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7월 광개토대왕릉비. 유리관을 씌우기 직전의 모습

 

https://www.news1.kr/articles/?2227363 

 

순천대, 개교 80주년 기념 '광개토대왕릉비탁본전' 특별展

사실 앞에 겸손한 민영 종합 뉴스통신사 뉴스1

www.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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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풍상에 마모되지 않고 남아 있는 비문과 국역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래 비문에서 보듯이 광개토대왕의 시호는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시다.

[참고]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이 말은 광개토태왕의 공식적인 호칭입니다.

광개토태왕릉비의 정식적인 명칭이기도 하지요.

여기서 국강상(國岡上)광개토태왕릉이 위치한 지역을 지칭하고,

광개토경(廣開土境)이란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의미합니다.

평안(平安)은 치세의 표현을, 호태왕(好太王)은 왕을 아름답게 호칭하는 말입니다.

이에 이 블로그 운영자가 광개토경(廣開土境)에 대해  앞 꼭지의 해설을 참고하여 덧붙인다면 '

開土境'은 하늘이 열어준 땅이라는 뜻이라니 이를 크고 넓게 만드신 太王으로 볼 수 있겠네요.

 

대왕은 18세(391년)에 왕위 올라 39세(412년)에 승하하셨다.

그의 아들 장수왕이 대왕의 3년상을 마치고 414년 대왕의 비를 건립하셨다.

만주 통구(현재 길림성 집안현)에 세워진 이 비석은 노천에 방치되었다가 지붕을 씌우게 되고,

드디어 중국 당국에서는 고조선과 발해의 역사를 중국사에 포함시키려는 동북공정과정의 일환으로 

비석을 유리창틀 속에 가두고 관광은 물론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위의 지도에 보이는 고조선의 영토는 보기만 해도 가슴 벅차다.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할 수 있었던 것도 고조선 유민들이 살고 있는 땅이었기에 가능했다.

한국민족은 사성의 발음체계를 가진 한족과는 엄연히 구분된다.

유목민족인 북방의 몽골계로 남하하여 백제와 교류하던 일본에까지 이르렀고

동방으로 갈라진 일파는 알래스카를 거쳐 멕시코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니까 고조선의 지도에는 단군으로부터 남하하면서 이룩한 터를 잡았던 영토가 역력하다.

텐트에 주거하며 겨울이면 가축과 가족들을 이끌고 엎어지고 넘어어지면서 설원을 탈출해 이동하는

유목민들의 영상을 볼 때면 온갖 간난을 이겨낸 우리 조상들의 슬픈 역사를 보는 듯하여 가슴이 메어진다.

한국인이 세계활쏘기대회에서 우승을 독차지하는 것도 필연적인 사실로 유목민들의

DNA를 가진 피가 맥맥히 흘러 조금만 훈련하면 그 능력이 금새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말을 유지 발전시켜 의성어 의태어 등 우리말을 개발해온 조상들께 감사한다.

아울러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문자[발음기호] 창제는 한국인의 독창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한국인의 우수성을 전세계에 떨친 위대한 사건이다. 

여기에는 세종의 스승인 신미대사의 산스크리트어에 대한 탁월한 언어 능력과

신숙주의 언어에 대한 천재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아설순치후 발음기관을 본떠 가획으로 오음체계의 모든 자음을 완성하고

천지인 세 글자를 순열 조합하여[정인지의 억지 주장일 뿐 모음체계는 범어에서 가져온 것임] 모든 모음을 적게 한 것은

신미대사와 신숙주의 공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신숙주 선생은 節義 문제로 비난받아왔지만 <동국정운> 공적을 십분 참작하여 재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한글창제에 대해서는 아래 포스트에 자세히 정리함.

훈민정음 정리

https://kydong77.tistory.com/10211

 

훈민정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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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의 창제원리  (1) 2008.09.05

초성 중성의 창제원리/ 3성법(초중종성)

https://kydong77.tistory.com/7971?category=485871 

 

훈민정음의 창제원리, 훈민정음 信眉창제설/북한 '조선글날' 1월15일

https://kydong77.tistory.com/20996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창제원리 세종께서 왼손에 들고 계신 책이 훈민정음 해례본 https://namu.wiki/w/%ED%9B%88%EB%AF%BC%EC%A0%95%EC%9D%8C%20%ED%95%B4%EB%A1%80%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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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碑文 1

[출처]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碑文 1|작성자 byunsdd8972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碑文 2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碑文 3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碑文 1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비문 1

 

唯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유석시조추모왕지창기야 출자배부여 천제지자 모하백녀랑 

剖卵降世 生而有聖德 □□□□□命駕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부란항세 생이유성덕 □□□□□명가순행남하 로유부여엄리대수

삼가 생가건대, 옛적에 시조 추모왕께서 우리 고구려를 창건하셨다.

