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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_BJ_H0254_T_001 URL복사 통합뷰어 010_0893_b_01L 선학입문禪學入門 선학입문 서 『선바라밀禪波羅蜜1)은 천태 지자天台智者2) 선사께서 설하신 것이다. 그 제자 법신法愼이 이를 기록해 10권으로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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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_BJ_H0254_T_002 URL복사 통합뷰어 010_0894_a_02L 범례凡例 一. 지자 대사智者大師께서 설하신 선법禪法은 10권으로 『선바라밀禪波羅蜜』이라 하는데, 바라밀은 구경究竟이란 뜻이다. 이제 그 3분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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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_BJ_H0254_T_003 URL복사 통합뷰어 010_0894_c_02L 선학입문禪學入門 上卷 총목차總目次 선학입문 서범례상권제1. 입식문入式門제1장 선바라밀의 해석제2장 수증修證의 명칭과 뜻제3장 근본인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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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학입문禪學入門 上卷

총목차總目次

선학입문 서
범례

상권
제1. 입식문入式門
제1장 선바라밀의 해석
제2장 수증修證의 명칭과 뜻
제3장 근본인 세 가지 문을 세움
제4장 먼저 방편의 대강을 설함

제2. 식문息門
제5장 호흡을 세는 법
제6장 호흡을 따르는 법
제7장 호흡을 관찰하는 법
제8장 욕계정欲界定
제9장 초선정
제10장 제2선정
제11장 제3선정
제12장 제4선정
제13장 사무량심四無量心
제14장 공처정空處定
제15장 식처정識處定
제16장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제17장 비유상비무상처정非有想非無想處定
제18장 육묘문六妙門
제19장 십육특승十六特勝
제20장 통명관通明觀

하권
제3. 색문色門
제21장 구상九想
제22장 팔념八念
제23장 십상十想
제24장 팔배사八背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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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_BJ_H0254_T_003 URL복사 통합뷰어 010_0894_c_02L 선학입문禪學入門 上卷 총목차總目次 선학입문 서범례상권제1. 입식문入式門제1장 선바라밀의 해석제2장 수증修證의 명칭과 뜻제3장 근본인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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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入式門

  •  釋禪波羅蜜第一章
  •  修證名義第二章
  •  立宗三門第三章
  •  先說方便大綱第四章
    • 第二息門
    •   禪學入門下卷
    •  跋
    •  書禪學入門後
    •  跋

제25장 팔승처八勝處
제26장 일체처一切處
제27장 구차제정九次第定
제28장 사자분신삼매師子奮迅三昧
제29장 초월삼매超越三昧

제4. 방편문方便門
제30장 다섯 가지 조건을 갖춤
제31장 다섯 가지 욕망을 다스림
제32장 다섯 가지 덮개를 버림
제33장 다섯 가지 법을 조절함
제34장 다섯 가지 법을 행함
제35장 삼지三止
제36장 선정 중에 선근이 나타나는 모습을 증험함
제37장 선근이 나타나는 모습의 진위 판별
제38장 악근이 나타나는 모습을 증험함
제39장 나쁜 장애를 대치하는 법
제40장 편안한 마음으로 선을 닦음
제41장 병을 치료하는 법
제42장 마사魔事를 밝힘
발문
선학입문 후기
발문

제1. 입식문入式門
제1장 선바라밀의 해석
선바라밀禪波羅蜜1)은 당나라 말로 정도定度이다. 선나禪那는 중국말로 정려靜慮정靜은 곧 선정(定)이고, 려慮는 곧 지혜(慧)이다.이고, 또한 사유수思惟修선정에 들어 고요히 사유하는 것을 선나라고 한다는 의미이다.라고도 한다. 바라밀波羅蜜은 중국말로 도피안到彼岸생사는 이 언덕이고 열반은 저 언덕이며 번뇌는 그 사이에 흐르는 강이다. 보살은 무상無相의 오묘한 지혜로 선정의 배를 타고 생사의 이 언덕에서 번뇌의 강을 건너 열반의 저 언덕에 도달한다.이라 하고, 또한 사구경事究竟이라고도 한다. 선이라 말하는 것에는 세간선世間禪·범부선凡夫禪·외도선外道禪·이승선二乘禪 등도 있어 모두 선이라고 부르지만 구경이 아니며 피안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오직 이 법문만이 범부가 닦는 세간선으로부터 출세간선에 이르고 구경의 피안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바라밀이라고 한다.

 

立宗三門第三章
『선학입문』 禪學入門上卷(ABC, H0254 v10, p.895b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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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_BJ_H0254_T_003 URL복사 통합뷰어 010_0894_c_02L 선학입문禪學入門 上卷 총목차總目次 선학입문 서범례상권제1. 입식문入式門제1장 선바라밀의 해석제2장 수증修證의 명칭과 뜻제3장 근본인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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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수증修證의 명칭과 뜻
선을 닦는 법을 나누어 구별하면 네 가지 이름이 있으니, 첫째는 세간선世間禪, 둘째는 세간이기도 하고 출세간이기도 한 선(亦世間亦出世間禪), 셋째는 출세간선出世間禪, 넷째는 세간도 아니고 출세간도 아닌 선(非世間非出世間禪)이다.
세간선이란 곧 사선四禪·사무량심四無量心·사무색정四無色定 등의 법이다. 세간이기도 하고 출세간이기도 한 선이것은 유루有漏이기도 하고 무루無漏이기도 하다.은 육묘문六妙門·십육특승十六特勝·통명관通明觀 등의 법이다. 출세간선무루선無漏禪이라고도 한다.은 곧 구상九想·팔념八念·십상十想·배사背捨·승처勝處·일체처一切處·차제정次第定·사자삼매師子三昧·초월삼매超越三昧 등의 법이다.
부정관문不淨觀門 가운데 구상·팔념·십상의 세 가지 법은 괴법壞法을 관하는 선이고, 배사·승처·일체처의 세 가지 법은 불괴법不壞法을 관하는 선이며, 차제정은 단련하는 선이고, 사자삼매는 훈숙하는 선이며, 초월삼매는 정교하게 가다듬는 선이다.
처음 수행에 들어갈 때는 그저 근기에 따라 자신에게 알맞은 것을 따라가야지 함부로 수승한 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가령 마음에 어지러운 생각이 많은 사람일 경우엔 식문息門을 따라 들어가야만 한다. 즉 호흡을 헤아리는 데 온 마음을 쏟아 순간순간의 마음에 틈이 없어 어지러운 생각이 끼어들지 못하면 마음속 생각이 모이고 고요해져 도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탐욕이 많은 사람일 경우엔 부정관문不淨觀門을 따라 들어가야 한다. 혐오하는 마음을 일으켜 음욕과 탐욕이 스스로 수그러들면 도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제3장 근본인 세 가지 문을 세움
선법을 닦는 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아나파나문阿那波那門2)아나阿那은 중국말로 입식入息이고 파나波那은 중국말로 출식出息이다. 곧 식문息門이다.이고, 둘째는 부정관문不淨觀門곧 색문色門이다. 색色은 몸을 말한다.이며, 셋째는 심문心門이 책에 식息과 색色 두 문만 있고 심문心門을 따로 나열하지 않은 것은 식문과 색문 모두에 지관止觀이 있고 지관이 곧 심법心法이기 때문이다. 심법이 여러 문 가운데 산재해 있으므로 따로 문을 세우지 않았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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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_BJ_H0254_T_003 URL복사 통합뷰어 010_0894_c_02L 선학입문禪學入門 上卷 총목차總目次 선학입문 서범례상권제1. 입식문入式門제1장 선바라밀의 해석제2장 수증修證의 명칭과 뜻제3장 근본인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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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으로 선을 닦는다는 것은, 호흡으로 마음을 거두어 사선四禪·사공四空·사무량심四無量心·특승特勝·통명通明 등의 선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을 사지事止곧 세간선世間禪이다.라고 한다. 색으로 선을 닦는다는 것은, 부정관不淨觀 등으로 마음을 거두어 구상九想·팔념八念·십상十想·배사背捨·승처勝處·일체처一切處·차제정次第定·사자삼매師子三昧·초월삼매超越三昧 등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을 이지理止곧 출세간선出世間禪이다.라고 한다. 마음으로 선을 닦는다는 것은, 지혜를 가지고 마음의 성품을 반조해 법화法華·염불念佛·반주般舟·각의覺意·수능엄首楞嚴의 여러 대삼매와 자성선自性禪 내지 청정정선淸淨淨禪3) 등의 법에 이르는 것이다. 이는 곧 출세간상상선문出世間上上禪門이다.
왜 세 가지 법으로 문을 삼는가? 첫째는 법상과 같기 때문이고, 둘째는 편리함에 따랐기 때문이며, 셋째는 법을 다 포함하기 때문이다.
법상과 같다는 것에 대해 말한다. 가라라歌羅邏4) 때에가라라는 중국말로 응활凝滑이며, 태에 든 처음 모습이다. 세 가지가 있으니, 명命과 난煖과 식識이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명이라 하고, 썩거나 문드러지지 않는 것을 난이라 하며, 이 가운데 있는 마음과 뜻을 식識이것은 순간순간 인지하는 마음이다.이라고 한다. 이 세 가지 법이 화합하여세 가지 법이란 명·난·식이며, 명·난·식은 곧 식息·신身·심心이다. 오음五陰·사대四大·육근六根·육식六識은 이 세 가지 법에 의해 이루어지고 세 가지 법이 화합해 생긴 것이다. 따라서 세 가지 법은 셋이면서 곧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셋으로 돌아간다. 태어나 어른이 될 때까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러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서 이 가운데서 인상人相·아상我相·중생상衆生相5) 등을 멋대로 일으킨다. 그리하여 온갖 업행業行을 저지르고 마음에 집착을 일으키며 이렇게 전도된 인연으로 삼계三界를 유전하는데, 만약 그 근원을 찾아본다면 본래 이 세 가지 법을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세 가지 법문을 세운 것이니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은 것이다.
편리함에 따랐다는 것에 대해 말한다. 호흡으로 선을 닦으면 두 가지 편리함이 있다. 첫째는 선정을 빨리 얻을 수 있고, 둘째는 무상함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또 색으로 문을 삼으면 두 가지 편리함이 있다. 첫째는 탐욕을 끊을 수 있고, 둘째는 가짜임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마음으로 문을 삼는 것에도 두 가지 편리함이 있다.


