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아룁니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보살피고 도와주시어 우리 전하(殿下)께서 한없이 위대한 왕위를 이어 받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과 사람이 잘 조화하는 시기를 맞았고, 만물이 소생하는 운수를 만났습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등극하신 첫해부터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나라를 걱정해서 정신을 가다듬고 잘 다스리기를 도모하셨습니다. 모든 임금의 훌륭한 덕을 겸하고자 생각하시어 주공(周公)처럼 앉아서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셨으며, 온갖 정무를 총괄하며 대우(大禹)처럼 촌음(寸陰)을 아끼셨습니다. 여러 차례 좋은 의견을 구하는 전지(傳旨)를 내리심은 우순(虞舜)이 사방 만민(萬民)의 소리를 다 듣고자 한 일과 같고, 여러 차례 견감(蠲減)하고 구휼하는 은전을 베푸심은 한나라 문제가 백성에게 전조(田租)의 반을 경감해 준 일과 같습니다. 재앙의 조짐에 놀라고 두려워하심은 은나라 고종이 자신을 반성해서 덕을 닦은 일을 좇은 것이고, 과거의 규정을 엄히 신칙하심은 주관(周官)의 빈흥(賓興)하는 뜻을 체득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종묘(宗廟)와 원침(園寢)에 공경을 다하고 양궁(兩宮)을 섬기는 데 자식으로서의 직분을 다하셨으니, 지극한 효성은 법이 되었습니다. 인(仁)을 행함에 근본이 있고 덕음(德音)에 하자가 없으니, 만민이 정성을 다하여 우러르며 존경합니다.
그러나 공자가 업적을 이룰 수 있다고 한 기한이 두 번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주(周)나라의 유신(維新)과 같은 공효가 더뎌 교화가 진흥되지 않고 지극한 정치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조정에는 노숙한 덕망을 지녀 나라의 안위를 맡길 만한 자가 적고, 재야에는 학문과 지조가 한 시대의 귀감이 될 만한 자가 없습니다. 불행히도 옛사람의 이른 바 “나라가 텅 비었다.”라는 말에 가깝습니다.
이 때문에 학교가 해이해지고 폐지되어 선비들에게는 선(善)을 으뜸으로 삼는 습속이 없어지고, 군정(軍政)이 무너져 나라에는 활쏠 줄 아는 군졸이 없으며, 병기(兵器)가 무뎌져 못쓰게 되어 창고에는 변란에 대응할 만한 병장기가 없습니다. 조운(漕運)하는 배는 해마다 침몰하여 저축은 날마다 고갈되었다고 하고, 백성들은 일정한 생업이 없어 이리저리 떠돌며 장사나 하고, 인심은 들뜨고 어지러워 역옥(逆獄)이 해마다 일어납니다. 홍수와 가뭄과 전염병이 잇따라 발생하여 고을은 잔패(殘敗)해지고, 산은 헐벗고 못은 말라 버려 모든 물산이 소진되었습니다.
게다가 높은 벼슬아치들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의리가 없으며, 지방 수령들은 임금의 근심을 분담하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위로는 경사(卿士)와 대부(大夫)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백성과 하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신을 이롭게 할 방도만 말하면서 서로 원수처럼 흘겨보니, 비록 한나라나 당(唐)나라 말기의 폐단도 지금보다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스러운 조정의 음식을 먹고 성스러운 시대의 옷을 입으면서 집안을 보전하고 자손을 기른 자들 가운데 이런 말로 전하를 위해 어전(御前)에서 곧장 아뢰는 자가 한 사람도 없으니, 신(臣)은 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오늘을 위해 말하는 자가 만일 일만을 지적해서 일만을 논할 뿐이라면, 비록 하루에 만 마디씩 말을 하더라도 진실로 나라에 보탬이 없습니다. 만약 근본으로 돌아가 논한다면 큰 요체는 여섯 가지입니다. 신이 그 조목들을 두루 거론할까 합니다. 삼가 바라오니 전하께서는 조금이나마 살펴 주소서.
첫째, 전하의 뜻을 세우고 전하의 학문을 밝히는 일입니다. 무릇 사람에게 있는 것 중에서 뜻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뜻이 있으면 공업(功業)을 이룰 수 있지만 뜻이 없으면 공업이 무너집니다. 뜻이 크면 공업도 크지만 뜻이 작으면 공업도 작습니다. 만일 뜻이 있으나 확립하지 못한다면 뜻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뜻이 도(道)에 어긋나고 망녕되게 크다면 도리어 작은 것만 못합니다. 사대부와 일반 백성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으뜸 존재가 될 운을 받아 성인이 될 지위에 계시면서 만방(萬方)을 통솔하고 온갖 정무를 총괄하는 임금에게는 어떠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뜻을 세워야 하겠습니까. 바로 요순처럼 되기를 스스로 기약할 뿐입니다. 만일 요순을 아름답지 않다고 여긴다면 그만이지만, 만일 요순을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선한 성인이라고 여긴다면, 우리 전하께서 스스로 기약할 대상은 요순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우왕(禹王)과 탕왕(湯王) 이하는 응당 우선 잠시 제쳐 두는 대상으로 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신 자질과 똑같이 옳게 여기는 성품을 바탕으로 의연히 스스로 분발하여 성인이 되는 것으로 목표를 삼으십시오. 요순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고, 요순의 말로 말하고, 요순의 행실로 행동해서 조금이라도 요순에 미치지 못한다면 스스로 부족다고 여겨야지, 감히 스스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충분히 순 임금처럼 되었다면 오히려 요 임금만 못할까 걱정해야 하고, 이미 충분히 요 임금처럼 되었다면 오히려 하늘만 못할까 걱정해야 합니다. 맹렬히 반성하고 곧장 앞으로 나아가 마음에 새겨 뜻을 확립하고, 의심하거나 꺾이지 않으면서 순수함 또한 그치지 않는다면 이런 임금은 요순이 될 따름입니다.
요순에 뜻을 둔다면, 그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은나라 삼종(三宗)과 주나라 성왕(成王)이나 강왕(康王) 수준의 임금이 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만일 한나라 고조(高祖)나 당나라 태종(太宗)에 뜻을 둔다면, 그에 미치더라도 한나라 고조나 당나라 태종 수준의 임금이 되는 것에 불과하고, 그에 미치지 못한다면 한나라와 당나라의 평범한 임금보다도 못한 수준의 임금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이 서로 헐뜯으면서 “네 인품은 한나라와 당나라의 평범한 임금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하면 성내고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스스로 기약할 즈음에 이르러서는 굳이 제1등을 버리고 어찌하여 제2등이나 제3등을 취한단 말입니까. 이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소견이 비루하고 뜻이 넓고 크지 않아서입니다. 그렇지만 예로부터 제왕은 더할 나위 없이 높은 지위에 처한 탓에, 칭찬하는 말로 모두 요순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러나 반성하는 배움이 없어서 이미 요순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스스로 믿게 되어, 마음이 안일해지고 뜻이 해이해져 스스로 성인이라고 여기면서 간언(諫言)을 거절했습니다. 그리하여 작게는 정사(政事)를 그르치고 크게는 나라를 망치게 되었으니, 이는 요순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도리어 해가 되었던 것입니다. 어째서겠습니까. 단지 요순의 이름이 아름다운 줄만 알고 요순이 요순이 된 이유는 알지 못해서였습니다. 저 요순이라는 분들은 자신이 성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이미 공경스럽고 밝았으며 깊고 지혜로웠지만 오히려 빠뜨림이 있을까 두려워했습니다. 이미 백성에게 널리 베풀어 많은 사람을 구제했지만 오히려 미진했을까 걱정했습니다. 이로써 천지와 더불어 그 위대함을 같이했으니, 사해(四海)의 온 백성이 존경하고 어버이처럼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할 수 있었던 까닭은 성인의 학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학문은 문장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요순 이후로 주공과 공자에까지 전해져 경서(經書)에 실린 내용이 이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주자(朱子)가 조정으로 가는 길목에서 기다렸다가 말하기를 “성의(誠意)ㆍ정심(正心)의 설(說)은 황상(皇上)께서 듣는 데 싫증내시니 다시는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대개 나라의 통상적인 정사는 형법ㆍ군대ㆍ부역 따위에만 있으니, 성의ㆍ정심의 설은 등한시하고 소홀히 하여 관여하고 비쳐봄이 없는 듯합니다. 이 때문에 세상의 임금들은 매번 고루한 선비의 세상 물정 모르는 이야기로만 여겨, 잘 생각하거나 듣지 않았으니, 이것이 잘 다스려진 때는 늘 적고 어지러운 때가 항상 많았던 이유입니다.
