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룡운 저

 

 野船渡盡無數人 滿江風雨自縱橫
「나룻배 타고 강 건너는 수 많은 사람들이여,
강에 가득한 비바람 스스로 어지럽구나」.

<십현담> 중에서

 

나룻배와 행인 - 한용운 (바리톤 박흥우)

https://www.youtube.com/watch?v=dZxS9Q0GE9w

 

한용운의 「나룻배와 행인」/ (김현성이 작곡,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vcvA5e5gLpU

 

황정자 - 처녀 뱃사공

https://www.youtube.com/watch?v=Zzsrz2sxlIg

 

김용임 - 처녀 뱃사공 (2008)

https://www.youtube.com/watch?v=3NoiCJUPINk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임경희 낭송)

https://www.youtube.com/watch?v=rtukHThvXD0

 

님의 침묵 - 한용운 (임경희 낭송)

https://www.youtube.com/watch?v=_TXAx0sY194&t=93s

 

김시습의 ‘십현담요해’ 언해본 발견

http://news.donga.com/3/all/20090916/8809995/1

 

십현담[]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51358&cid=40942&categoryId=31543

중국 당나라의 선승(禪僧) 동안상찰(同安常察)이 조동종(曹洞宗)의 가풍과 수행자의 실천 지침 등을 칠언율시 형식으로 노래한 10수의 게송(偈頌).

중국 선종()의 한 종파인 조동종의 승려 동안상찰이 지은 게송으로서 《경덕전등록()》 제29권에 실려 있다. 조동종의 가풍과 수행자의 실천 지침 등을 칠언율시 형식의 10수로 지은 것인데, 각 수의 제목은 심인()·조의()·현기()·진이()·연교()·달본()·환원()·회기()·전위()·일색()이다.

 십현담 [十玄談] (두산백과)

 

 

선종의 교지인 <십현담>이 먼저여야 하나 어제의 약속대로 <학랑소>부터 보지요.

한국 제일의 천재는 성속에 가림이 없으신 원효스님을 추앙했다.

다음은 만해가 주해서 서문에서 밝힌 매월의 평가와 매월과의 인연을 밝혔다.

"열경(悅卿)의 주석도 있는데, 열경은 매월(梅月) 김시습(金時習)의 자(字)이다. 매월이 세상을 피하여 산에 들어가 중옷을 입고 오세암에 머물 때 지은 것이다. 두 주석이 각각 오묘함이 있어 원문의 뜻을 해석하는 데 충분하지만, 말 밖의 뜻에 이르러서는 나의 견해와 더러 같고 다른 바가 있었다.
대저, 매월에게는 지키고자 한 것이 있었으나 세상이 용납하지 않아 운림(雲林)에 낙척(落拓)한 몸이 되어, 때로는 원숭이와 같이 때로는 학과 같이 행세하였다. 끝내 당시 세상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천하만세(天下萬世)에 결백하였으니, 그 뜻은 괴로운 것이었고 그 정(情)은 슬픈 것이었다.
또 매월이 십현담을 주석(註釋)하였던 곳이 오세암이고, 내가 열경의 주석을 읽었던 것도 오세암이다. 수백년 뒤에 선인(先人)을 만나니 감회가 오히려 새롭다. "

참고로 오세암은 매월의 거주처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세에 문재를 인정받아 세종으로부터 비단을 하사 받은 데서 유래한다. 실상은 7-8세였을 때라고 하나 그는 어딜가나 5세때부텨 천재로 명성이 났다는 전설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이이가 왕명으로 매월의 전기를 지었듯이. 

인터넷에 만해스님의 주해서가 있어 여기 옮깁니다.

법보회  번역자 서준섭님 고맙습니다.

십현담을 읽을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그러고 보니 <학랑소>도 그 뿌리가 <십현담> 아래 구절에 근거한 것이로군요.

<原文> 玄玄玄處亦須呵 
‘현묘(玄妙)하다’, ‘현묘하다’고 한 곳, 또한 웃음거리일 뿐.

첨언하면 김시습의 정의로 보나 유학이 국가이념인 조선시대에 그가 추앙된 관점으로 볼진대 그를 유학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운영자의 관점에선 <십현담요해> 집필이나 중도에 재혼한 적도 있으나 평생 홀로 방랑을 멈추지 않은 점, 그가 깨달음을 얻지 못했음을 한탄한 점 등을 감안하면 그는 선종 조동종을 신앙하는 불자였음을 확언합니다.

성철스님이  일천 배를 한 자만 만난다고 한 일화는 '천상천하 유아돈존'을 설파하신 부처님의 말씀처럼 도성제에 이르는 깨달음은 남이 대신해 줄 수 없고 사성제의 이치를 체득하여 팔정도를 정진수도한 자만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신 것이라 사료됩니다. 자신도 열반하실 때까지 해인사 백련암에서 팔정도의 정진수행을 그치지 않는 성철스님처럼!

 

謔浪笑(학랑소) - 梅月堂 金時習[매월당 김시습]

-실없는 말로 희롱질하며 비웃네.

 

我會也我會也

[아회야아회야] : 나는 깨닫고 또한 나는 이해하니

拍手呵呵笑一場

[박수가가소일장] : 박수치고 껄껄대며 한바탕 웃어보네.

古今賢達俱亡羊

[고금현당구망양] : 옛날과 지금의 현달도 모두 망양이리니

不如結茅淸溪傍

[불여결모청계방] : 맑은 시내 가까이 띳집 짓느니만 못하네.

畏途側足令人忙

[외도측족령인망] : 산기슭 곁 두려운 길에 사람들 조급하니

  不如安坐曝朝陽[불여안좌폭조양] : 아침 해 쬐며 편안히 앉음만 못하리라.

  百年熟黃梁

[백년숙황량] : 백년이 흘러야 메조밥 익을것이며

  談笑防龜桑

[담소방귀상] : 담소함에는 거북과 뽕나무를 막으리라.

百了千當

[백료천당] : 백가지 마치면 천가지 만나나니

不如坐忘

[불여좌망] : 앉아서 잊느니만 못하리라.

碧山峨峨

[벽산아아] : 푸른 산은 높고 위엄있고

碧澗泱泱

[벽간앙앙] : 푸른빛 산골물 깊고 넓구나.

自歌自舞

[자가자무] : 스스로 노래하고 절로 춤추니

憂樂兩忘

[우락양망] : 괴로움과 즐거움 다 잊는다네.

或偃或臥

[혹언혹와] : 쓰러져 있다가 혹은 누워자고

或行或坐

[혹행혹좌] : 혹은 가다가 혹은 앉아 있네.

或拾墮樵

[혹습타초] : 혹은 줍고 떨어뜨려 나무하고

或摘甜蓏

[혹적첨라] : 또 달콤한 열매를 딴다네.

一領布衫

[일령포삼] : 한벌의 베 적삼 차지하니

半眉裸臂

[반미라비] : 반쪽 둘레 팔뚝은 벌거숭이

骨癯麤筋瘰野

[골구추근라야] : 야윈 뼈 거친 살에 옴걸려 비천하고

冠粗粗纓下嚲

[관조조영하타] : 갓은 거칠고 갓끈은 아래로 늘어졌네.

眼底不見人

[안저불견인] : 눈 아래 사람은 보이지 않고

與我步月長歌

[여아보월장가] : 나와 함께 걷는 달과 항상 노래하네.

腰裊灘笑入

[요뇨탄소입] : 간드러진 허리에 웃으며 여울에 드니

煙蘿洞雲鎖

[연라동운쇄] : 안개낀 울타리 구름이 가두어 그윽하구나.

[출전]

梅月堂詩集卷之一[매월당시집 1] 詩  述懷[시 술회]

[註]   

亡羊[망양] : 한 가지 일에 오로지 전념하지 않고 이것저것 하면 실패하기 쉽다는 말. 

賢達[현달] : 현명하고 사리에 통달한 사람, 재능 덕행 성망을 겸비한 사람. 

黃梁[황량] : 黃梁炊夢[황량취몽] : 메조밥을 지을 때 잠깐 눈을 붙인 사이에 꾸는 꿈, 한단지몽 

한단지몽 (邯鄲之夢)

인생영화의 덧없음을 이르는 . 서기 731년에 노생(盧生)이 한단이란 에서 여옹(呂翁)의 베개빌려 잤는데, 꿈속에서 80년 동안 부귀영화 누렸으나 깨어 보니 메조짓는 동안이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심기()의 ≪침중기()≫에서 나온 말이다.

[비슷한 말] 노생지몽한단몽.

龜桑[귀상] : 愼桑龜[신상귀], 龜桑愼[귀상신], 거북이가 잡혀가며 자기는 죽지 않는것을 자랑함에  

뽕나무가 나의 영험으로 삶으면 죽는것을 비웃으며 알려주어 죽게된 고사. 

座中談笑[좌중담소愼桑龜[신상귀] - 莊子 座右銘[장자 좌우명] 

 

http://blog.daum.net/gudo57/2866

 

謔浪笑[학랑소]

謔浪笑[학랑소] 梅月堂 金時習[매월당 김시습] 실없는 말로 희롱질하며 비웃네. 我會也我會也[아회야아회야] : 나는 깨닫고 또한 나는 이해하니 拍手呵呵笑一場[박수가가소일장] : 박수치고 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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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현담(十玄談)》열 가지 현묘한 말씀

                  
- 동안상찰(同安常察) 선사 지음 

https://blog.naver.com/bonem25/221339263704

① 心印(심인)

問君心印作何顔 
(문군심인작하안)

그대에게 묻노니 
심인이 어떻게 생겼는가?


心印誰人敢授傳 
(심인수인감수전)

심인을 누가 감히 전해주고 받으랴


歷劫坦然無異色 
(역겁탄연무이색)

영원토록 변함없어 
다른 모양 없거늘


呼爲心印早虛言 
(호위심인조허언)

심인이라 부르는 것도 
벌써 헛된 말이라네


須知本自靈空性 
(수지본자영공성)

본래 스스로
신령스럽고 빈 성품이여,


將喩紅爐火裏蓮 
(장유홍로화리연)

비유하면 
벌겋게 달아 있는 
난로 속의 연꽃이네


莫謂無心云是道 
(막위무심운시도)

무심을 일러 
도라 하지 말게나.


無心猶隔一重關 
(무심유격일중문)

무심도 아직 
한 겹의 관문이 막혀 있다네.




② 祖意(조의)

祖意如空不是空 
(조의여공불시공)

조사의 뜻은 
공한 것 같으나 공하지 않나니


眞機爭墮有無功 
(진기쟁타유무공)

참된 기틀이 
어찌 있다 없다는 공과를 따지랴.


三賢尙未明斯旨 
(삼현상미명사지)

삼현의 경지로는 
아직 이 뜻에 캄캄하고


十聖那能達此宗 
(십성나능달차종)

십성인들 어찌 
이 종지(宗旨)를 통달 했으리요.


透網金鱗猶滯水
(투망금린유체수)

그물 벗어난 금비늘 고기가 
오히려 물에 걸렸는데


回途石馬出紗籠 
(회도석마출사롱)

길 돌린 돌말은 
우리를 벗어났네.


慇懃爲說西來意
(은근위설서래의)

은근히 그대 위해 
서쪽에서 온 뜻을 말하노니


莫問西來及與東 
(막문서래급여동)

서쪽에서 왔는가, 
동쪽에서 왔는가를 묻지 말게나.



