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다윈(왼쪽)과 그의 책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 

 

 

찰스 로버트 다윈(영어: Charles Robert Darwin,  1809년  - 1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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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말년기의 찰스 다윈 출생 1809년 2월 12일(1809-02-12)잉글랜드 슈루즈버리 사망 1882년 4월 19일(1882-04-19)(73세)잉글랜드 런던 던하우스 국적 영국 분야 박물학 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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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스 로버트 다윈(영어: Charles Robert Darwin, 문화어: 찰스 다윈, FRS1809년 2월 12일 ~ 1882년 4월 19일)은 영국의 생물학자이자 지질학자로서,[1] 진화론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박물학자이며 철학자로 인정받기도 한다. 다윈은 생물의 모든 이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졌다고 보고,[2]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와의 공동 논문에서 인위적인 선택인 선택적인 교배와 비슷한 현상이 생존경쟁을 거쳐 이루어지는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을 소개했다.[3] 박물학자 이래즈머스 다윈의 손자이며, 생물학자 프랜시스 골튼의 외사촌 형이기도 하다.

다윈은 종의 진화 개념 이전에의 과학의 거부반응을 극복하고 1859년에 저술한 《종의 기원》에 강력한 증거로 진화론을 발표했다.[4][5] 1870년대에 과학계와 많은 대중이 진화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많은 설명을 할 수 있어 자연선택이 진화의 기본 메커니즘이라는 것에 1930년대에서 1950년대에까지 폭 넓은 공감대가 형성된 이후 현대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경쟁 이론은 나오지 않았다.[6][7] 수정된 내용에서는, 다윈의 과학적 발견은 생명 과학의 통합 이론으로 생명의 다양성을 설명한다.[8][9]

종의 기원》에서 생물의 진화론을 내세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만큼이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지배적이었던 창조설, 즉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는 신의 뜻에 의해 창조되고 지배된다는 신중심주의 학설을 뒤집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인류의 자연 및 정신 문명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오게 했다.[10] 로잔대학의 다니엘 셰릭 교수는 '다윈은 사람과(科)에 속한 두 종(種)이 서로 연관이 있으며, 이들이 공동의 조상을 가졌던 시기가 있었다고 말했다'는 언급을 한바있다.[11] 다윈의 이러한 발언은 당시 유럽 사회에 충격을 주었을 것이며 그 당시 진화론과 창조설간의 논쟁에 본격적으로 불을 붙였다고 알려져있다.

 

https://www.koreascience.or.kr/article/JAKO200954860018048.pdf

① 다윈은 누구이며 무엇을 했는가? 글 | 홍성욱 _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과학기술사) 교수 comenius@snu.ac.kr

특집Ⅱ 진화론 탄생

150년 다른 혁명적인 과학 이론과 마찬가지로 진화론은 종의 진화라 는 간단한 원리를 통해서 종의 지리적 분포, 거대한 공룡의 화석과같은고생물학, 종사이의유사성과차이, 종과환경의관계 등 다양한 생명현상을 설명한다. 그렇지만 이 이론이 나오기 전에 는대부분의사람들이종의진화를받아들이지않고있었다. 진화론의 기반이 된 5년간의 비글호 여행 찰스 다윈은 1809년 2월 12일 영국에서 태어났다. 다윈은 어릴 적부터 자연에 관심이 많았고, 16세에 에든버러 대학에서 의학 강 의를 듣기 시작했지만 이를 곧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프리 카인에게서 동물 박제법을 배우는 데에 더 관심을 보였다. 에든버 러대학교 2학년시절에는학생들이만든자연연구그룹에 합류했고, 이 무렵에 라마르크와 자신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의 진 화론을접하게되었다.

다윈이 의학 공부를 게을리하고 있다는 것에 분노한 아버지는 아들을목사로만들기위해 1828년에다윈을케임브리지대학교에 보냈다. 그렇지만여기에서도다윈은공부보다사냥과승마를즐겼 고, 딱정벌레 관찰에 열의를 보였다. 이 무렵에 다윈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동물학 교수 헨슬로우와 친분을 쌓았다. 그는 단지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졸업 시험 전에 집중 적으로공부를해서 1831년에 괜찮은 성적으로 (시험을통과한 178 명중 10등) 졸업시험을통과했다. 졸업 직후, 다윈의 스승이자 동료인 헨슬로우가 다윈에게 그의 생애를 바꾸었던 제안을 했다.