첫째는 일체의 번뇌를 조복시킬 수 있고, 둘째는 공의 이치를 쉽게 깨칠 수 있다.
법을 다 포함한다는 것에 대해 말하면, 이 세 가지 법이 선문禪門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주요한 것을 들자면 세 가지에 지나지 않지만 이것을 벌여 놓으면 한량이 없다. 예를 들어 식문 중에는 호흡을 세는 것, 호흡을 따르는 것,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 있다. 색문에도 바깥의 색을 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자신의 색을 대상으로 삼기도 하며, 자비를 일으키기도 한다. 또한 부처님의 상호를 대상으로 삼아 실상을 깨닫는 관에 이를 수도 있다. 심문에도 지止·관觀·각覺·료了 등이 있다. 또한 온갖 마음을 깨달아서 마음이 아닌 것에 들어가고 마음이 아닌 것을 깨달아 한량없는 마음을 내기도 하며, 혹은 마음도 아니고 마음이 아닌 것도 아님을 깨달아 일체의 마음과 마음 아닌 것을 알기도 한다. 이처럼 세 가지 문에는 각기 한량없는 법이 있고 이르는 경지 또한 같지 않다. 따라서 세 가지 문이 일체의 선문을 총괄한다고 하였다.
이 세 가지 문은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모두 지을 수 있다. 왜 그런가? 불제자인 경우 세간선을 닦더라도 성스러운 깨달음을 얻고, 외도들의 경우 역시 마음을 관찰하지만 다른 견해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 가지 문이 서로 통하지만 마음을 쓰는 것이 다르므로 선을 닦아 도를 얻는 것도 각각 다른 것이다.
 
제4장 먼저 방편의 대강을 설함
왜 먼저 방편을 설하는가? 방편의 조목이 방편문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나 도를 닦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알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방편의 대강大綱을 입식문入式門에서 설명하여 학인들이 미리 알도록 하겠다.
방편에는 내방편과 외방편의 두 문이 있다. 외방편에는 또 다섯 가지 조목이 있다.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다섯 가지 조건(五緣)을 갖추는 것이고, 둘째는 다섯 가지 욕망(五欲)을 다스리는 것이며, 셋째는 다섯 가지 덮개(五蓋)를 버리는 것이고, 넷째는 다섯 가지 법(五法)을 조절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다섯 가지 법을 행하는 것이다. 다섯 조목에 각기 다섯 항목인 이 25법은 모두 선정을 얻지 못했을 때 처음 닦는 방편이다.
 
다섯 가지 조건을 갖춘다는 것은, 첫째는 계를 청정하게 지키고, 둘째는 옷과 음식을 빠짐없이 갖추며, 셋째는 한적하고 고요한 곳에 거처하고, 넷째는 모든 세속의 반연을 끊으며, 다섯째는 선지식을 만나는 것이다. 이것이 선을 닦을 때 갖출 다섯 가지 조건이다.
다섯 가지 욕망을 다스린다는 것은, 세간의 빛깔·소리·냄새·맛·촉감 등의 법은 항상 사람을 속이고 미혹하게 하여 온갖 착한 일들을 파괴한다. 만약 이들의 허물을 분명하게 알아 다스리고 싫어하며 떠나지 않는다면 어떤 선이나 삼매도 얻을 길이 없다.
다섯 가지 덮개를 버린다는 것은, 첫째 탐욕의 덮개, 둘째 성냄의 덮개, 셋째 수면의 덮개, 넷째 산란과 후회의 덮개, 다섯째 의심의 덮개(를 버리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는 삼독으로부터 일어나 그 마음을 덮고 가려서 청정함을 얻지 못하게 하니 빨리 물리치고 버려야만 한다.
다섯 가지 법을 조절한다는 것은, 첫째는 음식을 조절하고, 둘째는 수면을 조절하며, 셋째는 몸을 조절하고, 넷째는 호흡을 조절하며, 다섯째는 마음을 조절하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가 알맞게 조절되면 삼매가 쉽게 생긴다. 만약 고르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방해와 어려움이 많아져서 선근이 일어나기 어렵다.
다섯 가지 법을 행한다는 것은, 첫째 의욕, 둘째 정진, 셋째 염念, 넷째 선교방편의 지혜, 다섯째 일심(을 행하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는 마음을 일으켜 정진하고 마음을 오로지 해 한결같이 행하는 것이다.
내방편에도 또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지문止門을 밝히고, 둘째는 선악의 근성을 증험하는 것을 밝히며, 셋째는 마음을 편안히 하는 법을 밝히고, 넷째는 병환 다스리는 것을 밝히며, 다섯째는 마사魔事를 알아차리는 것을 밝힌다.
지止라고 하는 것은, 첫째는 계연지繫緣止, 둘째는 제심지制心止, 셋째는 체진지體眞止이다. ‘지’는 마음을 한곳에 매어 두고 잡념을 그쳐서 흘러 다니지 않게 하는 것이다. ‘묶어 두는 대상(繫緣)’에는 다섯 곳이 있다. 마음을 정수리에 집중하거나, 이마 끝단이나 콧등이나 배꼽 아래의 단전이나 발바닥에 집중한다.
『선학입문』 禪學入門上卷(ABC, H0254 v10, p.896b01)
 
