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한걸음을 떼기 시작한 한국역사

일부 고고학적 발굴로 '신화' 통설 반박… 청동기 문화 한반도 전래시기도 앞당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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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속초 조양동 유적
강원도 정선 청동기 유적
그동안 신화 형태로 기술돼 온 고조선 건국 과정이 공식 역사로 편입됐다. 또 한반도 청동기 도입 시기도 최대 1000년을 거슬러 올라가게 됐다. 교육인적자원부는 2007학년도 역사 교과서를 이처럼 수정해 일선 학교에 보급하기로 했다. 따라서 고조선 건국과 관련, 기존의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라고 기술한 대목은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로 수정됐다. ‘~한다’라는 말이 있고 없음의 차이는 엄청나다. 국사편찬위원회 장득진 실장은 "그동안 사서에는 나오지만 고고학적 증거가 불충분했던 고조선 건국 시기가 최근 연구 성과로 (근거가) 뚜렷해짐에 따라 서술 방식을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또 기존 교과서는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 지역에서는 기원전 15세기∼기원전 13세기에 청동기 시대가 전개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새 교과서는 ‘신석기시대 말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랴오닝(遼寧), 러시아의 아무르 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 문화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 시대로 넘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고 기술해 청동기 시대를 500∼1000년 앞당겼다. 이 부분을 집필한 최몽룡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강원도 정선과 춘천.홍천, 경기도 가평, 인천시 계양구 등지에서 최근 출토된 유물 등을 근거로 청동기 문화가 한반도에 전래한 시기를 앞당겼다"고 말했다. 올해 국사 교과서를 수정하게 한 가장 큰 동인은 고고학적 유물의 발굴과 과학적 연대 측정의 결과다. 그동안 한반도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0세기쯤이라는 한국 고고학계 통설은 이 시대 유적과 유물에 대한 연대 측정으로 흔들리게 됐다. 최몽룡 교수에 따르면 강원도 춘천시 신매리에서 출토된 청동기는 기원전 1510년쯤으로 추정됐다. (최몽룡 외 <동북아 청동기시대 문화연구>, 주류성 발간, 2004) 진주 남강 수몰지구에서 확인된 각종 청동기 시대 유적과 유물은 연대가 BC 10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BC 15세기 무렵으로 조사됐다. 남강 수몰지구 중 선문대 이형구 교수(역사학과) 조사팀이 발굴한 옥방 유적의 경우 집자리터에서 나온 목탄 2점에 대한 국립문화재연구소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각각 BC 1590-1310년과 BC 1620-BC 1400년이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당시 이 교수는 “남강지역의 유적 연대는 대략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으나 기원전 14∼기원전 13세기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지적했다. 건국대 박물관이 다른 남강 수몰지구에서 발굴한 청동기 시대 주거지 출토 목탄 2점을 측정한 결과에서도 BC 1420-BC 1100년, BC 1400-BC 1100년으로 나타났고 경남대 박물관 역시 서울대와 캐나다 토론토대에 시료측정을 의뢰한 결과 기원전 10세기를 뛰어넘은 것으로 드러났다. 강원 지역의 경우 청동기 시대가 남강 유역보다 더욱 올라가고 있다. 강릉 교동 주거지 1호의 경우 그 연대가 무려 BC 1878- BC 1521년으로 나왔고 다른 두 곳의 주거지도 중심 연대가 BC 15세기 무렵인 것으로 나타났다.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청동 도끼가 출토된 속초 조양동 청동기 시대 유적 또한 국립문화재연구소 연대 측정 결과 BC 1206-BC 830으로 나왔다.
진주 옥방5지구 각목돌대문토기 / 진주 옥방5지구 장방형집자리 / 전남 순천 죽내리 유적 / 전남 순천 죽내리 유적(왼쪽부터)
뿐만 아니라 조선대 박물관이 발굴한 전남 순천 죽내리 청동기 시대 주거지도 외국 연구소에 탄소 연대 측정을 의뢰한 결과 BC 16세기- BC 15세기라는 결과가 나왔다. 춘천시 신매리 유적, 강릉 교동 주거지, 전남 순천 죽내리 유적지에서는 청동기 전기의 유물인 공열토기와 이중구연토기, 단사선문토기 등이 공통적으로 출토되기도 했다. 이에 앞서 양평 양수리의 두물머리고인돌의 덮개돌 밑 15cm 되는 무덤방 안에서 발견된 숯의 연대측정은 3,900±200B.P(MASCA 계산법으로는 4,140~4,240B.P)라는 절대연대를 보였다. 고고학자인 조유전 한국토지박물관장은 "남강 선사 유적만 해도 탄소 연대 측정치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 연대를 BC 400- BC 500년쯤이라고 추정했다"면서 " 청동기 시대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과학적인 탄소연대 측정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교과서 수정에 따른 고조선에 대한 기술에 대해 이견도 적지 않다. 한국교원대 송호정 교수(역사교육과)는 “기원전 15세기에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는 이야기는 학계에서 합의된 내용이 아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청동기 유물은 극소수 장신구에 불과하다”며 종래의 통설을 고수했다. 이에 대해 이형구 교수는 “기존의 교과서에 있는 청동기 시대 역사는 중국, 일본 사람들이 쓴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며 "고조선 영역이었던 한반도 서북지역의 청동기 시대 개막은 여러 가지 과학적인 증거로 보아 기원전 15세기일 것"이라고 말했다. 윤내현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장은 “청동기 유물이 극소수 장신구이기 때문에 시대를 수정할 근거가 못 된다는 주장은 중국과 한반도에서 발굴되는 청동기의 내용이 다르다는 사실과 만주와 한반도에 이르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무시하는 견해”라고 반박했다. 이강승 충남대 교수(문화재위원)가 ‘청동기 있는 청동기 시대’와 ‘청동기 없는 청동기 시대’를 구분해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를 BC 10세기 아래로 본 데 대해 윤내현 소장은 “청동기 시대를 말해주는 유적(유물)은 청동기 말고도 얼마든지 있으며 과학적 탄소동위원소 측정 결과나 중국의 청동기 시대와도 비교한 데이터 등을 종합할 때 한반도 청동기 시대는 BC 15세기를 넘어선다”고 주장했다. 윤 소장은 특히 “중국 랴오녕성 북부와 내몽고 자치주 경계에 있는 훙산(紅山) 지역의 하가점(夏家店)’에서는 기원전 2400여 년의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가 많이 출토되었다”면서 “한반도의 고인돌, 청동기 유물을 만주지역의 그것들과 비교 분석할 때 한반도 청동기 시대를 BC 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증거들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고조선은 수정된 교과서에 역사로 기술됐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신화’라는 통설에 갇혀 있다. 또한 고조선의 실체를 둘러싼 강단 사학계와 재야 사학계의 이견도 여전하다. 고조선이 명실상부한 ‘역사’로 자리잡기에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동북쪽에 紅山(홍산)이라는 산이 있다. 몽골사람들이 ‘우란하따(烏蘭哈達)’라고 부르는 이 붉은 바위산 인근에서 학계를 놀라게 한 거대한 제단(壇)과 신전(廟)`적석총(塚) 등 거대한 후기 신석기 문화가 발견됐다. 100여년 전의 일이다. 중국 요녕성과 내몽골, 하북성 경계의 燕山(연산) 남북, 만리장성 일대에 널리 분포된, 국가 체제를 완벽하게 갖춘 이 유적을 ‘홍산문화’라고 부른다.

