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kr.buddhism.org/%eb%b2%bd%ec%95%94%eb%a1%9d/?mod=document&pageid=1&uid=77 

 

벽암록(4) 31칙 ~ 40칙

벽암록 31칙 마곡화상이 주장자를 흔들다 “옳고 그름의 차별에 들면 본래심 상실” {벽암록} 제31칙에는 마곡스님이 사형인 장경 화상과 남전 화상을 찾아가서 주장자를 흔들어 보인 기연을 다

kr.buddhism.org

 

[第031則]不是不是
〈垂示〉垂示云。動則影現。覺則冰生。其或不動不覺。不免入野狐窟裏。透得徹信得及。無絲毫障翳。如龍得水似虎靠山。放行也瓦礫生光。把定也眞金失色。古人公案。未免周遮。且道評論什麽邊事。試擧看。
〈本則〉擧。麻谷持錫到章敬。遶禪床三匝。振錫一下。卓然而立。敬云。是是。麻谷又到南泉遶禪床三匝。振錫一下。卓然而立。泉云。不是不是。麻谷富時云。章敬道是。和尙爲什麽道不是。泉云。章敬卽是是。汝不是。此是風力所轉。終成敗壞。
〈頌〉此錯彼錯。切忌拈卻。四海浪平。百川潮落。古策風高十二門。門門有路空蕭索。非蕭索。作者好求無病藥。

벽암록 31칙 마곡화상이 주장자를 흔들다

“옳고 그름의 차별에 들면 본래심 상실”

{벽암록} 제31칙에는 마곡스님이 사형인 장경 화상과 남전 화상을 찾아가서 주장자를 흔들어 보인 기연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마곡스님이 석정(錫杖)을 가지고 장경 화상의 처소에 도착하여 선상의 주위를 세 바퀴 돌고서 석장으로 한번 내려치고 우뚝 서자, 장경 화상이 말했다. "옳지(是) 옳지(是)" 설두 화상이 착어했다. "틀렸다(錯)" 마곡스님이 다시 남전 화상의 처소에 도착해서 선상을 세 바퀴 돌고 석장을 한번 내려치고 우뚝 서 있자, 남전 화상이 말했다. "아니야(不是), 아니야(不是)" 설두 화상이 착어했다. "틀렸다(錯)" 당시 마곡스님이 남전 화상에게 말했다. "장경화상은 옳다고 했는데, 화상은 어째서 옳지 않다고 하시오" 남전 화상이 말했다. "장경은 옳았지만, 그대는 잘못된 것이야!" 이것은 바람의 힘(風力)으로 그렇게 된 것이니 결국 부서지고 만다.

擧. 麻谷持錫到章敬, 禪床三, 振錫一下, 卓然而立. 敬云, 是是. (雪竇著語云, 錯.) 麻谷又到南泉, 요禪床麻, 振錫一下, 卓然而立. 泉云, 不是不是. (雪竇著語云, 錯.) 麻谷當時云, 章敬道是, 和尙爲什道不是. 泉云, 章敬卽是, 是汝不是, 此是, 風力所轉, 終成敗壞.

이 공안은 {전등록} 7권 '장경회휘전'에 전하고 있으며, {벽암록} 제20칙의 '평창'과 {종용록} 16칙에도 인용하고 있다. 본칙에 등장하고 있는 마곡보철(麻谷寶徹)과 장경회휘(長慶懷暉, 754~815), 남전보원(南泉普願)은 모두 마조도일 선사의 제자로서 조사선의 선풍을 확립한 대표적인 선승들이다. 마조문하에 뛰어난 선승 139명 가운데 88명이 모두 훌륭한 선지식으로 활약했다고 전하고 있는 것처럼, 실로 인도에서 전래한 불교를 중국인들의 일상생활의 종교로 완전히 정착시킨 선승들이다.

어느 날 마곡선사가 석장(주장자)을 가지고 사형인 장경화상이 앉아 있는 선상(禪床)을 세 바퀴 빙 돌고 나서 석장을 한 번 쾅! 하고 내리치고 장경의 정면에 우뚝 섰다. 마곡의 행동은 형식적으로는 예의를 갖추고 있지만 너무 교만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석장은 수행자가 행각할 때 지니고 다니는 나무 지팡이로서 맨 위에 철제로 탑 모양을 만들고, 둥글게 만든 큰 고리에 작은 고리를 12개를 끼워 넣기 때문에 석장(錫杖)이라고 한다. 수행자가 행각할 때 짐승이나 곤충들을 경각시키기 위해 석장을 땅에 치고 둥근 쇠고리가 부딪치어 소리가 나도록 한 것인데, 짐승이나 곤충이 수행자의 발에 밟혀서 죽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원오는 마곡의 행동을 "조계의 모습을 쏙 빼 닮았네"라고 착어(着語)하고 있다. 이 말은 영가현각(永嘉玄覺)이 처음 조계혜능을 방문 할 때도 이와 똑같은 모습으로 참문하였기 때문이다. 즉 '평창'에 "영가스님이 조계에 이르러 육조스님을 친견할 때에 혜능화상이 앉아 있는 선상을 세 바퀴 돌고는 석장을 한 번 치고 우뚝 섰다. 그러자 육조는 '사문이란 삼천의 위의와 8만 가지 구체적인 법칙을 모두 갖추어야 하는데 그대는 어디서 왔기에 이처럼 거만을 부리는가?'"라는 일단을 인용하고 있다.


주장자들고 선기작용 제시했지만
본래인의 지혜 아닌 경계 쫓아 행동

그런데 이러한 마곡의 행동에 장경은 "옳다(是)"고 말했는데, 마곡이 행동으로 제시하고 있는 독자적인 깨달음의 경지는 걸림 없는 지혜작용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마곡과 장경의 문답을 설두 화상은 "잘못된 것(錯)"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나는 그러한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마곡은 처음 사형인 장경으로부터 인정을 받자 득의양양하여 유명한 남전 화상의 처소에 가서도 장경의 처소에서 펼친 행동과 똑같이 선상을 세 바퀴 돌고 석장을 한번 내려치고 남전 화상의 앞에 우뚝 섰다. 그러나 남전 화상은 "아니야(不是), 아니야(不是)"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마곡의 지혜작용(禪機)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마곡의 행위에 대해서 설두 화상은 역시 "잘못된 것(錯)"이라고 착어했다.

이 때 마곡스님이 남전 화상에게 "장경 화상은 옳다고 했는데, 화상은 어째서 옳지 않다고 하시오"라고 다그쳤다. 마곡이 젊은 기운으로 독자적인 경지를 체득하고 장경 화상과 남전 화상을 참문하여 자신의 선기를 탁마하고 있는 입장으로 볼 때 옳고 그름의 상대적인 차별경계에 떨어지는 어리석은 인물로 평가할 수 없다. 남전의 차원 높은 선기와 안목을 끌어내어 점검하기 위한 차별적인 언어로서 다그치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원오는 이 말에 대하여 "주인공은 어디 있는가?"라고 착어하고 있다. 원오는 마곡스님과 이 공안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 "그대의 주인공은 어떻게 되었소? 옳고 그른 차별경계에 떨어져 상실한 것은 아닌지?"라고 자각하도록 던진 착어이다.

남전화상은 "장경은 옳았지만, 마곡 그대는 잘못된 것이야! 이것은 바람의 힘(風力)으로 그렇게 된 것이니 결국 부서지고 만다"고 마곡을 위해서 친절하게 대답하고 있다. '지금 여기서 그대 자신의 일을 문제로 삼고 지혜로운 일을 해야지 왜 장경을 끌어들이는가? 장경은 관계없는 일이야. 문제는 그대가 올바른 깨달음의 지혜로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석장을 들고 내 앞에서 선기작용을 제시하고 있는 행동은 본래심의 지혜작용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풍력(風力)의 힘으로 전개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가 흩어지는 시절인연이 되면 파괴되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오는 "자기는 어떻게 하지"라고 착어하고 있는데, '풍력에 따라 움직인 마곡의 주인공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의미이다.

남전이 말한 '바람의 힘(風力)으로 움직인 것'이란 인간의 신체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로 이루어진 것이며 육체를 움직이고 활동하는 원동력을 풍대라고 한다. 마곡이 장경과 남전의 선상을 세 바퀴 돌고 석장을 탁 치며 세운 모습은 풍대(風大)라는 원소의 작용에 불과한 것이지 본래인의 지혜작용은 아니라고 비판한 것이다. '사대가 흩어지면 그러한 육체적인 활동은 환멸(幻滅)이며 파괴되고 만다. 무슨 지혜작용인양 행동하는가? 그러한 선기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질책한 말이다.

절대 주체이며 진실의 자기인 본래인은 어떠한 경계에도 흔들리지 않고 동요됨이 없는 것이다. 그대는 자기의 본래인을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석장을 떨치며 선상을 도는 행위는 본래인의 지혜작용이 아니라 단순히 분위기에 휘말리고 경계를 쫓아 육체를 움직이는 일이었다. '진실로 그대 자신의 본래인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릇된 것'이라고 말했다.

설두는 장경이 "옳다(是)"고 한 것과 남전이 "그릇된 것(不是)"이라고 한 말에 모두 "잘못된 것(錯)"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그것은 옳고 그름에 끄달리지 않고, 옳고 그름을 모두 초월한 경지에 있다는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견해를 "이것도 잘못되고, 저것도 잘못되었다"고 읊고 있다. '절대로 제거하지 말라'고 한 것은 자신이 착어한 '잘못된 것(錯)'을 제거하면 옳고 그름의 차별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의 차별에 끄달리지 않는다면, "사해(四海)는 물결이 잔잔하고 모든 강물은 썰물이 빠지게 된다"고 무사태평한 경지를 읊고 있다. 옳고 그름, 선과 악, 범부와 성인이라는 일체의 상대적인 차별심을 일시에 초월한 안신입명(安身立命)의 경지를 읊고 있다. "고책(古策, 석장)의 가풍이 열 두 대문 보다 높은데, 대문마다 길이 있으나, 죽은 듯 조용하다" 고책(석장)은 본래 구족된 부모미생이전의 본래면목, 즉 고불심(古佛心)을 의미한다. 본래의 석장(불심)에 12개의 고리는 12인연을 상징한 것으로 본래 텅 비어 죽은 듯이 고요하게 울린다. 그런데 설두는 다시 석장의 쇳소리는 "죽은 듯이 고요한 것이 아니다"고 하여, 텅 빈 공의 경지, 무사 무심의 경지에 안주해서도 안 된다고 주의하고 있다. "작가는 병 없는 약을 찾는 것이 좋다"고 응병여약의 약이 아닌 본래의 불심을 깨닫는 지혜를 체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의주고 있는 것이다.



[第032則]佛法大意
〈垂示〉垂示云。十方坐斷千眼頓開。一句截流萬機寢削。還有同死同生底麽。見成公案打疊不下。古人葛藤試請擧看。
〈本則〉擧。定上座。問臨濟。如何是佛法大意。濟下禪床擒住。與一掌。便托開。定佇立。傍僧云。定上座何不禮拜。定方禮拜。忽然大悟。
〈頌〉斷際全機繼後蹤。持來何必在從容。巨靈抬手無多子。分破華山千萬重。

벽암록 32칙 임제와 불법의 대의

“시절인연 도래한 지금 여기에 깨달음"

{벽암록} 제32칙에는 임제 선사에게 불법의 대의를 질문하고 깨달음을 체득한 정(定) 상좌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정(定) 상좌가 임제 선사에게 질문했다. '무엇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임제 선사는 선상에서 내려와 정 상좌의 멱살을 붙잡고 손으로 뺨을 한대 후리치고는 바로 밀쳐 버렸다. 정 상좌가 멍하니 서 있자, 곁에 있던 한 스님이 말했다. '정 상좌! 선사께 왜 절을 올리지 않는가?' 정 상좌가 임제 선사께 절을 하려는 그 순간 크게 깨달았다."

擧. 定上座, 問臨濟, 如何是佛法大意. 濟, 下禪床, 擒住與一掌, 便托開. 定, 佇立. 傍僧云, 定上座, 何不禮拜. 定, 方禮拜, 忽然大悟.

