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모기령의 주자비판/ 中國文化

2007/03/08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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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empas.com/sacheon/16710967-주자 및 정약용의 시경연구

조선후기의 경학연구법 분화와 毛奇齡 비판

沈 慶 昊*

Ⅰ. 머리말

Ⅱ. 모기령의 생애와 경학설

Ⅲ. 正祖의 모기령 비판

Ⅳ. 북학파 학자의 모기령 경학설

수용

Ⅴ. 소론계 학자의 漢字수용과

모기령경학설 참고 Ⅵ. 노론계 학자의 宋字 재해석과

모기령 비판

Ⅶ. 丁若鏞의 모기령 경학연구법

참조와 신 경학방법론 수립

Ⅷ. 마무리

Ⅰ. 머 리 말

조선후기 18,9세기의 학문 경향은 조선 성리학의 논리체계와 자생적인 문헌학적 연구방법의 기초 위에 청조의 고증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방향과, 양명학적 사유와 漢學의 방법을 접목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그 과정에서 청조의 여러 학설이 직,간접으로 참조되었는데, 朱熹 비판의 학자 毛奇齡의 경학설은 내용면에서나 방법면에서 특히 爭點으로 부각되었다.

毛奇齡(1623~1713)은 淸初 浙東學派의 한사람이다. 그는 程朱理學을 철저히 부정하고 청조의 고증적 학풍을 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조선후기 문인-학자들은 대체로 그를 立異와 務勝을 일삼은 인물로 지목하였다. 하지만 그의 주희 비판은 조선 문인-학자들에게 충격을 주었으며, 주희 비판의 방식은 주자학을 재평가하고 宋學의 기초 위에 漢學을 도입할 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같은 시기 일본에서도 고증학이 일어나 모기령의 경학설이 참고로 되었으나, 조선에서는 모기령에 대한 비판이 일본보다 더 극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한․중․일에서 주자학을 계승하거나 극복하면서 근세 실증적 학문이 발흥하는 과정을 비교할 때 시사하는 바가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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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령은 자가 大可․齊于 등이고 浙江 蕭山人인데, 郡望을 따라 西河라고 자호하였다. 李德懋가 󰡔盎葉記󰡕에서 지적하였듯이 그는 字가 많기로 유명하다.1) 또 凌延堪의 󰡔校禮堂文集󰡕에는 固陵毛氏라 되어 있어서, 秋史 金正喜는 그를 ‘固陵’이라 불렀다.2) 문학적으로는 騈散에 두루 뛰어났으며, 詩詞에도 능하여 󰡔西河詩話󰡕 8권, 󰡔詞話󰡕 2권을 남겼다. 이덕무는 모기령의 시문이 고상하고 화려하면서도 시원시원하다[高華逸宕]고 평가하고, 󰡔淸脾錄󰡕에 佳句들을 뽑아두었다.3)

모기령은 문학적 재능도 있었지만, 경학면에서 주희를 비판하는 상당한 양의 저술을 남겨 저명하다.4) 門人 蔣樞가 遺集을 經集 50종, 文集 234권(실제는 179권)으로 분류해서 판각한 󰡔西河全集󰡕이 行世하였다.5) 그의 아들 毛遠宗이 편찬하고 문인 王錫이 서문을 붙인 󰡔四書索解󰡕 4권,6) 문인 盛唐․王錫․章大來와 아들 모원종이 편찬한 󰡔四書謄言󰡕 4권․補2권7), 문생과 자제들이 초하여 엮은 󰡔四書正事󰡕 8권이 別行되었다. 모기령은 86세 때 󰡔四書正事󰡕를 토대로 增損移易하여 󰡔四書改錯󰡕 22권을 간행하였다. 󰡔서하전집󰡕은 뒤에 다시 侄孫들에 의해 重輯되어, 蕭山 陸凝堂藏板本으로 나왔다. 이 중집본은 表題가 ‘毛西河先生全集’이고, “凡經集五函合五十一種共二百三十六卷, 文集五函合六十六種共二百五十七卷”이라 되어 있다.8)권수제는 ‘西河合集’이다. 한편 󰡔四書改錯󰡕은 嘉慶 辛未에 甌山 金孝柏이 목판 간행한 것이 별도로 행하였다.9)

錢穆의 󰡔中國近三百年學術史󰡕는, 모기령의 經說이 한대 이후 사람들을 모두 다 비판하였으되, 가장 切齒한 것은 송대인이며, 송인 가운데서도 가장 절치한 사람은 주자라고 하였다. 전신이 모두 가시가 돋힌 蝟公[고슴도치]라는 별명이 있었으니, 그의 ‘負氣求勝’은 두고두고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경학설 가운데는 참고로 할 만한 내용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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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大學󰡕에 今文과 古文의 차이가 없고 經文에 石經本과 注疏本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밝혔다.

② 「河圖」와 「洛書」는 道家의 太乙九宮之法에서 나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太極圖說遺議󰡕에서, 今本 太極圖가 주희에 의하여 개정되었으며, 朱震이 수록한 도식이 주희 태극도의 참 모습에 가까운 빠른 시기의 것임을 증명하였다. 또한 그는 󰡔송사󰡕 실록의 기록에 의거하여, 태극도설의 첫구인 “無極而太極”은 “自無極而爲太極”이어야 한다고 하였다.10)

③ 명대에 나온 󰡔子夏詩傳󰡕과 󰡔申培詩說󰡕이 위작임을 증명하였다. 조선 정조의 詩經講義 條問에서도 그 설이 채택되었다.

④ 󰡔周禮󰡕가 주공이 지은 책은 아니지만 僞書라고는 할 수 없으며 전국시대에 지어진 책으로 보인다고 하여 周公著作說을 비판하였다.11)

⑤ 󰡔四書謄言󰡕 권3에서 王復禮(호 草堂)가 子思 및 孟子의 생졸년을 고증한 설을 인용해, 맹자가 子思에게서 친히 배울 수 없었다는 것을 입증하였다.12)

모기령은 이밖에도 경문의 훈고에서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淸儒學案󰡕 「西河學案」에서는 “명 이래로 漢儒의 학을 거듭 밝혀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空言으로 經을 말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진실로 西河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제자 李天馥은 모기령에게 남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것이 셋 있다고 하였다.13) 서책을 끼고 있지 않아도 천만권이라도 써 내려갈 기세인 것이 그 하나. 명말의 도피시기에 怔忪疾을 얻었으나 발병하더라도 글을 구하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배를 쓱쓱 문지르고 하나도 착오 없이 경각에 써 주는 것이 둘. 독서를 깊이 하지 않았는데도 경전과 제자 및 자잘한 사실까지 모두 알아 논지를 전개하면 漢宋의 유학자들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인 것이 그 셋이라는 것이다. - 40 -

하지만 모기령의 경학은 논박을 위한 논박으로 시종한 면이 있었다. 그는 같은 시대의 潛邱 閻若璩(1636~1704)가 󰡔尙書古文疏證󰡕을 발표하자 두달 만에 󰡔古文尙書寃詞󰡕를 지어 비판하였는데, 논리가 황당하였다. 즉 염약거는 󰡔疏證󰡕에서 梅賾本이 僞古文이라는 斷案을 내리자, 모기령은 매색본 25편의 義理가 좋다는 이유를 들어 그것이 진고문이라고 강변하였다.

謝山 全祖望((1705~1755)은 󰡔蕭山毛檢討別傳󰡕를 지어, 모기령의 經義說 가운데는 채택할 것이 없지 않지만 잘못이 더 많아서 성인의 가르침에 죄를 얻었다고 애석해 하였다. 全祖望의 아버지 全書는 아예 󰡔蕭山毛氏糾謬󰡕 10권을 엮어, 모기령의 억설과 경솔함을 비난하였다고 한다.14) 모기령은 自撰墓誌銘 末尾에 陳子龍․何曾․徐緘․姜黃門․李師 등의 찬사를 늘어놓았는데, 그 가운데는 모기령의 才學이 두보․한유․공영달․육덕명․이선․구양수․소식의 재능을 합한 수준이라고 허랑하게 찬미한 것도 있다. 또한 그는 黃宗羲(1610~1695)․顧炎武(1613~1682)․王夫之(1619~1692) 등과 달리 遺民을 자처하지도 않았다. 梁啓超는 󰡔淸代學術槪論󰡕에서 “毛氏가 계몽기에 살았다면 용감한 장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학자로서의 도덕에는 결함이 있으니, 後儒들이 그를 높이 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렇게 모기령은 중국학술사에서 인격적 결함과 학술적 오류 때문에 지탄받아 왔지만, 趙紀彬(1905~1982)은 󰡔論語新探󰡕에서 그를 긍정시하였다. 조기빈은 󰡔논어󰡕의 신 해석에 전통적 훈고학을 채용하였는데, 그 방법론은 모기령에게로 소급한다. 조기빈은 克己에 대한 해석에서, 모기령이 心學 일파이지만 그가 程朱學을 비판한 내용은 정곡을 찌르는 부분이 많다고 특별히 언급하였다.15)

이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모기령의 경학설은 주자학=송학을 비판하려 할 때에 직.간접으로 참고가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는 사실 청초 학술계에 樸學의 기풍을 일으켜 程朱學의 기반을 무너뜨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平湖人 陸邦烈, 山陰人 盛唐, 遂昌人 王錫, 會稽人 章大來, 餘姚人 邵廷采, 蠡縣人 李塨 등이 그 제자라고 언급된다. 육방렬(자 又超)은 모기령의 경설을 초록하여 󰡔聖門釋非錄󰡕 5권을 엮었다. 만일 명말청초의 ‘經世致用學’의 계보를, ① 記誦이나 性理의 학문이 아니라 실천과 수양을 강조한 實踐派 ② 天文曆算․農業水利․兵學火器 등의 기술적 측면의 실용에 주목한 技術派 ③ 性理의 空談을 부정하고 경학․사학의 연구를 통하여 정치 및 사회 문제 해결에 응용하고자 한 經學史學派로 분류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모기령은 엄연히 ‘경학사학파’의 한사람으로 꼽을 수 있다.16)

조선에서도 18세기 후반, 19세기 초의 진보적 학자들은 모기령의 ‘好勝之心’을 냉혹하게 비판하면서도, 漢學과 宋學을 절충하거나 주자학을 새롭게 발전시키고자 할 때 모기령의 경학설을 많이 참고로 하였다. 본고에서는 그 실상을 개괄하고자 한다.

Ⅱ. 모기령의 생애와 경학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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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령의 생애에 관하여는 문인 唐盛이 지은 「西河先生傳」에 자세하며,17) 그것을 토대로 逸名氏의 󰡔淸史列傳󰡕은 「儒林傳․下」 권68에 그를 立傳하였다.18)

모기령은 折江省 蕭山 출생인데, 毛秉鏡과 張氏夫人의 네 아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중형 毛錫齡은 그의 易學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스무살 이전에 鄕試에 뽑혀 杭州府 學宮에서 공부하던 중에 明이 멸망하자 항주 南山에 몸을 숨겼고, 족친 毛有倫이 지휘하는 西陵軍에 투신하였다. 그런데 모유륜이 方國安․馬士英의 方馬軍과 제휴하려는 것을 반대하였으므로, 方馬軍은 朱橋에서 淸軍에게 대패한 뒤 그의 생명을 노렸다. 그 뒤 삭발하고 절의 토굴속에 숨어 지냈으며, 淸兵에게 잡혔으나 머리를 깎은 덕분에 목숨을 구하였다.19) 다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崇山으로 가서 도사의 土室에 숨어 지내면서 毛甡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 42 -

마흔 이후에 淸 정부의 사면을 받고, 56세 때인 1679년(강희 18, 기미)에 廩監生으로 博學鴻儒科(制科)에 천거되어 二等으로 합격, 翰林院檢討에 임명되고 明史館纂修官에 충당되었다. 그는 「辨忠臣不徒死文」을 지어 자기의 변절을 간접적으로 변명하였으며, 吳三桂의 아들 吳世璠이 죽어 三藩이 평정되자 「平滇頌」을 강희 황제에게 바쳤다. 그는 또 성운학을 좋아하는 강희제의 호감을 사려고 󰡔古今通韻󰡕 12권을 지었다. 1685년(강희 24)에는 會試同考官에 충당되었다. 얼마 뒤 휴가를 얻어 항주에 돌아가 있다가 痺疾을 얻었다. 1699년(강희 38)에 강희제가 南巡하자 嘉興에서 알현하고 󰡔聖諭樂本解說󰡕을 올렸고, 강희제의 三巡 때 절강으로 가서 알현하였다. 1713년(강희 52)에 91세로 몰하였다.