대저 성의ㆍ정심의 설은 바로 요 임금의 이른 바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라는 말이고, 순 임금의 이른 바 “정밀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라.”라는 말입니다. 우 임금의 이른 바 “당신의 마음이 그치는 바에 편안히 하여 기미를 생각하고 편히 할 것을 생각하신다.”라는 말이고, 탕왕(湯王)의 이른 바 “순히 하여 떳떳한 성(性)을 소유했으니, 능히 그 도(道)에 편안하게 한다.”라는 말입니다. 문왕의 이른 바 “경(敬)을 계속하여 밝히셨도다.”라는 말이며, 무왕의 이른 바 “네 마음을 의심하지 말라.”라는 말입니다. 만일 요ㆍ순ㆍ우ㆍ탕ㆍ문ㆍ무가 천하를 다스리는 도(道)를 몰랐다고 얘기한다면 그만이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제(二帝) 삼왕(三王)을 일컬어 그 누구도 더 뛰어날 수 없다고 칭하는데, 이들이 서로 전수한 신묘한 비결은 단지 이 몇 구절뿐입니다. 그러므로 분명 현실에 맞지 않는, 공효가 없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공자께서 구경(九經)을 논하면서 ‘성(誠)을 생각함〔思誠〕’을 그 근본으로 삼았고, 증자(曾子)는 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에 대해 풀이하면서 성의ㆍ정심을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안자(顔子)가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를 묻자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에 종사하라고 가르쳐 줬고, 자사(子思)는 위육(位育)을 미루어서 계구(戒懼)와 신독(愼獨)을 공부로 삼았습니다. 맹자는 왕도(王道)를 말하면서 방심(放心)을 찾고 선성(善性)을 회복하는 것을 가르침의 요지로 삼았습니다. 만일 공자ㆍ맹자ㆍ증자ㆍ자사가 천하를 다스리는 이치에 통달하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그만이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자와 맹자가 당대에 지위를 얻지 못한 일을 애석하게 여깁니다. 서로 이어온 깊은 뜻은 다시 다른 학술이 없으니, 분명 현실에 맞지 않는 후세 사람들을 속이는 말이 아닙니다.
옛적에는 성인(聖人)을 반드시 군사(君師)로 일컬었는데, 군(君)은 지위로써 이름 한 것이고 사(師)는 학문으로써 칭한 것입니다. 군주의 지위에 있으면서 이러한 학문이 있다면 곧 이른바 “하늘이 내신 군사”이자 훌륭한 제왕이 될 것입니다. 만일 한갓 군주의 지위만 있고 이런 학문이 없다고 한다면 한당(漢唐) 이후가 모두 여기에 해당합니다. 하늘의 뜻을 이어 표준을 세운 것에 대하여 거짓이라고 여긴다면 군주의 지위 또한 보전할 수 없으니, 매우 두려워할 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두려워하시어, 뜻을 세우는데 요순으로서 스스로 기약하시고, 학문을 밝히는데 공자와 맹자를 스승으로 삼으신다면, 종묘사직에 매우 다행이고 백성들에게 무척 다행일 것입니다.
둘째, 보필할 사람을 가려서 어질고 재능 있는 인물을 기용하는 일입니다. “임금은 어진 신하가 아니면 다스릴 수 없다.”라고 했으니, 크나큰 천하와 수많은 백성들은 한 사람이 혼자서 다스릴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이 때문에 우(禹)와 고요(皐陶)가 아니었다면 요순도 태평한 정치를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이 아니었다면 탕왕이나 문왕도 형벌이 필요 없는 정치를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억만년토록 무궁한 아름다움을 이룰 수 있도록, 독실하게 돕고 여러 가지로 보좌해서 우리 임금의 군대를 기르는 일은 모두 보필하는 신하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른바 “보필하는 신하”는 삼공(三公)ㆍ삼고(三孤)ㆍ육경(六卿)이 바로 그들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요순의 정치에 뜻을 두셨다면, 보필하는 신하들이 도와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전하께서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배우고자 하신다면 보필하는 신하들이 흉금을 털어놓고 성의껏 인도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야 임금님의 덕이 날로 새로워지는 공부가 있으며, 공업(功業)에도 장구하고 원대한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보필은 관직이 아니라 제대로 된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임금의 나쁜 점에 영합하여 총애를 굳힌 자는 나라를 망하게 하고, 남의 공적을 시기하여 원망을 기르는 자는 나라를 어지럽히며, 떼 지어 나아가고 떼 지어 물러가는 자는 정사를 그르칩니다. 이 때문에 옛날 성왕은 보필할 사람을 등용할 적에 매우 어려워하고 신중하게 했습니다. 밤낮으로 생각하면서 자리를 비워 놓고 기다리며 여기저기 물어본 것은 오직 재상 한 사람을 얻는 것을 임무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전(傳)에 “임금의 도리는 재상을 가려 뽑는 데에 그칠 뿐이다.”라고 했으니,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의 성왕(聖王)들이 훌륭한 보필을 얻었던 일을 살펴보면 진실로 그러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요순이 되기를 기약한 임금이 아니라면, 요순의 도로 보필하는 신하를 등용할 수 없습니다. 만일 공자와 맹자를 스승으로 삼는 임금이 아니라면, 공자와 맹자의 학문으로 보필하는 신하를 참으로 나오게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요순의 도를 즐기는 신하는 그 임금을 요순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배운 신하는 그 임금에게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깨우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바로 이른바 “같은 부류의 기운이 서로 찾고, 서로 만나게 되면 더욱더 빛난다.”라는 말이고, 《주역》 〈건괘(乾卦)〉의 구이(九二)ㆍ구오(九五)의 효사(爻辭)에 모두 “대인을 만나봄이 이롭다.〔利見大人〕”라고 한 상(象)이 있는 까닭입니다.
이 때문에 참다운 보필을 얻고자 함 역시 전하께서 스스로 기약하심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서경》 〈주서(周書)〉에 “관원은 반드시 구비함이 아니니, 오직 그러한 사람이 있어야 임명한다.”라고 했으니, 삼공(三公)과 육경(六卿)의 관직 역시 많습니다. 만일 적임자를 구하지 못했는데도 구차하게 자리만을 채우고자 한다면, 장구령(張九齡)과 한휴(韓休)를 등용하면서 이임보(李林甫)를 동평장사(同平章事)로 삼고, 한기(韓琦)와 부필(富弼)을 임명하면서 왕안석(王安石)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삼는 격이니, 음(陰) 하나가 여러 양(陽)을 망가뜨려 끝내 어지러워져 망하고야 맙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임금들은 관원을 반드시 채우려고 하지 않았으니, 인재 등용을 매우 신중하게 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요순 시대보다 융성한 적이 없었는데도 백우(伯禹 우(禹))가 백규(百揆)로서 사공(司空)을 겸직했고, 또한 주나라보다 융성한 적이 없었는데도 주공(周公)이 태부(大傅)로서 총재(冢宰)의 직책을 수행했으니, 이것은 정치와 교화에서 후세 사람들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공경(公卿)의 자리가 십여 석이나 되는 경우에는 적임자를 구하여 갖추기가 진실로 어렵습니다. 게다가 의정부(議政府)의 정승(政丞)이나 육조(六曹)의 판서(判書) 자리가 모두 역임하는 관직이 되어, 사람마다 품계에 따라 두루 거치니, 유사(有司 담당 관원)의 직책이 벼슬한 날짜를 계산해서 승진하는 자리이겠습니까. 구관(九官)의 아홉 담당자들은 순 임금이 세상을 마칠 때까지 50년 동안 보필했고, 다스리는 신하 열 명은 무왕과 성왕(成王)이 왕위를 마칠 때까지 50년 동안 보필했으니, 일컬을 만한 덕이 있고 남보다 뛰어난 재주가 있어서 각각 그 직책을 오래도록 맡아 함께 보필하여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고요(皐陶)가 백규(百揆)가 되지 못했고, 보석(保奭)이 총재(冢宰)가 되지 못했지만, 순 임금이나 주나라의 이름난 신하가 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습니다. 순 임금과 무왕ㆍ성왕의 다스림은 모든 왕 가운데서 탁월했으니, 임금과 신하의 훌륭한 명성이 함께 드러나고 무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은 그렇지 못하니, 2품의 직위에 오르자마자 반드시 육조 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좌우찬성(左右贊成)에 오르자마자 반드시 정승의 지위에 오르고자 합니다. 현부(賢否)를 따지지 않고 돌아가면서 맡아 서로 교대하게 하기 때문에, 현직(現職)과 산직(散職) 종2품 아경(亞卿) 이상을 통틀어 계산하면, 현재 남아 있는 사람은 거의 2백여 명에 이릅니다. 진실로 밝은 시대의 인재를 진흥시키는 교화가 과연 순 임금 때나 주나라 때보다 더 뛰어나서 그러한지 감히 모르겠습니다. 이 2백 명 모두 요순 시대의 어진 신하 28명이나 주나라의 무왕을 보필하던 훌륭한 신하 열 명과 같은 수준이 될 리가 만무합니다. 이러한 상태로 지극한 정치를 바란다면 참으로 뒤로 물러나면서 앞으로 나가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역대 임금이 융성하게 다스리던 시기에, 선정신(先正臣)에게 명하여 독실하게 보필토록 한 일은 오히려 옛 전례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때문에 당시에 주나라와 견줄 만한 시절이라고 칭했습니다. 《주역》 〈태괘(泰卦) 초구(初九)〉에 “띠풀의 엉켜 있는 뿌리를 뽑는 것과 같이 동류와 함께 가니, 길(吉)하다.〔拔茅茹 以其彙征吉〕”라고 했습니다. 만일 위에서 엉켜 있는 뿌리를 뽑는 조치가 없으면, 아래로는 동류와 같이 가는 운수가 없어져서 보필하는 사람은 도(道)를 제대로 펼 수 없고 모든 업적이 쌓여 성과를 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고요(皐陶)가 구관(九官)의 명령을 받은 뒤에도 인재 확보의 계책을 진달한 이유이며, 은나라 왕이 신(莘) 땅에서 들판의 노인을 초빙한 뒤에도 인재를 널리 구하는 방도를 모두 강구했던 이유입니다. 안으로는 온갖 관직과 관사로부터 밖으로는 수(守)ㆍ위(尉)ㆍ승(丞)ㆍ이(吏)에 이르기까지, 하나라도 제대로 된 사람을 구하지 못하면 지극한 정치를 이룰 수 없으니, 만일 평소에 인재를 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쓰임에 대비하겠습니까.