이 일단은 고본 {임제어록}에는 보이지 않고 송대(宋代)에 종연 선사가 {임제어록}을 편집할 때 {벽암록}에 전하는 자료를 그대로 수록한 것으로 보여진다. 임제 선사는 황벽 선사의 불법을 전해 받은 유명한 선승으로 임제종의 종조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법문집을 모은 {임제어록}은 '어록의 왕(王)'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선불교의 진수를 일상생활 속에서 깨달음의 지혜로운 삶을 전개하는 진인(眞人)의 사상으로 종합하고 있다. 임제의 선사상은 한마디로 '일체의 권위와 형식을 초월한 무위진인(無位眞人)'이며, 일체의 망념 경계를 초월한 무심의 경지에서 자신의 삶을 지혜롭게 사는 법문을 제시하고 있다. 즉 "시절인연에 따라서 시간과 공간, 언제 어디서라도 자신의 주체인 본래심을 자각하여 주인이 되어 살 수 있으면 지금 여기의 자신의 삶이 진실된 깨달음의 세계가 된다[隨處作主 立處皆眞]"고 주장했다.

임제 선사의 문하에서 참선수행하고 있는 정 상좌라는 스님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는데, '평창'에는 {종문통요집} 제6권 '정상좌'전에 수록된 자료에 의거하여, 덕산 문하의 수제자인 암두와 설봉, 흠산 이 세 사람이 임제 선사를 참문 하러 가는 길에서 정 상좌를 만나 임제 선사가 입적한 사실과 그의 무위진인(無位眞人)에 대한 설법을 일러주고 있다. 그리고 무위진인에 대한 문제로 흠산과 선문답을 나눈 내용 등을 소개하고 있다.

원오는 평창에 정 상좌의 인물됨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정 상좌가 이처럼 곧바로 깨달음의 경지를 출입하고 왕래한 것을 보라. 임제의 정법을 계승한 인물이었기에 이렇게 선기를 전개할 수 있었다. 불법의 대의를 깨칠 수 있다면 하늘을 훌쩍 뒤집어 대지를 만들고 스스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정상좌는 이러한 인물이었다. 임제 선사에게 한 차례 따귀를 얻어맞고 절을 하다가 곧바로 불법의 귀착점(대의)을 깨달았다. 그는 북방 사람으로 기질이 아주 순박하고 강직했다. 임제 선사의 불법을 이은 후에는 다시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고, 그 후 임제 선사의 큰 지혜(大機)를 활용했다. 그는 참으로 빼어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어느 날 임제선사가 법당에서 설법할 때에 정 상좌가 '불법의 대의'에 대해서 질문하자, 임제 선사는 선상(禪床)에서 내려와 정 상좌의 멱살을 붙잡고 손으로 뺨을 한대 후리치고는 바로 밀쳐 버렸다. 선어록에는 '불법의 대의'와 '조사가 오신 참된 의미' '선사의 가풍'을 묻는 질문이 정형화되어 있을 정도로 많이 등장하고 있다.

임제와 정상좌의 행동은 {임제어록} 행록에 처음 황벽의 문하에서 수학한 임제가 황벽 선사에게 "무엇이 불법의 대의입니까?"라고 질문하자, 황벽 선사가 곧장 방망이로 내리쳤다는 행동과 비슷하다. 임제는 세 번이나 황벽을 찾아가 불법의 대의를 질문했지만 세 번 모두 방망이를 얻어맞고 결국 대우 선사의 인연으로 비로소 깨닫게 된 유명한 이야기를 전한다.

선불교에서 '불법의 대의'를 문제로 삼는 것은 {육조단경}에 오조홍인 선사가 문인들에게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족한 사람은 게송을 지어 보라고 지시하자, 신수가 먼저 깨달음의 게송(心偈)을 지어 벽에다 쓴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황벽선사의 '몽둥이'방편과 흡사
불법의 대의 거친 행동으로 보여줘

불법의 대의는 불법의 현지(玄旨)를 말하는데, 번뇌 망념을 초월하여 불성을 깨닫는 견성(見性)과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는 불법의 근본정신을 말한다.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면 반야의 지혜를 구족한 정법의 안목으로 일체의 만법을 올바르게 볼 수 있기 때문에 만법의 차별경계에 걸림 없이 무애자재한 지혜로써 보살도의 삶을 전개 할 수 있는 것이다. 정법의 안목을 구족한다는 것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경지를 말하는데, 임제는 이러한 선사를 '무위진인'이라고 하였고, 진정한 견해를 갖춘 사람이라고 하고 있다.

{전등록} 14권에 도오가 "무엇이 불법의 대의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석두 선사는 "그대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면 알 수가 있다"고 대답하고 있다. 다시 "불법을 체득한 후의 세계에도 다시 진보가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창공은 걸림이 없다. 백운(白雲)이 날아다니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대답하고 있는 것처럼,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입장을 무심(無心)의 경지로 대변하고 있다. 사실 선불교의 사상은 계(戒), 정(定), 혜(慧) 삼학으로 정리되는 전불교의 실천정신을 번뇌 망념이 없는 무심(無心)으로 귀결시키고 있는데, 무심은 본래심이며 평상심을 말한다. 그래서 "무심(無心)이 도(道)" "평상심이 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정상좌도 임제 선사에게 '불법의 대의'를 체득할 수 있는 결정적인 한마디의 법문을 간청했다. 그런데 임제 선사는 한마디 말도 없이 곧장 선상에서 내려와 정 상좌의 멱살을 잡고 후리치며 밀쳐버렸다고 하는 것처럼 난폭한 행동으로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도록 법문을 제시하고 있다. 황벽이 임제를 몽둥이로 후리친 것과 같이 거친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원오는 "오늘에야 붙잡았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임제가 매일 설법하면서 대장부를 찾고 있었는데 오늘에야 분명히 붙잡았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서 멱살을 붙잡고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도록 노파심 간절하게 지도하고 있다고 코멘트하고 있다.

그런데 "정 상좌는 멍하니 서 있었다"는 것은 일체의 사량분별을 초월한 무아지경에 서 있는 모습이다. 불법의 대의를 행동으로 보여준 임제의 거친 노파심은 정 상좌를 무아지경에 몰아넣고 말았다. 원오가 "이미 귀신의 소굴에 빠졌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정 상좌가 무아지경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지혜의 작용이 없는 귀산의 소굴에서 사는 죽은 인간이 된다. 그런데 마침 곁에 있던 한 스님이 무아지경에 빠져있는 정 상좌에게 "정 상좌! 선문답은 끝났다. 빨리 선사께 인사를 올리게!"라고 고함쳤다. 처음 선문답을 하기 전에 먼저 인사를 하고 마칠 때는 '선사의 깊은 법문 감사 드립니다'라고 인사를 하는 예절이 있다.

정 상좌는 옆에서 주의를 준 스님의 말을 듣고 무심의 경지에서 임제 선사께 절을 하려는 그 순간 불법의 대의를 깨달았다. 즉 자아의식이 완전히 없어진 아상(我相) 인상(人相)을 초월한 무심의 경지에서 옆에 있는 스님이 던진 한마디의 주의에 지금 여기 자신의 할 일을 통해서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정 상좌가 지금까지 많은 세월에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기 위해 고심(苦心)으로 참구해온 결과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임제의 친절한 방편 수단으로 번뇌 망념을 초월하고 불법의 근본정신을 체득하게 된 것이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황벽 선사의 지혜작용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니, 이어받은 것이 어찌 점잖을 리 있으랴!" 불법의 대의를 질문한 정 상좌를 선상에서 내려와 거친 행동의 지혜방편으로 제시한 임제 선사를 칭찬하고 있다. 임제도 황벽에게 불법의 대의를 질문하고 방망이를 얻어맞는 거친 행동의 교화수단을 계승하고 있다. "거령신이 무심코 들어 올린 손 일격에 천만 겹의 화산이 쪼개졌네." 거령신은 황하의 전설에 나오는 신으로 무심코 들어올린 손으로 화산과 수양산을 나누어 그 사이로 황하의 물을 흐르게 한 것처럼, 임제의 무심한 행화가 정 상좌의 의심과 만 겹의 미혹을 타파하게 되었다고 읊고 있다.



[第033則]具一隻眼
〈垂示〉垂示云。東西不辨南北不分。從朝至暮從暮至朝。還道伊瞌睡麽。有時眼似流星。還道伊惺惺麽有時呼南作北。且道是有心是無心。是道人是常人。若向箇裏透得。始知落處。方知古人恁麽不恁麽。且道是什麽時節。試擧看。
〈本則〉擧。陳操尙書看資福。福見來便畫一圓相。操云。弟子恁麽來。早是不著便。何況更畫一圓相。福便掩卻方丈門。雪竇云。陳操只具一隻眼。
〈頌〉團團珠遶玉珊珊。馬載驢駝上鐵船。分付海山無事客。釣鼇時下一圈攣。雪竇復云。天下衲僧跳不出。

벽암록 33칙 자복화상의 일원상(一圓相)

“일원상은 만법일여의 불법의 세계 상징”

{벽암록} 제33칙은 자복 화상이 진조(陳操) 상서(尙書)에게 하나의 원상(圓相)을 그려서 제시한 법문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진조 상서가 자복 화상의 견해를 시험하기 위해 찾아갔다. 자복화상은 그가 오는 것을 보고 하나의 원상을 그렸다. 진조가 말했다. '제자가 이렇게 와서 아직 자리에 앉지도 않았는데, 하나의 원상을 그려서 어찌하자는 것입니까?' 자복화상은 곧장 방장실의 문을 닫아 버렸다. 설두화상이 착어했다. '진조는 단지 한쪽 눈만을 갖춘 인물이다.'"

擧. 陳操尙書, 看資福. 福見來, 便畵一圓相. 操云, 弟子恁來, 早是不着便. 何況更畵一圓相. 福便掩却方丈門.(雪竇云, 陳操只具一隻眼.)

자복 여보(如寶)선사는 당말 위앙종의 선승으로 앙산혜적의 법손으로 길주(吉州, 江西省) 자복사에 주석하며 선풍을 펼쳤기 때문에 자복 화상이라고 부른다. {전등록} 제12권과 {회요} 11권에 약간의 선문답을 수록하고 있지만 이 공안은 보이지 않는다. {종문통요집} 제6권 자복전에는 설두의 착어를 첨가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벽암록}을 인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진조상서는 {벽암록} 제6칙 평창에 언급된 것처럼, 황벽의 제자 목주화상(진존숙)을 참문하여 선법을 이은 거사이며, 상서는 대신(大臣)으로 장차관급의 고급관리이다. 원오는 평창에 진조 상서가 당대의 유명한 거사 배휴(裵休)와 이고(李)와 같은 유명한 거사로 그는 스님을 만나면 먼저 공양을 청하고 삼백량을 보시한 후에 반드시 그 스님의 안목을 시험하였다. 많은 선승들의 안목을 간파했지만 운문 선사는 간파하지 못했는데, 그가 목주 화상 밑에서 참선하여 정법의 안목을 갖춘 거사였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어느 날 진조거사가 여보 선사의 안목을 점검해보기 위해서 자복사를 참문하러 갔다. 그런데 자복 화상은 유명한 진조 거사가 오는 것을 보고 곧바로 허공에다 하나의 둥근 원상(一圓相)을 그렸다. 위산과 앙산의 위앙종은 일원상(一圓相)을 그리며 독창적인 선풍을 펼쳤다. 일원상을 제시하여 선문답을 나누는 선풍은 혜충 국사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인천안목} 제4권에는 혜충 국사가 제자 탐원(耽源)에게 내린 일원상의 의미를 앙산혜적이 학인을 제접하는 교화의 수단으로 응용하면서 위앙종의 선풍으로 활용된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원상에는 96가지 의미가 있지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6종류로 정리된다.

선문답에서 일원상을 그려서 제시한 것은 첫째로 절대의 진실인 불법 그 자체를 상징하여 나타낸 것, 둘째는 수많은 선정의 삼매를 모두 이 일원상에 포함시킨 것, 셋째는 주객의 차별적인 대립이 나누기 이전의 근원적인 불성의 지혜작용, 넷째는 일원상이 불법의 대의를 나타내는 문자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 다섯째는 일원상이 불법의 종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 여섯째는 원상이 그대로 언어 문자를 초월한 경지에서 종지에 계합된 사실 등이다. 즉 일원상은 깨달음의 경지를 상징으로 제시한 것이다. {신심명}에 "둥글기가 허공과 같이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고 읊고 있는 것처럼, 지도(至道), 진여(眞如), 불성(佛性), 불심(佛心)은 법계와 하나 된(萬法一如) 것이며, 일체 제법이 본래 공(空)한 모습을 그림(圖示)으로 제시한 법문이다. 하나의 원상은 무한의 시간과 공간을 중복시킨 법계를 상징한 동적(動的)인 도식화라고 할 수 있다. 즉 선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의 시간을 나타내고, 원상안의 공간은 시방(十方)세계를 표현한다. 즉 시방삼세는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지금이라는 찰나의 시간에 삼세가 함께하고, 여기라는 공간이 시방세계인 것이며, 자기의 본래심(佛心)은 만법과 하나 된 법계라는 사실을 구체적인 그림으로 제시하고 있는 법문이다.


