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주]한글날을 맞아 아래 주소창에서 한글의 우수성을 다시 요약해 본다.

1445년 4월 《용비어천가》의 완성은 시사하는 바 크다. 언문이라 비하하는 훈민정음으로 125장에 달하는조선왕조의 대서사시를 창작하여 제시함으로써 국운을 건 세종의 도전과 모험은 반대론자들의 분분한 불평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더이상 다시 반론을 제기했다가는 역적의 반열에 오를지도 모르는 분위기가 되었다. 드디어 1446년(세종 28) 9월에 훈민정음이 완성·반포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훈민정음 제정의 경과도 살펴본다.

원문 http://blog.paran.com/kydong/27416819

[참고]최만리 등의 반대상소

http://blog.paran.com/kydong/27693095

한글창제가 독창적이고 과학적이라는 근거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한자의 음절분석은 성모와 운모 2분법인데, 우리말을 초성 중성 종성 3분법으로 파악한 점.

2.초성의 창제 원리는 오행 사상을 바탕으로 발음기관의 조음 위치에 따라 아음, 설음, 순음, 치음, 후음의 오음으로 확정하고 "ㄱ , ㄷ, ㅂ, ㅅ, 여린히읗"을 기본 글자로 하여 가획하고, 따로 3개의 음운[옛이응, 반치음, 반설음 'ㄹ']을 추가하여 17자를 만듦. 경음[된소리]은 각자병서하였으나 17자에는 포함하지 않음.

이를 도표화하면 아래와 같다.

아음

설음

순음

치음

후음

전청

여린히읗

차청

전탁

여린쌍히읗

불청불탁

옛이응

ㄴ,

ㄹ(반설음)

반치음

[초성 17자중 현행 한글에서 소멸된 문자는 여린히읗, 반치음, 옛이응이 있으나 엣이응은 ㅇ 형태로 바뀌어 초성에서는 음가를 지니지 않고 종성에서는 음가를 지님.]

3. 중성의 창제의 원리는 음양이론을 바탕으로 우주의 에센스인 삼재(三才), 곧 天地人 [아래아, ㅡ, ㅣ]세 글자를 기본글자로 하여 순열 조합하여 11자를 제정함.

아래아, ㅏ, ㅑ, ㅓ,ㅕ, ㅗ, ㅛ, ㅜ, ㅠ, ㅡ, ㅣ

[중성 11자중 아래아자 소멸.]

4.종성 음운은따로 문자를 만들지 아니하고 초성을 다시 쓴 점.

그것도 팔종성으로 제한한 점.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실제로는 7종성임: ㅅ은 종성에서 ㄷ으로 발음됨

〈훈민정음 제정의 경과〉

세종의 훈민정음 제정이 언제부터 구상되었고 착수되어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는지에 대하여는 기록이 전혀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의하면 세종 25년 12월조에 “이달에 상께서 언문 28자를 친히 제정하였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라고 기록했을 뿐, 그 경과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다. 다만, 처음에는 세종 단독으로 구상하였다 하더라도 여러 신하의 중지(衆智)를 모아 상당한 기간에 걸쳐 추진되었을 것으로 추측될 따름이다.

이리하여 훈민정음이 제정되자 문자 창제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집현전과는 별도로 궁중에 언문청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의 보급과 이에 부수되는 문헌의 간행 등을 추진하는 한편, 해례와 같은 원리면의 연구도 여기에서 나온 듯하다.

이후 훈민정음과 관련된 기사는 44년 2월 《운회(韻會)》를 언해하고 같은 달에 최만리(崔萬理) 일파의 반대 상소에 부닥친다. 반대의 골자는 한자를 버리고 새 문자를 만듦이 사대모화(事大慕華)에 어긋날 뿐 아니라 선인이 만들어 놓은 운서를 뜯어 고치고 언문을 다는 것이 모두 무계(無稽)한 짓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45년 4월 《용비어천가》가 완성되고, 이듬해 3월 《석보상절(釋譜詳節)》의 언해를 명하였으며, 그 해 9월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이 이루어져 반포되고, 47년 9월 《동국정운》의 완성 및 《용비어천가》의 반포, 48년(세종 30) 11월 《동국정운》 반포, 55년(단종 3) 봄에 《홍무정운》 역훈(譯訓) 완성 등, 사업은 매우 의욕적으로 추진되었다.

먼저 《운회》를 번역한 것은 곧 《동국정운》의 편찬을 뜻하므로 그 사업은 이 무렵부터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훈민정음 해례의 작성은 아마도 1444년 최만리 일파의 반대 상소가 있은 직후부터 착수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 동안에 중국 운학(韻學)의 이론을 연구하고, 한편으로는 《용비어천가》와 《석보상절》 등의 찬정(撰定)을 통하여 그 실제적 효용성을 실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훈민정음 해례 본문에 나타나는 모든 자류(字類)를 추려 보면 처음 1443년에 제정하였던 28자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그것은 그 동안 운서 편찬과정에서, 또는 국어 표기를 통해서 거기에 필요한 자류가 더 요청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더 많은 글자를 만들어 내는 방법을 강구하였던 까닭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훈민정음은 더욱 갈고 다듬어졌으며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흠이 없는 것이 되었다고 믿기에 이르러 언문청에서 곧 간행에 착수, 46년(세종 28) 9월에 완성·반포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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