추모왕은 북부여에서 출생하셨고, 아버지는 천상의 상제님이시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셨다.

알을 깨고 세상에 태어나셨고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 추모왕이 길을 떠나 수레를 몰고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길이 부여의 엄리대수를 거쳐가게 되었다.

 

 王臨津言曰

왕림진언왈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應聲卽爲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아시황천지자 모하백녀랑 추모왕 위아연가부구 응성즉위연가부구 연후조도 어비류곡홀본서 성산상이건도언

이때 추모왕이 나룻가에서 외치시기를“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띄어서 물을 건너게 하라.”하였다.

그 말이 떨어지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이들이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추모왕은 물을 건너가서 비류곡 홀본 서쪽 산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다.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黃龍負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紹承基業

불락세위 인견황룡래하영왕 왕어홀본동강 황룡부승천 고명세자유류왕 이도흥치 대주류왕소승기업

추모왕이 세상의 왕위를 즐거워하지 않을 무렵 하늘에서 황룡을 내려 보내 왕을 맞이하였다.

홀본성 동쪽 언덕에서 황룡이 왕을 업혀 하늘로 올라갈 때,

세자인 유류왕을 돌아보고 명령하여 당부하시기를

도로써 나라를 다스리라.[以道興治]”하셨다.

대주류왕은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도로써 나라를 다스려 왕업을 계승 발전시키셨다.

 

還至十七世孫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太王 恩澤洽于皇天 威武振被四海 

환지십칠세손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이구등조 호위영락태왕 은택흡우황천 위무진피사해

掃除□□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卅有九 宴駕棄國

소제□□ 서녕기업 국부민은 오곡풍숙 호천불조 삽유구 연가기국 

以甲寅年九月甘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以示後世焉

이갑인년구월감구일을유 천취산릉 어시립비 명기훈적 이시후세언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17세를 내려와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다.

왕께서는 18세(391)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태왕이라 하셨다.

호태왕은 그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 미치고, 불의를 바로잡는 위무는 온 세상을 뒤덮었다. 

부정한 무리를 쓸어 없애시니 백성은 직업에 안정되었다.

나라가 부강하니 백성은 넉넉하고 오곡이 풍요하게 무르익었다.

하늘이 돌보지 아니함인지 39세(412)에 세상을 버리고 나라를 떠나셨다.

갑인년(414) 9월 29일(을유일)에 산릉에 모시고 비석을 세우고 훈공과 업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는 바이다.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碑文 2

其辭曰

기사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永樂五年 歲在乙未 王以稗麗不□□人 躬率往討

영락오년 세재을미 왕이패려불□□인 궁솔왕토 

영락 5년 을미년에 패려가 순종하지 않아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정벌하셨다. 

富山 貧山鹽水上 破其丘部洛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과부산 빈산 지염수상 파기구부락륙칠백영 우마군양 불가칭수 

부산과 빈산을 지나서 염수의 상류에 이르러 그 구(丘)에 있는 육, 칠백의 영을 깨뜨리고 소, 말, 양 등을 사로잡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於是旋駕 因過□平道 東來□城 力城 北豊 備狩 遊觀土境 田獵而還

어시선가 인과□평도 동래□성 력성 북풍 비수 유관토경 전렵이환

여기에서 수레를 돌려 □평도를 지나 동쪽으로 □성과 역성, 북풍에 돌아오며 여러 지방을 왕이 고루 순수하셨고, 관경을 순행하고 사냥을 하며 돌아오셨다. 

