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kydong77.tistory.com/20784
https://www.youtube.com/watch?v=pBBbVA9icOA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685
네 편의 비문은
①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성주사 터에 있는 대낭혜화상탑비(국보, 1962년 지정),
②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 경내에 있는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국보, 1962년 지정),
③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면 말방리 대숭복사에 있었던 초월산대숭복사비명,
④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면 원북리 봉암사 경내에 있는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국보, 2010년 지정)를 가리키며,
위의 네 군데 산 이름을 취하여 일반적으로 ‘사산비명’이라 일컫는다.
신라 불교사에서 우뚝한 위치를 차지하는 세 선사(禪師)의 일생 행적과 화엄종 계열의 왕실 원찰(願刹)인 대숭복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문으로서, 사비명(寺碑銘)의 찬술은 『문선(文選)』에 보이는 왕건(王巾)의 ‘두타사비명(頭陀寺碑銘)’에서 그 선례를 찾을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전에 유례가 없었던 일이다.
네 비 모두 왕명에 의해 찬술되었으며,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귀국한 뒤로부터 은거하기 이전에 걸쳐 찬술되었다. 현재 대숭복사비를 제외한 세 비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전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절과 함께 파괴된 것으로 알려진 대숭복사비는 1931년 이후 그 잔편(殘片)이 몇 차례 발굴되었다.
진감선사비와 대숭복사비는 최치원이 직접 글씨까지 썼으며, 대낭혜화상비는 화상의 종제(從弟)인 최인연(崔仁渷, 뒤에 崔彦撝로 개명)이, 지증대사비는 분황사(芬皇寺) 승려 혜강(慧江)이 썼다. 『사산비명』은 우리나라 금석문의 신기원을 여는 웅문거편(雄文巨篇)으로서, 화려한 수사(修辭)에다 함축미와 전아(典雅)함을 잘 갖추고 있다.
『계원필경집』주1이 재당시(在唐時)에 이룩한 대표적 저술이라면 『사산비명』은 귀국한 이후에 남긴 저술 가운데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사산비명』의 자료적 가치와 중요성은 종래 불교학인들 사이에서 과외독본(課外讀本)으로 널리 읽혀져 왔다는 점과 함께 다수의 주해본이 계속해서 나올 만큼 식자층의 관심이 높았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사산비명』은 조선 선조 · 광해군 때 명승(名僧) 해안(海眼: 鐵面老人 · 中觀)이 처음으로 『고운집(孤雲集)』에서 네 비문을 뽑아 책으로 엮고 주석을 붙인 이래, 연담 유일(蓮潭有一) · 몽암(蒙庵) · 홍경모(洪景謨) 등의 주해가 이어졌으며, 근세까지 십 수종의 주해본이 나왔다. 이 가운데 정주(精註) · 정교본(精校本)으로는 『문창집(文昌集)』(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과 『계원유향(桂苑遺香)』(崔完秀 소장), 『사산비명주』(梵海 覺岸註), 『정주사산비명(精註四山碑銘)』(石顚 朴漢永註) 등이 꼽힌다.
이 『사산비명』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연대상으로 훨씬 앞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생생한 사실(史實)을 담은 제1차 자료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우리의 고대사 연구, 특히 신라의 선종사를 비롯한 불교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는데, 이덕무(李德懋) · 정약용(丁若鏞) · 성해응(成海應)과 같은 저명한 실학자들이 『사산비명』을 신라시대의 귀중한 사료로 여겨 중시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사산비명』의 문체는 만당(晩唐) 시기에 크게 유행했던 변려문체(騈儷文體)로서, 육조풍(六朝風)의 기어(綺語)주2와 묘구(妙句)주3가 많고, 변려문에서 구사(驅使)되는 각종 수사기법과 기교, 그리고 중국 역대 금석문의 법식(法式)이 풍부하게 활용되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기교에 흐르거나 나열식의 기술로 꾸며진 것이 아니고, 매우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서술되었다.
또한 문의(文意)가 창달, 원만하고 음조(音調)가 잘 맞으며, 전고(典故)의 사용이 적절할 뿐 아니라, ‘화려함이 많지만 부박(浮薄)하지 않다’는 평을 받고 있다. 비문이라는 제약된 형식 때문에 문학적 가치를 충분히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명(銘)을 비롯하여 문학으로 접근할 수 있는 단서가 적지 않다. 문체적 특성 역시 당시의 문풍(文風)과 문장 스타일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또 『사산비명』은 글의 성격이나 형식상 최치원의 사상과 철학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것은 아니지만, 여느 비문과는 달리 찬자(撰者)의 사상적 · 철학적 편린들을 많이 담고 있으므로, 그것을 통해 최치원의 철학사상까지도 추론(推論)할 수 있다. 특히 당시 학인(學人)들의 삼교관(三敎觀)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최치원 철학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동인의식(東人意識)과 동방사상(東方思想)을 고찰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자료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높다.
[주]최치원 선생의 문장이 명문이라 하나 한문은 읽을 수 없고.
한글 번역을 보아도 많은 불교 용어에다 작가의 문장 핵심이 드러나지 않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이에 본인은 문이라고 하더라고 대구가 많은 한문문장의 특성을 이해하고
정독하기 위해서 글을 토막쳐 대역을 시도해 보았다.
기존의 번역에서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 부분은 이지관 스님의
<역주 역대고승비문,신라편>(가산문고,1993)를 참고하였다.
원문과 번역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주석은 그대로 두었다.
쪽수가 표시된 것은 최씨문중본의 원문 쪽수로 보면 된다.
원문
http://blog.naver.com/dasomchy?Redirect=Log&logNo=50007351646
http://blog.naver.com/kydong47/memo/40114541524
http://blog.naver.com/jbart/150069827611
http://blog.daum.net/seogwipo/13425091
논문
http://blog.naver.com/bhjang3/140051285817
고희양산 봉암사 교시 지증대사 적조탑비명 및 서
聞慶 曦陽山 鳳巖寺 智證大師 寂照塔碑銘
문경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명
입조하정겸연봉황화등사조청대부 전수병부시랑원서서원학사사자금어대 신최치원이 교지를 받들어 찬술함.
최병헌번역
常叙曰 五分位
[以仁義禮智信 配東西南北中]
서문에 말하기를,
오상으로 방위를 나눔에
配動方 [東是萬物始生之方故曰 動方]者曰仁
동방에 배치되는 것을 仁(인)이라하고
三敎[儒佛老]立名 顯淨域者曰佛
삼교에 명칭을 세움에
정역에 나타난 것을 佛(불)이라 한다.
仁心卽佛
佛目能仁[梵語釋迦 華言能仁] 則[音測 法也]也
仁心(인심)이 곧 佛(불)이니
불목이 인이 될 수 있는 것이 법칙이다.
導郁夷 [東方] 柔順性源
達迦衛[竺國] 慈悲敎海
욱이 [東方] 의 유순한 성품의 근원을 인도하여
인도[가위]의 자비스러운 교해에 통하게 하니
寔猶石投水 雨聚沙然
[以石投水無碍而直下 大而瀑流 不勞而沙聚 言其易也]
이는 진실로 돌을 물에 던지고
비가 모래를 모으는 것과 같이 쉬운 것이다.
矧[音申 況也] 東諸侯之外守者
莫我大也
하물며 동방제후의 나라로
우리와 같이 큰 것이 없으며
而地靈旣好生爲本 風俗亦交讓爲先
[東方生長萬物先於他域故云
地靈好生 三韓古俗 好讓不爭 行者相逢皆住讓路故云 交讓爲先]
지령은 이미 호생을 근본으로 삼고
풍속은 또한 서로 사양하는 것을 먼저 하니
熙熙[和樂貌 老子云 衆人熙熙 如享太牢如春登臺] 太平之春
隱隱[安心貌 又彷彿貌] 上古之化
화락한 태평의 봄이오
은은한 上古(상고)의 교화이다.
加以性參釋種
遍頭居寐錦之尊
[遍頭 削髮也 寐錦 王號也 眞興王末年祝髮被僧衣 自號法雲 王妃亦效之爲尼 住永興寺]
더욱이 성품은 석종에 첨례하니
편두는 금탑의 놓은 지위에 앉아 있고
語襲梵音
彈舌足[音走]多羅之字
[多羅且云貝多羅 卽西域木名 其葉長廣潔白 故書寫經文也]
언어는 범음[산스크리트어]을 따르니
혀를 움직이면 곧 다라[다라니]의 글자가 되었다.
是乃天彰 [彰 明也 或云 指漢明帝 未詳]
西顧
海印東流
[海印佛之證法也 會玄記 七寶山間 香水海中 閻浮提 有情無情 一切物像炳現其中 故謂之海印]
이는 진실로 하늘이 불법을 들어
서쪽 나라를 돌아보고
해인이 동쪽 나라에 유포하니
宜君子之鄕 染法王之道
[佛爲萬法之王 故云法王也]
日日深 又日深矣
마땅히 군자의 나라에
법왕의 도가 감영됨이
나날이 깊어지고
또 나날이 깊어졌다.
且自魯紀隕星
[道安三敎論云 惠光遐照 莊王目覩夜明 註云 春秋云
魯莊公七年歲次甲寅四月辛卯夜 恒星不現 星隕如雨
卽周之莊王十年也 莊王遂易筮云 西域銅色人出也 所以夜明
非中華之灾也 淨名疏云 周時佛興 星隕如雨]
또한 노나라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을 기록하였고
漢徵佩日
[弘明集云 漢明帝永平三年 帝夢金人 項佩圓光 飛行殿庭
忻而悅之 詰朝遍問羣臣 此何神耶 通事舍人傳毅曰 臣聞
天竺有道者號曰佛也 殆將其神乎
帝信爲然 卽遣中郎蔡諳 博士王遵等十八人同往西域 求迎佛法
往月支國 遇迦葉摩騰 竺法蘭二梵僧 帝白
畫釋迦像及舍利幷四十二章經 白馬駄之至洛陽
乃永平十年 帝大悅 立精舍 號曰白馬寺 以安之也]
한나라에서 금인(金人)의 목에 일륜(日輪)이 채여 있음을 증거함으로부터
像跡則百川含月
상적은 곧 백천이 달을 머금은 듯하고
法音則萬籟號風
법음은 곧 만뢰가 바람을 부르는 듯하여
或緝懿縑緗
[古文云 學富縑緗 ○ 縑緗淡黃帛 古者無紙 書用竹帛也
懿 懿德也 如魯史列子等文 或纂四聖懿德故也]
혹은 그 아름다운 덕은 겸상에 엮어지기도 하였고
或鐫花琬琰
[鐫 刻也 琬琰 美玉也 言佛之花容 刻於美玉也]
혹은 그 아름다운 말은 완염에 새겨지기도 하였다.
故濫觴洛宅
[書云 三江浩浩 其源濫觴 註 濫泛也 觴杯也 謂江出珉山
初出之源 可泛一盃而已 凡事之始初云濫觴
○ 洛宅 召公宅於洛邑 故云洛宅 言佛法始到洛陽故也 又弘明集云
周昭王二十四年甲寅夏四月八日 江漢川池 忽然汎漲 山泉大地
皆悉動震 五光氣 入貫太微 遍於四方 盡作靑黃色間 王問太史蘇由
對曰 有大聖人 生于西方 故現此瑞 一千年後 聲敎及此
因刻石 埋南郊祀側 此佛法將來之始應 此應上魯紀句]
그러므로 낙택에 남상이 되고
懸鏡秦宮
[始皇時 有外國沙門悉利防等十八人 持佛經來 始皇囚防等
夜有丈六金身 面如懸鏡 破獄出之 乃驚懼謝焉 此佛法現著之事]之事跡
진궁에 거울을 걸어놓은 사적은
昭昭焉如揭合璧
[此明白之意 古詩 日月如合璧 五星如連珠]
밝기가 합벽을 걸어 놓은 것과 같으니
苟非三尺喙
[孔子曰 丘願有三尺喙 說盡天下之事也]
五色毫
[說文云 江淹夢受五色筆 自後文藻日新]
진실로 삼척의 혀와 오색의 붓이 아니면
焉能措辭其間
駕[傳也]說于後
어찌 능히 그 사이에 문자를 배치하여
후세에 언설을 전하게 할 수 있겠는가.