◇홍산문화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였다. 1906년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많은 신석기 유적과 적석묘 등을 발견했는데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다. 1955년 이를 ‘홍산문화’로 이름 붙였는데 이후 1982년 요녕성 뉴허량(牛河梁)에서도 같은 유적이 대거 발굴되자 세계 각국 언론들은 ‘5천 년 전 신비의 왕국’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이 일대는 현재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나 중국의 방해로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 하고 있다.

◇황하문명보다 앞선 서기전 4천500년~2500년경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는 통상 청동기 시대에나 출현 가능한 분업화가 이뤄진 국가형태를 띠고 있다. 특히 가면과 玉(옥) 장식 등에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대거 발견돼 국내 학자들은 곰 토템을 지닌 웅족과 청동기 시대의 고조선 초기(고조선 중기 이후는 철기시대) 이전 한민족 원류 중 하나인 신석기 시대의 배달국 초기(한웅배달국 후기는 청동기시대)가 자리했던 곳이라고 주장한다. 즉 홍산문화는 단군조선 건국의 토대일 가능성이 높은 유적이라는 말이다.

◇2006년에 중국이 뉴허량 유적 등 35개를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목록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遼河(요하)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探源工程(탐원공정)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국내 학자들은 “고조선과 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요하 일대의 홍산문화를 중국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라고 비난하고 있다.