"이것이 나의 본래심" 둥근원 제시
방장실로 돌아가 선승의 본분 보여

자복 화상은 일원상을 그려서 선법을 제시한 위앙종의 종지를 계승한 선승답게 불법의 근원과 본질을 텅 빈 허공에다 일원상을 그려서 진조 거사에게 보여준 것이다. 원오는 자복 화상이 일원상을 그린 것에 대하여 "도깨비는 도깨비를 알고, 도적은 도적을 안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자복과 진조 거사의 경지를 똑같이 평하고 있다.

진조 거사는 "제자가 이제 막 화상을 참문하려고 와서 아직 인사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지도 않았고, 한마디의 질문도 하지 않았는데, 화상은 미리 허공에다 일원상을 그려 보이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말했다. 자복 화상보다 나이도 많고 선법도 뛰어난 진조 거사가 자신을 제자라고 하는 말한 것은 거사로서 선승에 대한 겸손의 미덕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복 화상은 진조 거사가 자신을 방문하는 의도와 그의 선기를 먼저 파악하고 그가 받아먹을 수도 없고 문제를 파악하여 다시 제기할 수도 없는 일원상을 허공에다 그려 보인 것에 대한 반문이다. 즉 도적이 도적의 마음을 먼저 읽어보고 한 발 앞서서 쓸데없는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도록 선수치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자복 화상 당신이 그린 원상 가운데 빠져들지 않는다는 선기가 포함된 말이기도 하다.

원오는 진조거사가 "오늘 비로소 졸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고 평하고 있는 것처럼, 눈 밝은 선지식을 만나게 되었다고 하고, 진조 거사는 과연 "노련한 도적"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진조거사보다도 한 수 더 위에서 활동하고 있는 노련한 도적이 자복 화상이다. 자복 화상은 진조거사의 안목을 전부 파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진조거사의 비판적인 말에 한마디의 대꾸나 반응도 없이 방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리고 자신의 살림살이에 몰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장실은 주지가 거처하는 공간이며, 본래 깨달음의 공간에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진조거사를 위해서 일원상을 그려서 방편 법문을 제시하고는 자신이 제시한 법문을 진조거사가 파악했기 때문에 더 이상 그곳에 머물 필요가 없다.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서 자신의 일에 몰입하는 선승의 본분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설두는 "진조 거사는 훌륭한 안목을 갖춘 인물이지만 한쪽 눈만을 갖춘 사람"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자복화상은 진조거사가 자복의 견지를 시험하기 위해 오는 것을 보고 절대 깨달음의 경지인 원상을 방편문으로 제시한 것은 파악하고 있지만, 방장실로 되돌아 문을 닫고 안신입명(安身立命)의 경지에서 무애자재하게 살고 있는 자복화상의 지혜작용은 파악하지 못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 원오도 수시에 "낮잠 자고 있는가? 깨어있는가? 유심인가 무심인가, 도인인가. 범부인가 전혀 파악 할 수 없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복화상은 정말 자유 자재한 선기를 펼치고 있는 훌륭한 선지식(작가)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설두 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둥근 진주는 구르고, 옥구슬은 돌돌돌" 진주나 옥구슬이 둥근 형체로 자복화상이 제시한 일원상은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이 완전무결한 것이며, 옥이 그릇에서 구르는 것처럼, 자유 자재한 지혜작용이 빛난다. "말에 싣고 나귀에 얹어 철선(鐵船)을 타고"라고 읊은 말은 둥근 주옥과 같은 진여 법성은 우주 만상을 그대로 들어내고 시방세계에 충만하고 있기 때문에 말에 싣고, 나귀에 얹고, 철선에도 가득 싣게 된다는 의미이다. "온 세상 번뇌 망념의 일이 없는 나그네(海山無事)에게 나누어주네." 수없이 많은 구슬을 말과 나귀, 철선에 싣고 어디로 가서 누구에게 나누어 줄까라고 생각해보니 불법의 대의를 체득했지만 깨달음의 자취도 없고 지옥과 극락을 초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 {증도가}에서 말하는 것처럼, "불도의 수학을 일체 끊고(絶學) 번뇌 망념의 일이 없는 한가한 도인"이 아니면 일원상을 수용할 수가 없다는 의미이다. "큰 자라를 낚을 때는 올가미를 던져라"라고 읊은 것은 자라는 낚싯대로 잡는 것이 아닌 것처럼, 진조와 같은 거물은 자라를 잡는 방법은 일원상의 올가미를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설두는 "천하의 납승도 자복화상이 던진 이 일원상의 올가미를 벗어날 수가 없다"고 칭찬하고 있다.



[第034則]不曾遊山
〈本則〉擧。仰山問僧。近離甚處。僧云。廬山。山云曾遊五老峰麽。僧云。不曾到。山云。闍黎不曾遊山。雲門云。此語皆爲慈悲之故。有落草之談。
〈頌〉出草入草。誰解尋討。白雲重重。紅日杲杲。左顧無瑕。右盻已老。君不見。寒山子。行太早。十年歸不得。忘卻來時道。


벽암록 34칙 앙산화상이 산놀이를 묻다

“산놀이는 본래심 체득한 유희삼매의 삶”

{벽암록} 제34칙은 앙산혜적 선사가 어느 스님에게 '여산의 오로봉에 산놀이한 적이 있었는가'를 질문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앙산 화상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최근 어디서 왔는가?' 스님은 대답했다. '여산에서 왔습니다.' 앙산 화상이 물었다. '오노봉(五老峯)에도 가 보았는가?' 스님은 대답했다.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앙산 화상이 말했다. '그대는 아직 산놀이를 하지 못했군!' 운문 선사가 말했다. '이 말은 모두 자비심 때문에 중생을 위한 방편의 말(落草之談)이다.'"

擧. 仰山問僧, 近離甚處. 僧云, 盧山. 山云, 曾遊五老峰. 僧云, 不曾到. 山云, 사黎不曾遊山. 雲門云, 此語皆爲慈悲之故. 有落草之談.

이 공안은 {운문광록} 중권(中卷)에 수록하고 있다. 앙산혜적(仰山慧寂, 807~883) 선사는 위산영우 선사의 제자로 위산과 앙산의 선풍을 종합하여 일원상(一圓相)을 제시하는 독창적인 위앙종의 종지를 천양한 훌륭한 선승으로 {벽암록} 18칙 평창에도 언급하고 있다. {임제록}에도 임제의 행록과 선문답에 위산과 더불어 촌평을 붙이고 있는 것처럼, 독자적인 안목으로 임제의 지혜작용(禪機)을 비평하면서 인정하고, 예언하는 말들을 수록하고 있다. 이것은 {임제록}의 편집자가 당시 최고의 선승으로 안목을 구족한 위산과 앙산의 권위를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조당집} 18권에 앙산은 날마다 법당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고 한다. "그대들 모두 각자가 광채를 돌이키고 자신을 되찾도록 하라. 나의 말을 기억하지 말라. 나는 시작 없는 예부터 밝음을 등지고 어둠을 향하여 허망을 쫓는 뿌리가 깊어져 단법에 뽑기가 어렵게 된 그대들을 가엽게 여긴다. 그러므로 거짓 방편을 사용하여 여러분들이 수량 겁에 쌓인 수많은 나쁜 지식을 뽑아 버리려고 한다. 마치 누른 나뭇잎으로 아기의 울음을 달래는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이 백가지 재물과 금 은 보화를 한 자리에 뒤섞어 놓고 찾아온 사람의 정도에 맞추어 물건을 파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석두(石頭)는 순금가게(眞金)지만 나는 잡화가게(雜貨)이니 찾아온 사람이 잡화를 찾으면 잡화를 주고, 순금을 찾으면 순금도 준다."

본칙에서 운문이 앙산의 자비심을 언급한 것처럼, 앙산은 다양한 지혜와 방편법문으로 수행자들을 지도하여 각자의 불심을 체득하도록 하면서 "내 말을 기억하지 말라(莫記吾語)"고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은 마조의 설법에도 강조하고 있는데, 나의 설법은 우는 아기를 달래는 일시의 방편과 같은 것이니 내 말에 집착하지 말고 불법의 진실을 각자 체득하라고 주장한 말이다.

어떤 스님이 앙산 화상을 참문 하러 왔기에 앙산은 "그대는 최근 어디서 왔는가?" 라고 물었다. 이러한 질문은 선지식이 처음 온 학인에게 말하는 평상시의 인사말이기도 하지만 반드시 학인의 수행능력을 시험하기 위해서 던지는 문제인 것이다. 그 스님은 "여산(廬山)에서 왔습니다"라고 정직하게 대답했다. 너무나 정직하게 대답하고 있기 때문에 본분에 계합된 맛이 있기에 원오는 "정직한 사람이라, 앙산은 이 스님의 안목을 파악하기 어렵게 됐다"고 코멘트 하고 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더 물어봐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던진 말이 "그러면 오노봉(五老峯)에도 올라가 보았는가?"라는 질문이다. 여산은 중국 강서성 북쪽에 있는 산으로 백련사의 혜원(慧遠) 법사가 은거 수행한 곳으로 유교의 도연명(陶淵明), 도교의 육수정(陸修靜)의 대표적인 은거수행자 3인이 담소하며 여산에 흐르는 호계라는 개울을 처음 건너게 된 '호계삼소(虎溪三笑)'라는 고사로 유명하며, 또한 송대 소동파가 동림상총 선사를 참문하여 참선하고 깨달음을 체득한 뒤에 읊은 "여산은 안개, 절강은 조수"라고 읊고 있는 절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여산의 서쪽에는 향로봉(香爐峰)이 있고, 남쪽에는 오노봉이라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솟아 있는 아름다운 경치이기 때문에 관광지로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방문스님과 선문답 통하지 않아
중생 위한 다양한 방편법문 설해

앙산 화상이 스님에게 "오노봉에 산놀이 가 보았는가?"라는 질문은 이 스님을 시험하기 위한 두 번째 의 질문이었다. 그 스님은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라고 정직하게 대답했다. 정말 앙산 화상이 질문한 내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앙산 화상이 질문한 '오노봉'은 여산의 오노봉을 제기한 것이지만, 단순히 경계를 묻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본래 구족한 깨달음의 경지인 오노봉을 말한다. {벽암록} 23칙에서 말하는 묘봉산의 정상과 같은 의미로 각자의 발아래서 전개되는 진실의 세계, 지금 여기서 자기의 본래심으로 체득한 깨달음의 경지를 오노봉이라고 말한 것이다. 자기와 깨달음의 경지인 오노봉이 하나가 되어 지금 여기 자신의 삶에서 전개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세월을 행각한다고 할지라도 불법의 깨달음을 체득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신과 오노봉이라는 경계와 주객(主客)의 대립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앙산 화상은 "그대는 불법의 궁극적인 경지를 체험했는가?"라는 질문을 "오노봉에도 가 보았는가?" 라고 질문한 것인데, 그 스님은 정직하게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있다. 앙산화상은 "그대는 아직 한 번도 산놀이를 해보지 못했군!"이라고 말했다. 앙산 화상이 말하는 산놀이는 각자가 구족하고 있는 본분(本分)의 산(山: 깨달음의 경지)을 말하며, 본래면목, 혹은 본지풍광을 체득하여 유희삼매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한마디의 말이다. 원오도 "이런 스님과 대화를 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선문답으로 대화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은 무의미한 것이다.