就以國觀國
考從鄕至鄕
[此用道經文 以一國觀一國 以一鄕觀一鄕
○ 舊註云 上國字中國 下國字西國也
上鄕字中原也下鄕字東方也言以我國觀他國也]
나아가서 나라로써 나라를 보고
고을로부터 고을에 이르게 된 것을 상고하면
則風傳沙嶮而來
[沙卽繩度之流沙也嶮卽傳 傳身之葱嶺也 見三莊傳]
불법의 유풍이 유사와 총령을 지나서 중국에 들어오고
波及海隅[東國]之始
그 여파가 해동에 비로소 미쳐왔다.
昔當東表鼎峙之秋
[鼎峙三韓也 卽指三國並立言]
옛날 동국이 정립한 때에 당하여
有百濟蘇塗之儀
[三韓古代諸國 各有別邑 建大木縣鈴鼓事鬼神 謂之蘇塗 出魏志東夷傳]
백제에는 소도의 의식이 있었으니
若甘泉金人之祀
[魏書佛老志云 武帝元狩中 霍去病 入西域獲渾邪王及金人一軀來 長丈餘
帝以爲大神 置甘泉宮 燒香禮拜 此佛道之漸興也]
이는 한무제가 감천궁에서 금인(金人)에게 예배하는 것과 같았으며
厥後西晉曇始 始之貊[東夷]
亦攝騰東入
[攝騰 西域僧名 漢明帝時 入中國也]
그 후 서진의 담시가 맥국에 온 것은
가섭 마등이 후한에 들어온 것과 같으며
句驪阿度 度于我
[阿度 新羅訥祗王時墨胡子 自高句麗 禮作窟室處之 後阿度與侍子三人亦來]
고구려의 아도가 신라에 건너온 것은
如康會南行
[吳書 赤烏四年 有康居國大丞相子 姓康 名僧會者 棄俗被緇 以遊化爲任 行至建康 營立茅茨設像行道 限于三七日 甁中乞舍利有驗 吳王權喜 建塔立寺度人]
강희가 남방의 오나라에 간것과 같았으니
時迺梁菩薩帝 反同泰一春
이때는 곧 양나라 보살제가
동태사에서 궁으로 돌라온지 일년만이오
我法興王 剬律條八載也
[梁書 武帝紀云 大通元年三月辛未 輿駕幸同泰寺 捨身 甲戍還宮 卽新羅法興王十五年也]
우리 법흥황이 율령을 제정한지 팔년만이었다.
亦旣海岸植與樂之根
[慈能與樂 悲能拔苦]
또한 이미 동해의 언덕에 여락의 뿌리를 심었고
日鄕耀增長之寶
[信能增長智功德也]
해가 뜨는 나라에 증장의 보물을 빛내었으니
天融善願 地聳勝因
[海岸 東海之岸 日鄕 日出之鄕 皆指東國也]
하늘은 선원에 합하였고 땅은 승인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
爰有中貴 [廣利傳 中貴從廣 註 居中用事之貴人]
捐軀[指異次頓殉敎事]
上仙 [君也] 剔髮
[指眞興王剃髮事]
이에 중귀가 몸을 버리고
상선이 머리를 깍았으며
苾蒭 [草名 具五義故比僧 見大法數]
西學
비추는 서쪽으로 중국에 가서 배우고
羅漢 [此云殺賊 亦云應供 殺無明賊 應人天供器也]
東遊
나한은 동국에 나왔다.
因爾混沌能開
[東國佛敎之初世界]
이로 인하여 혼돈한 상태가 능히 개화되고
娑婆[堪忍也]遍化
사바세계가 두루 교화하게 되었으니
莫不選山川勝槩
窮土木奇功藻[音早 文飾也]
산천의 좋은 경계를 가려서
토목의 기이한 공역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宴坐之宮 燭修行之路
信心泉涌 慧力風揚
연좌의 궁을 화려하게 꾸미고 수행하는 길을 밝혀
신심이 샘물처럼 솟아나고 혜력이 바람처럼 드날리니
果使漂杵
[書 武成云 旣戊午 師渡孟津 癸亥 陣于商郊 俟天休命 甲子昧爽 受率其旅 若林會于牧野 罔有敵于我師 前徒倒戈攻于後徒 以此血流漂杵 一戎衣天下大定云云 註曰 杵或何鹵楯也 昧爽昧冥 爽明 將明未明之時也 若林 詩所謂其會如林也 紂兵若林 然無克我師之志 故紂之前徒倒戈 反攻其在後之徒 自相屠殺 至血流漂杵也]
과연 절구공이가 떠서
蠲灾
[三國戰爭 血流漂杵 至新羅統合 而時得平和]
재앙을 제거하고
鍵櫜騰慶
[禮記云 武王克商 濟河而西 馬散華山之陽 不復乘 牛散之桃林之野
不復服 車甲釁而藏之府庫 而不復用 倒載干戈包以虎皮 名曰建櫜 註云 建鍵同 鎖閉兵器也]
무기를 자루에 넣고 경사를 칭송하게 되었다.
昔之蕞爾[蕞音萃 小貌 左傳蕞爾同]
三國
옛날의 조그마한 세 나라가
今也壯哉一家
[新羅武烈王滅百濟 文武王滅高句麗也]
이제 장하게도 한 집안이 되었다.
雁刹
[西域記 昔有一伽藍僧 依小乘敎 食五淨肉 見羣雁飛翔 戲曰 今日廚供有缺 宜善知時 有雁折翼而下 上座大德曰 此佛菩薩 憐汝等愚昧 示現 因以瘞雁爲塔 故塔謂之雁塔 刹 塔上竿柱也]
雲排
안찰은 구름처럼 벌려져서
將無隙地
빈땅이 없으며
鯨桴 [張衡東京賦 發鯨魚 魚鏗牢鍾 註云 海岸有獸 名蒲牢 其聲如鍾 性畏鯨 見鯨輒吼 故如今鑄鍾 像蒲牢爲頭 擊鍾之桴 像鯨故曰鯨桴]
雷振
경부는 천둥처럼 진동하여
不遠諸天
제천에 멀지 않으니
漸染有餘 幽求不斁
[音亦 厭也 詩云 爲締爲綌服之無斁也]
점염의 여유가 있으며
유구의 싫증이 나지 않았다.
其敎之興也
그 교가 일어남에
毘婆娑 [音義云 此云廣解 又云分分說 總有三義 廣說 勝說 異說 卽小乘敎論也]
先至
비바사가 먼저 이르르니
則四郡 [樂浪 臨屯 玄菟 眞蕃]
驅四諦[苦 集 滅 道]之輪
사군에 사제의 볍륜을 달리고
摩訶衍[大乘敎也]後來
則一國耀一乘[佛乘]之鏡
마하연의 뒤에 오니
한 나라에 일승의 거울을 빛나게 하였다.
然能令義龍雲躍
그리하여 능히 오룡이 구름같이 뛰게 되고
律虎風騰
[高僧傳云 陳義淨 能通義學 故曰義龍 隋贊寧 能解律學 故曰律虎也]
율호가 바람같이 오르게 되어
洶[音匈 水勢湧貌]
學海之波濤
학해의 파도가 용솟음치고
蔚[音鬱 草木盛貌]
戒林之柯葉
계림의 가지와 잎이 무성하게 되었다.
道咸融乎無外
도는 밖이 없는 곳까지 모두 융합 하였고
情或涉於有中
정은 가운데가 있는 데까지 거의 지나쳤으니
抑止水停漪 [漪 水波也 比妄想]
생각컨데 고요한 물이 비단처럼 잔잔하고
高山佩旭[旭 初出日 比心印]者
높은 산이 햇빛을 쪼인 듯한 사람이
蓋有之矣 世未之知
대개 있었지만
세상에서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洎長慶[唐穆宗年號]初
有僧道義 西泛
장경 초년에 이르러
중 도의가 서방으로 건너가서
睹西堂之奧 [西堂 馬祖弟子智藏禪師]
서당의 오지을 보고
智光[自心也]侔智藏而還
始語玄契者
지광을 지장으로부터 취하여 돌아와
처음으로 현계를 말하니
縛猿心
護奔北之短
[奔北者 適越北轅之意]
원숭이의 조급한 마음에 사로잡혀
북쪽으로 달아나는 단점을 비호하고
矜鷃翼
誚圖南之高
[莊子 斥鷃笑大鵬曰 彼且奚適也 我騰躍而上 不過數仞而下
翶翔蓬蒿之間 此亦飛之至也 而彼奚適也 此比敎學之謗禪]
메추리가 제 날개를 자랑하여
붕이 남쪽 바다로 떠나려는 대망을 비난하였다.
旣醉於誦言
[詩云 誦言如醉]
이미 송언에 취하여
競嗤爲魔語
是用韜光廡下
[見無染碑中廡玉註]
다투어 마어라고 비웃음으로
빛을 무하에 감추었고
斂迹壺中[並見無染註]
罷思東海東
[東海 通一國東 新羅之東]
자취를 호중에 감추어
신라에 전법할 생각을 그만 두고
終遁北山北
[佛陀耶舍 謝秦使曰 脫如見禮羅什 則貧道當遠遁於北山之北]
마침내 북산의 북쪽에 은둔하였으니
豈太易之無悶
[文言曰 遯世無悶 不見是而無悶 註云 悶病也 又憂也]
어찌 주역에서 말한 “세상을 피해 살아도 근심이 없다”는 것과
中庸之不悔者耶
[中庸云 君子依乎中庸 遯世不見知而不悔也]
중용에서 말한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더라도 뉘우침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然秀冬嶺
[陶淵明四時詩曰 秋月揚明輝 冬嶺秀孤松也]
芳定林
그러나 겨울 산봉우리에 빼어나고
정림에서 꽃다우매
螘慕 [徐無鬼云 羊肉不慕蟻 蟻慕羊肉 羊肉羶也舜有羶行 百姓悅 故三徙成都 至之墟 而十有萬家]
者彌山
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사람이 산에 가득하고
鷹化 [變惡爲善 如鷹化爲鳩也 出禮月令]
者出谷
악인이 변화하여 선인이 된 사람이
골짜기에 꽉 차게 되었으니
道不何廢
도라는 것은 폐하여질 수 없는 것이요
時然後行 [時至後行化也]
때가 되면 저절로 행해지는 것이다.
及興德大王纂戎 [纂繼也 戎大也]
흥덕대왕이 왕위를 계승하고
宣康太子監撫
[監撫者 太子之職 古詩云 撫軍監國太子事]
선강태자가 감무를 하게 되매
去邪毉國 樂善肥家
[去邪云云 善治國家之意]
사도를 제거하여 나라를 바로잡으며
선을 좋아하여 집안을 살찌게 하였다.
有洪陟大師
去西堂證心 來南岳休足
이때에 흥척대사가 또한
서당지장에게 심인을 받고
남악에 와서 머무르니
鷩冕
[鷩似山雞而小 乃華虫 天子玉冕 公袞冕 侯伯鷩冕 子男毳冕 大夫絺冕 士玄冕 蓋朝祭之冠 上玄下纁 前後有旒各十二 每旒十二玉 玉之色 以朱白蒼黃玄爲次 冕者 略俛之意 前低一寸二分]
왕이
陳順風之請
[順風 莊子云 廣成子在崆峒 黃帝問至道 又欲官陰陽遂郡生 廣成子曰 而欲問者物質也 欲官者物殘也 奚足語至道 黃帝退 捐天下築特室 席白茅 間在三月 復往邀之 廣成子南首而臥 黃帝順下風膝行而進 再拜稽首 而問治身之道]
귀의하며 초청을 하였고
龍樓
[宮闕也 杜詩 雞鳴問寢龍樓曉]
궁궐에서는
慶開霧之期
[開霧云云 師來南岳休足 故以比南山玄豹隱霧澤毛也 霧雨七日而限滿 則開霧而出頭也 大師出山之期 猶玄豹開霧出頭之時也]
흥척의 출산을 경하하였다.