모기령은 스스로, 일찍부터 諸經의 문제점을 辨定하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고 하였다. 하지만 全祖望이 지은 「蕭山毛檢討別傳」이나 모기령의 제자 盛唐이 지은 「西河先生傳」에는 그가 마흔 이후에야 경학에 관한 저술을 시작하였다고 되어 있다. 河秋濤(1824~1862)도 모기령이 염약거를 만난 이후에야 경학에 관심을 가졌고, 특히 歸田 뒤에 경학에 관해 저술을 하였다고 말하였다.

모기령은 정주학을 극력 비판하였는데, 그것은 四庫館臣이 지적하듯 門戶之見에 의한 것이었을 혐의가 짙다. 그는 毛甡이란 이름으로 도피할 때 賀凌臺의 제자라는 승려를 만나 하릉대의 古本大學說을 전해듣고 깨우침이 있었다고 했다.20) 그렇지만 그의 정주학 비판은 같은 浙東學派에 속하는 선배 蕺山 劉宗周(1578~1645)의 영향을 받은 면이 있다. 유종주는 명말의 양명학자로 陳確(1604~1677), 黃宗羲(1610~1695)의 스승이다. 모기령은 史館에 있을 때 󰡔明史󰡕에 「道學傳」을 두려는 여론에 반대하는 황종희의 논조에 동조해서, 그 계획을 취소시켰다. 또한 「辨聖學非道學」을 지어 양명학을 옹호하였으며, 󰡔王文成集傳本󰡕을 지어 󰡔明史󰡕 「王守仁傳󰡕의 초고로 삼았다.21) 질병으로 벼슬을 그만 둔 뒤에는 주희의 사서학을 공격하는 󰡔四書索引󰡕․󰡔論語稽求篇󰡕․󰡔大學證文󰡕․󰡔大學知本圖說󰡕․󰡔中庸說󰡕․󰡔四書謄言󰡕․󰡔四書謄言補󰡕․󰡔聖門釋非錄󰡕 등을 저술하였다. 86세 때에는 이 저작들의 요지를 󰡔四書改錯󰡕으로 묶어 강희제에게 헌정하려다가, 강희제가 주자의 문묘배향을 결정하자 일단 刻版을 없애 버렸다.

모기령이 훈고에 탐닉한 것은 청대 文字獄의 영향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강희 2년 莊廷鑨의 󰡔明史󰡕 사건으로 지식인들이 희생 당한 이후,22) 경세사상을 고취하던 황종희・고염무 등의 영향력이 감소되고, 聲韻․文字․訓詁를 위주로 하는 考證學이 성행하였다. 당시 마흔 남짓의 모기령은 점차 청조의 정책에 휘둘려서 고증학적 기풍에 젖기 시작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 43 -

모기령은 명말에 토실에서 󰡔毛詩續傳󰡕 38권을 저술하였으나 江淮에 피난하던 때에 원고를 잃어버리고, 󰡔國風省篇󰡕 1권, 󰡔詩箚(詩札)󰡕 1권, 󰡔毛詩寫官記󰡕 4권을 새로 저술하였다. 그리고 江西參議道 施閏章(1618~1683)이 湖廣人 楊洪才를 吉安 白鷺洲書院에 山長으로 초청하고 모기령도 부르자, 모기령은 그곳에서 양홍재와 淫詩 및 笙詩에 관하여 논하였다. 양홍재가 주희의 설을 따라 鄭風淫詩說과 笙詩無詞說을 주장한 데 비하여, 모기령은 정풍에는 음시가 없고 생시는 本詞가 없어졌다는 주장을 하였다. 모기령은 한림이 된 뒤 󰡔白鷺洲主客說詩󰡕 1권을 엮었다. 그리고 명 嘉靖 연간에 鄞人 豐坊이 위작한 󰡔子貢詩傳󰡕과 󰡔申培詩說󰡕이 行世하는 것을 보고는, 󰡔詩傳詩說駁議󰡕 5권을 저술하였다.

청조에 들어와 史館에 있을 때 모기령은 󰡔古今通韻󰡕 12권을 강희제에게 헌정하였다. 杭州에 僦居할 때는 󰡔仲氏易󰡕 30권을 저술하였고, 다시 󰡔推易始末󰡕 4권, 󰡔春秋占筮書󰡕 3권, 󰡔易小帖󰡕 5권, 󰡔易韻󰡕 4권, 󰡔河圖洛書原舛編󰡕 1권, 󰡔太極圖說遺議󰡕 1권을 저술하였다.23)

그는 會試同考官일 때 春秋房卷을 보고 故傳의 偏僻됨에 불만을 느꼈는데, 歸田 뒤 󰡔春秋毛詩傳󰡕 36권, 󰡔春秋簡書刊誤󰡕 2권, 󰡔春秋屬辭比事記󰡕 4권을 지었다.

그리고 禮經을 全著하고자 하였으나 衰病으로 여의치 않자, 昏禮․喪禮․祭禮․宗法․廟制․郊社․禘祫․明堂․學校에 관하여 차례로 저술하였다. 論語(󰡔逸講箋󰡕 3권 등)․大學(󰡔逸講箋󰡕 3권, 󰡔大學問󰡕 1권 등)․中庸(󰡔中庸說󰡕 5권 등)․孟子(󰡔逸講箋󰡕 3권 등)에 대하여도 고증하였다. 󰡔大學證文󰡕과 󰡔孝經問󰡕에서는 後儒의 改經이 잘못임을 변증하였다.

평소 음률에 밝았던 그는 史館에 있을 때, 명대 宗藩이 전한 唐樂笛色譜에 의거하여 󰡔竟山樂錄󰡕 4권을 저술하였다.24) 또 在籍時에 강희제가 음악을 논하여 羣臣에게 ‘徑一圍三隔八常相生之法’을 勅諭하자, 그것을 근거로 󰡔聖諭樂本解說󰡕 2권, 󰡔皇言定聲錄󰡕 8권을 저술하였다.25) 강희 38년의 남순 때는 嘉興에서 迎駕하고 󰡔聖諭樂本解說󰡕을 헌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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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령의 경학 저술 가운데 염약거의 󰡔疏證󰡕을 압도하려고 저술한 󰡔古文尙書寃詞󰡕 8권과 그것을 산절한 󰡔尙書廣德錄󰡕 5권은 오류가 가장 많다. 󰡔經問󰡕을 저술하여 󰡔周禮󰡕․󰡔儀禮󰡕가 전국시대의 서적이라고 논하되, 錢丙蔡氏의 이름은 감추고 顧炎武․閻若璩․胡渭을 거론해서 공격한 것은 ‘心術不正’의 예로 꼽힌다.

모기령은 󰡔詩話󰡕 8권과 󰡔詞話󰡕 2권을 지어 문예관을 피로하였다. 그 가운데 󰡔詩話󰡕는 自作詩와 동시인의 唱和詩를 싣고 尊唐抑宋說을 논하였다. 단 송시의 득실을 파악하지 못한데다가, 당시의 藩籬에도 이르지 못하였다는 四庫館臣의 평이 있다.26) 주희의 󰡔楚辭集註󰡕를 비판하고 疏證하여 󰡔天問補註󰡕 1권을 저술한 것도 억측의 언사가 많다.27)

모기령은 小學 방면의 저술도 많이 남겼다. 그는 顧炎武의 󰡔音學五書󰡕를 배척하고자 󰡔古今通韻󰡕 12권을 저술해서 五部三聲兩界兩合의 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古音이 역사적으로 변화하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수많은 條例를 만들어 포괄하려 하였으니, 조례가 많아질수록 모순이 더욱 심해졌다.28)

모기령의 경학설 가운데 후인들에게 주목받는 사항을 몇가지 알아보기로 한다.

(1) 모기령은 王守仁의 설을 추종하여 󰡔大學知本圖說󰡕 1권을 저술해서 古本大學의 설을 내세워 주희의 格物傳을 공격하였다.29) 이 책은 知本圖說과 知本圖로 이루어져 있는데, 知本圖는 大學有本․格物知本․格物以修身爲本․修身以誠意爲本의 4도이며 附錄을 두었다. 그리고 後圖가 있어, 大學知本과 中庸立本을 병렬시켜 두 그림을 節次相配하였다. 그는 知行竝用과 博約兼資의 문제에 대하여 경전에서는 혹 偏擧하였지만 이치상 編廢할 수가 없다고 보았다. 그런데 經文에 이미 格物이라고 분명히 말하였으므로, 偏傳을 두지 않은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格物을 量度의 뜻으로 보고, 知本을 誠意라고 보았다. 知本을 直指한 것은 王守仁의 良知說을 따른 것이고, 誠意를 위주로 한 것은 劉宗周의 愼獨說을 취한 것이다

(2) 모기령은 󰡔주역󰡕에 一家를 이루었음을 자부하였고 후세 학자들의 認可를 얻었다. 顧炎武의 󰡔易本音󰡕이 考據易學의 선하를 열고 黃宗羲 형제의 󰡔易學象數論󰡕․󰡔圖書辨惑󰡕이 圖書僞作說을 논한 뒤, 모기령은 󰡔仲氏易󰡕 30권, 󰡔推易始末󰡕 4권, 󰡔春秋占筮書󰡕 3권, 󰡔易小帖󰡕 5권, 󰡔易韻󰡕 4권, 󰡔河圖洛書原舛編󰡕 1권, 󰡔太極圖說遺議󰡕 1권을 저술해서, 荀爽․虞翻․干寶․侯嬴의 설과 卦變․卦綜의 법을 발명하고 圖書를 변증하여 宋易을 공격하였다. 四庫館臣은 “명 이후 漢儒의 역학을 신명하여 유가로 하여금 공리공담으로 經을 논설하지 못하게 한 것은 사실은 모기령이 그 첫 길을 열었다”고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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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령의 역학을 대표하는 저서는 󰡔仲氏易󰡕이다.30) 그는 易에 變易․交易(둘은 복희의 󰡔역󰡕), 反易․對易․移易(셋은 문왕과 주공의 󰡔역󰡕)의 다섯가지 뜻이 있다고 논하였다. 變易은 양이 음으로 변하고 음이 양으로 변함이다. 交易은 음이 양과 교호하고 양이 음과 교호함이다. 劃卦는 변역을 이용하고 重卦는 교역을 이용하므로 복희의 󰡔역󰡕이라고 하였다. 反易은 順逆을 살피고 向背를 심리하여 반대로 보는 것이다. 對易은 剛柔를 엮어서 짝을 살피는 것이다. 移易은 나뉨과 모임을 심리하고 오고 감을 계산하여 추이하여 상괘․하괘로 하는 것이다. 反易․對易․移易을 강론한 것이 漢魏 이래의 易學과 구별되는 모기령의 역학이다.31) 移易은 荀爽의 升降이다. 이를테면 泰卦는 음효와 양효가 유별로 모여 있는 괘인데, 그 제3효가 상효로 옮아가서 양이 가고 음이 오면 損卦가 된다. 또 否卦도 음효와 양효가 유별로 모여 있는 괘인데, 그 제4효가 초효로 옮아가서 양이 오고 음이 가면 益卦가 된다. 對易은 우번의 旁通과 가깝다. 이를테면 上經의 需卦․訟卦는 下經의 晉卦․明夷卦와 짝을 이루어서, 땅이 하늘과 짝이 되고 불이 물과 짝이 된다. 상경의 同人卦․大有卦가 하경의 夬卦․姤卦와 상대하여, 5양이 5양과 마주하고 1음이 1음과 마주하는 것도 그 예이다. 모기령이 말한 反易은 虞翻의 反對이다. 屯卦가 반전하면 蒙卦이고, 咸卦가 반전하면 恒卦이다. 對易은 기존의 正變占對와 차이가 있다. 정변점대는 需卦가 訟卦와 상대하고, 同人卦가 大有卦와 상대함을 말한다. 하지만 모기령은 需卦․訟卦의 둘이 晉卦․明夷卦의 둘과 상대하고 同人卦․大有卦가 夬卦․姤卦와 상대한다고 말한다. 그의 移易說도 10벽괘 및 주희의 괘변설과 다르다. 다른 괘변설은 모두 두 괘가 번갈아 변하여 順逆이 서로 이어 접함을 취하여, 변점을 취하지, 推演을 취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기령은 먼저의 효사를 부연하였고, 변한 뒤의 상수를 점하지 않는다.