③ 玄機(현기)

迢迢空劫勿能收 
(초초공겁물능수) 

멀고 먼 공겁부터 
거두지를 못했는데


豈爲塵機作繫留 
(가위진기작계류)

어찌 티끌 속에 
매어둘 수 있으리오


妙體本來無處所 
(묘체본래무처소)

미묘한 본체는
본래 처소가 없고


通身何更問蹤由
(통신하갱문종유)

온몸이 그대로인데 
어찌 다시 자취를 묻겠는가?


靈然一句超群像 
(영연일구초군상)

신령한 한 말씀이 
모든 현상을 초월하였으니


逈出三乘不假修 
(형출삼승불가수)

삼승 경계 뛰어 넘어 
닦는 노력 필요 없네.


撒手那邊千聖外 
(철수나변천성외)

저 쪽 천성들이 못가는 
먼 밖에서 손을 흔들고


廻程堪作火中牛 
(회정감작화중우)

돌아오는 길에는
불 속의 소가 되었네.


④ 塵異(진이)

濁者自濁淸者淸 
(탁자자탁청자청)

탁한 것은 스스로 탁하고
맑은 것은 스스로 맑으니


菩提煩惱等空平

(보리번뇌등공평)

보리와 번뇌가 텅 비어 
똑같이 평등하도다.

誰言卞璧無人鑑 
(수언변벽무인감)

누가 변씨네 옥을 
알아보는 이 없다 하는가?


我道驪珠到處晶 
(아도여주도처정)

나는 여룡의 여의주가
도처에서 빛난다 하리라.


萬法泯時全體現 
(만법민시전체현)

만법을 잊을 그때
전체가 드러나고


三乘分處假安名 (삼승분처가안명)

삼승으로 
나누는 곳에서 
거짓 이름 생긴 것

丈夫自有衝天氣 
(장부자유충천기)

대장부 누구나 
하늘 찌르는 기운 있으니


不向如來行處行 
(불향여래행처행)

부처님 가신 곳을
향해 가지 말아야 하네.



⑤ 佛敎(불교)

三乘次第演金言 
(삼승차례연금언)

삼승을 차례로 
설하신 부처님 말씀


三世如來亦共宣 
(삼세여래역공선)

삼세의 여래가 
모두 같이 말씀하셨지만


初說有空人盡執 
(초설유공인진집)

처음 유와 공을 설하니 
사람들이 모두 집착하더니


後非空有衆皆捐 
(후비공유중개손)

뒤에는 공과 유가 아니라 설하니
중생이 모두 버려

龍宮滿藏醫方義
(용궁만장의방의)

용궁에 저장된 장경은 
중생의 병을 치료하는 약방문일 뿐


鶴樹終談理未玄 
(학수종담리미현)

학수의 마지막 말씀에도
이치는 현묘하지 않았네.


眞淨界中纔一念 
(진정계중재일념)

깨끗한 경계 속에 
한 생각 일으키면


閻浮早已八千年 
(염부조이팔천년)

염부제에서 
벌써 8천년이 지났네.



⑥ 還鄕曲(환향곡)

勿於中路事空王 
(물어중로사공왕)

공부하다 중간에 
부처님을 따로 섬기지 말라.


策杖咸須達本鄕 
(책장함수달본향)

지팡이 재촉하여 
모두 본고향으로 어서 가라.


雲水隔時君莫住 
(운수격시군막주)

구름과 물이 막는다고 
그대 머물지 말라.


雪山深處我非忙 
(설산심처아비망)

설산 깊은 곳에서도 
나는 허덕이지 않았노라.


堪嗟去日顔如玉 
(감차거일안여옥)

슬프다. 떠나던 날 
옥 같던 그 얼굴이


却歎廻來鬢似霜 
(각환회래빈사상)

돌아올 때 
귀밑털이 서리와도 같구나.


撒手到家人不識 
(철수도가인불식)

손을 털고 집에 오니 
식구들도 몰라보고


更無一物獻尊堂 
(갱무일물헌존당)

집안의 어른에게 
드릴 것도 하나 없네.



⑦ 破還鄕曲(파환향곡)

返本還源事亦差 
(반본환원사역차)

고향에 돌아온다는 것도
또한 틀린 일이니


本來無住不名家 
(본래무주불명가)

본래 머문 것이 없었으니 
집인들 어디 있나?


萬年松徑雪深覆 
(만년송경설심복)

오래된 솔밭 길에 
눈이 깊이 덮여 있고


一帶峯巒雲更遮 
(일대봉만운갱차)

산봉우리는 
구름 띠가 막아버렸네.


賓主穆時純是妄 
(빈주목시순시망)

손님 주인 화목해도
순수함이 거짓이요

君臣合處正中邪 
(군신합처정중사)

임금 신하 모인 곳도 
바른 가운데 그릇됨이라


還鄕曲調如何唱 
(환향곡조여하창)

귀향 노래를
어떻게 부를 건가?

明月堂前枯木華 
(명월당전고목화)

밝은 달밤 
집 앞의 고목나무 꽃이 피었네.




⑧ 廻機(회기)

涅槃城裏尙猶危 
(열반성리상유위)

열반성 
그 속이 오히려 위태롭고


驀路相逢沒了期 
(맥로상봉몰료기)

길에서 만나 봐도 
마칠 기약 없구나.


權掛垢衣云是佛 
(권괘구의운시불)

방편으로 때 낀 옷 입혀놓고 
부처라 하였으나


却裝珍御復名誰 
(각장진어부명수)

비단 옷으로 단장하면 
무엇이라 부를 건가?


木人夜半穿靴去 
(목인야반천화거)

목인은 한밤중에 
신을 신고 떠나가고


石女天明戴帽歸 
(석녀천명대모귀)

석녀는 새벽녘에 
모자 쓰고 돌아오네.


萬古碧潭空界月 
(만고벽담공계월)

만고의 푸른 못에 있는
허공의 달을


再三勞漉始應知 
(재삼로록시응지)

두 번 세 번 건져내야 
비로소 알리라.



⑨ 轉位歸(전위기)

披毛戴角入廛來 
(피모대각입전래)

털옷 입고 뿔을 이고 
저자로 들어오니


優鉢羅花火裏開 
(우발라화화리개)

우발라 보배 꽃이
불속에 피었구나.


煩惱海中爲雨露 
(번뇌해중위우로)

번뇌의 바다 가운데 
비와 이슬 되어주고


無明山上作雲雷 
(무명산상작운뢰)

무명산 위에서는 
구름이 되고 우레가 된다네.


鑊湯爐炭吹敎滅 
(확탕노탄취교멸)

활활 타는 지옥 불을 
입으로 불어 끄고


劍樹刀山喝使摧 
(검수도산할사최)

검수지옥 도산지옥 
소리쳐 꺾고서


金銷玄關留不住 
(금쇄현관유부주)

부처님 궁전과 조사의 관문에도 
머물지 아니하고

行於異路且輪廻 
(행어이로차윤회)

다른 길을 가면서 
윤회를 밟고 있네.




⑩ 一色過後(일색과후)

枯木岩前差路多 
(고목암전차로다)

고목나무 바위 앞엔 
갈림길이 많나니


行人到此盡蹉跎 
(행인도차진차타)

길가는 이 
여기서 잘못 들기 일쑤더라.


鷺鷥立雪非同色 
(노사입설비동색)

백로가 눈밭에 서니 
같은 색이 아니지만


明月蘆花不似他 
(명월노화불사타)

갈대꽃 위에 달이 밝으니 
다른 빛이라 하겠는가?


了了了時無所了 
(료료료시무소료)

깨닫고, 깨닫고, 깨달아도
깨달은 것 없고


玄玄玄處亦須呵 
(현현현처역수가)

현묘하고 현묘해 현묘한 곳 
또한 현묘한 것 없으니


慇懃爲唱玄中曲 
(은근위창현중곡)

은근히 그대 위해 
현묘한 노래를 부르건만


空裏閃光撮得麽 
(공리섬광촬득마)

허공 속의 달빛을 
어떻게 잡으랴.

 

 

《십현담(十玄談)》열 가지 현묘한 말씀

《십현담(十玄談)》열 가지 현묘한 말씀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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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십현담(十玄談)》열 가지 현묘한 말씀|작성자 곡두

 

김시습의 <십현담 요해>는 복사가 가능한

만해 한룡운의 <십현담 주해>로 대신한다.

아래 포스트에는 서준섭님 번역의 선불교의 10가지 요체를 담은 원문과 번역 및 주해가 있다.

 

https://blog.naver.com/bonem25/221339531724

 

한용운, ‘십현담주해’(법보회,1926)
서준섭역
                                                                            

  
乙丑余過夏于五歲 偶閱十玄談 十玄談者 同安常察禪師所著禪話也 文雖平易 意有深奧 初學者卒難窺其幽旨耳 有原註 而未詳其人 幷有悅卿註 悅卿者 梅月金時習之字也 梅月之避世入山 衣緇而住于五歲時 所述也 兩註各有其妙 足以解原文之意 至若言外之旨 往往與愚見 有所同異者存焉 夫以梅月之有所守 而世不相容 落拓雲林 爲猿爲鶴 終不屈於當世 自潔於天下萬世 其志苦 其情悲矣 且梅月註十玄談于五歲 而余之讀悅卿註者 又五歲也 接人於數百年之後 而所感尙新 乃註十玄談
 
乙丑 六月 日 於五歲庵
 
韓 龍 雲 識

서문
을축년 내가 오세암(五歲庵)에서 여름을 지낼때
우연히 십현담(十玄談)을 읽었다. 십현담은 동안 상찰 선사(同安 常察 禪師)가 지은 선화(禪話)이다.

글이 비록 평이하나 뜻이 심오하여 처음 배우는 사람은 그 유현(幽玄)한 뜻을 엿보기 어렵다.
원주(原註)가 있지만 누가 붙였는지 알 수 없다. 열경(悅卿)의 주석도 있는데, 열경은 매월(梅月) 김시습(金時習)의 자(字)이다. 매월이 세상을 피하여 산에 들어가 중옷을 입고 오세암에 머물때 지은 것이다. 두 주석이 각각 오묘함이 있어 원문의 뜻을 해석하는데 충분하지만, 말 밖의 뜻에 이르러서는 나의 견해와 더러 같고 다른 바가 있었다.
대저, 매월에게는 지키고자 한 것이 있었으나 세상이 용납하지 않아 운림(雲林)에 낙척(落拓)한 몸이 되어, 때로는 원숭이와 같이 때로는 학과 같이 행세하였다. 끝내 당시 세상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천하만세(天下萬世)에 결백하였으니, 그 뜻은 괴로운 것이었고 그 정(情)은 슬픈 것이었다.
또 매월[김시습]이 십현담을 주석(註釋)하였던 곳이 오세암이고, 내가 열경의 주석을 읽었던 것도 오세암이다.

수백년 뒤에 선인(先人)을 만나니 감회가 오히려 새롭다. 이에 십현담을 주해(註解)한다.

