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야심경 해설 3. 심경(心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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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心經)!

여기서의 심(心)은 마음이라는 의미보다는 핵심할 때의 그 심을 뜻합니다.

반야심경은 600권 반야경(대반야바라밀다경)을 짧게 핵심만 요약한 경전 이라는 의미입니다.

중국에 한역된 반야심경은 두 종류가 있는데,

계빈국 반야 ․ 이언 이 두 분이 공역하신 반야심경이 있고, 또 당나라 현장법사께서 한역하신 반야심경이 있습니다.

반야 ․ 이언 이 두 분께서 한역하신 반야심경은 길고, 현장법사께서 한역하신 반야심경을 짧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읽고 있는 반야심경은,

당나라 현장법사(삼장법사)께서 한역하신 것입니다.

이 반야심경에는 삼법인(무상/고/무아)에 대한 내용이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을 핵심적으로 설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방법인 空에 관한 내용이 주류를 이룹니다.

空이 곧 해탈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반야바라밀이란 곧 열반의 본질을 의미합니다.

실제 해탈은 무상/고/무아로 하는 게 아니라, 삼해탈문인 空/無相/無願을 통해서 입니다.

그래서 삼법인과 삼해탈문에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반야심경이란 이런 해탈문을 통해 도착한 그 열반의 본질/특성 그걸 설명한 경전인 것 입니다.

그러므로 대단히 내용이 심오하고 깊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은 고집멸도 사성제입니다.

멸성제란 열반/해탈 그 자체를 의미하는데 바로 그 멸성제를 설명한 것이 반야경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세 번의 법륜을 굴리셨는데,

초전법륜에서는 고집멸도 사성제를 설하셨고,

두 번째인 중전법륜에서는 이 반야부 경전을 설하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초전법륜의 경전과 반야부의 경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반야부 경전이 상당히 심오하고 깊습니다.

그래서 또한 空에 대한 깨달음이나 이해가 없으면 전혀 이해가 안될 수밖에 없는 경전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대승경전은 비불설이다라는 소리를 해대는 사람이 생겨납니다.

또 空은 후대에 대승불교에서 즉 용수보살이 만들어냈다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空은 본래부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지 용수보살이 만들어낸 용어가 아닙니다.

그래서 아함경에서도 空이라는 용어가 자주 나오고,

근래 번역된 니까야나 청정도론에서도 역시나 空에 대한 말씀이 명확하게 나옵니다.

또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空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바로 해탈과 열반에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해탈/열반과 空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이 空이 곧 해탈의 문입니다.

대승경전에서도 삼해탈문은 空/無相/無願이며,

소승경전에서도 삼해탈문은 空/無相/無願입니다.

해탈의 문은 같습니다. 다를 수가 없습니다.

대승경전을 부인한다라는 것은 반야바라밀을 부인한다라는 것인데,

이 반야바라밀을 부인한다라는 것은 오역죄보다 더 큰 죄라고 반야경에 나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이란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탄생시키는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어리석고 무지해서 부인하고, 부처님 말씀이 아니다..라고 욕을 해대는 것, 그것처럼 큰 죄는 없죠.

그래서 그 벌은 상상을 초월하는데,

하나의 우주가 무량한 세월을 지난 후에 불에 타서 없어지면 그때는 지옥도 타서 없어지게 되는데 그럴 때는 그 지옥에서 벗어나 또 다른 우주의 지옥에 가서 또 벌을 받고,

또 그 우주가 무량한 세월후에 불에 타서 없어지면 거기서 또 다른 곳의 우주에 있는 지옥에 가서 벌을 받습니다.

오역죄의 경우 길어야 1겁의 세월을 받습니다만,

이 반야바라밀을 부정한 죄는 그것보다 더 크기 때문에 상상할 수 없는 기간 동안을 고통당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벌은 부처님께서 주시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자업자득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인과 진리는 함부로 비방해서는 안됩니다.

반아바라밀이나 空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경전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특히 소승쪽에 치우친 사람들이 그런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런 짓은 본인에게 대단히 악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니 남들이 비방한다고 해서 같이 덤탱이로 비방하는 짓은 삼가야 합니다.

그러기보다는 먼저 소승경전에 그런 내용이 있는지 없는지 찾아보는 게 우선입니다.

아함경에서야 당연히 空에 대한 내용이 아주 많이 나오진 않습니다만, 그래도 자주 나옵니다.

또한 니까야에서도 명확히 나와 있으므로, 空이란 후대에 용수보살이 만들어낸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용수보살은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어낸 존재가 아닙니다.

다만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다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을 뿐입니다.

대승도 역시 용수보살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空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경전에 대한 비방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소승경전에 대한 비방/험담도 하지 말아야 하며,

대승경전에 대한 비방/험담도 역시 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 다 부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반야바라밀에는 소승과 대승의 차이점과 구분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반야바라밀 그 자체에는 소승도 없고 대승도 없습니다.

소승/대승이란 속제에서나 구분이 있는 것이지, 진제에서는 그러한 구분조차 없습니다.