제심지(制心止)란, 마음은 본래 모습과 빛깔이 없고 처소도 없으니 어찌 그것을 대상에 매어 둘 수 있겠는가? 다만 그 마음을 모아 모든 어지러운 생각을 쉬면 곧 이것이 지를 닦는 것이다. 체진지란, 바른 지혜로 모든 법을 체달하여 관찰하면 모두 자성이 없고 일체가 다 공하여 취할 것도 없고 집착할 것도 없다. 그러면 망상이 저절로 쉬어 없어진 듯이 깨끗해진다. 이것을 체진지라 한다.
선악의 근성을 증험한다고 하는 것은, 첫째 선한 근성, 둘째 악한 근성(을 증험하는 것)이다. 수행자가 지를 닦으면 그 마음이 맑고 고요해져 과거세의 업과 습기가 자연히 드러나게 된다. 그리하여 정에 들어갔을 때 홀연히 좋은 경계를 보기도 하고 홀연히 나쁜 습기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이때 선정만을 닦아 어떤 것도 취하거나 집착하지 않으면 선정의 힘이 점점 깊어지고 선근이 더욱 드러나게 된다. 선이라면 길러 자라게 하고 악이라면 다스려야 한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법에는 대략 다섯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편의便宜를 따르고, 둘째는 대치對治를 따르며, 셋째는 좋아하는 것(樂欲)을 따르고, 넷째는 차례를 따르며, 다섯째는 제일의第一義를 따르는 것이다. 이는 과거의 근성이 나타나면 편의에 따라 선한 습성은 따르고 악한 습성은 없애며, 각기 좋아하는 바에 따라 편안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마음을 편안히 하여 도를 닦는 수행자라 하더라도 몸에 오래된 병환이 있기도 하고 혹은 음식을 잘못 먹어 병이 생기기도 한다. 그럴 때면 그 병의 원인을 잘 파악하여 그에 따라 방법을 써야 한다.
마사魔事를 알아챈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魔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번뇌의 마, 둘째는 음陰·입入·계界의 마, 셋째는 죽음의 마, 넷째는 욕계천자欲界天子의 마이다. 이와 같은 마들은 사람들이 행하는 도를 파괴하니, 잘 살펴서 미혹하지 않아야만 한다.

 

제2. 식문息門일명 아나파나문이다(一名阿那波那門)

제5장 호흡을 세는 법
호흡 세는 법을 닦고자 하면 먼저 호흡의 상을 분별해야 한다. 호흡에는 네 가지 상이 있다. 첫째는 풍상風相이고, 둘째는 천상喘相이며, 셋째는 기상氣相이고, 넷째는 식상息相이다. 이 네 가지 상에 대한 설명은 제33장의 호흡을 조절하는 법에 자세히 나온다. 풍상의 호흡을 세면 기운이 흩어지고, 천상의 호흡을 세면 기운이 맺히며, 기상의 호흡을 세면 피곤하다. 이 세 가지는 병이므로 모두 사용해서는 안 된다. 마땅히 호흡을 고르는 법을 이용해 소리도 나지 않고 맺히지도 않고 거칠지도 않게 하여 들어오고 나감이 면면히 이어져 있는 듯 없는 듯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식상이니 비로소 쓸 수 있다고 하겠다.
날숨을 세거나 들숨을 세어야지 두 가지를 함께 세어선 안 된다. 날숨을 세게 되면 기도가 켕기지 않고 몸이 팽만하지 않으며 몸과 마음이 가벼워져 삼매에 쉽게 들어간다. 들숨을 세면 호흡을 따라 안으로 마음이 거두어져서 쉽게 정에 들어갈 수 있으며, 기식氣息이 안으로 충실해져 몸의 기력이 가뿐하고 왕성해진다. 들숨과 날숨을 함께 세면 호흡이 막히는 병이 목구멍 속에 생겨서 마치 풀잎이 걸린 것처럼 토해도 나오지 않고 삼켜도 넘어가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날숨을 세거나 들숨을 세어야 하며, 그 선택은 편의에 맡긴다.
호흡을 세는 법이란, 호흡을 세는 것에 마음을 집중하고 세밀하게 이를 되새겨 마음으로 하나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산란하지 않게 하고 그 중간에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 것이다. 만일 열을 채우지 못하면 그걸 숫자가 모자란다고 하고, 열하나까지 세면 그걸 숫자가 남는다고 한다. 남거나 모자라게 세는 것 모두 선정을 얻는 길이 아니다. 따라서 그런 경우가 많아서는 안 되니, 그런 경우가 많아지면 기운이 가득 차고 배가 불러 앉으려 해도 편안하지 못하게 된다.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세밀하게 하나하나 숫자를 세어 하나에서 열에 이르고, 끝나면 다시 하나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오래도록 익히고 연습하면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상응하게 된다. 이럴 때, 호흡은 허공이 엉긴 듯하고
『선학입문』 禪學入門上卷(ABC, H0254 v10, p.897a01)

마음은 점점 미세해져 세는 것이 거추장스러워지고 세고자 하는 뜻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면 방법을 바꾸어야만 하는데, 호흡 따르는 법을 닦을지 호흡 관찰하는 법을 닦을지는 오직 방편에 달려 있다.


제6장 호흡을 따르는 법
호흡을 세는 것이 익숙해져 마음과 호흡이 서로 의지하게 되면 마음으로 애써 세지 않아도 호흡을 세는 것이 저절로 어긋나지 않으니, 이것을 상응相應마음이 세는 숫자와 응하고 세는 숫자가 마음과 응하는 것이다.이라 한다. 이때에는 호흡 세는 것을 버리고 호흡 따르는 법을 닦아야 한다. 따른다고 하는 것은 한마음으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숨이 들어올 때는 마음도 그것을 따라 코에서부터 목구멍에 이르고 다시 심장, 배꼽, 엉덩이, 넓적다리에 이르며 끝에는 발가락에까지 이른다. 숨이 나올 때는 마음도 따라 나온다. 숨이 몸 밖으로 나와 한 뼘 또는 한 길이나 떨어질 때까지 마음으로 항상 그 뒤를 따른다. 익숙하도록 익혀서 공이 이루어지면 저절로 상응하고 뜻과 생각이 편안해지며 고요히 응어리진다. 이것도 싫증나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면 곧 지관止觀 등의 법을 닦는 것으로 바꿔야만 한다. 호흡을 따르는 법은 제19장 십육특승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으니 참조하라.


제7장 호흡을 관찰하는 법
마음이 항상 대상에 있어서 머물러 어지럽지 않으면‘대상에 있다’고 함은 호흡을 셀 때는 한마음이 세는 데에 있고, 호흡을 따를 때는 한마음이 오직 따르는 데 있으며, 관觀을 닦을 때는 한마음이 관에만 있다. 그러므로 마음이 항상 대상에 있다고 한다. 마음이 항상 대상에 있으면 다른 마음이 끼어들지 못하므로 마음이 머무를 수 있게 된다. 곧 호흡 따르는 법을 버리고 호흡 관찰하는 법을 닦아야 한다. 수행자가 선정에 든 마음에서 마음의 눈으로 몸속에서 미세하게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잘 살피면 그 모양이 허공의 바람과 같다. 또 피부와 힘줄과 뼈와 살 등의 서른여섯 가지 물질6)은 모두 파초와 같이 알맹이가 없고 안과 밖이 모두 더러워 몹시 싫어진다. 또한 숨이 몸에 머무는 것은 마치 구슬을 꿰고 있는 실과 같으며, 차가워지기도 하고 따뜻해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고 늘어나기도 한다는 것을 관찰한다. 또 심식心識은 생겨났다 사라짐이 무상하여 한 찰나도 머무르지 않으므로 집착할 곳이 없음을 관찰한다.
이와 같이 관찰할 때

심안이 밝게 열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모든 털구멍에 두루 퍼져 있음을 알게 되고, 안팎의 오장육부와 벌레들까지도 속속들이 보게 된다. 또한 온갖 괴로움이 핍박하고 한순간에 뒤바뀌며, 일체 모든 법은 다 자성이 없고, 마음에 생겨나는 슬픔과 기쁨도 의지할 곳이 없음을 보게 된다. 그러면 곧 사념처四念處사념처란 육신이 고통임을 생각하고, 느낌이 고통임을 생각하고, 마음이 무상함을 생각하고, 법에는 주체가 없음을 생각하는 것이다.를 얻어서 네 가지 뒤바뀐 생각7)을 타파하게 된다. 이미 나와 남이 없거늘 선정인들 무엇을 의지하겠는가? 이렇게 관觀을 통한 이해가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각覺과 염念8)을 움직인다면 그것 역시 진실한 도가 아니다. 이때에는 방법을 바꾸어 환還과 정淨 등의 법을 닦아야 하는데 그 설명은 제18장 육묘문六妙門에 있다.

