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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현장경매 > 제 134 회 > 조선 후기 한시사가(漢詩四家, 약칭 '後四家')의 시를 柳琴이 選集한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 묵서필사본 4권 단책 조선 후기 한시사가(漢詩四家, 약칭 '後四家')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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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사가들은 세조가 중건한 원각사지 백탑[10층석탑]부근에 살았으며 연암 박지원과 사제관계로 이서구를 제외하면 북학의 선구자들이었다.

ⓐ 이덕무(李德懋, 1741-1793)
통덕랑(通德郞) 이성호(李聖浩)의 아들로 집안의 당색은 노론이다. 자는 무관(懋官), 호는 아정(雅亭)·형암(炯庵)·청장관(靑莊館) 등이며 본관은 전주다. 가난 속에서도 평생 서책과 학문을 좋아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사후 평소 그를 아꼈던 정조의 특명과 도움으로 시문집 『아정유고(雅亭遺稿)』(8권4책)가 간행되었고, 초년기, 장년기의 필사본 시문집 및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사소절(士小節)』, 『청비록(淸脾錄)』,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 등의 저술이 아들 이광규(李光葵)에 의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필사본)로 정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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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덕무(李德懋, 1741년 7월 23일(음력 6월 11일) 출생 ~ 1793년 3월 7일(음력 1월 25일) 서거)는 조선 후기의 북학파 실학자이다.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의 소위 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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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득공(柳得恭, 1748-1807)
자는 혜풍(惠風)·혜보(惠甫), 호는 영재(齋)·고운당(古芸堂),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본디 집안의 당색은 소북(小北)이나 유득공의 조부, 부친대에서는 달성 서씨 등 소론계와 절친히 교유하였다. 부친 유춘(柳瑃)이 27세로 요절하여, 편모 슬하에서 고학(苦學)하였다. 1773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시문에 능하여 청 이조원으로부터 ‘동국의 문봉(文鳳)’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문학 외에 역사·고거학에도 해박하여 저서로 『발해고(渤海考)』, 『경도잡지(京都雜志)』, 『령재집(泠齋集)』,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사군지(四郡志)』,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등을 남겼다. 총 3차 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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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재집(泠齋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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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자는 재선(在先)·수기(修其)·차수(次修), 호는 초정(楚亭) 또는 위항도인(葦杭道人), 만년에는 정유(貞)로 고쳤다. 본관은 밀양으로 승지 박평(朴坪)의 서자(庶子)다. 당색은 소북이다. 1778년 5월 사은(謝恩) 정사 체제공(蔡濟恭)을 따라 처음으로 연경에 들어가게 되었는데(이덕무 또한 서장관 심염조를 따라 같이 입연하였다), 명사들과 교유하는 한편 청의 문물 제도와 각종 시설을 세밀히 관찰하고 돌아와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하였다. 시문집으로는 『정유집(貞集)』 등이 있다. 총 4차례 연행을 하였던 바 1801년을 전후해서는 그의 『정유고략(貞藁略)』이 중국에서 간행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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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초정 박제가 선생 조선국의 전설서 별제 임기 1785년 ~ 1791년 군주 정조 이산 조선국의 오위도총부 오위장 임기 1794년 ~ 1795년 군주 정조 이산 조선국의 경기도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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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저서

  • 북학의(北學議)
    • 《정유집》(貞否集)
  • 《정유각집》 박제가의 시문집. 정민의 국역서도 출판됨.
  • 明農草稿
  • 武藝圖譜通志》 - 백동수 이덕무와 공저.
  • 韓客巾衍集
  • 정유시고(貞否詩稿)

 

ⓓ 이서구(李書九, 1754-1825)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齋)·강산(薑山)·석모산인(席帽山人),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이서구는 선조(宣祖)의 열두 번째 왕자인 인흥군(仁興君) 영(瑛)의 후손으로, 부친은 정언(正言)을 지낸 이원(李遠)이다. 당색은 노론이다. 영조 50년(1774)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를 거쳐 호조판서에 이르고 순조 24년(1824)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오희상은 그를 “초년에는 시율(詩律)로 울렸고, 중년에는 정치로 이름을 날렸으며, 만년에는 경술로 자오(自娛)하였다”고 평하였다. 저서로 『강산초집(薑山初集)』, 『척재집(齋集)』, 『강산필치(薑山筆)』, 『청수당필기(淸修堂筆記)』 등이 있다.

ⓔ 유금(柳琴, 1741-1788, 초명은 璉)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의 편자,
유득공의 숙부로 자는 탄소(彈素), 호는 기하주인(幾何主人)이다. 그는 거문고와 책을 아주 좋아했으며, 천문과 기하학에 정통했다. 정조는 즉위와 함께 규장각을 설치하고 훌륭한 인재를 뽑아 우문지지(右文之治)의 교두보로 삼았는데 1779년에는 서얼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徐理修)를 검서관에 임명하는 전대에 없었던 특채를 하였다. 이들이 이른바 '사검서관(四檢書官)'이다.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은 이 중 서이수를 제외한 3인에 이서구가 낀 것으로, 3인은 모두 서얼이나 이서구는 경화벌열 양반이다. 이들은 모두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제자 '북학(北學)'이라는 공동의 학문적·사상적 지향을 가졌다.
유금(柳琴)은 영조 52년(1776)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연행 부사(副使)인 서호수(徐浩修)를 수행하여 연경에 다녀왔다. 그 때 이 네 사람의 시를 선집한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을 가지고 가서 청의 문인들인 이조원(李調元)과 반정균(潘庭筠)으로부터 평어(評語)는 물론 서문까지 받아 귀국하였다.

 

[참고]

한문사대가

https://kydong77.tistory.com/10865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월상계택(月象谿澤)이정구,신흠, 장유,이식

월사(月沙) 이정구, 상촌(象村) 신흠, 계곡(谿谷) 장유, 택당(澤堂) 이식.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월사(月沙) 이정구, 상촌(象村) 신흠, 계곡(谿谷) 장유, 택당(澤堂) 이식. 조선 중기 한문학 문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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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계택(象谿澤)

월사(月沙) 이정구, 상촌(象村) 신흠, 계곡(谿谷) 장유, 택당(澤堂) 이식.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으로는,

첫째 당송 팔가의 고문을 모범으로 삼아 고문을 쓰려고 노력한 점,

둘째 주자학적(朱子學的)인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

셋째 화려한 가문의 출신이며 관료로서 출세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점에 비추어 이들은 중세적인 관료 문학을 대표하는 이들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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