모기령은 송학을 극도로 천시하여, 「辨道學」을 지었다. 그에 따르면, 북송에 이르러 陳摶이 華山道士․种放․李漑와 함께 자신의 역학을 부풀리고서, 도가서 󰡔無極尊經󰡕 및 張角의 󰡔九宮󰡕을 찾아내어, 太極․河洛의 설을 창도하여 󰡔道學綱宗󰡕을 지었다. 이후에 주돈이․소옹․정호 형제가 그를 사사하여 도교를 유가의 서적 속에 찬입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주희는 史官 洪邁에게 애걸하여 진단을 名臣 大傳에 입전하게 하고 주돈이․정이를 위해 󰡔宋史󰡕에 道學總傳을 두게 하였다고 모기령은 통박하였다. 이미 黃宗炎은 「태극도」가 󰡔道藏󰡕의 「太極先天之圖」에서 기원한 사실을 폭로한 바 있는데, 모기령은 󰡔태극도설유의󰡕에서 더 나아가 朱震 헌정의 「태극도」가 주돈이의 작품임을 증명하였다.32) 또한 그는 󰡔하도낙서원천편󰡕을 지어, 진단이 만든 「하도」가 “大衍之數 五十有五”에 대한 鄭玄 注를 근거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鄭玄은 결코 대연지수가 「하도」라 하지는 않았고, 「하도」에 9篇이 있고 「낙서」에 6편이 있다고 하였으니, 정현이 말한 「하도」․「낙서」는 55點․45點의 易圖가 아니었다. 송인의 「하도」는 大衍圖․天地生成圖․五行生成圖라 이름하여야 하지, 「하도」라 할 수는 없다고 모기령은 논하였다.33) 뒷날 胡渭는 모기령의 설을 부연하였다.

(3) 󰡔周禮問󰡕34)에서 모기령은 󰡔주례󰡕가 周公의 작이 아니라 전국시대에 성립하였음을 상세하게 논증하였다. 󰡔漢書󰡕 「藝文志」의 기록을 보면 당시 󰡔주관경󰡕 6편과 󰡔주관전󰡕 4편이 저록되어 있고, 󰡔주례󰡕의 내용에는 전국시대의 事迹이 많다. 이미 東漢의 何休는 전국시대 成書說을 제기한 바 있는데, 모기령은 그것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皮錫瑞의 󰡔經學通論󰡕도 모기령의 설을 지지하였다. 康有爲와 廖平은 劉歆이 󰡔주례󰡕를 僞撰했다는 설을 견지하였으나, 유흠 위찬설은 모기령에 의하여 이미 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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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모기령은 주희의 鄭詩淫詩說을 부정하였다. 그는 󰡔尙書󰡕 「堯典」편(偉古文에서는 「舜典」)의 ‘詩言志, 歌永言, 聲依永’에 의거하여 ‘聲’과 ‘詩’는 별개의 것이므로 鄭聲이 淫亂하다고 해서 鄭詩가 다 淫亂한 것은 아니며, 만약 주희의 주장대로 鄭詩가 淫亂하다면 공자가 ‘放鄭聲’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35) 이것은 明의 郝敬36)의 설을 계승한 것인 듯하다.

(5) 모기령은 주희의 四書學을 근저에서 전복하려고 하였다. 嘉慶本 󰡔四書改錯󰡕은 32門部 451條로 되어 있는데, 門部目만 보면, 人錯․天類錯․地類錯․物類錯․官師錯․朝廟錯․邑里錯․宮室錯․器用錯․衣服錯․飮食錯․井田錯․學校錯․郊社錯․禘嘗錯․禮樂錯․喪祭錯․故事錯(上)․故事錯(下)․典制錯․刑政錯․記述錯․章節錯․句讀錯․引書錯․據書錯․改經錯․改註錯․自造典禮錯․抄變詞例錯․添補經文錯․小詁大詁錯(上)․小詁大詁錯(下)․貶抑聖門錯(上)․貶抑聖門錯(下) 등이다. 물명 고증과 자구 훈석의 문제에서부터 改經과 聖門貶抑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주희의 四書學을 철저히 공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모기령의 󰡔사서개착󰡕이 나온 이후로는 비록 주자학을 옹호하려는 태도라고 하여도, 󰡔사서개착󰡕에서 제기된 문제점을 해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6) 비록 모기령의 경학론은 새로운 체계를 수립하지는 못하였으나, 治經과 관련한 주장은 실증적 樸學에 참고할 만한 것이 있었다. 즉 그는 ‘說經勿杜撰’ ‘勿武斷’ ‘勿誤作解說’ ‘勿誤章句’ ‘勿誤訛人倫序’ ‘勿因經誤以誤經’ ‘勿自誤誤經’ ‘勿因人之誤以誤經’ ‘勿改經以誤經’ ‘勿誣經’ ‘勿借經’ ‘勿自造經’ ‘勿以誤解經之故而復回護以害經’ ‘勿依違附經’ ‘勿自執一理以繩經’ ‘勿說一經礙一經’을 治經 요령으로 제시하였다.37) 그가 실제로 이러한 요령을 실천하였는지 여부는 재론하여야 하겠으나, 이 주장이 경학 연구에서 실증적 태도를 제고하는데 일정한 지침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Ⅲ. 正祖의 모기령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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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재위 15년(1791)에 招啓文臣 親試 및 泮儒 應製에서 「俗學」이란 제목의 책문을 내걸고, 陽明 좌우파와 毛奇齡을 포함한 僞經害經의 무리인 豊坊孫鑛之派, 고증학에 치우친 일파인 楊愼季本之派, 蟲刻鷄距의 操觚家인 七子五子之派의 세 유파를 비판하고 諸生의 의견을 물었다.38) 모기령에 대해서는 특히 󰡔經說󰡕을 속학의 서적이라고 거론하였다. 정조는 王守仁의 문장을 높이 평가하고 顧炎武의 ‘淹博’을 인정하였으며, 모기령에 대하여도 考證博洽의 거장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명청의 학문은 끝내 순정하지 못하며, 주자학을 정통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확고한 의지였다.

정조는 󰡔시경󰡕에 관한 논의에서 朱熹의 說을 수정 비판한 詩論이나 三家詩說을 검토하면서 오히려 주희 설의 정통성과 우위성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신축년 이래 4․5차에 걸쳐 󰡔시경󰡕에 관련된 조문을 頒給하고 條對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詩經講義󰡕 9권(寫本)이 엮어졌다. 즉 條問辛丑選 2권과 條問癸卯選 1권, 條問甲辰選 1권, 條問己酉庚戌選 5권이다.

條問辛丑選 2권과 條問癸卯選 1권은 이미 1783년(계묘)부터 교정이 시작되었다. 당시 󰡔毛詩講義󰡕를 교정하였던 李德懋는 모기령의 주희 비판이 儒林의 公案을 어지렵혔다고 비판하였다. 즉 李德懋는 「내각에 비치된 모시강의를 교정하다(校內閣毛詩講義)」39)의 제10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련하다 彤管[즉 靜女篇]과 靑衿[즉 子衿篇]을

小序는 어찌하여 刺淫詩라 아니했나.

朱門의 공안을 감히 무너뜨려

毛甡과 李紱이 유림을 어지렵혔네.

可憐彤管與靑衿, 小序如何不刺淫.

