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불경의 귀신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공자의 귀신론을 정리하다가 재미 있는 글이 있어 여기 소개합니다.

http://uni33.net/m/lect47.html

季路問事鬼神

계로문사귀신

子曰未能事人

재왈미능사인

焉能事鬼

언능사귀

敢問死

감문사

曰未知生焉知死.

왈미지생언지사. -論語 先進, 11-

十一. 季路問事鬼神한대

子曰 未能事人이면 焉能事鬼리오

敢問死하노이다

曰 未知生이면 焉知死리오

[譯]
자로가 귀신을 섬기는 일을 묻자(季路問事鬼神),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子曰);

"내가 아직 사람을 섬기는 것도 능하지 못한데(未能事人),
어찌 귀신을 섬기는 일을 알겠느냐?(焉能事鬼)"

또 죽음에 대해서 묻자(敢問死),
하시는 말씀이(曰);

"사는 것조차 버겨운 판에(未知生)
뭐 죽을 것까지 신경쓸 거 있냐?(焉知死)"

[案]이 구절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여기 季路라는 사람은 우리가 잘 아는 자로죠, 子路.

자로가 귀신을 섬기는 일을 묻는 겁니다;

"季路, 問事鬼神".

그런데 이 "귀신"이라는 말도, 사실은 지금 이게 해석이 어렵습니다.

"鬼"와 "神"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들이 해석이 어려워요. 전통적으로 근세에 오면 귀신에 대해서 천지 코스몰로지에 의한

아주 추상적인 해석들이 나오죠.

천지로 말한다면,

인간이 땅 쪽으로 돌아가는 것이 귀(鬼)고, 하늘 쪽으로 펼쳐 가는 것이 신(神)이다.

그리고 음양적으로 가면, 鬼는 음(陰)적인 것이고, 神은 양(陽)적인 것이다,

뭐 이렇게 귀신을 풀기도 하는데.., 이것은 시대적으로 논어에 잘 맞지를 않아요.

그래서 보통은
여기 귀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죽으면 사람의 형상을 가지게 되는 것이 鬼다,

그리고 神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 이외의 신들, 예를 들면 산신령 같은 것들이다,

이렇게 풀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지금 보세요.

나(我)라는 존재를 이렇게 본다면, 여기에 지금 제가, 나라고 하는 몸 덩어리가 있잖아요?

옛날사람들은 이 몸 덩어리를 하늘과 땅의 묘합이라고 생각했단 말입니다.

나라는 존재에 있어서 유형적인 형태(=魄)와
나라는 존재에 있어서 무형적인 형태(=魂)가
같이 움직여서 움직이죠.

그깐 옛날 사람들은 뭐냐면,

예를 들면, 칼로 내가 여기 배를 탁! 쳤다.

그렇게 해 가지고 내가 죽는다 그러지 않습니까?

칼로 손상을 당한 게 뭐예요? 나의 유형적 존재가 손상을 당하는 거죠.

그러니까 쉽게 망가지는 것은 뭡니까?

나의 유형적 형체(魄)는 금방 망가지지만

무형적인 형체(魂)는 잘 안 망가진다고 생각하는 거란 말입니다.

우리가 혼났다 그러면 뭐예요? 혼이 잠깐 내 몸뚱이에서 나갔다가 돌아오는 거죠.

너무 놀라 가지고 혼과 백이 잠깐 분리되는 현상, 이게 혼났다 그런 얘기거든요.

『장자』라는 서문에도 보면 아주 쇼킹한 고사가 나와요;

돼지들은 한 번에 새끼를 많이 까잖아요? 열 마리, 스무 마리..,막 까죠.

그래서 엄마돼지가 이렇게 드러누워 있으면

그 새끼들이, 그냥 한 20 마리가 우르르...몰려 가지고 엄마젖을 빨죠.

축..늘어진 젖을 걍 하나씩 물고 서로 싸우면서 빠는 모습, 얼마나 귀여워요 그죠?

그런데 갑자기, 그렇게 열심히 엄마젖을 빨던 새끼들이, 줄줄이.. 도망가는 겁니다.

왜 그랬겠어요?

그 순간에 엄마돼지가 죽은 겁니다.

무슨 병이 있었든지.. 하여튼 죽었거든요.

그런데 새끼들이 하나, 둘.., 도망가는 겁니다! 얼마나 처참한 모습입니까?

뭐예요?

그 새끼들이 도망갈 적에, 거기에 분명히 엄마라고 하는 형체는 그대로 있었다는 거죠.

바로 그 순간, 1초 전의 엄마돼지와 1초 후의 엄마돼지의 모습이 무슨 차이가 있냐는 겁니다.

그게 뭐예요? 혼이 떠나가 버린 거예요.
죽은 거예요.

그러니까 엄마라고 하는 것이 그 순간에 인식이 안 되는 거죠.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새끼들이 엄마를 그렇게 찾고 젖을 빨았던 것은 엄마의 형체가 아니라는 거예요.

엄마의 혼이죠.