운문 선사는 본칙의 선문답에 대하여 "이 말은 모두 자비심 때문에 중생을 위한 방편의 말(落草之談)"이라고 비평하고 있다. 낙초지담(落草之談)이란 말은 운문의 독창적인 말로서 사바세계(풀밭)에서 중생을 위하여 자비심의 방편법문을 설하는 것을 말한다. 즉 앙산 화상은 그 스님을 위해서 지극한 자비심으로 방편 법문을 설한 위대한 선승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말이다. 원오는 "요컨대 산길을 알려면 산에 갔다 온 사람이어야 한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운문 선사가 오노봉에 산놀이를 한 경험이 있는 선승이기 때문에 앙산의 경지를 잘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비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본칙은 지극히 평범한 선승들의 일상 대화로서 평상심으로 깨달음(道)의 삶을 일상생활에서 전개하고 있는 모습을 여실하게 전하고 있는 것처럼, 선의 수행은 평상시의 대화에서 본래심을 상실하지 않고, 잠시라도 방심할 수 없는 일상생활의 대화로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처음 "풀밭에서 나오고, 풀밭에 들어가고"라는 말은 앙산의 경계는 깨달음을 체득하게 하는 향상(向上)과 중생 구제를 위한 자비심의 향하(向下)를 자유자재로 펼친 선승이라고 '출초입초(出草入草)'라고 읊고 있다. 이러한 앙산의 자유 자재한 경지를 "그 누가 판단 할 수 있을까?" 앙산의 향상과 향하를 마음대로 전개하는 출입자재한 경지를 "흰 구름 겹겹이 쌓이고, 붉은 해는 높이 솟았네"라고 읊고 있다. 즉 구름에 쌓인 앙산의 깨달음의 경지(向上)를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붉은 태양이 솟아 오노봉(向下)의 모습이 나타난다. 또한 오노봉은 팔면이 영롱한 옥과 같이 조금도 흠(티)이 없는 것처럼, 앙산은 철저히 무심의 경지에서 설법하고 있으며, 일체의 범부의 경계를 초월했다는 의미를 "왼쪽으로 돌아봐도 흠이 없고, 오른쪽으로 돌아보니 벌써 늙어 버렸다"고 읊고 있다. '늙었다'는 말은 범부의 경지를 완전히 뛰어 넘은 의미이다.

또 설두는 오노봉의 산놀이에 대하여 한산시를 인용하여 "그대는 들어보지 못했는가? 한산자에 대하여. 너무 일직 길을 떠나, 십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못하고, 왔던 길마저 잊어버렸다"고 읊고 있다. 앙산의 오노봉 산놀이를 천태산 근처에서 한산과 습득이 무심의 경지에서 산놀이를 하는 유희삼매와 대비하고 있다.



[第035則]前三三後三三
〈垂示〉垂示云。定龍蛇分玉石。別緇素決猶豫。若不是頂門上有眼。肘臂下有符。往往當頭蹉過。只如今見聞不昧。聲色純眞。且道是皂是白。是曲是直。到這裏作麽生辨。
〈本則〉擧。文殊問無著。近離什麽處。無著云。南方。殊云。南方佛法。如何住持。著云。末法比丘。少奉戒律。殊云。多少衆。著云。或三百或五百。無著問文殊。此間如何住持。殊云。凡聖同居龍蛇混雜。著云。多少衆。殊云。前三三後三三。
〈頌〉千峰盤屈色如藍。誰謂文殊是對談。堪笑淸涼多少衆。前三三與後三三。

벽암록 35칙 무착과 오대산의 문수보살

“오대산 대중은 분별심으로 계산할 수 없어”

{벽암록} 제35칙은 무착문희(文喜)와 오대산의 문수와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문수가 무착에게 물었다. '최근 어디를 떠나 왔는가?' 무착이 말했다. '남방에서 왔습니다.' 문수가 물었다. '남방에서는 불법을 어떻게 실천(住持)하는가?' 무착이 말했다. '말법시대의 비구가 계율을 잘 지키지 않습니다.' 문수가 말했다. '대중이 얼마나 되는가?' 무착이 말했다. '300명에서 500명 정도입니다.' 무착이 문수에게 질문했다. '여기서는 어떻게 불법을 실천(住持) 합니까?' 문수가 말했다. '범부와 성인이 함께 있고, 용과 뱀이 뒤섞여 있다.' 무착이 질문했다. '대중이 얼마나 됩니까?' 문수가 말했다. '앞도 삼삼(三三), 뒤도 삼삼(三三)'이다."

擧. 文殊問無著, 近離什處. 無著云, 南方. 殊云, 南方佛法, 如何住持. 著云, 末法比丘, 少奉戒律. 殊云, 多少衆. 著云, 或三百, 或五百. 無著問文殊, 此間如何住持. 殊云, 凡聖同居, 龍蛇混雜. 著云, 多少衆. 殊云, 前三三後三三.


'三三'은 숫자개념 초월한 무한 수
차별심 없는 문수의 지혜 드러내

본칙에 대한 단편은 {조당집} 11권 보복전 등에 전하고 있지만, 이렇게 정리된 것은 {설두송고} 35칙이 처음인데, {풍혈록(風穴錄)}에 의거한 것으로 보인다. 무착(無着) 선사는 두 사람이 전한다. 한 사람은 {송고승전} 20권에 '오대산 화엄사 무착'. 우두종 혜충(慧忠) 선사의 법을 이은 사람으로 {광청량전(廣淸凉傳)}에도 전한다. 문수보살이 일만(一萬)의 권속과 함께 오대산에 상주한다는 신앙은 {화엄경}이 전래되면서 일어났으며, 중국 화엄종의 형성과 더불어 성행하게 되었고 밀교가 전래되면서 정점에 이른다. 그래서 많은 수행자들이 오대산의 문수보살의 화신(化身)을 친견하려고 순례하는 행렬이 줄을 이었고, 수많은 감통과 영험을 전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신라의 자장법사도 오대산의 문수보살을 친견한 이야기를 전한다.

또 한 사람은 {송고승전} 12권, {전등록} 12권의 앙산혜적의 법을 이은 항주용천원 문희(文喜. 821~900) 선사이다. {오등회원} 9권에는 화엄사 무착과 같은 사람으로 보고 있는데 연대적으로는 무리가 있다. '평창'에서는 남방에서 활약한 문희 선사로 보고 있다.

무착이 오대산 화엄사의 금강굴에서 문수의 화신인 노인과 만났다. 노인은 균제동자를 불러 무착에게 차를 대접하도록 하였는데, 다구(茶具)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훌륭한 파리(璃)제품이며 다과(茶菓)도 입에 넣자 경쾌함을 느꼈다. 무착이 동자에게 한마디 청하자, 동자는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마음이 깨끗함이 참된 보배요, 더럽히지 않은 그 마음이 청정법신이로다"라고 읊었다. 목소리가 끝나는 순간 동자의 모습도 반야사의 금강굴도 자취를 감추었다. 깜짝 놀란 무착은 머리 위에 오색의 구름 가운데 금모(金毛)의 사자를 탄 문수보살이 동자를 데리고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는 일단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 본칙의 공안이 제기된 것인데, 무착은 그 노인이 문수보살의 화신인줄도 모르고 대화를 다음과 같이 나누고 있다.

문수가 오대산에 순례 온 무착에게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라고 질문하니 무착은 정직하게 "남쪽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불법의 근본에서 볼 때 동서와 남북은 없다. 자기 중심의 차별심으로 본 방향이다. 그래서 문수가 "남방에서는 불법을 어떻게 실천(住持)하는가?"라고 질문했다. 원래 '실천[住持]'은 불법을 깨달아 지니며,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무착이 "말법(末法)시대에는 비구가 계율을 잘 지키지 않습니다"라고 솔직하게 현상을 말했다.

불교에서는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의 시기로 나누며 말법은 불법이 쇠퇴된 시기를 말한다. 석존이 입멸하여 500년은 정법의 시대로 부처님의 가르침(敎法)에 따라서 수행자가 깨달음을 증득하는 정법이 잘 유지되는 시기이다. 다음 1000간년은 상법의 시대로 부처님의 정법을 깨닫는 수행자가 없이 가르침과 수행자만 있고 正法의 흉내만 내는 시기이다. 부처님이 입적한 1500년 이후는 말법의 시대로 불법의 가르침은 있지만 수행자와 깨달음을 증득하는 사람이 없다는 시대구분이다.(참고로 선불교에서는 이러한 시대구분을 무의미한 것으로 본다) 원오는 "무착이 '너무 정직한 사람'이지만 문수의 지혜를 체득하지 못했다"고 비평하고 있다. 문수는 "그러면 계율을 잘 지키는 대중은 얼마나 되는가?"라고 묻자, 무착은 "약 300명에서 500명 정도"라고 너무나도 정직하게 대답하고 있다. 원오는 무착의 대답에 "들여우"로서 "허물을 들어냈다"고 평했다. 순진하기는 하지만 계율에 의존하여 독자적인 선기가 없는 선승의 허물을 들어냈다고 비평한 것이다.

이제는 무착이 문수에게 "여기 오대산에서는 어떻게 불법을 실천(住持) 합니까?"라고 질문했다. 문수는 "범부와 성인이 함께 있고, 용과 뱀이 뒤섞여 있다"라고 대승 보살도의 정신을 그대로 대답하고 있다. 오대산은 일만의 보살이 함께 하며 육도에 윤회하는 일체 중생과 정토(淨土)에 동거(同居)하고 있는 입장이다. 즉 무착은 계율을 지키는 남방의 수행자를 300~500명이라는 숫자로 구분하여 제시하였지만, 문수는 불법의 근본에서 범부와 성인, 용과 뱀을 나누지 않고, 남녀(男女)와 선악(善惡)의 차별을 초월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대승불교의 정신이 제법의 차별적인 현상을 그대로 본체가 평등한 실상인 것으로 보는 것이 문수의 지혜인 것이다.

무착은 "그러면 오대산의 대중이 얼마나 됩니까?"라고 질문하자, 문수는 "앞(前)도 삼삼(三三), 뒤(後)도 삼삼(三三)"이라고 대답했다. 문수를 본받아 묻는 무착의 질문은 바보 같은 질문이다. 범부와 성인의 숫자가 정해진 것인가? 범부와 성인, 용과 뱀의 숫자는 무궁무진인 것이다. 범부도 무량무수요 불보살도 무량무수인데, 오대산의 대중을 숫자로 묻고 있기에 문수는 "앞에도 삼삼(三三), 뒤에도 삼삼(三三)"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무착이 300이나 500이라는 숫자는 잘 알 수 있지만, 문수의 대답은 세상에서는 파악 할 수도 없고 계산할 수도 없는 숫자 말이다. 원오는 "천수천안 대비로서도 셈할 수 없다"고 평하고 있다. 너무 많은 숫자이기 때문에 중생의 분별심으로는 계산 할 수 없다는 말이며, 숫자적인 견해를 초월한 입장이다.

{전등록} 13권 자복화상전에 "옛사람이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이라고 말한 뜻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선사는 "그대 이름이 무엇인가?" "아무개입니다" "차나 한잔하게"라고 대답하고 있다. 삼삼(三三)은 보통의 숫자가 아니라 한정된 차별의 숫자개념을 초월한 무한의 숫자를 말한다. 또 {조당집} 12권 용회(龍回)화상전에는 "옛 사람이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이라고 말했는데 무슨 뜻입니까?"라는 질문에 "서산(西山)에는 해나 뜨고 동산(東山)에는 달이 진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고정관념으로 사량분별하지 말라는 말이다.

원오는 '평창'에 {오등회원}에서 인용하여 무착과 문수의 대화를 계속 소개하고 있는데, 요컨대 이 공안은 무착 선사가 범부와 성인이 함께 사는 정토를 멀리서 추구하고, 숫자로 불법을 판단하고 있는 미혹한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오대산에 환화(幻化)의 사찰에서 문수보살과 만나 대화를 나눈 한바탕의 연극을 꾸며서, 미혹한 중생의 차별심을 초월하여 불심의 경지를 체득하도록 제시하고 있는 법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설두 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천개의 산봉우리 굽이굽이 쪽빛처럼 푸르른데, 그 누가 문수와 대담을 하였다고 하겠는가? 우습다. 청량산에는 대중이 얼마나 되느냐고? 앞에도 삼삼(三三)이요, 뒤에도 삼삼(三三)이다" 첫 구절 '천 개의 산봉우리'는 먼저 오대산의 전경이 청정법신의 세계임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다. 불법의 본질(진실)의 입장에서 볼 때 무착과 문수라는 이름도 없는데 누가 문수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방편의 입장에서 볼 때 무착이 환화의 사찰에 머물며 문수와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고 하지만, 무착은 노인을 문수로 알지 못했네. 청량(淸凉)은 문수보살의 정토인 오대산을 말하는데, 대중이 얼마냐고 숫자를 묻는 것은 우스운 말이다. 불법을 수량으로 파악하려는 분별심을 비웃고 있다. 그래서 문수는 "앞에도 삼삼(三三)이요, 뒤에도 삼삼(三三)"이라고 설두가 다시 읊고 있다.