◇30년 전 중화문명의 시발점을 앙소문화에서 하모도문화로 바꿔 재설정한 중국은 뉴허량 유적 발견 이후 홍산문화를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중화 3대 문명의 시발점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漢族(한족)의 것과 엄연히 다른 동이족 문화인데도 과거 일제가 한 것처럼 한민족의 뿌리마저 잘라버리려는 역사왜곡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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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왕조 은나라, 동이족 일파였다”

경향신문 /입력 : 2008-11-03-17:40:46수정 : 2008-11-03 17:40:47 중국 안양(은허) | 이기환 선임기자 lkh

ㆍ中 ‘은허’ 발굴 80주년 기념 현장을 가다

지난 10월29일부터 31일까지 중국 안양 은허(殷墟)유적에서 은허발굴 80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중국내외의 학자 160여명이 갑골문으로 대표되는 은허발굴의 의의를 되돌아보고 발굴성과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학술대회에는 계간 ‘한국의 고고학’ 주관으로 답사단이 파견됐는데, 기자는 이 답사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이곳은 은허(殷墟) 유적보다 이른 시기의 상(商)나라 성이 존재했던 곳인데요. 1호 궁전터는 이미 1999년 발굴되었고, 이곳은 지금 막 확인된 제2호 궁전터입니다.”

지난 10월30일 오후 5시, 중국 허난성(河南省) 안양(安陽) 은허(殷墟).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무렵.

은허 발굴 8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모인 국내외 참석자들의 눈이 빛났다. 이곳은 유명한 은허 유적에서 강(환수·洹水)을 사이에 두고 강북으로 약 2㎞ 정도 떨어진 원북상성(洹北商城) 터. 탕지건(唐際根) 중국사회과학고고연구소 연구원은 설명을 끝낸 뒤 참석자들을 이끌고 한참 더 갔다.

은허(殷墟) 유적의 원경. 36㎢의 넓은 지역에 은(상)나라 말기 궁전과 제사터, 왕릉 등이 조성돼 있으며 15만편의 갑골이 확인되기도 했다. 중국 100대 고고학 발굴사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자, 이 판축한 흔적 좀 보세요. 이것이 이번에 새롭게 확인한 원북상성의 북성벽입니다.”

따끈따근한 발굴 성과를 보면서 유난히 감상에 젖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1928년부터 은허를 발굴한 리지(李濟)와 둥쭤빈(董作賓), 량쓰융(梁思永) 등의 후손들이었다.

109년 전인 1899년 국자감 좨주이자 금석학자였던 왕이룽(王懿榮)은 지독한 학질에 걸렸다. 그는 처방 받은 용골(龍骨)이라는 약재에 새겨진 글자를 확인했다. 이것은 갑골문자였다. 이후 학자들의 추적 끝에 약재의 원출처가 바로 허난성(河南省) 안양(安陽) 샤오둔춘(小屯村)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1928년 둥쭤빈을 대장으로 대대적인 샤오둔촌 발굴에 나섰고, 마침내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온 은(상·BC 1600~BC 1046년) 말기(BC 1300년부터)의 도성인 은허(殷墟)를 찾아낸 것이다. 무엇보다 완전한 체계를 갖춘 문자(갑골문자)를 확인했다. 이 갑골문은 현재 세계인구의 4분의 1이 사용하는 한자의 원형이다. 은허 발굴은 2001년 중국학계가 선정한 ‘중국 20세기 100대 고고학 발굴’ 가운데 단연 1위로 뽑혔다. 2006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자의 원형이 된 갑골문. 갑골은 완전한 체계를 갖춘 문자로 현재 세계인구의 4분의 1이 사용하고 있다.


“특히 1936년에는 12기의 왕릉과 2500여기의 제사갱, 부장묘가 발굴됐는데 학자들은 이것이 은(상) 말기인 BC 1300년에서 BC 1046년 사이에 재위했던 12명의 왕, 즉 역사서에 나온 반경에서 주왕까지 12명의 왕으로 해석했어요.”(이형구 선문대 교수)

답사단의 눈길을 잡아 끈 것은 갑골전시관이었다. 지금까지 은허에서 확인된 갑골은 15만편에 이르는데, 1936년 이 한 곳(YH 127 갑골갱)에서만 무려 1만7000여편의 갑골이 쏟아졌다.

문득 ‘상서(尙書) 다사(多士)’편에 나온 “오직 은(상)의 선인들만이 전(典)이 있고, 책(冊)이 있었다”는 귀절을 떠올랐다. 중국학계는 “이것을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당안고(당案庫·역사기록을 보관한 창고)”라고 표현했다. 지금의 국가기록원인 셈이다.


은(상)은 갑골에 하늘신과 조상신, 자연의 신령에게 왕실과 나라의 길흉을 점친 것으로 유명하다. 군대, 형벌, 전쟁, 공납, 농업, 수공업, 상업, 축목, 기상, 건축, 질병, 생육, 길흉 등 국가의 대사는 물론 소소한 일상까지 일일이 점을 친 뒤 그것을 버리지 않고 기록으로 남겨두었던 것이다. 확인된 15만 편에서 확인된 갑골문은 4500자에 이르지만 아직 해독된 글자는 1000여자에 지나지 않는다.