헨슬로우는 남미 해안을 측량하고 관찰하는 비글호에 다윈의 승선을 추천했고, 다윈은 이를 바로 수 락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승낙도 받아냈다. 다윈의 공식 직책은 단순한 표본 수집가보다는 한 단계 높은 비글호 선장 피츠 로이의‘신사 말벗’이었다. 다윈은 1831년 12월 비글호를 타고 긴 세계일주를 시작해서 1836년 8월에 영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약 5 년 간에 걸친 비글호의 여행에서 다윈은 이후 진화론의 기반이 되 었던수많은관찰을할수있었다. 그는 여행 도중에 멸종된 동물의 화석을 발견했고, 인디언 같은 원주민들과 만남을 가졌으며, 노예제의 잔인성을 목격하는 과정에 서 인간 종의 차이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했다. 그는 특히 노예제의 비인간적인측면에대해치를떨었고이를놓고선장인피츠로이와 다투기까지 했다.

1835년 3월에는 대륙은 융기하고 대양은 침강한 다는 가설을 이용해 산호섬의 형성 과정을 설명한 논문을 썼다. 그 는 여행 내내 일기 형식으로 자신의 관찰을 기록했는데, 이는 나중 에유명한‘비글호항해기’(1839)로출판되었다.

다윈의 비글호 여행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그가 1835년 9월에 도착한갈라파고스군도에서의탐험일것이다. 인구에널리회자되는얘기는, 다윈이갈라파고스에서관찰한핀치새와거북이가그의 진화론을 만들어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나중에만들어진‘신화’이다.

갈라파고스군도에서다윈이 머물렀던 시간은 전체 여행에 비해 볼 때에 아주 짧았으며, 다윈의 일기는 그가 그 곳에서 남미 흉내집빠귀새에 많은 관심을 보였지 거북이와 핀치새에는 별관심이 없었음을 예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글호 여행 이후 다윈은 자신의 관찰과 수집한 표본에 대해 숙 고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조류학자인 굴드는 다윈이 갈라파고스에 서 수집한 표본이 실제로 서로 다른 종이며, 이 종들이 갈라파고스 에서 600마일이나 떨어진 남미의 종을 닮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원래는붙어 있었던 지역이 바다에 의해 떨어지면서 한종이 서로 다른 종으로 변했다고 생각하면 이러한차이와 유사성을 설명할 수 있었다. 동물 사육가들이 품종을 선택하고 교배시켜서 새 품종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관찰하면서 종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할 수 있다는 다윈의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그는 이 무렵에 종의 진화가 사다리식이 아니라 나무의 가지치기와 비슷한 방식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인공적인 교배와는 달리 자연의 진화에는 품종을 선택해서 교배를 시켜주는 사육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이런 역 할을하는것일까? 다른말로하자면, 자연에서 진화의 메커니즘은 무엇일까? 이런 고민을 하던 1838년 9월에 다윈은 영국 경제학자 맬서스의‘인구론’을 펼쳐 읽게 되었다. 

맬서스는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세계에서 식량의 완만한 증가에 비해서 인구는 급속하게 증가하고, 결국에는식량이 먹여살릴 수 있는 적은 인구외에 나머지 인구는사멸하는과정을 겪게된다는 비관적인 세계관을 설득력있게 제시했던 사람이었다. 

다윈은 살아남아서 자손을 번식하는 개체 보다  훨씬 더 많은 개체가 자손을 번식하지 못하고 죽어 간다는 점에 주목했고, 이렇게 생존하는 것들과 생존하지 못하는 것들 사이의 차이가 생물 종의 다양한 변이를 만 들어내는 핵심적인 원인이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원인을 ‘자연선택’이라고 개념화했다. 자연선택에 대한 요약본 ‘종의 기원’출판 다윈은 1842년 5월 자신의 진화론의 개요를 담은 짧은 초고를 작성했다. 1844년에는 진화론에 대한 조금 더 긴 논고를 저술했지만, 이를 책으로 출판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종이 진화한다는 생각이 너무 이단적이어서, 사람 들을 완벽하게 설득시킬 수 있는 방대한 양의 증거를 축적하기 전 에는책을 쓰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1859년에 다윈이 급하게‘종의 기원’을 출판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동남아시아에서 동식물을 관찰하던 영국의 생물학자 월러스가 1858년에 다윈에게 편지를 보내서 종의 기원에 대한 자신의 결론을 얘기했는데, 이 결론이 다윈이 그동안 진화에 대해서 했던 생각과 정확히 동일했기 때문이었다.