 

百殘 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 □□新羅 以爲臣民

백잔 신라 구시속민 유래조공 이왜이신묘년래 도해파백잔 □□신라 이위신민

(이것이 바로 문제의 신묘년 기사)

백잔과 신라는 본시 속민으로서 옛적부터 조공을 바쳐 왔다. 왜가 신묘년 이래로 매양 바다를 건너와 백잔과 □□와 신라를 파하여 신민으로 삼으려 하므로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이륙년병신 왕궁솔수군 토벌잔국 

이에 광개토대왕 영락 6년 병신년에 태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왜적과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軍至窠臼 攻取壹八城

군지과구 공취일팔성 

군대가 먼저 왜적의 과구(소굴)에 이르러 18성을 공격하여 취하셨다. 

臼模盧城 各模盧城 幹氐利城 □□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古舍蔦城 阿旦城 古利城 □利城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루성 미사성 고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雜珍城 奧利城 句牟城 古須耶羅城 莫□□城 □□城 □而耶羅城 瑑城 於利城 農賣城 豆奴城 沸城比利城 彌鄒城也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수야라성 막□□성 □□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농매성 두노성 비성비리성 미추성야

그리고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고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수□□, □□성, 개이야라성, 전성, □□성, □□성, 두노성, 비□□리성, 미추성, 야

利城 大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 城婁賣城散那城那旦城 細城牟婁城 于婁城蘇灰城燕婁城 析支利城

리성 대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 성루매성산나성나단성 세성모루성 우루성소회성연루성 석지리성 

巖門□城 林城□□□□□□□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彡穰城 □□城 □古盧城

암문□성 림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성  □고로성 

仇天城 □□□□□其國城

구천성 □□□□□기국성

구천성, □□□□□기국성[들을 취하였으며 어느덧 백잔의 국성에 근접하였다.]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遺刺迫城 殘兵歸宂 就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백잔은 정의에 굴복하지 않고 감히 모든 전투에 나와 싸웠다. 왕은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성을 압박하시니 백제의 군대가 제 소굴로 도망치므로, 이어 그들의 성을 에워싸 공격하셨다. 백제왕이 당황하고 다급하여 남녀 노비 1천 명과 가는 베 1천 필을 바쳤다.

  

跪王自誓 從今以後 永爲奴客 太王恩赦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 村七百 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궤왕자서 종금이후 영위노객 태왕은사선미지건 록기후순지성 어시득오십팔성 촌칠백 장잔주제병대신십인 선사환도

그리고 왕에게 귀순하여 스스로 맹세하기를“지금부터는 영원히 노객(신하)이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태왕은 그들이 처음에 잘못한 허물을 널리 용서하시고, 뒤에 순종하는 정성을 가상히 여긴다고 기록하셨다.

그리하여 58개 성과 7백 마을을 얻고, 백잔 임금의 아우와 대신 10명을 데리고 군대를 철수하여 수도에 돌아오셨다.

 

八年戊戌 敎遣偏師觀帛土谷 因便抄得莫□羅城 加太羅谷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論事

 팔년무술 교견편사관백신토곡 인편초득막□라성 가태라곡남녀삼백여인 자차이래 조공론사

영락 8년 무술년 일부 군대를 식신(숙신)의 토곡의 정황을 탐색하고 바로 공격을 개시하여 막□라성과 가태라곡에서 남녀 3백여 명을 포로로 잡아가지고 돌아왔다. 이때부터 식신은 조공을 바치고 복종하여 섬겼다.

 

九年己亥 百殘爲誓 與倭和通 王巡下平壤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特遣使還 告以密計

구년기해 백잔위서 여왜화통 왕순하평양 이신라견사백왕운 왜인만기국경 궤파성지 이노객위민 귀왕청명   태왕은자 긍기충성 특견사환 고이밀계

영락 9년 기해년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여 친선을 맺었다. 왕이 순시차 평양에 가셨는데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왕에게 아뢰기를,“왜인이 그 영토에 가득 들어 와서 성과 못을 파괴하고 노객(신라인)을 왜의 백성으로 삼고자 합니다.”라고 고하며 호태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호태왕은 그들의 충성을 동정하여 사절을 다시 보내 그 요청을 허락하셨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 自倭背急追   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拔新羅城晨城 倭寇大潰 城內 [이하 원문 16자 결] 十九 盡拒隨倭         安羅人戍兵

십년경자 교견보기오만 왕구신라 종남거성지신라성 왜만기중 관군방지 왜적퇴 □□□□□□□ 자왜배급추          지임나가라종발성 성즉귀복 안라인수병 발신라성신성 왜구대궤 성내 [이하 원문 16자 결] 십구 진거수왜     안라인수병

영락 10년 경자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였다. 남거성을 경유하여 신라성에 들어가니 그 안에 왜인이 가득했는데 관군이 도착하자 왜적이 물러갔다. □□□□□□□ 왜의 뒤로 돌아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에까지 이르러 계속하여 성을 함락하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이에 안라인 수병으로 하여금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또 신라성, 신성을 함락시키니 왜구가 크게 궤멸되었다. 성안사람 [이하 원문 16자 결] 열아홉, 왜적을 모두 물리치고 안라인 수병에게 맡기어 안돈시켰다. 