을축 6월 일 오세암에서
한용운 씀
 
 
십현담 주해(十玄談註解)
 
                               동안선사(同安禪師) 지음(述)
                               용운사미(龍雲沙彌) 비주(批註)


                                            서 준 섭 역
 
 
마음(心印)

[批] 畫蛇已失 添足何爲 
[비] 뱀을 그리는는 것도 이미 틀렸는데, 다리까지 덧붙여 무엇하리.
[註] 心本無體 離相絶跡 心是假名 更用印爲 然萬法以是爲準 諸佛以是爲證 故名之曰心印 本體假名 兩不相病 心印之旨明矣
[주] 마음(心)은 본래 형체[體]가 없어 모양[相]을 떠나고 흔적을 잃었다. 마음(心)이란 말이 가짜 이름인데, 거기에 인(印)자를 덧붙였다.
그러나 만법(萬法)은 이로써 기준을 삼고 제불(諸佛)은 이로써 증거를
삼는다. 그러므로 심인(心印)이라 이름 붙여 말한다. 본래의 체(體)와 가짜 이름이 서로 병(病)이 되지 않는데서 심인(心印)이라는 말 뜻이 드러난다.

<原文> 問君心印作何顔
그대에게 묻노니 마음은 어떤 모습인가?

[批] 脂粉滿地 世無傾城
[비] 분냄새는 가득한데 경국지색(傾國之色)은 간데 없다.

[註] 三十二相 八十種好 在心印 盡屬空華 果何顔之有 五彩不足以染 規矩不足以形 且道果作何顔 良久 花月已謝 美人全如玉
[주] (부처님의) 32상(相) 80종호(種好)가 다 마음[心印]에 있고 모두 허공 꽃[空華]에 속한다. 그러니 어떤 얼굴이 있겠는가. 다섯 가지 물감으로도 물들이기에 부족하고 갖가지 자[規矩]로도 그 모습을 재기에 부족하다. 또한 도(道)는 과연 어떤 모습을 짓고 있는가?
(잠시 후에 읊는다)

「꽃과 달 이미 시들었는데 미인은 옥처럼 온전하네」.

<原文> 心印何人敢授傳 
마음을 주가 감히 주고 받겠는가?

[批] 衣鉢早非心印 
[비] 의발(衣鉢)은 본래 마음[心印]이 아니다.
[註] 心印無體 衆生不能受 諸佛不能傳 三世佛祖之傳法 仍是謾語 世法以傳爲傳 心印以不傳爲傳
[주] 마음은 형체가 없어서 중생이 받을 수 없고 제불(諸佛)이 전할 수 없다. 삼세(三世) 불조(佛祖)의 전법(傳法)도 부질없는 말이다. 세상의 법은 전함으로써 전해지는 것이고, 마음[心印]은 전하지 않음으로써 전해지는 것이다.

 
<原文> 歷劫坦然無異色
긴 세월 지나오며 한결같이 변함 없어

[批] 千眼失明
[비] 천 개의 눈도 빛을 잃는다.
[註] 超古越今 萬色俱泯 不異不立 異者何物
[주] 고금(古今)을 초월하고 만색(萬色)이 다 없어진다.
다름이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다른 것은 어떤 물건인가.
良久云 滿地芦花 一天明月
(잠시 후에 읊는다) 「땅에 가득한 갈꽃이요 하늘에 밝은 달이로다」.


<原文> 呼爲心印早虛言 
심인(心印)이라 하는 것도 본래 빈말인 것을.

[批] 呼心非印亦虛言 
[비] 마음을 심인(心印)이 아니라고 해도 또한 빈말인 것을.
[註] 無相無色 何有言說 千呼萬名 元不相稱 此諱尊嚴 千佛莫能犯 名之則錯 不名亦錯 天下廣長舌 一時俱斷
[주] 모양도 없고 색깔도 없으니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천 가지로 부르고 만 가지 이름을 붙여도 원래부터 이름으로는 어긋난다. 이것은 존엄하여 천불(千佛)도 범할 수 없다. 거기에 이름을 붙이면 틀리고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틀린 것이다.
천하에 말 잘하는 사람도 한 순간 말길이 끊어져 버린다.



<原文> 須知體自虛空性
분명히 알아라 그 형체 텅 비어 저 허공 같다.

[批] 天下之不具 莫此甚也 
[비] 천하의 병신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註] 離相而存 超色而明 拔乎性命 曾不生滅 不與有爲之有形 有壽爲伍 虛空性故 有若此者
[주] 모양[相]을 떠나 존재하고 빛[色]을 초월하여 밝다.
성명(性命)을 넘어서서 일찌기 생멸(生滅)하지 않는다.
세상의 형체있고 수명있는 것이 더불어 짝하지 않는다.
본성이 공(空)하므로 이와 같다.

 
<原文> 將喩紅爐火裡蓮 
불 속에 핀 연꽃에나 비유해 볼까.

[批] 百花元從火裡生 
[비] 모든 꽃(것)이 원래 불 속에서 핀다.
[註] 性若虛空 無以爲名 喩之火中蓮 取其名有實無也 道之無名 喩之無物 火中蓮 亦何足世喩哉
[주] 본성은 허공과 같아서 이름 붙일 방법이 없다. 불속의 연꽃에 비유한 것은 이름은 취했으나 실체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도(道)는 이름이 없고 그것을 비유할 물건이 없으니 ‘불 속의 연꽃’이라는 세속의 비유 또한 어찌 만족스러운 것이겠는가.

 
<原文> 勿謂無心云是道
무심(無心)을 도(道)라 이르지 말라.

[批] 網盡桃花武陵春 漁郞依舊到仙源 
[비] 무릉(武陵)의 봄 복사꽃을 모두 건져 올렸지만 어부들은 여전히 선원(仙源)에 찾아온다.
[註] 非徒有心爲病 無心均是病也 何也 有心者滯於有心 無心者碍於無心 有無雙忘 近於道矣
[주] 유심(有心)만이 병이 아니라 무심(無心) 또한 병이다. 왜 그런가.
유심은 ‘유심’에 걸리고 무심은 ‘무심’에 막힌다.
유(有) 무(無) 모두 잊어버려야만 도(道)에 가깝다.


<原文> 無心猶隔一重關
무심(無心)마저 한 겹 막혀 있는 것이다.

[批] 初擬萬事到夜定 其奈閒愁入夢多 
[비] 처음에는 만사가 밤이 되면 안정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근심이 꿈속에 들어와 설치니 어찌할 것인가?
杖云
[註] 初學者 妄念紛起 常以無心爲期 及到無心 往往落空 絶盧爲宗 墮於小乘 至是而無心之病 更甚於有心也 此法不可以有心得 亦不可以無心求 如何始得 放下拄 山雨未晴 春事在邇
[주] 처음 배우는 사람은 망령된 생각이 어지러이 일어나 항상 무심의 경지를 기약하고, 무심에 이르러서는 종종 허공(虛空)에 떨어져, 생각을 끊는 것을 종지(宗旨)로 삼아 소승(小乘)에 떨어지고 만다. 이렇게 되면 무심의 병이 오히려 유심(有心)의 병보다 심한 것이다. 이 법은 유심으로 얻을 수 없고 무심으로도 구할 수 없다. 어떻게해야 얻을 수 있는가?
(주장자를 내려 놓고 읊는다)

「산에 오는 비는 개지 않는데 봄철 농사 일은 코앞에 닥쳤도다」.


조사의 뜻(祖意)

[批] 博地凡夫 本自具足 一切賢聖 道破不得 
[비] 세상의 범부(凡夫)도 본래부터 다 갖추어져 있다. 모든 현자(賢者) 성인(聖人)이 일러볼 길 끊겼다.
[註] 祖師之意 何嘗有意 衆生有意 祖亦有意 祖意者 衆生之意也
[주] 조사(祖師)의 의중에 처음부터 무슨 뜻이 있었겠는가? 중생에게 뜻이 있다면 조사에게도 뜻이 있는 것이다. 조사의 뜻이란 중생의 뜻이다.

 
<原文> 祖意如空不是空
조사(祖師)의 뜻은 빈 것 같지만 빈 것이 아니다.

[批] 一葉天下秋 
[비] 나뭇잎 하나로 천하가 가을됨을 안다.
[註] 祖意者 祖師之意旨也 若空而妙有 若有而眞空 有時天上天下 尋之無跡 有時百草頭上 歷歷可見 破有云空 破空云有 空有俱倒 祖意始彰
[주] 조사의 뜻이란 조사가 지니고 있는 뜻이다.
공(空)한 것 같지만 묘하게 있고[妙有], 있는 것 같지만 참으로 공한 것[眞空]이다. 때때로 하늘 위 아래에서 찾아보아도 흔적이 없지만,
백 가지 풀머리에서도 늘 역력히 볼 수 있다.
유(有)를 깨트려 공(空)이라 하고 공을 깨트려 유라고 하지만,
공과 유가 다 함께 거꾸러져야 조사의 뜻이 비로소 드러난다.

 
<原文> 靈機爭墮有無功 
신령스런 기틀 어찌 ‘있다’, ‘없다’에 떨어지랴.

[批] 無報無應 
[비] 보답할 것도 베풀 것도 없다.
[註] 有功者 功有所不成 無功者 未始有淨業 故有功者 其功不大 無功者 其業不進 此兩者 共不足以爲大量漢 夫靈機者 無所不成 而實無一得 何功之有 何功之無 畢竟如何

良久 野船渡盡無數人 滿江風雨自縱橫

[주] 공(功)이 있다는 것은 이루지 못한 공이 있다는 것이고,
공이 없다는 것은 아직 업(業)을 씻기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이 있는 자는 그 공이 크지 못하고, 공이 없는 자는 그 업이
나아가지 못한다. 이 둘은 모두 큰 도량을 지닌 사람되기에 부족하다.
무릇 신령스런 기틀은 하나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지만, 실상은 하나도 얻은 것이 없다. 거기에 무슨 공이 있다고 할 것이며 또 공이 없다고 할 것인가. 그렇다면 끝내 무엇이란 말이가?
(잠시 후에 읊는다)

 「나룻배 타고 강 건너는 수 많은 사람들이여,
강에 가득한 비바람 스스로 어지럽구나」.
 
 
<原文> 三賢尙未明斯旨
삼현(三賢)도 아직 이 뜻에 밝지 못하거늘,

[批] 盃水之覆 芥爲之舟 
[비] 한 잔 물 엎질러서 겨자씨 배 띠우는 격이다.
[註] 十住十行十廻向 學位之初 豈能承當大旨 未明此旨 無足怪也
[주] 10주(住) 10행(行) 10회향(廻向)은 학위(學位)의 시작인데,
어찌 깨달음의 큰 뜻을 알 수 있겠는가.
아직 이 뜻에 어두운 것도 이상하지 않다.

 
<原文> 十聖那能達此宗 
십성(十聖)이 어찌 이런 종지(宗旨)를 깨닫겠는가?

[批] 百尺竿頭
[비] 백척간두(百尺竿頭)로다.

[註] 位至十地 所證非淺 然至於妙覺 瞠乎後矣 安能達此祖意 如何到得 良久 回首停步處 已出第三關
[주] 학위가 10지(地)에 이르면 마음 공부가 얕지 않다. 그러나 오묘한 깨달음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멀다. 어찌 이 조사(祖師)의 뜻에 이를 수 있겠는가. 어떻게 다다를 수 있겠는가?
(잠시 후에 읊는다)

「머리를 돌려 발길을 멈춘 곳, 이미 세 번째 관문(關門)을 빠져 나왔도다」.

