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y3PWlZk54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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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華嚴經)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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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현재 한역본(漢譯本)으로는 권수에 따라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번역한 60화엄과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80화엄, 반야(般若)가 번역한 40화엄 등 세 가지가 있으며,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에서 널리 유통되었다.

60화엄에는 34품(品), 80화엄에는 39품이 들어 있으며, 그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으나 40화엄은 60권본과 80권본의 마지막 장인 입법계품(入法界品)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화엄경』의 완역본은 아니다.

이 한역본이 나타난 이래 우리나라 및 중국에 화엄사상을 형성했을 뿐 아니라, 그 회통적인 철학성은 동양사상 속에서 하나의 강력한 흐름을 형성하였다.

이 경은 60화엄의 경우 7처(處:경을 설한 장소) 8회(會:경을 설하는 모임) 34품, 80화엄의 경우는 7처 9회 39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을 설한 장소를 60화엄에 의해서 살펴보면, 제1 적멸도량회(寂滅道場會)와 제2 보광법당회(普光法堂會)는 지상(地上)이고, 제3 도리천회(忉利天會)와 제4 야마천궁회(夜摩天宮會), 제5 도솔천궁회(兜率天宮會), 제6 타화자재천궁회(他化自在天宮會)는 천상(天上)이며 제7은 다시 지상의 보광법당회와 제8 중각강당회(重閣講堂會)에서 설한다.

이 여덟 회좌(會座) 중 보광법당회가 두 번 있으므로 7처가 되고, 80화엄의 경우는 보광법당회가 세 번 있기 때문에 9회가 된다.

그 내용을 보면, 제1회는 석가모니불이 마가다국의 보리수나무 밑에서 이제 막 대각(大覺)을 이루고 묵묵히 앉아 광채를 발하고 있다. 그 둘레에는 많은 보살들이 있어 한 사람씩 일어나 부처님의 덕을 찬양한다. 이 때 석가모니는 이 경의 교주(敎主)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일체가 되어 있다.

제2회에서는 석가모니가 자리를 옮겨 보광법당의 사자좌(獅子座)에 앉아 있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먼저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四諦)의 법을 설한 뒤 10명의 보살들이 각각 열 가지의 심오한 진리를 설한다.

제3회부터는 설법 장소가 천상으로 옮겨진다. 제3회에서는 십주(十住)의 법을 설하고, 제4회에서는 십행(十行), 제5회에서는 십회향(十廻向), 제6회에서는 십지(十地)를 설한다. 이 제6회는 현재 범어의 원전이 남아 있는 십지품(十地品)이며, 『화엄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이 품은 『십지경(十地經)』으로 따로 편찬되었다.

『화엄경』과 『십지경』은 고려 및 조선 시대 승과(僧科)의 교종선(敎宗選) 시험과목으로 채택된 중요 경전이기도 하다. 이 십지품에서는 보살의 수행발전 단계를 열 가지로 나누어 설하고 있다.

십지의 제1은 환희지(歡喜地)로, 깨달음이 열려 기쁨이 넘쳐 있는 경지이다. 제2 이구지(離垢地)는 기본적인 도덕의 훈련 과정이며, 제3 명지(明地)는 무상(無常)의 성찰을 통하여 점차 지혜의 빛을 나타내며, 제4 염지(焰地)는 진리를 향한 열의로 그 지혜가 더욱 증대하며, 제5 난승지(難勝地)는 평등한 마음을 갖추어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지배를 받는 일이 없는 경지이다.

제6 현전지(現前地)는 십평등지(十平等地)를 갖추어 일체가 마음의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 허망한 것임을 깨달아 아는 경지이다.

제7 원행지(遠行地)는 일체불법(一切佛法)을 일으키는 경지로서 열반(涅槃)에도 생사(生死)에도 자유로이 출입하며, 제8 부동지(不動地)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는 경지로서 목적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의 움직임이 자연히 솟아나오며, 제9 선혜지(善慧地)는 훌륭한 지혜를 성취하고 무애행(無碍行)이 이룩되는 경지로서 부처님의 법장(法藏:진리의 창고)에 들어가 불가사의한 큰 힘인 해탈의 지혜를 얻으며, 제10 법운지(法雲地)는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은 번뇌의 불길을 모조리 꺼 버린 해탈의 경지이다.

또한 이 십지품은 그 전체를 통하여 자기자신의 깨달음을 위해서 노력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깨달음으로 향하게 한다는 이타행(利他行)의 수행을 적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 십지는 지혜와 자비가 완성됨에 따라 나타나는 여래성(如來性)의 흥기(興起)와 성기(性起)의 외적인 표현이며, 그에 관한 이론적 체계화로 평가되고 있다.

제7회는 다시 지상의 보광법당에서 지금까지의 설법을 요약해서 설한다. 제8회는 입법계품으로 이 또한 범어 원전이 남아 있다. 여기에서는 선재(善財)라는 동자가 53인의 선지식을 찾아 도(道)를 구하는 과정을 적어 정진이 곧 불교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만나는 선지식 중에는 뛰어난 보살만이 아니라 비구·비구니·소년·소녀·의사·장자(長者)·창부(娼婦)·외도(外道) 등 갖가지 직업과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 있다.

이는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보리심의 유무가 문제라는 대승불교의 수행 이상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 밖에도 이 경에는 십현연기무애법문(十玄緣起無碍法門)·사법계설(四法界說)·육상원융론(六相圓融論) 등 불교의 세계관 및 인생관 등의 주요 사상들이 함축성 있게 수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신라의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이 경을 가져와서 강설한 이후 유포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경이 화엄사상으로서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이 이 경을 연구하고 화엄종을 창종함에 따라 본격화되었다.

그 뒤 우리나라 불교 교학(敎學)의 중심은 이 경과 『법화경(法華經)』을 중심으로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이 경은 선종(禪宗)에서도 그 연구가 활발하여 소의경전으로 삼았으므로, 선종이 주류를 이루었던 조선시대에도 선승들이 한결같이 이 경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특이한 흐름을 보이기도 하였다.

 

https://abc.dongguk.edu/ebti/c2/sub2_pop_ls.jsp?nbooknum=1&startpage=0&endpage=2062 

 

동국대학교 한글대장경

대방광불화엄경 80권본 대방광불화엄경 제1권 우전국삼장(于國三藏) 실차난타(實叉難陀)한역 이운허 번역 1.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때 부처님께서 마갈제국(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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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r.buddhism.org/%ed%99%94%ec%97%84%ea%b2%bd-%e8%8f%af%e5%9a%b4%e7%b6%93/

 

화엄경 華嚴經 – 디지털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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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세간정안품(世間淨眼品)

제 2장 노사나품(盧舍那品)

제 3장 여래명호품(如來名號品)

제 5장 여래광명각품(如來光明覺品) 

 

제 6장 보살명난품(菩薩明難品) 

제 7장 정행품(淨行品) 

제 8장 현수보살품(賢首菩薩品) 

제 9장 불승수미정품(佛昇須彌頂品) 

제 10장 보살운집묘승전상설게품(菩薩雲集妙勝殿上說偈品)

 

제 11장 보살십주품(菩薩十住品)

제 12장 범행품(梵行品)

제 13장 초발심공덕품(初發心功德品)

제 14장 명법품(明法品)

제 15장 불승야마천궁자재품(佛昇夜摩天宮自在品) 

 

제 16장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設偈品) 

제 17장 십행품(十行品)

제 18장 십무진장품(十無盡藏品)

제 19장 여래승도솔천궁품(如來昇兜率天宮品)

제 20장 도솔천궁보살찬불품(兜率天宮菩薩讚佛品)

 

제 21장 십회향품(十廻向品)

제 22장 십지품(十地品)

제 23장 십명품 (十明品)

제 24장 십인품(十忍品)

제 25장 심왕보살문아승지품 (心王菩薩問阿僧祗品)

 

제 26장 수명품(壽命品)

제 27장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

제 28장 불부사의법품(佛不思議法品)

제 29장 여래상해품 (如來相海品)

제 30장 불소상광명공덕품(佛小相光明功德品)

 

제 31장 보현보살행품(普賢菩薩行品)

제 32장 여래성기품(如來性起品)

제 33장 이세간품(離世間品)

제 34장 입법계품(入法界品)

 

제 13장 초발심공덕품(初發心功德品)

그때 제석천이 법혜보살에게 물었다.
“불자여, 초발심의 보살은 얼마만한 공덕을 완성하고 있습니까.” 법혜보살이 대답하였다.

“불자여, 그 도리는 심원하여 알기 어렵고 믿기 어렵고 또한 이해하기가 어려우며, 설하기도 어 렵고 판별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나는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아서 그대에게 설하고자 합니다. 불자여, 예를 들면 어던 사람이 동방의 무수한 세계의 중생을 오랫동안 공양하고 그 뒤에 오계 (五戒)를 행한다고 합시다. 또 동방의 세계에서와 같이 사방팔방, 시방의 세계의 중생에게도 그와 같이 한다고 합시다. 이렇게 한다면 이 사람의 공덕은 많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제석천이 말했다.