다윈은 자연 선택에 대해 원래 자신이 계획하던 방대한 저술을 포기하고 이의 요약본을 서둘러 집필해서 1859년 11월 24일‘종의 기원’으로 출판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로서도 엄청난 인기를 누 렸는데, 초판은 첫날 모두 팔려나가서 1860년 1월초에 재판을 찍을 정도였다. 1860년 영국과학진흥회 모임에서는 진화론의 종교적∙도덕적 의미를 놓고 윌버포스주교와 헉슬리가 충돌했고, 이는 다윈의 이론이 낳은 숱한 논쟁의 시발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다윈의 연구와 저술은 인간과 동식물을 포함한 자연계를 바라보는 현대인의 시각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다윈 이후에 사람들은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을 ‘진화’의 렌즈를 통해 바라보기 시작했으며, 놀랄 정도로 복잡하고 정교한 대상도 우연한 진화를 거듭하면서 만들어 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생명에 대한 다윈의 진화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그의 영향은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의 구석구석에 만연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후 동대학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석사∙박사(과학사)학위를 받았다.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과학기술사 철학과에서 테뉴어를 받아 종신교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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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말년기의 찰스 다윈 출생 1809년 2월 12일(1809-02-12)잉글랜드 슈루즈버리 사망 1882년 4월 19일(1882-04-19)(73세)잉글랜드 런던 던하우스 국적 영국 분야 박물학 생물학 출신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교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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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eyqCZvkTJMY

 

https://www.bbc.com/korean/news-49288770

 

찰스 다윈을 죽을 때까지 괴롭힌 '지독한 수수께끼' - BBC News 코리아

약 140여 년 전, 찰스 다윈은 자신의 진화론을 뒤흔드는 “지독한 수수께끼”에 대한 편지를 남겼다. 이후 이 수수께끼는 수 많은 생물학자들의 영감과 동기 부여의 원천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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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동식물 연구가, 찰스 다윈은 자신의 말년을 거대한 수수께끼 앞에서 조바심을 내며 보냈다.

그가 "가장 당황스러운 현상"이라 부른 이 수수께끼는 과학사에 다윈이 남긴 업적인 진화론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한 건 1859년.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진화 이론을 자연선택으로 묘사하며, "자연선택은 극히 미미한 유전적 변화가 보존되고 축적되었을 때만 일어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요컨대, 자연선택이 거대하고 갑작스러운 변화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자연선택이 새로운 생물이 끊임없이 창조되었다는 신념과 생물의 구조가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는 신념을 일소해버릴 것"이라고 쓴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그가 집중했던 식물학 연구가 그에게 독이 됐다. 여기에서 자신의 이론에 대한 의문이 생겨났고, 이 의문은 그가 죽기 직전까지 근 20여 년간 괴롭혔기 때문이다.

이론이 위협받다

다윈의 신념은 진화가 "대약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훗날 이 신념에 위협을 되는 사례가 나타났다. 다윈은 당시의 좌절감을 지인 몇 명에게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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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은 당시의 좌절감을 지인 몇 명에게 전했다.

다윈은 1875년부터 188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편지로 활발하게 토론했다. 이 토론은 이후 한 세기 반이 지나도록 생물학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1879년 다윈은 영국의 큐 왕립식물원의 조셉 후커에게 보낸 편지에 "최근의 지질학적 연대기 내에서 모든 고등 식물들의 급속한 진화는 하나의 '지독한 수수께끼'"라고 썼다.

1879년 7월 22일 자 편지에선 "나는 막 [존] 볼의 글을 읽었는데, 꽤 대담한 주장"이라고 썼다. 분명 다윈이 "고등식물"이라고 표현한 꽃식물(속씨식물, 현화식물이라고도 불린다)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다윈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는 속씨식물의 진화가 매우 빠르고 거대한 규모로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에 충격을 받았다.

지적 정직함

다윈을 좌절감에 빠뜨린 거대한 진화론적 사건은 바로 꽃식물의 기원과 초기 확산과 관련이 있다.

