
[道之相違也。]
굳이 혹 말한다면
수레채를 북으로 향하면서 남방인 영 땅에 가려는 것과 같다.
第以國主之外護。門人之大願。
그러나 국왕의 보살핌과
문인의 큰 바램으로
非文字。不能昭昭乎羣目。
문자가 아니면
뭇 사람의 눈에 밝게 보여줄 수 없으므로
遂敢身從兩役。
[兩。二也。以儒而役於佛。爲二役。]
드디어 몸은 유교와 불교에 겸하고
力效五能。
[鼯鼠。一名夷由。有五能五不能。一能飛不能過屋。二能緣不能穿木。三能逾不能渡谷。四能穴不能掩身。五能走不能先人。喻述作之能反不能也。]
힘은 오능을 본받으려 하노니
雖石或憑。言可慚可懼。[慚於心而懼於人也]
비록 돌에 의탁한다 할지라도
부끄럽고 두렵도다
而道強名也。何是何非。
[字解曰。強。自是也。自是以道爲名。何必是非。]
그러나 도란 것은 억지로 이름한 것이니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 것인가
掘[音凡。莊子。掘若枯木。不動之意。]
筆藏鋒。
則臣豈敢。[王命也。不敢不作。]
석각으로 새길 만한 글인즉
신이 어찌 감당하리오마는
重宣前義。謹札銘云。[札。櫛也。編之如櫛齒相比。]
거듭 명령하신 임금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
삼가 아래와 같이 명을 짓는다.
杜口禪那。歸心佛陀。[禪那。靜慮。佛陀。覺也。]
根熟菩薩。弘之靡他。
입을 다물고 선정을 닦았으며
마음은 불타에 귀의했도다.
근기가 익은 보살이라
넓힌 게 다른 것이 아니로다
猛探虎窟。遠泛鯨波。
去傳秘印。來化斯羅。[新羅之一稱。]
용맹하게 호랑이굴을 찾아
멀리 바다를 건넜도다.
가서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인 비인을 전해받고
돌아와 신라를 교화했네.
尋幽選勝。卜築巖磴。
水月澄懷。雲泉奇興。
깊은 승지 찾아 골라
바위 벼랑에 절을 지었네.
물과 달에 마음 밝히고
구름과 샘물에 흥을 부쳤네.
山與性寂。谷與梵應。
觸境無閡。息機是證。
산은 성과 함께 적연하고
골은 범패소리에 메이리쳤네.
경계에 닿는 곳마다 걸림이 없고
기심을 끊었으니 이가 곧 증독이다.
道贊五朝。
[憲德,興德,僖康,神武,文聖。]
威摧衆妖。
默垂慈蔭。顯拒嘉招。
도는 다섯 왕조 험찬했고
위엄은 모든 요귀 꺽었었네.
묵묵히 자비 음덕 드리우면서도
겉으로는 부름을 물리쳤네.
海自飄蕩。山何動搖。
無思無慮。匪斲匪雕。
바다야 제대로 표탕하나
산이야 어찌 동요될까.
사려가 없었으매
다듬지도 않고 꾸미지도 않았네.
食不兼味。服不必備。
風雨如晦。始終一致。
음식은 맛을 겸하지 않았으며
옷은 갖추어 입지 않았다.
바람 비가 그믐밤 같은데도
시종이 한결 같았네.
慧柯方秀。法棟俄墜。
洞壑凄涼。烟蘿憔悴。
지혜의 가지가 바야흐로 빼어나는데
법의 동량이 갑자기 꺽였다.
골과 구렁이 처량도 하고
연하와 등라가 초췌하다.
人亡道存。
終不可諼。
[爾雅云 忘也 詩 衛風 終不可諼兮]
사람은 가도 도는 남았으니
영원토록 잊지 못하리라.
上士陳願。大君流恩。
상사가 소원을 진달했으매
대군이 은덕을 베풀었네.
燈傳海裔 塔聳雲根 [雲根 石也]
법등은 신라인들에게 전해왔고
탑은 바위 위에 솟구쳤네.
天衣拂石 *[天衣拂石 取久遠之意劫頌云 有石長廣四萬里 長壽天人過百年 六銖袈裟磨鍊盡 是則名爲一大劫]
천의(天衣)의 스침에 반석이 다 닳도록
永耀松門 [松門 卽寺刹]
영원히 불문(佛門)에 빛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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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는 용틀임이 실감나게 비틀려 새겨졌고, 앙화 위에 보주가 올려져있다. 중앙 네모진 부분은 두전(頭篆)이라고 하는데, 이곳에 비석의 제목인 제액(題額)을 쓴다. 대부분 전서체로 쓰기에 전액(篆額)이라고 한다. 진감선사탑비는 '敭해동고진감선사비(敭海東故眞鑑禪師碑)'라고 쓰여 있다.
*진감선사탑비 두전의 첫 글자는 敭으로 밝혀졌지만 학자 사이에 양(揚), 당(唐) 및 상(傷)의 古字로 보는 등 의견이 다르다고 한다.
*'敭' 은 '揚'의 古字. "오르다, 날다, 흩날리다"의 뜻. '위대한' 정도로 해석함이 부합할 듯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