 
<原文> 透網金鱗猶滯水 
그물 뚫은 금고기 오히려 물에 걸리고,

[批] 天下之金鱗 不死於網 而死於水者多矣
[비] 천하의 금고기도 그물에서는 살아났지만, 물에 떨어져 죽는 자 많다.
杖云
[註] 金麟之魚 脫於漁網 可謂出死入生 猶未免滯水之憂 至於非水 則其危立至 水與非水 縱橫自在 是謂神龍 三賢十聖 能脫世間煩惱網 猶未忘法見之浸水 如何不滯水 堅起拄自從泥牛入海後 木魚盡在白雲中
[주] 금빛 비늘의 물고기(아름다운 물고기 : 역자주)가 그물에서 벗어나니 사경(死境)에 들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말할 수 있으나, 아직 물에 걸리는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물 아닌 것에 이르러서는 곧 위험에 빠지게 된다. 물과 물 아닌데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야 ‘신비스런 용(神龍)’이라 이른다. 삼현(三賢) 십성(十聖)도 세간(世間)의 번뇌의 그물을 벗어날 수는 있지만, 세상만사[法見]의 침수(浸水)를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한다. 어떻게 해야 물에 걸리지 않겠는가?
(주장자를 세우며 읊는다)

「진흙 소 바다로 들어간 후에, 나무 물고기[木魚] 흰 구름 속에 있네」


<原文> 廻頭石馬出紗籠 
머리 돌린 석마(石馬)는 사롱(紗籠)을 빠져 나간다.

[批] 須彌納芥 恢有餘地 
[비] 수미산(須彌山)을 겨자 씨에 넣어도 남은땅이 있다.
[註] 天下之駿馬 何足以出細入微 石馬乃能出紗籠 三賢十聖 不能透關 靜思回頭 頓忘功用 無關不透 無地不入
[주] 하의 준마(駿馬)가 어찌 미세한 곳으로 나고 들 수 있겠는가?
석마(石馬)라야 사롱(紗籠)을 빠져 나올 수 있다. 삼현(三賢) 십성(十聖)도 관문을 뚫지 못한다. 근본을 돌이켜 고요히 생각하고 공부[功]와 쓰임을 문득 잊어야 뚫지 못할 관문이 없어지고 들어가지 못할 곳(지위)이 없어진다.


<原文> 慇懃爲說西來意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을 귀뜀하노니,

[批] 口業未淨 
[비] 구업(口業)을 아직 깨끗이 씻지 않았군.
[註] 達磨西來 本無一意可說 饒舌何爲 然婆心未已 橫說堅說
[주] 달마(達磨)가 서쪽에서 온 것은 본래 말할만한 한 뜻도 없는데,
혀를 놀려 무엇하겠는가? 노파심 때문에 횡성수설해보는 것이다.

 
<原文> 莫問西來及與東 
서쪽이냐 동쪽이냐 묻지 말라.

[批] 尋春莫須向東去 西園寒梅已破雪 
[비] 봄 찾아 굳이 동쪽으로 갈 필요없네. 서쪽 정원의 한매(寒梅)가 이미 눈[雪]을 뚫고 있네.

[註] 無邊刹境 不隔於毫端 入此門來 何有方所 旣無方所 云東云西 仍是妄語 畢竟如何 良久未離兜率 已降王宮 

[주] 광대무변의 찰나의 경지는 털끝만큼의 막힘도 없다. 이 문(門)에 들면 어찌 방위와 장소(場所)가 있겠는가. 이미 방위와 장소가 없는데 동쪽이요 서쪽이요 하는 말은 헛된 것이다. 마침내 어떻다는 말인가?
(잠시 후에 읊는다) 「도솔천(兜率天)을 떠나지 않았는데 이미 왕궁으로
내려 왔도다」.
현묘한 기틀(玄機)
 
[批] 不是秋花不是紺 
[비] 가을 꽃 빛도 아니고 하늘 빛도 아니다.
[註] 超乎方圓 亦非長短 無法不生 故曰玄機 玄機者 妙之至也
[주] 모나고 둥근 것을 초월하고 길고 짧은 것도 아니다. 생성하지 못하는 사물[法]이 없으니 ‘현묘한 기틀’[玄機]이라고 한다. 현묘한 기틀은 오묘함의 극치이다.
 
<原文> 超超空劫勿能收 
공겁(空劫)은 뛰어나고 뛰어나서 거둘 수가 없으니,

[批] 春風桃李 秋水芙蓉 
[비] 봄 바람에 도리(桃李)요, 가을 물에 부용(芙蓉)이다.

[註] 十世古今 不離於當念 一念不生 萬劫自消 白髮靑春 妄想故有 劫外更有何世 良久 新絃未上 古桐有聲

[주] 아득한 세월도 지금의 한 생각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고,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만겁(萬劫)도 저절로 사라진다.
백발과 청춘도 망상 때문에 있는 것이니
공겁(空劫) 밖에 무슨 세계가 따로 있겠는가?
(잠시 후에 읊는다) 「초승달 뜨기 전 늙은 오동나무에 가을 바람 소리로다」.


 
<原文> 豈與塵機作繫留 
어찌하여 진기(塵機)따위에 묶여 머뭇거리겠는가?

[批] 依天長劍 
[비] 하늘에 기댄 장검(長劍)이다.

[註] 玄機之在日用中 何嘗與世塵爲侶 如蓮生水中 曾不着水 在色非有 在空非無 收之不得 却之不退 用在其中 妙而不染 果作何狀 良久兩岸細過芳草雨 江上未沾鈞魚人

[주] 현묘한 기틀은 일상생활[日用]속에 있으나 어찌 일찌기 세상 띠끌과 반려가 된 적이 있는가.
(이 도리는) 연꽃이 물 속에서 생겼으나 일찌기 물에 얽매인 적이 없는 것과 같다. 색계(色界)에 있지만 유(有)가 아니고, 공(空)에 머무나 무(無)가 아니다. 거두되 얻지 않고 놓되 물러서지 않으니 나날의 씀[日用]은 그 속에 있다. 오묘하여 물들지 않으니 과연 무슨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인가?
(잠시 후에 읊는다) 「언덕 방초(芳草)에 이슬비 내리는데 강 위에서 고기잡는 사람은 젖지 않도다」.

 
 
<原文> 妙體本來無處所 
그 묘체(妙體) 본래 머물 곳이 없으니,

[批] 君臣同座 始得太平 
[비] 군신(君臣)이 자리를 같이 하니 비로소 태평(太平)스럽다.
[註] 妙體 不在內 不在外 亦不在中 內外中間 歷歷現露 無處不在 所在無處
[주] 묘체는 안에 있는 것도 밖에 있는 것도 가운데에 있는 것도 아니나,
안팎 중간에서 역력히 드러난다. 없는 곳이 없고 있는 곳[所在]도 없다.

 
<原文> 道芽何更有蹤由 
도(道)의 싹이 어찌 흔적이나 있겠는가?

[批] 春雨未能潤 秋霜何曾枯 
[비] 봄비가 적시지 못하는데, 가을 서리가 어찌 시들게 하겠는가.
[註] 道無色相 千眼不能視 道無形狀 五軆不能觸
[주] 도(道)는 색(色)과 상(相)이 없으니 천 개의 눈(眼)으로도 볼 수 없다. 도는 형상(形狀)이 없으니 온 몸으로도 만질 수 없다.

 
 <原文> 靈然一句超羣像
령(神靈)스럽게 일구(一句)는 만상(萬像)을 훌쩍 뛰어 넘어

[批] 一句不在一句中 
[비] 일구(一句)는 일구 중에 있지 않다.
[註] 向上一句 不在文字 旣離文字 有何像形 超乎群像 靈而不眛
[주] 일구(一句)위에는 문자가 없다. 이미 문자를 떠났는데 무슨 형상(形像)이 있겠는가? 뭇 형상을 훌쩍 뛰어 넘어 신령스럽지만 어둡지 않다.

 
<原文> 逈出三乘下假修 
삼승(三乘)을 멀리 벗어났으니 수행(修行)
따위는 필요 없다.


[批] 夜光之璧 不因彫琢而得 
[비] 야광주(夜光珠)는 조탁(彫琢)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註] 地位漸次 假小乘而權有 至於玄機 劫前圓成 末後不盡 何假修得 三阿僧祗 五十五位 一時俱斷
[주] 지위(地位)는 점차 소승(小乘)을 빌어 권위를 얻고 현묘한 기틀에
이른다. 영겁(永劫) 전에 완만히 이루어져서 뒤에 다하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수행 따위가 필요하겠는가?
세 아승지(阿僧祗)겁과 55위(位)가 일시에 끊어져 버린다.

<原文> 撤手那邊千聖外 
어딘가 뭇 성인(聖人) 밖으로 손을 털어버렸으니

[批] 佛也打 祖也打 滿地無一物 
[비] 부처도 처 버리고 조사(祖師)도 처 버려서,
천지 가득 한 물건(一物)도 없음이여.
[註] 萬魔不足以爲碍 千聖何足以爲益 超然獨立 所依無物 此大丈夫之事也
[주] 일만 마귀도 장애가 되지 않는데 천성(千聖)이 어지 도움이 되겠는가? 초연히 우뚝 서서 의지할 물건이 필요 없으니, 이것이 대장부의 사업이다.

<原文> 廻程堪作火中牛 
돌아오는 길 ‘불속의 소’나 되어 볼까.

[批] 去平安 來平安一下云 
[비] 가는 것도 평안(平安)이요, 오는 것도 평안이다.
[註] 廻程 言了事以後也 火中牛 坐斷性命 不滯生死也 撤手千聖外 始作火中牛 如何是火中牛 卓拄丈 不吃芳草不在屋 始得耕盡天下田 
[주] 돌아오는 길은 말이 끝난 사업 이후이다. ‘불 속의 소’는 앉아서 성명(性命)을 끊어버리고 생사(生死)에 걸리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뭇 성인들도 떨쳐 버려야 비로소 ‘불 속의 소’가 될 수 있다.
‘불 속의 소’란 무엇인가?
(주장자로 한 번 치고 읊는다) 「방초(芳草)도 먹지 않고 집도 없어야 비로소 천하를 다 얻어 경작할 수 있도다」.


티끌은 다른가(塵異)
 
[批] 一室千燈 
[비] 한 방(房)에 일천 등(一千燈)이라.
[註] 離塵而不隔 處塵而不混 故曰塵異
[주] 속세를 떠났으나 떨어져 있지 않고, 속세에서 살지만 혼란이 없다.
그래서 진이(塵異)라고 한다.

 
<原文> 濁者自濁淸者淸 
더러운 것도 스스로 더러운 것이고, 깨끗한 것도 스스로 깨끗한 것이니

[批] 春光妙在各自得 堪笑種蘭剪荊棘 
[비] 봄빛의 묘함은 스스로 그런 것인데, 우습구나,
난(蘭)은 심고 가시는 자른다니.
[註] 濁者淸者 各有妙理 在濁不爲劣 在淸不爲高 奚取奚捨 且濁不離淸 淸不離濁 萬水一源 所以異者 波流之境也
[주] 더러움(탁함, 濁)과 깨끗함(맑음, 淸)은 각각 묘한 도리가 있다.
더러움에 있다고 열등하지 않고 깨끗함에 있다고 고상한 것은 아니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겠는가. 또한 더러움은 깨끗함에서 떠나 있지
않고 깨끗함은 더러움에서 떠나 있지 않다. 만가지 물[水]이 한 가지 근원에서 나왔는데 달라지는 까닭은 파류(波流)의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原文> 菩提煩惱等空平 
보리(菩提)다, 번뇌다, 그게 그거다.

