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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생애와 사상 – 디지털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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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탄생(誕生)

1. 탄생에 관한 전설

붓다의 생애 가운데 탄생과 관련된 신화와 전설이 가장 많습니다. 붓다의 탄생에 관한 유명한 전설의 골자는 이미 초기성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석존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투시타(Tusita, 兜率天)에 있다가, 거기서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코끼리를 타고 내려와 마야 부인의 태(胎) 안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역에서는 석존의 탄생을 일반적으로 ‘강탄(降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1)

이러한 강탄 설화가 만들어지게 된 것은 한 인간이 그 짧은 기간에 그토록 완벽한 인격을 완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가 부처 되기 이전에 무수한 생애를 거쳐오는 동안 끝없이 자기 희생의 공덕을 쌓았고, 그 결과 도솔천에 올라가 거기에서 신들을 교화하면서 지상에 내려올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2) 그래서 보살의 수많은 전생 설화가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생 설화들은 대부분 여러 생애를 통해 선행의 공덕을 쌓았다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결과 도솔천에 머물고 있으면서 인간 세상에 내려가 교화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솔천 하강설입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도솔천은 보살(菩薩)이 다음 생애에는 지상에 태어나 부처가 될 것이므로 그 준비를 위해 그곳에 잠시 머문다고 합니다. 이때 보살은 하생의 시기와 대륙과 나라와 집안에 대해 살핀다고 합니다. 시기라 함은, 인간 사회가 너무 이상적인 상태에 있으면 종교심이 일어나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타락한 세상에서는 종교를 돌아볼 여유가 없으므로 그 중간의 알맞은 시기를 가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륙[洲]이라 함은, 고대 인도의 세계관에 의한 네 개의 주 가운데 하나를 가리킵니다. 그 중에서 잠부드비파(閻浮提)라는 곳은 인도를 중심으로 한 우리들의 인간 사회를 말한 것인데 부처님의 출현에는 거기가 제일 적당하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같은 인도 중에서도 변경(邊境)이 아닌 중앙부가 좋다고 선택됩니다. 인도 사회의 계급은 세습 종교가인 바라문과 무사 귀족의 크샤트리야(刹帝利)가 상위(上位)에 있는데,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는 크샤트리야 쪽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보살도 그런 집안에 태어나기로 한다는 것입니다.3)

여러 신들은 어느 나라의 왕을 고를까를 의논하여, 열여섯 큰 나라를 하나씩 들어보지만 보살이 태어나기에 적당한 곳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신들이 다시 보살에게 그 조건을 물으니, 보살은 국토에 대해서는 예순 네 가지, 어머니가 되실 분에 대해서는 서른 두 가지 조건을 내어놓습니다. 말하자면 국토의 이상과 여성의 이상을 말한 것입니다. 어느 것이나 그 인품이 뛰어나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을 들은 여러 보살과 신들은 석가족의 숫도다나왕(淨飯王)과 마야비(摩耶妃)야말로 그런 분이라는 의견이 일치되었다고 합니다.4)

한편 보살은 도솔천에서 신들에게 법을 설합니다. 신과 천녀들은 머지않아 보살과 작별할 것을 슬퍼합니다. 보살은 자기의 후임으로 미륵보살(彌勒菩薩)을 정했다고 합니다. 미륵보살은 도솔천에서 신들에게 법을 설하고 언젠가는 석가모니를 본받아 지상에 내려가 부처가 될 날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5)

후세의 전설들에 의하면 특히 한역 경전들에 의하면 태자가 탄생하자, 많은 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 손으로 태자를 받들었다고 하고, 그 때에 하늘에서 두 줄기의 온수(溫水)가 쏟아져 태자의 몸을 씻어드렸고, 그러자 태자는 선뜻 대지(大地)에 일어서서 사방(四方)을 둘러보며, 북쪽으로 일곱 걸음을 내디디고서 오른 손으로는 위를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사자후(獅子吼)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탄생게(誕生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붓다의 탄생에 관한 설화는 일찍부터 신화화(神話化) 되었습니다. 초기경전에도 탄생과 관련된 설화가 많이 남아 있는데, 이러한 설화들은 후대로 가면 갈수록 더욱더 윤색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화를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는 학자들은 오늘날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정전에 기록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분명하게 믿을 수 없는 부분을 빼버리고, 나머지 부분을 역사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6) 다만 우리는 이러한 설화를 통해 이렇게 해서라도 상징(象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인류의 스승 석가모니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흠모(欽慕)의 정을 충분히 이해해야만 할 것입니다.7)

