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http://cafe.daum.net/kiwonsub/19lIH/1/1/8739/8739

천혜의 요새(要塞), 고구려 <환도산성(丸都山城)> 답사

- 비는 그치지 않았다. 환도산성 주차장에서부터 삼삼오오 우산을 받쳐 들고 산성 안의 점장대(點將臺)까지 올라가 보았다. 환도산성(丸都山城)은 지안시 북쪽 퉁구하를 따라 약 2.5km 떨어진 환도성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다. 국내성이 평지의 도성인 반면 환도산성은 유사시 적군과 대치하기 위해 쌓은 군사적 위성(衛城)으로 '산성자산성' 혹은 '위나암산성(尉那巖山城)'이라고도 불린다. 이후 산성자산의 이름이 환도산(丸都山)으로 바뀌면서 현재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유리왕 21년 국내성으로 천도 후, 676m의 반원형 산봉우리와 주위 능선을 이용해 만든 총 둘레 7km의 산성이다. 현재에는 흔적을 알 수 있는 터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발 말굽 모양의 불규칙한 타원형 형태의 돌로 쌓아 올린 산성 입구에는 석각으로 된 안내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환도산성에는 현재 약 5m 높이의 북쪽 화강암 성벽(城壁)과 말에게 물을 먹이던 음마지(飮馬池), 전투를 지휘하던 점장대(點將臺)를 비롯해 병영터와 궁전터 흔적들이 일부 남아 있었다. 언뜻 눈으로 보아도 천혜의 요새지이다.

아아, 유현(幽玄)하고도 찬란한 고구려 벽화, <오회분(五盔墳) 오호묘(五號墓)> 탐방

- 우산 아래 고분군 남쪽에 자리한 7세기 고구려 분묘, 지안 고구려 유적지에서 묘실의 화강암 벽면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5개의 고분을 오회분(五盔墳)이라고 하며, 그 중 다섯 번째가 바로 오호묘(五號墓)이다. 큰 봉토분 다섯 개가 동서방향으로 일렬로 나란히 서있는 모습이 마치 투구 같다 하여 '투구 회(盔)'자를 붙여 오회분이라 한다. 오호묘는 사호묘와 정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자리해 일명 '쌍둥이묘'라고도 한다. 5호묘는 6세기 중반~ 7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8m, 무덤 둘레가 약 180m의 규모이다. 1962년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발굴 정리되었기에 국내에서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가히 고구려 유적의 꽃이라 할 만 하다.

- 놀랍고도 실로 감격적이었다. 묘실로 들어가는 계단을 내려가니 후덥지근한 바깥 기온과는 달리 서늘한 냉기가 온몸에 엄습해 왔다. 그것은 일종의 전율(戰慄)이었다. 무덤의 음산함이라기보다는 고구려 고분의 벽화를 만나게 되는 짜릿한 긴장이었다. 나는 지금 1,300여 년 전 고구려인의 인식의 태반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한 시대의 무덤 속에서 고구려인의 원형적 세계와 만나는 것이다. 아아, 나는 지금 말로만 듣던 고구려 고분 벽화를 현장에 와서 그 실체를 보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는 인류 문명 발달에 기여한 신들을 형상화하여 풍부한 설화성을 지니고 있다. 돌 위에 직접 동식물, 광물의 염료를 사용하여 그렸기 때문에 1,3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길고 긴 세월을 넘어…

- 묘실 안에는 세 개의 석관이 나란히 있는데 주피장자(主被葬者)를 사이에 두고 부인과 또 다른 부인의 관으로 추정된다. 예의 사면의 화강암 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그 내용은 7세기의 전형적인 벽화 양식에 따라 동벽에는 청룡(靑龍), 서벽에는 백호(白虎), 남벽에는 주작(朱雀), 북벽에는 현무(玄武)의 사신도가 신비로운 빛깔로 그려져 있으며, 그 위층에는 28마리의 용(龍)이 역동적으로 뒤엉켜 있는데, 신비로운 기운을 더했다. 그리고 층위별로 각종 문양들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최상단 암벽의 사면의 한 가운데에는 야명주(夜明珠)를 하나씩 박아 놓아 어두운 현실(玄室)을 환하게 비추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야광주는 보이지 않고 빈 구멍만 남아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집안의 20여 기의 고분 벽화 중에서, 여기 오호묘는 유일하게 일반인에게 관람이 허용되는 곳이다. 그러나 묘실에서의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

* 그 외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진 사신총(四神塚), 무용과 생활상이 그려진 무용총(舞踊塚), 고구려인들의 씨름하는 모습이 그려진 각저총(角觝塚) 등이 인근에 있다.