하버드 대학의 유기 진화생물학과 윌리엄 프리드만 교수는 2009년 후커의 편지를 분석해 글을 썼다.

그는 "백악기 중반에 꽃식물이 갑작스럽게 등장하고 그 종류가 엄청난 속도로 다양해진 걸 보고 굉장히 혼란스러워했다"고 말했다.

속씨 식물(꽃식물)은 지구 역사에서 갑자기 등장했다. 이 식물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앞서 존재한 원시 식물로부터 진화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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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식물은 인간의 식단에서 과일과 채소의 형태로 기여했다

프리드만 교수는 "다윈이 훌륭한 건 지적으로 정직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다윈은 편지에서 이 수수께끼가 자신을 미치게 할지언정 은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프리드만 교수는 BBC에 "꽃식물만큼 다윈의 관심을 사로잡은 다른 유기체 집단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모든 식물 중에서 가장 최근 지구에 나타난 게 꽃식물입니다."

그러나 볼의 연구에 따르면, 꽃식물은 갑자기 출연한 뒤 몇 가지 진화 단계를 거치지 않은 것처럼 추정된다.

꽃식물은 1억3000만 년 전에 지구 상에 등장했고, 짧은 시간 안에 35만 종 이상으로 뻗어 나가 식물 세계에서 종이 가장 다양한 집단이 됐다.

프리드만 교수는 "정원을 떠올려 보면 그 안에 있는 식물 대부분이 꽃 식물"이라며 "우리가 먹는 과일과 채소를 생각해봐도 그 대부분이 꽃 식물"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꽃식물이 어떤 방식으로 이렇게 빠르게 분화되고 번성에 성공했는지를 약 200여 년 가까이 추정해왔다.

"데이지 꽃이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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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은 "자연선택은 극히 미미한 유전적 변화가 보존되고 축적되었을 때만 일어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다윈은 꽃식물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빠른 다양화를 두고 그다지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프리드만 교수는 "(꽃식물은) 다윈이 굳게 견지하던 '자연은 대약진하지 않는다'는 개념에 가장 극단적인 예외"라고 말했다.

프리드만 교수는 "꽃식물을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한 가설은 꽃 식물이 '창조됐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꽃식물은 진화의 결과가 아니라, 어느 날 신이 창조했다고 설명하는 거죠. 데이지 꽃이 있어라, 목련 나무가 있어라, 잔디가 있어라…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가 말했다.

1억3000만 년 전 화석을 보면, 꽃식물의 등장과 다양화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빨랐다.

하지만 다윈은 다른 설명을 제시했다.

잃어버린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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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은 HMS 비글을 타고 전 세계를 항해했다

다윈은 조셉 후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아마도 고등 식물(꽃식물)의 기원지는 남반구에 오랫동안 고립된 작은 대륙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이것이 매우 부실한 추측"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그가 1831년부터 1836년까지 HMS 비글호 항해에 참여해 남아메리카 해안을 탐험하고 세계일주를 했던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는 또 다른 가능성도 생각했다. 그는 "지금까지 나온 설명들이 몹시 불완전한 지질학적 기록에 기반하고 있다"고 썼다.

다시 말해서 꽃식물의 진화와 관련된 모든 단계를 보여줄 화석이 있지만, 아직 인류가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프리드만 교수는 "다윈은 수수께끼를 풀진 못했지만 기적을 믿는 것을 거부했다"며  "그는 그 대신 경험적 연구방법, 이성적 사고, 자연의 보편 법칙에 호소했다"고 말했다.

 

여전히 지독한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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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꽃식물은 미스터리로 남았다

다윈은 후커에게 쓴 편지에서 "이 문제가 풀리는 걸 보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프리드만 교수는 "다윈은 그것을 볼 만큼 오래 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사실 지난 30년간 꽤 많은 진전이 있었습니다. 꽃식물의 초기 다양화 단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귀중한 화석을 발굴했습니다."

최근에는 꽃식물이 점진적인 진화를 거쳤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도 속속 나오고 있다.

꽃식물은 약 35만 종으로 식물의 약 90%를 차지한다. 꽃식물종이 없다면 곡물도 없고,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중요한 질문들이 남아 있다. 꽃식물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번성을 하게 됐을까? 꽃이 생겨나는 기본 구조는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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