2. 역사적 붓다의 탄생

석가족은 현재 네팔 중부의 남쪽 변경과 인도 국경 근처에 위치하였던 작은 부족으로, 까삘라밧투(Kapilavatthu, 현재 네팔의 타라이 지방의 티라우라 코트에 해당함)를 수도로 하여 일종의 공화정치 또는 귀족정치(혹은 과두정치)를 행하였습니다. 왕(rajan)이라고 하는 수장(首長)을 교대로 선출하는 독립된 자치공동체였지만 정치적으로는 꼬살라 국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8)

붓다는 이러한 석가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였고, 그의 어머니는 마야(Maya, 摩耶) 부인이었습니다. 아버지 숫도다나는 수장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왕으로 불렸으며, 석존도 왕족 출신이었다고 합니다.9) 그러나 결코 대왕(大王)이라고 불린 적이 없습니다. 아마 이 지방의 지배자(支配者)였던 것은 틀림없으나, 대국(大國)의 왕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정반대왕(淨飯大王)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후세 사람들이 그를 이상화(理想化)한 데서 생긴 호칭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마야부인도 후세에는 마하마야(Mahamaya) 왕비로 높여 불렸습니다. 그녀는 같은 석가족의 한 별계(別系)인 꼴리야(Koliyas)족의 공주였습니다.10)

초기성전에서는 고따마(Gotama, Gautama, 瞿曇)라고 하는 이름이 종종 쓰이고 있는데, 이것은 ‘가장 좋은 소’라고 하는 의미의 족성(族姓)입니다. 그의 이름은 싯닷타(Siddhattha, Siddhartha, 悉達, ‘목적을 성취한 자’의 뜻)이지만 초기성전의 오래된 부분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아 후세에 와서 쓰이게 된 이름으로 보입니다.11)

숫도다나(정반왕)에게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석존을 낳은 것은 아마 당시 40을 넘었을 때의 일인 것 같습니다. 석존의 탄생이 이 가문(家門)의 얼마나 큰 경사(慶事)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12)

마야 왕비는 출산이 임박해 오자 당시의 풍습에 따라 아기를 낳기 위해서 친정인 데바다하(Devadaha, 天臂城)로 향하던 중, 두 도시 사이에 위치한 아름다운 룸비니(Lumbin ) 동산에 이르자, 꽃이 만발한 무수 아래서 아들을 낳았던 것입니다.13)

왕자가 태어난 지 닷새 째 되던 날, 왕은 여덟 명의 현자를 청하여 아기의 이름을 짓고 또 왕자의 앞날을 점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현자들은 왕자에게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란 뜻으로 ‘싯닷타(Siddhattha)’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그 바라문들은 심사숙고한 후 일곱 명은 두 손가락을 펴 보이면서 말했습니다. “오! 왕이시여! 이 왕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전 세계의 통치자인 전륜성왕(轉輪聖王: Cakravarti)이 되어 온 세계를 다스릴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세속을 떠나 출가한다면 왕자님은 정등각자(正等覺者)가 되어 사람들을 무지에서 구해낼 것입니다.”  “오! 왕이시여! 이 왕자는 언젠가는 진리를 찾아 떠날 것입니다. 그래서 정등각자가 될 것입니다.”14) 그런데 어머니 마야부인은 석존을 낳은 지 이레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동생인 고따미(Mahapajapati Gotami, 大愛道瞿曇彌)가 양모가 되어 석존을 양육하였습니다.

3. 붓다의 탄생지: 룸비니

붓다의 탄생지는 룸비니(Lumbin )라고 전해지는데, 1896년 퓨러(A. Fuhrer)15)가 네팔 타라이 지방의 룸민디에서 발견한 아소까 왕의 석주(石柱)에는 ?여기에서 불타 석가모니가 탄생하였다?고 하는 뜻의 글이 새겨져 있어 석존 탄생지에 대한 초기성전의 기술이 역사적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16) 이곳은 현재 룸민데이(Rummindei)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이 룸비니 동산은 마야비(妃)의 친정인 석가 일족의 데바다하(천비성)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왕비의 친정 어머니 이름을 따서 룸비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온갖 아름다운 꽃과 수목, 과일이 열리는 나무가 울창하고, 연못과 늪과 흐르는 시내도 있고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훌륭한 동산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기 405년 이곳을 찾은 중국인 승려 법현(法顯)은 여기에 두 용왕이 태자에게 첫 목욕물을 끼얹어주었다는 유적이 그때도 우물과 연못으로 쓰이고 있었으며, 그 근처에 살고 있던 불교 승려들의 음료수로도 사용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또 633년 이 지방을 찾아간 현장(玄 )은 연못과 샘말고도 그 고장 사람들이 유하(油河)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시냇물이 동남쪽으로 흐르고 있더라고 적었습니다. 해산한 뒤 마야비가 목욕한 강이라는 것입니다.17)