[批] 春草王孫今何在 黃沙白骨共無邊 
[비] 봄풀[春草] 왕손(王孫)은 지금 어디 있느냐?
황사(黃沙) 백골(白骨) 모두 가이 없구나.
[註] 菩提性空 煩惱本寂 一切平等 無有高下 妄分別 故有悟有迷
[주] 보리(菩提)는 자성(自性)이 공(空)하고 번뇌란 본디 없는 것[寂滅]이다. 일체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는데 헛되이 분별한다.
그러므로 깨달음과 미혹함이 있다.

<原文> 誰言卞璧無人鑑
 
누가 변화(卞和)의 구슬을 알아볼 사람 없다고 말했나?

[批] 卞璧千古不爲卞石
[비] 변화(卞和)의 구슬은 천고(千古)를 지나도
변화의 돌이 되지는 않는다.
[註] 楚人卞和 獻荊山之玉於楚厲王 王曰石也 遂刖一足 又獻於武正 王怒又刖一足 至於文王 和抱其墣 哭於荊山之下 王召問曰刖足者何怨乎 和曰不怨刖足 而怨眞玉以爲凡石 忠事以爲謾事 是以哭之 王使玉工剖之 乃眞玉也 是爲卞璧 卞和之足 再刖不三刖 則鑑玉終有人也 本自具足之法寶 受用亦有人也
[주] 초(超)나라 사람 변화(卞和)가 형산(荊山)의 옥(玉)을 초(楚) 나라
여왕(厲王)에게 바쳤더니, 왕은 「돌이야」라고 하면서, 한쪽 발꿈치를 잘라 버렸다. 그가 무왕(武王)에게 다시 그것을 바쳤더니, 왕이 노하여 또 한쪽 발꿈치를 잘랐다. 문왕(文王)때에 이르러서 변화는 옥돌을 안고 형산 아래서 울고 있었는데, 왕이 불러 「발꿈치가 잘린 자가 무엇을 원망 하는가」라고 물었다. 변화는 「발꿈치 잘린 것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옥을
보통 돌이라 하는 것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일을 속이는 일이라 하니 그래서 웁니다」라고 말하였다. 왕이 옥공(玉工)을 시켜 그것을 쪼개어 보니 진짜 옥이었다. 이것을 일러 ‘변화의 옥(구슬)’이라 한다.
변화의 발꿈치가 두번 잘리고 세번째 잘리지 않은 것은 옥을 알아보는 사람이 마침내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 스스로 다 갖추어져 있는 불법(佛法)도 그것을 알아보고 쓰는 사람도 있다.
 
<原文> 我道驪珠到處晶 
내 가는 곳곳마다 구슬 빛 뿐이로다.

[批] 空谷之蘭 不以無人不馨 
[비] 빈 골짜기에 난(蘭)은 그 향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
[註] 驪珠驪龍之頷珠也 驪龍之名珠 無處不晶 性珠圓名 何處不顯 何時不熙
[주] 여주(驪珠)는 (바다속에 있는) 여룡(驪龍)의 턱에 있는 구슬(여의주)이다. 여룡의 명주(名珠)는 빛나지 않는 곳이 없다. 성품의 구슬[性珠]은 둥글고 뛰어나니, 어느 곳인들 나타나지 않는 곳이 있겠으며 어느 때인들 빛나지 않는 때가 있겠는가?
 
<原文> 萬法泯時全體現 
만법(萬法)이 스러질 때 본체(本體)가 온전히 나타나니

[批] 酒殘歌罷 淸興方妙 
[비] 술이 다하고 노래가 끝나야 맑은 흥취가 오묘해진다.
杖云
[註] 心生法生 一切萬法 妄想分別 妄念一息 萬法俱泯 妄息法泯 一心之妙體始現 如何是法泯體現 放下拄 落盡紅樹黃葉後 空山無處不見秋

[주] 마음이 생기면 법(法: 다르마, 사물, 만물)이 생기니 일체 만법(萬法)은 망령된 생각이 분별한다. 망령된 생각이 한번 끊어지면, 만법이 다 같이 없어진다. 망령된 생각이 끊어지고 만법이 없어지면, 일심(一心)의 오묘한 본체가 비로소 나타난다.
법이 사라지고 본체가 드러나는 것은 어떤 경지인가?
(주장자를 내려 놓고 읊는다) 「울긋 불긋 단풍 잎들이 다 떨어지니,
빈 산 곳곳 가을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구나!」

 
<原文> 三乘分別强安名 
삼승(三乘)을 분별하여 억지로 이름 붙인 것.

[批] 一 二 三 
[비] 하나, 둘, 셋.
[註] 妙體無名 大法不二 小乘不知 無名處 强立名字
[주] 오묘한 본체는 이름이 없고 큰 법[大法]은 둘이 아니다. 소승(小乘)은 이름 없는 곳을 알지 못하여 억지로 이름을 붙인다.
 
<原文> 丈夫自有衝天志 
장부(丈夫)는 스스로 하늘 뚫을 뜻을 품기에
 
[批] 乾坤一我 
[비] 하늘과 땅 나 혼자다.
[註] 無敵於前 無君於後 出正入奇 無妙不極 進攻退守 算無遺策 是謂將材 丈夫處世 固當若是 學道者 宜乎任運騰騰 不爲物役
[주] 앞에 적(敵)이 없고 뒤에 임금이 없다. 정도(正道)에서 나와 기기(奇奇) 묘묘(妙妙)함에 드니 묘함도 없고 끝도 없다. 나아가 무찌르고 물러나 지키니 헤아림도 없고 책략도 없다. 이를 참다운 장수의 재목됨이라 한다. 장부(丈夫)의 처세(處世)가 실로 이래야 마땅하다. 도(道)를 배우는 사람은 도를 운영할 때 씩씩하게 해야 외부의 사물에 사역(使役)되는 일이 없다.

<原文> 莫向如來行處行 
부처님 간 길 따위 뒤밟지 말라.

[批] 芳草有人跡 更踏落花路 
[비] 풀숲에 누가 먼저 간 흔적 있어, 다시 꽃 떨어진 길을 밟는다.
杖云
[註] 如來行處 已是陳跡 更尋別處去 方是妙境 如何是如來不行處 堅起拄 烟收鷗夢外 月隱雁影初 

[주] 부처님[如來]이 간 길은 이미 낡은 자취이니 다시 다른 곳을 찾아야 묘한 경지이다. 부처님이 가지 않은 길이 어디인가?
(주장자를 세우며 읊는다) 「연기(烟氣)는 따오기 꿈 밖에 거두었고,
달은 기러기 그림자 속에 숨는도다」.



가르침(演敎)
 
[批] 無數黃葉葉 盡作止啼錢 
[비] 수 많은 누런 잎, 병든 잎, 우는 아기 달래는 종잇돈.
[註] 如來爲衆生 故無言說處 更生言說
[주] 부처님[如來]은 중생을 위해 짐짓 아무것도 말할 곳이 없는 곳에서
다시 말할 것을 만들었다.

<原文> 三乘次第演金言 
삼승(三乘) 말씀을 차례로 펼쳤고

[批] 不辨牛馬秋水至 莫道滄海有幾多 
[비] 소인지 말인지 모르면서 추수(秋水)에 이르러 바다가 넓다는지
많다든지 말하지 말라.
[註] 如來 爲聲聞 說四諦 爲緣覺 說十二因緣 爲菩蕯 說六婆羅密 故云次第 隨機說法 從緣度生 老婆心切
[주] 부처님[如來]은 ‘성문(聲聞)’을 위해 사제(四諦)를 설하고 ‘연각(緣覺)’을 위해 12인연(十二因緣)을 설하고, ‘보살(菩薩)’을 위해 6바라밀(六婆羅密)을 설하였다(聲聞, 緣覺, 菩薩에 대한 세 가지 敎法을 ‘三乘’이라 한다 : 역자주). 그래서 차례로 법문하였다고 한다. 근기(根機)에 따라 법을 설하고 인연을 좇아 중생을 제도하였으니, 노파심이 간절하였다.

 
<原文> 三世如來亦共宜 
삼세(三世) 부처들도 또한 그러했노라.

[批] 前車覆轍 後車不戒
[비]앞의 수레 뒤집어졌는데도 뒤의 수레 조심하지 않는다.
[註] 佛無異佛 衆生亦無有異 以無異之佛 敎不異之衆生 所說之法 不得不同
[주] 부처는 다른 부처와 다르지 않고 중생 역시 다르지 않다.
다르지 않은 부처로 다르지 않은 중생을 가르치니,
설하는 법문도 같지 않을 수 없다.


<原文> 初說有空人盡執
처음에 ‘유(有)’와 ‘공(空)’을 말씀하자 사람들이 거기에 집착하여

[批] 種荳得荳 
[비] 콩 심은데 콩 난다.
[註] 說因果之有法 則執爲實有 說破相之空法 則更執頑空 隨言生執 不知色則是空 空卽是色
[주] 인과(因果)의 유법(有法)을 설하니 실유(實有)에 집착하고, 파상(破相)의 공법(空法)을 설하니 공(空)에 완강하게 집착하였다. 말에 따라 집착이 생기니 ‘색(色)이 공(空)이요 공이 곧 색’인 도리를 알지 못하였다.

 
<原文> 後非空有衆皆捐 
뒤에 ‘공(空)’도 ‘유(有)’도 아니라 하니
그제서야 모두 집착을 버렸도다.


[批] 君言亦復佳 
[비] 그대의 말이 아름답다.
[註] 衆生執有執空 故欲破其執 更說非空非有 則皆捨空有之前執
[주] 중생이 유(有)와 공(空)에 집착하므로 그 착심(着心)을 깨뜨리고자 다시 비공(非空) 비유(非有)를 설하였다. 그러자 모두들 공과 유에 대한 종전의 집착을 버렸다.
 
<原文> 龍宮滿藏醫方義 
용궁(龍宮)에 가득찬 저 보물은 약방문이요

[批] 病如牛毛 藥似泰山 
[비] 병(病)은 쇠털 같고 약(藥)은 태산 같다.
[註] 龍宮者 華嚴經䟽云 文殊與阿難海 結集法藏於鐵圍山間 入于龍宮 佛滅度後六百餘年 龍樹菩薩往龍宮 見華嚴大經 凡有三本 上中二本 文義浩博 非力所持 遂誦出下本 流布 云醫方義者 佛法之度人 如醫藥之療病 故云醫方義 滿藏者法有多種 故云滿藏
[주] ‘용궁’이란 화엄경소(華嚴經䟽)에 이르기를, 「문수보살과 아난(阿難) 존자가, 철위산에서 부처님 생전에 설하신 법장(法藏)을 결집(結集)할 때, 용궁에 들어갔다」고 한 그것이다. 부처님 돌아가신 6백년 후 용수(龍樹) 보살이 용궁에 가서 화엄대경을 보았다고 한다. 세 가지 본(本, 책)이 있었는데, 상(上) 중(中) 이본(二本)은 글의 뜻이 너무도 크고 넓어 갖고 오기에는 힘이 부쳐서, 마침내 하본(下本)을 암송하여 나와서 널리 퍼트렸다고 한다. ‘의사의 약방문’이란, 불법(佛法)이 세상 사람을 구제하되 마치 의사가 약으로써 병을 고치듯하기에 약방문이라 한 것이다. 가득찬 보물[滿藏]은 불법에도 수 많은 종류가 있어 가득히 간직해 놓은 것과 같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原文> 鶴樹終談理未玄 
학수(鶴樹)의 마지막 말마저 방편인 것을.