천하에 어진 인재가 없는 때는 없습니다. 대비년(大比年 식년(式年))마다 관찰사(觀察使)와 절도사(節度使)부터 아래로 군현의 수령에 이르기까지, 문무(文武)에 구애받지 말고 문벌에 한정하지 말며 덕행을 우선으로 하고 재능을 다음으로 해서 각기 한 사람씩 천거하게 하여, 이조(吏曹)에서 이를 모아 기록하되, 과거 합격자 명단처럼 추천한 사람의 이름을 각각 기입하게 하십시오. 이들 가운데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는 태학(太學 성균관)에 소속시키고, 유생(儒生)은 사학(四學)에 분속시키고, 무사(武士)는 군(軍)의 각 위(衛)에 분속시키십시오.
그리하여 한(漢)나라 때 대조(待詔)의 규례와 같이해서, 형식적인 법문(法文)만 갖추도록 하지 말고 실제로 차례대로 관원 임명 후보자로 추천해서 여섯 번의 고과(考課)를 두루 시험해야 합니다. 만일 능력을 속인 사람이 있으면 추천한 사람을 벌주고, 추천한 사람이 이미 죽은 경우에는 그 벌로 관직을 추탈(追奪)해야 합니다. 만일 추천된 사람이 어질고 재능이 있다면 그 역량에 따라 추천한 사람을 상 주되 한결같이 옛날에 상등(上等)의 상을 받는 것처럼 하십시오. 경관(京官)의 경우에는 6품 이상은 각기 한 사람씩 추천하되 대략 당나라 사람들이 대신할 자를 천거하던 규례처럼 능력 여부를 시험하여 추천한 사람을 상 주거나 벌준다면, 몇십 년이 채 되지 않아 뛰어난 인재가 모두 발탁되어 모든 직책에 적임자가 없는 곳이 없어서, 구덕(九德)을 갖춘 사람들이 모두 나랏일을 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훌륭한 정치를 이루는 근본은 전적으로 선비를 뽑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선비를 뽑는 방법을 전적으로 과거에만 의존한다면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의 정치라도 오히려 이룰 수 없으니, 하물며 요순 시대와 하ㆍ은ㆍ주 삼대의 훌륭한 정치를 바랄 수나 있겠습니까.
과거제도를 그대로 두거나 개혁하는 문제는 임금 스스로 정치를 하는 데 아무런 해악이 없는 듯합니다. 그렇지만 매번 개혁하려고 하다가 고치지 못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과거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말은 반드시 삼대(三代)를 이야기하는 입에서 나오지만, 임금의 뜻은 매번 자기 마음대로 하고픈 욕망이 절실하므로, 훌륭한 정치를 원하는 임금의 마음이 저절로 해이해지고, 훌륭한 정치를 이야기하는 신하도 스스로 소원해지기 때문입니다. 신하의 경우 불초한 자들이 벼슬길에 나아가는 방도로 또한 과거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개혁을 교묘하게 저지합니다. 수천 수백 년 동안 습속이 되어 개혁할 수 없고 폐단이 고질이 되어 바로잡을 수 없으니, 매우 개탄할 만합니다. 정이천(程伊川)이 만든 학제(學制)는 이미 삼대의 제도를 순전히 따른 것이 아니고, 실로 옛것을 참작하여 당시에 통용될 수 있는 아름다운 법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역시 시행할 수 없었으니, 과거는 오늘날 병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체(文體)는 실로 정치와 교화의 그림자이고 세상 풍속의 정화(精華)이니, 《서경》의 전고(典誥)나 《시경》의 풍아(風雅)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과거 시험으로 인재를 뽑을 때, 문체가 간명하고 엄중하며 문기(文氣)가 온전하면서도 논리가 뛰어나고 아름다워 문채를 이룬 글은 덕을 갖춘 사람의 말에 가까우니, 그런 글을 짓는 사람은 10명 중에 3명 정도 얻을 수 있습니다. 문체가 명백하고 매우 절실하며 실정을 곡진히 표현하고 기축(機軸)이 은밀한 글은 재능 있는 선비의 말에 가까우니, 그런 글을 짓는 사람은 10명 중에 5명 정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나머지 경박하고 화려하며 슬퍼하고 원망하는 문체는 모두 자신을 망치고 풍속을 어지럽히는 사람의 글이니, 위에 있는 사람이 응당 통렬히 배척하고 엄하게 금지시켜야 합니다. 만일 합격자 명단에 훌륭한 인재를 얻었는가의 여부로 고시관(考試官)에 대한 상벌을 엄격히 하고, 문체가 법도와 같지 않은 사람을 그때마다 방목(榜目)에서 삭제한다면, 과거제도 또한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얻는 하나의 방도가 될 수 있습니다. 단지 법의 시행이 성실한지 성실하지 않은지에 달렸을 뿐입니다.
중종(中宗) 때의 천거제(薦擧制)는 옛 제도에 가장 가까웠습니다. 남곤(南袞)과 심정(沈貞) 같은 흉악한 무리가 싫어했으니, 참으로 좋은 제도였음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역대에 임시로 설치한 폐단 많은 정치제도 가운데에도 더러는 그대로 시행하면서 바꾸지 않은 것이 있는데, 천거제만은 한 번 폐지된 뒤에 복구되지 못했습니다. 이는 삼대의 법이 폐지되어 복구하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중종 대 초기는 삼대에 가까웠음을 또한 미루어 알 수 있으니, 매우 애석하게 여길 만합니다. 그러나 천거한 사람에 대한 상벌(賞罰)이 엄하지 않으면, 비록 천거제일지라도 더욱 시행해서는 안 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깊이 생각하고 두려워하시어 보필할 신하를 얻는 일을 급선무로 여기시고 어질고 재능 있는 사람을 뽑는 데 힘쓰신다면, 종묘사직에 매우 다행이고 백성들에게 무척 다행일 것입니다.