현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곳에 무우왕(無憂王, 아소까왕을 가리킴)이 세운 큰 돌기둥[石柱]이 있고 그 꼭대기에 마상(馬像)이 새겨져 있었는데, 뒷날 벼락으로 돌기둥이 중간에서 꺾이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8)

이 룸비니 동산의 유적은 오랫동안 정글에 묻혀서 잊혀진 채 겨우 그 고장 사람이 조그만 집을 짓고 지켜왔었습니다. 그러다가 1896년, 그 당시 인도 정부의 노력으로 퓨러(A. Fuhrer)라는 사람이 네팔에 들어가, 이른바 타라이 지방의 룸민디라는 마을이 룸비니의 고적임을 확인했습니다.19) 특히 아소까왕이 세운 돌기둥이 발견됨으로써 결정적으로 확인된 것입니다. 현장이 기록한 바와 같이 그 돌기둥의 위쪽은 꺾여진 채 없어지고 말았지만, 아랫부분은 그대로 있어 거기에 적힌 비문의 넉 줄 반의 글자는 온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 석주에는 93자로 된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글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습니다.

“신들의 보호를 받는 덕 높은 왕(아소까)이 왕위에 오른지 20년 되는 해에 친히 이곳에 와서 공양을 올렸다. 여기서 붓다 사캬무니가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담을 만들고 돌기둥을 세우게 했다. 세존께서 여기서 탄생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룸비니 마을은 세금을 면제받고, 또 생산의 팔 분의 일만을 지불하게 된다.”20)

위의 석주에는 ‘석가족의 성자, 붓다, 여기서 탄생하셨도다.'(hida buddhe jate Sakyamuni)21)라는 대목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에 의해 이곳이 룸비니 동산이었음이 분명히 밝혀진 것입니다. 이 거대한 석주는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서기 7세기 중엽 중국의 구법승 현장 법사가 여기에 왔을 때는 석주는 이미 벼락으로 부러져 있었지만, ‘어제 깎은 듯 생생하다’고 했습니다.

4. 탄생 연대

붓다의 탄생 연도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 학설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남전과 북전에는 약 100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동남아시아 제국의 불교도들은 불멸(佛滅)을 기원전 544년(또는 543년)으로 보는 학설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것은 세일론(스리랑카) 불교의 전설에 근거한 것이어서 의심의 여지가 있으며 학문적으로 무시되고 있습니다. 학문적 입장에서 볼 때 현재 학계에서 쓰이고 있는 붓다의 재세 연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22)

첫 번째는 서력 기원전 약 560-480년 설입니다. 이것은 주로 서양의 여러 학자들이 세일론의 사서(史書) 등의 자료를 검토하여 주장하는 학설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불멸 연대를 서력 기원전 489년(A. Bareau), 487년(V. A. Smith), 484년(H. Jacobi), 483년(W. Geiger 등), 482년(J. Fleer) 혹은 478년(J. Filliozat), 477년(F. Max Muler 등)으로 보는 등 여기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이들의 학설은 이른바 중성점기(衆聖點記; 많은 聖者들이 불멸 후 <律藏>에다 매년 점을 하나씩 찍어 온 기록)에 희한 486년 설(수정설은 485)과도 거의 일치합니다.23)

두 번째는 서력 기원전 약 460-380년 설로서 일본의 우이하쿠주(宇井伯壽)와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의 학설입니다. 우이(宇井)은 아소까 왕의 즉위 연대를 기원전 271년으로 추정하고 이 즉위가 불멸 후 116년에 거행되었다고 하는 북전(北傳)의 불교 전승에서 역산(逆算)하여 불멸을 서력 기원전 386년으로 산정하였습니다. 아소까 왕의 연대는 그 후의 연구에 의해 다소 수정되어 현재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는 268년 즉위설을 취합니다. 따라서 붓다의 연대는 서력 기원전 463-383년으로 수정됩니다.24)