敢壞朱門公案了, 毛甡李紱鬧儒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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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酉․庚戌選 抄啓文臣을 대상으로 한 辛亥頒給條問의 詩經講義 寫本의 標記에서 정조는, 毛詩序 從違의 定論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면서, “근대의 유학자들이 공공연하게 前賢을 비난하고 별도로 新義을 창안하는 것으로 말하면 더욱 변론할 것도 못된다”고 하고 󰡔시경󰡕을 논하는 자들이 好夸競奇의 풍조가 있는 것을 징계하려 한다고 밝혔다.40) 신해반급 조문의 第一問인 ‘總論’은, 주희의 󰡔詩集傳󰡕이 訓釋을 구비하는데도 불구하고 詩篇 분석이 어려운 것은 小序 美刺說에 관한 정론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처럼 小序의 신빙성에 관한 물음을 제기한 직접적 원인은 ‘근대유자’의 이설 때문이었다.41) 그 ‘근대유자’란 곧 모기령이다. 정조는 모기령의 󰡔白鷺洲主客說詩󰡕을 간접 인용하여 小序의 작자에 대한 이설을 거론하였다. 모기령은 小序 작자에 관한 문제는 從序派와 攻序派의 입장에 따라 이설이 많다. 모기령은 從序派의 극단론자는 아니어서, 小序의 刺詩說은 부정하였다. 그는 다만 주희의 淫詩說을 부정하고자 小序를 부분 인정하였다. 그는 󰡔詩札󰡕에서는 毛亨作序說을 强辯하였지, 荀子子夏淵源說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정조는 신축년 毛詩講義 때부터 모기령의 󰡔시집전󰡕 비판을 검토하게 하였다. 그 때문에 자연히 名物字句 考證의 방법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정조는󰡔子貢詩傳󰡕(余嘉錫의 󰡔四庫提要辯證󰡕에 의하면 豊坊의 僞作임42))과󰡔申培詩說󰡕(余嘉錫에 의하면 王文祿의 僞作임)도 검토케 하였는데, 그것도 모기령의 󰡔詩傳詩說駁議󰡕를 의식해서였다. 신해년 반급의 조문 가운데는 ① 字句 분석에서 모기령 설에 따라 󰡔시집전󰡕에 대한 의문을 표한 것이 있고, ② 物名 고찰에서 모기령의 설을 검토한 예가 있으며, ③ 詩篇 제작의 동기나 본의를 검출할 때에도 모기령의 설을 직접 검토한 예가 있다. 모기령은 ‘口氣가 輕薄’(정약용의 지적)할 정도로 󰡔시집전󰡕을 매도하고, 󰡔시집전󰡕 注가 체제를 잃었다고 통박하였는데, 정조도 󰡔시집전󰡕 훈석의 일관성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모기령은 󰡔시집전󰡕의 淫詩說을 비판하여, 男女相悅之詞는 모두 君臣朋友의 사이를 남녀에 가탁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정조는 주희의 淫詩說을 준수하고 託詞說을 따르지 않았다.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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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조는 󰡔주역강의󰡕에서도 모기령의 설을 참조하였다. 정조는 1783년(계묘)에 그 해 선발의 초계문신에게 󰡔주역󰡕에 관한 조문 183개조를 반급하였고, 1784년 갑진 선발의 초계문신에게도 33개조의 조문을 반급하였다.44) 󰡔군서표기󰡕에서 정조는, “伊川(程頤)의 易은 한결같이 躬行에서 나와 거의 觀彖過半(彖을 보고 생각이 過半함)의 易인데 비하여 紫陽(朱熹)의 易은 理數를 겸하여 우뚝히 辭變象占의 역을 이루었으니, 배우는 사람은 󰡔程傳󰡕과 󰡔本義󰡕에 의하여 孔門의 翼을 터득하고, 孔門의 翼에 의하여 文王의 卦辭와 周公의 爻辭를 터득한다면, 그 정맥을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전제한 뒤, 주희 이후로 岐論이 많아져, 先天圖를 의심하는 자에 袁樞와 林栗의 무리가 있고 河圖를 배척하는 자로는 項安世와 王褘의 부류가 있다고 개탄하였다. 그리고 來知德의 卦綜이나 毛奇齡의 卦變은 漢儒의 緖餘를 훔쳐다가 程朱를 매도하였다고 비난하였다.45) 정조의 󰡔주역강의󰡕는 청초의 卦變說을 재비판하여 󰡔易傳󰡕과 󰡔本義󰡕의 가치를 재확인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 그러한 때에 모기령의 설은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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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1781년(신축)․1783년(계묘)․1784년(갑진) 세차례에 걸쳐 󰡔尙書講義󰡕를 시행하면서 고문상서설에 대하여 정론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에 따라 條問辛丑選二卷, 條問癸卯選二卷, 條問甲辰選四卷이 엮여 나왔다. 󰡔상서강의󰡕의 「군서표기」는 “古今眞僞의 辨說은 아직 결론을 맺지 못한 案”라고 전제한 뒤, 이 編의 條問은 學術을 바로잡고 聖經을 保衛하는 大用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고 하였다.46) 󰡔서경강의󰡕의 총론은, 六經 가운데 󰡔역경󰡕과 󰡔시경󰡕은 諸家의 텍스트가 각기 다르지만 字句나 訓詁에서의 차이일 뿐이거늘 󰡔상서󰡕만은 今文 28편과 古文 58편의 텍스트 자체가 다른데, 고문상서 가운데 금문상서에 없는 25편에는 의심나는 점이 있다는 사실을 거론하였다.47) 정조는 고문상서 25편을 僞書라고 보는 논거로, 첫째, 한무제 때 공안국이 고문상서를 秘府에 올린 이후 동진 때 매색본이 나올 때까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는 점, 둘째, 秘府에 漆書竹簡으로 보관된 고문상서가 몇차례의 병화를 거치는 과정에 온전히 보존될 수 없었으리란 점, 셋째, 그 문체가 한결같이 文從字順하다는 점 등 세가지를 들었다. 이 가운데 세 번째의 근거는 元의 吳澄의 文體辨僞說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48) 정조는 결코 모기령의 설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문상서를 전면 폐기하지는 않았으며, 모기령의 고문상서 옹호론을 간접적으로 참고하였다. 고문상서 25편을 僞書라고 하여 그 가치를 부정할 경우에는 「大禹謨」․「太甲」․「說命」․「周官」 편에 들어 있는 聖學의 핵심이 부정되므로, 주희가 고문상서를 의심하면서도 그 결론을 유보하였던 것이나 마찬가지로 고문상서를 전면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조가 모기령을 비판한 것은 會極之妙를 살려 정국과 학술계를 통합하려던 정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주자학의 정통성을 확인하려면 모기령의 주자 비판을 공박하여야 하였고, 지식층의 학문을 大用의 學으로 수렴시키기 위하여 모기령 이후 청대 고증학의 번쇄한 경학논의를 경계하였다.

Ⅳ. 북학파 학자의 모기령 경학설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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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북학파의 학자들은 모기령의 고증적 경학설을 眞僞의 여부에 근거해서 從違를 결정하는 관점을 다소 지녔다. 특히 李德懋는 모기령 시의 ‘高華逸宕’을 좋아하여 󰡔淸脾錄󰡕에 佳句를 뽑아두었다. 또한 그는 모기령의 해박함을 사모하였다. 다만 그 말이 번다하고 六書에 밝지 못한 것을 흠이라고 여겼다.49) 모기령도 모기령의 인간적 결함을 비판하였다. 즉 󰡔앙엽기󰡕(3) 「毛奇齡駁忠臣」에서는 모기령이 자신의 훼절을 미봉하고자 충신을 논박한 저열한 심사를 상세히 논하였다.50) 顧炎武나 魏禧가 있었더라면 마땅히 침을 뱉았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이덕무는 󰡔禮記臆󰡕에서 고염무의 설을 많이 인용하고 모기령의 설을 함께 참고하여야 한다는 견해를 여러 곳에서 밝혔다.51) ① ‘三年問’ 조항에서는 고염무 󰡔일지록󰡕의 ‘二十五月而畢’說을 인증하고 按語를 붙여 ‘모기령의 설을 참고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모기령의 설은 󰡔西河文集󰡕 권4에 수록된 「擬喪制以日易月議‘를 가리킨다. ② ’大學‘ 조항에서는 古本 대학설과 관련하여 모기령의 상세한 설이 있다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이덕무는 󰡔앙엽기󰡕(6)의 ‘經書人物辨證’ 조항에서 모기령의 변증에 찬동하였다. 즉 모기령의 󰡔四書索解󰡕․󰡔四書謄言󰡕․󰡔春秋傳󰡕․󰡔四書謄言補󰡕․󰡔四書索解󰡕와 「答柴陛升書」가 경서의 인물을 고증한 것을 상세히 소개하고, “여러 선현이 다시 살아나 보더라도 고개를 끄덕여 긍정할 것이며 위로하고 사과하기에 바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덕무는 󰡔앙엽기󰡕에서 모기령의 설을 논평 없이 소개하거나 그 설에 따랐다.

① 󰡔盎葉記󰡕(2)에서 徐緘(자 伯調)의 「讀書說」을 소개하고, 서함의 근면함을 칭찬한 모기령의 「二友銘」을 각주로 인용하였다.

② 󰡔앙엽기󰡕(3)의 ‘博學鴻詞科’ 조항에서는 청나라가 명의 유민들을 포섭하는 방안으로 1678년(강희 17년)에 개설한 박학홍사과의 연혁을 서술하면서 모기령의 󰡔制科雜錄󰡕을 인용하였다. 모기령은 바로 강희 17년의 박학홍사과 출신으로 翰林院 檢討의 벼슬을 받았던 50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제과잡록󰡕은 그 시말을 스스로 적은 책이다.52) 이덕무는 강희 때에 制科한 사람들은 모두 명나라 때에 성장하였으므로 모두 淸에 臣僕하지 않았으니, 박학홍사과 뿐만 아니라 다른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는 것이 옳았다고 하여, 모기령 등의 훼절을 비판하였다. 다만 雍正과 乾隆 때의 사람은 명이 망한 뒤 1백년 동안에 태어났으므로 가혹하게 책망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③ 󰡔앙엽기󰡕(6)의 ‘孔子生卒’ 조항에서는 공자의 생졸 시기와 관련된 ‘근세 사람’의 설로 郭存․朱書의 설과 함께 모기령의 설을 논평 없이 소개하였다.

④ 󰡔앙엽기󰡕(7)의 ‘공(石貢)妃’ 조항에서는 모기령의 󰡔彤史拾遺󰡕(󰡔勝朝彤史拾遺記󰡕)53)를 인용하여, 명나라 영락 7년(1409)에 조선 여성으로 賢妃에 책봉되었던 權氏와 당시 조선 여성으로 位號가 드러난 여인들의 사적 및 賜祭의 사실을 기록하여 두었다. 또한 명태조의 비 공씨의 사적을, 朱彛尊의 󰡔靜志居詩話󰡕와 󰡔明詩綜󰡕을 인용하여 沈玄華의 「삼가 남경 봉선전에서 제사를 올리다(敬禮南都奉先殿紀事)」를 근거로 설명하였다. 모기령의 󰡔동사습유󰡕는 고황후 마씨가 成祖를 낳았다고 기록하였으나, 이덕무는 󰡔靜志居詩話󰡕 󰡔명시종󰡕의 설에 좌단하여, 공비가 성조의 생모라는 설에 찬성하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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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앙엽기󰡕(8)의 ‘慧通浚禪師’ 조항에서는 1691년(강희 30) 高麗寺에서 설법한 慈聖賢禪寺가 고려에서 불법을 얻었다고 기록한 모기령의 「慧通浚禪師塔誌」를 인용하고 고려사의 내력을 고증하였다.

⑥ 󰡔앙엽기」(8)의 ‘八股’ 조항에서는 모기령의 설을 전재하였다. 모기령은 󰡔制科雜錄󰡕에서, 팔고의 後股(원나라 제도의 경우)나 大結(명나라 제도의 경우)이 없어지고 高手들의 講章이란 것이 集註만 본받아 터럭만큼도 다르지 않게 되었다고 개탄하였다.

한편 이덕무는 모기령의 설을 곳곳에서 ‘실증적으로’ 비판하였다.

① 徐有年(稼雲)에게 보낸 서신(󰡔아정유고󰡕)을 보면, 「堯典」의 ‘放勳’에 대하여 모기령의 설을 지지하였다. 모기령은 󰡔大戴禮記󰡕 「五帝德篇」에서 “帝堯는 高辛의 아들이니 방훈이요, 帝舜은 瞽瞍의 아들이니 重華요, 禹는 鯤의 아들이니 文命이다”라고 한 것을 인용하여 ‘방훈’을 이름이라고 단정하고 요․순․우는 당시에 통칭한 호로 보았다. 이덕무는 다시 고염무가 요․순․우를 이름이라고 보았던 설을 인증하여 고염무의 설에 좌단하였다.

② 󰡔盎葉記󰡕(1)에서는 모기령의 「續詩傳鳥名」을 거론하여 그 득실을 논하였다. 모기령은 ‘睍睆黃鳥’에 대하여 주희의 󰡔詩集傳󰡕이 凱風篇의 주에서 ‘현환은 황조의 소리라 하고 또 淸和圓轉의 뜻이다’라고 한 것을 비판하고, 꾀꼬리는 엿보기를 좋아하므로 ‘현환’은 꾀꼬리의 눈을 이름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集韻󰡕과 󰡔廣韻󰡕에 黃鳥=鶯이 黃 으로 되어 있어서, 현환이 눈과 관련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덕무는 이러한 설명을 수용하였다. 단 모기령은 󰡔주역󰡕 繫辭傳의 離卦爲目說과 󰡔상서󰡕 洪範 伏生傳의 五事說 가운데 目爲火說을 끌어다가 鸎이란 글자의 二目一八說(두 目자는 離가 둘이라는 뜻이고 하나의 八자는 부리를 가진 새의 유를 뜻하여 艮의 八을 가리킨다고 주장)을 부회하였다. 이덕무는 字書에 인용된 󰡔禽經󰡕의 말과 󰡔시경󰡕 小雅 桑扈篇 毛傳의 注文, 󰡔說文󰡕의 字訓을 끌어와 모기령의 자학이 잘못이라고 비판하였다. 즉 ⓐ 󰡔금경󰡕에는 鸎자가 ‘賏’자를 따르고 있다고 하였으니, ‘目’자를 따른다고 한 설은 잘못이다. ⓑ 󰡔시경󰡕 桑扈篇의 毛傳에 “鶯은 文章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鸎을 鶯으로 쓰는 것은 문장이 있음을 취하여 이름한 것인데, 모기령은 ‘머리에 두 개의 火를 이고 있다’고 고루한 설명을 하였다. ⓒ 󰡔설문󰡕에 “黃離는 倉庚이니 隹가 붙었고 음은 离이라”라고 하였으므로 괘명의 離는 창령의 離를 가차한 것일 뿐인데 모기령은 그것을 새이름에 관계시켰다.