[第036則]芳草去落花回
〈本則〉擧。長沙。一日遊山。歸至門首。首座問。和尙什麽處去來。沙云。遊山來。首座云。到什麽處來。沙云。始隨芳草去。又逐落花回。座云。大似春意。沙云。也勝秋露滴芙蕖。
〈頌〉大地絶纖埃。何人眼不開。始隨芳草去。又逐落花回。羸鶴翹寒木。狂猿嘯古臺。長沙無限意。咄。

벽암록 36칙 장사 화상의 봄날 산놀이

삼매에 빠진 산놀이…일체 차별경계 초월

{벽암록} 제36칙에는 장사경잠(長沙景岑) 화상이 꽃피는 봄날에 산놀이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장사 화상이 하루는 산을 유람하고 돌아와 대문 앞에 이르자, 수좌가 질문했다. '화상은 어디를 다녀오십니까?' 장사 화상이 말했다. '산을 유람하고 오는 길이다.' 수좌가 말했다. '어디까지 다녀오셨습니까?' 장사 화상이 말했다. '처음은 향기로운 풀을 따라 갔다가 그리고는 지는 꽃을 따라서 돌아 왔다.' 수좌가 말했다. '아주 봄날 같군요.' 장사 화상이 말했다. '역시 가을날 이슬 망울이 연꽃에 맺힌 때보다야 낫지.' 설두 화상이 착어했다. '대답에 감사드립니다.'"

擧. 長沙, 一日遊山, 歸至門首. 首座問. 和尙什處去來. 沙云, 遊山來. 首座云, 到什處來. 沙云, 始隨芳草去, 又逐落花回. 座云, 大似春意. 師云, 也勝秋露滴芙渠.(雪竇著語云, 謝答話)


산천의 풀.꽃과 완전 하나된 경지
'시방세계가 온통 사문의 눈' 설파

이 공안의 출처는 잘 알 수 없지만, 장사 화상의 전기는 {조당집} 17권, {전등록} 10권 등에 전하고 있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장사(長沙)의 녹원사(鹿苑寺) 초현(招賢) 화상은 남전(南泉) 선사의 법을 이었으며 조주(趙州)와 자호(紫胡)스님과 동시대 인물이다. 선지의 작용이 민첩하여 상대방이 교학(敎學)으로 질문하면 교학으로 대답하고 게송을 요구하면 게송으로 대답해 주었다. 만일 작가로서 만나고자 하면 작가로서 맞이해 주었다. 앙산혜적 선사는 평소 선지의 작용(機鋒)으로는 제일인자이다. 하루는 장사 화상과 함께 달구경을 하다가 앙산스님이 달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마다 이것(불성)이 있지만 사용하지 못할 뿐이다." 장사 화상이 말했다. "옳치 그것 좀 빌려 써 봤으면 좋겠다." 앙산이 말했다. "화상이 한번 사용해 보세요." 그러자 장사 화상은 앙산을 한 발로 걷어차서 넘어뜨렸다. 앙산은 일어나면서 말했다. "사숙께서는 마치 호랑이(大蟲) 같군요." 이후로 사람들이 장사 화상을 잠대충(岑大蟲: 높은 산의 호랑이)이라고 불렀다. 장사는 호남성에 있는 지명으로 가까이 동정호(洞庭湖)가 있는 산수(山水)의 경치로 유명한 명승지이며, 전설로 전하는 무릉(武陵) 도원(桃園) 등이 있는 지방이다.

{전등록} 10권에는 장사화상의 독특한 법문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내가 만일 매양 종교(宗敎)만을 선전한다면 법당 앞에 풀이 한길이나 자라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시방세계가 온통 사문의 눈이요, 시방세계가 온통 사문의 온몸이요, 시방세계가 온통 자기의 광명이요, 시방세계가 온통 자기 광명속의 것이며, 시방세계가 온통 자기 아닌 것이 없다. 내가 항상 그대들에게 말하기를 삼세의 부처님들과 법계의 대중들이 모두가 마하반야의 광명이라 하였는데, 광명이 나기 전에 그대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광명이 나기 전에는 부처와 중생이라는 징조도 없거늘 산하(山河)와 국토(國土)는 어디서 생겼는가."

즉 아상(我相)과 인상(人相), 주관과 객관의 자기와 부처 등 일체의 상대적인 차별경계를 초월하여 시방의 세계와 자기가 하나 된 경지(萬法一如)에서 지혜롭게 사는 사문이 되도록 설하고 있는 유명한 법문이다.

본칙의 공안은 장사의 녹원사 주지로 활약한 경잠 화상이 하루(一日) 산놀이(遊山)를 한 것을 안목으로 제시하고 있다. 원오는 "금일일일(今日一日)"이라고 평하고 있는 것처럼, 매일 오늘을 지금 여기 자기의 깨달음의 삶으로 철저하게 살고 있는 선승의 지혜를 보여주고 있다. 운문이 "날마다 좋은날(日日是好日)"이라고 말한 것처럼, 오늘 하루를 좋은 날로 보낸 장사화상의 경지를 유산(遊山)으로 보여주고 있다. 선어록에 산놀이를 유산(遊山)과 완산(翫山) 완수(翫水)라는 말로 언급되고 있는데, 세간에서 말하는 유람행각이 아니라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일대사(一大事)를 마친 선승이 일체의 차별경계를 초월하고 본래심 그대로 임운자재하게 인연에 따라서 자적(自適)한 풍류의 모습을 말한다.

장사 화상이 산놀이를 하고 돌아오니 대문 앞에 수좌가 마중을 나왔다. 수좌는 "화상은 오늘 어디를 다녀오십니까?"라고 질문했다. 수좌의 질문은 지극히 일반적인 인사말이지만 장사의 심경을 점검해보려는 선승의 선기(禪機)가 깔려있다. 장사 화상은 "산을 돌아보고 오는 길이네"라고 본심그대로 정직하고 산뜻한 대답을 하고 있다. 수좌는 "어디까지 다녀오셨습니까?"라고 두 번째 점검하는 질문을 던졌다. 만약 여기서 장사 화상이 수좌의 질문에 휘말려서, 어떠한 목적으로 어디 어디를 다녀왔다고 한다면 그것은 차별경계에 끄달리고 구경하는 세간사람의 유람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며, 여기저기에 자취를 남긴 범부의 행적이 된다. 선승은 범부심을 초월한 소요자적한 유산이 되어야 하며, 자취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청정한 지금 여기의 지혜로운 삶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장사 화상은 수좌의 점검하는 질문에 편승하지 않고, "처음은 향기로운 풀을 따라 갔다가 그리고는 지는 꽃을 따라서 돌아 왔네"라고 했다. 장사 화상은 뛰어난 문장력을 구사하는 훌륭한 시인이기 때문에 멋있는 시로서 대답했다. 즉 갈 때는 향기 좋고 싱싱한 풀을 따라서 무아지경이 되어 갔기 때문에 산을 올라갔는지 계곡을 지나갔는지 기억도 없었다. 올 때는 나비가 꽃을 찾아 날아다니는 것처럼, 바람에 날리는 꽃을 쫓고 함께 지나다 보니 어느새 절에까지 오게 되었네. 산천의 풀과 자기가 하나가 되고, 꽃과 자기가 완전히 하나가 된 경지이다. "시방세계가 온통 사문의 온몸이며 눈"이라고 설파한 것처럼, 유희삼매의 경지에서 산놀이를 하고 있다. 수좌는 "아주 봄날의 소풍놀이 같군요"라고 맞장구를 치면서, "화상은 산놀이에 너무 치우쳐 있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일침을 은근히 던지고 있다.

장사 화상은 수좌의 심경을 날카롭게 간파하고 "역시 가을날 이슬 망울이 연꽃에 맺힌 때보다야 낫지"라고 시구로 응대하고 있다. 부거(芙)는 연잎(荷葉)의 다른 이름이다. 가을날 차디찬 이슬이 연잎에 떨어지는 모습은 정말 처량한 것으로 조금도 따뜻한 기운이 없다. 이러한 심경을 선에서는 일체의 차별경계를 초월한 향상사(向上事)의 일로서 선승의 본분을 의미한다. 장사 화상은 나는 향하문(向下門)의 입장에서 중생과 함께 하는 낙초(落草)의 봄기운이 훨씬 좋다는 의미를 시로 읊고 있다. 오늘 하루 산놀이를 가고 옴에 삼라만상의 차별경계와 함께 하였지만 어디에도 깨달음의 자취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장사 화상의 심경이 산뜻하게 들어나고 있다. 수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선문답을 보고 설두화상은 수좌가 인사말을 잊고 있기 때문에 그를 대신하여 "대답에 감사드립니다"라고 인사말을 착어로 하고 있다. 즉 설두는 장사화상에게 감사의 뜻을 밝히고 있는 것인데, 그의 본의는 장사의 산놀이가 본분사에 계합된 선승의 삶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설두 화상은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대지에는 티끌 한점 없는데, 어떤 사람인들 눈을 뜨고 보려하지 않으랴! 처음엔 향기로운 풀을 따라 갔다가, 다시 지는 꽃을 따라서 돌아왔네. 야윈 학은 차가운 나무 위에서 발돋음 하고, 미친 원숭이는 옛 누대에서 휘파람을 분다. 장사의 무한한 뜻이여! 쯧쯧." 대지는 티끌 한 점 없다는 말은 시방세계와 자기와 하나로서 일체 차별경계를 초월한 장사의 청정한 심경을 말하고 있다. 누구나 두 눈을 뜨고 정법의 안목을 체득한 지혜의 눈으로 보면 장사와 같이 본래 청정한 경지를 볼 수 있다. 오늘 장사의 무심한 산놀이는 어떠했나. 처음은 향기로운 풀을 따라 갔다가 지는 꽃을 따라서 돌아왔다고 하는 것처럼, 일체의 사량분별도 없이 자취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철저한 유산삼매였다고 칭찬한 말이다. 장사는 봄날의 산놀이에 푹 빠져있는데, 나라면 이러한 산놀이 소식도 있다고 하면서 야윈 학이 고목에서 앉아 있는 것과 슬픈 울음을 우는 원숭이를 등장시켜서 완전히 다른 경지를 제시하고 있다. 장사의 유산(遊山)은 의미심장하기만 하다. 아! 아!



[第037則]何處求心
〈垂示〉垂示云。掣電之機徒勞佇思。當空霹靂。掩耳難諧。腦門上播紅旗。耳背後輪雙劍。若不是眼辨手親。爭能搆得。有般底。低頭佇思。意根下卜度。殊不知髑髏前見鬼無數。且道不落意根。不抱得失。忽有箇恁麽擧覺。作麽生祗對。試擧看。
〈本則〉擧。盤山垂語云。三界無法。何處求心。
〈頌〉三界無法。何處求心。白雲爲蓋。流泉作琴。一曲兩曲無人會。雨過夜塘秋水深。

벽암록 37칙 반산화상의 삼계 무법

“마음이 그대로 부처, 부처가 그대로 사람”


{벽암록} 제37칙은 반산보적화상의 삼계(三界) 무법(無法)이라는 상당 법문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삼계(三界)는 무법(無法)인데, 어디에서 마음을 구하랴!

擧. 盤山, 垂語云, 三界無法. 何處求心.

본칙의 공안은 {전등록} 제7권, 반산 화상의 유명한 상당법문의 일절인데, {조당집} 제15권에도 똑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반산 화상은 마조 문하의 뛰어난 선승 가운데 한 사람인 보적(寶積) 선사로 독창적인 법문을 설하고 있다. {전등록}과 {조당집}에는 그의 상당법문을 수록하고 있을 뿐, 그의 생애나 전기를 자세히 전하지 않고 있는데, 그의 문하에 미치광이 같은 풍광승(風狂僧)으로 유명한 보화(普化)선사가 배출되었다. 보화는 {임제록}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 선승으로 임제가 북쪽에서 행화(行化)를 펼치도록 도와준 선승이며, 임제를 어린애로 취급하는 등 뛰어난 역량을 갖춘 선승이었다.