顯示密傳 朝凡暮聖
밝게 보이고 비밀히 전하여 주어
아침의 범부가 저녁에 성인이 되니
變非蔚也
[繫辭云 聖人虎別 其文炳君子豹別 其文蔚 辨人狸別 其文華 言殊炳明著也 蔚文深密貌 猶爲漸次也]
변함이 점차로 된 것이 아니라
興且勃焉
[左傳 臧文仲曰 禹湯罪己 其興也勃焉]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다.
試較其宗趣
시험적으로 그 종취를 고찰한다면
則修乎修沒修
證乎證沒證
[無修 無證 言虛無也]
수에 수했으나 수하는 것이 아니고
증에 증했으나 증하는 것이 아니며
其靜也山立
其動也谷應
그가 고요히 있을 때는 산처럼 서 있으나
그가 움직일때는 산골짜기가 응하니
無爲之益 不爭而勝
무위의 이익이
다투지 않고도 이기게 되었다.
於是乎 東人方寸地
[人之心四方各一寸也]
靈矣
이에 동국 사람은 마음 속이 신령해졌는지라
能以[靜同]利 利海外
不言其所利 大矣哉
[能以云云 用乾卦 能以美利利天下 不言其所利 大矣哉之文也]
능히 정리로써 해외사람을 이롭게 하였는데도
그 이로운 바를 말하지 않으니 위대하도다.
爾後觴騫河
[觴 盃也 騫 飛也 盃度和尙 携一木盃渡河]
이후 술잔이 물결을 따르듯이
구도승의 선박이 왕래하고
筌融道
[卽道義 明宗旨之意]
無念爾祖
소시의 방편이 진도에 융합하였으니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寔繁有徒
진실로 무리가 많이 있도다.
或劍化延津
[言得道中原而不還也 西晉惠帝時 張華 使雷煥掘鼓城獄而得雌雄二劍 各佩其一 華誅 失劍所在 煥死 其子雷華 持劍渡延平津 劍躍入水 使潛水者求之不得 但見雙龍琬蜒而去]
혹은 칼이 연평진에 용으로 변화하여 들어가듯이 하고 [중국에 가서 돌아오지 않고]
或珠還合浦
[言得道而還也 後漢孟嘗 爲合浦太守 郡不産穀 海出寶珠 民以爲業 先是太守貪取珠 民不勝其苦 珠徙交趾郡 至是革袪舊弊 珠卽還來]
혹은 구슬이 합포로 다시 돌아오듯이 했다.[중국에 가서 득법하고 돌아왔으니 ]
爲巨擘[卽居首指者也]者
可屈指焉
뛰어난 인물이 된 사람이
가히 손가락을 꼽아 셀만하다.
西化則靜衆無相
[高僧傳云 大師燒指求法 草衣 食土<凡木根之皮曰土> 居靜衆寺 保唐 無住 亦門人也 玄宗西幸 禮敬殊甚 有唐近朝詞宗柳尙書宗元 按節東川 畫無相 無住 道一 智藏四祖師眞 起四證堂 幕吏詞宗李商隱 爲碑序 大師冠其序 云 大師表海遐封辰韓顯族 始其季妹 夙挺冥機 見金夫 以有躬 授寶刀以敗面 大師得因上行 豁悟迷途 載驗土風<風俗> 東國素稱君子 旋觀沙界 西方始有聖人 銘曰 猗歟靜衆 太隔天尋 遺珪擲組 爐指求心 柔管伐毳 掬土<食土>延陰 蘇<倉廩>含檀鉢 露涉瓊針 其碑在蜀東川 惠義寺南禪院 是也 凡物之長 謂之天尋 謂中原也]
중국에 귀화하여 돌아오지 않은 사람은 정중사의 무상,
常山慧覺[金雲卿弟也 馬和尙弟子]
禪譜益州金 鎭州金者[禪譜云 黃梅子金生名也]
是
상산혜각, 익주김, 진주김 등이 이들이고
東歸則前所叙北山義[道義] 南岳陟[洪陟]
귀국한 사람은 앞에서 말한 설악산의 도의와 지리산의 홍척과
而降太安徹[惠徹]國師 慧目育 智力聞
그리고 세대가 내려 와서는 태안사의 혜철국사, 혜목산의 현욱, 지력문,
雙溪照[惠昭] 新興彦[沖彦] 涌巖體 珍丘休[覺休]
쌍계사의 혜소, 신흥언, 용암체, 진구휴,
雙峯雲[惠雲] 孤山日[品日] 兩朝[景文憲康] 國師 聖住染
[高僧傳云 無染 新羅國傳法師 西堂藏法嗣 道義洪陟惠徹 章敬惲法嗣玄昱覺休 鹽官安法嗣 品日 大梅常法嗣 迦智沖彦 白兆圓法嗣 惠雲 兩朝國師法嗣 景文憲康二王育門體三人 各上字及嗣法 皆未詳 炤之嗣法 亦未詳]
쌍봉산의 도윤, 굴산사의 범일, 양조국사, 성주사의 무염은
菩提宗 德之厚爲父衆生
보리의 종으로서 덕의 후함은 중생에게 아버지가 되고
道之尊爲師王者
도의 높음은 임금에게 스승이 된 사람들이었으니
古所謂
逃名名我隨
避聲聲我追者
[綱目云 法眞 名可得聞 身難得見 逃名而名我隨 避聲而聲我隨也]
옛말에 이른바
이름을 피해 달아나도 이름이 나를 따르고
명성을 피해 달아나도 명성이 나를 따른다는 것이다.
故得皆化被恒沙[衆生也 世界也]
蹟傳豐石[浮屠與碑]
그런 까닭으로 교화는 중생세계에 덮이었고
자취는 부도와 비석에 전하였으며
有令兄弟 宜爾子孫
俾定林標秀於雞林
慧水安流於鰈水
[爾雅云 東方有比目魚 其名鰈 音帖 卽東海也]矣
좋은 형제가 있고 자손이 많이 있어
정림을 계림에 빼어나게 하고
혜수를 접수에 흐르게 하였다.
別有
[ 別有云云 不往中國 在此得道之意]
不戶不牖而見大道
[不戶云云 老子云 不出戶知天下 不窺牖見天道 其出彌遠 其知彌少 但穿明則爲戶 更以木交飾則爲牖]
별도로 지게문을 나가지 않고 들창을 내다보지 않고도
대도를 보았으며
不山不海而得上寶
[漢書云 邴原欲遠遊學 請安丘孫崧 崧辭曰 君鄕里鄭君玄 學覽古今 博聞强識 誠學者之師模也 君乃捨之 躡屩千里 所學以鄭爲東家丘耶 原曰 人各有志 所向不同 有登山而採玉者 有入海而探珠者 豈可以登山者不如海之海入海者不如山之高哉 君謂僕以鄭爲東家丘 則君以僕爲西家之愚夫耶 崧謝 愚夫者 家語云 孔子西家有愚夫 不能識孔子爲聖人 乃曰 彼東家丘 吾知之矣]
산에 오르지 않고 바다에 들어가지 않고도
상보를 얻음이 있었으니
恬然息意 澹乎忘味
[莊子云 魚相忘於江湖 人相忘於道術 以至於廢枕忘饌]
조용히 뜻을 쉬고 담담히 맛을 잊게 되었다.
彼岸也不行而至
此土也不嚴而治
저 언덕에 가지 않아도 이르렀고
이 나라를 엄하게 하지 않아도 다스려졌으니
七賢
[見道以前凡夫之位 小乘以五停心觀 別相念住 總相念住之三賢位及煖 頂 忍世 第一法之四善根爲七賢 大乘以初發心人 有相行人無相行人 方便行人 習種性人 性種性人 道種性人爲七賢]
孰取譬
칠현에게 누가 비유되겠으며
十住
[發心 治地 修行 生貴 具足 正心 不退 童眞 法王子 灌頂]
難定位[不歷階位而證大道]者
십주에 지위를 정하기 어려운 사람은
賢溪山智證大師 其人也
현계산의 지증대사 그 사람이다.
始大成也
[大成者 取孟子 夫子集大成之語也 成 變也 金石絲竹匏土革木八音 各爲一變 是小成 合八音 以金爲始修理 以玉爲終條理 則是大成也]
처음으로 대성할 적엔
發蒙于梵體大德
범체대덕에게서 몽매를 깨우치고
稟具于瓊儀律師
경의율사에게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終上達也
[下學而上達大法也]
마지막으로 상달할 적엔
探玄于慧隱嚴君
[智證大師法統上之父也]
혜은엄군에게서 현리를 탐구하여
授黙于楊孚令子
[法統上智證之子也 嚴令 尊美之稱]
양부영자에게 묵계를 전수하여 주었다.
法胤
[胤音允 說文 子孫相承績也]
그 법연은
唐四祖爲五世父
[道信之傍出者]
당나라의 사조 도신을 오세부로 하여
東漸[進也 次也]
于海
동쪽으로 점차 바다에 전해져 왔다.
遡游
[遡與泝同爾雅云 逆流而上曰泝洄 順流而下曰泝流也]
數之
흐름을 거슬러 이를 헤아리면
雙峯[四祖諡號]子法朗 孫愼行
曾孫遵範 玄孫慧隱 來孫大師也
쌍봉사조의 제자는 법랑이요, 손제자는 신행이요,
증손제자는 준범이요, 현손제자는 혜은이요, 말손제자가 대사이다.
朗大師 從大毉
[代宗諡四祖曰大醫]
之大證
법랑대사는 대의 사조의 대증에 따랐었는데
按杜中書正倫纂銘
[纂與撰同 集述也 卽四祖銘也]
두중서 정륜이 지은 비명을 상고해 보면
叙云
遠方奇士 異域高人
無憚嶮途 來至珍所
서에 말하기를, “먼지방의 기사와 이역의 고인이
험난한 길을 꺼리지 아니하고 진소에 이르러
則掬
[與寶同掬 曲禮云 受珠玉者 以掬 註云 兩手承之 恐墮破也]
歸止
곧 보물을 움켜쥐고 돌아가니
非師[法朗]而誰
사가 아니고 누구겠는가?”라고 하였다.
第知者不言
[道經云 知者不言 言者不知也]
復藏于密
다만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다시 은밀한 데 감추었으니
能撢[古探字]秘藏
唯行[愼行]大師
능히 비장한 것을 찾아낸 사람은
오직 신행대사 뿐이었다.
然時不利兮 道未亨[通也]也
그러나 때가 이롭지 못하여
도가 통하지 못하였다.
乃浮于海
[論語云 子曰 道不行 乘桴浮于海 從我者由]
이에 바다에 떠서 하늘에 알리니
聞于天肅宗皇帝 寵賂天什
[什 篇也 天什 卽天子所製詩文也]曰
숙종황제가 몸소 시구를 내리시기를,
龍兒渡海不憑筏
鳳子沖虛無認月
[龍兒鳳子 指大師 不憑筏無認月 不執方便云]
“용이 바다를 건느려면 떼배를 힘입지 아니하고 봉이 하늘을 나르려면 달을 돌보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師以山鳥海龍二句爲對
[山不擇鳥 鳥能擇山
海不擇龍 龍能擇海之語也]
사는 산조와 해룡의 두 글귀로써 대답하였으니
有深旨哉
깊은 뜻이 있었다.
東還三傳 至大師
畢萬之後 斯驗矣
[左傳 晉卜偃曰 畢萬之後必大 指魏文侯斯 能興宗業 言今大師能復振祖風]
신행이 신라로 돌아와서 삼대를 전하여
대사에게 이르게 되었으니
필만의 후손이 업한다는 말이
이에 증험된 것이다.
其世緣 則王都[慶州]人 金姓子
그 세속의 인연은 즉 왕도 사람이요.
김씨 성의 아들이니
號道憲 字智詵
父贊壞 母伊氏
호는 도헌이요, 자는 지선이다.
아버지는 찬괴요, 어머니는 이씨이다.