- 그런데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민족의 찬란한 보물인 고구려 벽화의 관리 상태가 너무나 부실하다는 것이다. 벽면에는 단순한 습기 이상의 물기가 흘러내리고, 두 마리의 용이 그려져 있는 천정에서 간간히 물방울이 떨어졌다. 밖에서 비가 내리기 때문일까, 아니면 늘 그렇게 물기에 젖어 있는 것일까. 참으로 마음이 아팠다. 가이드 김용의 말로는 몇 년 전 개방 당시에는 그림의 윤곽이나 채색의 상태가 아주 선명했다고 했다. 지금은 그 때에 비해서 훼손이 매우 심한 상태란다. 비싼 입장료를 받고 관광 수입을 올리면서 정작 그 묘실은 이렇게 무도하게 방치하다니 … 참담하고 안타까워 분노가 치밀었다. 아아, 고구려!

고구려의 기백(氣魄), 우리 역사의 광장에 우뚝 선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정복 군주, 가장 위대한 고구려의 왕으로 칭송받는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로서 높이가 6.39m에 이르고 무게가 37톤으로 추정되는 세계적 규모를 지니고 있다. 광개토대왕 사후 2년(414년) 아들 장수왕이 부왕의 재위 22년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으며, 높이만 3층 건물과 맞먹고, 방추형의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비석의 배면 너비는 1.46미터, 1.35미터, 2미터, 1.48미터로 각 면이 다른 크기와 문양을 지니고 있다. 땅에 비석을 고정시켜 주는 대석과 비문을 새겨진 비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석은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사각형이고, 두께는 약 20cm이나 고르지 않으며 비신에는 총 1,775자의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덮개돌[蓋石]이 없는 고구려 석비 특유의 형태이다. 참으로 장엄한 모습이었다.

당대 특유의 호방한 필체로 쓴 비문은 현재까지 한, 중, 일 학자들에 의해 약 1500여자 정도가 해석되어져 있는데 내용은 크게 고구려 건국 과정과 광개토대왕의 대외 정복사업과 업적, 수묘 체계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따라 중국에서는 '호태왕비(好太王碑)'로 불린다. ‘광활한 영토를 개척하고(廣開土境) 민생을 편안하게 보살핀(平安) 하늘과 같이 큰 왕(好太王)의 업적을 기록한 기념비"라는 뜻이다. 비석의 주위를 돌면서, 장엄한 대왕비를 바라보는 후생(後生)의 마음은 뜨거웠다. 이 광활한 대지에 고구려의 기백을 장엄하게 펼치셨던 대왕의 위용이 느껴지는 듯하여 가슴이 뭉클하고 온몸이 출렁거렸다.

현재는 1982년에 중국 당국에 의하여 새로 건립된 단층의 대형 비각 속에 있으며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비석과 태왕릉을 중심으로 주변 경관이 공원처럼 잘 꾸며져 있다. 비각을 나와서 성긴 빗방울이 떨어지는 경내를 걸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대왕의 능을 찾아갔다.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수목이 싱그러웠다. 광개토대왕비를 바라본 감동이 가라앉지 않아 자꾸만 비각을 돌아보았다. 경내는 다른 관광객이 없어 주위의 분위기가 아주 호젓했다. 잔디 사이로 보도블록이 깔린 길 주위로 사람의 키 두 배 정도 크기의 가로수가 아주 특이한 모습이다. 한 줄기로 자란 나무 위에서 수양버들처럼 가느다란 실가지를 사방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균형 잡힌 옹기를 엎어 놓은 듯했다. 가장자리로 늘어져 있어 속은 비어 있다. 그 외양이 아주 특이했다.

◈[자료] 논란이 되는 비문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海破百殘△△新羅 以爲臣民’

- 신묘년 기사대목으로 △△은 완전 유실되어 해독이 불가능하며 나머지 글자도 학자에 따라 판독이 다르거나 불분명한 글자가 섞여 있다. 일본은 1889년 <회여록>에서 "백잔 ,신라는 본디 속민이었으므로 원래 조공을 하였다. 그런데 왜는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 백잔 △△ 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 고 해석하였고, 이는 곧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여러 정황과 사료를 살필때 "破"의 주어인 고구려가 생략된 것이 아닐까하는 견해가 국내에서는 더욱 인정받고 있는 편이고, 아직까지 각종 학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한민족 최대의 웅대한 시대를 이끈 고구려 <광개토태왕릉(廣開土太王陵)>