제8장 욕계정欲界定
호흡법을 수행함에 따라 마음이 점점 비고 집중되어 다시는 대상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거칠게 머무는 마음(麤住心)’이라 한다. 그 마음이 없어지듯 점점 미세해지는 것을 ‘미세하게 머무는 마음(細住心)’이라 한다. 또한 이 거친 모습과 세밀한 모습이 생길 때에는 반드시 몸을 지탱하는 법(持身法)이 일어난다. 즉 자연히 몸과 마음이 바르고 곧아져 앉아 있어도 피곤하지 않은 것이 마치 어떤 물건이 몸을 지탱하고 있는 것 같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저 미미하게 몸을 지탱하는 힘이라면 그건 좋은 경계이다. 그러나 만일 그 힘이 너무 급하고 강하면 (지신법이) 생겼을 땐 몸을 긴장되게 하여 괴롭고, (지신법이) 사라졌을 땐 늘어져 사람을 노곤하게 한다. 따라서 이것은 선법善法이 아니다.
마음이 아주 세밀해져 감각이 자연히 밝고 깨끗해지며, 선정법이 마음을 유지해 제멋대로 움직이지 않으며,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들어가 뜻이 흩어지지 않으면 이것을 욕계정欲界定이라 한다. 이는 욕계보신欲界報身9)의 상相이 아직 다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이즈음에서 만약 방편을 잘 쓰지 못해 어기거나 범하는 바가 있다면 선정을 잃게 된다. 예를 들어 수행자가 선정에 든 모습을 드러내거나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여 다른 사람이 알게 하거나 혹은 어떤 일을 인연해 선정의 모습이 파괴된다면 이는 밖의 장애(外障)이다. 바라는 마음·의심하는 마음·놀라거나 두려워하는 마음·기뻐하는 마음·애착하는 마음·근심하거나 후회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는 안의 장애(內障)이다.

이 여섯 가지 마음도 선정을 파괴하니 반드시 알아 두어야만 한다.
모든 선정 사이마다 미도지정未到地定이 있다. 즉 욕계정에 있으면서 아직 초선을 얻지 못했을 때 다른 경계가 있어서 초선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욕계정에 든 뒤 몸과 마음이 없어진 듯 확 트여 욕계의 몸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고, 앉아 있는 가운데 머리와 손을 볼 수 없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다면, 이를 미도지정이라 한다. 이것이 곧 초선의 방편정方便定으로 미래선未來禪이라고도 하고, 또 홀연담심忽然湛心이라고도 한다. 이 선정을 얻었을 때 간혹 삿된 거짓이 생기는데, 첫째 지나치게 밝은 것과 둘째 지나치게 어두운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삿된 선정이다. 밝다는 것은 선정에 들었을 때 마치 신통을 얻은 것처럼 바깥 경계의 모든 색과 형상을 보는 것이다. 어둡다는 것은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아무 지각도 없는 것이니, 이것을 무심상법無心想法이라고 한다. 이 두 가지를 만나면 빨리 버려야만 한다.


제9장 초선정
수행자가 욕계의 미도지정 가운데서 ‘움직이는 감촉(動觸)’의 열 가지 선법善法을 얻고, 움직이는 감촉이 발생한 뒤 또 열여섯 가지 감촉을 증득하여 성취하는 것이 초선의 모습이다.10) 즉 미도지정에서 선정에 점점 깊이 들어가면 몸과 마음이 비고 고요하여 안팎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루나 이레를 경과하고 혹은 한 달이나 한 해가 지나도록 선정에 든 마음을 허물지 않으며 지키고 증장시키면, 선정 중에 홀연히 몸과 마음이 응집되어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움직일 때 도리어 그 몸이 구름 같고 그림자 같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먼저 몸의 윗부분에서부터 생기면 대부분 선정에서 물러나게 되고, 먼저 아랫부분에서부터 생기면 선정이 진전되는 경우가 많다.
움직이는 감촉이 일어날 때는 공덕이 한량없으나 대략 말하면 열 가지 선법善法이 권속이 된다. 첫째 안정됨(定), 둘째 걸림 없음(空), 셋째 밝고 깨끗함(明淨), 넷째 희열喜悅, 다섯째 즐거움(樂), 여섯째 좋은 마음이 생김(善心生), 일곱째 지견이 밝아짐(知見明了), 여덟째 번뇌의 얽힘에서 벗어남(無累解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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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째 경계가 눈앞에 나타남(境界現前), 열째 마음이 고르고 유연함(心調柔輭)이다. 이 열 가지 권속이 움직이는 감촉과 함께 생겨 하루가 가기도 하고 혹은 한 달이나 한 해 동안 지속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이 지나간 뒤에는 다시 다른 감촉들이 차례대로 일어난다. 움직임(動)·가려움(痒)·시원함(凉)·따스함(煖)·가벼움(輕)·무거움(重)·거침(澁)·매끄러움(滑) 등의 여덟 감촉과 흔들림(掉)·기댄 느낌(猗)·차가움(冷)·뜨거움(熱)·들뜸(浮)·가라앉음(沈)·딱딱함(堅)·부드러움(輭) 등의 여덟 감촉, 합하여 열여섯 감촉이 된다. 여기에도 권속으로 수많은 선법이 있다. 왜 그런가? 색계의 청정한 사대가 욕계의 몸속에 머물게 되면 거친 것과 세밀한 것이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흔들림(掉擧) 등의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열여섯 가지 감촉은 다 갖춰지는 경우도 있고, 혹은 다 갖춰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미도지정을 얻기 전에 먼저 이 감촉이 일어나게 되거나 또는 열 가지 선법이 수반되지 못하면 대부분 병든 모습이거나 혹은 마사魔事이니 반드시 잘 분별해야만 한다.
초선에는 다섯 가지 지支가 있다. 첫째는 각지覺支이니, 처음 마음으로 지각해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관지觀支이니, 세밀한 마음으로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희지喜支이니, 그 마음이 경사스럽고 기쁜 것을 말한다. 넷째는 낙지樂支이니, 그 마음이 편안하고 담담한 것을 말한다. 다섯째는 일심지一心支이니, 고요히 흩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지支’란 갈래가 나뉜다는 뜻이며 가지가 지탱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치 나무가 뿌리와 줄기로 인하여 가지가 있고, 또 뿌리와 줄기는 하나뿐이지만 가지는 각각 다른 것과 같다. 지금 한 선정의 마음속에서 다섯 가지 지가 생겨나는 것이 마치 많은 나무가 숲을 이루는 것과 같으므로 또 지의 숲(支林)이라고도 한다. 욕계의 미도지정에도 비록 하나의 고요한 선정심禪定心이 있긴 하지만 각과 관 등의 다섯 가지가 서로를 지탱하지 못하므로 선정에 든 마음이 얕고 엷어서 잃어버리기가 쉽다. 만약 초선을 얻어 다섯 가지 지가 숲을 이루면 선정에 든 마음이 안온하고 굳세어서 파괴하기 어렵다. 초선을 ‘벗어났다(離)’고도 하고 ‘갖추었다(具)’라고도 한다. 벗어났다는 것은 다섯 가지 덮개(五蓋)를 벗어났음을 말하고, 갖추었다는 것은 다섯 가지 지(五支)를 갖추었음을 말한다. 제2선·제3선·제4선에도 모두 지의 숲이 있다. 따라서 모두 이구선離具禪이라 한다.