長慶[唐穆宗年號] 甲辰歲 現乎世
中和[僖宗年號]壬寅曆 歸乎寂
장경 갑진년에 세상에 태어나서
중화 임인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恣坐[夏安居最終之日 謂之姿坐]
也 四十三夏
승려생활이 사십삼년이고
歸全也
[曾子臨死 謂門人妻子曰 啓予手足見之 我身托於父母 所生之身 不壞而歸全云云 孝經亦同此說也]
五十九年
전생애가 오십구년이다.
其具體則身仞[七尺]餘
面尺所[所餘也]
그 갖추어진 신체는 키가 팔척이 넘고
얼굴이 일척 정도 였으니
儀狀魁岸
[江充爲人魁岸 岸者有廉積如崖岸不形]
語言雄亮[亮 明朗也]
의상은 뛰어나고 존엄하며
언어는 웅장하고 통달하였으니
眞所謂威而不猛者
[論語贊孔子語]
참으로 이른바 위엄이 있으나
사납지 아니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始孕洎滅
奇蹤秘說
神出鬼沒
筆不可紀
처음에 잉태할 때부터 세상을 떠날때까지
기이한 자취와 신비한 설화는
신출귀몰하여
붓으로는 기록할 수가 없다.
今撮其感應聳人耳者 六異
이제 그 감응이 사람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것으로
여섯 가지의 이상한 사실과
操履[志操行履]警人心者
六是而分表之
지조와 행실이 사람의 마음을 놀라게 한 것으로
여섯 가지 옳은 일을 간추려서 나누어 표시한다.
初母夢一巨人告曰
처음에 어머니 꿈에 한 거인이 고하기를,
僕昔勝見[毘波尸也]佛 季世 爲桑門[僧也]
“‘나는 옛날에 승견불의 말세에 승려가 되었었는데
以謓恚故 久墮龍報
報旣旣[旣 盡也]矣
當爲法孫
성낸 까닭으로 오랫동안 용보에 떨어졌으나,
업보가 이미 끝났으니
마땅히 법손이 될 것이다.
故侂[侂與托同]妙緣
願弘慈化
그러므로 묘연에 의탁하여
자비스러운 교화를 홍포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因有娠 幾四百日
이내 임신하여 거의 사백일이 지나서
灌佛
[佛誕之日儀 卽浴佛會也]
之旦[四月八日] 誕焉
관불회의 아침에 탄생하였다
事驗蟒亭
[高僧傳云 漢安息國沙門安淸 字世高 本世子 當嗣位 讓叔父 出家 聰敏好學 外國典籍無不綜達 旣已遊方徧歷諸國 以漢桓帝建和四年 至洛陽 値靈帝末 關洛擾亂 因附舟 至廬山渡 昔同學達 湖廟神 靈甚 能分明 風途往來之舟 會艤舟 奉牲請福 神降語曰 舟有沙門 可上來 高至 神曰 吾昔與汝 俱出家學道 吾雖好施 性多嗔 故今爲廟神 周回千里 皆吾所管轄 報形極醜 旦夕且死 必入地獄 吾有絹疋幷雜寶物 可爲代吾造塔建寺 使我生善處 高曰 何不出形 神曰 形甚魏異 衆人必懼 高曰但出形 神從帳中出頭 乃大蟒 至高膝邊 高出梵音 贊唄祝願 蟒悲淚如雨 高卽取絹疋寶物 辭別神 神卽過命 暮有一少年 上船跪高前受其祝願 神報曰 得離惡形 生善處己 後人於西山澤中 見一死蟒 頭尾數里 高至預章 建大安寺也]
일은 망정에 증험하였고
夢符象室
[世尊生也 見相者 相者曰 自古夢見象 則生大聖人也 今兒無乃夢見象而生耶 慈母許之曰 如是云云 佛母摩耶 夢見大聖乘六牙白象 從天而下 降神入胎故 見西域記 見釋氏源流]
꿈은 상실에 부합하여
使佩韋者益誡
[西門豹性急 佩韋自警]
가죽을 차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경계하게 하고
擁毳者[被袈裟而修行之僧也]
精修
가사를 입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밀하게 수도하게 하였으니
降生之異一也
탄생의 기이한 것이 첫째이다.
生數夕不嚥
乳[音耨 上聲 又音遘 以手壓取乳而餉也 楚人以爲乳]
之則
號欲嗄 [嗄音愛 嘔逆也] [音忽 所吹起也]
태어난 지 여러 날에 젖을 먹지 않고
젖을 짜서 먹이면
곧 울면서 목이 쉬려고 하였는데
有道人 過門誨曰
문득 도인이 문을 지나가다가 깨우쳐 주기를
欲兒無聲 忍絶焄腥
[焄 借作葷 辛臭之菜 腥 魚肉也 言乳母不食也]
“‘아이에게 소리를 없이 하고자 하면 훈채와 날고기를 참고 끊으시오”하므로
母從之 竟無恙
어머니가 그 말에 따랐더니
마침내 아무런 탈이 없게 되어
使乳育者加愼
肉食者懷慚
젖으로 양육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삼가게 하고
고기를 먹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품게 하였으니
宿習之異二也
숙습의 기이한 것이 둘째이다.
九歲喪父 殆毁滅
[毁形滅性也]
아홉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거의 회멸되게 되었는데
有追福僧[主典父濟之僧也]
憐之諭曰
추복승이 이를 불쌍히 여겨 깨우쳐 말하기를,
幻軀易滅
壯志 [出家度生之志]
難成
“덧없는 몸은 사라지기가 쉬우나
장한 뜻은 이루기가 어려운 것인데
昔佛報恩有大方便
子勉之
옛날 부처님이 그 부모의 은혜를 갚은 큰 방편이 있으니
그대는 이를 힘쓸 것이다”고 하였다.
因感悟輟哭
白所生[母也] 請歸道
인하여 느끼어 깨달아서 곡을 거두고
어머니에게 아뢰어 입도를 청하니
母慈其幼
復念保家無主 確不許
어머니는 그의 어린 것을 사랑하고
다시 집안을 보존할 주인이 없음을 생각하여
확고하게 허락하지 아니하였는데
耳踰城故事
[釋氏源流云 悉達太子踰城出家 成佛度生也]
부처님이 출가할 때 성을 넘어간 고사를 듣고
則亡去 就學浮石山
곧 도망해 가서 부석산에 나아가 배웠다.
忽一日心警坐屢遷
홀연히 어느날 마음이 놀래어 자리를 여러 번 옮겼는데
俄聞倚閭[母也]成疾
조금 후에 어머니가 그를 기다려 병이 났다는 말을 듣고
遽歸省而病隨愈
곧 돌아가 어머니를 뵈오니
병이 즉시 나았으므로
時人方之阮孝緖
[梁武帝時人 家世仕宦 年十四五 通經大旨 十六丁外艱 終喪入鍾山聽經久之 在席驚心而歸家 母果罹疾而合用蔘 躬入終南山 有鹿引指蔘處 采用而母疾愈]
그때 사람들이 그를 완효서에게 비교하였다.
居無何[言不多時]
染沈疴[沈疴 痼疾也 卽師染母之疾故也]
얼마 안되어
고질이 전염되어
謁毉無效 枚卜之
[杵 箇箇請卜而問之]
의원에 보여도 효험이 없어
여러 점치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僉曰 宜宜名隸大神[佛也]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마땅히 이름을 대신에게 예속 시켜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母追惟曩夢
試覆以方袍[袈裟]而泣
어머니는 그 전의 꿈을 생각하여
시험삼아 방포로써 덮고 울면서
誓言斯疾若起
乞佛爲子
맹세하여 말하기를,
“이 병이 만약 나아서 일어난다면 부처님에게 원하여 아들이 되게 하겠습니다”고 하였더니
信宿
[左傳 凡師行 一宿爲舍 再宿爲信 過信爲次也]
이틀을 자고 난 후에
果大瘳[瘳音秋 愈也]
과연 아주 나았었다.
仰悟慈親 終成素志
우러러 자친을 깨우쳐서
마침네 본디 뜻을 이루어서
使舐犢者割愛
[漢書太尉楊彪之子修 爲曹操所殺 操見彪問曰 公何瘦之甚 對曰 愧無日磾先見之明 猶懷老牛舐犢之愛 操爲之改容 注云 金日磾 漢昭帝之臣 其子與宮人戲 日磾見之卽殺其子也]
자식 사랑하기를
늙은 소가 새끼 송아지를 핥듯이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하는 마음을 끊어 버리게 하고
飮蛇者釋疑
[晉書 樂廣遷河南尹 有親客 久不至 廣問故 答曰 前蒙賜酒 見盃中有蛇影而疾 是以久失問候 時廳掛有角紫弓 廣意弓影如蛇 復置前處 謂客有所見否 客曰如初 乃告所以 客病遂豁然而愈 註云 客杜滿]
술잔 속에 뱀의 그림자를 마신 사람으로 하여금
의심을 풀게 하였으니
孝感之異三也
효도의 감동 시킨 것이 기이한 셋째다.
至十七受具 始就壇
[羯摩戒壇]
십칠세 때에 이르러 구족계를 받고
비로소 강단에 나아갔는데
覺袖中光熠熠然
探之得一珠
豈有心而求
[黃帝遊於赤水北 登于崑崙丘 遺其玄珠 使智者索之不得 使離婁索之不得 乃使罔象 索而得之 注云 明眼者 有心故不得 盲眼者 無心故得之也]
소매 속에 신광이 선명함을 깨닫고
이를 더듬어 한 구슬을 얻었으니
어찌 마음을 두고 구한 것이겠는가.
乃無脛而至
[會稽典錄 孔融云 珠玉無脛而自至者 人好之也 善言不行而自至者 亦類是矣]
이에 종아리가 없어도 이르게 된 것이니
眞六度經所喩矣 [以戒喩珠]
참으로 육도집행에서 깨우친 것이다.
使飢嘑者
[楞嚴經云 說食飢夫 蒸沙迷客 比敎學人]
自飽
굶주려 부르짖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배부르게 하고
醉偃者
[法華經云 醉臥不識衣內繫珠 比禪學人]
能醒
취해서 넘어진 사람으로 하여금 능히 깨어나게 하였으니
勵心之異四也
마음을 힘쓰게 한 것이 기이함이 넷째이다.
坐雨
[卽夏安居 西域之法 一年分爲帆悶寒三際
自二月十六日至 六月十五日 爲熱際
六月十六日 至十月十五日 爲雨際
十月十六日 至二月十五日 爲寒際]
하안거를 마치고
竟將他適
장차 다른 곳으로 가려 하는데
夜夢遍吉[普賢也]菩薩撫頂提耳曰
밤의 꿈에 보현보살이 이마를 어루만지고 귀를 쥐면서 말하기를,
苦行難行 行之必成
“고행은 실행하기는 어렵지만 이를 행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形開
[莊子云 其寐也魂交 其寤也形開]
꿈을 깨니
㾕然[心驚聳縮貌]
黙篆肌骨[言銘佩也]
가려움증이 생겨
잠잠한 가운데 기골에 도장이 새겨졌다.
自是不復服繒絮焉
이로부터 다시는 명주옷과 솜옷을 입지 않았으며,
修[與線同]之須
[須補破之具]
取必麻楮
노끈과 가는 실의 사용에도
반드시 삼과 닥나무실을 사용하고
不穿達履
[詩云 先生如達 達 小羊也 三韻聲彙云 達與 同 達履 羊皮履]
양가죽으로 만든 신을 신지 않았으니
矧羽翣[扇也]
毛茵[毛皮褥也]餘用乎
하물며 새깃의 부채와
털로 만든 자리를 사용했겠는가?
使縕黂
[縕 麻絮也 黂 麻布也 言著麻絮衣也]
者開眼
솜옷과 난마를 입는 자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하고
衣蟲者[錦繡衣者]
厚顔[恧怩也]
명주옷을 입는 자로 하여금 낯가죽을 두껍게 하였으니
律身之異五也
율신의 기이함이 다섯째이다.
自綺年[妙年也] 飽老成之德
加瑩戒珠
유년으로부터 노성의 덕을 갖추었고
더욱 계주를 밝히었으니
可畏者
[論語云 後生可畏也]
競相從求益
후진들이
다투어 서로 추종하여 배움을 청하게 되었다.