 

□□□□□其□□□□□□□□□□□□□□□□□□□□□□□□□□□□□□辭□□□出□□□□□□□□殘□潰□□□城  安羅人戍兵.

□□□□□기□□□□□□□□□□□□□□□□□□□□□□□□□□□□□□사□□□출□□□□□□□□잔□궤□□□성  안라인수병.

[원문 50여자 결]

 

昔新羅寐錦未有身來聆事 □□□□廣開土境好太王 □□□□ 寐錦□家僕句 □□□□朝貢

석신라매금미유신래령사 □□□□광개토경호태왕 □□□□ 매금□가복구 □□□□조공

옛날에 신라의 임금이 친히 와서 영사(잘 따르며 섬기는 행위)를 한 적이 없었는데 □□□□광개토경호태왕이 □□□□ 신라 임금이 친히 가복을 데리고 와 고구려왕(호태왕)에게 조공하였다.

 

十四年甲辰 而不軌 侵入帶方界 和通殘兵□石城 □連船 □□□王窮率往討 從平穰□□□鋒相遇 王幢要截盪刺 倭寇潰敗 斬殺無數

십사년갑진 이왜불궤 침입대방계 화통잔병□석성 □련선 □□□왕궁솔왕토 종평양□□□봉상우 왕당요절탕자

왜구궤패 참살무수

영락 14년 갑진에 가 부당하게 대방 지역을 침입하여 백잔군과 연합하여 석성을 공격하였다. 호태왕은 몸소 군대를 이끌고 가셔서 토벌하매, 평양□□□에서 만나 격전을 치루게 되어 왕의 군대가 들이치시니 왜구가 궤패하여 흩어지고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王師□□合戰 斬殺蕩盡 所穫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沙溝城婁年□城 牛由城 □城 □□□□□□城

십칠년정미 교견보기오만 □□□□□□□□왕사□□합전 참살탕진 소확개갑일만여령 군자기계 불가칭수 환파

사구성루년□성 우유성 □성 □□□□□□성

영락 17년 정미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출병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 왕사가 □□와 합전하여 적군을 섬멸하여 모두 없애시고, 노획한 갑옷이 1만 벌이나 되고 군수물자와 장비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 누성, 우유성, □성, □□□□□□성을 격파했다.

 

二十年庚戌 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城國駭服 獻□□□□□□□ 王恩普覆

이십년경술 동부여구시추모왕속민 중반불공 왕궁솔왕토 군도여성 이여성국해복 헌□□□□□□□ 왕은보복

영락 20년 경술년, 동부여는 옛날에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그래서 호태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에 나섰다. 군대가 부여성에 이르자 부여는 온 나라가 놀라 □□□□□□□을 헌납하였다. 왕의 은혜가 널리 퍼졌다.

 

於是旋還 又其慕化隨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偳社婁鴨盧 肅斯舍鴨盧  □□□鴨盧 凡所攻破 城六十四  村一千四百

어시선환 우기모화수관래자 미구루압로 비사마압로 단사루압로 숙사사압로  □□□압로 범소공파 성륙십사   촌일천사백

그리하여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오는데 또 그들 중에서 왕의 은덕을 사모하여 관군을 따라온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미구루압로, 비사마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압로이다. 이때 공격하여 함락시킨 성의 수가 64개요, 촌의 수가 1천4백개였다.

