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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31)하서(夏書)(1)우공편(禹貢篇)(1) 기주(冀州)의 치수(治水)와 부세(賦稅)

             <서경(書經)>(31) 하서(夏書)(1)         하(夏)는 우(禹)를 비롯한 그의 자손들이 중국을 다스렸던 왕조를 가리킨다. 하서(夏書)는 하 왕조(夏王   朝)의 사관(史官)이 기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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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書經)>(31) 하서(夏書)(1)       

   하(夏)는 우(禹)를 비롯한 그의 자손들이 중국을 다스렸던 왕조를 가리킨다. 하서(夏書)는 하 왕조(夏王

   朝)의 사관(史官)이 기록하여 후세에 남긴 것이라고 한다. 중국민족을 화(華) 혹은 화하(華夏)라고 일컫

   게 된것은 하왕조(夏王朝)의 하(夏)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왕조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왕조로서, 중국

   의 민족과 정치와 문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개로 간주되고 있다. 14대에 걸쳐 17명의 임금이 다스렸

   으며, 약 400여 년 동안 왕업(王業)을 누렸는데, 서기(西紀)로는 대략 기원전 2183년 경에서 1752년으로

   잡고있다. 하(夏)의 역사로는 곧 이 하서(夏書)에 수록된 우공(禹貢)과 감서(甘誓), 오자지가(五子之歌),

   윤정(胤征)등이며, 그밖에는 유실 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하(夏)의 역사를 한낱 전설로만 여겨 왔는

   데, 하남성(河南省) 평양현(平陽縣)에서 출토 된 갑골문(甲骨文)에 의해서 하나라 때의 문자가 있었음을

   단정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서(夏書)는 본래 우서(虞書)와 함께 수록이 되어있었으며, 한대(漢代)의

   여러 학자들은 모두 우하서(虞夏書)라 불렀다고 공영달(孔穎達)은 <상서정의(尙書正義)>에서 주장하고

   있다. 내용면으로도 역시 <위고문상서>에서 나뉘어진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제1편 우공(禹貢)(1)

   이 편은 우(禹)가 홍수를 다스리고 또 중국을 9주(九州)로 나눈 업적 등을 기록한 것이다. 우(禹)가 홍수

   를 다스림으로써 백성들은 안정된 생활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우는 백성들이 정착하게 되자, 조세제도

   를 재확립하여 실시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편을 우공(禹貢)이라고 하였는데, 공(貢)은 공물등을 바

   친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전세(田稅)를 부(賦)라 하고, 제후들이 바치는 지방의 토산물을 공(貢) 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공(貢)은 양자를 모두 일컫는 말이다.   

 

 

[1] 기주(冀州)의 치수(治水)와 부세(賦稅)

   禹敷土(우부토) 隨山刊木(수산간목)

   우는 땅을 다스렸으며, 산에 이르면 나무를 베어내고,

   奠高山大川(전고산대천) 

   높은 산과 큰 강에 임해서는 제사를 지내었다. 

   冀州(기주) 旣載壺□(기재호구)

   기주(冀州)의, 호구산(壺□山)에서 시작하여, 

   治梁及岐(치량급기)

   양산(梁山)과 기산(岐山)까지 다스렸고,

   旣修太原(기수태원) 至于岳陽(지우악양) 

   태원(太原)으로부터, 악산(岳山)의 남쪽 기슭에 이르렀으며,

   覃懷底績(담회저적) 

   담회(覃懷)에서의 일을 이룩하여,

   至于衡漳(지우형장)

   장수(漳水)가 가로지르는 곳까지 이르렀다.

   厥土惟白壤(궐토유백양) 

   그곳의 흙은 희고 부드러웠다.

   厥賦惟上上錯(궐부유상상착) 

   이곳의 부세(賦稅)는 상상(上上)급에 속하나 상중(上中)도 섞였으며, 

   厥田(궐전) 惟中中(유중중) 

   이곳의 밭은, 중중(中中)급에 속했다.

   恒衛旣從(항위기종) 

   항수(恒水)와 위수(衛水)가 잘 흐르게 되어,

   大陸旣作(대륙기작) 

   대륙(大陸)이란 호숫가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島夷皮服(도이피복) 

   도이(島夷)의 백성들은 갖옷을 바쳐 왔는데,

   夾右碣石(협우갈석) 入于河(입우하)

   그들은 갈석산(碣石山)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黃河)로 들어 왔다.

 

    *우(禹)는 홍수를 다스린 후 중국 전체를 9주(九州)로 나누었다.

그는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중국 전역을 돌아 다녔으며, 지형을 샅샅이 조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그때까지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있던 전 국토를 크게 분할하여 9주라고 일컫는 지역이 정해진 것인데,

이후에도 중국을 9주(九州)라 부르게 되었다. 

     물론 그 후에 더욱 세분되고 확대가 되었으나, 우(禹)가 정한 것이 기초가 된 것이다.

이 편에서는 우가 정해 놓은 9주의 내용이 차례로 기록이 되어 있으며,

기주(冀州)가 그당시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으므로, 먼저 정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이족(夷族)은 하왕조 이전의 한족과 가장 빈번한 접촉을 가졌던 묘족(苗族)과 마찬가지로,

하왕조때부터 중국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는 이민족이다.

고사(古史)에서 말하는 동이(東夷), 방이(方夷),구이(九夷)는 모두 이족(夷族)이며, 이들의 주거지는 주로 동쪽 바닷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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