大師拒之曰
대사가 이를 거절하여 말하기를,
人之大患 好爲人師
[孟子曰 人之大患 在好爲人師 王勉註曰 學問有餘 人資於己 不得已而應之可也 若好爲人師 則自足而不復有進矣 此人之大患也]
“‘사람의 큰 근심은 남의 스승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니
强欲惠不惠
[言無惠人之才 而强欲惠之 則大不可也]
억지로 은혜를 베풀고자 하여도
은혜를 베풀 수가 없게 되는 이다.
其如模不模邪
[模 法也 言其如爲師 而不可爲師 何耶之意也 淮南王草木譜 吳證問曰 何以取木爲義 曰 昔 模木 生周公塚上 其葉春靑夏赤秋白冬黑 以色得其正也 楷木 生孔子塚上 其幹枝疎而不屈 以質得其直也 正與直可爲法 則況在周孔之塚乎]
스승이 되려고 하여도
스승이 될 수 없는데 어찌하겠는가?
況浮芥海鄕
[所得者小 如浮舟於大海]
하물며 큰 바다에 떠 있는 지푸라기같이
自濟未暇
[楞嚴 演若達多迷頭逐影之事]
제 자신도 구제할 여가가 없으니
無影逐 爲必笑之態
그림자를 쫓고자 하나
쫓을 수가 없는 것과 같이
반드시 웃음거리의 모양이 될것이다”라고 하였다.
後山行 有樵叟礙前路曰
그 후에 산을 가는데
나무꾼이 이르러 앞길을 막으면서 말하기를
先覺覺後覺
[孟子曰 伊尹曰 天之生斯民也 使先知覺後知 使先覺覺後覺也 予天民之先覺者也 予將以斯道 覺斯民也 非予覺之而誰云云]
“선각이 후각을 깨닫게 하는데
何須悋空殼[幻身]
어찌 환신을 아낄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就之則無見焉
그에 나간 즉 보이지 않았다.
爰媿且悟 不阻來求
이에 부끄럽고 또한 깨달아서
와서 배움을 청하는 사람을 막지 아니하니
森竹葦[衆多貌]
于雞籃山水石寺
[卽連山開泰寺 或云 尙州龍興寺 未詳]
계람산 수석사에는 대와 갈대같이 빽빽하게 몰려들었다.
俄卜築他所曰
조금 후에 다른 곳에 집을 짖고 말하기를,
不繫[孔子曰 吾豈繫匏瓜哉 言周遊天下也]
爲懷
能遷是貴
“매어있지 않는 것이 본래의 생각이니 능히 옮겨 가는 것이 귀중한 일이다”고 하였다.
使佔畢者
[佔音占 初學記云 今之敎學者 呻其佔畢 註 佔 視也 畢 簡也 但諷詠所覘視之簡牘 不能通其蘊奧也 呻 諷吟之聲也]
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三省
[論語曰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註云 傳謂受之於師 習謂熟之於己]
날마다 세번 반성하게 하고
營巢者
[禮記云 昔者 先王未有宮室 冬則居塋室 夏則居櫓巢云云]
선실을 짓는 사람으로 하여금
九思
[論語云 君子有九思 疑思問 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忿思難 見得思義]
아홉 가지를 생각하게 하였으니
垂訓之異六也
훈계를 내린 것의 기이함이 여섯째이다.
贈太師景文大王
心融鼎敎[三敎也]
面渴輪工
[大轉法輪之工 指大師]
증태사 경문대왕이
마음으로 삼교에 통하고
대사를 만나 뵙고자 하여
遙深爾思
覬俾
[覬 覬覦也 俾 俾倪也 言欲得希幸之貌]
我卽
“멀리서 그대의 생각을 깊이 하여 나의 법칙을 도와 주기를 바란다”하면서
乃寓書曰
이에 서신을 보내기를,
伊尹大通
[孟子曰 伊尹曰 何事非君 何使非民 治亦進 亂亦進]
“‘이윤은 대세를 통달하였고
宋纖小見
[晉書 宋纖有遠操 不與世俗交遊 太守馬岌造焉 高臺重閣拒不可見 岌嘆曰 名可望而身不可見 德可仰而形不可覩 然後 知先生人中之龍也 乃銘詩於石壁曰 丹岸千尺 靑壁萬尋 奇林鬱鬱 蔚若鄧林 其人如玉 維國之珍 室邇人遠 實勞我心]
송섬은 명성만을 들렸었는데
以儒辟釋 自邇陟遠
유도로써 불교에 비유한다면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으로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甸邑
[甸音田 王居五百里內爲甸服 卽五服之一 見禹貢]
巖居
頗有佳所
왕경지바의 암거에도
자못 아름다운 곳이 있으니
木可擇矣
[仲尼曰 鳥能擇木 木豈擇鳥耶]
無惜鳳儀
[尙書 蕭韶九成 鳳凰來儀 註 來舞而有容儀也]
새가 나무를 가려 않듯이
봉황이 오는 거동을 아끼지 마시옵소서”라 하고
妙選近侍中可人
[桓溫過王敦墓曰 可人可人 言稱可之人也]
근시 가운데 가한 사람으로
鵠陵
[先王陵號 元聖卜陵白鵠墟 故似仍號焉]
昆孫
立言爲使
원성왕의 종손인
입언을 선발하여 사신을 삼아
旣傳敎已 因攝齊焉
[攝 摳也 齊 衣下縫也 禮 將升堂 兩手摳衣 使去地尺 恐躡之而傾跌失容也 景景褰衣 弟子之禮也]
이에 교지를 전하여
섭제하게 하였다.
答曰
修身化人 捨靜奚趣
대사가 대답하기를,
“자신을 닦고 남을 교화 시키는데 고요한 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鳥能之命
[應擇木語 善爲我辭 幸許安塗中 莊子釣於濮水 楚王使大夫二人往先焉曰 願以竟內累矣 莊子持竿不顧曰 吾聞楚有神龜死已三千歲矣 王巾笥而藏之廟堂之上 此龜者 寧其死爲留骨而貴乎 寧其生而曳尾於塗中乎 二大夫曰 寧生而曳尾塗中 莊子曰 往矣 吾將曳尾於塗中]
새가 능히 나무를 가려야 한다는 말은
나를 위하여 잘 말하여 준 것이니
無令在汶上
[論語云 季氏使閔子騫爲費宰 閔子騫曰善爲我辭焉 如有復我者 則吾必在汶上矣 言遠去也]
진흙속에 편안히 있게 허락하여 주어 문수 위에 있게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上聞之 益珍重
임금이 이 말을 듣고 더욱 진중하게 여겼다.
自是譽四飛於無翼
[戰國策云 衆口所移 無翼而飛]
衆一變於不言
이로부터 명예는 날개가 없이 사방에 전해지고
대중은 말하지 않는 가운데 일체 변해졌다.
咸通[唐懿宗年號]五年冬
함통 오년 겨울에
端儀[女之官名也]
長翁主 [景文王之姊]
단의장옹주가
未亡人爲稱
[禮 夫死 妻隨死 乃夫人之行 未能隨死 故稱未亡人也 左傳云楚令尹子元者 楚文王弟之子 欲蠱惑文王 夫人息嬀 以事爲館於其宮側 振萬<振動萬舞>焉 夫人聞之泣曰 先君以是舞也 習戎備也 今令尹不尋諸仇讎 而於未亡人之側 不亦異乎]
미망인으로 일컬어 졌었는데
當來佛是歸
敬謂下生[翁主自云下生也]
厚資上供
당래불에 귀의 하여
삼가 하생이라 하고
시사를 후하게 하였다.
以邑司[翁主所封之地]
所領賢溪山安樂寺
읍사의 관할인 현계산 안락사가
富有泉石之美
請爲猿鶴主人
[山林隱居之士與猿鶴爲友之意]
천석의 아름다움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까닭으로
원학의 주인이 되어주기를 청하니
大師乃告其徒曰
대사는 이에 그 문도에 알리기를,
山號賢溪 地殊愚谷
[劉子云 齊桓公 逐鹿入谷中 問一老 此何谷 對曰愚公之谷 以臣名得之]
“산의 이름을 현계라 하니 땅은 우곡과 다를 것이며
寺名安樂 僧盍住持
從之徙焉
절 이름을 안락이라 하니 승려가 주지하기에 합당할 것이다”하고는
이에 따라 옮기었다.
居則化矣 使樂山者
[論語曰 仁者樂山 智者樂水]
益靜
거주한즉 교화하여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고요하게 하고
擇地者愼思
行藏之是一焉
땅을 가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을 삼가게 하였으니
나가서 도를 행하고 물러가서 숨는 것의 옳음이 첫째이다.
他日告門人曰
어느날 문인에게 고하기를,
故韓粲[官名]金公嶷勳[嶷音億]
度我爲僧
報公以佛
“고 한찬 김공의훈이 나를 승적에 넣어 중이 되게 하였으니 김공에게 불로써 보답하겠다”하고는
乃鑄丈六玄金像
傅[塗也]之以銑
[爾雅云 金之絶澤 謂之銑也]
이에 장육현금상을 주조하여
황금으로 발라서
爰用鎭仁宇[寺也]導冥路
절을 지키고 명로를 인도하는 데 쓰게 하여
使行恩者日篤
은혜를 베푸는 자로 하여금 날로 독실하게 하고
重義者風從
의를 갚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람을 쫒아 따라오게 하였으니
知報[知恩而報也]之是二焉
은혜에 대한 보답을 알게 하는 것의 옳음이 둘째이다.
至八年丁亥
檀越翁主 使茹金[人名]等 持伽藍南畝
[伽藍 此云衆園 卽賢溪伽藍也 南畝者 田地 通云南畝也]
함통 팔년 정해에 이르러
단월옹주가 여금등으로 하여금 가람의 남묘와
曁臧獲[奴婢也 男曰臧 女曰獲也]
本籍[文簿]授之
장획의 문서를 가지고 그것을 주게 하여
爲壞袍[袈裟]傳舍
[奴隸車馬之所 或云 補縫破衣之舍]
俾永永不易
괴포의 전사로 삼아
영구히 바꿀 수 없게 하니
大師因念言
대사가 인하여 생각하여 말하기를,
王女資法喜 尙如是矣
“왕녀께서 불법을 믿어 숭상하기를 좋아함이 이와 같으니
佛孫味禪悅
[華嚴經云 若飯食時 當願衆生禪悅爲食 法喜充滿]
豈徒然乎
불제자로 선열을 맛보는 일이
어찌 헛되이 그렇겠는가.
我家匪貧 親黨皆歿
우리 집이 가난하지 않은데
친당이 모두 죽었으니
與落路行人之手
寧充門弟子之膓
길가는 사람의 손에 떨어지기 보다는 차라리 문하제자의 배를 채우게 하는 것이 낫겠다”하고
遂於乾符[僖宗年號]六年
드디어 건부 육년에
捨莊[莊 田廬也] 十二區
田五百結隸寺焉
[百卜爲一結 ○ 方俗 以周五弓爲一結 四肘爲弓 一尺八寸爲肘 王荊公詩曰 臥占寬閒五百弓]
장 십이구의
전 오백결을 절에 예속시켰다.
飯孰譏囊
[孰譏食蟲之飯囊 著實工夫 則可免此譏 漢書 彌衡曰時輩唯荀或則可與同言 餘人皆酒帒飯囊]
밥은 누가 주머니라고 나무라겠으며
粥能銘鼎
[正考父鼎銘云 饘於是 粥於是 以糊予口]
죽은 능히 좋은 솥이어야겠는가?
