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금소총 제226화 - 아버지와 딸이 서로 속이다 (父女相譎)
한 시골에 어떤 선비가
딸을 하나 두어 매우 아끼며 길렀다.
그 딸이 자라 출가를 하니,
그 시집은
수십 리 떨어진 마을에 있었다.
선비는 애지중지 기른 딸을
시집보내 놓고는
보고 싶을 때마다 늙은 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수십 리 먼 길을 걸어 찾아가지만,
딸은 그저 인사만 할 뿐
술 한 잔 밥 한 그릇 대접하지 않고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매양 쫄쫄 굶고,
그 먼 길을 다시 걸어
기진맥진 집으로 돌아와서는
분통을 터뜨렸다.
"내 그것을 어떻게 길렀는데,
그 먼 길을 걸어서 간 아비에게
물 한 모금 대접하지 않고 돌려보내니.
그렇게 무심한 것이
어디 또 있단 말인가?
내가 죽었다 해도
애통해 하기나 하겠는가?
내 한번 시험 삼아
거짓으로 죽었다 해놓고
그 아이 하는 꼴 좀 봐야겠다."
선비는 이렇게 원망하며
아내와 상의하여 언약하고,
사람을 시켜
부친 사망의 부고를 딸에게 보냈다.
그리고는 홑이불을 쓰고
죽은 듯이 누워 있으니,
부고를 받은 딸이 즉시 달려와
슬피 울며 곡을 하는데
그 내용 또한 황당했다.
"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아버님이 엊그제
저의 집에 오셨을 때
쌀밥과 고깃국으로
식사를 대접하고
맛있는 술과 안주도
장만해 올렸었는데,
그 때 아버님은 맛있게 잡수시고
신관도 훤하니 좋으셨습니다.
그랬는데 며칠 사이에
이렇게 돌아가시다니
이 무슨 변고이십니까?"
이렇게 거짓말을 하면서
통곡을 하는데
갈수록 거짓말은 커져만 갔다.
"그 날 아버님께서는
어느 골짜기 목화밭과
어느 들판의 논을
이 딸에게 주겠노라고
약속까지 하셨는데
그대로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으니,
그 전답들을 어디에다
호소하여 받으라고
이렇게 돌아가셨습니까?
정말로 염라대왕도 야속합니다요."
딸이 이렇게 울면서 말하는 것은
집안사람들이 이 소리를 듣고,
살아 생전 부친의 말씀을
그대로 처리해 주어야 한다는
일종의 거짓 연극이었다.
선비가 죽은 듯이
누워서 듣고 있자니,
딸의 행동이
너무나 교활하고 요사스러워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홑이불을 걷어치우고
벌떡 일어나 앉아,
눈을 부릅뜨고,
손을 내저으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염치없는 악독한 년아!
내가 죽었다고 하여 와서는,
어찌 그리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을 한단 말이냐?
내 엊그제 언제 네 집에 갔으며,
지난날 네 집에 갔을 때
물 한 모금 내게 대접했단 말이냐?
내 언제 네게
전답을 주겠다고 했기에,
그런 허황된 말을 한단 말이냐?
세상에 너 같은 악한 딸년이
또 어디 있겠느냐?
보기 싫다. 당장 물러가거라!"
이렇게 흥분하여 꾸짖으니,
통곡을 하던 딸이
슬그머니 일어나
눈물을 거두고는
부친의 손을 잡으면서,
"아버님, 아버님의 돌아가심도
어디 정말 돌아가신 것이며,
제 울음도 어찌
정말 울음이겠습니까?
거짓 초상에 거짓 곡을 한 것이니
너무 화내지 마소서."
하고 애교 있게 웃는 것이었다.
이에 선비는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아무 말이 없다가,
따라 웃으면서
그만 시집으로 돌아가라 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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