“불자여, 모든 여래 이외에는 이 사람의 공덕과 비교될만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법혜보살이 제석천을 향하여 말했다.

“불자여, 이 사람의 공덕이 아무리 많아도 초발심을 한 보살의 공덕에는 비할 수 없습니다. 비유 한다면, 그 백분의 일, 천분의 일, 백천분의 일, 억분, 백억분, 천억분 내지 헤아릴 수 없으며, 따 라서 그 공덕은 다함이 없고, 설할 수도 없을 만큼 많습니다.

불자여, 또 어느 사람이 시방의 무수한 세계의 중생을 오랫동안 공양하고 그 뒤에 십선(十善)을 행한다고 합시다.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중생에게 혜택을 베풀고자 하는 자비심으로 물질을 초월한 경계에 안정하도록 하며, 한 번 다시 태어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경계[一來]에 이르도록 하고, 미 혹의 세계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경계[不還]와 아라한(阿羅漢)의 경계에 이르도록 하며, 최후에 는 연각(緣覺)의 깨달음을 얻게 한다고 한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이 사람의 공덕은 많다고 생각합니 까.”

제석천이 말했다.
“모든 부처님 이외에는 이 사람의 공덕을 낱낱이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법혜보살은 제석천을 향하여 말하였다.

“불자여, 이 사람의 공덕이 아무리 많다 하여도 초발심한 보살의 공덕에 비한다면 그 백분의 일, 천분의 일에도 지나지 않습니다. 초발심을 한 보살의 공덕은 헤아릴 수도 없으며 설할 수 없을 만 큼 많습니다.

불자여, 왜냐하면 일체 모든 부처님은 시방세계의 무수한 중생을 오랫동안 공양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무수한 세계의 중생으로 하여금 오계(五戒)와 십선(十善), 사선(四嬋), 사무량심(四無量心), 사무색정(四無色定), 예류(預流), 일래(一來), 불환(不還), 아라한(阿羅漢), 연각(緣覺) 등의 길을 행하게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나오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체의 모든 보살이 처음으로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菩提心]을 일으켰던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모든 세계는 스스로 청정함을 알게 하기 위함이며, 모든 중생을 구하 고 깨달음을 열고자 생각하였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의 번뇌와 그 오염 그리고 이별의 아쉬움, 마 음의 움직임을 알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이 여기에서 죽고 저기에서 태어나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또 일체 모든 부처님의 세계가 평등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불자여, 또 다음과 같은 예가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한 순간에 무량한 세계를 통과할 수 있을 만한 신통력을 가지고 그에 필적할 만한 긴 시간 동안 동방을 향하여 나아간다 하여도 세계의 끝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또 두 번째 사람이 앞 사람의 뒤를 이어서 다시 긴 시간동안 동방을 향하여 나아간다 하여도 역 시 세계의 끝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제 삼, 제 사, 내지 제 십의 사람이 동방을 향하여 나아간다 하여도 마찬가지로 그 끝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또 이 동방의 경우와 같이 시방세계에 있어서도 모두 합쳐서 백 명의 사람이 저마다의 방향을 향 하여 나아갈 때, 설사 시방의 세계의 끝에 이를 수가 있다고 가정한다 하여도 초발심을 한 보살의 공덕의 양을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초발심을 한 보살은 한정된 세계의 중생만을 위하여 보리심을 일으킨 것이 아니기 때 문입니다. 시방의 무변한 세계의 실정을 알고, 그 세계의 일체의 중생을 구하고자 생각하기 때문에 최고의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킨 것입니다.

또 작은 세계는 곧 커다란 세계라고 알고, 커다란 세계는 곧 작은 세계임을 알며, 넓은 세계는 곧 좁은 세계임을 알고, 좁은 세계는 곧 넓은 세계임을 알며, 하나의 세계는 곧 무량한 세계임을 알고, 무량한 세계는 곧 하나의 세계임을 알며, 무량한 세계는 곧 하나의 세계에 드는 것임을 알 고, 하나의 세계는 곧 무량한 세계에 드는 것임을 압니다.

또 더럽혀진 세계는 곧 깨끗한 세계임을 알고, 깨끗한 세계는 곧 더럽혀진 세계임을 알며, 하나 의 털구멍 속에 일체의 세계가 있음을 알고, 일체의 세계 속에서 일체의 털구멍의 성질을 알며, 하 나의 세계로부터 일체의 세계가 생하는 것을 알고, 일체의 세계는 흡사 허공과 같음을 압니다. 또 일념 사이에 일체의 세계를 낱낱이 알고자 하기 때문에 보살은 위없는 궁극의 깨달음을 향하여 마 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블자여, 또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신통력을 가지고는 한 순간에 무량한 세계에 사는 모든 중생의 소망을 알 수 있지만, 사람이 아 득한 시간에 걸쳐 제 아무리 능력을 다해도 동방의 일체 세계에 있는 중생의 소망을 알 수는 없다 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제 이, 제 삼, 내지 제 십의 사람이 그 뒤를 이어서 시간을 다해도 동방세계에 사는 중생의 소망을 낱낱이 알 수는 없습니다. 또 시방세계의 중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가령 시방의 무변한 세계에 사는 중생의 소망을 낱낱이 알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초발심 을 한 보살의 공덕을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초발심의 보살은 한정된 세계의 중생의 소망을 알기 위하여 최고의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살이 위없는 깨달음을 향한 마음을 일으킨 것은 일체 중생의 다함이 없는 소망의 대해(大海)를 알고자 하고, 중생의 욕망은 하나의 욕망이며, 하나의 욕망은 일체의 욕망임을 알고자 하며, 또 착 함[善]과 착하지 않음[不善]에 대한 욕망, 세간 혹은 출세간(出世間}에 대한 욕망, 커다란 지혜의 욕망, 청정한 욕망, 장애가 없는 지혜의 욕망, 장애를 받지 않는 지혜를 갖춘 욕망 등을 낱낱이 알 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불자여, 혹은 또 중생의 감각기관, 희망, 방편, 마음, 움직임, 모든 업, 번뇌 등을 낱낱이 알고자 하는 것을 비유로 들 수 있습니다.

불자여! 혹은 또 다음과 같은 비유도 들 수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한 찰나에 동방의 무변한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부처님과 그 일체의 중생을 공경하고 찬탄, 예배하며 존경하고, 또 온갖 공양을 다하고 장엄할 수 있는 신통력을 가지고 아득 한 오랜 시간을 다한다고 하면, 이같이 하여 동방세계와 마찬가지로 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과 일 체 중생을 공양할 수 있다고 하면, 불자여, 어떻겠습니까, 이 사람의 공덕은 많다고 생각합니까.” 제석천은 이에 대답하였다.

“오직 부처님만이 이 사람의 공덕을 알고 있으며 다른 사람은 도저히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법혜보살은 말했다.
“불자여, 이 사람의 공덕을 초발심한 보살의 공덕에 비한다면, 그 백분의 일, 천분의 일에도 지 나지 않을 것입니다. 초발심한 보살의 공덕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따라서 설할 수도 없 습니다.초발심을 발한 보살이 보리심을 내면, 무한한 과거로부터 활동해 온 모든 부처님의 지혜를 알 수 가 있으며, 무한한 미래를 향하여 활동하고자 하는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믿을 수가 있으며, 현재 의 모든 부처님이 설하는 지혜를 알 수가 있습니다.

또 이 보살은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믿고 가르침을 받으며 행하고 체득하여 모든 부처님 들의 공덕과 같게 됩니다. 왜냐하면, 초발심을 발한 보살이 최고의 깨달음을 향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다음의 이유에 근 거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보살은 일체의 모든 부처님의 본질을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커다란 자비심을 가지고 모 든 세계의 중생을 구하고자 생각하기 때문이며, 또 모든 중생의 오염이나 청정함이 생기는 실정을 알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또 모든 중생의 마음의 움직임이나 남은 업으로 인한 번뇌를 낱낱이 알기 때문이며, 또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깨달음을 알고자 생각하기 때문이며, 또 삼세의 부처님께서 가지신 힘을 이 어받아 그 한없는 평등의 지혜를 얻고자 하기 때문에 이 보살은 위없는 깨달음을 향한 마음을 일으 킨 것입니다.

이 초발심을 발한 보살이야말로 실은 부처님인 것입니다. 이 보살은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세계 와 마찬가지로 여래의 한마음[一心]과 한량없는 마음[無量心]과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평등한 지혜 를 얻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세계를 비추고 모든 악도의 고통을 잠재우며, 모든 세계에서 성불하는 것을 실천하고,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불법의 기쁨을 얻게 하고, 그 깊은 진리의 세계를 깨닫게 합니다. 또 모든 부처님의 본성을 지키며, 모든 부처님의 지혜와 광명을 얻고 있습니다.