엄마의 혼이 거기 깃들어 있었기 때문에 맨 날 가서 엄마를 찾고 그랬던 건데,

그게 떠나자 그 순간에 새끼들이 줄줄..도망가는 거죠.

옛날 사람들이 생각한 이런 혼백사상이 일리가 있어요.

백(魄)은 금방 썩어버리니깐 그것은 땅에다가 묻되,

혼(魂)이라고 하는 것은 지속력이 있기 때문에, 경배의 대상으로 삼자.

그리고 그것이 다 흩어지는 데는 약 1세기 정도가 걸릴 것이다.

한 세대를 30년씩을 두면,

4대봉사도 120년 아닙니까?

그깐 魂이 완벽하게 흩어져서 인간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까지의 완충기간을 120년,

4대로 잡자는 겁니다. 四代奉祀. 이게 제사의 이론이에요.

야박하지 않고 좋지 않아요?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귀신과 더불어 살았어요. 그러나 불교에서는 어떻게 돼요?

귀신에 대한 지속성을 완벽하게 인정하는 거죠.

불교에서는 혼이 영원히 가는 거예요. 그게 윤회죠. 아시겠어요?

그런데 유교에서는 어떻게 돼요? 혼도 결국은 다 흩어진다는 거죠.

그러니깐 자로가, 자로는 원래 용감한 녀석이니깐,

질문도 보통사람들은 못하는 그런 질문을 하는 겁니다:

"問事鬼神,"

"귀신을 섬기는 일은 어떻게 합니까?"
하고 공자한테 묻는 거죠. 자로다운 질문예요.

다른 장면에서 공자가 자로를 평해서 한 말이:

"자로 저 녀석은 제 죽음을 못 죽을 것이다.." 그런 말을 하거든요.

천수를 못살고 죽을 놈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로는 그렇게 모험심이 강하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벙대니깐,

죽음이라는 것도 자신이 항상 느끼고 살았을 거란 말예요. 그러니깐 그런 것을 묻는 겁니다.

"귀신을 섬기는 일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깐,

재왈: "未能事人인데 焉能事鬼리오?"

"내가 아직 사람을 섬기는 것도 능하지 못하거늘,

어찌 귀신을 섬기는 것에 능할 수 있으리오?"

하는 표현, 이것은 해석이 아주 분분합니다.

이것을, 예를 들면, 기독교적 어떠한 신본주의사상을 비판하는 유교의 인본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표어 격으로 해석하는 것이 여태까지 가장 흔한 해석입니다.

기독교의 신본주의사상에 대해서 동양의 인본주의사상을 표현 하는,

그래서 이 동양사상이 가지고 있는 본질은 서양의 근세 휴머니즘 이후에나 달성했던,
그러한 휴머니즘이 중국에는 이미 선진시대 때부터 주류를 이루는 문명이다 하는 것이

보통의 근세적 해석이었는데, 저는 그 해석이 매우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분명히 여기서 공자의 이러한 언급은,
"사귀"에 대하여 "사인"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

어떠한 합리주의적인 입장은 분명히 있어요.

그러나 이런 언급의 생각의 배후에는 결국 "사인"을 통해서

"사귀"의 세계에까지 도달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귀"도 "인"의 연장선상에서 이해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그러니까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를 통관하는, 공자의 지혜가 여기 담겨있다고 봐야 할 겁니다.

어떻게 본다면 공자에게 있어서
보다 敬而遠之(敬하되 멀리)하는 더 중요한 세계는 사실 "사인"보다 "사귀"에 있었을지도 몰라요.

공자가 뭐 무당의 아들이었다..라는 출생설화라든가..,이런 걸로 볼 적에
공자는 분명히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거거든요.

그래서 공자는 "사귀"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중시했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事鬼에 도달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事人"을 생각했다고 하는 것이

역시 공자의 위대성으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겠죠.

최소한 "사귀"의 세계를 "사인"의 세계로부터 확창해 가고자 하는 이러한 공자적인 발상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위대합니다.

오늘날 말이죠, 여러분들이 생각해보세요.

한국 사회처럼 종교적으로 복합적인 사회가 없습니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처럼 이렇게 종교적 광신이 아주 그냥.. 뭐랄까..

익지 않은 상태로 혼재하는 사회는 없어요.

뭐 이슬람까지도 들어와 있으니깐.. 온갖 신앙형태들이 다 들어와 있어요.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을 겁니다.

인류의 이렇게 위대한 종교들이 우리나라에 다 들어와서 경쟁을 벌리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종교전쟁도 없고, 종교 간에 싸움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게 왜 그런 줄 아세요?

그게 바로 공자 덕분이에요. 우리나라는 아무리 광신적 광란이 일어나도 그 밑바탕에는

공자의 이러한 합리주의 정신이 상식으로 깔려 있는 문명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종교전쟁이 없는 겁니다. 한국 사람들은 굉장히 광적인데 반해서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합리적이거든요.

사실 한국 사람들은 굉장히 광적이면서도 종교적이 아니에요. 그 배경에는 바로 유교적

합리주의가 있다는 거, 이게 중요합니다.