제10장 제2선정
초선의 미도지정에서 각과 관을 싫어하여 떠나게 되니, 이것을 ‘성스러운 침묵의 선정(聖黙然定)’이라 한다. 사선四禪의 미도지정 뒤에는 모두 고요한 마음이 있다. 이전의 선은 물러나고 새로운 선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때, 그 마음이 조용하고 고요한 것을 말한다. 각覺이란 신근身根과 신식身識이 상응하는 것을 말하고, 관觀이란 의근意根과 의식意識이 상응하는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 법은 마음을 어지럽게 하므로 받아들이거나 집착하지 않아서 그 마음이 고요한 것이다.
수행자가 초선의 허물을 다스릴 수 있으면 초선의 다섯 가지 지와 고요함까지 모두 물러간다. 초선은 이미 떠났고 제2선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그 사이에도 또 선정법이 있다. 이것을 중간선中間禪이라고 하는데, 그 마음이 모두 사라져 없어진 듯한 것이다. 한마음으로 오로지 정진하여 공들이기를 그치지 않으면 그 마음이 맑고 고요해져 흩어짐이 없게 되는데, 이를 미도지정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오랜 시간 동안 잃거나 물러나지 않으며 마음을 오로지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그 마음이 확 트여 밝고, 맑고, 희고, 깨끗해지면서 선정의 마음이 기쁨과 함께 일어난다. 마치 어떤 이가 어두운 방에서 나와 바깥의 광명을 보는 것처럼 활연히 밝아진다.
열 가지 선법은 초선에서 일어난 모양과 같으나 기쁨이 더 크고 아름답고 오묘해 초선보다 뛰어나다. 다만 초선은 촉觸의 즐거움을 느낄 때 신식身識과 상응하기 때문에 ‘바깥의 깨끗함(外淨)’이라고 하는 데 반해, 제2선에서는 심식心識과 상응하기 때문에 ‘안의 깨끗함(內淨)’이라 한다. 마음에 각과 관이 있으면 ‘안의 더러움(內垢)’이 되지만 지금은 각과 관이 없으므로 ‘안의 깨끗함(內淨)’이 된다.
제2선에는 네 가지 지가 있다. 첫째는 내정內淨, 둘째는 희喜, 셋째는 낙樂, 넷째는 일심一心이다. 일심지一心支란 비록 기쁨과 즐거움이 있긴 하지만, 안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반연하지 않고 밖으로 생각을 반연하지 않아 한마음으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일심지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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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제3선정
제2선은 일명 희구선喜俱禪이라고도 하니, 그 선정이 기쁨과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 제3선은 일명 낙구선樂俱禪이라고도 하니, 이 선정이 몸 전체에 가득한 즐거움과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
수행자가 제2선을 관찰하면 선정이 안의 깨끗함으로부터 일어나긴 하지만 큰 기쁨이 용솟음쳐 선정이 견고하질 못하다. 따라서 세 가지 법으로써 그것을 물리치니, 첫째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다스리는 것이며, 셋째는 마음을 관찰하여 끝까지 검토하는 것이다. 모든 선정에서 허물을 다스릴 때 모두 이 세 가지 법을 쓴다. 끝까지 검토해 허물을 알고, 허물을 알아서 다스리며, 다스려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쁨과 고요함이 점차 물러난다. 제3선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중간에도 선정이 있다. 일심으로 오로지 제3선의 공덕을 상념하면 그 마음이 맑고 고요하게 되는데, 이것이 제3선의 미도지정이다. 그 후에 마음이 없어진 듯 선정에 들어가니 안팎에 의지하지 않고 즐거움과 함께 일어난다. 이에 따르는 공덕의 권속은 앞서 말한 것과 같다. 다만 용솟음치는 기쁨이 없고, 면면히 이어지는 즐거움이 안의 마음에서 일어나 아름답고 오묘함이 비유하기도 어려운 점이 다를 뿐이다.
즐거움의 선정(樂定 : 第三禪)이 처음 생겨 아직 몸에 두루 미치지 않았을 때 대부분 세 가지 허물이 있게 된다. 첫째는 즐거움의 선정이 아직 얕은데도 그 마음이 가라앉아서 지혜의 작용이 적은 것이다. 둘째는 즐거움의 선정은 미약한데 마음과 지혜가 세차게 일어나 편안하지 못한 것이다. 셋째는 즐거움과 지혜가 모두 면면하고 미묘하면 대부분 탐착을 일으켜 그 마음이 미혹하고 취해 버린다. 그러므로 경전에 “이 즐거움을 성인은 버릴 수 있으나 다른 사람은 버리기 어렵다.”11)라고 하였으니 수행자는 잘 조절해야만 한다.
만일 마음이 가라앉으면 염念·정진精進·혜慧 등의 법을 써서 북돋워야 한다. 만일 마음이 지나치게 일어나면 삼매 선정의 법을 생각하여 그것을 거둬들여야 한다. 만일 마음이 미혹되어 취하면 나중의 즐거움과 여러 가지 뛰어나고 오묘한 법문을 생각해 스스로 정신을 차리고 마음이 집착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만약 즐거운 법을 잘 닦는다면 그것이 점점 늘어나 온몸에 가득 찰 것이다. 이때는 식을 일으키는 바깥 경계가 없어도

즐거운 법이 안에서 나와 모든 근根에 가득 차고 의식과 상응할 것이니, 세간의 제일가는 즐거움 가운데서도 가장 으뜸이다.
제3선에도 다섯 가지 지가 있다. 첫째는 사捨, 둘째는 염念, 셋째는 지智, 넷째는 낙樂, 다섯째는 일심一心이다. 사지捨支란 즐거움의 선정이 생겨날 때 기쁜 마음을 버리는 것이고, 염지念支란 조화롭고 적당함을 되새겨 즐거움을 늘어나게 하는 것이고, 지지智支란 세 가지 법을 알맞게 써서 세 가지 허물을 벗어나는 것이고, 낙지樂支란 상쾌한 즐거움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며, 일심지一心支란 즐거움을 누리던 마음이 쉬어 한마음으로 고요하고 안정된 것이다.

제12장 제4선정
수행자는 제3선에서 즐거움에는 고통과 근심이 있음을 깊이 보고 한마음으로 싫어하면서 다스려서 집착하지 않는다. 이에 움직이지 않는 선정(不動定)인 제4선을 구하면 미도지정에 들어가 마음에 움직임이나 흐트러짐이 없게 된다. 그 후에 활연히 눈앞이 열리고 선정에 든 마음이 안온해지면서 들고 나는 호흡이 끊어지니, 이것이 제4선이다.
선정이 일어날 때,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사수捨受12)가 함께 생겨나므로 사구선捨俱禪이라 한다. 마음이 밝은 거울처럼 움직이지 않고, 또한 맑은 물에 파도가 없는 것처럼 모든 어지러운 생각이 끊어지고 바른 생각이 견고하며, 허공처럼 모든 더러움에 물듦이 없으므로 또한 부동정不動定이라 한다. 또 세간의 진실한 선정(世間眞實禪定)이라고도 한다. 이때 수행자는 마음이 선善에 의지하지 않으며 또한 악惡에 의탁하지도 않는다. 의지하여 기대는 바가 없고 모양도 없고 바탕도 없으나 신통변화가 모두 이 선정으로부터 나온다.
제4선에는 네 가지 지가 있다. 첫째는 불고불락지不苦不樂支, 둘째는 사지捨支, 셋째는 염청정지念淸淨支, 넷째는 일심지一心支이다. 이 선정은 처음 일어날 때 사수와 함께 일어나 괴로움이나 즐거움과 상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고불락’이라 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선정을 얻고 나면 아래 단계의 뛰어난 즐거움을 버리고도 혐오나 후회를 일으키지 않는다. 또 선정에 발생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음이 생각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지’라 한다. 선정이 명료하여 평등한 지혜로 비추어 깨달으므로 ‘염청정지’라고 한다. 선정에 든 마음이 고요하여 온갖 대상을 대하여도 마음에 움직임이 없으므로 ‘일심지’라 한다.
대개 이 제4선에서는 여전히 색계의 속박이 남아 있다. 외도들은 유위법인 몸과 마음이 생멸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여 고요하고 영원하며 즐거운 열반을 구하려고 하지만 진실로 색을 파괴하는 법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저 삿된 지혜로 그 마음을 없애고는 삿된 법과 상응하여 마음에 기억과 생각이 없게 되면 열반을 증득했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 목숨을 버리고는 무상천에 태어나는데, 여전히 이는 색계色界이며 또한 객천客天이라고도 한다.
혹 어떤 수행자는 색이 있는 게 감옥과 같다고 여겨 한마음으로 색을 파괴하고는 곧장 네 가지 공한 선정(四空定)을 닦는데, 이는 범부선凡夫禪이다. 만일 불제자라면 자신의 수행을 갖춘 뒤엔 다시 남들을 이롭게 하고자 하므로 먼저 사무량심을 닦는다.