여기서 먼저 {조당집}에 전하는 반산 화상의 법문을 들어보자. "선덕 여러분! 비유하면 칼을 휘둘러 허공에 던지면 칼이 (허공에) 미치거나 미치지 못함을 따지지 못한다. 이것은 허공에는 자취(흔적)가 없고 칼날은 손상하지 않는 경지이다. 만일 능히 이와 같이 (마음을 허공과 같이 텅 비우면)마음과 마음이 서로 분별이 없어져 마음이 그대로 부처요, 부처가 그대로 사람이다. 사람과 부처가 다르지 않아야 비로소 도(道)를 이룬다(全心卽佛, 全佛卽人, 人佛無異 始爲道矣) … 선덕들이여! 스스로가 잘 살펴보도록 하라! 아무도 대신해줄 사람이 없다. 삼계(三界)는 무법(無法)이거늘 어디에서 마음을 구하며, 사대(四大: 地水火風)가 본래 텅 비어 공(空)한데 부처가 어디에 의지하리요. 마음(旋機)이 움직이지 않으니, 고요하여 근원이 없어졌고 마주보면서 곧바로 드러낼 뿐 다시 다른 일은 없다."

원오도 '평창'에 반산 화상의 법문을 인용하고 있는데, 설두는 본칙에 "삼계가 무법인데 어디서 마음을 구하랴!(三界無法 何處求心)"라는 일절을 문제로 제시하고 게송으로 읊고 있다. 삼계(三界)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로 중생이 살고 있는 세계를 말한다. 원래 고대 인도의 세계관에서 주장한 것으로 우주에 이러한 세계가 있다고 믿었지만, 불교에서는 중생이 살고 있는 삼계를 도덕적인 표준으로 삼고, 정신상의 수행단계로 보고 있다. 즉 욕계는 음식에 대한 욕망, 이성에 대한 욕망, 수면에 대한 욕망, 재산과 명예에 대한 욕심이 치성한 중생의 세계를 말한다. 색계의 색(色)은 형체로 육체를 말하며, 육체가 있지만 욕심이 없는 중생의 세계를 말한다. 무색계는 형체가 없고 육체가 보이지 않는 신이나 부처님, 천인(天人) 등의 경계를 말하는데, 이것은 중생이 살고 있는 이 사바세계를 말한다. 욕심도 있고, 육체도 있고, 동물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생리적인 현상도 있으며, 부처의 자비심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반산 화상이 말하는 삼계는 단순히 중생이 살고 있는 세계를 말하며, 넓은 의미로 시방세계인 무한의 우주를 지칭한 것인데, 이러한 삼계는 무법(無法)이라고 설하고 있다. 무법(無法)은 공(空)의 의미이다. {대품반야경} 제22권에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일체 종지(種智)는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법(法)에 자성이 없으면 이것을 무법(無法)이라고 한다"라고 설하며, 또 "일체의 모든 법은 인연의 화합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법(法)은 독자적인 자성(自性)이 없다. 만약 자성이 없다고 한다면 이것을 무법(無法)"이라고 한다. {열반경} 26권에도 "공(空)은 바로 무법(無法)"이라고 설하고 있다. 일체의 만법은 무자성(無自性)이며, 공한 것이기 때문에 텅 비어 공(空)하다고 하고, 또 무법(無法)이라고 하며, 인연의 화합의 법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무생(無生)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는 화엄철학과 유식사상에서는 삼계는 오직 마음뿐이라는 '삼계유심(三界唯心)'을 주장하고 있으며, {능엄경}과 많은 어록에서는 "마음 밖에 달리 법이 없다고 한 심외무법(心外無法)"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불교인들이 가끔 "법(法)은 없으나 마음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불심(佛心)이나 불성(佛性)을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그래서 반산화상이 이러한 전도되고 착각하는 중생의 병(禪病)을 치료하기 위해서 "어디서 마음을 구하려고 하는가?"라고 했다.


진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금강경}에 "과거심도 얻을 수가 없으며, 현재심도 얻을 수가 없고, 미래심도 얻을 수가 없다"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은 모양도 형체도 색깔도 없기 때문에 그 마음의 본체는 얻을 수가 없다. 이러한 마음의 작용으로 나타낸 것이 중생의 삼계(三界)인데, 삼계도 불가득(不可得)인 것이며, 일체의 모든 존재나 삼라만상도 텅 비어 공(空)한 것이기 때문에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 "만약 모든 모양이 있는 것을 모양이 아닌 것으로 본다면 여래를 친견하리라"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일체의 차별경계를 초월한 무심(無心)의 경지에서 지금 여기 자기의 일을 지혜롭게 하고 있는 그 당체(當體)가 여래이며 법신(法身)이라는 사실을 체득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달마가 혜가에게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오라! 내가 그대를 위하여 안심시켜 주마!"라고 말하자 혜가는 "불안한 마음을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다(不可得)"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래서 달마는 "내가 그대를 안심시켜 주었다"고 하여, 혜가는 얻을 수가 없는(不可得) 그 마음이 안심(安心)을 체득한 경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유명한 안심법문(安心法門)을 전하고 있다. 반산 화상이 "삼계가 무법(無法)인데 어디서 마음을 구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은 어느 곳에서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일체가 텅 비어 공(空)한데 어디서 얻을 수가 있겠는가? 구하고 얻을 수도 없는 마음을 구하려고 하는 것은 물 속에 비친 달을 주우려고 하는 것과 같이 착각과 환상에 떨어지게 된다. 불법은 심법(心法)이다. 마음 밖에서 불법이나 진실을 추구하고 불도를 구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이다. 그래서 "마음 밖에 법은 없다" "마음 밖에서 불도를 구하는 것은 외도"라고 선승들이 강조하고 있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삼계는 무법(無法)인데 어디서 마음을 구할 수가 있으랴!" 설두는 먼저 반산 화상의 설법을 그대로 제시하고 있다. 원오는 "이 말은 귓전에 아직 울리고 있네" "또다시 이 말을 거론하고 있는가?"라고 하면서 앵무새처럼 이 말만 언급하지 말고 자신이 잘 점검해 보라고 착어하고 있다. "흰 구름은 일산이요, 흐르는 물소리 비파소리로다"라는 말은 삼계(三界) 무법(無法)인데 마음을 어디서 구하랴! 반산 화상의 법문을 단적으로 읊고 있다. 멀리 청산을 바라보면 흰 구름이 유유히 왕래하고 산 위를 덮은 일산처럼 보인다. 고개를 숙여 흐르는 계곡물을 바라보면 흐르는 물소리가 마치 거문고를 연주하는 음악소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백운(白雲)은 무법(無法)의 상태를 과시하지도 않고, 흐르는 물도 무심(無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그냥 유유히 왕래하고, 도도하게 흐르고 있을 뿐이다. 무법(無法), 무심(無心)을 읊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곡조를 아는 사람이 드물다. 그래서 "한 곡조, 두 곡조 아는 사람 없다"라고 읊고 있다. 이 말은 {열자(列子)} '탕문편'에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연주하면 종자기(鐘子期)는 조용히 귀를 기울여 그 연주를 듣고 이해하였다는 지음(知音)의 고사에 의거하고 있다. 즉 무심하게 흐르는 물소리의 음악을 백아도 연주 할 수가 없고, 종자기도 듣고 이해 할 수가 없는데 어찌 음악도 모르는 사람이 한 곡 두곡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설두는 줄이 없는 거문고(無絃琴)의 연주를 어떻게 들었는가? "비 개인 밤 못 가엔 가을 물이 깊다"라고 읊고 있는데, 한 곡 두 곡의 연주를 듣고 잘 파악한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즉 비가 많이 온 원인 때문에 연못의 물이 많이 불어났다는 결과가 나타나게 된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인연의 화합으로 법이 생기는 것을 진실이라고 하는 것처럼, 불법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말한다. 그러한 불법의 진실이 멀리 있는 것도 아니요, 추상적인 것도 아니라 지금 여기에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차 마시고 밥을 먹는 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第038則]祖師心印
〈垂示〉垂示云。若論漸也。返常合道。鬧市裏七縱八橫。若論頓也。不留朕跡。千聖亦摸索不著。儻或不立頓漸。又作麽生。快人一言快馬一鞭。正恁麽時。誰是作者。試擧看。
〈本則〉擧。風穴在郢州衙內。上堂云。祖師心印。狀似鐵牛之機。去卽印住。住卽印破。只如不去不住。印卽是。不印卽是。時有盧陂長老出問。某甲有鐵牛之機。請師不搭印。穴云。慣釣鯨鯢澄巨浸。卻嗟蛙步輾泥沙。陂佇思。穴喝云。長老何不進語。陂擬議。穴打一拂子。穴云。還記得話頭麽。試擧看。陂擬開口。穴又打一拂子。牧主云。佛法與王法一般。穴云。見箇什麽道理。牧主云。當斷不斷返招其亂。穴便下座。
〈頌〉擒得盧陂跨鐵牛。三玄戈甲未輕酬。楚王城畔朝宗水。喝下曾令卻倒流。

벽암록 38칙 풍혈화상과 조사의 마음

“불법 체득해야 무쇠소의 무심경지 터득”

{벽암록}제38칙은 풍혈화상이 조사의 심인(心印)은 철우(鐵牛)의 기용(機用)과 같다고 설법하고 있다.

擧. 風穴, 在州衙內, 上堂云, 祖師心印, 狀似鐵牛之機. 去卽印住, 住卽印破. 只如不去不住, 印卽是. 不印卽是. 時有盧陂長老出問, 某甲有鐵牛之機, 請師不搭印. 穴云, 慣釣鯨澄巨浸, 却嗟蛙步輾泥沙. 陂, 佇思. 穴喝云, 長老何不進語. 陂, 擬議. 穴, 打一拂子, 穴云, 還記得話頭, 試擧看. 陂, 擬開口. 穴, 又打一拂子. 牧主云, 佛法興王法一般. 穴云, 見箇什道理. 牧主云, 當斷不斷, 返招其亂. 穴, 便下座

풍혈화상이 영주(州) 관청(官衙)의 법당에서 설법하였다. '조사의 마음 도장(心印)의 모양이 무쇠소(鐵牛)의 지혜작용(機)과 같다. 도장을 떼면 집착하는 것이고, 찍어두면 도장으로 쓸모가 없다. 도장을 떼지도 못하고, 그대로 두지도 못하니, 도장을 찍어야 옳은가? 찍지 말아야 옳은가?' 그 때 노파장로가 대중 가운데서 나와 말했다. '나한테 무쇠소의 지혜작용(機)이 있습니다. 화상은 찍지 마시요!' 풍혈화상이 말했다. '고래를 낚아 바다를 맑히는 일은 익숙하지만, 개구리 걸음으로 진흙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에는 흥미 없다.' 노파장로가 한참동안 생각에 잠기자, 풍혈화상이 고함치며 말했다. '장로는 왜 말을 계속하지 못하는가?' 여전히 장로가 머뭇거리자, 풍혈화상은 불자(拂子)를 한번 치고 말했다.

'할 말을 찾고 있는가? 어서 말해봐라!' 노파장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풍혈화상은 또다시 한차례 불자로 치니, 지사(牧使)가 말했다. '불법과 왕법이 똑같군요.' 풍혈화상이 말했다. '그대 지사는 무슨 도리를 보았는가?' 지사가 말했다. '끊어야 할 것을 끊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불러들이게 됩니다.'

풍혈화상은 곧바로 법좌에서 내려왔다.


자신과 무쇠소의 지혜작용 차별한
노파장로의 분별심 날카롭게 비판

본칙의 공안은 {전등록} 13권과 {광등록}15권에 전하고 있다. 풍혈연소(風穴延沼: 896~973)는 송초(宋初) 임제종을 중흥한 선승으로 남원혜옹(慧)의 법을 이었으며, 그의 어록 1권이 {고존숙어록}에 전하고 있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풍혈화상은 임제종의 법통을 이은 고승이다. 임제선사가 처음 황벽의 문하에 있으면서 소나무를 심자, 황벽선사가 말했다. "깊은 산중에서 소나무를 심어서 무엇 하려고?" 임제선사는 "첫째는 산문의 경지를 만들고, 둘째는 후대 사람들의 표시가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풍혈화상이 임제종을 중흥한 선승으로 주목된 것은 {임제록}에 임제가 소나무를 심는 이야기에 위산과 앙산의 대화에서 풍혈화상의 출현을 예언하는 말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풍혈화상이 영주(州) 도지사의 초청으로 관청(官衙)의 법당에서 설법했다. "조사의 마음 도장(心印)은 무쇠소(鐵牛)의 지혜작용(機)과 같다. 도장을 떼면 집착하는 것이고, 찍어두면 도장으로 쓸모가 없다. 도장을 떼지도 못하고, 그대로 두지도 못하니, 도장을 찍어야 옳은가? 찍지 말아야 옳은가?" 당송시대에는 도지사가 고승들을 관청의 법당에 모시고 법문을 청한 사례가 많다. 마조가 홍주(洪州)의 관청안의 법당에서 법문을 하고 거주한 것은 유명하다.