[출처]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碑文 2|작성자 byunsdd8972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碑文 3

守墓人煙戶賣句余民國煙二 看煙三 東海賈國煙三 看煙五 敦城民四家盡爲看煙 干城一家爲看煙 碑利城二家爲

國煙 平穰城民國煙一 看煙十 訾連二家爲看煙 俳婁人國煙一 看煙卌三 梁谷二家爲看煙 梁城二家爲看煙 安夫

連甘二家爲看煙 改谷三家爲看煙 新城三家爲看煙 南蘇城一家爲國煙

수묘인연호매구여민국연이 간연삼 동해가국연삼 간연오 돈성민사가진위간연 간성일가위간연 비리성이가위국연 평양성민국연일 간연십 자련이가위간연 배루인국연일 간연십삼 량곡이가위간연 량성이가위간연 안부련감이가위간연 개곡삼가위간연 신성삼가위간연 남소성일가위국연  

능묘를 지키는 연호(가구)는 매구여의 백성 중에서 국연이 두 집, 간연이 세 집이요, 동해고는 국연이 세 집, 간연이 다섯 집이요, 돈성의 백성은 네 집이 모두 간연이요, 우성은 한 집이 간연, 비리성은 두 집이 국연, 평양성 백성은 국연 한 집, 간연이 열 집, 자연은 두 집이 간연, 배루 사람은 국연이 한 집, 간연이 마흔세 집, 양곡은 두 집이 간연, 양성은 두 집이 간연, 안부련은 스물두 집이 간연, 개곡은 세 집이 간연, 신성은 세 집이 간연, 남소성은 한 집이 국연이다.

 

新來韓穢沙水城國煙一 看煙一 牟婁城二家爲看煙 豆比鴨岑韓五家爲看煙 句牟客頭二家爲看煙 求底韓一家爲

看煙 舍蔦城韓穢國煙三 看煙甘一 古須耶羅城一家爲看煙 炅古城國煙一 看煙三 客賢韓一家爲看煙 阿旦城

雜珍城合十家爲看煙 巴奴城韓九家爲看煙

신래한예사수성국연일 간연일 모루성이가위간연 두비압잠한오가위간연 구모객두이가위간연 구저한일가위

간연 사조성한예국연삼 간연감일 고수야라성일가위간연 경고성국연일 간연삼 객현한일가위간연 아단성

잡진성합십가위간연 파노성한구가위간연

새로 들어온 한예로 사수성은 국연 하나, 간연 하나, 모루성은 두 집이 간연, 두비압잠한은 다섯 집이 간연, 구모객두는 두 집이 간연, 구저한은 한 집이 간연, 사조성의 한예는 국연 셋, 간연 스물하나, 고모야라성은 한 집이 간연, 경고성은 국연 하나, 간연 셋, 객현한은 한 집이 간연, 아단성과 잡진성은 모두 열 집이 간연, 파노성의 한은 아홉 집이 간연이다.

 

臼模盧城四家爲看煙 各模盧城二家爲看煙 牟水城三家爲看煙 幹弓利城國煙一 看煙三 彌鄒城國煙一 看煙七 也 利城三家爲看煙 豆奴城國煙一看煙二 奧利城國煙二看煙八 須鄒城國煙二看煙五 百殘南居韓國煙一看煙五大    山韓城六家爲看煙

구모로성사가위간연 각모로성이가위간연 모수성삼가위간연 간궁리성국연일 간연삼 미추성국연일 간연칠 야리성삼가위간연 두노성국연일간연이 오리성국연이간연팔 수추성국연이간연오 백잔남거한국연일간연오대 산한성륙가위간연

 구모로성은 네 집이 간연, 각모로성은 두 집이 간연, 모수성은 세 집이 간연, 간저리성은 국연 둘, 간연 셋, 미추성은 국연 하나, 간연 일곱, 야리성은 세 집이 간연, 두노성은 국연 하나, 간연 둘, 오리성은 국연 둘, 간연 여덟, 수추성은 국연 둘, 간연 다섯, 백잔 남쪽에 한은 국연 하나, 간연 다섯, 대산한성은 여섯 집이 간연이다.

