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2000년, 홍랑의 연인이었던 문인 최경창(崔慶昌․1539~1583)이 홍랑과의 인연과 시조 작성 당시 정황을 밝힌 육필 원고, 홍랑을 다시 만났다가 헤어질 때 그에게 써준 한시 2수, 근대 들어 국문학자 가람 이병기(1891~1968)가 1936년 이 자료들을 보고 고증 평가해서 쓴 발문 등이 일괄 공개됐다.


*참고자료(기사 2건)

[조선중엽] 명기 홍랑의 시조 "묏버들" 원본 첫공개/조선일보2000.11.13

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200011/200011130492.html

400년만에 드러난 '사대부와 기생의 비련'

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200011/200011130226.html

원본 사진 스캔

http://ipcp.edunet4u.net/~koreannote/3/3-묏버들가려.htm


기녀 홍랑은 1573년 가을, 함경도 경성에 북평사로 온 최경창을 만나 군막에서 겨울을 함께 보낸다. 이듬해 봄 서울로 부임하는 최경창을 쌍성(함경도 영흥)에서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가다 함관령(함흥과 홍원 사이)에 이르렀을 즈음, 때마침 날도 저문데 비마저 뿌리고 있었다. 이때 지은 시를 그는 서울의 연인에게 보내주었다.


翻方曲

折楊柳寄與千里人 묏버들 갈해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爲我試向庭前種 자시는 창밧긔 심거 두고 보쇼셔

須知一夜新生葉 밤비예 새 닙 곳 나거든

憔悴愁眉是妾身 나린가도 너기쇼셔


그리고 소식이 끊긴 채 2년 남짓. 최경창이 병을 얻어 몇달 간 누워있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홍랑은 그날로 상경 길에 올라 7일을 밤낮으로 걸어 서울에 도착했다. 그러나 당시는 양계의 금(함경도 평안도 사람들의 도성 출입을 금하는 제도)이 시행되고, 국상(명종 비 인순왕후)마저 겹친 때였다.


사람들이 이를 구실로 두 사람 사이를 헐뜯은 탓에 최경창은 관직이 삭탈되고, 홍랑 역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눈물로 홍랑을 떠나보내며 최경창은 󰡐송별󰡑이란 제목으로 두 편의 한시(7언 절구)를 지어 주었다.


贈別 *원본 送別 [삼당집,p.171.]

玉頰雙啼出鳳城 고운뺨에 눈물지며 한양을 나설 적에

曉鶯千囀爲離情 새벽 꾀꼬리가 이별의 슬픔 울어주네

羅衫寶馬汀關外 비단옷에 천리마로 나루 건너니

草色迢迢送獨行 풀잎은 아득하니 날 떠나 보내누나

쌍성(함경도 영흥)에서 작별.

相看脉脈贈幽蘭 말없이 마주 보며 유란을 주노라

此去天涯幾日還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랴

莫唱咸關舊時曲 함관령의 옛노래를 부르지 말라

只今雲雨暗靑山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함관령(함흥과 홍원 사이)


2년 전 이별할 때 불렀던 시조를 다시 부르지 말라는 당부와 홍랑과의 애타는 이별을 노래했다. 이렇게 헤어진 홍랑은 행여나 오시려나, 소식이마나 있을까 하는 애타는 기다림을 지속하였다. 하지만 이별한 지 3년 되던 해에 최경창이 병이 들어 봄부터 겨울까지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었다.


홍랑은 그 즉시 길을 떠나 7일 밤낮을 달려 한양에 올라왔다. 당시는 양계(兩界, 함경도 평안도) 사람들의 도성 출입을 금한 데다, 명종(明宗)의 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가 승하한 때로 국상 중이었다. 이런 비상시에 관원이 기생과 놀았다고 하여, 이들의 일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고죽은 벼슬자리에서 물러났으며, 결국 이듬해 여름에 홍랑은 강제로 돌아가야만 했다. 고죽은 자신의 면직보다는 홍랑과의 이별이 더 가슴 아팠기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길 수 있었다.


<고의(古意)>

-崔慶昌


덜거럭덜거럭 쌍 수레의 바퀴들은,

하루에도 천만 번씩 구른다지오.

마음은 같건만 수레는 같이 못 타,

이별한 후 세월은 많이도 변했구려.

수레바퀴는 그래도 자취를 남기지만,

그리워 그리워해도 보이진 않네.


有贈(유증)

-崔慶昌

烟雨空濛提柳垂 行舟欲發故遲遲

(연우공몽제유수), (행주욕발고지지)

莫把離情比江水 流波一去沒回期

(막파이정비강수), (유파일거몰회기)

뽀안 안개비 속에 버들은 늘어지고,

가는 배는 떠나려고 일부러 느릿느릿.

이별의 정을랑 강물에 비기지 마오,

강물은 한 번 흘러가면 다시는 못 오는 걸.


이렇게 최경창이 써 준 이별의 아픔에 애간장만 태우는 홍랑의 발걸음에는 눈물과 두이눔만 쌓일 뿐이었다. 피천득 선생의 말마따나 “그리워 하는 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하” 는 것이 인연의 끄나풀이다.


고죽은 그 뒤 벼슬길이 평탄하지 않아 좌천과 사직을 거듭하다가 43세 되던 해에 종성부사(鍾城府使)로 제수되어 다시 홍랑과 재회했다. 그러나 갑작스런 승진을 문제 삼은 조정에서 다시 성균관직강으로 벼슬명을 고쳐 제수받고 돌아오던 도중 종성객관에서 4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승에서 그들의 사랑은 신분의 차이와 고죽의 죽음으로 말미암아지속될 수 없었으며, 그때 차라리 재회하지 않았다면 마음이나마 덜 상처받고 그리움 속에서 늙어갔을지모를 일이다.

아래의 <홍랑을 사랑한 최경창>에 의하면 최경창 사후 홍랑은 파주로 달려와 시묘살이를 했고, 임란 때는 최경창의 시고 (詩稿)를 짊어지고 다녀 온전히 보존한 공적이 인정되어 근년 에 고죽의 후손들이 고죽의 묘를 영태리로부터 다율리의 홍랑 묘 곁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제목과 달리 주체와 객체가 뒤바뀌어 '고죽을 사랑한 홍랑' 얘기로 후세 호사가들의 입심을 돋운다.

임희숙/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

http://blog.daum.net/shs4912/15869453

홍랑을 사랑한 최경창

http://blog.daum.net/kck4281/13817776


그리워 그리워해도 보이진 않네

http://kdaq.empas.com/knowhow/view.html?num=108061&sq=%C3%D6%B0%E6%C3%A2+%F1%FC%DC%AC

[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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