셋째, 염치(廉恥)를 장려하고 기강을 떨치는 일입니다. 전(傳)에 “예(禮)ㆍ의(義)ㆍ염(廉)ㆍ치(恥)는 나라의 사유(四維 네 가지 강령)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의가 없으면 나라가 위태롭고, 의리가 없으면 나라가 어지럽고, 청렴이 없으면 나라가 부패하고, 부끄러움이 없으면 나라가 망합니다. 오늘날 온 나라의 벼슬아치와 일반 백성 중에 예ㆍ의ㆍ염ㆍ치가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에게 예ㆍ의ㆍ염ㆍ치가 없으면 몸이 반드시 위태로워지고 망하며, 온 나라 사람이 거의 다 위태로워지고 망할 것이니, 누구와 더불어 나라가 존재하겠습니까. 옛사람이 예ㆍ의ㆍ염ㆍ치를 나라의 사유로 삼은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지금 나라의 형세는 병을 오랫동안 앓은 사람과 같으니, 오장육부ㆍ근골ㆍ순환계가 하나라도 병들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가래가 끓어 목구멍이 막혀서 먹고 마시는 일을 모두 그만두어 사지가 차갑고 육맥(六脈)이 모두 끊어진 상태입니다. 단지 병의 열기가 들끓어 콧숨이 끊어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아무리 명의(名醫)라고 하더라도 편작(扁鵲)처럼 마른 뼈에 살이 돋아나게 할 재주가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해볼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 가생(賈生 가의(賈誼))은 한나라의 형세가 쌓아 놓은 땔감 아래에 불을 놓는 것과 같아 통곡할 만하다고 문제(文帝)에게 상소했으나, 한나라가 당시에 아직 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들은 더러 그의 말이 지나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가의가 아뢴 말을 문제가 대체로 모두 시행했기 때문에 후원(後元)의 정치가 형벌을 시행하지 않을 정도에 이르렀으니, 쌓아 놓은 땔감 아래의 불이 크게 번지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만일 가의가 한번 통곡할 만하다고 상소한 내용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문제가 참으로 알았다면, 경제(景帝) 또한 칠국(七國)의 변란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승상부(丞相府)에서 대궐에서 예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신하를 격문으로 불러 벌준 일, 군영 안에서는 장군의 명령만을 따르게 한 일, 총애하는 부인들이 검정색 거친 명주옷만을 입은 일, 태창(太倉)의 곡식이 붉게 썩어난 일 등은 나라가 4백 년 동안 지탱하는 토대가 되었으니, 분명 가태부(賈太傅 가의)가 눈물을 흘리고 크게 탄식한 효과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만일 가태부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형세를 논한다면, 아마도 통곡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어서 피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대체로 예ㆍ의ㆍ염ㆍ치 네 가지를 마음에 간직하고만 있을 때에는 이중에 부끄러움이 가장 크다고 하겠지만, 행동으로 나타낼 때는 예가 근본이 됩니다.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옳지 못한 행동을 부끄러워하게 한다면, 비록 다스리지 않고자 해도 잘 다스려질 것입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알게 하면 예에 맞게 살아갈 것입니다.
예라는 것은 꿇어앉거나 절하고 읍하는 행동을 말함이 아닙니다. 천하의 사물은 크고 작음, 높고 낮음, 귀하고 천함, 많고 적음, 사치하고 검소함에 모두 자연스러운 절문(節文)과 등급(等級)이 있습니다. 그 등급과 절문을 잃지 않으면 순순히 차례가 생기지만, 그 등급과 절문을 잃게 되면 차례가 없어 어지러워집니다. 필부(匹夫)의 몸이나 작은 집을 다스리는 일도 그 등급과 절문을 얻으면 보존되고, 잃으면 망하고 맙니다. 하물며 한 나라에서겠습니까.
《주역》 〈이괘(履卦) 단(彖)〉에 “위에 하늘이 있고 아래에 연못이 있는 것이 이(履)이니, 군자가 이로써 위아래를 분별하여 백성의 마음을 안정시킨다.〔上天下澤履 君子以 辨上下 定民志〕”라고 했습니다. 위에는 하늘이 있고 아래에는 연못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등급이며 능멸할 수 없는 이치입니다. 때문에 “이(履)로써 행한다.”라고 했습니다. 예는 만물의 자연스러운 등급을 통해 분별하고 밝혀서, 능멸해서는 안 되는 절문을 제정한 것입니다. 그런 뒤에야 백성의 마음이 비로소 안정되니, 백성의 마음이 안정되어야 부끄러움이 생기고, 부끄러움이 생기면 하지 않는 바가 있고, 백성에게 하지 않는 바가 있으면 팔짱을 끼고 있더라도 정치와 교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백성의 뜻이 안정되지 않은 정도가 지금보다 심한 적이 없습니다. 신분의 구별이 문란해져 마음가짐이 정도에 넘치며, 분수에 넘치는 것을 망녕되이 바라고, 산만하고 음일(淫溢)하며, 사양하는 마음이 전혀 없고, 겸손한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조정에는 덕 있는 이에게 겸양하는 습속이 없기 때문에 여러 관직에 모두 적임자가 임명되지 않고, 마을에는 자신을 낮추는 풍속이 없기 때문에 위에서 내리는 명령을 모두 등집니다. 본분을 어기고 윗사람을 범하여 불의(不義)가 풍속을 이루고, 함부로 나아가면서 만족할 줄 몰라 염치가 전부 사라졌습니다. 예절도 없고 의리도 없어 수치심이 완전히 없어지니, 하인들이 경(卿)과 사대부(士大夫)의 예절을 두루 행하고, 포구의 장사꾼들이 궁궐과 관청의 복식과 음식을 몰래 본뜨고 있습니다. 동쪽 우리나라 전체가 홍수가 난 듯 역류하면서 거센 물결이 산을 삼켜 버릴 기세라 막을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진언하는 사람의 말에 “사유가 펼쳐지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모두 선비들이 늘 하는 말로 여겨 새겨듣지 않습니다.
또 “기강이 해이하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모두 위기가 장차 닥칠 것을 알면서도, 사유가 기강의 본체라는 사실은 도무지 모릅니다. 사유는 인물ㆍ정형(政刑)ㆍ법령ㆍ재물을 모두 통괄하니, 크게는 벼리가 되고 작게는 벼릿줄이 되어, 세세하게는 언어ㆍ의복ㆍ음식ㆍ거처ㆍ도구에 이르기까지 통하여 통섭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데 사유가 이미 없어진다면 크고 작은 일들이 뒤죽박죽되어 마치 낡고 구멍이 나 못쓰게 된 그물처럼 됩니다. 사람들이 각자 자신만을 위해 도모한다면 그들의 마음은 억만 가지가 되어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행민(倖民)이 되고, 온 나라의 재물이 모두 뇌물로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로는 조정의 백관(百官)으로부터 아래로는 마을의 책임자에 이르기까지, 공정한 방법으로 자리를 얻는 사람은 한 명도 없게 될 것입니다. 크게는 군부(軍賦)와 형법(刑法)으로부터 작게는 송사(訟事)와 추문(追問)에 이르기까지, 공정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한 가지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소의 관원들은 안일하게 지내며 예사로운 일로 봅니다.
조정에서 벼슬하는 신하들은 관직의 높고 낮음, 바치는 물품의 많고 적음, 음식의 등급과 음란하고 외설스러운 농담으로 묘당(廟堂)의 방략을 삼습니다. 조금이라도 염치가 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음풍농월하는 단율(短律)을 짓고, 산의 경치를 구경하고, 화초와 나무를 모으고, 풍수지리를 이야기하는 것을 고상하게 여깁니다. 혹 나라의 걱정이나 백성의 고통을 말끝에 조금이라도 드러내는 자는 세상 물정에 어두운 시골 사람으로 지목하고, 굶주려 뼈만 앙상하게 될 상이라고 배척하면서 사람 축에 끼워 주지도 않습니다.
이 때문에 전하께서 백성을 가엽게 여기는 윤음(綸音)을 해마다 내리시지만 백성들은 여태까지 실제 혜택을 조금도 입지 못했습니다. 민간에서 변괴가 나타나고,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기강을 위반하고, 하늘의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는 일이 하루가 멀다 하지 않고 발생하는데도, 중앙과 지방 관아의 장관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전혀 알지 못하고, 온 나라 안에 귀천ㆍ빈부ㆍ노소ㆍ부자ㆍ형제ㆍ남녀ㆍ노주(奴主)에 이르기까지 일제히 질서가 무너져 등급이 완전히 없어졌으니, 이것이 바로 앞서 말씀드린 육맥(六脉)이 모두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럭저럭 미봉해 시일을 보내고 곧바로 다 무너져 버리지 않는 것은 단지 덕을 쌓은 역대 임금들의 혼령께서 부지(扶持)해 준 덕분일 따름입니다. 나라가 붕괴하고 와해되는 지경을 발돋움하고 기다릴 만하니, 어찌 마음이 매우 걱정스럽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두려워하시어, 염치를 장려하는 일을 급선무로 여기시고, 기강을 떨치는 데 힘쓰신다면, 종묘사직에 매우 다행이고 백성들에게 무척 다행일 것입니다.
넷째, 선비들의 습속을 바로잡고 서로 앞다투어 출세하려는 습관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선비는 나라의 원기(元氣)라고 일렀으니, 원기란 천지의 바른 기운입니다. 선비는 천지의 바른 기운을 받고 태어나, 천지의 바른 이치를 체득하여 천지의 바른 도리를 실천하고, 천지의 바른 일을 말합니다. 임금은 선비를 통하여 사방의 눈을 밝히고 사방의 총명함을 통하게 합니다. 재상은 선비를 등용해 하늘의 일을 대신하여 모든 업적을 빛나게 이룹니다. 이 때문에 선비를 원기라고 하니, 진실로 그러합니다.