초발심을 발한 보살은 항상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그 가르침과 모든 보살 연각(緣覺)과 성문(聲 聞) 내지 그 법(法), 세간(世間), 출세간(出世間)의 법, 중생의 법 등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깨달 음을 구하며 그 지혜는 장애를 받는 일이 없습니다.”

그때 부처님의 신통력과 초발심을 발한 보살의 공덕을 찬탄하는 힘에 의하여 시방의 끝없는 모든 부처님의 세계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다. 그리고 하늘의 꽃과 하늘의 향기와 하늘의 꽃다발과 하 늘의 보배가 비처럼 뿌려져 미묘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그때 끝없는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은 낱낱이 그 몸을 법혜보살의 앞에 나타내시었다. 그리고 법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착하고 착하도다. 불자여, 그대는 능히 초발심의 공덕을 설하였다. 시방의 한량없는 모든 부처 님도 또한 낱낱이 초발심의 공덕을 설하고 있다. 그대가 초발심 보살의 공덕을 설하였을 때, 시방 의 중생은 모두 초발심 공덕을 얻고 무상한 깨달음을 향한 마음을 일으킨다. 우리는 이제 중생들에 게 약속하나니 그들은 미래세에 저마다 동시에 반드시 성불할 것이니라. 우리들은 미래의 모든 보 살들을 위하여 이 초발심의 법을 지키고 전하여야 한다.”

법혜보살이 이와 같이 사바세계의 수미산 정상(頂上)에서 초발심의 법을 설하고 중생을 교화한 것과 같이, 시방의 헤아릴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모든 세계 안에서도 초발심의 법을 설하고 중 생을 교화하였다. 그리고 이 법을 설하는 자를 각각 법혜라고 이름하였다.

그것은 부처님의 신통력에 의하며, 부처님의 본원력(本願力)에 의하며, 지혜의 광명이 남김없이 비추는 것에 의하며, 제일의(第一義)를 깨닫는 것에 의하며, 모든 보살은 기쁨에 넘쳐 있음에 의하 며,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한 것에 의하며, 모든 부처님의 평등함을 아는 것에 의하며, 또 법 계는 하나이며 둘이 아님을 깨닫는 것에 의하기 때문이다.”

그때 법혜보살은 시방세계를 남김없이 관찰하고서, 중생의 미혹과 오염을 제거하고, 넓은 해탈을 얻게 하고자, 또 스스로의 깊고 청정한 공덕을 나타내기 위하여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아 다음과 같 이 게송을 읊었다.

“초발심의 보살은 일체 중생 안에서 항상 분노를 떠나 대자비를 일으키며, 남을 이롭게 하는 마 음을 기릅니다. 그 자비의 빛은 시방세계를 비추어 중생을 위한 의지처가 되도록 하며, 모든 부처 님은 이 보살을 지키고자 염원합니다.

그 어느 것도 이 보살의 신심을 방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흡사 금강과 같이 견고하며, 항상 모든 여래의 밑에서 은혜를 알고 은혜에 보답합니다. 보살은 부처님의 지혜를 완성하여 그 뜻에 막힘이 없습니다. 또 진실한 세계를 분명하게 깨달아 마음은 적멸하고 허망을 떠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힘은 고요하고 평안하며 지혜의 힘은 청 정합니다.

보살은 미래의 끝까지 다하여도 중생에게 힘을 바쳐 드디어는 해탈을 얻게 하고자 생각하며 다함 없는 생사 안에서 어떠한 지옥의 괴로움을 받아도 중생을 위하여 힘을 다합니다. 하나의 털구멍 안 에서 시방의 세계를 보니, 그 세계는 미묘하게 장엄한 모습을 띠고 있어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 이 여기에 모여 있습니다.

만약 시방세계 일체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만나 받들고자 하며, 또 헤아릴 수 없는 깊은 공덕을 얻고자 원하며, 혹은 또 일체 중생의 끊임없는 생사의 괴로움을 없애고자 생각한다면 진정으로 서 원을 세워서 곧 깨달음을 향한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제 17장 십행품(十行品)

그때 공덕림(功德林)보살은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고 선복삼매(善伏三昧)에 들어 헤아릴 수 없 는 여러 부처님을 만나 뵈었다.

여러 부처님은 공덕림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거룩한 일이다. 불자여, 그대는 능히 이 선복삼매에 들었다. 시방 세계의 수없는 여러 부처님이 신통력을 주었기 때문에 그대는 이 선복삼매에 들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로자 나불의 본원력과 위신력(威神力)이, 그리고 여러 보살의 선근의 힘이 그대로 하여금 이 삼매에 들게 하고 마침내 깊고 깊은 법을 설하게 할 것이다.

즉 보살이 십행(十行)을 일으키는 것은 일체의 지혜를 증장하려 함이요, 모든 장애를 떠나서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것이며, 진실에 사는 한량없는 방편을 얻기 위한 것이고, 모든 진리를 받아들이고 몸으로 행하기 위해서이다.

불자여! 그대는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아 이 미묘한 법을 설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여러 부처님은 공덕림보살에게 걸림 없는 지혜, 안정된 지혜, 스승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지혜, 한량없는 지혜, 물러섬이 없는 지혜를 주시었다. 왜냐하면 이 삼매력은 법에 의해서 성취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여러 부처님은 제각기 오른손을 내밀어 공덕림보살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공덕림보 살은 삼매에서 일어나 많은 보살들을 향해 십행의 설법을 시작하였다. “여러 불자들이여, 보살의 행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 광대함은 마치 법계와 같으며 무량 무변하기가 마치 허공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삼세의 여러 부처님이 행하는 것을 배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자여, 보살에게는 삼세의 여러 부처님이 설하신 십행(十行)이 있습니다. 십행이란 무엇입니까.

환희행(歡喜行), 요익행(饒益行), 무에한행(無喪限行), 무진행(無盡行), 이치란행(離癡亂行), 선현행(先現行), 무착행(無着行), 존중행(尊重行), 선법행(善法行), 진실행(眞實行)입니다.

불자여, 첫째 보살의 환희행(歡喜行)이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평등한 마음을 갖고 자기의 모든 것을 일체 중생에게 보시합니다. 보시하고 나서도 아 까운 생각이 없으며 과보를 바라지 않고 명예를 바라지 않으며 좋은 세계에 태어나려고 생각하지 도 않습니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체 중생을 구하고 거두며, 여러 부처님의 행을 생각하고 배우고 몸에 지니고 실현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설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살의 환희행입니다. 보살이 환희행을 닦을 때 일체 중생은 환희하고 공경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그곳으로 가서 재보(財寶)를 줍니다.

수 없는 중생이 보살에게로 와서 ‘우리는 가난하고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아무쪼록 자비로 써 목숨을 구해 주십시오’하고 말하면, 보살은 그 요구에 응하여 모두 다 만족시키고 기쁘게 해 주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중생이 구하는 바가 있어서 오면 보살은 위없는 대자비심을 일으켜 더욱 환희 하여 이렇게 생 각합니다.

‘나는 바라던 일을 얻었다. 이들 중생은 나의 복전(福田)이며 나의 선지식이다. 내가 구하지 않았는데도 이 중생들은 와서 나를 가르치고 나를 발심시키고 불도를 수행시킨다. 나는 이와 같 이 수행하여 널리 중생을 기쁘게 해주자. 내가 닦은 공덕으로 어서 속히 청정의 법신을 완성하고 중생의 요구에 응하여 모두 다 환희를 얻을 수 있기를.

또 이 공덕으로 여러 중생이 모두 위없는 궁극의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기를. 나는 먼저 일체 중생의 소원을 만족시키자. 그 후에 나의 위없는 궁극의 깨달음을 완성하리 라.’

보살이 이렇게 생각할 때 보살은 주는 것을 보지 않고, 그 받는 것을 보지 않고, 재물을 보지 않고, 복전을 보지 않고, 업보를 보지 않고 결과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보살은 삼세의 중생을 관찰하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참으로 불쌍한 일이다. 중생은 어리석음에 덮이고 번뇌에 싸이고 항상 생사 속에서 흔들리고 고해(苦海)를 헤매며 조금도 견고한 진실을 얻지 못하고 있다.나는 여러 부처님들이 배우신 것을 모두 배우고 중생을 위하여 힘을 다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위없는 궁극의 깨달음을 얻게 하자.’ 이것이 보살의 환희행입니다.

불자여, 두 번째로 보살의 요익행(饒益行)이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계율을 청정하게 지켜서 어떠한 감각의 대상에 있어서도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며 중생 을 위해서도 무집착의 법을 설하여 스스로의 이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굳게 계율을 견고하 게 가지고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나는 모든 번뇌와 두려움, 슬픔, 고통을 떠나 중생의 소원을 어기지 않고 아침에는 위없는 최 고의 깨달음을 얻도록 하자.’보살이 이와 같이 계율을 수호할 때 여러 마왕이 아름다운 천녀를 수없이 데리고 와서 보살을 유혹하려고 하여도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이 오욕(五慾)은 불도의 장애가 된다. 이에 집착해서는 위없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을 수 없 다.’ 그래서 보살은 직접 부처님을 만나뵈온이래 한 생각의 욕심도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청정하기 가 마치 부처님과 같아졌습니다.