③ 󰡔앙엽기󰡕(3) 「原憲燕伋字子思」에서는 모기령의 󰡔喪禮吾說篇󰡕을 인용하였다. 모기령은 檀弓篇에 기록된 ‘子思가 형수의 초상에 곡할 때 哭位를 만든 일’을 변증하면서 子思는 공자의 손자 孔伋의 字가 옳다고 논하였다. 이덕무는 다시 󰡔사기󰡕 「仲尼弟子列傳」을 검색하여 原思와 燕伋의 자가 子思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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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앙엽기󰡕(4) 「經解目」에서는 모기령이 󰡔論語稽求錄󰡕 서문에서 侍衛 納蘭成德의 󰡔경해󰡕(즉 󰡔皇淸經解󰡕)가 ‘수만 권’이라고 한 것에 대하여, 󰡔경해󰡕는 모두 144종 1,775권 5백책이라고 정정하였다. 이미 무술년에 涵齋 沈念祖가 연경에서 구득하여 와서 皆有窩에 소장해 두어, 자신이 열람하고 서목을 기록하였다고 하고, 그 서목을 상세히 열거하였다.

북학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박지원도 모기령의 인간적인 결함을 비판하였으나 그의 박학고증을 인정하였다. 즉 그는 󰡔西河集󰡕을 보고 모기령이 經典의 뜻을 考證한 데는 그럴싸한 의견이 없지 않다고 보았다. 그래서 중국학자들과 필담을 하는 중에 그의 경학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박지원은 󰡔鵠汀筆談󰡕에서 王民皥와 󰡔논어󰡕의 “태백은 세번이나 천하를 사양했다”는 말의 진위에 대하여 논란하면서 모기령의 설을 인용하였다. 왕민호는 당시 紂王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古公은 附庸國에 불과하므로 태백이 천하를 세 번씩이나 양보했다는 말은 지나치다고 하였다. 그는 주희(《集注》)가 季歷의 아들 昌(주 문왕)에게 태어나면서부터 거룩한 덕이 있어서 太王(古公의 묘호)이 殷을 멸망시킬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풀이한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기령을 雷公이란 별명으로 부르며,54) 모기령을 망령된 사람이라 지탄하였다. “그의 문장도 역시 교할한 백성[刁民]의 疏章과 같은 점이 많습니다. 모기령은 蕭山 사람이어서 그 지방은 글하는 아전들이 많아 글장난을 잘하므로 안목 가진 사람들은 모를 지목하여 蕭山氣를 벗어나지 믓했다고 합니다.” 박지원도 태백의 일에 관하여 의문이 없지 않다고 하였으나, 모기령의 설을 적극적으로 채용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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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銅蘭涉筆󰡕에서 박지원은 毛詩序의 從違 문제를 논하면서 모기령의 설을 분석하였다. 박지원은 玩亭 王士禎이 小序를 없앨 수 없다고 한 설에 동의하였다. 또한 朱彛尊(호 竹垞)의 󰡔經義攷󰡕도 인용하였다. 주이존은 「木瓜」․「子衿」․「野有蔓草」 등의 소서를 주희가 폐기한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런데 박지원은, 주희는 실상 소서를 많이 이용하되 유독 鄭․衛의 시만은 󰡔논어󰡕에서 “鄭聲을 버리라”고 한 말에 근거하여 모두 음탕한 시의 부류에 남겨 두었다고 비판하고, 모기령이 鄭詩는 음탕하지 않다고 한 설에 동의하였다. 다만 박지원은 󰡔宋史󰡕 「儒林傳」에서 王栢이 시경 삼백 편의 산정에 漢代人의 증보가 있었으리라고 한 말이 일리가 있다고 보아, 小序에 漢代人의 傅會가 있었으리라고 유보하였다. 박지원은 또 翰林 彭齡과 太史 高棫生과 함께 段家樓에서 小序의 문제를 힐문한 일이 있었다. 그 때 박지원은 詩篇風謠說을 주장하였는데, 중국인들은 소서를 중히 여기는 편이었다. 박지원은, 馬端臨․毛奇齡․朱彛尊 등에 이르러 주희를 비판하는 것이 극심하였고, 당시에는 아주 時義로 되어 버렸다고 파악하였다.

연경에서 돌아와 박지원은 연암골에서 󰡔열하일기󰡕를 정리하면서 望洋錄과 󰡔혹정필담󰡕을 校閱하다가 <審勢編>이란 義例를 만들었다. 그는 중국에서 터놓고 주희를 반박하는 자를 만나거든 함부로 배척하지 말고 그 속내를 탐색하라고 하였다. 淸朝는 주희를 十哲의 열에 올리고 주희의 도덕을 帝室의 家學이라고 선언하였다. 박지원은 그것을 두고, 淸朝가 중국의 대세를 살펴 先占해서 온 천하 사람의 입을 재갈먹이는 일일 뿐이라고 보았다. 淸朝는 주희의 攘夷 사실을 알고 宋 高宗이 《春秋》의 정의를 알지 믓하였다고 배격하였고, 秦檜가 강화를 주장한 죄악을 성토하였다. 또 淸朝는 주희가 모든 글에 集注한 것을 보고는 곧 圖書集成과 四庫全書 등을 만들고 ‘주자가 끼치신 宗旨’라고 선전하였다. 그리고 사대부의 사상을 억누르고자 고식적으로 주희의 학문을 높여서 중국 선비의 사상을 약체화시키고 지식인들을 문자 교정의 사무에 골몰하게 하였다. 購書의 災殃이 焚書에 비해서 심하기에, 중국의 지식인들은 모기령이야말로 ‘주자의 충신’이라 하거나 “衛道의 공이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박지원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자의 도덕은 마치 해가 중천에 떠오른 것과 같아서 세계 만국이 모두 우러러보는 바이거늘 저 황제가 사사로이 숭배했다 한들 주자에게는 아무런 누가 될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중국의 선비들이 부끄러워하는 것은 대체로 저 황제가 주자를 거짓 높여서 세인을 억누르려 하는 資具로 쓰는 데에 격분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가끔 한두 가지 集注의 그릇된 곳을 빙자하여 백년 동안의 번민하고 원통한 기운을 씻으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주자를 반박하는 자는 실로 옛날 陸氏의 학문을 하는 이와는 차별이 있다.”55)

Ⅴ. 소론계 학자의 漢學 수용과 모기령 경학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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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때 소론계 관각문인이자 학자였던 徐瀅修(1749~1824)는 明淸의 ‘訓詁名物學’을 수용하여 程朱學의 결락부분을 보완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는 그는 모기령의 정주학 비판을 참고로 하였다. 다만 모기령의 논설이 지리한 데로 빠졌다고 억누르기를 잊지 않았다.56) 그는 󰡔西河集󰡕에 제한 글(「題毛西河集卷」)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程朱學은 위로 孔孟에 접하여 오랫동안 斯文의 正脉이어 왔으나 名物訓詁에서는 혹 검색을 잘못하거나 대조를 못한 과실이 없을 수 없으니, 後人이 빈틈을 보수하는 것은 실로 程朱가 후인들에게 바라는 바였다. 비록 주자가 걸음마다 程子를 따랐지만 󰡔주역󰡕․󰡔시경󰡕․󰡔논어󰡕․󰡔맹자󰡕에서는 전적으로 程子를 따른 것은 아니었고, 󰡔대학󰡕․󰡔중용󰡕에서는 程子를 받듬이 아주 돈독하였지만 정정한 것도 아주 많았다. 대개 크나큰 근본을 마음으로 체득하여 이어받았기에, 章次와 文義에서 각자 지닌 의견은 따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程朱에서 나온 말이라면 털끝만큼도 감히 의의를 제기할 수 없게 된 것은 정말로 남송 이후 유가의 말폐이다. 그런데 이 󰡔毛西河集󰡕의 경우는 考證의 巨觀이자 宏博의 上乘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툭하면 매도하는 爭心과 勝氣는 남을 해꼬지하려는 본색을 가릴 수가 없다. 무릇 名理는 천하의 公物이다. 그것을 젠 체해서 立言한다면 本領이 이미 잘못된 것이다. 비록 만가지 말이 모두 다 들어맞는다고 하여도 屠家에서 禮佛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주자는 정말 잘못이 없을 수 없다. 瑚璉에 대해 夏의 것을 殷의 것으로 바꾼 것이라든가, 農家에 대해 班固의 설을 司馬遷의 설이라고 바꾼 것 등은 모두 그러한 따위이니, 누가 잘못이라 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어찌 주자의 주자됨에 손상이 가겠는가! 옛날에 陳大章은 󰡔通鑑󰡕에 익어서, 그 빠지고 잘못된 부분을 찾아 辨駁하는 글을 지어 친구에게 보여주었다. 그 친구가 말하였다. “이렇게 소모할 필요가 없다. 다만 그 밑에 ‘응당 어떠어떠해야 한다’고 註를 다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우주간의 몇몇 大作은 父祖의 遺訓과 같아서, 만일 우연히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단지 우리는 ‘그때 그렇게 기억해두었다’고 해야 하지, 만약 강직하게 변증하려 한다면 立言의 體가 아니다.” 󰡔통감󰡕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經傳 箋注의 경우에랴? 이러한 풍조가 한번 열린 뒤 폐단이 더욱 만연하였다. 근래의 유자로 이름난 자들은 程朱書를 읽으면서 義理의 精純한 곳에 대하여는 한번도 그 울타리조차 엿보지 않고, 人名․地名․度數와 관련된 글구가 한두가지 訛傳된 것을 만나면, 미친 듯 크게 떠들어대면서 종이 몇 장을 써내려가도 그치지를 않고, 이것으로 주자에게 대항하려 하니,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함이 너무 심하다. 그런데 그 기원을 궁구하면 모두 西河가 처음으로 인형을 만든데서 비롯한다. 궁극에까지 논한다면 西河가 어찌 斯文의 賊임을 면할 수 있으랴!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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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형수는 모기령이 斯文의 賊임을 면할 수 없다고 하였고, 정주학의 義理精純處를 살피는 일이 긴요한 학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다른 곳에서는 “吾於尊朱, 自有平生血誠”이라고까지 하였다.58) 그러나 그는 정주학 심성론의 울타리 안에 머물지 않았다. 󰡔시경󰡕과 󰡔상서󰡕의 설에서 名物訓詁學을 중시하고, 古注를 掇拾하는데 공력을 기울였다. 󰡔詩故辨󰡕에서는 毛傳과 集傳을 倂錄하고 古今의 諸說을 취하여 篇旨를 발명하고자 한다는 의도를 밝혔다. 毛傳의 설을 적극 취하여 󰡔詩集傳󰡕의 설을 절충하고자 한 것이었다.

徐瀅修는 1791년 초계문신 친시 및 반유 응제에서 정조가 「俗學」이란 제목의 책문을 내걸었을 때 그 뜻을 헤아려 「俗學十韻排律」59)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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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成(鄭玄) 이후로는 康成같은 이 없어

말만 늘어놓거나 글품 팔아 일생을 마친다만,

이것은 모두 오래된 담벼락에 귀뚜라미 우는 격이라

가을 지렁이마냥 분분하게 빈 굴에 메아리 울릴 뿐이지.