사장(詞章)의 학문이 성행하여 선비의 이름이 이미 더럽혀졌습니다. 문장이나 구절을 따다가 글을 지어 시속(時俗)에 뽐내며 화려함을 다투는 풍습이 성행함에 이르러서는, 선비의 실제가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끝내 지금에 이르러서는 선비의 풍습이 아주 나쁘게 바뀌었습니다. 시골의 향교(鄕校)나 서원(書院)의 선비들은 글귀나 따다가 글을 짓는 작은 재주도 오히려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서 떼 지어 몰려다니며 먹고 마시며 서로 반목하는 짓만을 일삼습니다. 과거 시험공부를 하는 선비들은 먹을 뒤섞고 글귀를 엮어 새나 귀뚜라미가 조잘대듯 글을 짓습니다. 이른바 ‘과거 문장’은 이미 아주 말할 것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경솔하고 천박하여 염치를 무릅쓰고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면서, 심지어는 글을 팔고 글씨를 파는 일까지 모두 능사로 삼습니다.
태학의 상재(上齋)에서 공부하는 선비들도 과거 시험에 물든 지 오래되어 실질적인 학문이 본디부터 없으면서, 나라에서 지급하는 양식이나 축내며 놀러 다니고 또한 나가서 권세 있는 자에게 아첨합니다. 한 해를 마치도록 책 한 권도 읽지 않고, 종일토록 의리(義理)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은 채 무리지어 그럭저럭 살면서 음식과 물품만을 축내고 있습니다. 사학(四學)에서 명경과(明經科)를 준비하는 선비들도 경서의 뜻에는 통달하지 못하고 구두만을 외워 구차하고 용렬하기에 더욱 허망합니다.
맹자는 어렸을 때 학교 옆으로 이사하여 읍(揖)하고 사양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예절을 배웠고, 곽태(郭泰)는 각지를 유력(遊歷)하며 사람들에게 배우기를 권장하여 모두 이름난 선비가 되게 했으니, 전국 시대와 한나라 말기의 학문도 오히려 오늘날처럼 형편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선비라고 하는 사람들은 도리어 나라를 앓게 하는 현하(痃瘕)가 되고 풍속을 앓게 하는 담화(痰火)가 되고 있으니, 원기가 될 만한 점이 어디에 남아 있겠습니까. 원기가 이미 이처럼 남김없이 쇠잔해졌으니, 나라의 병세가 육맥이 모두 끊어지는 상태에 이르렀음은 조금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선비의 습속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서로 앞다투어 출세하려는 풍속이 빌미가 되었습니다. 대체로 염치가 모두 없어지고 온 세상이 조급하게 출세를 향해 달려가면서부터, 사람들은 제 분수를 편안히 지키며 운명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없어졌고, 선비들은 자기를 수양하는 학문과 자신의 본분을 지키려는 뜻도 없어졌습니다. 권세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을 찾아가 뵙기를 구하는 일을 옛날에는 선비들의 허물로 여겼으나, 지금은 재상을 두루 찾아가 뵙는 것을 최고로 여깁니다. 관아에 출입하는 것에 대해 나라에 금령(禁令)이 있었으나 지금은 관장(官長)과 교분을 맺지 못한 것을 큰 수치로 여깁니다. 그리하여 뇌물이 분주히 길을 오가고, 명함이 대문 앞에서 마구 오가며, 글 잘 짓는 자는 글 짓는 일을 전담하고, 글씨 잘 쓰는 자는 글씨를 써서 바치고, 운명을 점치는 자는 복록(福祿)을 누릴 것이라며 기리고, 묘지를 보는 자는 명당을 찾아 바치니, 재상들의 청탁 편지가 성안에 어지럽게 오가고, 벼슬을 구하려는 선비들은 발이 부르트도록 도성 안을 바삐 왕래합니다.
이에 향리(鄕吏), 역리(驛吏), 포구의 부자〔浦豪〕, 점장(店長), 승려, 군교(軍校)에 이르기까지, 지름길을 다투어 찾고 비밀스런 통로를 서로 뚫어서, 바라던 일이 성취되면 출세하여 이익을 도모하고, 조금이라도 제 술책이 통하면 마을에서 자랑하고 교만을 부립니다. 그 그늘 아래에 있으며 눈을 휘둥그렇게 뜬 사람들 또한 모두 침을 흘리며 발돋움하고 바라보면서 감탄하고 부러워합니다. 마침내 언덕에는 안정된 백성이 없고 들에는 진정한 풍속이 없어졌습니다. 만일 이러한 풍습을 변혁시키지 않는다면 요ㆍ순일지라도 교화를 베풀 수 없습니다. 만고에 백성들의 풍습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고서도 망하지 않은 나라는 아직 없었으니, 이는 소소한 법의 폐단이나 정치의 허점에 견줄 것이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두려워하시어 선비들의 습속을 바로잡는 일을 급선무로 여기시고, 서로 앞다투어 출세하려는 습관을 억제하는 데 힘쓰신다면, 종묘사직에 매우 다행이고 백성들에게 무척 다행일 것입니다.
다섯째, 뇌물을 탐하는 행위를 단속하고 사치를 금하는 일입니다. 재물을 탐하는 관리는 나라의 좀입니다. 좀이 많으면 나무가 죽고, 재물을 탐하는 관리가 많으면 나라가 망합니다. 탐관오리는 위로 나라를 훔치고 아래로 백성을 벗겨 먹습니다. 백성을 벗겨 먹는 폐해는 나라를 훔치는 것보다 더 심합니다. 나라를 훔치는 경우에는 나라가 오히려 백성에 의지하여 소생할 수 있지만, 백성을 벗겨 먹는 짓을 그만두지 않으면 백성이 망하고 맙니다. 백성이 망하면 나라가 비록 홀로 존재하고자 하더라도 누구와 더불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경전에서 말하기를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들이는 신하를 둘 바에야 차라리 도적질하는 신하를 두라.”라고 했으니, 이치가 참으로 그러합니다. 평소 옛날 역사를 살펴보면, 재물을 탐하는 관리 한 명도 오히려 나라를 어지럽히기에 충분한데, 하물며 열 명, 백 명에 달하는 경우이겠습니까. 여러 사(士)와 집사(執事)도 정사를 망치기에 충분한데, 하물며 중앙의 공경(公卿)과 여러 관리의 우두머리나 지방의 방백(方伯)과 연수(連帥)인 경우이겠습니까.
지금 한창 재물을 탐하는 풍습이 땅을 휩쓸고, 그 혼탁한 물결이 하늘까지 넘쳐 나지만, 함께 목욕한 사람은 남이 벌거벗었다고 비난할 수 없기 때문에, 조정에는 탐욕을 탄핵하는 옛 풍습이 없습니다. 뒷간에 들어간 사람은 냄새로 인하여 동화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잘못을 본받아 보통의 일로 여깁니다. 그 근본은 모든 관리가 문을 열어 놓고 한밤중에 시장을 개설하는 데 있으니, 아래에 있는 자들은 재물로 거래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재물은 바로 인민의 고혈이며 뼛골입니다.
혹 조금이라도 청렴한 재량(裁量)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굶어 죽을 상이라고 욕하면서 번번이 배척해 버립니다. 이리하여 온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보는 것, 말하고 웃는 것,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것, 자고 깨는 것, 놀고 장난하는 것 모두 돈과 관련이 있습니다. 영접하고 전송하는 일, 족친(族親)과 혼인에 관한 일, 죽고 삶과 잘되고 못됨, 드나드는 문과 도로 모두 돈과 관련이 있습니다.
들녘을 내려다보면 때맞춰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농사가 잘되었지만, 곡식 항아리는 죄다 비고, 아낙네들이 밤낮으로 길쌈을 하지만 베틀에는 베가 모두 비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남녀노소가 비난과 시름을 씹어 삼키며 혼백조차 파리해져, 삶조차도 원수로 여기면서 죽기를 바라지만 그럴 수도 없으니, 몸에 힘이 빠져 하늘의 화 따위를 생각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시경》 〈대동(大東)〉의 슬픔도 이때보다 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시골에 사는 사람들의 말에 “출산할 때 아기가 거꾸로 나오는 경우에도 돈을 주면 순산한다.”라고 하니, 이는 비통한 언사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다지 서로 다르지 않는 법인데, 어찌하여 다른 때는 청백리(淸白吏)가 그리도 많았으면서도 지금은 이처럼 관리들이 탐욕을 부린단 말입니까. 이것은 사치하는 습속 때문에 자연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천하의 가난한 나라로서 산에는 금ㆍ옥ㆍ구리ㆍ주석이 나오는 광산이 없고, 바다에는 진주ㆍ조개ㆍ무소뿔과 같은 보화가 없습니다. 아울러 바다와 육지에 천리 정도 되는 넓은 지역이 없기 때문에 고기잡이를 하고 소금을 구워도 세 배의 소득을 거둘 수가 없고, 세속의 풍습은 오래 견디는 성질이 부족하기 때문에 장사하는 사람들이 십 년 동안의 비축을 버텨 내지 못합니다. 따라서 곡물이 취약해서 삼 년 동안 쌓아 두지도 못하고, 사람들의 성품이 졸렬하고 인색하여 먼 지역의 장사꾼들과 교역하지도 못합니다.