이상의 두 가지 학설에는 약 100년의 차이가 있지만 고대 인도에 있어 역사 관념의 결여, 연대의 불명확성이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할 때 100년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는 것에 오히려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25)

우리나라에서 붓다의 탄생일을 4월 8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방의 불교국에서는 베사카(Vesakha, Vaisakha, 인도력의 2월로서 태양력으로는 4-5월에 해당함) 월의 만월일(滿月日)을 붓다의 탄생·성도·열반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인도와 중국의 역법(曆法)이 서로 틀리기 때문입니다.

Notes:

1)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서울 : 민족사, 1989), pp.36-37.
2) 와타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서울 : 샘터, 1990), p.18.
3)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위의 책, pp.18-19 참조.
4)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위의 책, pp.19-20.
5)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위의 책, p.20.
6)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New Delhi: Munshiram Manoharlal Publishers Ptv Ltd, 1992), pp.27-29 참조.
7) 이기영,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 지문각, 1965), p.26.
8)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앞의 책, p.36.
9)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위의 책, p.36.
10) 이기영, 앞의 책, p.18.
11)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앞의 책, p.36.
12) 이기영, 앞의 책, p.18.
13) 피야다시 지음·정원 옮김, <부처님, 그 분 : 생애와 가르침> (서울 : 고요한 소리, 1988), p.10.
14) 피야다시 지음, 앞의 책, pp.10-11.
15) 피야다시(Piyadassi Thera) 장로는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룸비니 동산을 1896년 저명한 고고학자 커닝엄(Cunningham) 장군에 의해 발굴되었다고 했다. 이것은 피야다시 스님의 착오에 의한 것 같다. 피야다시 지음, 위의 책, p.10 참조.
16)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앞의 책, p.37.
17)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위의 책, p.23.
18)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위의 책, p.23.
19)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위의 책, p.24.
20) “When king Devanampiya Priyadar in had been anointed twenty years, he came himself and worshipped (this spot), because the Buddha kyamuni was born here. He both caused to be made a stone bearing a horse(?) ; and caused a stone pilar to be set up (in order to show) that the Blessed one was born here. (He) made the village of Lummini free of taxes, and paying (only) an eighth part (of the produce).” translated by Dr. Hultzsch. See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pp.18-19.
21) 피야다시 지음, 앞의 책, p.10.
22)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앞의 책, p.37.
23)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위의 책, p.37-38.
24)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위의 책, p.38.
25)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위의 책, p.38.

붓다의 젊은 시절

1. 태자의 어린 시절

태자가 탄생한 후 7일 만에 그의 생모(生母)였던 마야(Maya) 왕비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야 왕비의 사망에 관한 여러 학설들이 있지만, 너무 미화시킨 것이라 믿기 어렵습니다. 마야 왕비가 일찍 사망한 원인은 아마 산후 몸조리를 잘못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출산을 위해 친정인 데바다하(Devadaha, 天臂城)로 가던 중, 룸비니(Lumbini) 동산에서 태자를 낳았습니다. 야외에서 출산한 뒤 충분히 휴식을 취하지 못한 채 곧바로 이동하여 왕궁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태자가 자라면서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한 사실은 태자의 인격과 성격 형성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봅니다.1)

그 후 태자는 그의 이모(姨母)인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apajapati Gotami, 大愛道瞿曇彌)에 의해 양육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언니인 마야 왕비의 뒤를 이어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의 부인이 되었으며, 나중에 난다(Nanda, 難陀)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나중에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비구니 교단(敎團)은 그녀의 출가로 인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붓다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에 관해서는 자세한 기록들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단편적인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자료들에 의하여 붓다의 어린 시절을 종합 정리해 보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붓다는 어려서부터 감수성이 예민하여 뭇 생명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실례로 어느 날 농부가 일구어 놓은 땅 속에서 벌레가 기어 나오자 새가 날아와 그 벌레를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것을 본 태자는 생물은 서로 해친다는 것을 통감했다고 합니다.