조사의 심인(心印)은 {벽암록}1칙에 달마조사가 인도에서 중국에 온 것은 불심인(佛心印)을 전하기 위한 것이라고 지공화상이 양무제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불심인(佛心印)과 같은 말로 부처와 조사가 이심전심으로 전한 불법의 근본정신으로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도 한다. 풍혈화상은 조사심인의 모습을 "무쇠소의 지혜작용과 같다."고 주장하고 있다. 철우(鐵牛)는 {중화고금주(中華古今注)} '협주(陜州)에 철우의 사당이 있는데, 소의 머리는 하남(河南)에 있고, 꼬리는 하북(河北)에 있다, 우왕(禹王)은 황하의 재난을 달랬다'라고 하는 것처럼, 옛날 우왕(禹王)이 황하(黃河)의 물을 다스리기 위해 무쇠로 만든 소로서 수호신처럼 제사를 올리는 철우이다. 원오가 '천인 만인이 움직이려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착어하는 것처럼, 여기서는 엄청난 작용을 갖고 있으면서 전혀 움직임이 없는 무심의 지혜작용으로 비유하고 있다. 즉 불심을 도장에 비유하여 도장을 종이위에 찍어 두면 그 도장은 사용할 수가 없으며, 도장을 종이에서 떼면 인장의 문자가 종이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문자가 종이에 나타나게 되면, 자취와 흔적을 남기게 된다. 반대로 도장을 종이 위에 놓아두면 도장의 문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도장으로서 쓸모가 없다. 도장 없이 문자를 나타낼 수가 없고, 문자 없는 도장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풍혈화상은 이 문제를 학인들에게 제시하면서 "도장을 찍어야 옳은가? 찍지 말아야 옳은가?" 라고 질문하고 있다.

그 때 노파장로가 "나도 무쇠소의 지혜작용(機)을 본래부터 구족하고 있는데, 화상은 도장을 찍는 형식으로 인가하지 마시요!" 라고 말했다. 노파장로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는데, 노파장로 뿐만 아니라 일체중생이 모두가 무쇠 소(불심)의 지혜 작용을 구족하고 있다. 문제는 이 무쇠 소의 지혜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노파장로는 조사의 심인(心印)이라면 나도 불심을 체득한 지혜가 있으니 선사는 나를 인가해 주시오 라고 제의하고 있는 것이다.

풍혈화상은 노파장로에게 "나는 바다를 혼탁하게 하는 고래를 잡아서 바닷물을 맑히는 큰일은 숙달되어 있지만, 개구리가 진흙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짓거리는 흥미가 없다."고 말했다. '오늘 큰 고래를 한 마리 잡기 위해 불법의 바다에 낚시(문제)를 던졌는데, 겨우 개구리가 걸렸나' 하면서 안목 없는 노파장로를 심하게 비판하고 있다. 즉 노파장로는 자신과 무쇠 소의 지혜작용을 상대적인 차원에서 파악하려고 하고 있는 이원적인 분별의식과 차별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풍혈화상이 날카롭게 비판한 것이다.

노파장로가 한참동안 생각에 잠기자, 풍혈화상이 고함치며 말했다. "장로는 왜 말을 계속하지 못하는가?" 여전히 장로가 머뭇거리자, 풍혈화상은 불자(拂子)로 한번 치고 말했다. "무슨 할말을 찾고 있는가? 어서 말해보게나!" 노파장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풍혈화상은 또다시 한차례 불자로 쳤다. 뭐야! 그대가 체득했다는 무쇠 소의 지혜는 어디서 잠자고 있는가? 라고 다구 치는 말이다. 지사(牧使)가 말했다. "불법과 왕법이 똑같군요." 그러자 풍혈화상은 "그대 지사는 무슨 도리를 보았는가?"라고 질문하니 지사가 "끊어야 할 것을 끊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불러들이게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지사가 한 말은 {사기(史記)} 제도혜왕 세가(齊悼惠王 世家) 등에는 도가의 말로 전하는데, {조정사원}2권에는 황석공(黃石公)의 말이라고 하는데, 출세간이나 세간이나 똑같이 일시적인 임시변통으로는 완전히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불법의 근본정신을 분명히 체득한 지혜가 있어야 언제 어디서나 무쇠 소의 무심한 경지에서 자신이 세운 원력의 일을 지혜롭게 잘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원오는 "옆에 있는 사람이 안목이 있다는 사실" 이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지사의 관찰이 훌륭한 것이라고 칭찬하고 있으며, 또, "동쪽 사람이 죽었는데, 서쪽 집안사람이 조문한다."라고 하면서 노파장로의 안목 없는 죽음을 지사가 조문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풍혈화상은 지사의 대답에 일단 만족하며 곧바로 법좌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노파장로를 붙잡아 무쇠 소에 앉혔다"는 말은 대중 가운데 등장한 노파장로를 어떻게 해서라도 무쇠 소에 앉히려고 노력한 풍혈화상의 자비심을 읊고 있다. 그러나 장로는 자신이 이미 무쇠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삼현(三玄)의 창과 갑옷에 가벼이 덤비지 못하리.' 라고 하는 것은 풍혈화상이 임제의 법손이기 때문에, 가문의 보배라고 할 수 있는 임제의 삼현(三玄), 삼요(三要)의 법문을 갑옷으로 몸을 보호하고 전쟁에 나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대적 할 상대 없었다. {임제록}에 "일구(一句)의 법문에 반드시 삼현문(三玄門)을 갖추고, 일현문(一玄門)에는 반드시 삼요(三要)를 갖추어야 한다"라고 주장한 설법인데, 임제의 법문을 체득한 풍혈의 지혜와 방편법문의 수단이 너무나 뛰어난 것이기에 감히 도전하는 장수가 없었다고 읊고 있다. '초왕(楚王)의 성으로 모여든 물이 일갈(一喝)의 고함소리에 거꾸로 흐른다.' 풍혈화상이 설법하는 영주(州)의 관청은 옛날 춘추시대 초왕의 도읍지로서 초왕의 성을 둘러싸고 흐르는 물을 조종(朝宗)이라고 한다. 모두 바다로 흘러가는 물이기 때문이다. 풍혈화상의 일갈(一喝)은 이 물을 역류(逆流)시키는 힘이 있다고 그의 종풍을 칭찬하고 있다.



[第039則]金毛獅子
〈垂示〉垂示云。途中受用底。似虎靠山。世諦流布底。如猿在檻。欲知佛性義。當觀時節因緣。欲[火+段]百鍊精金。須是作家爐[糒-米+韋]。且道大用現前底。將什麽試驗。
〈本則〉擧。僧問雲門。如何是淸淨法身。門云。花藥欄。僧云。便恁麽去時如何。門云。金毛獅子。
〈頌〉花藥欄。莫顢頇。星在秤兮不在盤。便恁麽太無端。金毛獅子大家看。

벽암록 39칙 운문화상의 황금빛 털의사자

“작약꽃밭 등 삼라만상이 법신의 나툼”


{벽암록} 제39칙은 운문화상의 '작약(芍藥)의 꽃밭', 혹은 '황금빛 털의 사자(金毛獅子)'라고 불리는 공안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질문했다. '떤 것이 청정 법신입니까?' 운문화상이 대답했다. '작약(芍藥) 꽃밭이다.' 그 스님이 또 질문했다. '바로 이러한 법신의 경지에 있을 때는 어떻습니까?' 운문화상이 대답했다. '황금빛 털의 사자로다.'

擧. 僧問雲門, 如何是淸淨法身. 門云, 花藥欄. 僧云, 便恁去時如何. 門云, 金毛獅子.


운문화상과 꽃밭이 하나된 경지 제시
'황금빛 사자'는 선지가 뛰어난 선승

본칙의 공안은 {운문광록} 상권에 전하고 있다. 운문문언(雲門文偃)화상은 {벽암록} 제6칙에서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법문을 하고 있는 것처럼, {벽암록}에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운문선사에 대해서는 생략한다.

어떤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청정법신이란 무엇입니까?"라고 진지하게 질문했다. 대승불교에서 부처는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의 심신(三身)을 구족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육조단경}에서는 자성의 삼신불(三身佛)을 설하고 있는데, 보신은 원력과 서원을 세운 보살이 순간순간 불법의 정신으로 깨달음의 지혜와 자비가 실행되는 것이다. 화신은 보살이 원력과 서원을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시절인연에 맞추어서 자신의 지혜와 자비행을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법신은 불법의 지혜와 자비행을 실천할 수 있는 불심의 지혜작용이다. 즉 원력과 서원을 세운 보살은 위대한 보살행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불법의 정신에 의거한 많은 지혜와 자비행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능력이 없는 보살은 올바른 불법을 펼치는 지혜와 자비심이 없기 때문에 중생의 심병(心病)을 올바르게 진단하고 처방할 수 없는 것이다. 부처는 불법의 지혜와 자비심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구족해야 언제 어디서나 다양한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것인데, 중생의 심병을 진단하는 안목의 지혜작용을 법신이라고 한다. {임제록}에서는 "그대가 지금 한 생각의 청정한 지혜광명이 그 자신의 법신불이다"라고 단적으로 설파하고 있는 것처럼, 선에서는 지금 여기서 자신의 청정한 불심의 영묘한 지혜의 작용를 법신 혹은 본래면목이라고 한다.

따라서 법신은 보신과 화신의 본체(本體)이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법신을 인격적으로 보고 밀교에서는 비로자나불, 법신불이라고 하며, 우주에 가득히 편만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도 "불신은 법계에 두루 충만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태양과 달, 별, 산천초목 등 일체의 모든 삼라만상이 모두 법신의 나툼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금강명경}에도 "부처의 참된 법신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사물에 순응하여 형체를 나타내는 모습이 마치 물속에 비친 달과 같다"라고 설하고 있다.

그런데 부처나 여래라고 하면 신과 같이 고정된 모습과 형체가 있는 존재로 생각하고 집착하기 쉽게 때문에 법신불을 '청정법신'이라고 한다. 허공과 같이 형체나 모습이 없는 무상(無相)의 부처이다. 그렇다면 '청정법신불의 본성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갖게된 스님이 운문선사에게 질문한 것인데, 운문화상은 당시 작약꽃이 만발한 꽃밭을 응시하고 있으면서 즉시 "보라! 이와 같이 아름다운 작약(芍藥) 꽃밭을 보았는가?"라고 대답하고 있다. 작약을 심은 밭에 아름다운 작약의 꽃이 만발하게 피어 있는 그 모습이 다름 아닌 청정법신의 경지이며, 만법이 현전한 소식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그대가 작약 꽃이 만발한 꽃밭을 쳐다보며, 자신과 작약 꽃과 하나가 된 시절인연을 관찰하는 지금 여기 그대자신의 지혜작용 이 외에 달리 청정법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원오는 '북을 치면 울린다'라는 사투리로 착어하고 있는데, 청정법신이라는 북(질문)을 치니 작약꽃밭(소리)이라고 울렸다고 하면서 운문의 대답은 청정법신의 지혜작용을 하나도 숨김없이 그대로 정직하게 들어낸 것이라고 평하고 있다. 원오가 운문화상이 정직하게 대답했다고 평하고 있는 것은 당시 운문화상이 작약꽃밭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한 것이며, 그가 만약 화장실에 있었다면 '마른 똥막대기(乾屎)'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라는 의미을 내포한 코멘트라고 할 수 있다. {운문광록}에 어떤 스님이 "무엇이 부처입니까?"라고 질문하면 운문화상은 가끔 "마른 똥막대기"라고 대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창에도 인용한 것처럼, 어떤 스님이 현사스님에게 "어떤 것이 청정법신입니까?"라고 질문하자, 현사는 "썩은 고름이 뚝뚝 떨어진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운문의 '마른 똥막대기'처럼, 부처나 청정법신은 청정하고 깨끗하다는 차별심, 분별심에 집착된 학인의 선병을 치료하기 위한 처방의 대답인 것이다. 깨끗함은 더러운 것에 대한 상대적인 분별심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일체의 모든 사물은 차별과 분별의 세계에 존재하지만 그 본성은 모두 청정하며 순진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차별과 분별이 없는 청정법신인 것이다. 운문이 '작약꽃밭'이라고 대답한 것은 작약꽃밭을 쳐다보고 있는 운문과 꽃밭이 하나가 된 경지에서 운문법신의 미묘한 지혜작용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질문한 스님은 "일체의 모든 존재가 바로 청정법신의 경지 아닌 것이 없지요 바로 이러한 법신의 경지에 있을 때는 어떻습니까?"라고 곧장 질문했다.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원오는 "대추를 한입에 통째로 삼켰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음식의 참맛을 보지 않고 한입에 집어넣은 녀석이라고 하면서 운문의 대답의 깊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운문화상은 "황금빛 털의 사자로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사자는 뭇 짐승의 왕으로 불법을 체득한 대장부에 비유하고 있는데, 황금빛의 사자는 사자 가운데서도 뛰어난 사자를 말한다. 선에서는 불도의 수행이 무르익어서 선지가 뛰어난 선승을 지칭하고 있거나, 뛰어난 제자를 인가할 때에 사용하는 말이다. 원오는 "칭찬하기도 하고, 깎아내리기도 하였다"라고 착어하고 있는데, 운문화상은 이 스님의 경지를 인가한 것인가? 아니면 인가하지 않은 것인가? 원오는 "주사위를 던진 한판의 승부에 각자가 모두 이겼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질문한 스님과 운문화상을 똑같은 경지에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설두스님은 이 공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작약꽃밭이여! 우물쭈물 하지 말라. 저울의 눈금은 저울대에 있지, 받침대에 있지 않다. 이러함이라! 전혀 잡다함이 없다. 황금빛 사자를 그대들은 살펴보라!" 설두스님은 먼저 운문이 대답한 '작약 꽃밭'을 주제를 먼저 제시하고 있는데, 원오는 "이 말은 아직 귓전에 있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조금 전에 들은 말인데, 들을 때마다 새롭게 들린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운문이 말한 '작약 꽃밭'이라는 말에 집착하면 운문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다.