성왕의 공덕은 二程과 朱子의 가르치심 따랐고

王制도 馬融과 鄭玄의 주석 따라 밝아졌도다.

공자 구택에서 古文經이 먼저 나왔고

汲塚의 科斗 문자도 진작에 행하였다.

이런 전통에 어두워 명물에만 빠져서는

새 학문이란 칭찬에 舌耕을 일으켜

丹鉛으로 논함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

이리저리 함부로 黃妳(책)을 평가하다니.

하나라도 합당한 것 없으면 내려깔아 보고

반푼도 못미치면서 큰 소리쳐

經解로 헐뜯지만 모두다 엉성하고

疏家가 인증하는 것도 번번이 식은 죽일 뿐.

우박 보고 아이들 떠드는 말이 우습고

가난뱅이가 옷자랑하니 얼굴이 붉어온다.

습속이 근래에 고질로 되었기에

영명한 조칙으로 표준 내리시길 기다리노라.

康成以後無康成, 飣餖賃傭了此生.

渾是寒蛩唫老壁, 紛如秋蚓響空坑.

聖功已有程朱訓, 王制亦因馬(原註 : 馬貴與)鄭(原註 : 鄭漁仲)明.

孔宅古文先我出, 汲墳科斗自前行.

迷茫墜緖惟名物, 僥倖新譽起舌耕.

甲乙丹鉛何太易, 縱橫黃妳妄加評(原註 : 昔人呼書爲黃妳, 以爲老人耆書如穉子之須妳.)

一無中有尙低視, 半不及他敢大聲.

經解訾謷皆粗跡, 䟽家援引每陳羹.

羣兒咻雹言堪笑, 窮子誇衣面發騂(原註 : 羣兒咻雹, 窮子誇衣, 皆出錢虞山語.)

習俗邇來成痼弊, 會須明詔目示權衡.

서형수의 조카 徐有本도 楊愼과 毛奇齡 이하 明淸의 諸儒가 考證之學에 自托하여 “輒欲凌駕前賢, 高視千古”하려는 태도를 비판하였다.60)

徐有本의 아우 徐有榘는 「與李愚山論尙書古文書」에서 역대 문헌을 조사하여 고문상서의 종류를 나열하고, 梅賾本 고문상서가 僞作임을 논하였다. 그는 모기령의 󰡔고문상서원사󰡕가 고문상서를 변호하려고 󰡔한서󰡕 儒林傳을 인증한 내용이 잘못임을 반박하였다.61) 서유구는 정조의 詩經條問에 條對에서 1727년(雍正 5)에 청에서 간행된 󰡔欽定詩經傳說彙纂󰡕(20권)을 인용하는 등 청의 학술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정조 때의 󰡔四書輯釋󰡕 登刊과 관계하여 仲父 徐瀅修에게 보낸 서한에서, 청의 欽纂本 등을 참고로 ‘十三經傳說’을 이루어야 한다는 의견을 피로하였다. 즉 󰡔易󰡕은 󰡔折中󰡕을 이용하고, 󰡔詩󰡕․󰡔書󰡕․󰡔春秋󰡕는 󰡔彙纂󰡕을 이용하여, 三禮는 󰡔義䟽󰡕(欽定本)를 이용하여 더욱 檃栝하고, 󰡔孝經󰡕․󰡔爾雅󰡕도 그런 방식을 준용한다. 󰡔대학󰡕․󰡔중용󰡕은 󰡔禮記󰡕로 되돌려 넣고, 󰡔左傳󰡕․󰡔穀梁󰡕․󰡔公羊󰡕은 각각 單行한 뒤, 각각 󰡔註䟽󰡕를 前編으로 삼고 󰡔傳說󰡕을 後編으로 삼으며 諸儒의 箚解를 망라할 것을 권하였다.62) 그는 정주학을 회복하기보다, 청조의 신 학술을 받아들여 절충적인 주석서를 편찬하는 일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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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소론계 江華學派의 학자 石泉 申綽은 三次故를 저술하여 古訓을 망라하였다. 그는 당대의 학술이 西河 毛奇齡에 쏠리고 있다고 하여 그 편향성을 비판하되, 주자학이 아니라 樸學(朴學)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이를테면 그의 󰡔시차고󰡕는 毛詩說 이외의 三家詩說을 취록하였으며, 齊魯韓의 어느 설에 속하는지를 밝히려고 하였다.63) 그런데 그는 唐의 劉安世가 읽었다는 齊詩, 董逌의 󰡔藏書志󰡕에 있는 齊詩 6권, 豊坊이 발견했다는 子貢詩와 申培詩가 모두 위작이라고 하였다.64) 豊坊本 자공시와 신배시가 위작임을 단정한 것은 모기령의 설을 참고한 결과라고 짐작된다. 그는 古注를 광범하게 수집하여 경전의 원뜻에 접하고자 하는 일을 경학 연구의 과제로 삼았다. 이 때 경문을 改易하지도 않고 己見의 피로를 극력 억제한 일은 모기령이 綱領처럼 제시한 治經 태도와 통하는 면이 있다.

신작 󰡔시차고󰡕의 본편(「詩經故訓及異議」) 5책은 注疏本의 체재를 따라 風雅頌을 배열하고 章句를 나누되, 篇名은 注疏와는 달리 각편의 앞에 두었다. 그는 小學類에서 고훈을 인용하고 󰡔예기󰡕․󰡔좌전󰡕․󰡔사기󰡕․󰡔한서󰡕․󰡔후한서󰡕․󰡔문선󰡕을 2차로 인용하였으며, 다시 경사자집․잡가의 서적을 두로 인용하였다. 「詩經異文序」에 보면 그는 󰡔시경󰡕의 異文이 있게된 이유를 古今․假借․隸變․音轉․形轉․義轉․涉誤․師讀․俗寫․方音등 10族으로 나누어 보았다. 雅學을 토대로 하는 박학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또 그는 󰡔역차고󰡕(8권 3책)를 편찬하여 漢注를 수록하되, 󰡔本義󰡕가 권두에 실었던 易圖를 전혀 싣지 않았고 ‘大衍之數’의 注에서도 선천도․후천도와의 관련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모기령의 송역 비판설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신작의 樸學도 훈고적 과심에 머문 것이 결코 아니었다. 경전의 원뜻을 파악하고 그것을 인간학에 연결시키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宋學을 ‘解體’하려 한 것이었다. 신작은 ‘次故’의 작업에서 박잡한 인증례의 나열로 그치지 않고 古註를 대비하여 나름대로 正義를 남겨두려 하였다. ‘以故訂故’를 통해 經義가 저절로 드러나게 하려한 것이 그의 治學 방법이었다.

Ⅵ. 노론계 학자의 宋學 재해석과 모기령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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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조의 초계문신을 거쳐 19세기 전반의 京畿學人으로서 활발한 저술을 하였던 洪奭周(1774~1842)는 宋學의 경세적 요소를 부각시키고 발전시키려는 과정에서 모기령을 비판하였다.

홍석주도 당대의 다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모기령의 인격을 비판하였다.65) 하지만 그는 모기령의 경학설을 내재비판하여 그 고증학적 연구성과를 수용한 면도 있다. 즉 그는 󰡔주례󰡕가 周公의 작이 아니라고 하여 󰡔주례󰡕를 현실에 적용할 수 없다고 보았는데, 󰡔주례󰡕의 작가에 관한 그 설은 모기령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었다. 그는 󰡔주례󰡕의 傳授 관계가 불분명하여 劉歆 이전에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고, 󰡔주례󰡕의 제도에 의심나는 점이 많으며, 그 내용이 다른 경전과 어긋나는 점이 많다고 하였다.66) 홍석주는 초계문신 시절의 課試 「今古文辨」 답안에서, 25편을 僞古文이라고 보는 설에 반대하였다. 그는 주희가 의심한 고문은 經의 본문이 아니라 「孔安國傳」이었고, 한두 구절의 補綴은 있었겠지만 25편 전체가 위작일 리는 없다고 하였다.67) 이것은 명백히 모기령의 󰡔古文尙書寃詞󰡕 설을 수용한 것이었다. 1824년에 이르러 홍석주는 󰡔尙書補典󰡕을 저술하면서 금고문에 대한 종래의 설을 다소 수정하여, 「舜典」 서두의 28자가 隋文帝 때의 위작이라고 논하기에 이르렀다.68) 그러나 그는 󰡔상서󰡕의 금문과 고문이 모두 불완전하므로 󰡔상서󰡕의 모든 구절을 완전하게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으며, 성인의 가르침이 많이 들어 있고 六經에 포함되어 있던 고문을 전면 부인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1827년에 정약용과 금고문에 대하여 논쟁하면서, 선왕의 교훈이 담겨 있어서 世敎에 도움이 되는 고문을 그대로 남겨두자고 하였다.69) 그는 모기령의 고문상서설에서 일정한 영향을 받아, 만년에 이르도록 부분적인 수정론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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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홍석주는 근본적으로는 청의 고증학적 방법론을 비판하였다. 즉 古書를 이해하기 위하여 名物訓詁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고증학이 경전의 大義와 무관하게 고증 자체에 치중하는 점을 비판하였다.70) 그리고 명물훈고의 방법은 이미 송학 속에 내재하여 있었으며 그것을 계승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보았다. 그는 󰡔鶴岡散筆󰡕의 권5와 권6의 상당한 지면을, 모기령 경학설의 결함을 논하는 데 배당하였다. 즉 ① 모기령은 堯의 행적을 簒逆으로 보았으나, 이것은 異端의 짓이다. ② 모기령은 명청 교체기의 義士들을 狂惑하다고 평하였는데, 이것은 완전히 그릇된 것이다. ③ 모기령은 《春秋》 이전에 五倫에는 父․母․兄․弟․子만 있었고 君臣․夫婦의 윤리가 없었으며 오늘날의 오륜은 전국 이후에 맹자가 처음 언급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先賢을 모욕하고 經訓을 그르치는 망발이다. ④ 모기령은 古訓이나 經義를 빌려 私見을 강변하고 고훈의 인용에도 오류가 있으며 朱子書는 아예 변조까지 하였는데, 그것은 心術이 不正한데서 나온 것이다. 홍석주는 모기령이 畢沅과는 달라 程朱 이하의 先賢을 비난하였다고 하되,71) 역시 선현을 ‘侵詆’하기를 능사로 삼아 ‘醜悖無倫’하다고 혹평하였다.

홍석주는 모기령의 인간적 결함에 초점을 두어 그를 비판하지는 않았다. 또한 모기령 경학설의 眞僞를 화두에 올리지도 않았다. 홍석주는 송학의 義理實用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였기에, 그러한 정신을 결여한 번쇄한 고증적 방법을 부정하였던 것이다.