그때 보살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중생은 광야와 같은 생사 가운데서 오욕을 생각하고 오욕을 즐기며 오욕에 집착하고 오욕에 헤매며 오욕에 침몰하며 오욕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다. 나는 지금 여러 마왕, 천녀 및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무상의 계율을 세우게 하자. 또 가르쳐서 불퇴전(不退轉)의 경지를 얻게 하고 위없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게 하자. 왜나 하면 이것이 내가 할 일이며 여러 부처님도 모두 이와 같이 행하였기 때문이다.

온갖 법은 허망하고 진실하지 못하며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견고하지도 못하다. 그것은 마치 환상처럼 중생을 현혹케 한다.모든 존재는 꿈과 같고 번개와 같이 무상한 것이라고 깨닫는 사람은 능히 생사를 헤아려 열반 에 통달할 수가 있다. 또한 번뇌를 극복하지 못한 중생으로 하여금 번뇌를 극복케 하고, 고요하 지 못한 중생들로 하여금 고요하게 하며, 청정하지 못한 중생들로 하여금 청정케 하고, 열반에 통달하지 못한 중생들로 하여금 열반에 통달케 할 수가 있다.’

이것이 보살의 요익행입니다.

불자여, 세 번째로 보살의 무에한행(無喪限行)이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항상 인내의 법을 행하고 스스로 겸손하고 남을 공경하며 온유한 얼굴로 상냥한 말을 쓰고 스스로를 해치지 않고 남을 해하지도 않으며 항상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나는 항상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고 모든 악을 떠나게 하자. 즉 탐욕, 노여움, 어리석은 마 음, 교만심, 어지러운 마음과 질투심을 떠나게 하여 큰 지혜 속에서 안온케 하자.’

보살이 이와 같이 인내의 법을 완성하면, 예컨대 수 없는 중생이 나쁜 소리를 내어 보살을 욕 하고 헐뜯고 또한 여러 무기로써 박해를 가하더라도 보살은 언제나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만약 내가 이 고통으로 해서 노여운 생각을 일으킨다면 나 스스로 번뇌를 극복하지 못하고, 고요하지 못하고, 진실하지 않으며, 자기 몸을 애착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하물며 어떻게 남으로 하여금 환희의 마음을 일으켜 망집에서 빠져 나오게 할 수 있겠는가.’

또한 보살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나는 아득한 옛적부터 여러 가지 고뇌를 받았다. 그러므로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어 스스로 번 뇌를 극복하자. 왜냐하면 나는 위없는 법에서 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보살은 중생으로 하여금 이 법을 얻게 하기를 원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이 몸은 공적(空寂)하고 나도 없으며, 나에게 속한 것도 없으며 진실의 본성도 없다. 모든 고 락도 그 실체가 없다. 모든 것은 공한 것이라는 것을 나는 능히 깨닫고 사람들을 위해 널리 설하 리라.

가령 내가 지금 고뇌나 박해를 겪더라도 능히 그것을 참고 견디어야 한다. 즉 중생을 가엾이 여기고 중생을 안락케하여 중생을 거두어 붙들고 중생으로 하여금 불퇴전의 경지를 얻게 하여 마 침내는 위없는 최고의 깨달음을 완성시키고자 생각하여, 부처님이 행하던 법을 나도 또한 행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보살의 무에한행입니다.

불자여, 네 번째로 보살의 무진행(無盡行)이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항상 많은 노력을 하고 정진을 행합니다.
보살은 오욕 때문에 마음이 산란해지거나 노여움, 어리석음, 교만, 질투, 원망 때문에 번뇌하 는 일이 없습니다. 또 보살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어떠한 중생도 괴롭히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정진을 행한다. 또 모든 번뇌를 떠나려고 생 각하여 모든 중생의 생사, 번뇌, 희망, 마음의 움직임을 알려고 생각하며, 여러 부처님의 진실한 법을 알려고 생각하고, 청정한 평등의 법을 알려고 생각하고, 여러 부처님은 무량무변하여 불가 사의하다는 것을 알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진을 행한다.’

보살이 이와 같은 정진을 완성할 때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물을 것입니다. ‘수 없는 세계의 하나 하나의 중생을 위해 당신은 천만억년 동안 지옥의 고통을 받고 그 중생 들로 하여금 열반에 들어가게 하려고 생각합니까.

또 수 없는 여러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시어 수 없는 중생들에게 가지가지 낙을 받게 하여도 당신은 낱낱이 지옥의 고통을 겪은 후 비로소 위없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으려고 생각합니까.’ 이에 보살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나는 수 없는 세계의 하나 하나의 중생을 위하여 지옥의 고통을 받으리라. 또한 여러 부처님 이 세상에 출현하시어 중생에게 기쁨을 주어도 나는 지옥의 고통을 두루 떠맡은 후에야 비로소 위없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으리라.’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예컨대 당신이 한 개의 털끝으로 큰 바다의 물을 찍어내어 그 바다를 마르게 하고, 또한 수 없는 세계를 부수어 티끌로 만든 후, 그 티끌을 낱낱이 셀 정도의 수많은 겁을 지내도 당신은 진 리를 구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겠습니까?’ 보살은 이와 같은 말을 들어도 결코 퇴전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으며 큰 기쁨과 노력으로 정진 을 행하고 그리고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바를 얻을 수가 있다.

무량무변의 세계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은 나에 의해서 영원히 고통을 벗어날 것이다.’ 다시 보살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나는 일체 중생을 대신하여 일체의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마침내 모두 열반을 얻게 할 것이다.’ 이것이 보살의 무진행입니다.

불자여, 다섯 번째로 보살의 이치란행(離癡亂行)이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어떠한 경우에도 마음을 산란케 하는 일이 없습니다. 보살은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 정법을 들어왔습니다.

보살은 정법을 들으면서 아직 일찍이 정법에서 물러선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이 불도를 행할 때 아직 일찍이 중생의 삼매를 산란시킨 일이 없고 또한 정법이나 지혜를 끊은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남의 험담을 들어도, 또한 칭찬하는 말을 들어도 마음이 산란하지 않습니다. 선정(禪 定)도 산란치 않고, 보살행도 산란치 않고, 보리심을 성숙시키는 데도 산란치 않고, 염불 삼매도 산란치 않으며, 중생을 가르쳐 인도하는 지혜도 산란치 않습니다.

보살은 선정 가운데서 모든 음성의 모습을 관찰하고 그 본성을 알고 있습니다. 가령 다른 사람 으로부터 좋고 나쁜 소리를 들어도 애증(愛憎)의 마음을 일으키는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살 은 모든 소리는 실체가 없고 무차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동작, 말, 마음이 적정하므로 법에서 퇴전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선정에 안주하여 지혜는 깊어지고, 모든 음성을 떠난 삼매를 얻어 자비의 마음을 키우고, 일념 일념 속에서 한량 없는 삼매를 얻고, 마침내는 일체의 지혜를 완성하게 할 것입니다.

보살은 다른 사람의 나쁜 소리를 듣고 나서도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나는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청정한 마음으로 안락케 하고 모든 지혜를 얻게 하여 마침내는 큰 열반의 세계를 완성시킬 것이다.’ 이것이 보살의 이치란행입니다.

불자여, 여섯 번째로 보살의 선현행(先現行)이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동작, 말, 마음이 청정하며 모든 것이 실체가 없다는 지혜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보살의 동작, 말 마음에는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의 행동은 의지하는 곳 이 없고 머무르는 곳이 없습니다. 다만 마음에 따라 나타나고 마음에 따라 움직입니다. 보살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일체 중생은 자성(自性)이 없는 것을 자성으로 삼고, 일체의 것은 적멸을 성품으로 삼고, 일 체 국토는 형체가 없음으로 형체를 삼았다. 또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가 오직 말뿐이고, 모든 말이 여러 법 가운데 의지한 곳이 없고 모든 법이 말 가운데 의지한 곳이 없다.’ 보살은 이와 같이 깊은 진리를 깨닫고, 모든 세계를 두루 다니며 고요한 것을 알고, 일체 여러 부처님의 심심한 묘법을 깨닫고, 불법과 세간법과는 동일하여 구별이 없다고 깨닫고 있습니다. 세간의 법은 부처님의 법과 일치하며 부처님의 법은 세간의 법과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부처님의 법과 세간의 법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보살은 삼세의 평등한 진리에 안주하여 자비심을 버리지 않고, 중생을 교화하고 인도하는 마음 을 버리지 않고, 대자대비의 마음을 성숙시켜서 일체 중생을 구하기를 원합니다. 보살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내가 중생의 덕을 완성시키지 않으면 누가 완성시킬 수 있겠는가. 내가 중생의 번뇌를 극복하 지 않으면 누가 극복시킬 수 있겠는가. 내가 중생의 고뇌를 가라앉히지 않으면 누가 가라앉힐 수 있겠는가. 내가 중생의 마음을 청정케 하지 않으면 누가 청정케 할 수 있겠는가.’ 또 보살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중생의 덕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 나 홀로 위없는 궁극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잘못이 다. 나는 우선 중생을 교화하고 인도하며 한없는 겁 동안 보살행을 수행하여 중생의 덕을 완성시 키자.’