아, 우리 성조(聖祖)께서 처음 나라를 세워 경영하실 적에 검소함을 법도로 삼고 검약함을 전통으로 전해 주셨으니, 옛날의 법전을 살펴보면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태평한 날이 오래되면서 풍속이 변하고 겉치레의 폐단이 생겨, 화려함을 앞다투어 숭상하여 사물의 꾸밈에 분수가 없습니다. 저택, 의복, 음식, 도구, 안장을 얹은 말을 극도로 기이하고 화려하게 하여 도에 지나친 교묘함이 날로 불어났습니다. 서양의 완상물, 남해의 보배, 왜인의 보물, 몽고의 재화는 진(陳)나라와 수(隋)나라도 구비하지 못한 것들이고, 장화(張華)도 기록한 적이 없는 것들인데, 모두 개인 집에 모아 놓고 있습니다.
남보다 사치하기를 힘쓰면서 만족할 줄 모르는 풍습이 나날이 성행하여 임금이 타는 수레나 의복보다 몇 배 더 사치스러운 것들이 거의 집집마다 즐비할 지경입니다. 우의(牛醫), 농사꾼, 떡장수, 발을 엮는 자들도 모두 검소하게 명아주국을 먹고 질그릇을 사용하려는 마음이 없어져, 방탕하고 사치함을 하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사용하는 물품은 의롭지 못한 재물이거나 강제로 취한 재화로, 몰래 받거나 훔친 뇌물이 아니라면 획득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위아래가 서로 이익만 취하는 것이 대소 간에 풍속이 되어, 욕심의 골짜기가 바다마저 삼키고 탐욕의 불길이 하늘마저 불태우게 될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위로는 공경(公卿)의 세가(世家)로부터 아래로는 시골의 문무관(文武官)에 이르기까지, 모두 경관직(京官職)을 싫어하고 외관직(外官職)을 얻고자 도모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 외관직에 제수되면 다음 날 아침 부임하여 그다음 날부터 꾸미는 것은 음식과 잠자리이고, 시키는 일은 이것저것 만들라는 것입니다.
진기하고 보배로운 음식을 매번 새로운 것으로 극진히 올리게 하고, 진기한 장난감을 매번 교묘한 것으로 극진히 바치게 하여, 이를 가지고 자신의 배를 채우고 이를 가지고 뇌물로 바칩니다. 수레와 역말로 실어다 바치느라 관도(官途 벼슬길)에 줄을 잇습니다. 저 목과 손과 발에 형구를 차고서 소나 돼지처럼 취급받는 백성들이 무슨 여지가 있어서 천승(千乘)의 나라의 근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만고에 세속의 숭상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고서도 망하지 않은 나라는 여태껏 없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깊이 생각하고 두려워하시어, 뇌물을 탐하는 행위의 단속을 급선무로 여기시고, 사치를 금하는 데 힘쓰신다면, 종묘사직에 매우 다행이고 백성들에게 무척 다행일 것입니다.
여섯째, 옛 제도에 따라 잘못된 정치를 개혁하는 일입니다. 널리 생각하건데, 우리나라 역대 임금께서 제정한 법은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三代)의 법을 본보기로 삼아 덜거나 보태고, 고금을 참작하여 중도에 맞추어 만든 것입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한 책에 큰 강령이 이미 정립되었고, 《속록(續錄)》이 대대로 갖추어져 온갖 조목이 남김없이 펼쳐졌으니, 만세토록 바뀌지 않으리라 이를 만하여, 옛 법을 그대로 따라도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직무에 게을리하는 것이 풍속을 이루어, 기강은 해이해지고 법령은 문구만 남은 채 일체 폐지되었단 말입니까. “고려 공사 3일〔高麗公事三日〕”도 오히려 오래 시행되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조서를 내릴 경우, 반드시 취소하지도 않았는데 시행되지 않고, 대궐 문에 법령을 게시할 경우, 반드시 거둬들이지도 않았는데 시행되지 않습니다. 위에서는 성과를 책망하지 않고 아래에서는 믿고 따르지 않으니, 금과옥조(金科玉條)는 부질없이 책 속에 있는 빈말이 되고, 《수교집록(受敎輯錄)》이나 《대전통편(大典通編)》은 모두 가각고(架閣庫)의 먼지 덮인 책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관리들은 일에 임해 마음대로 처리하면서, 친분관계에 따라 높이고 낮추며, 뇌물에 따라 봐주거나 까다롭게 굽니다. 군사나 형벌과 같은 대정(大政 중대한 정치)일지라도 애당초 의리에 견주어 보거나 전례에 비추어 처리하는 일이 하나도 없으니, 하물며 자질구레한 조례(條例)이겠습니까. 무릇 이와 같다면 주관(周官)의 제도〔品節〕라도 나라에 보탬이 되지 못하고, 요순의 어진 마음이라도 백성들을 믿게 할 수 없습니다. 백성이 믿지 않는데도 나라가 잘 다스려진 경우는 예로부터 없었습니다.
《서경》에 말하기를 “선왕이 이루어 놓은 법을 거울삼으라.”라고 했지만, 지금은 어찌 거울삼지 않는 정도뿐이겠습니까. 《시경》에 말하기를 “잘못하지 말고 잊지 말라.”라고 했지만, 지금은 어찌 잘못하고 잊을 정도뿐이겠습니까. 부열(傅說)의 경계하는 말에 “옛일을 본받지 않고서 장구하게 잘한다는 말은 제가 들은 바가 아닙니다.”라고 했으니, ‘제가 들은 바가 아닙니다.’라는 말은 맹세의 표현으로, 요행으로 보존되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만일 부열의 말을 그릇되고 망녕되게 여기신다면, 오늘날 어찌 마음이 섬뜩하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역대 임금이 이루어 놓은 법을 거울삼아 살펴서, 폐지되고 무너진 것을 개선해서 시행하고 바로잡는 일을 불에 타고 물에 빠진 자를 구제하듯 서둘러야 합니다. 다만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없을 수 없으니, 작게는 30년이 되면 사람의 일이 변하고, 크게는 60년이 되면 천도(天道)가 바뀝니다. 이 때문에 옛날 성인들이 예악(禮樂)을 제정하면서 시의에 따르는 것을 귀하게 여겼으니, 인정에 부합하고 천리에 순응하기 위해서입니다.
운룡(雲龍)과 화조(火鳥)로 기년(紀年)을 바꾸거나 충(忠)과 질(質)과 문(文)을 번갈아 숭상한 것은 진실로 달리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대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을 통섭하고 백성을 다스려서 임금이 되고 스승이 되는 큰 법도는 복희(伏羲)로부터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에 이르기까지 혹여 달랐던 점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탕왕(湯王)이 질로써 충을 개혁했는데, 《서경》에서 “우왕이 옛날에 행하셨던 것을 이었다.”라고 했고, 무왕은 문으로써 질을 개혁했는데, 《서경》에서 “정사(政事)는 옛날을 따랐다.”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왕을 계승한다.’든지 ‘옛 제도를 따른다.’고 말하면서 제도를 조금도 변통하지 않고 시대착오적으로 시행한다면, 이는 구당협(瞿塘峽)에서 수레를 몰고 태항산(太行山)에서 배의 돛을 펴는 격이니, 은나라와 주나라의 성대한 덕일지라도 지극한 정치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급선무는 참으로 옛날 제도를 따르는 데 있지만, 만일 무너진 폐단을 변혁하지 않고서 율령(律令) 문구의 말단에만 구애된다면, 단지 옛 제도를 따른다는 이름만 있을 뿐 옛 제도를 따르는 실상은 거의 없을 것이니, 도리어 지금 상태를 그대로 따르며 시일을 보냄만도 못합니다.
지금 나라의 큰 정사인 과거(科擧)ㆍ군병(軍兵)ㆍ조운(漕運)ㆍ조적(糶糴)ㆍ공안(貢案) 같은 것들은 모두 무너져, 백성과 나라가 함께 병들고 폐습이 풍속을 이루었습니다. 전하께서 국정을 운영하실 적에 단지 옛것을 말미암아 개선하여 시행하고자 하더라도 결코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마땅히 《주역(周易)》의 “때에 따라 변한다.”라는 뜻을 잘 체득하고, 공자의 덜거나 보태는 가르침에 따라 경장(更張)을 크게 시행한 뒤에야, 백성들이 화목해지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예로부터 말하는 자들은 매번 경장을 어렵다고 하면서, 번번이 역대 임금을 거론하며 핑계를 댔습니다. 권세 있는 간신들이 나라를 좀먹고 옛 법을 변경하며 어지럽힐 때에는, 하루아침에 역대 임금의 좋은 법을 모두 바꾸면서도 꺼리는 바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좋은 법을 변경하여 어지럽힐 경우에는 간신들이 뜻을 이루어 이를 기뻐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에, 한 사람이 외치면 백 사람이 화답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때에 따라 폐단을 개혁할 경우에는 무너진 기강이 들춰져서 이를 꺼리는 자들이 많기 때문에, 한 사람이 도모하면 백 사람이 저지하는 것입니다.