홍석주와 인척 관계에 있었고, 안동김씨 노론계의 가학을 이은 金邁淳(1776~1840)도 송학의 의리실용학을 중시하고, 모기령 이하 고증학의 治學 방법을 극력 비판하였다. 그는 37세 때인 1812년에 󰡔朱子大全箚疑問目標補󰡕를 완성한 것으로 저명하다. 만년에는 경학 관련 수필집인 󰡔闕餘散筆󰡕을 적어, 誠篤의 학문 자세를 다잡았다.72) 즉 그는 “배움이란 다름 아니라 善을 실천하는 것”이며, 善의 실천은 “반드시 탐구하고 강습하며 오랫동안 쌓고 배양하여 道理가 눈에 익숙해지고 취미가 자신의 몸에 스며들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致知存心이 力行보다 앞에 놓인다고 보아 그것을 ‘學의 體’라고 하였으며, 일마다 中節之和를 얻는 것을 ‘學의 用’이라고 하였다.73) 그는 주자학을 맹신하지는 않았고 의리의 개념을 확장시켰으며, 新注를 부분 수정하였다. 하지만 章句訓釋의 의문점을 강론하는 일은, 그로서는 결국 體用을 겸하고 條理를 아우르는 진정한 학문에 대해 방편적 의미밖에 지니지 않았다. 장구훈석의 眞僞를 화두에 올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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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매순은 당시의 학자들이 걸핏하면 漢儒의 업적을 칭찬하고 주희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古註를 순수하게 이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주희가 존숭하던 第一義的인 것을 도외시하여, 결국 송학도 아니고 한학도 아니라 私見에 빠지고 말았기에, 實事求是의 진정한 학문 태도를 상실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74) 그로서는 解經의 어려움은 訓詁章句에 있지 않고 立言宗旨를 살피는 데 있었다. 그래서 정약용에게 보낸 서한에서, “明淸 이래로 才氣가 좀 있다고 뽐내어 朱子를 專心으로 섬기려 하지 않는 자들은 대체로 毛氏나 鄭玄을 떠받들고 스스로 古雅하다고 하면서, 章句集註는 功令俗學에게나 관계한다고 결론짓고 오만하게 깔보는 것을 高致하다고 여긴다. 그 心志와 眼界가 일찌감치 偏蔽되어 공정하지 못하니, 어찌 虛明하여 金鐵珉玉의 분간에서 또렷히 오차가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우려하였다.75) 이것은 정약용의 治學이 속학의 폐습을 띠지 않았다고 칭찬하는 과정에서 한 말이지만, 결국 章句集註를 기본으로 하고 宋學의 治學 방법을 계승하는 것이 진정한 학문이라는 평소의 지론을 피로한 것이었다. 그가 四庫書目을 열람하고는, 그것이 程朱를 游辭陰攻하였다고 경계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76)

홍석주는 구체적으로 모기령의 경학설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명청 이래로 才氣가 좀 있다고 뽐내어 朱子를 專心으로 섬기려 하지 않는 자들’을 비판하였을 때 모기령도 염두에 두었음에 분명하다. 그는 ‘淑人心, 致時用’이 학문의 지향처라고 보아, 顧炎武도 만년에 자신의 학문을 후회하였다고 하였고, 모기령이나 閻若璩․胡渭는 ‘往而不返’한 자라고 비판하였다.77) 심지어 그는 고의로 모기령의 경학설을 무시하였다. 역학과 관련하여 “近世說易之士, 惟李光地一人, 可以上下, 餘皆不及也”라고 논단하여 모기령의 󰡔중씨역󰡕을 거론하지 않은 것은 그 일례이다.78)

홍석주와 김매순의 예를 통하여, 노론계의 이른바 京畿學人이 義理之學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모기령 이하 명청의 고증적 경향의 학자들을 경계하거나 무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Ⅶ. 丁若鏞의 모기령 경학연구법 참조와 신 경학방법론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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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 19세기 초 남인 계열의 지식인들도 모기령의 경설을 숙지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정약용과 문학적 실천 면에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洛下生 李學逵도 󰡔因樹屋集󰡕에 수록된 尺牘 가운데 한 편에서 모기령(「詩說」)의 ‘睍睆黃鳥’ 설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그는 󰡔詩集傳󰡕이 그것을 ‘淸和圓轉之意’로 풀이한 것은 반드시 근거가 있었을 것이므로 󰡔시집전󰡕의 설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79)

그런데 남인 지식인 가운데 모기령의 경설을 가장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그 경학연구의 방법을 일정하게 채용한 인물은 茶山 丁若鏞(1762~1836)이다. 그는 초계문신 시절에 경학 강의에 참여하여 주희의 설과 주희 비판의 설을 대조 논단하는 일을 한 일이 있어, 그 때부터 모기령의 설을 철저히 분석하기 시작하였던 듯하다.

정약용은 32세때 지은 「古詩二十四首」의 제21수에서 “천하에 터무니없는 남자라면 나는야 모기령을 보았고 말고. 자기 보루 드높이 쌓아 올리고, 주자를 향해 활을 당기다니. 샅샅이 찾고 뒤져 흠 하나 잡아선, 이리저리 날뛰는 게 원숭이같았다. 마음 바르고 말도 공손하다면, 경전을 논하지 못한단 말인가. 왕개미가 큰 나무를 흔들어본들, 잎사귀 하나라도 떨어진 적 있는가(天下妄男子, 我見毛奇齡. 突兀起壁壘, 關弓對考亭. 窮搜摘一疵, 踊躍如猴정. 平心遜其詞, 獨不能談經. 蚍蜉撼大樹, 一葉何曾零)”80)라고 하였다. 모기령은 翰林院 檢討官으로 있을 때 妾 曼殊를 위해 「曼殊藏銘」과 「曼殊別誌書罇」을 남겼는데, 정약용은 「跋曼殊傳」을 지어 “風情의 妙를 극도로 서술하고 孅濃한 자태를 다 갖추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넋을 잃고 간장을 녹게 하므로 도저히 똑바로 볼 수가 없다”고 비난하였다. 모기령은 만수를 糟糠之妾이라 불렀고, 自撰墓誌銘에서도 그녀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정약용은 또 모기령이 지은 「連廂詞」가 체제는 󰡔西廂記󰡕를 닮고 글은 󰡔金甁梅󰡕를 닮았으니, 儒者로서 어찌 이런 것을 지을 수 있었단 말이냐라고 개탄하였다. 「連廂詞」란 모기령이 세상의 풍속을 바로잡고 名敎에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해 지었다는 「擬連廂詞」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정약용은, 모기령이 “망녕되이 주자를 공박하였으나 이는 왕개미가 큰 나무를 흔들려고 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고 논하였다.81) 인간과 학문과 시문을 불가분리의 것으로 보는 입장이 조선후기 학자-문인의 지배적 문학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이 비판한 모기령의 「曼殊別誌書罇」은 청초의 張潮가 편찬한 󰡔虞初新志󰡕에 수록되어 있어서 조선후기에 널리 읽혔다.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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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약용은 모기령의 역학이론을 비판하여 「題毛大可子母易卦圖說」을 지었다. 정약용은 󰡔左傳󰡕의 일부 卦 해석과 虞翻의 역학을 개괄하여 推易․物象․互體․爻變의 법칙을 새로 해석하고 독특한 十二辟卦說을 운용하였다. 즉 󰡔周易四箋󰡕에서 易卦를 乾坤과 12벽괘와 50衍卦로 나누고 12벽괘를 다시 四時之卦와 再閏之卦로 나눔으로써 程伊川의 乾坤二辟卦說이나 朱子의 十辟卦(乾坤除外)說에 반대하되, 경방의 分卦直日法은 취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그는 종래 역학자의 推易․物象․互體․爻變說을 비판하였는데, 모기령의 子母易卦說도 함께 비판하였다. 정약용은 모기령이 推移의 의의와 爻變의 법칙을 모른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모기령은 宋易을 극복하는데 공을 기울였으니, 정약용의 역학설은 모기령의 역학설을 일정하게 수용한 면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정약용의 역학은 송대의 관념론이나 도가 사상에 의해 훼손되기 이전의 儒家易을 탐구하고자, 독자적인 推易․物象․互體․爻變說을 수립하여 역해석 전반에 적용하였다. 그는 易의 생활세계적 기반과 의미를 탐색하였으며, 개인과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고 사회체제를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이념을 易學에서 발견하고자 하였다.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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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약용은 梅賾本 고문을 위고문이라고 보아, 모기령의 󰡔古文尙書冤詞󰡕를 비판한 󰡔梅氏書平󰡕을 저술하였다.84) 모기령은 고문상서 경과 공안국 전을 구별하여 東晉 때 梅賾이 헌정한 것은 공안국 전이었다고 하여, 고문상서의 경이 위작이 아니라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정약용은 󰡔매씨서평󰡕에서 그 설을 摘記하고, 臆說이라 비판하였다. 그 뒤 1827년에 洪奭周가 소장한 閻若璩의 󰡔古文尙書疏證󰡕을 빌어보고 자신의 󰡔매씨서평󰡕을 없애도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다만 염약거의 저술이 義例를 갖추지 못하고 眞古文과 僞古文을 뒤섞었으며 上下를 착간하고 禮樂․刑政․地理․曆法 등을 애매하게 처리하여 초학자가 이치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여겼다. 즉 정약용은 염약거의 󰡔소증󰡕이 吳棫 이후 처음으로 위고문을 변증한 주요한 업적이지만 모기령이 여전히 舞弄하고 宋鑑이 󰡔尙書考辨󰡕을 저술하여 疊牀하였던 것은 오로지 󰡔소증󰡕의 義例가 정돈되어 있지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閻氏古文尙書疏證鈔󰡕를 작성하고, 다시 1834년에는 유배지에서 작성한 󰡔古訓蒐略󰡕과 󰡔尙書知遠錄󰡕을 합하여 󰡔尙書古訓󰡕을 엮었다. 정약용은 관련 자료의 校合과 변증에서 합리적인 태도를 견지하였고, 體例 연구법을 활용하여 書序와 상서 경문의 原義를 탐구하려 하였다. 󰡔상서고훈󰡕에서는 考異, 考誤, 考證, 考訂, 考辨, 論曰․訂曰, 衍義 등 표출어를 사용하여 訓詁와 재해석을 시도하였다. 그런데 그가 書序의 完缺과 眞僞를 분별하고 원의를 추정할 때에 體例硏究法을 원용한 것은 모기령 이래 청대 문헌고증학의 방법을 참조한 측면이 있다.

(3) 정약용은 「題毛奇齡喪禮吾說篇」을 지어 모기령의 三禮에 대한 기본시각을 논박하였다. 그는 󰡔周禮󰡕의 문체가 아주 고고하므로 결코 춘추시대 이후에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것은 󰡔주례󰡕를 전국시대에 지어진 책이라 논하였던 모기령의 설을 반박한 것인데, 현대의 통설과는 견해가 다르게 되었다. 또 󰡔禮記󰡕에 대하여도, 그것이 공자 이후에 子游․子夏의 문인으로 公羊․穀梁같은 무리가 각각 옛날에 들은 것을 기술한 것이라고 하여, 모기령의 漢初成立說을 부정하였다. 모기령의 경학설이 종전의 학설을 뒤집는 懷疑에 철저하였던 데 비하여, 정약용은 尙古와 衛道의 정신에서 󰡔周禮󰡕를 주공의 작으로 존숭하고 󰡔禮記󰡕를 선진시대의 저술로 소급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4) 정약용은 󰡔시경󰡕 국풍과 二雅를 ‘군주를 풍간하는 시’로 규정하였다.85) 그런데 그가 이렇게 시경을 ‘諫書’로서 파악한 것은 모기령의 영향을 받은 면이 있다. 1791년에 반급된 정조의 시경조문에 답한 정약용의 條對86)는 주희의 鄭風淫詩說을 비판하는 모기령의 설을 수용하였고, 또 󰡔시집전󰡕 논리의 비판 방식도 모기령으로부터 얼마간 영향을 받았다. 다만 모기령은 諫書說을 더욱 논리화하지는 않았고, 陳詩觀風說을 고집하여 주희의 鄭風淫詩說을 비판하는 데 그쳤다. 이에 비하여 정약용은 󰡔시경강의보유󰡕에서 국풍과 二雅의 ‘諷人主’ 양식을 분류하였다. 또한 󰡔시󰡕 내용이 지닌 풍자의 철저성을 들어 “시인(시경시편의 작자)의 직필이 󰡔춘추󰡕보다도 더 엄하여, 자기 나라의 나쁜 일도 감추지 않았고 강한 자 앞에서 움츠러드는 일도 없다(詩人直筆, 嚴於春秋, 不諱國惡, 不吐彊禦)”고 하였다. 이처럼 풍자가 엄하였으므로 연회 때나 향당에서 국풍의 시들을 진설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 정약용의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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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국풍의 시들은 ‘諷人主’의 시로 규정하고 小序의 美刺說을 취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小序를 신봉한 呂祖謙(呂氏家塾讀詩記, 四部叢刊本 권5 ‘桑中’)은 풍자의 방식을 ① 직접 비판하는 것(‘新臺’ 등) ② 은근히 풍자하는 것(‘君子偕老’ 등) ③ 사실을 서술하기만 하고 한마디도 풍자의 말을 덧붙이지 않되 뜻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桑中’ 등)의 셋으로 나누었다. 주희는 小序가 어느 때 어느 사람을 美刺한다고 한 설에는 견강부회가 많다고 보았고, ‘옛일을 진술하여 이제를 풍자한다’(陳古刺今)는 원리를 소서가 무책임하게 사용한 것은 ‘온유돈후’의 가르침을 해친다고 논하였다.87) 정약용은 시편을 실제 비평할 때 대부분 小序와 新注를 그대로 따랐다. 다만 그는 주희가 ‘陳古刺今’설을 배격한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원리를 알아야만 시를 이해할 수 있다고까지 하였다. 본래 小序의 ‘陳古刺今’은 시경의 편차가 시대순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전제에서 해당 시기의 王公이 善行을 한 기록이 없고 나쁜 시호가 붙여져 있을 때 적용하는 원리였다. 정약용은 시편의 世次와 관계없이 ‘陳古刺今’설을 적극 도입하려 하였다.88)