대왕릉은 광개토대왕비각에서 서쪽으로 약 200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대왕릉는 정사각형의 계단식 석실묘로 되어 있는데 높이만 14,8m, 한 변의 길이가 66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였다고 한다. 현재는 많이 무너져 상단부만 보존되어 있고, 철제 계단으로 올라 내부를 간단하게 살펴볼 수 있다. 내부에는 큰 직사각형 모양의 돌이 두 개 있고, 그 겉은 플라스틱틀로 덮여 있는데 대왕과 왕비를 합장한 것으로 보인다. 석실의규모가 생각보다 아주작았다. 오회분(五盔墳) 오호묘(五號墓)에 비하면 아주초라한 정도였다. 벽면에는 벽화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단순한 화강암으로 네 벽을 축조해 놓았다. 대형 돌을 직사각형으로 다듬어 계단식으로 쌓아 올린 구조인 태왕릉은 7단의 계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계단 안은 작은 돌들이 채워 넣어져 있다. 현재 광개토대왕릉 양쪽으로 중국과 북한의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점도 이색적이다.

인근 장군총에 비해 능의 정교함과 예술성이 다소 떨어져 보이지만 이곳에서 ‘願太王陵 安如山 固如岳(태왕릉이 산처럼 굳건하고 평안하기를 바란다)‘이라는 명문(銘文) 벽돌이 출토되었고, 광개토대왕비에서도 매우 가까우며 손상되지 않았을 때 무덤의 크기도 장군총보다 클 것으로 추정되어 태왕릉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동방의 피라미드, <장수왕릉> 속칭 <장군총(將軍冢)> 답사

- 길림성 용산에 있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돌무지무덤으로 장군총은 광개토대왕의 대를 이어 고구려의 대정벌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20대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지안의 고구려 고분 중 가장 웅장한 형태의 능으로 고구려의 비약을 상징하는 고분이다.

집안(集安)에 남아있는 1만 2천여 개의 묘지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능으로 장엄한 규모와 빼어난 조형미를 갖추어 동방의 금자탑으로 불린다. 밑변의 길이가 31.6m, 높이 12.4m에 이르는 거대한 피라미드형 방단계단식적석묘(方壇階段式積石墓, 돌을 계단형식으로 네모지게 쌓아올린 형태의 무덤)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길이가 5.7m인 엄청난 크기의 화강암 1,100여 개를 계단식으로 쌓아올렸다. 정면은 국내성(集安)을 바라보는 서남향이며 네 귀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석실 안 석관의 머리 방향이 53도로 북동쪽에 있는 백두산(白頭山) 천지(天池)를 향하고 있다고 한다. 장군총의 맨 위층인 제7층의 사방 변두리에서는 난간 구멍이 있는데 피라미드 위에 제사를 지내는 종교적인 시설로 보이는 일종의 향당 (享堂)이 있었던 흔적으로 보인다. 이는 고대 동이민족이 세운 나라에서 유행하던 묘제의 하나이다.

수많은 고구려 고분들 가운데 이 장군총에는 특별한 점이 두 가지 있는데 바로 이 적석총(積石塚)을 둘러싼 12개의 받침돌[護石]이 있다는 것과 그 주변의 배총(陪塚)이 있다는 것이다. 호석은 돌을 쌓아 올린 무덤이 빗물이나 기타 외부압력에 인하여 밀려나거나 무너짐을 방지하기위해 세운 것으로 3개씩 4면에 총 12개가 있는데,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의 기원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현재는 그 중 하나가 소실되었다. 배총(陪塚)은 현재 하나만 남아있는데 과거에는 이 장군총의 네 모서리 방향에 있어 피라미드의 스핑크스처럼 수호신을 상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배총은 고인돌 형태이다.

지안(集安)에서 퉁화(通化)로, 내일 백두산을 등정을 위하여

지안에서 답사를 끝낸 일행은 전용버스 편으로 303번 국도를 타고 통화로 이동했다. 길은 2차선 포장도로였는데 거의 산간으로 난 길이어서 구비가 심하고 넘어가는 고갯길도 많았다.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중의 날씨는 금방 어두워져서 예정보다 이동 시간이 많이 걸렸다. 심신이 피로가 온몸에 엄습해 왔다. 압록강변의 지안에서 만났던 고구려를 생각하며 참으로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이제 내일 백두산 등정을 위하여 퉁화시(通化市)로 가고 있는 것이다. 통화에 도착하니 빗줄기는 더욱 세찼다. 도심에는 가로등을 비롯하여 길을 따라 아치형으로 네온사인을 설치하여 아주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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