옛 법을 어지럽히는 일은 대부분 임금이 좋아하는 바에 영합해서 면전에서 아첨하는 말을 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에, 임금이 바로 쉽게 따릅니다. 반면에 폐단을 개혁하는 정사는 모두 백성들을 구제하는 방책에서 나와 직간(直諫)하는 말이 많기 때문에, 임금이 반드시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한당(漢唐) 이후로 쇠퇴하고 피폐한 정치가 마침내 중도에 회복되지 못하고 몰락하는 데 이르고 만 이유입니다.
폐단을 개혁하자는 의견은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역대의 조정에서 충분히 아뢴 적이 있으니, 지금 그가 남긴 문집을 가져다 살펴보면 아실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시에 선정신 이이가 아뢴 계책을 채택하여 시행했다면 임진의 화란이 분명 그처럼 심한 정도에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의 폐단은 선정신 이이가 살았을 때보다 백배나 더하지만 조정에 있는 신하 중에 선정신 이이처럼 폐단에 대한 개혁을 주장하는 말을 임금님께 올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 바로 《시경》에 “그렇게 느긋해 하지 말지어다.”라고 말한 경우입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전하의 하늘이 내신 예지로 조용히 혼자 계실 때에 깊이 생각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전하께서 다스리는 시기는 선조(宣祖)로부터 이미 200년이나 지난 뒤이니, 오늘날이 당시보다 낫다고 이른다면 이치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만일 법이 오래되면 반드시 폐단이 생긴다고 말한다면, 200년 사이에 폐단이 늘어나는 일은 형편상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선정신 이이가 당시에 대한 근심 때문에 오히려 이처럼 급급해 하면서, 어지러워져 망하는 지경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했으니, 오늘날의 근심은 응당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폐단을 개혁하는 조목에 관해서는, 저처럼 얕고 단편적인 생각으로 논의해서는 안 됩니다. 예전 명신(名臣)들의 주의(奏議)를 모으고 지금의 시의(時宜)를 가지고 참작하신다면, 반드시 합당한 계책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깊이 생각하고 두려워하시어, 옛날 제도를 따르는 일을 급선무로 여기시고 잘못된 정치를 개혁하는 데 힘쓰신다면, 종묘사직에 무척 다행이고 백성들에게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신이 이상에서 아뢴 여섯 가지 조목은 진언(進言)하는 사람들이 늘 하는 말로, 따로 특이한 말이나 계책은 없습니다. 이것은 의원이 병의 증세를 진찰하면서 “밖에서 병이 들어와 안이 상했다.”라고 말하는 정도에 불과하며, 병의 원인을 따지면서 “바람, 추위, 더위, 습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약 처방으로 말하자면, 또한 인삼ㆍ복령(茯笭)ㆍ황기(黃芪)ㆍ창출(蒼朮) 등을 더 넣고 덜 넣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비록 기백(岐伯)과 유부(兪跗)의 신묘한 처방과 조제라고 할지라도, 진실로 기린의 골수와 봉황의 기름이 아니라고 하면서, 만일 그 약재가 특별히 기이한 효능이 없다고 여겨 끝내 믿고 복용하지 않는다면, 병이 나을 때가 없을 것입니다.
여섯 조목 가운데서 세 번째 조목 이하는 따로 폐해를 바로잡을 방책이 없습니다. 대개 전하의 뜻과 전하의 학문은 모든 교화와 정사의 근본이 됩니다. 이미 전하의 뜻이 정해지고 학문이 밝아질 경우, 이러한 뜻으로 보필을 구하면 보필이 저절로 현명하고, 이러한 뜻으로 어질고 재능 있는 사람들을 천거하면 어질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 저절로 나올 것입니다. 그런 뒤에 이러한 학문으로 더욱 힘쓰면 덕이 순수하여 그치지 않게 되고, 이러한 학문으로 정사를 행하면 한결같음에 잘 합치될 수 있어서, 폐단을 거론하지 않고도 하(夏)나라와 상(商)나라 이후 나라를 어지럽히고 망하게 한 정사가 모두 오늘의 귀감이 될 것이며, 요순 이하 훌륭한 제왕들의 정치가 모두 오늘의 폐단을 바로잡는 좋은 약이 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임금의 뜻이 해이해지면 온갖 폐단이 함께 발생해서 서쪽을 보수하면 동쪽이 무너지게 됩니다. 임금의 학문이 어두워지면 모든 이치가 완전히 우매해져서 앞에서 얻으면 뒤에서 잃어버리게 됩니다. 가의(賈誼)에게 폐단을 말하게 하고 육지(陸贄)에게 의견을 아뢰게 하더라도 정치에 보탬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맹자가 “등용한 인물에 대해 군주에게 일일이 다 탓할 수 없다.”라는 가르침을 남긴 이유입니다.
사람들이 기쁘게 사모할 대상으로는 성현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없고, 요순보다 위대한 사람이 없습니다. 부녀자와 어린아이일지라도 성현으로 인정하면 기뻐하고, 요순 같다고 칭찬하면 즐거워합니다. 그렇지만 성현이나 요순의 일로 권하면 반드시 기뻐하지만은 않습니다. 반드시 성현이나 요순이 되라고 억지로 권유하면 - 원문 빠짐 - 아무리 대인(大人)이라도 더러 화를 내고 거부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지각이 옛날에는 슬기로웠으나 지금은 어리석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사사로운 뜻이 가렸기 때문입니다. 사사로운 뜻이라는 것은 귀ㆍ눈ㆍ입ㆍ코가 소리ㆍ색ㆍ냄새ㆍ맛에 빠지고, 마음과 뜻이 방일에 빠지고, 두 팔과 두 다리가 안일에 빠지고, 자신의 잘못을 듣기 싫어하고, 남의 선(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인도 형기(形氣)를 지니고 있으므로 하고 싶어 하는 바가 뭇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귀는 소리를 듣고자 하지만 음란한 음악은 듣지 않고, 눈은 색을 보고자 하지만 요염하고 난잡한 색에는 빠지지 않습니다. 입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하지만 주지육림을 차리지 않고, 코는 냄새를 맡고자 하지만 침향을 수레에 가득 피우지는 않습니다. 마음과 뜻은 다만 화평하고자 하지만 방자하게 하지 않고, 두 팔과 두 다리는 다만 편안하고 길하고자 하지만 제멋대로 즐기게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소리ㆍ색ㆍ냄새ㆍ맛이 좋아할 만하고, 편안하고 화평함이 즐길 만하다는 것을 깊이 알아서, 내 몸이 평생토록 오래 누리고자 한 것이며, 자손이 만세토록 늘 번영하게 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요ㆍ순ㆍ우ㆍ탕ㆍ문왕ㆍ무왕이 누린 부귀는 만세토록 거기에 이른 사람이 없고, 이와 반대로 걸왕(桀王)ㆍ주왕(紂王)ㆍ유왕(幽王)ㆍ여왕(厲王) 등은 몸과 나라가 함께 망했습니다. 그보다 덜한 자들 또한 삶을 오래 누릴 수 없었으니, 《서경》에 “즉위하는 왕들이 태어나면 오직 탐락(耽樂)만을 추구한 탓에 혹 5, 6년이나 3, 4년밖에 삶을 누리지 못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고금을 헤아려 보면, 경사(卿士)나 서인(庶人)일지라도 요순의 도가 아닌 것으로는 안락을 오래 누린 자가 없었으니, 하물며 제왕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요 임금의 마음은 백성들이 변화하여 화목한 데서 편안했고, 순 임금의 귀와 눈은 사방의 눈을 밝히고 사방의 총명함을 통하게 한 데서 즐거워했습니다. 우 임금의 입과 몸은 평소의 음식을 간소하게 하고 궁실을 낮게 한 데서 기뻐했습니다. 장차 깊은 못에 빠질 것처럼 두려워함은 성탕(成湯)이 그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던 방법이고, 하루 종일 한가히 밥 먹을 겨를도 없었던 것은 문왕이 그 지위를 편안하게 만든 방법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했기 때문에 덕행과 업적이 당시에 광대했고, 명성이 후세에 길이 전해졌으니, 부귀가 누가 이보다 더했으며, 강녕(康寧)이 누가 이보다 더 컸겠습니까. 이들 몇몇 성인이 이와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모두 자기 잘못을 듣기 좋아하고 간하는 말을 따르며 어기지 아니한 데다가, 남들과 더불어 선행을 하면서 흐르는 물처럼 선을 따랐기 때문이니, 성현이 성현다운 까닭은 단지 이 두 가지 일뿐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을 극진히 실천한다면 오제(五帝)나 삼황(三皇)이 될 수 있고, 약간 실천한다면 한 고조나 당 태종 수준의 정치는 할 수 있으며, 만에 하나만이라도 실천한다면 몸을 망치고 나라를 무너뜨리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나라와 주나라가 쇠망하고부터 후세에 이르기까지, 이 두 가지를 잘 실천한 임금은 새벽별 같이 드문드문 나오는 형편입니다. 엎어진 수레바퀴가 앞길에 즐비한데도 뒤에 오는 사람들이 썩은 새끼로 여섯 필의 말을 매어 쫓아가는 꼴이니, 어찌 마음이 섬뜩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의 임금들이 덕을 잃고 정사를 어지럽힌 원인은 모두 사냥을 즐기고 주색을 좋아하며, 사리에 어둡고 유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본디 사냥을 즐기거나 주색에 빠지는 일이 없고, 하늘이 내신 영명함으로 과단성 있게 일을 처리하십니다. 이는 오제나 삼황의 자질을 갖추고, 은나라와 주나라 말기에 선왕의 덕을 무너뜨렸던 잘못을 근절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의당 성스러움과 공경함이 날로 광명한 하늘에 오르고 훌륭한 정치가 이미 태평성대에 이르렀어야 합니다.