[批] 四十九年道不破 萬事於今水東流 
[비] 49년 동안 지껄여도 도(道)는 다 말할 수 없으니, 지금까지의 만사(萬事)여, 동쪽으로 흐르는 물이로다.
一下云
[註] 鶴樹者 世尊入滅時 詣娑羅雙樹間 樹變白色如鶴 故云鶴樹 世尊入滅槃 告大衆言 自從鹿野苑 終至跋提河 於是中間 未曾說一字 故云理未玄 且道如何理玄 打拄杖 老胡不解佛法意 漫說言語非理玄

[주] 학수(鶴樹)는 세존께서 돌아가실 때 두 사라수(娑羅樹) 나무 사이에서 돌아가셨는데, 나무가 마치 학처럼 흰색으로 변하는 현상이 있었기 때문에 학수라 말한 것이다. 세존께서 열반에 드실 때 대중에게 말씀하기를
「녹야원(鹿野苑)에서 발제하(跋提河)에 이르기까지, 이 사이 일찌기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치는 현묘하지 않다’
(理未玄, 앞에서는 ‘방편이다’라고 옮겼음: 역자주)고 한다.
그런데 도(道)는 왜 이치가 현묘한가?
(주장자로 한번 치고 읊는다) 「오랑캐 늙은이가 불법의 참뜻을 알지 못하면서 ‘이치는 현묘하지 않다’고 제멋대로 지껄이네」.

 

<原文> 眞淨界中纔一念 
진정계(眞淨界) 가운데 한 생각 비침이여,

[批] 纔有一念 原非眞淨
[비] 한 생각 비쳤다면 본래 진정계(眞淨界) 아니네.
[註] 眞淨界 天界也 此中時間 與人世不同
[주] 진정계는 천계(天界)이다. 이 가운데 시간은 인간세(人間世)와 같지 않다.

<原文> 閻浮早已八千年 
염부(閻浮)에 이미 8천년이 지났구나!

[批] 一刻抵千金 
[비] 일각(一刻)이 천금(千金)이다.

[註] 閻浮 漢譯勝金 卽此世也 天界之一念間 卽閻浮之八千年 如何是一念八千年 良久 一翳在眼 空華亂墜 

[주] 염부(閻浮)는 한역(漢譯)으로 승금(勝金)이라 하는데 곧 이 세상을 말한다. 천계(天界)의 한 생각 사이는 곧 염부의 8천년이다. 이 ‘한 생각이 8천년’이란 무슨 말인가?
(잠시 후에 읊는다) 「눈을 한 번 비비니 허공 꽃이 어지러이 떨어지네」.



근본에 이르다(達本)
 
[批] 踏破雲山無限路 還家依舊離家在 
[비] 운산(雲山) 끝없는 길 헤치고 여기 왔으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여전히 ‘집’을 떠나 있다.
[註] 百千方便 盡是機宜 一念回光 早已達本
[주] 백, 천가지 방편이 모두 이 기틀에 알맞고, 한 생각 빛을 돌이키니 벌써 근본에 도달하였다. 
 
 <原文> 勿於中路事空王
가는 길에 허공 왕(王)을 섬기지 말고

[批] 鄕愁無端惱殺人 
[비] 향수(鄕愁)가 부질없이 사람을 휘잡는다.
[註] 說玄談空 已非本意 隨言生解 又是錯了 空王者 解空之王 卽佛也 不知法之在己 中途彷徨 漫事空王 則虛費日月 後悔何及
[주] ‘십현담(十玄談)’을 설명하는 것은 공(空)하여 이미 그 본래의 뜻이
아니다. 말을 따라 해석하려는 것도 잘못이다. 허공 왕[空王]이란 공(空)을 해석하는 왕 즉 부처이다. 불법이 자기 몸에 있는 줄 모르고 중도에서 헤매고 부질없이 허공 왕만 섬기면 세월만 허비한다. 후회해도 소용없다.

 
<原文> 策杖還須達本鄕 
지팡이나 재촉하며 고향에 어서 가라.

[批] 方有事于旋踵
[비] 바야흐로 중요한 일은 발꿈치 돌리는 데 있다.
[註] 拘於言語 碍於聲色 紛紛擾擾 盡是中路彷徨 有何所得 但萬念不動 寂然絶塵 本鄕直在眼前
[주] 언어에 묶이고 소리와 색에 구속되어 갈팡질팡하면, 이것이 중도에서 방황하는 것이니, 얻는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만가지 상념이 움직이지 않고 고요히 세상 티끌을 끊어버리기만 하면, 본 고향은 바로 눈 앞에 있다.

<原文> 雲水隔時君莫住
운(雲), 수(水) 막힌 곳에 머뭇머뭇 하지 말라.

[批] 雲水仍是天涯 
[비] 운수(雲水)는 천애(天涯)니라.
[註] 雲水者 比之方便化城 到此而作奇特想 妄認化城 而爲本鄕 故住於雲水之方便者多矣
[주] 운수(雲水)는 비유컨대 방편이 빙 둘러처진 성(城)이 되는 것으로, 여기에 들어 앉으면 기행(奇行)과 특별한 상념을 짓게 되어 망녕된 인식의 성(城)에 갇혀 그것을 본 고향으로 삼게 된다. 그러므로 운수(雲水)의 방편에 머뭇거리는 자가 많아진다.
 
<原文> 雪山深處我非忙 
설산(雪山) 깊은 곳 바쁜 것 하나 없다.

[批] 勞而無功 
[비] 수고롭기는 하지만 공(功)은 없다네.
[註] 雪山者 皎皎一色 絶塵無雜之謂也 情除量盡 超乎云謂 拔於靑黃 到此有何色相之可比 萬事已了 無一紛忙
[주] 설산(雪山)은 고요한 한빛으로 세상 티끌이 끊어지고 잡념이 없는 경지를 말한다. 정념(情念)이 사라지고 헤아림이 없어져서 언어를 초월하고 모든 분별[靑黃]을 넘어선다. 여기에 이르면 색(色)과 모양[相]의 세계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모든 사업이 이미 끝났으니 바쁠 것 하나 없다.


 
<原文> 堪嗟去日顔如玉  
슬프다, 지난 날은 옥(玉) 같은 얼굴이더니

[批] 回憶自生憐
[비] 지난 날을 돌아보니 연민이 일어난다.
[註] 不知萬法生於自心 妄隨情量 空費許多歲月 紅顔已失 能無慨乎
[주] 만법(萬法)이 자신의 마음에서 나오는 줄 모르고, 망령되게 정념과 헤아림을 따르고 수많은 세월을 허비하였으니 이미 홍안(紅顔)을 잃어버렸다.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原文> 却嘆廻時鬢似霜 
오는 길 머리카락에는 서리가 내렸구나!

[批] 佛法惟有白髮在 
[비] 불법(佛法)은 오직 백발(白髮)에 있다.
三下云
[註] 可憐靑春 失於情塵之中途 還本之時 已是白髮如霜 如何免得白髮 打拄杖 須知春消息 方到落花妙

[주] 불쌍한 청춘이여. 정념과 티끌의 도중 길에서 다 잃어버리고 본 고향에 돌아올 때에는 이미 흰 머리카락이 서리같구나.
흰 머리카락을 어찌하면 면할까?
(주장자를 세 번 치고 읊는다) 「봄 소식을 알지어다 그래야 낙화(落花)의 묘경(妙境)을 볼 수 있도다」

 
<原文> 撒手到家人不識 
손 털고 집에 오니 아는 사람 하나 없고

[批] 識則非妙 
[비] 알면 묘(妙)하지 않다.
[註] 情謂萬法 一切放下 無拘無碍 嵬然獨存 眉毛已非前日之陳跡 何人敢識得
[주] 정념은 만법(萬法)이니 일체 놓아버리고 구속과 막힘이 없이 우뚝한 산처럼 오직 홀로 독립해 있다[唯我獨存]. 눈썹에 이미 옛날 낡은 흔적이 남아있지 않는데 어찌 다른 사람이 알아 볼 수 있겠는가.
 
<原文> 更無一物獻尊堂 
존당(尊堂)에는 한 물건도 바칠 것 없다.

[批] 猶有尊堂在 
[비] 그래도 존당은 존재하네.

[註] 佛法以無得爲得 旣無所得 無物能成孝養宜矣 如何能成孝養 良久 撤之無手還無家 白骨滿地草靑靑 

[주] 불법(佛法)은 얻지 않음을 얻음으로 한다. 얻은 것이라고는 없으므로, 효양(孝養)할 마땅한 물건이 없다. 어찌 효양할 것이 있겠는가?
(잠시 후에 읊는다) 「없는 손 털고 없는 집으로 돌아오니 백골(白骨)은 땅에 가득하고 풀빛은 청청(靑靑)하네」.



귀향마저 부정하다(破還鄕)*

 * 매월당전집에 수록된 ‘십현담’ 원문에는 이부분의 소제목 이름이 ‘還源’으로 되어 있음(역자주).

[批] 何地非故鄕 
[비] 어느 곳인들 고향집 아니겠는가?
[註] 末云旣空 本亦非有 達本還鄕 更如昨夢
[주] 말단(末端)은 이미 공(空)하고 근본도 유(有)가 아니다.
근본에 이르고 고향 집에 돌아오는 것도 어제 밤 꿈과 같다.

<原文> 返本還源事已差 
본원(本源)에 돌아 가면 사업은 이미 틀린 것,

[批] 金屑雖貴 着眼則病 
[비] 금(金)이 귀하지만 눈에 들어가면 눈병 난다.
[註] 棄末而返本 捨流而還源 是有取捨進退也 纔有取捨 便成邪道 豈不差哉
[주] 말단을 버리고 근본에 돌아온다, 지류(支流)를 버리고 본원(本源)에 돌아온다는 것은 취하고 버리고 나아가고 물러남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새 취하고 버리는 것(방편)이 다시 잘못된 길(道)을 만든다. 어찌 틀리지 않았는가!

<原文> 本來無住不名家 
본시 머물곳 없고, 집 또한 없는 것.

[批] 滿身淸風明月 
[비] 온몸에 가득한 청풍(淸風) 명월(明月)이여.
[註] 佛法不在內外中間 無有定所 旣無定所 何名爲家 無處無家 則還鄕之事錯矣
[주] 불법(佛法)은 내외(內外) 중간(中間)이 없고 정해진 곳도 없다. 미리 정해진 곳이 없으니 왜 집이라 이름 붙이는가? 처소도머물 곳도 없고 집도 없으니 고향집에 돌아온다는 것은 틀린 것이다.