民天
[史記酈生傳云 王者以民爲天而民以食爲天]
是賴
백성이란 먹는 것을 하늘로 삼으니
佛土[卽西方淨土也]可期
불토를 가히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雖曰我田 且居王土
비록 말하기를 내 토지라고 하지마는
왕토에 있으니
始資疑於王孫韓粲繼宗·
執事侍郎金八元·金咸熙
及正法大統釋玄亮
처음 왕손 한찬 계종과
집사시랑 김팔원 김함희
및 정법대통 석현량에게 질의 하니
聲九皐 應千里
[聲九皐者 詩云 鶴鳴九皐 聲聞于天 應千里者
周易云 鳴鶴在陰 其子和之 我有好爵 吾與爾縻之
君子居其室出其言 善則千里之外應之]
임금에게 전해져서 허락을 받게 되어
[학이 깊은 유택에서 우니, 소리가 하늘에까지 들린다
천리 밖에 있는 자들도 응한다]
贈太傅獻康大王[卽景文王之子] [佳之也]
而允[肯也]之
중태부헌강대왕이 자기의 마음으로 남을 살펴서
이를 윤허하여 주었다.
其年九月 敎南川郡統僧訓弼
[亦金姓也]
그해 구월에 남찬군 승통 훈필에게 교지를 내려
標別墅[墅與莊同]
劃正場[以禁標明示寺領]
별서를 표하여
생장을 구획하여 주게 하였다.
斯蓋外佐君臣益地
內資父母生天
이것은 대개 밖으로는 군신의 익지를 돕고
안으로는 부모가 하늘에 태어나게 하는데 이바지하며
使續命者
[卽百姓也 南史 劉善明傳 靑川飢荒 善明開倉以救 鄕里多獲全濟 百姓呼其家爲續命田]
興仁
목숨을 잇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을 일으키게 하고
賞歌者悛過
[仇池筆硯云 唐裴晉公 召一妓 作半日遊 賞絹五疋 書生有詩云 一曲淸歌一疋絹 佳人猶自意嫌經 不知貧女寒窓下 幾度抛梭織得成]
노래 부르는 이를 상주는 사람으로 하여금 허물을 고치게 하였으니
檀捨之是三焉
단월의 희사한 것의 옳음이 셋째이다.
有居乾慧地[卽初乾慧地 是乾有其慧]者曰沈忠
건혜지에 거하는 사람으로
심충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
聞大師刃餘[莊子云 其於游刃 恢恢然猶有餘地]
定慧
대사가 수단은 정혜에 여유가 있고
鑑透乾坤
[師之神鑑 通透於天文地理也]
신감은 천문지리를 통달하며
志確曇蘭
[東晉時僧 蓮社高賢傳 慧持傳云 慧持法師 以東間經籍付道泓 西間法典付曇蘭 以泓行業淸敏 蘭神悟天發 並能係軌師蹤故也]
뜻은 소구담과 축법란 처럼 확고하고
術精安廩
[南朝陳時僧 續高僧傳 安廩傳云 安廩 性好老莊 早達經史 又善太一之能 幷解孫吳之術]
학술은 도안과 늠보다 정밀하는 말을 듣고
禮足已[見禮畢] 白言
예를 갖추어 사뢰어 말하기를,
弟子有剩地
在曦陽山腹 鳳巖龍谷
“제자가 남은 땅이 희양산복의 봉암용곡에 있는데
境駭橫目
[何尙之曰 橫目之俗 不可與言 莊子有云 橫目之民]
幸構禪宮
지경이 괴이하여 사람의 눈을 끄니
선찰을 세우기를 바랍니다”고 하였다.
徐答曰
吾未能分身 惡用是
이에 대사는 서서히 대답했다.
“내가 몸을 나눌 수 없는데 어찌 이를 사용겠습니까?”
忠請膠固 加以山靈
심충의 청이 확고부동하고
더욱이 산이 신령스럽게 생겨
有甲騎爲前騶之異
[騶音鄒 說文 廐御也 月令季春 天子敎于田獵 命僕及七騶咸駕 註 天子馬有六種名 騶一幷總主 爲七騶]
갑기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오는 기이한 형상이었으므로
乃錫[錫杖]挺樵蹊而 歷相焉
[說文 歷 推察也 相省視也]
이에 나무꾼이 다니는 길로 지팡이를 짚고 가서
지세를 살피었다.
且見山屛四迾
또한 살펴보니 산이 사방에 병풍처럼 둘리었으니
則鸑[鸑鷟 禽經曰 紫鳳也]
翅掀[掀音軒 以手高飛也 又高聳貌]
雲
붉은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치며 올라가는 듯하고
水帶百圍
則虯[音紏 無角龍]腰偃石
물이 백겹으로 띠처럼 둘리었으니
이무기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 듯하였다.
旣愕且唶
[愕音岳 驚遽貌 唶音借 鳴也 又歎也]曰
이에 놀라고 또한 탄식하며 말하기를,
獲是地也 庸[豈也]非天乎
“이 땅을 얻게 된 것은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不爲靑衲[僧也]之居
其作黃巾[賊也]之窟
승려의 거처가 되지 않는다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遂率先於衆 防後爲基
[先於人而作基 以防後慮]
起瓦簷四柱以壓之
마침내 대중에 솔선하여
후환을 방비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아서
와첨 사주를 세워서 이를 누르게 하고
鑄鐵像二軀以衛之
철불상 두구를 주조하여
이를 호위하게 하였다.
至中和 [唐僖宗年號]辛丑年
중화 신축년에 이르러
敎遣前安輪寺僧統俊恭
肅正史裴聿文 標定疆域
교를 내려 전 안륜사의 승통 준공과
사정상 배율문을 보내어
강역을 표정케 하고
艿賜
[艿與芿同 陳根未芟 新草又生 艿 言不改鳳巖山 仍爲鳳巖寺也]
牓爲鳳巖焉
이어 방을 내리어 봉암이라 하였다.
及大師往化數年
후에 대사가 가서 교화한 지 수년만에
有山甿[甿與氓同]
爲野寇者
산백성으로서 야구가 된 자가 있어
始敢拒輪
[莊子曰 螳蜋 怒其臂以當車轍 比初不從師化也]
처음은 감히 화륜에 항거 했으나
終能食葚
[詩云 翩彼飛鴞 集于泮林 食我桑葚 懷我好音 憬彼淮夷 來獻其琛 註云 淮夷被魯侯之化 變惡來獻 如飛鴞之食葚變音 比初不從化者 從化爲善也]
마침내 능히 대사의 교화에 쫓아 감화되었으니
得非深㪺[㪺音拘 酌也]
定水
預沃魔山之巨力歟
정수를 깊이 따루어
미리 마산에 물을 댄 큰 힘이 아니겠는가.
使折臂者
[晉書 羊祜 相墓者 言祜祖墓有帝王氣 祜果墮馬折臂而至三公無子 今言折臂 指上捨地也]
標義
팔을 자른 사람으로 하여금 의리를 표시하게 하고
掘尾者制狂
[伯宅編云 祿山 逆謀日熾 每反入長安 恐有如渠者之 ○唐含元殿前途 詰曲宛轉 如龍尾 此則指野寇 又掘發也 尾終也 吳語 狐埋之 狐掘之 是以無成功 言小賊以埋掘無成功自終也]
용미를 파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심을 제어하게 하였으니
開發之是四焉
선심을 개발시킨 것의 옳음이 넷째이다.
太傅大王 以華風掃弊
[掃夷狄之弊]
태부대왕이 중화의 풍속으로서 폐풍을 일소하고
慧海濡枯
불교의 진로로써 마른 땅을 적시어서
素欽靈育[北魏高僧玄高之俗名 出梁高僧傳]
之名
평소부터 영육의 이름을 흠앙하고
渴聽法深之論
[通載云 東晉時 竺潛 字法深 興寧二年甲子 詔 講般若經於禁中 乃辭還剡山 支遁寓書 求買沃州小嶺歸隱 潛答曰 欲來當綌 未聞巢由買山而隱也 寧康二年卒 哀帝賜錢十萬建塔 言今王聽法於禪師 如哀帝聽法於法深也]
불교의 강론 듣기를 간절하게 바랐었는데
乃注心雞足[指賢溪山]
灑翰鶴頭以徵之曰
이에 계족산에 마음을 기울이어
서한을 보내어 대사를 부르기를
外護小緣 念踰三際
內修大惠 幸許一來
“밖에서 소연을 도호한 지가 잠깐 삼제가 지났으니 안으로 대혜를 닦으시어 한번 와 주심을 바랍니다”고 하였다.
大師感動琅函[御書之稱]言及 勝因通世
대사는 왕의 서신에 좋은 인연은 온 세상에 같이 하고
同塵率土
[老子云 和其光同其塵 言與塵俗 同一混處之謂也 詩云 溥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 此詩 言率土莫非王臣 則奚必我獨賢勞也 [老子云 和其光同其塵 言與塵俗 同一混處之謂也 詩云 溥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 此詩 言率土莫非王臣 則奚必我獨賢勞也 此文 言同塵率土 則師亦隨俗不辭賢勞也]
진속은 온 나라에 같이 하자는 말에 미쳐 감동되어
懷玉出山
[老子云 聖人被褐懷玉 ○案 懷玉出山 如卞和之懷玉 出自荊山 欲獻王門也]
옥을 품고 산을 나오니
轡織迎途
[詩云 六轡如織 言處處車馬 當途爭迎也]
거마가 베 날듯이 길에서 맞이하였다.
至足于禪院寺 錫安信宿
引問心于月池宮
선원사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여 편안히 이틀 동안을 쉬게 하고
월지궁에 인도하여 심법을 질문하게 되었다.
時屬織蘿不風
溫樹方夜
[綱目云漢長樂宮中有溫室殿 三公入朝 時議政之所也 其宮庭中有樹]
때는 섬라에 바람이 불지 않고
온수에 바야흐로 밤이되었는데
適覩金波之影
[杜詩云 金波耿玉繩 金波 月也 玉繩 星也]
端臨玉沼之心[心 中也]
마침 금파의 그림자가
옥소의 복판에 단정히 임한 것을 보고
大師俯而覬 仰而告曰
대사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있다가
우러러 보고 말하기를,
是卽是[上是水月 下是心也]
餘無所言
“이것은 이것이니 그 나머지는 할 말이 없습니다”고 하였다.
上洗[洗與洒同]然忻契曰
임금은 상쾌한 모양으로 혼연히 계합하여 말하기를,
金仙
[唐武宗 改佛號爲大覺金仙]
花目
[佛以靑蓮花目 顧視迦葉 迦葉破顔微笑 故見拈頌拈花]
所傳風流 固協於此
“금선 화목의 전해 온 풍류가 진실로 이에 합치됩니다”라고 하고
遂拜爲忘言師
마침내 배하여 망언사로 삼았다.
及出 俾藎臣
[詩 大雅 王之藎臣 註 忠愛之篤 進進無已]
譬旨
대사가 나감에 미쳐 신신으로 하여금 교지를 알려
幸宜小停 答曰
잠시 머물러 주기를 청하니 대답하기를,
謂牛戴牛 所直無幾
[梁武帝 遣使召陶弘景 弘景畫畫二牛以進 一則戴金籠厭粟豆 一 則無覇獨臥於芳草中 帝曰 此人如此 其可致耶 言若留京 則如戴牛價少]
“우대우라고 이르지만 값이 얼마되지 않으며,
以鳥養鳥[莊子云 以己養鳥 鳥不飮食 三日而死 詳見無染註]
爲惠不貲[不貲 猶言不少]
새로써 새를 기르면
그 은혜가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請從此辭 枉之則折
이로써 작별하기를 청하오니 이를 굽히면 부러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上聞之喟然 以韻語歎曰
임금이 이말을 듣고 탄식하여 운어로써 찬탄하기를,
挽旣不留 空門鄧侯
[晉書 鄧收 字伯道 爲吳郡太守 除水以外束薪斗米 不食於民 稱疾去職 民至有臥輪 人歌曰 鄧侯挽不留 謝公推不去]
“만류하여도 이미 머물지 않으니 공문의 등후로다.
師是支鶴
[西晉哀帝時 支遁 字道林 人有遺鶴者 乃放之曰 沖天凌雲之物 豈耳目之所玩哉 君子多稱其達]
스님은 바로 지둔의 학이온데
吾非趙鷗
[通載云 後趙石勒弟 名虎 字季龍 襲兄之位 徙都鄴城 尤傾心事佛圖澄 朝會引見 侍御史擧ꞈ升殿 太子諸公扶翼而前 主者唱曰大和尙 坐者皆起 勑司空李農 朝夕問候 支遁聞之曰 澄公 其以季龍爲鷗鳥乎○ 鷗鳥者 列子傳云 昔有人無心日坐江邊 鷗鳥聚遊膝下矣 其父見之 語之曰 汝之膝下鷗鳥取來 從其父敎 有心而待鳥 鳥則不來 言澄公以季龍爲鷗而同遊 大師則不與王同遊而入山故也]
나는 조나라의 갈매기가 아니로다”라고 하였다.