 

 

 

반야심경 해설 2.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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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반야심경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준말이며,

금강경은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의 준말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이나 둘 다 똑같이 그 핵심은 반야바라밀다입니다.

본래는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인데,

한국에서는 보통 줄여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정확한 용어는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이기 때문에

반야심경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바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입니다.

해탈의 핵심이 바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이기 때문이죠.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반야(般若)와 바라밀다(波羅蜜多)의 합성어입니다.

반야와 바라밀다의 뜻을 알아보겠습니다.

1. 반야(般若)

반야(般若)란 지혜 를 말합니다. 통찰지입니다.

뭐가 반야이며, 뭘 통찰해야 그게 통찰지일까요?

뭐가 지혜인지 우선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지혜라는 것은 제법(諸法), 즉 삼라만상 모든 것들의 존재방식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의 반대는 무명(無明)인데 무명이란 곧 삼라만상의 존재방식을 잘못 알고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반야(般若), 즉 지혜/통찰지라는 것은, 모든 것의 존재방식을 제대로 알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 삼라만상 모든 것들의 존재방식은 어떤 것일까요?

그게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법(緣起法)입니다.

연기법(緣起法)이란 인(因)과 연(緣)이 서로 상호의존하여 모든 법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뜻 합니다.

연기법(緣起法)이란 가장 쉽게 표현하면 상호의존성을 뜻합니다.

상호의존성이란 독립적인 실체가 없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삼라만상에 독립적인 실체가 없을까?

바로 상호의존성 때문입니다. 이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무명(無明)이란 바로 이걸 모르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무명(無明)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엔 독립적인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왜 중생은 무명(無明)에 빠져서 고통을 당할까요?

왜냐하면 보여지는 것이 진짜처럼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냥 우리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면 언제나 진짜처럼 보여집니다. 그래서 속는 것입니다.

속기 때문에 모든 것에 실체가 있는 줄 알고, 집착을 하게 됩니다.

집착을 하게 되므로 온갖 고통이 생깁니다.

집착하는 것을 못 이루거나, 이뤘어도 결국 잃어버리게 되므로 온갖 고통이 발생합니다.

이런 것이 무명(無明)입니다.

이와 같이 중생의 무명(無明)이란 삼라만상의 존재방식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반야(般若)란 이와 반대로 모든 것의 존재방식을 제대로, 똑바로, 사실 그대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써놨듯이 모든 것의 존재방식이란 바로 상호의존성...즉 연기(緣起)입니다.

인과 연이 서로 의존해서 모든 것이 발생하므로, 거기에는 독립적인 실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존재건 사물이건 모조리 다 순간순간마다 변해갈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게 무상하게 변해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상호의존성 때문입니다.

변해가는 게 당연합니다.

반야(般若)란 곧 지혜/통찰지이며, 지혜/통찰지란 존재 및 사물의 존재방식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2. 바라밀다(波羅蜜多)

바라밀다(波羅蜜多)는 피안으로 건너간다/다다른다...라는 뜻 입니다.

한자로는 도피안(到彼岸)입니다.

바라밀의 종류는 엄청나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승의 육바라밀은 가장 중요한 여섯 가지 바라밀을 취합니다.

피안으로 건너가게 해주는 핵심이 바로 반야(般若)입니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입니다.

지혜라는 배에 타고, 열반이라는 섬에 도착합시다.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

아라한이 되는 것도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로 인한 것이고,

벽지불이 되는 것도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로 인한 것이고,

부처가 되는 것도 역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로 인한 것 입니다.

무상/고/무아의 삼법인이 있고, 공/무상/무작의 삼해탈문이 있고, 또 반야바라밀이 있습니다.

여기서도 핵심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입니다.

삼법인과 삼해탈문과 반야바라밀의 관계도 자세히 알아야 합니다.

이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너무도 심오해서 말이나 언어로써 형용이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공하여 모습도 없고, 작위도 역시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중생은 언제나 어떤 모습이나 실체가 있는 것을 찾으려는 게 뼈에 박힌 습관입니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더더욱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행하기 때문이죠.

불교의 깨달음이란 세속의 종교나 세속의 도 닦는 그런 것들과는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사실 접근이 어렵습니다.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실체가 없어 공하며, 그러므로 모습(相)이 없고, 그로 인해 작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걸 말이나 언어로써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마치 허공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과 보살님과 같은 위대한 성인들께서는

비록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가 말이나 언어가 끊긴 언어도단의 경지이지만,

말과 언어로써 중생들을 위해 설하십니다.

왜냐하면, 비록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가 말과 언어, 생각이 끊긴 경지라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말과 언어로써만이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기에 그걸 취해서 중생을 위해 설법을 하시는 것 입니다.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라는 것도 그냥 단어입니다. 말과 단어죠.

그러므로 말과 단어라는 것은 모조리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이지, 달 그 자체는 아닙니다.

다만 이러한 용어는 우리 인간세계에서 쓰이는, 즉 서로 통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그 뜻을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부처님께서 팔만사천 가지의 법문을 하셨지만,

오로지 이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 중에 바로 이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가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가 핵심인가?