둘째, 붓다는 천성적으로 명상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2) 태자가 어렸을 때부터 매우 명상(冥想)을 좋아하는 형의 소년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석가족의 왕인 그의 아버지는 국가적인 행사인 농경제(農耕祭)에 참가했습니다. 이때 어린 왕자도 함께 데리고 가게 되었습니다. 농경제가 진행되는 동안 어린 왕자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피해 나무 밑에서 좌선을 하여 초선(初禪)의 경지에 들었다고 합니다.

<중아함경(中阿含經)> 제29권의 <유연경(柔軟經)>에 따르면, 붓다께서는 출가 전에 이미 초선(初禪)의 경지를 체험한 것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경전의 내용을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또 옛날을 생각하면, 농부가 밭 위에서 쉬는 것을 보고 염부(閻浮)나무 그늘에 가서 가부를 맺고 앉아 욕심을 떠나고 악하고 선하지 않은 것을 떠나, 각(覺)이 있고 관(觀)이 있어, 욕계(欲界)의 악을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어, 초선(初禪)을 얻어 성취하여 노닐었다.”3)

이 때가 농경제(農耕祭)에 참가했을 때인지 아니면 다른 때인지는 정확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태자가 홀로 나무 밑 그늘진 곳에 앉아 명상에 잠기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쾌 지나간 모양이었습니다. 다른 나무들의 그늘은 해가 돌아감에 따라 모두 그 그림자 자리를 옮겨갔는데, 태자가 앉은 나무의 그늘만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고 합니다. 인도의 오래된 조각(彫刻)들에는 그 광경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시간도 태자의 명상을 깨뜨리지 못한다는 미래의 붓다의 위력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설사 이것이 후대의 추측인 첨가라 할지라도 충분히 사실에 가까운 일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4)

한편 후대에 성립한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의 제4권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태자의 선정에 대해 보다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태자가 염부수(閻浮樹) 아래에서 사선(四禪)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5) 이것은 붓다께서 출가하여 성도(成道)를 향한 고행을 마치고, 과거 소년시절 체험했던 명상의 시간을 회상하여 그와 같은 방법으로 좌선하게 되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셋째, 붓다의 젊은 시절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웠던 것 같습니다. 붓다께서 만년에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여 제자들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앞에서 인용했던 <중아함경> 제29권 유연경에 설해져 있습니다. 이 경전에 의하면, 자신을 위해 겨울·여름·봄 세 계절에 어울리는 세 가지 종류의 궁전(三時殿)이 지어졌다는 등 유복하고 호화로운 생활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내가 부왕(父王) 숫도다나(悅頭檀) 집에 있을 때에는 나를 위해 여러 가지 궁전, 곧 봄 궁전과 여름 궁전 및 겨울 궁전을 지었으니, 나를 잘 노닐게 하기 위해서였다. 궁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다시 푸른 연꽃 연못·붉은 연꽃 연못·빨간 연꽃 연못·흰 연꽃 연못 등 여러 가지 연꽃 연못을 만들고, 그 연꽃 가운데에는 온갖 물꽃, 곧 푸른 연꽃·붉은 연꽃·빨간 연꽃·흰 연꽃을 심어서 언제나 물이 있고 언제나 꽃이 있었으며, 사람을 시켜 수호하여 일체 통행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나를 잘 노닐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네 사람을 시켜 나를 목욕시키고는 붉은 전단향( 檀香)을 내 몸에 바르고 새 비단옷을 입혔으니, 위아래나 안팎이나 겉과 속이 다 새 것이었다. 그리고 밤낮으로 언제나 일산(日傘)을 내게 씌웠으니, 나로 하여금 밤에는 이슬에 젖지 않고 낮에는 볕에 그을지 않게 하기 때문이었다. ……

내가 옛날의 아버지 숫도다나 집을 생각하면 여름 4개월 동안은 정전(正殿) 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남자는 없고 오직 기생만 있어서, 스스로 즐기면서 당초에 내려오지 않았다. 내가 동산으로 나가려고 할 때에는 삼십명의 제일 훌륭한 기병(騎兵)을 뽑아 의장(儀仗)이 앞뒤에서 시종하고 인도하게 하였으니, 그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이런 여의족(如意足)이 있었으니, 이것이 가장 유연(柔軟)한 것이었다.”6)