乃命十戒弟子 宣敎省副使馮恕行
援送歸山
이에 십계제자 선교성부사 풍서행에게 명하여
대사를 전송하여 산에 돌아가게 하였다.
使待ꟙ者離株
[此大師出山 如離株見無染註]
羨魚者學網
[臨淵羨魚 不如退而結網 比辭京入山 居靜修心也]
토끼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무 줄기를 떠나게 하고
물고기를 탐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물 만드는 것을 배우게 하였으니
出處之是五焉
나아가서 교화하고 물러가서 도를 닦는 일의 옳음이 다섯째이다.
在世行 無遠近夷險
대사는 세상에 나가 있을 때에는
멀고 가까움과 험준하고 평탄함을 말할 것 없이
未嘗代勞以蹄角[馬牛]
일찍이 말이나 소로써 그 노고를 대신하게 하지 않았으며
及還山
산에 돌아감에 미쳐선
冰雪梗跋涉
[梗 塞也 草行曰跋 水行曰涉 又行不由蹊隧曰跋涉 今則後也]
빙설이 길을 막으므로
乃以栟櫚
[音呂 說文云 梗木也 出安南 性堅 紫紅色 可作床几輪輿等也]
步ꞈ[今之步轎也]寵行
병려나무로 만든 보여를 내려 총행하니
謝使者曰
사자에게 사절하여 말하기를,
是豈非井大春所云車耶
[後漢 井丹 字大春 常曰 黃帝作車 少昊加牛 大禹加馬 已不可 況代人乎]
“이것이 어찌 정대춘의 이른바 인거가 아닌가.
顧英君
[顧 顧視也 英君 俗人中英俊者]
所不須
속인 가운데 영준한 사람을 돌아보아도 사용하지 않는 것인데
矧形毁者乎
하물며 삭발한 사람으로야 사용하겠는가.
然命旣至矣 受之爲濟苦具
그러나 명령이 이미 이르렀으니 그것을 받아서 괴로움을 구제하여 주는 도구로 삼겠다”고 하였다.
及移疾于安樂練若
[練若阿練若之略稱 又云蘭若 乃比丘之修行處 卽寺院也]
후에 병으로 여락난야에 옮겨가서
扶錫不能起 始乘之
석장을 짚고도 일어날 수 없게 됨에 미쳐
비로소 이것을 타게 되었다.
使病[憂也]病者了空
병을 근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괴로움을 구제하게 하고
賢賢者離執
[病病至離執 病不至處 師因乘輿能至 病豈實乎 是乃勝病濟苦 故云了空 賢賢者 亦得捨却不乘爲是之偏執也]
어진 사람을 경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집을 버리게 하였으니
用捨之是六焉
사용하고 버리는 것의 옳음이 여섯째이다.
至冬抄[末也 十二月也]
旣望之二日[十八日]
겨울 끝달의 기망 후 이일에 이르러
趺坐晤言
[晤音吳 鄭箋 對也 蘭亭記 晤言 一室謂相對言也]
之際
가부좌를 하고 않아서 서로 대하여 말할 즈음에
泊然[恬靜無爲也]
無常
조용히 입적하였다.
嗚呼
星廻上天 月落大海
아아!
별은 하늘로 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에 떨어졌다.
終風[詩註云 終日之風也]吼谷
온종일 바람은 산골짜기에 진동하니
則聲咽虎溪
[慧遠入滅 虎溪若咽]
그 소리는 호계가 울부짖는 것 같았고
積雪摧松
則色侔鵠樹
[佛入滅 娑羅樹色變 白如鵠 故謂鵠樹也]
적설이 소나무를 꺾으니
빛깔은 학수와 같았다.
物感斯極 人悲可量
만물의 느낌도 이같이 극도에 달했는데
사람의 슬픔이야 헤아릴 수 있겠는가!
信[再宿]而假殯[猶言草殯]于賢溪
이틀 후에 현계산에 임시로 빈소를 짓고
期而遷窆于曦野
기년에 드디어 희양산 아래로 옮겨 장사를 지내었다.
太傅王馳毉問疾
降騋營齊
태부대왕이 의원을 보내어 병을 위문하고
말을 내리어 제를 지내게 하니
不暇無偏無頗
[洪範註云 偏 不中也 頗 不平也 偏頗好惡 己私之生於心也 是不遵王之義也 言不外假無偏頗 實出於內心之至也]
정치를 고루 보살피는데 여지가 없으면서도
能諧有始有卒
[卒 終也 言待師死生一如]
능히 시종이 하나 같았던 것이다.
特敎菩薩戒弟子建功鄕[地名]令[官名]金立言
慰勉諸孤[弟子]
임금은 특별히 보살계제자 건공향령 금입언에 명하여
여러 어린 제자들을 위로케 하고
賜諡智證禪師 塔號寂照
시호를 지증선사
탑호를 적조라 내리었다.
仍許勒石 俾錄狀聞
이어 탑비의 건립을 허락하고
행장을 기록하여 아뢰게 하니
門人性蠲·敏休·楊孚·繼徽等
문인 성견,민휴,양부,계휘 등은
咸得鳳毛者
[晉謝鳳 有文章 而其子超宗 又有文章 謂之得鳳毛]
斂陳迹以獻
모두 봉미를 얻은 자들로
묵은 사적을 거두어 모아 바쳤다.
至乙巳歲
[師 僖宗中和二年壬寅十二月十八日卒 公 僖宗光啓元年乙巳來 師殞後四年來也]
을사년에 이르러
有國民媒儒道 嫁帝鄕
[孤雲 年十二入唐 十八登科]
국민 중에서 유도를 매개로하여 황제의 나라에 들어가서
而名掛輪中
[月輪桂中 比登科也]
이름을 계적중에 기록하고
職攀柱下者
[侍御史 着鐵冠立柱下]
曰崔致遠
관직이 주하사에 등용된 사람이 있어
이름을 최치원이라 하는데
捧漢后[天子]龍緘[詔書]
한후의 조서를 받들고
齎淮王鵠幣
[桂苑筆耕云 行次山陽 太尉<高騈>寄賜衣緞 令充歸覲 續壽信物 謹以詩謝]
희왕의 의단을 가져 왔으니
雖慙鳳擧
頗類鶴歸
[先生自謙言 己之榮貴 雖不足爲鳳擧之比 其去家久而今始歸 則頗與丁氏鶴相似]
비록 봉의 거동에는 부끄럽지만은
자못 학의 돌아감에 비길 만하였다.
上命信臣淸信者陶竹陽
授門人狀 賜手敎曰
임금이 총신으로 불교신자인 도죽양에 명하여
문인이 쓴 대사의 행장을 주고 수교를 내리기를,
縷
[音樓 絲麻之縷 可經緯者 或云 藍縷弊衣也]
褐
[音曷 織毛爲之 可御寒者 陸佃曰黃黑色]
東師
“누갈의 동국 스승이
始悲西化[大師]
서방으로 돌아간 것은 비로소 슬프고
繡衣[御使 衣繡衣故也]
西使
深喜東還[孤雲]
수의의 서방 사자가
동국으로 돌아온 것은 매우 기쁘다.
不朽[指碑文]之爲 有緣而至
영구히 전할 일이
인연이 있어 이르게 된 것이니
無恡外孫之作
[漢列女傳云 孝女曹娥 會稽上虞人也其父盰 能絃聲 爲巫祝 桓帝鴻嘉二年五月五日 泝松江濤 迎婆娑神溺死不得屍骸 娥年十四 沿流呼泣 晝夜不絶聲 旬有七日 遂投江而死 三日後 與父屍俱出之 吏爲之立碑云 孝順第一曹家女者 邯鄲淳作其碑文 蔡邕題其陰曰 黃絹幼婦外孫 臼 楊修見卽悟 曹操行三十里知之 歎曰 有知無知 較三十里]
좋은 글짓는 것을 아끼지 말아
將酬大士
[指智證禪師 法華文句記 大論稱菩薩爲大士 亦曰開士 又釋門正統 宋神宗宣和元年 詔 改釋氏爲金仙 菩薩爲大士 僧爲德士]
之慈
대사의 자비에 보답하게 하라”고 하였다.
臣也雖東箭非材 而南冠多幸
[晉 顧象 吳郡人 虞澤 會稽人 並起討蘇峻 時後人贊曰 顧實南冠 虞唯東箭也 註 南冠者文人 東箭者武士]
신이 비록 동방의 비재이지마는
남관의 댜행을 얻게 되었다.
方思運斧
[昔 莊子 因送葬 過惠子之基 顧謂從者曰 郢人堊漫其鼻端 若蠅翼 使匠石斲之 匠石運斤成風 聽而斲之 盡其堊而鼻不傷 郢人立不失容 宋元君聞之 召匠石曰 試爲寡人爲之 匠石曰 臣嘗能爲之 然臣之質死矣 吾無以爲對也 比作文之妙]
바야흐로 재주를 부릴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遽値號弓
[言王昇遐也 黃帝鑄鼎於荊山之下 鼎成龍至 帝及羣臣宮女七十二人 乘龍而上天 百姓攀龍鬚 鬚絶 帝墮弓 羣臣百姓 抱弓而號 因名弓爲烏號]
갑자기 헌강왕의 승하하심을 만나게 되었다.
況復國重佛書
家藏僧史 法碣相望
禪碑最多
[說文云 方者爲碑 圓者爲碣]
하물며 다시 나라에서는 불서를 소중히 여기고
집에서는 승사를 간수하며 법갈이 서로 바라보고
선비가 가장 많던 시대가 아니었던가.
遍覽色絲[謂妙辭也]
試搜殘錦
두루 절묘한 글을 보고
시험삼아 금송을 찾았다.
則見無去無來之說
競把斗量
살펴보건데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다는 말이
다투어 말로 헤아리게 되고
不生不滅之譚
動論車載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다는 말이
움직이면 수레로 실을 만하였다.
曾無魯史新意
[春秋 乃孔子筆削魯史 則是史外典心之要典 而今於法碣中 不見其意]
일찍이 노사의 신의가 없고
或用周公舊章
[孔子修禮記 盡用周公之所撰周禮 言攝取前代章句也]
혹은 주공의 구장을 인용하였다.
是知石不能言
[陳腐之文 刻於石面 爲石所慚]
益驗道之云遠
이로써 돌은 능히 말을 못하니
더욱 도의 현묘하고 심원한 것을 증험함을 알겠도다.
唯懊[音奧 惱也 又悔恨也]
師化去早[師壬寅化]
臣歸來遲[公乙巳來]
오직 한스러운 것은 대사의 입적한 것이 빨랐고
신의 귀국한 것이 늦은 것이다.
靉靆字誰告前因
[法華靈驗傳 秦郡東寺 有沙彌誦法華經 甚通利 到藥草喩品靉靆二字 隨敎隨忘 師苦責之 師夢一僧曰 此沙彌前生 在寺側東村受身 誦法華藥草喩品 白魚食靉靆二字 其經現在其家 往驗之 明旦師就彼家問之 果有法華經一 部 取看果缺二字 兒亡已十七年 果與此沙彌年時胎月相應也]
애체의 글자는 누가 전의 인과인 것을 고하며
逍遙義不聞眞訣
[通載云 東晉安帝隆安四年 後秦姚興弘始三年庚子三月庭樹生連理 逍遙園有葱變茝 以表智人應入中國 十二月二十日迎羅什法師 居逍遙園 興以國師禮待之 甚見優寵 資學三千 拔萃有八曰道生 僧肇 道融 僧叡 道恒 僧影 惠觀 惠嚴等 可謂一時之盛 千載光華 興卑萬乘之心 尊三寶之敎 莫不精究 洞其深旨 比什公逍遙園證師月池宮也]
소요유의 뜻은 참다운 비결을 듣지 못하였다.