제13장 사무량심四無量心
사무량심四無量心이란 자慈·비悲·희喜·사捨이다. ‘자’란 중생을 사랑으로 생각하여 늘 즐거운 일로 그들에게 이익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비’란 중생이 다섯 갈래 세계13)에서 괴로움 겪는 것을 불쌍하게 생각하여 늘 선법善法으로 고통에서 구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희’란 중생들이 모두 기쁨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사’란 세 가지 마음14)을 버리고 다만 중생을 생각함에 미워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것이다.
‘무량’이란 이 네 가지 마음이 친구나 원수, 가까운 사람이나 먼 사람이라는 차별 없이 시방에 두루 미쳐 평등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중생의 성내는 느낌을 없애기 위해 자심을 닦고, 중생의 괴로운 느낌을 없애기 위해 비심을 닦으며, 중생의 즐겁지 않음을 없애기 위해 희심을 닦고, 중생의 증오와 사랑을 없애기 위해 사심을 닦는다.
어떻게 자무량심慈無量心을 닦는가? 선정에 들어가려고 할 때 먼저 “일체중생이 다 쾌락을 누리는 것을 내가 선정 가운데서 수·상·행·식을 통해 보리라.”라고 서원한다. 처음 닦을 때 염청정念淸淨의 마음을 써서 먼저 가장 가깝고 좋아하는 사람, 예를 들면 부모나 형제 중 한 사람을 선택해 그가 즐거움을 누리는 모습을 한마음으로 반연한다. 만일 다른 생각이 끼어들면 거두어서 돌이키고, 다른 경계가 보이더라도 모두 취하지 않는다. 그저 한마음으로 그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관찰하여 확실하고 분명하게 상속하여 끊이지 않으면 삼매가 곧 발생하고, 삼매의 힘을 갖추기 때문에 곧 선정 가운데서 그가 즐거움을 누리며 몸과 마음으로 기뻐하고 얼굴색이 온화해지는 것을 명료하고 분명하게 보게 된다. 이와 같이 친한 사람을 보고 나서는 점점 확대하여 다음에는 그저 그런 관계의 사람들을 보고 나아가 원수에게까지 이른다. 또 열 사람, 백 사람, 한 나라, 한 천하까지 확대시킨다. 이렇게 시방 다섯 갈래 세계의 중생에 이르기까지 다들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봄으로써, 선정의 마음이 점차 깊어져 고요히 움직임이 없어지고 성냄과 원한 등의 괴로움을 벗어나게 된다. 즐거운 일을 중생에게 주는 것은 중생을 반연한 자심(衆生緣慈)이고, 그들에게 법을 주는 것은 법을 반연한 자심(法緣慈)이며, 무위심無爲心으로 취하거나 버림이 없고 주체나 대상의 구분도 없어 중생으로 하여금 이익을 얻게 하면 반연이 없는 자심(無緣慈)이다. 비심·희심·사심 또한 이 경우와 같다.
어떻게 비무량심悲無量心을 닦는가? 수행자는 자심의 선정 가운데서 늘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생각하다가, 자심의 선정에서 깨어났을 때 여전히 중생들이 여러 가지 몸과 마음의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는 마음에 불쌍히 여기는 생각을 일으킨다.
“다섯 갈래 세계의 중생이 이런 큰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나는 알 수 없었고 볼 수도 없었다. 긴 세월 게으름만 떨며 구제하려는 마음을 내지 않았으니 눈 없는 장님과 같았구나. 바라건대 선정 가운데서 모두 알고 모두 보아 부지런히 구제하고 보호하리라.”
이와 같이 원을 세우고 곧 선정에 들어 자심의 관법과 같이 먼저 가깝고 좋아하는 한 사람을 선택해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나아가 시방의 다섯 갈래 세계 일체중생까지 확대한다. 삼매의 힘으로 명료하게 보게 되면 비심이 점점 깊어지게 된다.
어떻게 희무량심喜無量心을 닦는가? 수행자는 비심의 선정에서 고통으로 핍박받는 중생을 불쌍히 여겨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어떤 법으로 구제해야 저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고 모두 환희하게 될까?”
이때 다음과 같이 깊이 관찰한다.
“중생들이 비록 괴로움을 받으나 이 괴로움은 실체가 없다.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기니 본래 이것은 망령된 법이다. 저 고통은 이미 실체가 아니므로 쉽게 없앨 수 있다. 내 마땅히 감로법을 중생에게 널리 베풀어 번뇌의 병을 없애고 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하리라.”
자심과 비심의 관법에 의거하여 한 사람에서 열 사람까지 이르고, 나아가 한량없는 중생이 기쁨을 누리는 모습을 명료하고 분명하게 본다. 그 마음의 기쁨을 말로 다할 수 없지만 마음에 동요가 없으면 선정이 점점 깊어진다.
어떻게 사무량심捨無量心을 닦는가? 수행자는 희심의 선정에서 나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자심으로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 비심으로 괴로움을 없애 주며, 희심으로 크게 기뻐하게 했다고 해서 내가 이익을 주었다고 생각한다면 또한 뛰어난 행이 아니다. 비유하면 자애로운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익을 주어도 은덕을 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내가 즐거움을 주고 기쁨을 주었다고 말한다면 그건 부덕한 짓이다. 지금 마땅히 이 세 가지 마음을 버려야 한다. 바라건대 중생과 더불어 모두 묘한 사심으로 장엄하리라.”
이와 같이 선정에 들어 중생이 괴로워하지도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는 모습을 낱낱이 보면 그 마음이 평등해져 좋아하거나 미워함이 없게 되며, 삼매가 점차 깊어져 견고하고 안온해진다.

사심捨心  가운데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갖가지 일을 하면서도 취하거나 집착하지 않으니, 이것이 사심이다.
이 네 가지 마음을 닦으면 공덕이 넓고 커 현세에서는 뜻밖의 죽음을 당하는 일이 절대 없고 선신들이 옹호할 것이며, 내세에는 범왕梵王15)이 되는 경우가 많으니, 그가 중생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제14장 공처정空處定
색계의 네 하늘은 곧 앞의 사선四禪이다. 무색계의 네 하늘은 곧 사공처四空處이고, 일명 사무색정四無色定이라고도 하니, 형태가 없고 빛깔이 없음을 말한다. 또한 사공정처四空定處라고 하는데, 이미 형태와 빛깔이 없으므로 다만 관찰되는 경계로서 처를 삼음을 말한다. 염처念處·승처勝處·일체처一切處가 모두 관찰하는 대상을 따라 처라는 이름을 얻은 것과 같은 경우이다.
사공四空이란 첫째 공처空處, 둘째 식처識處, 셋째 무소유처無所有處, 넷째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이다. 이들은 모두 각도 없고 관도 없는 성스럽고 고요한 마음이며, 또한 사구선捨俱禪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경에 “허공처정虛空處定을 얻으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그 마음이 점차 늘어난다.”16)고 하였다.
공처정空處定은 다음과 같다. 수행자는 먼저 색법色法의 허물과 죄를 깊이 생각한다.
“만약 형색을 갖춘 몸이 있으면 안으로 굶주림·목마름·질병·거침·무거움·헛됨·거짓 등의 고통이 있고, 밖으로 추위·더위·칼·몽둥이·묶임·형벌 등의 괴로움을 받게 된다. 인연이 화합하여 과보로 받은 이 몸이 곧 괴로움의 근본이다. 또 색법은 마음을 얽매어 자유롭지 못하게 하니, 이것은 마음의 감옥이다. 어찌 탐착하랴. 허공은 형색이 없이 확 트이고 고요하여 어떤 허물이나 근심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한마음으로 자기 몸을 자세히 관찰한다. 모든 털구멍과 아홉 구멍이 비고 성근 것을 모두 보며, 마치 얇고 고운 비단처럼 안팎이 서로 통하고

또 파초처럼 겹겹이 싸여 있지만 알맹이가 없다는 것을 본다. 그러면 떡시루의 체와 같고, 거미줄 같다가 점점 미미해져 몸이라는 구분이 모두 사라진다.
이와 같이 관찰할 때 눈으로 보던 빛깔이 없어지고 소리·냄새·맛·촉감도 차례차례 모두 사라진다. 색법이 사라지고 나서 한마음으로 공을 반연하면 색의 선정이 곧 물러나는데, 공처정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도 중간선이 있다. 이때 절대로 걱정하거나 후회해서는 안 된다. 마음을 오로지하여 부지런히 힘쓰면서 공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곧 그 마음이 사라지고 저절로 공의 연緣에 머물게 되니, 이것이 미도지정의 모습이다. 그런 후에 활연히 공과 상응하여 그 마음이 밝고 깨끗해지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이 점점 늘어나고, 선정에서 오직 끝없는 허공만 보이며 마음에 흐트러짐이 없게 된다. 그러면 이미 색의 속박이 없어져 심식이 맑고 고요하며 걸림 없이 자재하게 되니, 마치 새가 새장을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것과 같다.