팔리어로 씌어진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aya, 中部)에도 동일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7) 이와 같이 태자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 보다 좋은 조건과 풍족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 붓다는 세속적 삶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즐기며 지내는 것이 상례(常例)입니다. 하지만 이 젊은 왕자는 온갖 안락과 사치를 누리며 예기(藝妓)들의 시중을 받는 궁궐생활에 오히려 싫증을 느꼈습니다. 그는 육체적인 쾌락이나 세속적 야망에 만족하기에는 감수성이 너무나 예민했던 것입니다. 초기 팔리어 사료들을 보면 그는 자신이 늙음과 병듦과 죽음의 슬픔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괴로워하며 환멸을 느끼는 존재로 묘사되어 있습니다.8)

보통 사람들은 추한 노인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지만, 어느 누구도 병의 고통이나 병자의 추잡스러움을 바라지 않지만, 병에 걸리는 것 역시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기를 바라지 않지만, 그 누구에게도 죽음은 반드시 닥쳐옵니다. 젊은 날의 붓다는 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두려움에 대해 골몰하고 있을 때, 젊음이 넘치는 그의 신체로부터 기쁨이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9)

이러한 세속적 쾌락에 대한 혐오감과 인생이 단지 끝없는 고통이라는 생각은 이 젊은 왕자를 크게 자극했습니다. 결국 그는 가정생활을 포기하고 종교적 삶을 통해서 평화와 고요를 추구하고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10)

2. 태자의 교육

태자는 당시 왕족의 교양으로서 필요한 모든 학문·기예(技藝)를 배웠으며, 비범한 재간을 발휘했다는 사실이 후대의 불전(佛傳)에 나옵니다. 물론 그것도 사실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그 교육이란 어떠한 내용의 것을 어떻게 배우는 것이었을까?

태자가 취학(就學)을 한 것은 일곱 때일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인도의 습관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인도의 관습에 의하면 보통 브라만 계급의 사람들은 여덟 살부터 12년 동안, 크샤트리아 계급의 사람들은 열 한 살부터 12년 동안, 바이샤 계급의 사람들은 열두 살부터 12년 동안, 스승 밑에서 인도인이 가장 존중하는 고전(古典)인 <베다>를 배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특히 학문에 뛰어난 재간이 있는 사람은 일곱 살부터 스승을 맞이하여 공부할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태자가 이와 같은 부류의 소년이었을 것은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11) 그리고 태자는 <베다>는 물론 <베다>의 보조학(補助學)도 학습하였다고 합니다. 불교의 경전에는 세 개의 <베다>와 자휘학(字彙學), 어원학(語源學), 사전(史傳), 문법학(文法學), 순세파학(順世派學), 대인상학(大人相學)으로 되어있고, 이것들에 통하는 것이 브라만으로서의 자격을 구비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 자이나교 측에서는 네 개의 <베다>와 사전(史傳), 문법학(文法學) 등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당시의 수재들은 <베다>의 본문 암송(暗誦), 그것에 의한 문법, 어원(語源)에 관한 학문, 사전(史傳) 등을 중심으로 하여, 그 밖에 당시의 일반 과학지식을 습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기록들에는 인도 사상 중 가장 깊이 있는 내용을 가진 <우파니샤드>에 관한 이야기는 나와있지 않지만, 붓다 당시 <우파니샤드>의 사상은 이미 주지(周知)되어 온 사실이기 때문에 태자가 학습한 과목 중의 하나를 이루고 있었을 것은 명백합니다. 불교의 원시경전 중 가장 오래된 층의 것들 속에 우파니샤드적 표현이 많은 것은 석존의 태자 시대의 <우파니샤드>에 대한 교양을 말하고 있음을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12)

또한 태자가 크샤트리야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문(文)의 면만이 아니라, 무(武)의 면도 같이 연수를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는 무사계급(武士階級)인 크샤트리야족 출신으로서 필요한 무술(武術)을 배우고 닦았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후대의 불전에는 태자가 특히 궁술(弓術)에 뛰어나 있었다고 했고, 그가 야소다라비(妃)와 혼인하게 되었던 것도 그가 궁중에서 열린 무술대회에서 발군(拔群)의 성적을 올린 까닭이었다고 하고 있습니다.13)

태자는 인도의 언어와 고전 문학 등의 일반적인 학습만을 한 것이 아니라 도보경주, 원반 던지기와 창 던지기 등의 육체적인 단련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귀족에게 필수적인 네 가지 기예, 즉 말타기, 코끼리 타기, 전차 몰기 그리고 군대의 배치법을 배웠다고 합니다.14) 이와 같이 전기나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태자는 왕족으로서의 교양을 쌓는데 필요한 온갖 학문과 기예를 습득했고, 비범한 재능을 발휘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있습니다.15)

