信眉, 禪敎宗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礙 慧覺尊者/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
위 사진 제목의 '나홍하상'은 '나홍화상'의 잘못./ 태조의 王師였던 신미대사의 법호임
https://www.youtube.com/watch?v=zKM3Dtz2xeg
https://kydong77.tistory.com/21523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47258
경전 언해는 1447년 석보상절을 시작으로 월인석보, 금강경, 반야심경, 능엄경 등 20여 종에 걸쳐 진행됐다.
“1446년 한글이 창제되고 1447년 언해본 발행이 시작됐는데, 총 30종 가운데 21종이 불교 경전 언해였습니다. 경전 이외의 서적은 용비어천가와 의학서적이었고, 분량으로 볼 때 80%에 육박하는 자료가 경전이었습니다. 초기 언해본은 우리 글자가 어떻게 정착되고 대중에게 확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26_0020_0020_0060_0030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중요한 책들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楞嚴經諺解≫10권(세조 7년;1462) ≪妙法華經諺解≫7권(세조 8년) ≪金剛經諺解≫1권(세조 9년) ≪佛說阿彌陀經諺解≫1권(세조 9년) ≪禪宗永嘉集諺解≫2권(세조 9년) ≪般若心經諺解≫1권(세조 9년) ≪圓覺經諺解≫12권(세조 10년) ≪牧牛子修心訣諺解≫1권(세조 13년)
https://ko.wikipedia.org/wiki/%EC%84%9D%EB%B3%B4%EC%83%81%EC%A0%88
《석보상절》(釋譜詳節)은 1447년(세종 29년)에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주요설법을 뽑아 한글로 편역한 서적이다. 불교서적중에 한글로 번역, 편찬된 최초의 책으로[1] 소헌왕후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을 받아 만들었다. ‘석보’(釋譜)는 석가모니의 전기(傳記)를 의미하고, ‘상절'(’詳節)은 중요로운 내용은 자세히(詳) 쓰고, 그렇지 않은 내용은 줄여서(節) 쓴다는 뜻이다.[1] 금속 활자에 의한 15세기 한글 산문 자료로서 한국 어학, 한국 문학, 한국 서지학, 한국 불교학에서 귀중한 자료 중의 하나이다.
https://kydong77.tistory.com/21576
https://www.youtube.com/watch?v=0MEvP48j6gs
https://kydong77.tistory.com/21523
信眉
禪敎宗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礙 慧覺尊者
선교종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
세종이 말년에 유언을 남겨 문종이 즉위년(1452) 7월 6일
'선교종도총섭(禪敎宗都摠攝) 밀전정법(密傳正法) 비지쌍운(悲智雙運) 우국이세(祐國利世)* 원융무애(圓融無礙)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칭호를 내렸다.
*시호 중 "우국이세(祐國利世)"
운영자 주석)
: 운영자는 산스크리트어(범어)에 능통한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에 주도적으로 기여한 공적을 공표한 증거임.
조선 초 15세기에 활동한 승려. 본관은 영동(永同). 속명은 김수성(金守省).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 김수온(金守溫)의 형.
https://namu.wiki/w/%EC%8B%A0%EB%AF%B8(%EC%8A%B9%EB%A0%A4)
언어학에 능통했다고 하는데,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신미를 적극적으로 기용했고 세종대왕의 눈에도 들었다. 그 덕택에 말년의 세종대왕에게 총애를 받으며 한글 보급 업무를 맡았고, 문종과 세조도 신미를 적극적으로 기용했다.
그 결과로 조선 초기 수많은 한글서적들이 신미의 손을 거쳐갔는데, 현존하는 주요 저서로는 능엄경언해, 목우자수심결언해,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불설수생경, 사법어언해, 석보상절, 선종영가집언해, 원각경언해, 법화경언해,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창원 금룡사 입능가경 등이 있다.
다만 위 책 대부분을 신미 혼자 저술하진 않았다. 수양대군이 주도적으로 책을 저술했고 효령대군, 신미, 학조 등은 교정 또는 주해작업 정도를 했다. 물론 이러한 작업이 저평가될 일은 아니기에, 초기 한글 보급에 큰 도움을 준 승려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세종이 말년에 유언을 남겨 문종이 즉위년(1452) 7월 6일 '선교종도총섭(禪敎宗都摠攝) 밀전정법(密傳正法) 비지쌍운(悲智雙運) 우국이세(祐國利世)* 원융무애(圓融無礙)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칭호를 내렸다.
*시호 중 "우국이세(祐國利世)" 주석)
: 운영자는 산스크리트어(범어)에 능통한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에 기여한 공적을 드러낸 증거임.
한신대학교[4] 강진갑 외래교수는 기사를 통해, 세종대왕 친제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친제협찬설도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고 보지만, "실제 세종대왕 치세에는 임금과 신하가 협력하여 국력을 융성하게 만들었는데, 영화에서는 임금과 신하의 대립을 너무 극단적으로 묘사해 관객에게 당혹감을 주었다." 비판했다.
[이 블로그 운영자의 愚見]
왕조시대에는 그 왕조에 만들어진 것은 모두 당대 왕의 치적으로 기록한다. 영릉에 가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세종대왕께서 어떻게 그 많은 과학발명품들을 만드셨겠는가?
신미대사는 초기 경전에 접근하기 위한 방편으로 초기 불전의 문자인 산스크리트어[범어]를 공부했고, 범어에 능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전의 초기 번역은 대체로 그의 번역 내지 감수를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세종께서 소헌와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월인천강지곡>의 언해의 출간을 감행한 점이다. 유학 이념으로 건국한 조선이었지만 유학에는 제사외에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할 아무런 방편이 없었다. 억불숭유정책은 정도전 등이 주창한 건국이념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