제15장 식처정識處定
수행자가 공처정에서 색법을 타파하고 허공을 관하는 것은 바깥의 법을 반연하는 것이므로 흩어져 없어지기 쉽다. 따라서 식처정識處定만 못하다. 식처정은 안의 법을 반연하는 것이므로 선정에 안온함이 많다. 이에 곧 공처정을 버리고 한마음으로 현재의 심식을 반연하여 찰나찰나 떠나지 않으면 곧 그것이 사라지고 저절로 식의 연에 머무르게 되니, 이것이 미도지정이다.
그 후 활연히 식과 상응하여 마음이 안정돼 움직이지 않고, 다른 현상은 보이지 않고 오직 현재의 심식心識이 찰나찰나 머물지 않는 것만 보게 된다. 그러면 선정의 마음이 분명하고 식으로 생각함이 대단히 넓어 한량없고 끝이 없다. 또한 선정 가운데서 과거에 이미 사라진 한량없고 끝없는 식을 기억하며, 미래에 일어날 한량없고 끝없는 식도 다 선정 중에 나타나 식법識法과 상응한다. 식법을 마음에 지니면 산란한 뜻이 없게 된다. 이 선정은 편안하고 청정하고 고요하며, 심식이 밝고 예리해지는 것이 어떤 비유로도 설명할 수 없다.

제16장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은 불용처정不用處定이라고도 한다. 말하자면 공은 바깥 경계고 마음은 안의 경계인데 이 두 경계를 버리고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소처정少處定이라고도 하니, 이 선정은 일체를 다 버렸으나 의근에 아직 법진法塵이 조금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한다. 또 무상정無想定이라고도 한다.
수행자는 식처정의 과실과 우환을 깊이 알아야 한다. 즉 “과거·현재·미래의 심식은 한량없고 끝이 없으므로 식을 반연하여 선정에 들어가는 것은 진실한 법이 아니니, 오직 심식처가 없어 마음에 의지할 것이 없어야 비로소 편안함(安隱)이라 부를 수 있다.”고 알아야 한다. 그러면 곧 식처를 버리고 마음을 무소유처에 매어 둔다. 무소유란 공도 아니고 식도 아닌 무위법의 경계이며 분별도 없다.
이와 같이 알고 나서 그 마음을 고요히 쉬고 무소유법을 생각한다. 이때 식처정이 곧 사라지고 중간정인 미도지정이 나타난다. 이때 수행자는 한마음으로 안이 깨끗하며 공하여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모든 법을 보지 않고, 고요하고 편안하여 마음에 흔들림이 없다. 이러한 선정을 얻었을 때 은은한 기쁨이 샘솟고 고요하며 생각이 끊어져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데 하물며 다른 법이 보이겠는가. 분별하는 바가 없으니, 이를 무소유처정이라 하고 또 무상정이라고도 한다.


제17장 비유상비무상처정非有想非無想處定
이 선정의 이름에 대한 고금의 해석이 제각각인데 각기 의미가 있으므로 모두 소개한다. 어떤 이는 “비상非想은 거친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고, 비비상非非想이란 미세한 생각이 아님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이미 거친 생각은 없지만 여전히 미세한 생각이 남아 있기 때문에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이라 한다.”고 설명한다.

어떤 이는 “식처정일 때는 생각이 있고, 불용처정일 때는 생각이 없는데, 지금 이런 있고 없음을 함께 버리는 것이다. 비상으로 생각 있음을 버리고 비비상으로 생각 없음을 버리기 때문에 비상비비상이라 한다.”고 설명한다. 또 어떤 이는 “이 선정에서는 어떤 모습도 보지 않으므로 비유상非有想이라 한다. 그렇다고 만약 오로지 생각이 없기만 하다면 마치 나무나 돌과 같을 것이니, 어찌 생각이 없다는 걸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비무상非無想이라 한다.”고 설명한다.
수행자는 무상無想 중의 허물과 죄를 깊이 알아야 한다. 즉 “이 무소유처정은 우매한 것 같고 취한 것 같으며 잠자는 듯 어둠 속에 있는 듯하다. 무명에 덮여 깨달아 아는 것도 없으니 사랑하거나 즐거워할 이유가 없다.”고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선정(무소유처정)의 수·상·행·식이 아무리 미세하다 해도 역시 무상·고·공 등의 법임을 면치 못한다는 사실을 세밀히 관찰하고 곧 그것을 떠나 비유비무를 관찰한다. 무슨 까닭인가? 나의 지금 이 마음은 과거·현재·미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으며, 이미 모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처소도 없으므로 마땅히 ‘있는 것이 아님(非有)’을 알아야만 한다. 또 만약 말 그대로 ‘없다’면 무엇을 마음이라 부르겠는가? 만약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면 다시 별도로 없다 할 것도 없다. 무슨 까닭인가? ‘없음’은 저 홀로 없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있음’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기 위해 ‘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있음’이 없다면 ‘없음’도 없다. 그러므로 ‘비유비무非有非無’라고 한다.
이와 같이 관할 때 있음도 없음도 보지 않고 한마음으로 중도를 반연하며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비유상비무상정을 수습하는 것이다. 이때 불용처정이 문득 사라져 중간선을 얻고, 그 마음이 저절로 중도를 반연하여 머물게 된다. 그런 후 갑자기 진실한 선정이 발생해 있고 없는 모습을 보지 않게 되며, 일체가 없어진 듯 고요해 마음에 동요가 없게 되며, 편안하고 청정한 것이 열반의 모습과 같게 된다.
이 선정은 미묘하여 삼계에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 외도가 이것을 증득하면, 이것을 중도실상中道實相인 열반涅槃으로 여겨 상常·낙樂·아我·정淨이라 하면서 이 법에 애착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질 않는다. 이 선정에 들어가면

있고 없음을 보지는 않지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마음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외도들은) 곧 이 마음을 계탁하여 “이것이 진신眞神으로서 멸하지 않는 것이다.”라고들 한다. 그러나 만약 불제자라면 이것 역시 네 가지 음陰이 화합하여 있는 것으로서 허망하고 실체가 없으며, 별도의 신지神知는 없다는 것을 안다.
또한 허공처정은 색을 타파하므로 공空이라 한다. 식처정은 공을 타파하므로 식識이라 하고 유상有想이라고 한다. 불용처정은 식을 타파하므로 무식無識이라 하고 무상無想이라고 한다. 지금 이 선정은 무소유를 타파하므로 비무상非無想이라 하고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이라고 한다. 이 선정에서는 들뜨고 가라앉음이 완전히 평등하고 공과 유가 균등하므로 세간선 중에 가장 높고 뛰어나다.
또한 무상無想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무상천정無想天定이고, 둘째는 비유상비무상정非有想非無想定이며, 셋째는 멸수상정滅受想定이다. 외도 가운데 방편을 모르는 자는 마음을 멸해 무상천정에 들어가고 방편을 아는 자는 마음을 멸해 비유상비무상정에 들어가지만, 불제자는 마음을 멸해 멸수상정에 들어간다.