답사 내내 경탄에 마지 않은 것은 은(상)의 청동기와 옥기 제작 기술이었다. 은허에서 출토된 청동기는 5000점이 넘는데, 사모술(司母戌)이란 명문이 있는 청동방정(鼎·사각형 모양의 솥)은 무게가 832.75㎏에 이르렀다. 옥기는 2600여건이 확인됐는데, 중국 동북방 차하이-싱룽와에서 발원한 옥기문화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은(상)은 동이족의 일파라는 점이다. 고고학자 푸쓰녠(부사년)은 “은(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으며, 망한 뒤에 동북으로 돌아갔다”고 단정했다. 이번에 발굴된 원북상성의 경우 중심축이 동북으로 13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이는 전형적인 상나라 도성의 방향인데, “고향(발해연안)에 대한 짙은 향수를 나타낸 것(궈다순·郭大順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이라 해석되고 있다.

이형구 교수는 “고구려·백제의 선조인 부여 역시 점을 치고, 술과 노래를 좋아하며, 백색을 숭상하는 등 은(상)의 풍습을 빼닮았다”면서 “하늘로부터 왕권을 받았다는 뜻인 역법(曆法)마저 은의 역법을 썼다”고 말했다.

이제 짙게 깔린 어둠에 바람마저 휑하여 더욱 쓸쓸해진 은허 현장. 답사단은 은(상)이 망하자(BC 1046년) 왕족인 기자(箕子)가 은허를 지나면서 불렀다는 맥수지가(麥秀之歌)를 떠올렸다. 하지만 은(상)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철저히 파괴된 역사지만 그 동이의 역사는 300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현현하고 있으니까….

<중국 안양(은허)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갑골문자보다 1000년 앞선 골각문자 발견

중앙일보ㅣ2008.10.22 02:17 입력 / 2008.10.22 16:51 수정

4000 ~ 4500년 전 추정 … 동이족 문자 가능성

중국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갑골(甲骨)문자보다 1000년이나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문자가 발견됐다.

갑골문자는 중국 고대 상(商·BC 1600~1046년)나라의 수도인 은허(殷墟·허난성 안양현)에서 1899년 처음 발견된 이후 중국 최초의 문자로 인정받아 왔다.

산둥(山東)대 고고미술학연구소 류펑쥔(劉鳳君) 소장이 최근 중국 고고학 관계자들을 초청한 세미나에서 갑골문자 이전에 다른 형태의 골각(骨刻)문자가 산둥성 창러(昌樂)현 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홍콩 문회보(文匯報)가 21일 보도했다. 류 소장은 중국 고고미술학의 창시자로 학계의 명망이 깊은 학자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회과학원 왕위신(王宇信) 교수 등 은상문화협회(殷商文化協會) 관계자 5명은 모두 류 소장의 학설에 동의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세미나에서 이 문자는 ‘창러골각문’으로 이름 붙여졌다.

산둥성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골각문자(左), 중국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갑골문자(右).


류 소장은 산둥성 민간 소장가인 샤오광더(肖廣德)가 2004년부터 최근까지 창러현 지역 주변에서 수집한 수백 개의 골각문자를 연구한 결과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류 소장에 따르면 이들 도안은 소의 어깨뼈와 사슴·코끼리 뼈에 새겨져 있었다.

도안의 형태는 다양했다. 뼈 한 곳에 100여 개의 서로 다른 도안이 새겨진 것도 있고, 1~2개의 도안만 새겨진 뼈도 있다. 여러 개의 도안은 세로로 정렬돼 있어 특정 사안을 기록한 문자로 봐야 한다는 게 류 소장의 주장이다. 단순한 그림일 경우 이처럼 정렬된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점복(占卜)기록인 갑골문자와 달리 골각문자에선 점복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류 소장은 “뼈의 색깔과 석화(石化) 상태를 판단해 볼 때 문자를 새긴 연대는 4000~4500년 전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 산둥성의 룽산(龍山) 신석기 시대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함께 출토된 뼈로 만든 칼과 송곳은 전형적인 룽산 중·후기 시대의 도구들이었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당시 산둥 지역은 한민족을 포함한 동이(東夷)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이 골각문자는 동이문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 소장은 “문자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문자 계열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류 소장은 이어 “안양(安陽)을 중심으로 한 은허 지역에서 발견됐던 갑골문자도 동이족의 골각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20세기 중국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 갑골문자 발견이었다면 이번 골각문자 발견은 중국 역사를 지금보다 1000년 이전으로 돌리는 21세기 중국 고고학의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홍콩=최형규 특파원

최형규 기자 [chkc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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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요서지역 해안도시인 진시시(錦西市) 소황띠(小荒地)라는 고대성곽에서 출토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와 <승>(丞) 자 봉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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