<原文> 萬年松逕雪深覆 
만년 소나무 오솔길에 눈 깊이 덮혀 있고

[批] 何日松有逕 雪覆又幾年 
[비] 어느 때의 소나무 오솔길이며, 눈 덮인지 몇 해인가.
[註] 思量未及 情塵不到 一切蹤跡斷絶 故如松逕雪覆 至於萬年之久 而不通塵跡
[주] 생각과 헤아림이 미치지 못하고 정념과 티끌이 이르지 못하여 일체의 종적(蹤跡)이 끊어진다. 그래서 「소나무 오솔길에 눈 덮혔다」고 비유한다. 만년(萬年)처럼 길어서 티끌의 종적이 들어올 수 없다.
 
<原文> 一帶峰巒雲更遮 
한 줄기 산 봉우리에 구름 다시 가린다.

[批] 一步更奇於一步 
[비]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내딛는 데 묘미가 있다.
一下云
[註] 非徒松逕不通 全山莫開 進之無路 退亦無門 勢至於百尺竿頭 更尋活路於萬法之中 而觸處便塞 至是而可謂勝地絶景 當恁麽時如何 打拄杖 雲中峰巒

[주] 소나무 오솔길 통하지 않고 모든 산이 막혀 있으니, 들어가는 길이
없고 나가는 길도 없어, 형세(形勢)는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이른다.
다시 만법(萬法) 가운데서 활로(活路)를 찾지만 접촉하는 곳이 다시 막힌다. 이에 이르러서야 ‘승지절경(勝地絶景)’이라 할 만하다.
이런 때(‘절경’인 마음의 경지)는 어떤가?
(주장자를 한번 치고 읊는다) 「구름 속의 산 봉우리로다」.
 
<原文> 賓主穆時全是妄 
손님과 주인이 화목할 때 모두가 망령이오

[批] 禮有揖讓 
[비] 예의 하나 바르구나.
[註] 賓主和睦 雖云盛事 依然有賓有主 歷然分居 更事和睦 此非小故 非了事漢之所可肯定也
[주] 손님과 주인이 ‘화목’한 것은 비록 좋은 일이라 하겠으나, 의연히 ‘손님’이 있고 ‘주인’이 있어 뚜렷이 구별되어 있는데도, ‘화목’을 다스리니(섬기니) 이는 사소한 일이 아니다. ‘무뢰한을 다스리는 마음 공부’[事漢之事]를 마치지 못했으므로 긍정할 바가 되지 못한다.

<原文> 君臣合處正中邪
임금과 신하가 동석(同席)한 곳 옳은 듯 하나 잘못된 것.

[批] 宮中紊亂 
[비] 궁중 법도가 문란하다.
[註] 君臣合處 無高無下 一味平等 在法非不云正 自向上一句看之 則猶是邪道
[주] 임금과 신하(이는 조동종의 ‘君臣五位’론과 관련된 표현임: 역자주)가 합석한 곳은 고하(高下)가 없다. 얼핏 보면 평등한 맛이 있어 법(法)으로 바르다고 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위의 한 구절로 비추어 본다면,
이는 오히려 잘못이다.
 
<原文> 還鄕曲調如何唱 
환향(還鄕)의 노래를 어떻게 불러 볼까?

[批] 漁歌樵笛 
[비] 고기잡이 노래요 나뭇꾼의 피리로다.
[註] 以還鄕爲不可 而至於破還鄕 則還鄕曲調
如何唱道 方免得破 五音實難妙唱

[주] 고향에 돌아왔다는 말은 옳지 않다. 그래서 고향집마저 부수는 것이다. 그러니 환향(還鄕)의 노래를 어떻게 부르겠는가? 모두 놓아 부셔버려서 오음(五音, 통상적인 곡조)으로는 그 오묘한 경지를 노래하기가 실로 어렵다.
 
<原文> 明月堂前枯樹花 
명월당(明月堂) 앞 마른 나무에 핀 꽃이로다.

[批] 聲前非寂 聲後無聞 
[비] 소리 앞에도 고요하지 않았고 소리 뒤에도 들은 것 없다.

[註] 明月堂前 枯樹有花 此非聲色之所到 還鄕曲調 至是而諧音 如何和得此曲 良久云 坐斷生死路 猶是夢裡人 

[주] 「명월당 앞 마른 나무에 꽃이 핀다.」 이것은 소리와 색이 이르지 못하는 곳이다. 환향(還鄕)의 노래(곡조)는 이에 이르러 아름다운 소리[諧音]가 된다. 어떻게 이 노래에 화답하겠는가?
(잠시 후에 읊는다) 「앉아서 생사의 길을 끊어버리니 이 분은 꿈속의 사람이라네」.

위치를 바꾸다(轉位)
 
[批] 步步白水靑山 
[비] 걸음마다 백수(白水)요 걸음마다 청산(靑山)이로다.
[註] 取之非佳 捨之更非妙境 故更轉一位 轉之又轉 應接不暇
[주] 취하면 아름답지 않고 버린다 해도 묘한 경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위치[位 : 轉位의 ‘位’는 조동종의 ‘偏正五位’론과 관련된 것임: 역자주〕를 한번 바꾸고 또 바꾸어 사람 대하기에 한가하지 않다.

<原文> 涅槃城裡尙猶危 
열반(涅槃)의 성(城)이 오히려 위태로워

[批] 佛祖位中多危懼 夜來依舊宿蘆花 
[비] 불조(佛祖)의 자리[位]에 위태로움과 두려움이 많아 밤이 오면 옛대로 갈대 숲에 깃든다.

[註] 執着生死 已是凡夫 碍於涅槃 亦非聖人 莫道生死可㦊 涅槃愈危

[주] 생사(生死)에 집착하면 이미 범부(凡夫)이다. 열반에 구애되어도 성인이 아니다. 생사만 두렵다 이르지 말라. 열반은 더욱 위태롭다.
 
<原文> 陌路相逢沒定期 
저자 거리에서 만남은 정해진 기약이 없네.

[批] 磊落不覊漢 可逢亦可離 
[비] 떠돌이 저 사내 만날 수도 있고 헤어 질 수도 있고.
[註] 阿耨菩提 無有定法 生死涅槃 有何選擇 南陌北路 隨時逢著 任意逍遙 豈有定期 以束任運哉
[주] 아뇩다라삼막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정법(定法)이 없으니 생사와 열반에서무엇을 선택하겠가. 남쪽 저자와 북쪽 거리에서 때에 따라 만나고 뜻에 맡겨 소요(逍遙)하니 어찌 정한 기약이 있겠는가. 묶이되 뜻에 따라 흐를 뿐이다.

<原文> 權掛垢衣云是佛
방편으로 때묻은 옷 걸어놓고 부처라 부른다면

[批] 陽焰元非水 渴鹿豈可飮 
[비] 아지랑이 원래 물이 아닌데 목마른 사슴 어찌 마시겠는가.
[註] 權設化城 實非淨土 三十二相 亦非佛身 况垢衣乎
[주] 방편으로 성(城)을 쌓으니 진실로 정토(淨土)가 아니다. 32상(相)도 불신(佛身)이 아닌데 하물며 때묻은 옷일까 보냐.
 
<原文> 却裝珍御復名誰 
진주 비단 으리으리한 장식 다시 무어라 이름하리.

[批] 一醜甚於一醜 
[비] 추함에 추함을 더하는구나.
[註] 若以垢衣爲佛 華鬘瓔珞珍御之服 更名爲誰 欲以名相求佛 求得者終非佛也
[주] 만일 때묻은 옷을 부처라 한다면 화만(華鬘) 영락(瓔珞) 진기한 보배로 장식한 옷은 다시 무어라 이름하겠는가. 이름과 모양에서 부처를 구하고자 바란다면 그렇게 얻은 것은 결코 부처가 아니다.
 
<原文> 木人夜半穿靴去 
‘목인(木人)’이 한 밤중에 신을 신고 돌아가고

[批] 喝 
[비] 할(喝)!
[註] 木人未得神足 猶有穿靴之勞
[주] 나무 사람[木人]은 신족(神足)을 얻지 못하였으니 오히려 신을 신는 수고로움이 있다.

<原文> 石女天明戴帽歸 
‘석녀(石女)’는 날이 새자 모자 쓰고 가는구나.

[批] 百鬼遯跡 
[비] 백 가지 귀신이 자취를 감추었다
[註] 木人石女 均是本來面目 偏正兩得 體用全彰
[주] ‘목인(木人)’, ‘석녀(石女)’는 모두 본래의 면목(面目)이다.
편과 정[偏正, 偏位와 正位:역자주〕을 다 얻으면, 체(體)와 씀(用)이
완전히 빛난다.

<原文> 萬古碧潭空界月 
만고(萬古)의 푸른 못과 공계(空界)의 저 달!

[批] 雲泥有差 
[비] 구름과 진흙 그 차이이다.
[註] 碧潭有水 空界有月 不同上下 各盡其妙 佛法門中 奚取奚捨 萬法一如 相卽相離
[주] 푸른 못의 물, 공계(空界)의 달은 위․아래로 같지 않지만 각각 그 오묘함을 다하였다. 불법문중(佛法門中)에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겠는가. 만법(萬法)은 한결같아서 서로 융합하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한다.

<原文> 再三撈摝始應知 
두 번 세 번 걸러보아야 알게 된다.

[批] 無微不入 
[비] 적어도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다.
[註] 佛法廣大 無法非法 潭水空月 不離機用 雖然如是 學者不可造次 委曲玩味 方始有得 且道如何應知 良久云 沈楊柳綠 回頭風更高 
[주] 불법(佛法)은 광대(廣大)하여 법도 없고 법 아닌 것도 없다. 연못의 물 허공의 달은 대기(大機,기틀) 대용(大用,쓰임)을 떠나지 않은 것이다. 비록 이와 같으나 배우는 사람은 잠시라도 게을리하지 말고 곡진하게 그 맛을 음미하여야 비로소 얻음이 있다. 어떻게 해야 도(道)를 알겠는가?
(잠시 뒤에 읊는다) 「연기는 버드나무 녹음에 가라앉는데 머리를 돌이키니 바람은 다시 높구나」.


기틀을 돌리다(廻機)

[批] 風起花香動 雲收月影移 
[비] 바람이 일자 꽃 향기 진동하고 구름이 걷히니 달 그림자 옮겨간다.
[註] 轉位 則廻機隨之 一廻二廻 不存軌則
[주] 위를 바꾸면[轉位], 회기(廻機, ‘회기’는 ‘道의 발동 자체’, ‘轉位歸’ 등의 뜻이 있다. : 역자주)도 거기에 따라간다. 한 번 회기하 두 번 회기하니 정해진 궤도와 규칙이 있지 않다.

<原文> 被毛戴角人酆來 
털 입고 뿔 얹고 저자 거리 들어오니
 
[批] 三世諸佛 爲牛爲馬 
[비] 삼세 제불(三世諸佛)이 소가 되기도 하고 말이 되기도 한다.
[註] 被毛戴角牛也 廛井也 此言不居正位 從異類中行 隨機接物 應用無方
[주] 가죽 옷 입고 뿔 얹은 것은 소이다. 저자는 시정(市井)이다. 이는 정위(正位)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다른 무리들을 쫓아 그 속에서 행하는 것을 말한다. 근기(根機)에 따라 사물을 접하고 두루두루 응용한다.