보살이 이와 같은 행에 안주할 때, 여러 천인, 출가자와 재가자들이 이 보살을 보고 마음으로 부터 환희하고 공경할 것입니다. 만약 중생이 이 보살을 공경하고 예배하며 그 법에 따르면 마침내 위없는 궁극의 깨달음을 얻 을 것입니다. 이것이 보살의 선현행입니다.

불자여, 일곱 번째로 보살의 무착행(無着行)이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 생각하며, 수 없는 불국토를 관찰하고, 수 없는 여래가 계신 곳 으로 나아가 예배하고 공양합니다.

보살은 부처님의 광명을 받아도 마음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또 부처님의 설법을 들어도 혹은 시방 세계와 부처님과 보살과 일체 대중 속에 있어도 집착이 없습니다. 보살은 청정하지 않은 나 라를 보아도 마음에 미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그 마음이 적멸(寂滅)하고 모든 것은 평등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것은 청정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고, 암흑도 아니며, 광명도 아니고, 분별도 없으며, 무분별도 없고, 희망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며, 안락도 아니고, 위험도 아니며, 정도도 아니고, 사도(邪道)도 아니라고.

이와 같이 보살은 모든 것의 진실한 모습을 관찰하고, 중생의 본성에 들어가 교화하고 인도하 여 덕을 완성하였으므로 집착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또 보살은 보살의 마음을 버리지 않기에 부처님의 세계에 머물면서도 집착하지 않고, 여러 가 지 말에도 집착하지 않고, 중생의 속에 들어가도 그 속에 집착하지 않고, 여러 선정을 분별하고 그 안에 들어가도 마음에 집착함이 없으며, 수 없는 여러 부처님의 국토에 들어가 그 불국토를 보아도 집착하지 않고, 혹은 그 불국토를 떠날 때에도 미련을 갖지 않습니다.

그때 보살은 일체 중생이 여러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대비심을 일으켜 다음과 같이 생각 합니다.

‘나는 시방 세계의 하나 하나의 중생을 위해 한량없는 겁을 지내면서 항상 중생과 더불어 지내 고 그 덕을 성취시키며 어떠한 경우에도 중생을 버리려는 생각은 티끌만큼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보살은 생각 생각마다 대비심을 일으켜서 끊어지는 일이 없고 또 중생에게 집착하지 않습니다.

또 보살은 모든 보살행을 학습하고 몸에 갖추었으나 신체에 집착하지 않고, 진리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소망에 집착하지 않고, 선정에 집착하지 않고, 적정(寂靜)에 집착 하지 않고, 깊은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일에 집착하지 않고, 중생을 교화, 인도하여 그 덕을 성취시키는 일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체의 세계는 환상과 같고 여러 부처님의 설법은 번개와 같고 보살의 행동은 꿈과 같고 듣는 불법은 메아리와 같다.’

보살은 일념 속에서 널리 시방 세계에 충만하여 보살의 행을 거둡니다. 그 행의 광대함은 마치 법계와 같으며 무량무변하기가 마치 허공과 같은 것입니다. 보살은 이와 같이 온갖 것이 무아(無我)라는 것을 관찰하였기에, 대비심을 일으켜 모든 사람들 을 구하고, 아직 덕을 성취하지 못한 사람은 성취케 하고, 아직 번뇌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은 번 뇌를 극복하게 하고, 세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더구나 세간에 따르게 합니다.

이것이 보살의 무착행입니다.

불자여, 여덟 번째로 보살의 존중행(尊重行)이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항상 여러 부처님의 훌륭한 진리를 즐기고 오로지 위없는 최고의 깨달음을 구하여 잠시 동안도 보살의 대원(大願)을 버리지 않고 한량없는 겁 동안 보살의 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보살은 생각 생각마다 끝없는 생사의 고통을 벗으려는 대원을 키우고 있습니다. 만약 중생이 이 보살을 공경하고 예배하고 또한 그 소원을 들을 수가 있다면 중생은 불퇴전의 자리에 머물러 반드시 위없는 최고의 깨달음을 완성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보살은 한 중생도 소홀히 여기지 않으며 많은 중생에게 집착하지도 않으며, 반대로 많은 중생 을 소홀히 여기지도 않으며, 한 중생에게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생의 세계와 진리의 세계는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보살은 깊은 진리의 세계를 깨닫고 형체 없는 형체로 머물면서 온갖 불국토에 몸을 나타내어도 그 불국토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또한 보살은 모든 일에 대하여 욕망을 떠나 있어도 보살의 도를 그만두지 아니하고 보살의 행 을 버리지 않습니다.

보살이 지니고 있는 공덕의 보물 창고는 다할 수가 없으며 중생을 교화하고 인도하는 것도 또 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즉, 보살은 궁극의 깨달음에 도달해 있는 것도 아니며 도달해 있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세간의 일도 아니며 부처님의 진리도 아니고 범부도 아닙니다. 보살은 이와 같이 중생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지혜의 마음을 성취하여 항상 보살의 행을 닦고,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영원히 나쁜 길에서 떠나게 하고, 중생을 교화하고 인도하여 삼세의 여러 부처님의 진리 속에 편안히 머물게 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모든 중생은 은혜와 옳은 것[思議]을 모르고 서로 해치며, 사심이 불타오르고 정도(正道)를 어겨서 번뇌가 많으며, 무지의 어둠에 덮여 있다. 나는 오로지 일체 중생의 번뇌를 극복하고 일 체 중생을 청정케 하고 또한 구하려고 생각할 뿐이다.’ 이것이 보살의 존중행입니다.

불자여, 아홉 번째로 보살의 선법행(善法行)이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일체 중생을 위하여 청정한 진리의 연못이 되며 정법을 수호하여 부처가 될 씨앗[佛種] 이 끊어지지 않게 합니다.

보살은 중생의 바람과 능력에 따라 설하고 하나 하나의 말에 한량없는 의미를 담고 사람들을 기쁘게 합니다.가령 중생이 수 없는 말을 알고 한량없는 숙업이나 인과응보를 알고 있고, 그와 같은 중생이 한량없이 세계에 충만해 있어도, 보살은 그 안에 있으면서 진리의 말로써 이들 사람들의 마음을 눈뜨게 합니다.

그때 보살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한 오라기 털끝 만한 곳에도 잠깐 사이에 수 없는 중생이 와서 모인다. 이와 같이 해서 일념 일념 사이에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모이더라도 중생은 다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중생들의 말은 같지 아니하고 그 물음은 제각기 다르더라도, 나는 그 중생의 문제를 마 음에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모두 들어서 단 한 마디로써 의문의 그물을 부수고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기쁘게 할 것이다.’

보살이 설법하는 말은 진실이며, 한 마디 한 마디 가운데 한량없는 지혜가 담겨져 있으며, 그 지혜의 광명은 일체의 세계를 비추고 중생의 공덕을 완성합니다. 보살은 선법행에 머물며 스스로 청정한 가운데 이와 같이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 인도합니다. 불자여, 이 보살에게는 열 가지 몸이 있습니다.

첫째, 무량무변의 법계에 들어가는 몸입니다. 그것은 일체 세간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둘째, 미래신(未來身)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국토에서도 태어날 수가 있습니다.

셋째, 불생신(不生身)입니다. 그것은 일찍이 난 일이 없다는 진리를 얻고 있습니다.

넷째, 불멸신(不滅身)입니다. 그것은 일찍이 멸한 일이 없다는 진리를 얻고 있습니다.

다섯째, 진실신(眞實身)입니다. 그것은 진실의 도리를 얻고 있습니다.

여섯째, 무지를 떠나 있는 몸입니다. 그것은 중생의 바람에 응하여 교화하고 인도합니다.

일곱째, 과거도 미래도 없는 몸입니다. 그것은 여기서 죽고 저기서 난다는 일이 전혀 없습니 다.

여덟째, 불괴(不壞)의 몸입니다. 그것은 법계의 본성은 파괴할 수가 없다는 진리를 얻고 있습 니다.

아홉째, 일상(一相)의 몸입니다.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나타낼 도리가 없습니다.

열째, 무상(無相)의 몸입니다. 그것은 법이 형체를 잘 관찰하고 있습니다.