조선조 오백년이 남긴
위대한 유산은 바로 공자의 이 한 마디;

"未能事人인데 焉能事鬼리오?"라는

이 한 마디라고 말해도 저는 과언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을 구원한 겁니다.

그러니깐 자로가,
이 사람은 항상 죽음의 위험성을 느끼는 인물이라서 그런지, 죽음을 또 묻는 겁니다:

"敢問死"

여기서 "死"(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의 해석이 있어요.

하나는, 자로가 아주 로맨틱한 모험의 인간이기 때문에,

여기 "死"는 언제, 어떻게, 어떠한 명분을 위해서 죽는 것이 가장 좋겠냐? 하고

공자에게 구하는 질문이라는 것도 있어요.

"언제 어떻게 죽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까?"하는 죽음에 대한 방법.

또 하나는 死後의 세계다, 이렇게 보는데..

저는 후자 쪽의 의미를 취합니다.

죽음 자체에 대한 의미가 아니라, 사후세계에 대한 질문이다.

사실 귀신의 세계라든가 사후의 세계에 대한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아그노스틱(agnostic),

하나의 불가지의 세계죠. 우리가 알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동양인들은 말이죠,

인간의 생사를 갖다가 아까도 말했듯이, 氣의 취산(聚散)으로 생각했다 그겁니다.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기가 모이는 것이고(人生也氣聚),

기가 흩어지는 것(散)이 곧 죽음이다.

이 기의 취산으로 설명되는 생사의 문제라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의연한 자세를 주는지 몰라요.

그리고 사실 죽음이라는 것은 허무한 겁니다.

이 허망한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서도 살 수 있었던 동양인들의 모습이,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죽음에 대해서 온갖 해석을 하고..,

거기에 치장을 하려고 그랬던 서양인들 보다 탁월했던 것 같아요.

서양인들은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짜식들이 그렇게 치장이 많아요.

천국이니, 지랄이고, 뭐...

그런데 동양인들은 보세요. "흩어진다", 이걸로 끝나거든요.

기가 흩어진다는 거.. 멋있잖아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너무 그렇게 복잡한 믿음과 해석, 집착하지 말아야 돼요.

불교 같은 것도 말이죠, 사실은 해탈이라 그래서 죽음에 가장 초연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말이죠,

윤회라든가 뭐.. 죽음에 아주 집착한다구요.

전생은 뭐했냐? 후생은 뭐해야 될 거냐?

이래가지고 시줏돈 울겨내고..다 해먹거든요.

사실 이 유교적 세계관처럼 말끔하게 처리되는 인간의 세계관이 없어요.

아주 깨끗하잖아요?

기가 모였다가 흩어진다. 고만에요. 흩어진다..

그런데 그 흩어지는 동안에 좀 시간을 두고 젊잖게 흩어지자, 이건데..

공자가 말하기를, 그런 세계관에서는 공자가 당연히 하는 말이죠:

"未知生인데 焉知死리오?,

내가 아직 사는 것조차 버겨운데, 뭐 죽을 것까지 신경 쓸 거 있냐?"

여기서 아까 제1의 문답으로서 죽음의 방법에 대한 걸로 해도 되죠?

"죽을 때 어떻게 죽어야 됩니까?" 하는 질문에 대해서,

"지금 살기 바쁜데 죽을 것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냐? 다음에 하자",

이런 말도 되고. 생전의 문제와 사후의 문제로 풀어도 됩니다.

그런데 공자의 궁극적인 얘기는 결국 삶에 충실해야 된다는 거죠.

삶에 충실함으로써 죽음에 도달한다고 하는 거.., 역시 공자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

공자의 이러한 생각의 배후에는 삶의 형태가 죽음의 형태를 결정한다는 겁니다.

결국 이렇게 되면,
극단적 합리주의 사상으로 가면 어떻게 돼요?

삶의 연속이 뭡니까? 삶의 연속이 사실 역사예요.

우리의 죽음에 대한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역사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깐 올바로 삶으로서, 그 올바르게 사는 모습을 역사에 남김으로서,

사후에 역사적인 삶을 유지한다는 것,

그것은 비단 위대한 영웅이 되어서 이름을 남긴다, 양명호후세다,

후세에 이름을 휘날리는 게 아니어도 소리 없이 죽어도

그의 모습은 대개 자식을 통해서 전달이 되고, 그죠?

아주 소시민적인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 죽음이 깨끗한 삶을 산 것일 적에는

분명히 그 자손들에게 연결되고 그 주위 사람들,

생전에 그를 지켜봤던 모든 사람들에게 연결이 되고 다 연결이 됩니다.

그러니깐 공자는 역시 삶에 엠퍼시스(emphasis)가 있었다는 거죠.

그러나 여기서 죽음을 대비시키고 이원적으로 분리시킨 삶이 아니라,

삶 속에 죽음을 포괄시켰다고 하는 것은
역시 유교가 모든 종교를 뛰어 넘는 위대한 종교적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저의 유교에 대한 하나의 생각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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