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의 신화 [Le Mythe de Sisyphe]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 카뮈가 1942년에 발표한 평론.

부제에 있듯이 〈부조리에 관한 시론〉이며 소설 《이방인》과 짝을 이룬다. 시지프(시시포스)는 그리스신화의 인물인데

신들에게서 바위를 산꼭대기에 운반하는 형벌을 받았다. 이 바위는 산꼭대기에 도달하면 굴러 떨어져서 시지프는 영원토록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운반하는 작업을 되풀이해야만 한다. 무익하고 희망이 없는 노동보다 더 무서운 형벌은 없다고 신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카뮈는 시지프 안에서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을 보았다. 인간 존재의 무의미성을 자각하면서 이 부조리에 대하여 반항을 기도

하는 인간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지만, 이 인간의 운명에 비참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행복을 발견하고 있는 데 그의 독자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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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의 신화(Painting by Burne Jones)

'The Briar Rose-The Prince Enters the Briar Wood'
painting by Burne-Jones, Sir Edward Coley

神들은 시지프에게 끊임없이 산꼭대기까지 바위 덩어리를 굴려 올리게 하는 형벌을 내렸다. 그러나 돌덩이는 그 자신의 무게로 인하여 꼭대기에서 다시 굴러 떨어지곤 하였다. 그 무익하고도 가망 없는 일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신들이 생각한 것은 일리가 있었다.

'Sponsa de Libano (The Bride of Lebanon)'painting by Burne-Jones, Sir Edward Coley

호머의 말에 의하면, 시지프는 인간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가장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를 지옥의 무익한 노동자가 되게 한 동기에 관해서는 의견이 구구하다. 첫째로 그는 신들을 輕視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신들의 비밀을 누설했다는 것이다. 아조프의 딸 에진은 주피터에게 납치당했다. 아조프는 이 실종에 놀라서 시지프에게 호소했다. 이 납치 사건을 알고 있던 시지프는 아조프가 코린트 城에 물을 대준다는 조건으로 그 사건의 진상을 알려 주겠다고 제의했다. 하늘의 노여움보다도 그는 물의 은총을 택했던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그는 지옥에서 벌을 받게 되었다. 호머는 시지프가 死神을 쇠사슬에 얽어 맸다는 것도 우리에게 이야기해 준다. 플루토(지옥의 왕인 죽음의 신)는 황량하면서도 고요한 자기 왕국의 모습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전쟁의 神을 급파하여 死神을 그의 정복자의 손에서 해방시켰다.

'The Prioress'tale' painting by Burne-Jones, Sir Edward Coley

또한 시지프가 죽음에 처해 있으면서 자기 아내의 애정을 무모하게 시험해 보려고 했다고도 한다. 그는 아내에게 자기의 屍身을 매장하지 말고 광장 한복판에 던질 것을 명령했다. 시지프는 지옥에 떨어 졌다. 인간적인 사랑과는 너무나도 어긋나는 아내의 복종에 화가 난 그는 아내를 벌하기 위해서 지상으로 되돌아갈 허락을 플루토에게서 얻어 냈다. 그러나 다시금 이 세상의 얼굴을 보고, 물과 태양, 뜨거운 돌과 바다의 맛을 보았을 때, 그는 이미 지옥의 그늘 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召還, 경고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또다시 여러 해 동안, 그는 河口의 연안과 찬란한 바다 그리고 대지의 미소 앞에서 살았다. 神들의 체포가 필요하게 되었다. 머큐리(주피터의 아들인 신들의 사자)가 이 파렴치한 자의 목덜미를 잡고 그의 기쁨을 빼앗고는 바위가 이미 준비되어 있는 지옥으로 강제로 끌고 갔던 것이다.

'The Morning of the Resurrection'painting by Burne-Jones, Sir Edward Coley

시지프가 부조리한 영웅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했다. 그는 그의 고통으로서 만이 아니라 정열로서도 영웅인 것이다. 신들에 대한 멸시(蔑視), 죽음에 대한 증오와 삶을 향한 정열은 온갖 존재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는 일에 전념해야 되는 형용할 수 없는 형벌이 내려진 것이다. 이것은 이 지상의 정열을 위해서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代價이다.

'The Garden of the Hesperides' painting by Burne-Jones, Sir Edward Coley

만일 이 신화가 비극적이라면 그것은 그 영웅이 의식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성공하리라는 희망에 부풀었다면 그는 과연 고통스러웠겠는가? 오늘날의 노동자는 날마다 같은 일에 종사하면서 삶을 영위하며, 그리고 그 운명은 부조리하다. 그러나 그 운명은 어쩌다 의식을 갖게 되는 순간에만 비극적일 뿐이다. 인간이 자기의 삶을 향해 돌아서는 그 미묘한 순간에 시지프는 자기의 바위로 되돌아가면서, 자신에 의해 창조되고 기억의 눈길 밑에서 통일되고 또한 멀지 않아 죽음에 의해 봉인(封印)될 그의 운명이 되는 이 행위의 연속을 바라본다. 인간적인 것은 전적으로 인간적 근원이 있음을 확신하여 보기를 원하나 밤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장님인 그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간다. 바위는 또다시 굴러 떨어진다.

'The Mirror of Venus'painting by Burne-Jones, Sir Edward Coley

우리는 언제나 시지프의 무거운 짐을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고 바위를 들어 올리는 고귀한 성실을 가르쳐 준다. 그도 또한 모든 것은 좋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 주인이 없게 되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지나 하찮은 것이 아닌 듯하다. 이 바위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으로 가득 찬 이 산의 광물의 빛 하나하나가 유독 그에게는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를 행복한 존재라고 생각해야 한다.

'Phyllis and Demophon'painting by Burne-Jones, Sir Edward Co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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