이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바로 부처님의 어머니이자, 부처님의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불모(佛母)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반야심경 중간에 나와 있듯이,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정각)을 얻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반야바라밀이 완성된 것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며, 그런 분이 바로 부처님이십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어머니이자, 부처님의 스승이 바로 이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입니다.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로 인해 부처가 탄생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부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보살이 탄생합니다.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의 다른 말이 바로 “여(如), 진여(眞如), 법성(法性), 실제(實際)”등입니다.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행하는 방법이 바로 삼해탈문인 空/無相/無作입니다.

삼해탈문인 空/無相/無作에 접어들게 하는 것이 바로 삼법인인 無常/苦/無我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를 배울 때는 삼법인을 배우고, 삼해탈문의 배우고,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합니다.

무상/고/무아는 삼법인인데, 이 삼법인으로 해탈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도 반드시 아셔야 합니다.

무상/고/무아는 방편설법입니다.

그러므로 삼법인은 진제가 아니고 속제에 해당하는 진리입니다.

소승이나 대승이나 둘 다 똑같이 해탈의 문은 세 가지이며 바로 空/無相/無作입니다

그래서 니까야나 청정도론에서도 해탈의 근본은 바로 空/無相/無願임이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無作이 곧 無願입니다.

같은 뜻인데 어떤 사람은 作으로 변역했고, 어떤 사람은 願으로 번역했을 뿐이지 같은 뜻 입니다.

바램이란 곧 뭘 짓는다는 것이기 때문에 뜻이 똑 같습니다.

어찌됐건 삼법인인 무상/고/무아로써 해탈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해탈문에 접어들게 하는 통로입니다.

실제 해탈케 하는 삼해탈문은 空/無相/無願입니다.

대승이나 소승이나 금강승(티벳불교)이나 다 똑같이 해탈의 문은 空, 딱 하나입니다.

無相이나 無願은 空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空하여 相이 있을 수 없으니 無相이고, 相이 없으니 뭘 바랄 것도 없다는 것이 無願입니다.

 

 

 

반야심경 해설 1. 마하(摩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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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摩訶)라는 뜻은 크다는 뜻 입니다.

한자로는 대(大)죠.

뭐가 크다는 것일까요?

바로 반야바라밀다가 크다는 것입니다.

육바라밀은 여섯개의 바라밀이라는 의미입니다.

보시바라밀/지계바라밀/인욕바라밀/정진바라밀/선정바라밀/반야바라밀

이 여섯개의 바라밀이 있지만,

오로지 반야바라밀에만 마하(摩訶)가 붙습니다.

그래서 <마하반야바라밀>입니다.

반야경에서 사리불께서 말씀하셨듯이 마하바라밀이 곧 반야바라밀입니다.

또한 육바라밀 중에서 가장 핵심이 바로 반야바라밀입니다.

그래서 오로지 반야바라밀에만 마하(摩訶)가 붙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크고 더 이상의 것이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 곧 마하반야바라밀입니다.

마하(摩訶)의 의미...즉 크다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야바라밀이 뭔지 알아야 합니다.

세속에서는 어떤 모습을 정해놓고 크다고 하지만,

이 반야바라밀은 그 반대로 모습, 즉 相이 없기 때문에 생각으로는 측정할 수도 없어 무량하게 큰 것입니다.

그래서 반야바라밀 앞에 마하(摩訶)가 붙습니다.

마하(摩訶)반야바라밀.............

 

 

반야심경 해설에 대한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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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카테고리에서는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즉 반야심경을 제 나름대로 해설하려고 합니다.

물론 틀리고 잘못되게 해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다만 참고용으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반야심경의 제대로 된 뜻을 완벽하게 이해하려면 600권짜리 반야경을 읽어봐야 합니다.

반야심경의 흐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사리자께서 관세음보살님께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어떻게 닦는가를 질문하자,

관세음보살께서 사리자에게 그걸 핵심만을 추려서 설명하는 내용이 바로 반야심경입니다.

 

우선은 나라고 여기는 오온의 공함부터 관해야 함을 말씀하시고,

그 오온인 색수상행식에는 스스로의 성품이 없어 空임을 설명하고,

空이 곧 색수상행식의 실상임을 나열했으며,

 

그 후에는 空의 모습을 설명하고,

그 다음에는 空 그 자체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길게 나열해서 고정관념을 박살내주며,

 

그 후엔 일체가 공하여 얻을 수 없음을 설명하고,

그 얻을 수 없음이 바로 반야바라밀의 모습이라 보리살타는 그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마음에 해탈을 얻고 결국 부처님을 이루게 되며,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역시나 의지할데 없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니, 

이 반야바라밀다는 그야말로 보물 중의 보물이라 깊게 찬탄하는 부분이 나오며,

마지막엔 반야바라밀다주를 직접 알려주는 것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아래는 반야심경 전문입니다.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以無所得故 菩提薩타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罫碍 無罫碍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주석)주문은 산스크리트어 음차(音借) 인데  菩提 [ 보리 ] 를 초기에는 유사음인 '모지'로 읽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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