보살은 이와 같은 열 가지 몸을 완성하여 일체 중생을 위하여 스스로 집이 됩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선(善)의 능력을 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일체 중생을 구호합니다. 왜냐하면 중생에게 두려움이 없는 마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일체 중생의 귀의처가 됩니다. 왜냐하면 중생으로 하여금 평안한 세계에 안주하도록 하 기 때문입니다.보살은 일체 중생의 지도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중생에게 무상도(無上道)에 이르는 문을 열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일체 중생의 스승이 됩니다. 왜냐하면 중생으로 하여금 진실의 법에 들게 하기 때문입 니다.
보살은 일체 중생의 등불이 됩니다. 왜냐하면 중생에게 인과응보를 환히 보게 하기 때문입니 다.
보살은 일체 중생의 밝은 지혜가 됩니다. 왜냐하면 중생으로 하여금 미묘한 불법을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일체 중생의 횃불이 됩니다. 왜냐하면 중생에게 여래의 자재력(自在力)을 나타내기 때 문입니다.
이 보살은 선법행에 머물러 일체 중생을 위하여 청정한 진리의 연못이 됩니다. 왜냐하면 보살 은 심심 미묘한 불법의 근원을 얻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보살의 선법행입니다.

불자여, 열 번째로 보살의 진실행(眞實行)이란 무엇입니까.
이 보살은 진리의 말을 성취하고 그 말대로 행하고 또 행하는 대로 설법합니다. 보살은 삼세 부처님들의 진실의 말을 배우며 삼세 부처님들의 본성에 들어가 삼세 부처님들의 공덕과 함께 합니다. 보살은 또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일체 중생이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이것을 구하려고 생각한다. 만약 아 직 중생을 구하기 전에 스스로 위없는 최고의 깨달음을 이룬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나는 먼저 보살의 대원을 만족한 후,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위없는 보리와 무여 열반(無餘涅 槃)을 얻게 하며 성불케 할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은 나에게 의뢰하여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이 보리심을 일으켜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온갖 종류의 지혜를 얻게 하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체 중생 가운데 가장 으뜸이다. 왜냐하면 중생에게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일체의 암흑을 떠나 있다. 왜냐하면 중생의 끝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선을 거두고 있다. 왜냐하면 삼세 부처님들에게 수호되고 생각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보살은 본래의 서원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최고의 지혜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보살은 일체 중생의 바람에 응하여 교화하고 인도하며 그 본래의 소원에 따라 중생의 소원을 만족시키고 모두 청정케 합니다. 보살은 생각 생각마다 널리 시방의 세계에 유행(遊行)하며, 생각 생각마다 한량없는 부처님 나 라에 두루 나아가며 생각 생각마다 한량없는 부처님들을 만나 뵙니다.

보살은 여래의 자재한 신통력을 나타내며, 그 마음은 법계와 허공계와 동등합니다. 그 몸은 한 량없어 중생의 바람에 응하여 나타나고, 몸과 마음 모두가 방해를 받는 일이 없으며 의지함이 없 습니다.
보살은 자신 가운데 일체 중생, 일체 법과 삼세의 여러 부처님들이 모두 나타나 있습니다. 보살은 중생의 갖가지 생각과 갖가지 욕망과 갖가지의 업보를 알며, 중생의 요구에 응하여 그 몸을 나타내고 중생의 번뇌를 가라앉힙니다.

보살은 대비심에 머물러 부처님의 큰 가르침을 실천하며 적정(寂靜)의 세계를 관찰하고 있습니 다. 보살은 또 부처님의 위신력을 얻어 자유자재로 보배로 엮은 그물과 같은[因陀羅綱]법계에 들 어 여래의 해탈을 성취하고, 지혜의 큰 바다를 관찰하여 항상 일체 중생을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 다.
이것이 보살의 진실행입니다.”

그때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시방의 모든 세계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으며, 하늘에서 꽃비, 향 비, 영락의 비, 보배의 비가 내렸다. 또한 하늘의 광명은 두루 일체를 비추고 하늘의 음악은 스 스로 미묘한 울림으로 퍼져나왔다.

그때 수 없는 불국토에서 수 없는 보살들이 와서 저마다 공덕림보살에게 말하였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불자여, 그대는 능히 여러 가지 보살의 행을 설법해 주셨습니다. 우리 들은 당신과 같은 이름인 공덕림이며 우리들의 국토는 공덕당(功德幢), 우리들의 부처님은 보공 덕(普功德)입니다.

불자여, 우리들은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고 이 국토에 와서 당신의 설법을 증명합니다.”

 

제 18장 십무진장품(十無盡藏品)

그때 공덕림보살은 여러 보살들에게 말하였다. “불자여, 보살에게는 열 가지의 보장(寶藏)이 있는데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들이 이미 말 씀하신 바입니다. 열 가지의 보장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장(信藏), 계장(戒藏), 참장( 藏), 괴장(愧藏), 문 장(聞藏), 시장(施藏), 혜장(慧藏), 정념장(正念藏), 지장(持藏), 변장(辯藏)입니다.

첫째로, 보살이 얻는 믿음의 보물 창고[信藏]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일체 법이 공(空)함을 믿고, 일체 법이 형태가 없음을 믿고, 일체 법에는 이것을 만드 는 주체가 없음을 믿고, 일체 법은 불생(不生)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은 신심(信心)을 완성하면 가령 부처님, 중생, 법계, 열반계 등의 불가사 의한 것에 관하여 들어도 놀랍고 두려운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또 가령 과거세, 미래세, 현재세의 불가사의한 것에 관하여 놀랍고 두려운 마음을 갖지 않습니 다. 왜냐하면 보살은 여러 부처님 밑에서 닦은 신심이 견고하여 무너지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무량무변의 지혜를 갖추고 계십니다. 더욱이 시방 세계에 무수한 부처님들이 계시어 이미 위없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고, 이미 열반에 들었습니다. 부처님들의 지혜는 더하는 일도 없고, 덜하는 일도 없고, 생기는 일도 없고 멸하는 일도 없습니다.

보살은 이와 같이 무변무진한 믿음의 보물 창고를 완성하여 여래의 큰 힘을 타고 나아가며, 모 든 불법을 지키고 보살의 일체의 덕을 닦고, 모든 여래의 덕에 따르고 모든 부처님들의 방편에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믿음의 보물 창고는 결코 퇴전하지 않는 믿음, 산란하지 않는 믿음, 깨뜨리지 않는 믿음, 집착하는 일이 없는 믿음, 여래 본성의 믿음입니다. 이것이 보살의 다함없는 믿음의 보물 창고입 니다.

불자여, 둘째로, 보살이 얻는 계율의 보물창고[戒藏]한 무엇입니까.
보살은 여러 가지 계를 성취합니다.
첫째는 요익계(饒益戒)입니다. 보살은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고 중생을 안락케 합니다. 둘째는 불수계(不受戒)입니다. 보살은 외도(外道)의 여러 가지 계를 받지 않고 과거, 현재, 미 래의 부처님들이 설하신 평등의 계를 지킵니다.
셋째는 무착계(無着戒)입니다. 보살은 어떠한 세계의 계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넷째는 안주계(安住戒)입니다. 보살은 어떠한 계도 깨뜨리지 않고 청정하여 의심도 후회도 없 는 계를 성취합니다.

다섯째는 부쟁계(不諍戒)입니다. 보살은 항상 열반으로 향하는 계에 따르고 이 계를 위하여 중 생을 괴롭히는 일이 없습니다. 보살이 계를 지니는 것은 다만 중생의 이익을 생각하고 중생을 환 희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섯째는 불뇌해계(不惱害戒)입니다. 보살은 계를 지님으로써 중생을 괴롭히거나 주술(呪術)을 배우는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을 구하기 위해 계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일곱째는 불잡계(不雜戒)입니다. 보살은 한 쪽의 견해를 떠나야만 인연을 관찰하고 청정의 계 를 갖습니다.
여덟째는 이사명계(離邪命戒)입니다. 보살은 다만 청정한 계를 지니고 오로지 불법을 구하며 일체의 지혜를 성취하려고 생각할 뿐입니다.

아홉째는 불악계(不惡戒)입니다. 보살은 스스로 교만하여 ‘나는 계율을 잘 지키고 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 계를 범하는 사람을 보고도 경멸하거나 괴롭히지 않습니다. 다만 일심으로 계를 지닐 뿐입니다.
열째는 청정계(淸淨戒)입니다. 보살은 살생, 도둑질, 바르지 못한 성관계(性關係), 거짓말, 나 쁜 말, 이간하는 말, 성내는 일, 어리석음, 바르지 못한 소견 등에서 떠나 오로지 계를 지킵니 다.

보살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만약 중생이 계를 범한다면 그것은 중생의 그릇된 생각에 의한 것이다. 모든 부처님들은 중생 이 그릇된 생각에 의하여 계를 범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나는 오로지 불도를 구하고 위없는 최고의 깨달음을 완성하여 널리 중생을 위해 진실의 법을 설하고, 중생들로 하여금 그릇 된 생각을 떠나 청정의 계를 지니게 하고 모두 위없는 최고의 깨달음을 성취케 하자.’ 이것이 보살의 다함없는 계장입니다.