每憂傷手
[相傳云 大匠若無則 小匠恐傷手 不能執斧 言以我腐儒 不敢下手於大師之碑]
매양 손이 상할 것을 근심하고
莫悟伸拳
[傳燈錄云 二十五祖奢耶多 自生至長 恆拳左手 見獅子尊者而申之 有一粒珠 衆皆驚異 獅子叙其宿因 而勸出家 今言無緣於佛 莫悟其理]
주먹을 펴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歎時則露往霜來
때를 탄식한즉 이슬이 지나가고 서리가 오니
遽涸愁鬢
문득 근심스러운 귀밑이 삐죽 말라졌으며
談道則天高地厚
[莊子云 至人德 若天高地厚也]
도를 말한 즉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두터우니
厪腐頑毫
[左思作三都賦 十稔始成 擲地金聲 今之述作不佳 僅塞腐毫 之責 故云僅腐]
겨우 뻣뻣하여진 붓털을 적실 뿐이었다.
將諧汗漫之遊
[淮南子云 盧敖遊北海 見一道士 問曰 夫子何與我爲友 士曰 吾將遊於汗漫之上 乃聳身直入雲中 敖仰視曰 吾比夫子 若壤蟲之於黃鵠也 此比大師於道士 而自比於敖也]
장차 한만한 놀음에 화합하려하여
始述崆峒之美
[崆峒山 有廣成子宮 景美不可盡述也 此言述大師之景行]
비로소 공동의 아름다운 자취를 서술한다.
有門人英爽 來趣受辛
[臼 受辛 字 二字用意有味]
문인 영상이 와서 글을 재촉하였다
金口是資
[資 依也 后稷廟前有金人三緘其口 蓋愼言之意 言自家資無言而不答也]
금인의 말을 삼가는 교훈을 빌려쓰니
石心彌固
[皮日休云 宋廣平爲相 疑其鐵石心腸 不解此軟媚詞 註云 宋璟封廣平公 諡文貞 比不許之尤固]
돌의 마음은 더욱 단단하다.
忍踰刮骨
[五代萇從簡 中流矢 命醫刮骨而言笑忍痛 三國志 關雲長事亦同 言忍不作序之甚]
참는 것은 뼈를 긁는 것보다 고통스럽고
求甚刻身[求之益甚]
구하는 것은 몸에 새기는 것보다 더 괴로웠다.
影伴八冬
[案 孤雲獨坐燈下 伴自家之影於八冬而作文也 八冬 八年之冬也]
그림자는 팔동에 짝하였고
言資三復
[言謂行狀也 論語曰 白圭之玷 尙可磨也 斯言之玷 不可爲也 南容一日三復讀之孔子以兄之子妻之]
말은 삼복에 힘입었다.
抑六異六是之屬辭
생각컨대 여섯 가지의 기이한 일과 여섯가지의 옳은 일의 속사가
無媿 賈[賈 買也 見初月註]勇有餘者
고용에 부끄러움 없이 여유가 있는 것은
實乃大師內蕩六魔
[與六塵同 色 聲 香 味 觸 法]
실로 대사가 안으로는 육마를 소탕하고
外除六蔽
[慳貪 破戒 瞋恚 懈怠 散亂 愚癡]
밖으로는 육폐를 제거하여
行苞六度
[布施 持戒 忍辱 精進 禪定 智慧]
행하면 육도를 포괄하고
坐證六通
[神足通 天眼通 天耳通 他心通 宿命通漏盡通]
故也
[其苦心勞身 旣至若是 則竟不可不爲屬辭爾]
앉으면 육통을 증험하였기 때문이다.
事譬採花
[然記事也 如蜂之採花 但取其香不擇其味]
일은 비유하면 꽃을 따는 것 같고
文難削藁
[後魏李季白上書切諫 卽消其藁 而今則登石 難於消也]
글은 초고를 소각하는 것보다 어렵다.
遂同榛楛勿翦
[陸機賦云 彼榛楛之勿剪兮 亦蒙榮於集翠 註云 庸文雜於麗句 如榛楛之同翠於松柏之下 善惡雖殊 同歸于美 喩自家之庸文 蒙榮於大師之美行]
드디어 진호를 자르지 않는 것과
有慙糠粍在前 [習鑿齒 與道安法師周遊 安先去 齒曰 簸之揚之糠粍在前 安曰 淘之汰之沙石在後]
강비가 앞에 있는 것이 부끄럽다.
跡追蘭殿之遊
[梁武帝 與達摩共遊蘭殿 卽王之正殿也]
자취는 난전의 노는 것을 좇았으니
誰不仰月池佳對
[月池宮說心 爲忘言師也]
누가 월지궁의 아름다운 대면을 사모하지 않을 것이며
偈效柏梁之作
[漢武帝作柏梁臺 命盧多遜作七字詩 七言始於此五言始於蘇武河陽詩]
게는 백량대의 시를 본받았으니
庶幾騰日域[東方]高譚
바라건대 일역의 고담으로 전하리라.
其詞曰
그 사에 이르기를,
麟聖依仁乃據德
[孔子未生時 有麒麟吐玉書於闕里人家曰 水精之子 繼衰周而素王天下 孔母徵在 以繡紱而泣 絶春秋之筆]
인성은 인에 의지하고 덕에 의거하였고
鹿仙知白能守黑
[敦煌實錄云 老子父 姓韓 名虔 夜夢日精敷野而仙人駕鹿入室
與上洋朱氏特猪婢子 合孕而生故曰鹿仙]
녹선은 백을 알고 흑을 지키었다.
二敎徒稱天下式
이교는 부질없이 천하의 격식이라고만 일컫고
螺髻眞人難确力
[佛頭髮如螺形 故謂佛螺髻眞人也 确力 競勝負也]
나계진인과는 힘을 겨루기 어려웠다.
十萬里外鏡西域
[成光子曰 自長安至中印度境五萬八千里 西至那拘遮國五萬八千里]
십만리 밖에서는 서역의 거울이 되었고
一千年後燭東國
[見上文洛宅註]
일천년 뒤에는 동국의 촛불이 되었다.
雞林地在鼇山側
[鼇山者 列子 湯問云 渤海之東 有大壑焉 其中有五山 而五山之根 無所連著 常隨波上下往還 帝恐流于西極 使巨鰲十五擧首戴之 五山始峙]
계림지경은 금오산 곁에 있으며
仙儒自古多奇特
선과 유에 예로부터 기특함이 많았다.
可憐羲仲不曠職
[羲和 堯時主四時之官 賓日餞日也]
거룩할손 희중의 직책을 비우지 않았는데
更迎佛日辨空色
다시금 불일을 맞아 공과 색을 분별하였네.
敎門從此分階
[三輔黃圖云 未央殿前左 右平 註 天子殿高九尺 階爲九級 中分左右 有齒 人行之 右則平之 平者 以文磚相亞次 令輦車得上也 音戚 階璣也]
교문은 이로부터 각 파로 갈렸으나
言路因之理溝洫
[洫音革 田間水道 卽深廣 八尺曰洫 深廣四尺曰溝]
법론은 고루 퍼져 인심을 다스렸다.
身依ꟙ窟心難息
[ꟙ窟 喩隱者之居處]
몸은 퇴굴에 의지했으나 마음은 편안키 어렵고
足躡羊歧眼還惑
[羊腸山 有九曲險路 上四句言敎路多端]
발자취는 양기에 다달으니 눈이 도로 현혹되었다.
法海安流眞叵測
법해는 어디로 흐르는가 진실로 측양하기 어려운데
心傳眼訣苞眞極
마음으로 전하고 눈으로 변론함이 진리의 극치를 포괄하였도다.
得之得類罔象得
[春池失珠 覓之不後 罔象無心而得之 出莊子]
얻었으매 얻음이 망상의 얻음 같고
黙之黙異寒蟬黙
[蟬之不鳴者雄也 不鳴是黙 大師則具說 故異於常黙]
말이 없으매 말없음이 한선의 울지 않음과는 다르다.
北山義與南岳陟
垂鵠翅與展鵬翼
[鵠則一擧飛千里 鵬則一擧九萬里 比遊中原]
북산의 도의는 홍곡의 쪽지를 쳐뜨렸고
남악의 홍척은 대붕의 나래를 펼쳤구나.
海外時來道難抑
遠派禪河無雍塞
해외에서 돌아오매 도는 꺽기 어려워서
멀리 뻗은 선의 흐름이 막힘이 없었구나.
蓬托麻中能自直
[寶鑑云 蓬生麻中不扶而自直]
다복쑥은 삼대에 의지하매 능히 스스로 곧았으며
珠探衣內休傍貸
[衣內 卽法華 親友係珠衣內 其人醉不知 後更逢親友 始知其珠不從外得 貸音惕 借也]
구슬을 옷안에서 찾으니 옆으로 구할 것이 없었다.
湛若賢溪善知識 十二因緣非虛飾
[六是六異也]
담담하기 현계의 선지식은
십이인연이 허식이 아니었다.
何用攀絚兼拊杙
[攀絚 渡流沙之事 拊杙 越葱嶺之事 言在此而得道]
무엇하려 드림줄 더위잡고 말뚝에 매어달릴 것이며
何用砥筆及含墨
[言不假文字而得道]
어찌하여 붓끝을 물에 빨고 먹물을 먹일 것인가.
彼或遠學來匍匐[指上義與陟也]
我能靜坐降魔賊[指大師]
저는 간혹 멀리 배워 고생으로 돌아왔으나
나는 능히 고요히 않아 마적을 물리쳤네.
莫把意樹誤栽植
莫把情田枉稼穡
의수를 함부로 심지 말 것이며
정전을 부질없이 가꾸지 말 것이다.
莫把恒沙論萬億
항사같이 많은 수행의 지경공덕을 논하지 말 것이며
莫把孤雲定南北
[此四句 戒門人之辭 初二句 戒空守黙之痴禪 虛栽意樹枉稼情田 次二句 戒參愚僧空論功德虛行南北者]
고운 같은 떠돌이 자취의 남북정처를 말할 것 없다.
德馨四遠聞薝蔔
[書云 黍稷非馨 唯德是馨 薝蔔 桅子花也]
덕은 사해에 퍼지매 담복처럼 향기롭고
惠化一方安社稷
[土穀之神 有德者 配食焉 共工氏之子句龍氏 食於社 厲山氏之子柱 食於稷 乃王者崇奉神明 以報天地之功用 是國家安危所在之所]
지혜는 일방의 교화하매 사직이 평안했다.
面奉天花飄縷
[天花 御札也 縷者 師之行狀也 卽出入宮之淸儀也]
몸소 천화를 받들으매 가사를 펄적였고
心憑水月呈禪拭
[拭音式 以巾拔垢也 卽呈禪門拭心之言也上句 入王城時事 此句 答王問心之事也]
마음은 수월에 부쳤으매 선식을 바쳤구나.
寯嗣佳綿誰入棘
腐儒玄杖慙摘埴
[盲者以杖探路之狀也 玄杖 筆也 言以儒記佛 如盲人之不知去路]
연면한 행록은 형극처럼 복잡하니
부유의 무식한 붓은 갈길은 못잡겠네
跡耀寶幢名可勒
[寶幢 指塔也]
자취가 보당에 광채가 나니 이름을 가히 새길만 한데
才輸錦頌文難織
[輸 負也]
내 재주 금송에 뒤졌으매 글을 짜내기 어렵구나.
囂腹欲飫禪悅食
[囂腹 鳴腹也 禪悅食 六度經云 以禪悅爲食 以智慧爲劍
此以碑文爲食也]
주린 창자로 선열의 공양에 배부르고자
來向山中看篆刻
산중에 와서 전자의 새김질을 보살피도다.
분황사 석 혜강이 글씨를 쓰고 아울러 글자를 새김 세 팔십삼
원주대덕 능선 통준 오유나 등 현일 장해 명선
단월선갈 서0대장군착자금어대 소파앙질미가은현장군 희필
당현0인신치000우덕명
용덕사년 세차갑신 유월 일 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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