<原文> 優鉢羅花火裡開 
우담발라 꽃 불 속에 활짝 피었다.

[批] 所懷伊人 
[비] 내가 사모하는 이가 이 사람이다.
[註] 優鉢羅花 靈瑞也 花從火裡開 實是寄遇 佛祖之出世 有若此者
[주] ‘우담발라 꽃’은 신령스러운 서기(瑞氣)이다. 꽃이 불 가운데서 활짝 피어나니 진실로 드문 만남이다. 불조(佛祖)가 세상에 나온 것도 이와 같다.

<原文> 煩惱海中爲雨露 
번뇌의 저 바다에 이슬비 되고

[批] 無多春宵一滴露 終朝付與百花頭
[비] 짧은 봄밤 이슬 한 방울이 아침이 다하도록 온갖 꽃을 다 적셔준다.
[註] 衆生之煩憫熱惱 猶如大海 佛祖出世 以涅槃妙法 爲雨爲露 以潤火宅 乃令衆生 咸得淸凉
[주] 중생의 갖가지 걱정과 뜨거운 번뇌는 마치 큰 바다와 같은데, 불조(佛祖)가 세상에 나왔다. 열반 묘법(涅槃妙法)이 비가 되고 이슬이 되어 불타는 집을 적시었다. 이에 중생이 시원함과 서늘함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原文> 無明山上作雲雷 
무명(無明)의 산 위로 우뢰 소리 울린다.

[批] 慶決平生 
[비] 평생(平生)을 결정한 것을 경축한다.
[註] 迷者碍於三毒無明 不得開發妙智 沈淪長夜 以大法之雲雷 破無明之迷山 爲功大矣
[주] 미혹(迷惑)한 자는 삼독(三毒) 무명(無明)에 막혀 오묘한 지혜를 열어 발전시키지 못하고 밤과 같은 어두움에 빠져든다. 구름 같고 우뢰 같은 큰 법으로써 무명의 미혹한 산(山)을 깨뜨려 버렸으니 공이 크다.
 
<原文> 鑊湯爐炭吹敎滅 
펄펄 끊는 가마 숯불 가르침의 나팔로 꺼버리고

[批] 割鷄牛刀 
[비] 닭잡는데 소잡는 칼을 쓴다.
[註] 鑊湯爐炭 地獄名也 佛法淸凉 能破熱獄
[주] 확탕(鑊湯) 노탄(爐炭)은 지옥 이름이다.
불법은 시원하고 서늘하여 뜨거운 지옥을 때려 부술 수 있다.
 
<原文> 劍樹刀山喝使摧 
험악한 세상이라도 ‘할(喝)!’ 소리에 깨버린다.

[批] 微勞何足謝 
[비] 조그마한 수고에 어찌 사례하겠느냐.
[註] 佛祖一喝 能摧劍樹刀山之地獄
[주] 불조(佛祖)가 한번 ‘할(喝)!’하면 칼과 창이 나무처럼 산처럼 많아 위태롭고 험악한 세상[劍樹刀山] 지옥도 깨버릴 수 있다.
 
<原文> 金鏁玄關留不住 
금자물쇠 현관(玄關)에 머물지 말고

[批] 神龍元非池中物 肯同魚鼈接香餌 
[비] 신룡(神龍)은 원래 물것[池中物]이 아니거늘 물고기,
자라처럼 낚시 밥에 걸리겠는가.
[註] 金鏁玄關 佛祖之關門 怜悧漢 不着佛求 不着法求 不着僧求 留於玄關 亦非妙境 故不住耳

[주] 금쇄(金鏁), 현관(玄關)은 불조(佛祖)의 관문이다. 영리(怜悧)한 사람은 부처를 구하는데 집착하지 않고, 법을 구하는데 집착하지 않고 승려를 구하는데 집착하지 않는다. 현묘한 관문[玄關]에 머무는 것도 오묘한 경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머물지 않는다[不住]고 한다.

<原文> 行於異路且輪廻 
다른 길로 가서 윤회하라.

[批] 一竿風月 滿地江湖 
[비] 낚시대에 풍월(風月)이요 온 천지가 강호(江湖)로다.
[註] 正位不離異路 涅槃卽在輪廻 男兒到處 本地風光 長在輪廻 不生不滅 爲牛爲馬 不居玄關 出世大丈夫 當若此也 如何是行於異路 良久云林太寂寞 管絃亦凄然 
[註] 正位不離異路 涅槃卽在輪廻 男兒到處 本地風光 長在輪廻 不生不滅 爲牛爲馬 不居玄關 出世大丈夫 當若此也 如何是行於異路 良久云林太寂寞 管絃亦凄然 
[주] 정위(正位)는 갖가지 길과 떨어져 있지 않다. 열반은 곧 윤회(輪廻) 속에 있다. 남자 가는 곳마다 본지풍광(本地風光)이니 긴 윤회 속에 존재한다.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고, 소가 되고, 말이 되고, 현관(玄關)에 머뭇거리지도 않는다. 세상에 나온 대장부(大丈夫)는 마땅히 이래야 한다. 갖가지 다른 길을 따라 간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잠시 후에 읊는다) 「운림(雲林)의 큰 적막이여 관현악도 처량하구나」.


한빛(一色)
 
[批] 一色知在一色外 
[비] 한빛은 한빛 밖에 있음을 알라.
[註] 萬轉千回 徒增其勞 入之一色 是爲大同
[주] 천만 번 돌고 돌며 헛되이 노고만 더할 뿐이다. ‘한빛’으로 들면 크게 동화(同和) 된다.
 
<原文> 枯木岩前差路多 
마른 나무 바위 앞에 갈림길도 많아서,

[批] 愈岐愈失 
[비] 갈수록 갈림길 갈수록 빗나간다.
[註] 學者維以息緣絶慮爲宗 如枯木死灰 則與道遠矣 至是而如岩前岐路 不得其正而入 反爲所惑
[주] 배우는 사람은 오직 인연을 쉬고 생각을 끊음을 종지(宗旨)로 삼아 마치 마른 나무와 죽은 재와 같이 된다. 그러면 도(道)에서 멀어진다. 이에 이르면 마치 바위 앞에 갈림 길을 만난 것과 같아서 바른 길로 들어가기 어려우니 오히려 미혹(迷하惑)게 된다.

<原文> 行人到此盡蹉跎 
나그네 여기 와서 모두 어긋나게 된다.

[批] 歲不我與 
[비] 세월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註] 行道之人 至於岐路而蹉跎 莫知所從 學法者 入於邪逕 終不得正道矣 初學者 當謹愼於始 未有悔於其終可也
[주] 길을 가는 사람이 갈림길에 이르면 갈 곳을 알지 못하게 된다.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이 사악한 길로 접어들면 끝내 정도(正道)를 얻을 수 없다. 처음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처음에 조심해서 뒤에 뉘우침이 없게 해야 한다.

<原文> 鷺鷥立雪非同色 
백로(白鷺)가 눈(雪)위에 서지만 같은 색이 아니요,

[批] 同則非同 
[비] 같다면 이미 같은 것이 아니다.
[註] 白鷺之立雪 白則同色 白鷺之白 與白雪之白同 鷺與雪 元非一色 故云非同也
[주] 백로가 눈[雪] 위에 서면 흰색으로 모두 같은 색(同色)이다. 백로의 흰빛과 눈의 흰빛이 같지만 백로와 눈은 원래 한빛(一色)이 아니다. 그래서 「같지 않다」고 말한다.

<原文> 明月蘆花不似他 
명월(明月)과 갈대꽃도 비슷하지 않고 다르다.

[批] 有類卽非高 
[비] 견줄 것이 있다면 곧 높지 않다.
 
[註] 明月蘆花 其色大同 猶不可比方於一色 如何是一色 良久云五色玲瓏處 明暗未分前

[주] 명월(明月)과 갈대 꽃은 그 빛이 크게 같다. 그러나 ‘한빛’(一色)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다. 그러면 한빛(一色)이란 무엇인가?
(잠시 후에 읊는다) 「오색(五色) 영롱한 곳이여 명암(明暗)이 갈리기
전(前)이로다」.

 
<原文> 了了了時無可了 
‘알았다’, ‘알았다’고 할 땐 알았다고 할 수 없고

[批] 可愧傍人 
[비] 옆 사람 보기가 부끄럽다.
[註] 佛法本無可了之事 了知佛法 則實無可了 有可了 則非了也 學者以無得爲得 始得
[주] 불법(佛法)은 본래 알 수 없는 일이다. 불법을 모두 알았다고 한다면 실로 알았다고 할 수 없고,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안 것이 아니다. 배우는 사람은 얻음이 없는 것으로써 얻음을 삼아야 얻음이 있게 된다.
 
<原文> 玄玄玄處亦須呵 
‘현묘(玄妙)하다’, ‘현묘하다’고 한 곳 또한 웃음거리일 뿐.

[批] 無處不玄 
[비] 현묘하지 않은 곳은 없다.
[註] 不到玄處 望之若天涯 及到玄處 仍非妙境 萬境一如 諸法皆空 能所雙忘 根塵無碍 回頭一望 可笑前功
[주] 현묘한 곳에 이르지 못하면 그것[玄處]을 하늘 끝[天涯]처럼 바라 본다. 현묘한 곳에 이르렀다 한다면, 그것은 오묘한 경지가 아니다. 모든 경계가 한결같고 모든 법이 다 공(空)이다. 함(능동)과 됨(피동) 모두 없어지고 6근(六根 : 眼·耳·鼻․舌·身·意)과 5진(五塵 : 色·愛·相·行·識)에 거리낌이 없다. 머리 돌려 한 번 바라보니 지난 공부가 우습다.
 
<原文> 慇懃爲唱玄中曲 
그대 위해 남몰래 현중곡(玄中曲) 부르노니

[批] 三世佛祖 一時耳聾 
[비] 삼세(三世)의 불조(佛祖)마저 귀먹겠구나.
[註] 無玄玄處 有何玄曲 唱之非易 聽之亦難
[주] 현묘하고 현묘한 곳이 없는데 어찌 현중곡(玄中曲)이 있겠는가. 부르기도 쉽지 않고 듣기도 어렵다.
 
<原文> 空裡蟾光撮得麽 
허공 속의 저 달빛 움켜잡을 수 있겠느냐?

[批] 千手不到 萬古明月
[비] 천 개의 손이 이르지 못하니 만고(萬古)의 명월(明月)이다.
[註] 蟾光者 月光也 空裡月光 無人撮得 有人撮蟾光可得 則解玄中曲矣 如何撮得蟾 打拄杖 三下云月光不能熙人明 閒得呼兒拾螢來
[주] 섬광(蟾光)이란 달빛이다. 허공 속의 달빛은 아무도 움켜 잡을 수 없다. 달빛을 움켜잡을 수 있는 사람은 곧 현중곡(玄中曲)을 이해할 수 있다. 어떻게 달빛을 움켜잡을 수 있겠는가?
(주장자로 세 번 치고 읊는다) 「달빛이 세상 사람을 밝혀줄 수 없어 한가로이 아이 불러 개똥벌레 모아오게 하네」.

乙丑 六月 七日 畢

을축년(1925년) 6월 7일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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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安常察,十玄談/김시습,십현담요해 &한룡운, 십현담주해/南銘,北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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