불자여, 셋째로, 보살이 얻는 참회의 보물 창고[ 藏]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스스로 자기의 과거세를 생각합니다. ‘나는 한량없는 옛적부터 부모 형제들에게 죄를 범해 왔다. 혹은 상대를 업신여기고 스스로 교 만하였으며, 혹은 믿음이 산란하여 바른 믿음을 잃고 화를 내어 친근함이 없어졌으며, 이와 같이 혼미하여 여러 가지 악을 지어 왔다. 일체 중생도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죄를 범하고 있다. 이럴진대 어찌하여 좋은 일이 있겠는가.

그러니 나는 스스로 죄를 부끄럽게 생각하여 위없는 최고의 깨달음을 완성하고 또한 중생을 위 하여 진실의 법을 설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죄를 부끄럽게 생각하여 위없는 최고의 깨달음을 완성 하도록 하자.’
이것이 보살의 다함 없는 참회의 보물 창고입니다.

불자여, 넷째로, 보살의 부끄러움을 아는 보물 창고[愧藏]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스스로 자신의 부끄러움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나는 옛날부터 감각의 대상이나 처자 형제나 재산이나 보물 등에 관한 탐욕이 끝이 없었다. 이러한 일은 그만두지 않으면 안된다.’ 또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중생은 나쁘고 거친 마음을 품고 서로 해치고 있다. 그러나 중생들은 그것을 조금도 수치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혼미 속에 빠져 끝없는 고뇌를 받고 있다. 삼세의 부처님들은 모두 이것을 아시고 있다.

나는 자기의 행위를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여 위없는 최고의 깨달음을 완성하고 널리 중생을 위하여 이 진리를 설하고 불도를 완성시키자.’ 이것이 보살의 끝없이 부끄러움을 아는 보물 창고입니다.

불자여, 다섯째로, 보살이 법문을 듣는 보물 창고[聞藏]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많은 진리를 듣습니다.
이를테면 보살은 어떤 일이 있음으로 해서 다른 일이 있고, 어떤 일이 없음으로 해서 다른 일 이 없다. 어떤 일이 일어나니까 다른 일도 일어나고 어떤 일이 멸하니까 다른 일도 멸한다는 상 대 관계를 알고 있습니다.

혹은 또 보살은 이 세계에 있어서의 진리, 이 세계를 초월하고 있는 진리, 모양이 있는 세계의 진리 등을 알고 있습니다. 보살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중생은 혼미의 세계에서 수많은 윤회를 거듭하면서 불도를 닦을 줄을 모른다.

그러니 나는 노력, 정진하여 불도를 배우고 일체 부처님들의 법을 지녀서 위없는 최고의 깨달 음을 완성하고 또한 널리 중생을 위하여 진실의 법을 설하고 위없는 궁극의 불도를 완성시키자.’ 이것이 보살의 끝없이 법문을 듣는 보물 창고입니다.

불자여, 여섯째로, 보살이 행하는 보시의 보물 창고[施藏]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열 가지 종류 의 보시를 합니다. 즉 수습시법(修習施法}, 최후난시법(最後難施法), 내시법(內施法), 외시법(外 施法), 내외시법(內外施法), 일체시법(一切施法), 과거시법(過去施法), 미래시법(未來施法), 현 재시법(現在施法), 구경시법(究景施法)입니다.

첫째로, 보살의 수습시법(修習施法)이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어떠한 귀중한 물건과 맛있는 음식에도 스스로 집착하지 않고 모두 사람들에게 보시합 니다.

보시한 후에 만약 남은 것이 있으면 자기가 그것을 먹고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내가 식사를 하는 것은 내 몸 속의 약 팔만 마리 가량의 작은 벌레들을 위해서이다. 나의 몸 이 안락하면 그들도 또한 안락하고 나의 몸이 굶주림에 고통받으면 그들도 또한 굶주림에 고통스 러울 것이다.’

이와 같이 보살이 식사를 하는 것은 몸 속의 벌레를 위한 것이며 그 맛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또 보살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나는 오랫동안 자기 몸을 위해 마실 것, 먹을 것을 탐해 왔다. 나는 조속히 이 몸을 떠나는 일에 노력 정진하자.’

둘째로, 보살이 행하는 가장 어려운 보시법[最後難施法]이란 무엇입니까. 만약 보살이 갖가지 맛있는 음식이나 의복, 그 밖의 생활 도구를 자기를 위해 사용하면, 목숨 을 연장하여 쾌적한 인생을 보낼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만약 이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시한다 면 보살은 곤궁해지며 목숨이 단축될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 어떤 거지가 나타나 보살에게 모든 것을 소망해 왔습니다.

그때 보살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나는 여태까지 목숨을 버린 일은 수없이 많았으나 남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 일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다행히 맛있는 음식과 의복을 얻은 것은 더없는 기쁨이다. 이제 나는 목숨 을 버리고 일체를 바쳐서 중생을 위해 아끼지 않고 큰 보리를 완성하자.’ 이것이 보살이 최후에 행하는 가장 어려운 보시입니다.

셋째로, 보살이 신명을 버려 행하는 보시[內施法]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젊었을 대 단정하고 아름다운 모습에다 맑은 얼굴을 가졌으며 청정한 의복에 장식을 달 고 국왕의 자리에 앉아 천하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거지가 나타나서 왕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늙고 병들고 쇠약하고 고독하고 아무도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대로 있으 면 반드시 죽어 버릴 것입니다. 대왕이시여, 아무쪼록 나를 살려 주십시오. 만약 내가 당신처럼 왕의 몸을 얻을 수가 있다면 나는 당신의 수족, 혈육, 뇌수(腦髓) 등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아 무쪼록 자비하신 마음으로 나에게 보시해 주십시오.’ 보살은 그때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나의 몸도 마침내는 거지와 같은 운명이 될 것이다. 만약 죽어 버리면 무엇 하나 보시할 수도 없게 된다. 그렇다면 조속히 이 몸을 버리고 목숨을 구하자.’ 보살은 기꺼이 자기 몸을 거지에게 보시하였습니다. 이것이 보살이 신명을 버려 행하는 보시법입니다.

넷째로, 보살이 자신의 지위를 버려 보시하는 법[外施法]이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젊었을 때 단정하고 엄숙한 모습에 그 얼굴은 더욱 맑았으며 깨끗한 옷을 입고 장식을 몸에 달고 국왕의 자리에 앉아 천하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거지가 나타나서 왕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나이 많고 병들고 쇠약해서 마침내 빈곤 속에서 목숨이 끊어질 것입니다. 저와는 달리 대왕께서는 모든 즐거움을 몸에 지니고 계십니다. 대왕이시여, 아무쪼록 왕위를 저에게 보시해 주십시오, 나는 천하를 다스려 왕의 행복을 만끽할 것입니다.’ 보살은 그때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부귀는 덧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침내 빈천(貧賤)으로 변할 것이다. 만약 빈천해지면 남에게 보시할 수도 없고 그 소원을 이루어 줄 수도 없다. 그렇다면 조속히 왕위를 버리고 거지의 마음을 만족시켜 주자.’ 이때 보살은 기꺼이 왕위를 보시하였습니다. 이것이 보살이 자신의 지위를 버려 보시하는 법입니다.

다섯째로, 보살이 안과 밖의 모든 것을 버려 행하는 보시의 법[內外施法]이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젊었을 때 단정하고 엄숙한 모습에다 그 얼굴은 더욱 맑았으며 청정한 의복을 입고 장 식을 몸에 달고 국왕의 자리에 앉아 천하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거지가 나타나 왕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나이 많고 병으로 쇠약하여 은근히 대왕의 생활을 바라고 있습니다. 대왕이시여, 아무쪼록 당신의 자리와 천하를 저에게 보시해 주십시오.’ 보살은 그때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나의 몸과 재보(財寶)는 모두 덧없는 것이며 마침내 사라져 갈 것이다. 나는 지금 나이도 젊 고 힘도 왕성하여 천하의 부(富)를 갖고 있는데 더구나 구걸하는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 있다. 나 는 이제 이 덧없는 것 가운데서 영원한 진실을 구하자.’

보살은 이와 같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기꺼이 모든 것을 버려서 거지에게 보시하였습니다. 이것이 보살이 안과 밖의 모든 것을 버려 행하는 보시의 법입니다.

여섯째로, 보살이 일체 모든 것을 버려 행하는 보시의 법[一切施法]이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젊었을 때 단정하고 엄숙한 모습에 그 얼굴은 더욱 맑았으며 향기 높은 탕에서 목욕을 하고 청정한 의복을 입고 장식을 몸에 달고 국왕의 자리에 앉아 천하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거지가 나타나 왕에게 말하였습니다.