신은 전하께서 전하 자신이 이미 요순처럼 되었다고 스스로 여기시는지 감히 알 수는 없으나, 신이 볼 때에는 아직 그렇게 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신은 전하께서 전하의 나라가 이미 요순 시대처럼 되었다고 스스로 여기시는지 감히 알 수는 없으나, 신이 볼 때에는 아직 그렇게 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다름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아직 요순의 뜻을 세우지 못하고 아직 요순의 학문을 밝히지 못하셨기 때문에, 보필도 아직 요순 때의 신하 같은 자를 얻지 못했고, 어질고 재능 있는 신하들이 아직 요순 때의 융성함을 이루지 못하여 법령과 정교(政敎)가 여전히 형식적인 문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데도 구태의연하게 미봉하면서 신하들과 더불어 세월만 보내고 계시니, 전하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하고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은 아마도 순 임금이 편안히 할 것을 생각한 것이나 문왕이 편안해 한 것이 아닌 듯합니다.
정자(程子)ㆍ주자(朱子) 이후로 유생들이 임금에게 진언(進言)한 것이 몇천만 마디인지 모를 정도이고, 책자로 묶어서 올린 것이 몇십, 몇백 편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당시 임금이 이를 거두어서 살피지 않은 것은, 다만 채택하여 쓸 수 없다고 여겼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번거로움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이 아뢴 말도 거의 만 마디나 되지만, 비단 옛사람들이 남긴 찌꺼기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난잡하고 질서가 없으니, 진실로 이를 올려 예람(睿覽)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스스로 들판의 미나리를 아꼈던 시골 사람과 쓸데없이 나라 걱정했던 베 짜는 여인을 생각하면서, 이에 감히 요ㆍ순ㆍ우ㆍ탕의 덕 중에서 절실하고 긴요한 말을 몇 구절 따다가 전하를 위해 올립니다. 그것은 요 임금의 진실로 공손하고 능히 사양함과 순 임금의 자신을 버리고 남을 따름, 우 임금의 나랏일에 부지런하고 집안에서 검소함, 탕 임금의 간하는 말을 따르며 어기지 않음, 문왕과 무왕의 능히 덕을 밝히고 형벌을 삼감이니, 이는 제왕이 따라야 할 20자의 부절(符節)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이를 마음에 심사숙고하고 실제로 몸에 간직하셔서, 생각을 언제나 여기에 두어 하나하나 따라 실천해 나가신다면, 빨리 덕을 공경하면서 백성들과 화합하여 능히 하늘에다 영원한 명(命)을 비는 데 이를 수 있으리니, 종묘사직의 큰 복이 영원토록 변함없을 것입니다.
신은 궁벽한 바닷가에 사는 비루한 선비로,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 근본을 둔 것이라,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서 사사로운 제 생각을 누누이 나열하느라 그것이 참람한 행위임을 망각했습니다. 외람되이 오늘 어전에서 삼가 절을 하고 하찮은 말을 올리도록 허락하여 주시니, 두렵고 송구스럽습니다. 어리석은 정성을 남김없이 다 아뢰었으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헤아려 주십시오.
이어 삼가 생각하건대, 변변치 못한 신의 나이가 이미 70세이고, 기질이 평소 약하여 일찍부터 고질병을 달고 살아서 오르내리고 절하고 읍하는 일을 혼자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몸으로 관직을 수행하면 마침내 죄를 얻을까 두렵습니다. 이에 감히 임금님의 은혜를 우러러 믿고서 제 사정을 사사로이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가엾게 여겨 용서해 주시고 속히 직명을 교체하심으로써 고향으로 일찍 돌아가서 천수를 마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마지막 숨이 붙어 있기 전까지 감히 칭송하고 떠받들며 축원하기를 잊겠습니까. 설령 신이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벼슬한다고 해도, 변변치 못한 재능으로 임금님의 정무를 도울 길은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진서산(眞西山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와 선정신 이이가 편찬한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임금님을 위해 올리게 해 주소서. 이렇게 하면 진 문충(眞文忠 진덕수)과 이 문성(李文成 이이)이 영원히 전하의 좌우에 있는 셈이오, 우리 동방의 백성들도 요순 같은 임금을 직접 뵐 수 있게 되어, 모두 요순 시대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시골의 백발 늙은이가 밭 갈고 우물 파서 먹는 것이 임금님의 힘임을 알고, 대궐을 향한 제 충정은 초막에서도 신하의 직분에 편안해 함이니, 이 어찌 성군이 다스리는 세상에 널리 펼친 교화가 위아래로 함께 유행함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하늘과 같은 전하를 우러르며 간곡히 빌면서 삼가 두려워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비답(批答)하기를 “상소를 살펴보고 모두 잘 알았다. 이미 원고를 가져오게 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을 알았으며, 또한 접견하여 포부를 확인해 보았다. 십 년 동안 연구하여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지은 것이 있다고 들었기에, 또한 대농시(大農寺 나라의 창고 관리를 맡은 관청)에 명하여 붓과 종이를 지급하게 했었는데, 지금 그 소장을 보니 참으로 내용이 넉넉하고 풍부하다. 맨 첫 번째에 뜻을 세워 학문을 밝히라고 아뢴 일을 나는 매우 가상하게 여기노라. 내가 뜻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뜻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정학(正學)이 밝혀지지 못했기 때문에 사학(邪學)을 종식시키지 못했다. 이는 모두 내가 반성해야 할 점이니, 깊이 생각하겠다.
그 두 번째에 보필할 신하를 선발하고 어진 자를 등용하라고 아뢴 조목을 나는 매우 가상하게 여기노라. 인재를 천거함으로써 임금을 섬기게 하는 일은 대신의 책무이다. 가린 것을 걷어 내고 두루 등용하여 재야에 소외된 현재(賢材)가 없도록 하는 일은 내가 오늘 의정부에 바라는 바이다. 그다음 셋째, 그다음 넷째, 그다음 다섯째, 그다음 여섯째로 아뢴 내용들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진실되고 절실하여, 그야말로 시폐(時弊)를 정확히 지적한 것들이다.
사유(四維 예ㆍ의ㆍ염ㆍ치)가 요즘처럼 펼쳐지지 않은 적이 없었고, 나라의 기강이 바로 이때에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남들과 다툼이 심하여, 선비들의 추향(趨向)이 날로 낮아지고 사치가 극심한 데다가, 탐욕을 부리는 풍조가 날로 성행하였으며, 다시는 옛날의 떳떳한 법이 없어서, 바르지 않은 정치와 하자가 있는 법이 손꼽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매일 깊은 밤에 생각에 잠겨 탑전을 맴도느라 잠 못 이루며, 스스로 초심을 돌아보면 모르는 사이에 얼굴이 붉어진다.
그대는 외진 시골에 사는 소원한 사람이면서도 이렇게까지 빠짐없이 논했다. 좋은 말을 듣고자 하는 이유는 유익함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그 가운데서도 식년에 관찰사ㆍ절도사ㆍ수령의 인재 천거와 과거의 문체가 법도에 맞지 않으면 과방(科榜)에서 삭제하는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소상히 아뢰게 하여 말의 실효가 나타나도록 하겠다. 그대의 나이가 칠십인데도 부름을 받고 올라왔는데, 그저 원하는 대로 고향에 돌아가도록 해 주고 만다면, 참으로 이른바 “오가는 데에 있어 아무 소득이 없다.”라는 셈이고, 또 오래 기다려 벼슬하게 한다면, 노년에 중랑(中郞)을 지낸 풍당(馮唐)보다도 더 늦은 감이 있으니, 한 고을을 주어 그 포부를 펴 볼 수 있게 하노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