(5) 한편 정약용은 모기령의 樂論이 체제를 갖추지 못하였고, 緯家의 雜法을 청산하지 못하였으며, 史籍의 문장을 임의로 끌어오고, 六律을 五聲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모기령이 지은 󰡔聖論樂本解說󰡕․󰡔皇言定聲錄󰡕․󰡔竟山樂錄󰡕 등의 樂論 數種을 유배지에 가지고 가서 그 내용을 심리하였다.89) 그리고 󰡔樂書孤存󰡕을 집필하여, 五聲의 체계인 五聲九差圖와 十二律의 체계인 三紀六平(紀之以三, 平之以六)을 양분하고, 독특한 三分損益論을 마련하였다.90) 그는 종래 律을 吹律(吹律定聲)로 해석해 오던 관점을 비판하고, 律을 差等之約例로 규정하였다. 한편 聲은 악기를 두드린 뒤에 나오는 소리로서, 율의 체계에 의하여 악기를 제작한 이후에 오성을 분별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 설에 따르면 律은 樂家의 先天, 聲은 樂家의 後天으로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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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정약용은 󰡔論語古今註󰡕에서 新舊註를 審定하면서, 일본의 太宰純의 󰡔論語古訓外傳󰡕과 함께 모기령의 論語說을 가장 많이 거론하고 辨駁하였다. 그리고 󰡔孟子要義󰡕에서도 청대 학자 가운데 모기령의 설을 가장 많이 인용하였다. 󰡔大學要義󰡕에서는 모기령의 설을 서너 곳에서 반박하였으나, ‘고본대학’을 신봉하였다는 점에서는 모기령의 견해와 같았다. 󰡔中庸自箴󰡕에서도 정약용은 모기령의 설을 간간이 인용하였다.91)

만년에 이르도록 정약용은 모기령에 대한 반감을 삭이지 못하였다. 1821년에 두 번째로 춘천여행을 하면서 기록한 󰡔汕行日記󰡕에 보면, 4월 21일에 史外倉92)의 放量을 목격하고 지은 「곳마을에서 잠시 쉬며」(倉村小憩)라는 시93)에 自註를 하면서 일부러 모기령을 언급하였다. 즉 그 날 양곡을 푼다고 해서 산간 백성이 수십여 명 모였으나, 官倉에 곡식이 결손된 것이 많아 그저 이름만 방량한다 하고 결손을 彌縫하는 데 불과하다고 정약용은 비판하였다. 정약용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로부터 “중국 蕭山의 縣吏는 법령을 제마음대로 주물렀다”고 한 구절을 인용하여, 춘천도호부의 아전들이 방량을 빙자해서 장부상의 결손분을 메꾸려 하는 작태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鵠汀 王民皥가 “모기령에게는 蕭山氣가 있다”고 비판한 말을 함께 따왔다.94)

정약용은 모기령이 程朱와 背馳하기를 甘心하여 ‘狂悖偏隘, 非復常理’95)하였음을 공박하고, 그의 경학설이 ‘체제’를 갖추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정약용의 경학에 끼친 모기령의 영향은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다. 그가 樂論에 이르기까지 六經=六藝의 경학설을 구비하고자 하였던 데는 역시 모기령과의 대결의식이 없지 않았다.96) 정약용은 「喪禮四箋序」에서 “以經證經, 期得聖人之旨”라 하여, 경문의 실제 용례로 경문을 해석하는 경학방법론을 수립한 바 있다. 그 방법론은 바로 송학의 관념론적 논리를 배격하고자 모기령이 주장한 ‘以經解經’의 방법론과 일정한 관련이 있는 듯이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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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정약용이 自撰墓誌銘을 지어 경학상의 創新을 특기하고 金邁淳 등 당대인의 예찬을 부기하여 둔 것은, 비록 심리의 正不正은 전혀 다르다고 할지라도, 모기령이 묘지명을 자찬하고 당대인의 평가를 부기한 방식과 흡사하다.

Ⅷ. 마 무 리

18세기 중엽에 모기령의 경학설이 소개된 이후 조선조의 지식인들은 그 경학연구 방법에 자극을 받되, 그의 治學의 근본지향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였다. 그런데 朴趾源은당시 淸朝가 주자학을 聖學으로 내걸어 학술사상을 통제하던 상황이기에 모기령 이후 발달한 고증학이 주자학을 비판하는 것은 곧 청조에 대한 소극적 저항의 의미를 지녔다고 논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견해는 소수에 불과하였다.

정조는 會極之妙를 살려 정국과 학술계를 통합하고자 하였다. 주자학의 정통성을 확인하고자 모기령의 주자학 비판을 반격하였고, 지식계층의 학문을 大用의 學으로 수렴시키고자 모기령 이후 청대 고증학의 경학논의를 경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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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李德懋는 일부 모기령의 경설을 그 眞僞에 따라 취사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기령이 입만 열면 程朱 이하 모든 송인들의 죄악을 비판한 것은 바로 자신이 죄악의 구덩이에 빠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盎葉記󰡕(2)에 「榕村衛程朱」 조항을 두어, 李光地가 “지금 사람들은 程朱의 글을 읽으면서도 정밀 순수한 도리를 말한 곳에 대하여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지명․인명이나 제도가 우연히 소루하거나 틀리게 기재된 데 대해서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큰 일로 삼고서 미친 듯이 소리치고 크게 외치며 여러 폭의 종이를 소비해 마지 않으니, 비록 그 말한 것이 옳다 하더라도 사람을 짜증나게 한다”고 한 말에 동의하였다. 이광지의 비판은 바로 명의 楊愼과 毛奇齡을 두고 한 말이라고 보았다. 모기령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조선 경학계에서 주류를 이루었다. 洪奭周와 金邁淳 등 노론계 京畿學人이 義理之學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모기령 이하 명청의 고증적 경향의 학자들에 대하여 경계한 것이 그 정통 계보에 속한다. 丁若鏞도 한학과 송학을 두루 연찬하여 모기령의 경학설을 비교적 적극적으로 참고하되, 명물훈고의 번쇄한 학문을 배격하고 송학이 지녔던 義理之學의 내용을 經世學의 방향으로 더욱 강화시켰다. 다만 18세기 말에 모기령의 경설이 알려진 이후, 주희의 新注를 맹신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따라서 학자에 따라서는 한송의 절충론을 제안하거나, 송학의 보완을 위하여 한학의 훈고적 방법론을 채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조선후기 경학사의 흐름은 일본의 그것과 유사한 면도 있고, 상이한 면도 있다. 모기령의 경학은 일본에서 고증학파가 성립할 때 상당히 참고로 되었고, 학문의 분화가 일어나 用不用의 문제와 분리된 ‘眞僞論’이 대두되는데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에 비하여 조선 지식인들은 義理之學의 기본 전제를 결코 폐기하지 않았으므로, 의리학의 토대 위에 고증적 방법을 원용할 때 모기령의 경학론이 일부 참고가 되는데 그쳤다.

일본에서는 1804년(일본 文化 원년)에 󰡔九經談󰡕을 출판한 大田錦城(1765~1825)은 모기령의 경학설을 크게 참고하여, 일본내 고증학파를 열었다. 그도 모기령의 󰡔古文尙書寃詞󰡕에 대하여는 그 强辯을 증오하였으나, 河圖洛書와 太極圖를 비판할 때는 朱彛尊의 설과 함께 모기령의 설에 크게 의존하였다. 󰡔九經談󰡕에는 모기령의 󰡔西河全集󰡕이 顧炎武의 󰡔日知錄󰡕, 胡渭의 󰡔大學翼眞󰡕, 朱彛尊의 󰡔經義考󰡕, 余蕭客의 󰡔古經解鉤沈󰡕, 閻若璩의 󰡔尙書古文疏證󰡕, 全謝山의 󰡔經史問答󰡕, 徐乾學의 󰡔澹園集󰡕, 紀昀의 󰡔四庫全書簡明目錄󰡕, 江聲의 󰡔尙書集注音疏󰡕, 王鳴盛의 󰡔尙書後辨(後案)󰡕 등과 함께 인용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도 모기령의 설은 대학․중용․논어․시․서․좌전․역의 경설에 두루 걸쳐 있다.97) 물론 大田錦城은 고증학이 義理의 當否를 논하지 않고 引據의 해박만 목표로 한다는 이유에서 고증학을 비판하고 송학과의 절충을 주장하였으며, 만년에 이를수록 踐履之學으로서의 實學을 중시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 이르러 일본에서는 학문의 분화가 일어나 用不用의 문제와 분리된 ‘眞僞論’이 대두되고, 고증학은 ‘허학’으로서 실증적 진실추구의 학문으로 기능하게 된다. 모기령의 경학론은 일본에서 고증학파가 독자적으로 성립하고 학문에서 진위론이 분화하는 때에 일정한 참고가 되었던 것이다. 1800년(寬政 12, 경신)에는 山本北山이 모기령의 󰡔經問󰡕(西河合集經問) 9권에 訓點을 치고 送り假名를 붙인 것을 蔓延堂에서 목판 간행하여, 그것이 널리 행하였다. 그 뒤 1829년(文政 12, 기축)에는 猪飼彦博이 모기령의 󰡔경문󰡕을 축조 비판한 󰡔西河折妄󰡕이 駿府 采選亭에서 活版 간행되었다.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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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는 모기령의 경학설을 체계적으로 논박한 성과는 집적되지 않았다. 하지만 모기령의 경학연구 방법론은 조선후기의 지식인이 독자적인 학풍을 형성할 때에 일단 초극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되었다. 모기령의 경학은 비록 당대의 정치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관심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선후기 지식인들은 모기령의 경학이 송학 비판 자체만을 목적으로 삼았다고 경계하였다. 또한 그것은 청대의 고증학에 대한 경계 혹은 평가유보로 이어졌다. 조선후기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고전의 訓詁考證을 통하여 經學史學의 이론을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응용하였고, 독서와 박학을 토대로 실증적 귀납적 연구를 수행하되 송학 이래의 실천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일본에서 用不用의 문제와 분리된 眞僞論이 대두된 것과는 사정이 달랐던 것이다.

http://blog.empas.com/sacheon/16710967-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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