‘대왕의 이름은 널리 세계에 알려져 있습니다. 나는 멀리서 왕의 이름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대왕이시여, 바라옵건대 대왕의 모든 지위와 재보를 나의 소망에 맡겨서 이 마음을 만족시켜 주십시오.’ 그리고 그 거지는 왕의 나라와 성, 처자, 권속, 수족, 혈육, 두뇌 등 모두를 요구해 왔습니다. 그때 보살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만나면 마침내 헤어지기 마련이다. 지금 남에게 보시를 안하면 그 소 원을 이루어 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조속히 탐애의 마음을 떠나서 모든 것을 버리고 남을 위해 힘을 다하자.’ 보살은 이와 같이 마음으로 생각하여 기꺼이 거지에게 모든 것을 보시하였습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버려 행하는 보시의 법입니다.

일곱째로, 보살이 과거의 여러 부처님들과 보살들의 보시법을 본받아 행하는 보시법[過去施法] 이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과거의 부처님의 행이나 보살의 행이나 공덕을 들어도 그에 집착하지 않고, 망상도 일 으키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들을 교화하고 인도하기 위하여 몸을 나타내고 널리 법을 설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불법을 완성시키려고 생각할 뿐입니다. 또 보살은 가령 시방 세계를 두루 아니며 과거의 여러 법을 관찰하더라도 그 실체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과거의 여러 가지 보시의 법을 모두 본받아 행하자.’ 이것이 보살이 과거의 여러 부처님과 보살들의 보시법을 본받아 보시를 실행하는 일입니다. 여덟째로, 보살이 행하는 미래의 보시법[未來施法]이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미래의 여러 부처님과 보살의 행이나 공덕에 대해 들어도 그 모습을 그리지 않고, 집착 하지 않으며, 그 부처님 나라에 탄생하려고 생각하지도 않고, 욕심을 내지도 않으며, 싫어하지도 않고, 마음을 닦아 산란하는 일이 없습니다.

다만 중생을 교화하고 인도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불법을 성숙시키게 하려고 진실을 관찰할 뿐 입니다. 이 진실의 법은 그 소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가까이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보살이 미래의 보시법을 실행하는 일입니다.

아홉째로, 보살이 행하는 현재의 보시법[現在施法]이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사천왕, 삼십 삼천, 야마천, 도솔천 등 온갖 천상의 세계, 혹은 성문, 연각의 공덕을 자신의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도 그 마음은 미혹하지 않고, 두려움을 품지 않고, 항상 고 요하여 집착하지 않습니다. 보살은 다만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모든 현상은 꿈과 같고 모든 행은 모두 진실이 아니다. 중생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미혹의 세계에 유전하는 것이다.’

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널리 설법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악을 떠나 불도를 완성시키고 이와 같이 스스로 보살의 도를 닦아 마음에 미혹이 없습니다. 이것이 보살이 현재의 보시법을 실행하는 일입니다.

열째로, 보살이 행하는 궁극의 보시법[究竟施法]이란 무엇입니까. 많은 중생 가운데는 눈, 귀, 코, 수족들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보살에게 ‘우리들은 불구자이며 불행한 몸입니다. 바라옵건대 보시로써 우리들을 완전하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 다.

그때 보살은 기꺼이 자기의 것을 보시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보살은 가령 자기가 한량없는 겁 동안 불구자가 되어도 일념의 후회도 일으키지 않 습니다. 다만 보살은 스스로 자기 몸을 관찰해 보건대 ‘이미 수태(受胎) 때부터 부정(不淨)하고 악취를 뿜으며 한 조각의 실체도 없고, 골절이 서로 연결된 그 위에 피와 살이 덮이고 여러 구멍에서는 항상 부정한 물이 흐르고, 이리하여 마침내는 시체가 된다’고 보았기에 일념의 애착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또 보살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이 몸은 연약하고 위태롭다. 어찌하여 이 몸을 애착하겠는가. 기꺼이 사람들에게 보시하여 그 소원을 만족시켜 주자. 그리고 마침내는 중생의 마음을 열고 교화하며 인도하고 모두 청정한 법 신(法身)을 얻게 하며 심신의 몸에서 떠나게 하자.’ 이것이 보살이 행하는 궁극의 보시법입니다. 이상이 보살이 행하는 보시의 보물 창고입니다.

불자여, 일곱째로 보살이 얻는 지혜의 보물 창고[慧藏]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형상의 세계와 마음 세계의 고뇌, 그 고뇌의 원인, 그 고뇌가 소멸한 열반, 고뇌를 소 멸하는 실천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또 근본 무지의 고뇌, 그 원인, 그 멸한 열반, 소멸의 방법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또 성문, 연각, 보살의 제각기의 법, 그 열반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살은 이 가르침을 어떻 게 알고 있는 것입니까.

보살은 온갖 것은 모두 숙업의 과보이며 인연에 따라 생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는 자아의 실체가 없고 견고하지 않으며 진실이 아니고 모두가 공(空)하다는 것을 알라 고 있으며 널리 중생을 위해 진실의 법을 설하고 있습니다. 즉 ‘온갖 것은 마침내 파괴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형상의 세계, 마음의 세계는 파괴되는 것이 아니고 근본 무지도 파괴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성 문, 연각, 보살의 제각기의 법도 파괴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온갖 것은 스스로 행한 것도 아니고 남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불 생(不生)이고 불멸(不滅)이며, 보시하는 것도 아니고 받는 것도 아니며, 말로써 나타낼 수가 없 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이와 같은 무진의 혜장을 완성하고 스스로 구극의 도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보살이 얻는 다함없는 지혜의 보물 창고입니다.

불자여! 여덟째로 보살이 얻는 기억의 보물 창고[正念藏]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무지의 암흑에서 떠나 과거의 한 생, 열 생, 백 생 내지는 한량없이 많은 생애와 세계 와 생성 소멸의 되풀이를 마음에 생각합니다.

또 보살은 한 부처님 혹은 한량없이 많은 부처님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한 부처님의 출현이나 혹은 많은 부처님들의 출현을 기억하고, 한 부처님의 한 설법이나 많은 부처님들의 많은 설법을 기억하고, 하나의 번뇌나 많은 번뇌를 기억하고, 하나의 삼매나 많은 삼매를 기억합니다. 이와 같은 보살의 기억에는 열 가지가 있습니다.

즉 고요한 기억, 청정한 기억, 탁하지 않은 기억, 분명한 기억, 티끌을 여읜 기억, 가지가지의 티끌을 여읜 기억, 때를 여읜 기억, 광명이 빛나는 기억, 사랑스러운 기억, 장애가 없는 기억입 니다.

보살이 이 기억을 할 때 어떠한 세간도 보살의 마음을 교란시킬 수는 없고 어떠한 악마도 그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보살은 부처님의 진리를 마음에 견지하고 분명히 그 까닭을 깨달아 아직 그릇된 일이 없습니 다. 이것이 보살의 다함없는 기억의 보배 창고입니다.

불자여, 아홉째로 보살이 얻는 가르침의 보물 창고[持藏]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여러 부처님에게서 하나의 경전 내지 한량없이 많은 경전을 배우고, 한 자나 한 구절도 잊은 일이 없습니다. 일생 동안이나 잊지 않고 또한 많은 생애 동안도 잊은 일이 없습니다. 보살은 한 부처님 내지 많은 부처님들의 이름을 들어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세계 내지 많은 세계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법회 내지는 많은 법회를 맡아보고 있습니다. 또 한때의 설법 내지 많은 때의 설법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번뇌 내지는 많은 번뇌를 분별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삼매 내지 많은 번뇌에 드나들고 있습니다.

불자여, 열째로 보살이 얻는 말씀의 보물 창고[辯藏]란 무엇입니까. 이 보살은 깊은 지혜를 완성하여 일체 중생을 위하여 여러 가지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 다. 보살은 한 경전의 진리 내지는 한량없이 많은 경전의 진리를 설하고 또 한 부처님의 이름 내지 수 없는 부처님들의 이름을 설하고, 또 하나의 세계, 하나의 법회, 하나의 설법, 하나의 번뇌, 하나의 삼매 내지 제각기 수없이 많은 세계, 집회, 설법, 번뇌, 삼매를 설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한 구절 내지 하나의 법을 설하여도 끝이 없으며 한량없이 오랜 시간에 한 구절 내지 하나의 법을 설하여도 끝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간의 흐름을 다하는 일은 있어도 한 구절이나 혹은 하나의 설법을 다하지는 못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보살은 열 가지 다함없는 보물 창고를 완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체의 불 법을 닦고 있으며 다라니(陀羅尼)도 얻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이 다라니에 의해서 일체 중생을 위해서 불법을 전하니 그 미묘한 음성은 시방의 세계 에 충만하여 중생의 번뇌를 제거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들 환희케 합니다. 보살은 중생의 모든 음성, 언어, 문자를 분별하고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여래의 종자를 끊기지 않도록 하며 불법을 전하는 데 조금도 권태를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커다란 허공에 충만하는 청정의 법신을 완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보살의 다함없는 말씀의 보물 창고입니다.

불자여, 이상이 보살이 얻는 열 가지 보물 창고이며 이에 의해서 일체 중생은 위없는 궁극의 깨달음을 완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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