3. 태자의 결혼

태자가 결혼을 한 것은 사실이었을 것으로 믿어집니다. 그리고 그 태자비(太子妃)가 라훌라(Rahula, 羅候羅)란 아들을 난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모든 불전(佛傳)이 다 그것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16) 결혼의 시기는 16세, 17세, 19세 20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남방의 전승에 따르면 16세에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재는 16세에 결혼한 것을 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태자비의 이름은 남방성전(南方聖典)에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북방성전(北方聖典)에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남방의 전승에서는 라훌라마따(Rahulamata, ‘라훌라의 어머니’의 뜻)라든가 밧다깟짜(Bhaddhakacca) 혹은 밧다깟짜나(Bhaddhakaccana, 跋陀迦旃延)로 불려지고 있지만 북방의 전승에서는 범어로 야소다라(Yasodhara, 耶輸陀羅, ‘영예를 지닌 여성’의 뜻)란 이름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뒷날 팔리어 성전의 주석서에서도 ‘야소다라’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나 어떤 전승에 따라서는 또 다른 이름도 정하고 있어 동일인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습니다.17)

남방의 팔리어 전기(傳記)에서는 다만 ‘라훌라의 어머니'(羅候羅母)라고만 불려지고 있는데, 이런 호칭은 우리나라에서도 통용되는 호칭법으로 옛날 인도에서는 그렇게 부르는 일이 흔했던 것 같습니다. 붓다의 제자나, 신자들 중에도 아들 이름을 붙여 그 어머니를 호칭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북방의 성전에서는 태자의 비를 야소다라(耶輸陀羅)라고 부르고 있는 경우가 제일 많습니다. 그런데 이 야소다라에 관한 이야기는 붓다께서 성도한 뒤 옛 왕성(王城)을 방문했을 때, 출영(出迎)한 것과 그 후에 이모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와 더불어 열심히 출가를 원해서 허락을 받고 니승(尼僧)이 되었다는 두 가지 사실밖에는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18)

붓다의 젊은 시절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생의 지식을 폭넓게 습득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삶의 문제를 통찰하는 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결혼 이후에도 그러한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후 얻게 된 그의 깨달음은 그의 단순한 천재성이나 직관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청년 시절까지 지속된 내성적 성숙과 노력의 결과라 할 것입니다.19)

Notes:

1) 이기영,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 지문각, 1965), p. 46.
2) 平川彰 著 · 李浩根 譯, <印度佛敎의 歷史> 上卷 (서울 : 민족사, 1989), p. 41.
3) <中阿含經> 제29권(大正藏 1, pp. 607c-608a), “我復憶昔時看田作人止息田上. 往詣閻浮樹下結跏趺坐. 離欲惡不善之法. 有覺有觀. 離生喜樂得初禪成就遊.”
4) 이기영, <석가>, pp. 47-48.
5) <方廣大莊嚴經> 제4권 (大正藏 3, p. 560b), “諸欲惡有覺有觀 離生喜樂住初禪內淨一心滅覺觀 離生喜樂住二禪 離喜受 聖說住捨有念有想 身證樂住三禪 斷除苦樂滅憂喜 不苦不樂 念淸淨住四禪.”
6) <中阿含經> 제29권(大正藏 1, p. 607c).
7) F. L. Woodward and E. M. Hare, Gradual Sayings.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32), I, p. 128.
8) 케네스 첸 지음, 길희성 · 윤영해 옮김, <불교의 이해> (왜관 : 분도출판사, 1994), p. 35.
9) 平川彰, 앞의 책, pp. 41-42.
10) 케네스 첸 지음, 길희성 · 윤영해 옮김, <불교의 이해>, p. 35.
11) 이기영, <석가>, p. 48.
12) 이기영, <석가>, p. 49.
13) 이기영, <석가>, p. 50.
14) 길희성 · 윤영해 옮김, 앞의 책, p. 34.
15) 정승석, <불교의 이해> (서울 : 대원정사, 1989), pp. 23-24.
16) 이기영, <석가>, p. 50.
17) 후지타 코타츠 외 ·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서울 : 민족사, 1989), p. 39.
18) 이기영, <석가>, p. 52.
19) 정승석, 앞의 책, p. 25.

붓다의 출가와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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