 

農賣城國煙一看煙七 閏奴城國煙二看煙甘二 古牟婁城國煙二看煙八 瑑城國煙一看煙八 味城六家爲看煙 就咨城五家爲看煙 彡穰城甘四家爲看煙 散那城一家爲國煙 那旦城一家爲看煙 句牟城一家爲看煙 於利城八家爲看煙   比利城三家爲看煙 細城三家爲看煙  

농매성국연일간연칠 윤노성국연이간연감이 고모루성국연이간연팔 전성국연일간연팔미성륙가위간연취자성

오가위간연 삼양성감사가위간연 산나성일가위국연 나단성일가위간연 구모성일가위간연 어리성팔가위간연 비리성삼가위간연 세성삼가위간연

  농매성은 국연 하나, 간연 일곱, 윤노성은 국연 둘, 간연 스물둘, 고모루성은 국연 둘, 간연 여덟, 전성은 국연 하나, 간연 여덟, 미성은 여섯 집이 간연, 취자성은 다섯 집이 간연, 삼양성은 스물네 집이 간연, 산나성은 한 집이 국연, 나단성은 한 집이 간연, 구모성은 한 집이 간연, 어리성은 여덟 집이 간연, 비리성은 세집이 간연, 세성은 세집이 간연이다.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存時敎言 祖王 先王但敎取遠近舊民守墓朝掃 吾慮舊民轉當羸劣 若吾萬年之後 安守墓者 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 令備朝掃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존시교언 조왕 선왕단교취원근구민수묘조소 오려구민전당리열 약오만년지후 안수묘자 단취오궁순소략래한예 령비조소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생전에 말씀하시기를“조왕과 선왕께서는 다만 멀고 가까운 곳의 여러 지방에 사는 구민(본토인)만을 뽑아 무덤을 지키며 소재를 맡기었으나, 나는 구민들이 차차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약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무덤을 편히 수호할 자들은, 내가 직접 돌아다니며 데리고 온 한족이나 예족이니 그들에게 수호하고 소재하는 일을 맡게 하라.”고 하셨다.

 

言敎如此 是以如敎令 取韓穢二百甘家 慮其不知法則 復取舊民二百十家 合新舊守墓戶 國煙卅 看煙三百 都合三百卅家

언교여차 시이여교령 취한예이백감가 려기불지법칙 복취구민이백십가 합신구수묘호 국연삽 간연삼백 도합삼백삽가

 그러므로 말씀하신 대로 한족과 예족 이백이십 집을 데려 오게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예법을 잘 모를 것을 염려하여 다시 구민 일백열 집을 데려왔다. 새로 온 사람과 전부터 있던 사람을 합하면 수호하는 집수는 국연이 삼십 집, 간연이 삼백 집, 모두 합하여 삼백삽십 집이다

 

自上祖先王以來 墓上不安石碑 致使守墓人煙戶差錯 唯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 盡爲祖先王墓上立碑 銘其煙戶   不令差錯 又制守墓人自今以後不得更相轉賣 雖有富足之者 亦不得擅買 其有達令 賣者刑之 買人制令守墓

자상조선왕이래 묘상불안석비 치사수묘인연호차착 유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진위조선왕묘상립비 명기연호 불령차착 우제수묘인자금이후불득갱상전매 수유부족지자 역불득천매 기유달령 매자형지 매인제령수묘

상조 선왕 이래로 능묘 위에 비석을 세우지 않아서 무덤을 지키는 가호들이 잘못하는 사태가 생기게 되었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선조왕의 무덤 위에 모두 비석을 세우서 그 가호들로 하여금 잘못하는 일이 없게 하였다. 또 제도를 제정하여 무덤을 수호하는 사람들에 대하여는 이후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게 하고, 아무리 부유한 사람일지도 마음대로 사 가지 못하게 하셨다. 만일 법령을 위반하고 파는 자는 형벌에 처하고, 사는 자도 법을 마련하여 그로 하여금 무덤을 수호하게 하셨다.

 

 

 

https://blog.naver.com/kytong3202/20201286854

 

광개토대왕비문 해석 및 부연 설명 - 광개토대왕비문 전문 수록

광개토대왕비문 해석 및 부연 설명 출처 : 네이버 지식인 - 바람신 (필자 부분 수정) 누락된 영락 8년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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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광개토왕(廣開土王, 374년 ~ 413년, 재위: 391년 ~ 413년은 고구려의 제19대 군주이다. 이름은 담덕(談德) 또는 안(安)으로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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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廣開土王, 374년 ~ 413년, 재위: 391년 ~ 413년은 고구려의 제19대 군주이다. 이름은 담덕(談德) 또는 안(安)으로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國崗上廣開土地好太聖王),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罡上大開土地好太聖王) 등의 시호가 전해진다. 현대의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중국과 일본 등지에는 호태왕(好太王)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OBM6fghN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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