운문의 진의를 파악하지도 못한 주제에 우물쭈물 하면 아는 체 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운문이 '작약꽃밭'이라고 대답한 것은 저울의 눈금자를 제시한 것인데, 저울의 받침대를 말한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원오는 각자 운문의 언구에 집착하지 말고 스스로 회광반조하여 법신의 지혜작용을 체득하라고 착어하고 있다. 설두는 질문한 스님이 "이러한 법신의 경지에 있을 때는 어떻습니까?"라고 말한 것에 대하여 이 스님은 "전혀 잡다함이 없다"라고 간결하게 읊고 있다.

즉 질문한 스님은 너무나 잡다함이 없이 순진하게 대답하고 있기 때문에 운문의 진의를 파악한 것인지, 파악하지 못한 것인지 짐작할 수가 없다고 원오도 설두의 게송에 동의하고 있다. 천하의 수행자는 특히 이 공안을 참구하여 운문이 '금모사자(金毛獅子)'라고 대답한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 잘 참구해 보라고 문제를 던지고 있다.



[第040則]如夢相似
〈垂示〉垂示云。休去歇去。鐵樹開花。有麽有麽。黠兒落節。直饒七縱八橫。不免穿他鼻孔。且道[言+肴]訛在什麽處。試擧看。
〈本則〉擧。陸亙[一/旦]大夫。與南泉語話次。陸云。肇法師道。天地與我同根。萬物與我一體。也甚奇怪。南泉指庭前花。召大夫云。時人見此一株花。如夢相似。
〈頌〉聞見覺知非一一。山河不在鏡中觀。霜天月落夜將半。誰共澄潭照影寒。

벽암록 40칙 남전화상과 육긍대부

“분별심 갖고 '만물일체' 논하는 건 무의미”


{벽암록}제40칙은 남전화상과 육긍대부(陸亘大夫)와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육긍대부가 남전화상과 대화를 나누면서, 육긍대부가 질문했다. "승조(僧肇)법사는 '천지는 나와 한 뿌리이며 만물은 나와 한 몸'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정말 훌륭한 말이군요." 남전화상이 정원에 핀 꽃 한 송이를 가리키며 대부를 부르면서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이 꽃 한 송이의 꽃을 마치 꿈을 꾼 것과 같이 보고 있다."

擧. 陸亘大父, 與南泉語話次, 陸云, 肇法師道, 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 也甚奇怪. 南泉, 指庭前花, 召大父云, 時人, 見此一株花, 如夢相似.

이공안은 {전등록} 제8권 남전화상전에 수록하고 있는데, 남전화상에 대해서는 이미 {벽암록} 제28칙에서 언급하였다. 육긍대부(陸亘:764~834)는 당나라 헌종을 모셨고,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어 관리들의 잘못을 바로 잡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 일찍이 남전화상을 참문하고 뛰어난 지혜를 체득한 거사로서 {전등록} 제8권에는 남전화상(南泉和尙: 738~834)과 많은 선문답을 남기고 있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육긍대부는 남전화상을 오래 참문하였다. 평소 불법의 대의(理性)에 마음을 두고 깊이 {조론}을 연구하였다. 하루는 앉아 있다가 이 두 구절이 훌륭한 말이기에 제시하여 질문하였다. "승조법사의 말에 '천지는 나와 한 뿌리이며, 만물은 나와 한 몸'이라고 했는데, 매우 훌륭한 말이군요." 승조(僧肇: 374~414)법사는 후진(後晉)시대의 고승으로 도생(道生), 도융(道融), 도예(道叡)와 더불어 구마라집(鳩摩羅什) 문하의 4대 철인(四哲)의 한 사람이다. 어린시절 {장자}와 {노자}를 탐독하고 그 뒤에 고본(古本) {유마경}을 베껴 쓰다 깨치고, {장자} {노자}에는 참된 진실이 없음을 알고, 여러 경전을 종합하여 네 편의 논문을 저술하였다. {장자} {노자}에서는 천지란 큰 형체를 갖고, 나의 형체도 또한 그와 같아 모두 허무(虛無) 그 가운데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 {장자}의 대의는 만물이란 본질적으로 똑같다(齊物)는 것을 논했을 뿐이지만, 승조법사가 주장한 대의는 만물의 자성이란 모두 자기에게로 귀결된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듣지 못했는가? 승조법사의 {열반무명론}에서 "훌륭한 사람(至人)은 텅 비어 아무런 형상을 갖지 않기 때문에 만물을 그가 만들지 않은 것이 없다. 만물을 모두 자기로 삼는 자가 어찌 성인뿐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신(神)이나, 사람, 현인(賢人), 성인(聖人)이 각기 다르지만 모두 같은 성품과 같은 바탕을 지녔다.

본칙에서 육긍대부가 제시한 말은 {조론} '열반무명론'에 나오는 말인데, 원래 {장자} '제물론'에서 '천지는 나와 함께 살아있고, 만물도 나와 함께 하나가 된다(天地與我竝生, 而萬物與我爲一)'이란 말을 승조는 불교사상에서 천지동근, 만물일체(天地同根 萬物一體)라는 말로 만들어 새롭게 주장하고 있다. 승조의 {조론}은 삼론종과 천태종, 화엄종 등 중국의 교학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책인데, 석두희천은 이 책을 읽고, '만물을 모두 모아 자기로 삼는다'라는 말에 크게 깨닫고 {참동계(參同契)}라는 저술을 지었다.

육긍대부는 승조법사의 이 말이 너무나 훌륭하다고 남전화상의 의향을 떠보기 위해 묻고 있다. '기괴(奇怪)'라는 말은 본래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이지만, 원오가 '평창'에 '기특(奇特)'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처럼, 뛰어난 안목을 갖춘 훌륭한 말이라고 찬탄한 것이다.

승조법사가 말한 '천지는 나와 한 뿌리이며, 만물은 나와 한 몸'이란 불교에서 제시한 일체 만법의 근본은 공(空)이라는 '일체개공(一切皆空)'과 {신심명}에서 '만법(萬法)은 하나(一如)'라고 말하고 있는 불교의 근본정신을 말한 것이다. 일체의 만법(만물)이 인연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삼라만상의 차별세계가 형성된다. 이러한 만물의 상대적인 차별경계에 집착된 중생은 자타(自他)와 주객(主客), 천지(天地)의 만물을 상대적인 분별심으로 나누고 비교하여 차별심을 일으키며 업장을 만들고 이에 따른 과보의 고통을 받게 되는 중생이 된다. 그러나 일체 만물(만법)의 본래 모습은 절대 평등한 세계로서, 둘이 아닌 하나(一如, 不二)의 경지인 텅 빈 공(空, 同根)이라는 대승불교의 정신을 {장자}의 말에 의거하여 중국적인 표현으로 주장한 것이다.

인간이 병이 났을 때 먹는 한약은 돌가루나 풀과 나무 열매, 뿌리, 씨앗을 비롯해서 동식물의 신체 일부 등 자연의 모든 만물들을 수집하여 조제하고 물을 붓고 불로 달여서 만든 액체를 마시며 인간의 육체적인 본래의 건강을 회복하도록 하고 있다. 병을 회복하는 문제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매일 먹고 마시는 음식물은 동물과 식물, 광물성을 먹고 마시며 인간의 육체를 유지할 수 있는 모든 자료나 영양분을 섭취하는 모든 자료가 자연의 일체 만물인 것이다. 만약 일체 만물과 같은 동질성의 뿌리(근거)가 아니라면 먹고 마시고 호흡하고 영양분을 섭취하고 나눌 수가 없는 것이며 나의 존재나 삶을 영위할 수도 없다.

자연의 일체 모든 만물과 하나 된 경지에서 자연인 인간의 육체적인 건강을 회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체 만물의 차별경계를 초월한 만물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인 마음도 절대 평등의 입장이 똑같은 하나의 뿌리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사상이다.

남전화상은 육긍대부의 이러한 질문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그냥 정원에 핀 목단 꽃 한 송이를 가리키며 대부의 이름을 부르며, "요즘 사람들은 이 목단 꽃 한 송이를 마치 꿈을 꾼 것과 같이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육긍대부의 질문은 매우 기특하기는 하지만, 교학의 이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만일 교학의 이치를 지극한 법칙이라고 한다면 세존께서 무엇 때문에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셨으며, 또한 달마조사는 서쪽에서 왔겠는가?' 즉 승조법사가 말한 것처럼, '천지가 나와 한 뿌리이며, 만물은 나와 한 몸'이라는 사실을 이치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실제로 천지 만물과 어떻게 똑같은 뿌리(同根)이며, 어떻게 한 몸(一體)이 되는 것인지,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으며, 꿈도 꾸지 못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천지 만물이 모두 제각기 제멋대로이며, 한 뿌리(同根), 한 몸(一體)이 되지 못하고 있고, 일심(一心)은 일심대로 만물은 만물대로 제각기 따로따로 주객의 차별경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만법의 주인이 되어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승조법사가 좋은 말을 했다고 인용해도 세상 사람들은 한 송이 목단 꽃을 보는 것과 같이, 꿈을 꾸면서 잠꼬대를 하는 것과 같이 말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정법의 안목으로 제법의 참된 실상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과 꽃을 주객의 대립과 상대적인 차별경계로 나누어 보고 있으며, 꽃과 자기가 하나 된 만법 일여(一如)의 경지에서 지금 여기 자기 자신의 지혜로운 생활이 되지 못하고 있는 수행자들을 비판하고 있는 말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듣고, 보고, 자각하여 아는 것이 따로따로가 아니다'라는 말은 '천지동근 만물일여(天地同根 萬物一體)'를 반대 측면에서 읊은 말인데, 일체 만물을 보고 듣고 자각하는 마음(주체)과 객체인 만물은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법(萬法)은 오직 인식(唯識)에 있다고 주장한 것처럼, 인식하는 그 가운데 천지 만물과 하나 된 경지인 것이다. '산하(山河)의 경관이 거울 속에 있지 않다.' 천지 만물은 각자의 마음 거울(心鏡)에 비추어 보는 것과 같이 일체 만물이 그대로 무심의 거울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 '서리 내린 하늘에 달은 지고 밤은 깊은데, 누구와 함께 하랴! 맑은 연못에 차갑게 비치는 그림자를.' 달이 지고 깊은 한밤중에 만물과 하나 된 적정의 세계(一如平等)에서 누구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무심의 경지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는데, 누구와 함께 이러한 깨달음의 풍광(風光)을 나누랴! 천지가 한 뿌리며, 만물이 일체라는 이치나 주장을 논의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