제18장 육묘문六妙門
육묘六妙란 첫째 수數, 둘째 수隨, 셋째 지止, 넷째 관觀, 다섯째 환還, 여섯째 정淨이다. 왜 묘문妙門이라 하는가? 이 여섯 가지 법을 통해 열반에 이르기 때문에 묘문이라 한다. 앞의 세 가지는 선정법이고 뒤의 세 가지는 지혜법이며, 유루이면서 무루라는 뜻17)이 여기에 있다. 수행하여 깨닫는 측면에서 설명하자면 모든 선이 다 육묘문六妙門에 속하나 지금은 단지 순서대로 생기는 양상만을 취해 도에 들어가는 바른 요체로서 육묘문을 밝히겠다.
첫째, 수數란 호흡을 세는 법에 따라 닦아 익히는 것이다. 호흡을 세는 법이 이루어져

호흡이 허공이 엉긴 듯하게 되면 마음의 모습이 점점 미세해지면서 호흡을 세는 것이 거추장스럽게 여겨진다. 이때 세는 법을 버리고 수隨를 닦는다.
둘째, 수隨란 호흡을 따르는 법에 의거하여 닦아 익히는 것이다. 마음과 호흡이 서로를 의지해 뜻과 생각이 즐거워지면 호흡을 따르는 것이 거추장스럽게 여겨진다. 이때에는 호흡을 따르는 법을 버리고 지를 닦는다.
셋째는 지止이다. 지에는 세 가지 법첫째는 계연지繫緣止, 둘째는 제심지制心止, 셋째는 체진지體眞止이다. 방편문 중 제35장에 나온다.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제심지법을 이용해 대상에 대한 모든 생각을 그친다. 그리하여 몸과 마음이 사라지고 선정에 들어간다. 이 선정법으로 마음을 지속시키면 저절로 동요함이 없게 되는데, 이때는 관법을 닦아야만 한다.
넷째는 관觀이다. 관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혜행관慧行觀이니 참된 지혜를 관하는 것이고, 둘째는 득해관得解觀이니 즉 가상관假想觀이며, 셋째는 실관實觀으로서 현상 그대로 관하는 것이다. 혜행관과 득해관은 사제四諦·십이인연十二因緣·구상九想·배사背捨 등에 설명이 있고, 실관은 관식법觀息法에 있다. 마땅히 세 가지 관법에 따라 닦아 익혀야만 한다.
다섯째는 환還이다. 관법이 이루어져 관하는 생각이 움직이게 되면 스스로 이렇게 생각한다.
“이 관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난 것인가, 마음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닌가? 마음으로부터 생겨났다면 마음과 관이 다른 것이 된다. 마음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면 앞에서 호흡을 세는 법·호흡을 따르는 법·그치는 법을 닦을 때는 왜 관하는 마음이 없었을까?”
그러면 곧 “관하는 마음은 본래 스스로 생겨나지 않았다. 생겨나지 않았으므로 있지 않고, 있지 않으므로 곧 공이며, 공이므로 별도의 관하는 마음도 없다. 이미 관하는 마음이 없는데 어찌 관할 대상이 있겠는가?”라고 알게 된다. 이와 같이 관할 때 대상과 앎이 함께 없어지고 마음과 지혜가 개발되니, 이것이 ‘근본으로 되돌리고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返本還源)’이다.
여섯째는 정淨이다. 근원으로 돌이키는 법이 이루어졌으면 깨끗이 하는 법을 닦아야 한다. 색의 깨끗함을 알기 때문에 망상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며, 수·상·행·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망상의 더러움을 쉬고, 분별의 더러움을 쉬고, ‘나’에 집착하는 더러움을 쉬면 주체와 객체를 얻을 수 없게 된다.

그러면 활연히 마음과 지혜가 상응하여 걸림 없는 방편이 저절로 개발되고 바른 삼매에 들어 마음에 의지함이 없게 되며, 나아가 무루의 지혜가 발생해 삼계의 더러움이 다하게 된다. 따라서 깨끗함이라고 한다.
또한 중생이 공함을 관하므로 ‘관’이라고 하고, 실제법의 공함을 관하므로 ‘환’이라 하며, 평등공을 관하므로 ‘정’이라고 한다.
또한 공삼매空三昧18)와 상응하므로 ‘관’이라 하고, 무상삼매無相三昧19)와 상응하므로 ‘환’이라 하며, 무작삼매無作三昧20)와 상응하므로 ‘정’이라고 한다.
또한 모든 외관外觀을 ‘관’이라 하고, 모든 내관內觀을 ‘환’이라 하며, 모든 내관도 외관도 아닌 것을 ‘정’이라고 한다.
또한 보살이 가假로부터 공空에 들어가는 관을 ‘관’이라 하고, 공으로부터 가에 들어가는 관을 ‘환’이라 하며, 공과 가를 한마음으로 관하는 것을 ‘정’이라고 한다.
또한 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도에 들어가는 초입에 먼저 육묘문으로 근본을 삼으셨다. 그러므로 보살이 육묘문에 잘 들어가면 모든 불법을 갖출 수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


제19장 십육특승十六特勝
십육특승十六特勝이란 첫째 숨이 들어오는 모습을 아는 것, 둘째 숨이 나가는 모습을 아는 것, 셋째 호흡이 길고 짧음을 아는 것, 넷째 호흡이 몸에 두루 퍼짐을 아는 것, 다섯째 모든 몸의 작용을 하지 않는 것, 여섯째 기쁨을 느끼는 것, 일곱째 즐거움을 느끼는 것, 여덟째 여러 마음작용을 느끼는 것, 아홉째 기쁜 마음을 짓는 것, 열째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것, 열한째 마음이 해탈하는 것, 열두째 무상을 관하는 것, 열셋째 나가서 흩어지는 것을 관하는 것, 열넷째 욕망을 관하는 것, 열다섯째 멸함을 관하는 것, 열여섯째 포기하고 버림을 관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지 않았을 때, 외도들도 사선과 사공처정을 얻었으나 대치對治21)하는 관행이 없었기 때문에 생사를 벗어나지 못했다. 여래께서는 처음 사제四諦를 설했을 때 혹 깨닫지 못하는 이가 있으면 다시 구상·배사 등의 부정관법을 설하여 그것을 대치했다. 부정관을 수행하는 자가 탐욕은 제거했지만 간혹 싫어하는 마음이 지나쳐 무루를 일으키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자 부처님께선 곧 부정관을 버리고 이 특승법을 닦게 하셨다. 이 법에는 정定도 있고 관觀도 있어서 모든 선禪을 구족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들숨을 관하는 법은 숨의 기운이 없어질 때까지 관하는 것이다. 둘째, 날숨을 관하는 법이란 코끝에 이르러 멈출 때까지 관하는 것이다. 셋째, 호흡의 길고 짧음을 관하는 법이란 몸이 불안하고 마음이 산란하면 나가고 들어오는 호흡이 짧고, 몸이 편안하고 마음이 고요하면 나가고 들어오는 호흡이 길다. 넷째, 호흡이 몸에 두루 퍼진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편안하면 기도가 막히지 않아 호흡이 몸에 두루 충만한 것이다. 다섯째, 모든 몸의 작용을 없애는 것이란, 상想과 수受가 마음의 작용이고, 각覺과 관觀이 입의 작용이며, 날숨과 들숨은 몸의 작용이 된다는 것이다. 호흡이 몸에 두루 퍼지고 나면 그 감각이 거친 생각을 일으킬 것이 우려된다. 따라서 모든 거친 생각을 제거하므로 모든 몸의 작용을 없앤다고 한다. 여섯째는 기쁨을 느끼는 것이고, 일곱째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미미한 기쁨과 즐거움만 있어도 그것이 온몸에 가득 퍼지고, 몸과 마음이 가득 차고 나면 안으로 마음에 희열이 있게 된다. 따라서 즐거움이라고 한다. 여덟째, 온갖 마음의 작용을 느끼는 것이란, 이미 마음속에 즐거움을 느꼈다면 반드시 마음의 즐거운 경계에 의지하여 여러 가지 마음의 작용이 따라 일어나게 된다. 따라서 온갖 마음의 작용을 느낀다고 한다. 아홉째, 기쁜 마음을 짓는 것이란, 마음이 한 경계에 머물게 되었어도 지혜로 이해하는 작용이 없으면 가라앉은 마음에 반드시 덮이고 만다. 따라서 기쁨으로 그 마음을 일으켜 가라앉지 않게 하므로 기쁨을 일으킨다고 한다. 열째,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란, 기뻐하는 마음이 정상보다 지나치게 일어나 산란해지면 그것을 거두어 돌아오게 하고, 온갖 연으로 달아나 흩어지는 일이 없도록 한다. 따라서 거두어들인다고 한다. 열한째, 마음이 해탈하는 것이란, 마음이 들뜨거나 산란하지 않고

고르고 평등하여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해탈이라고 한다. 열두째, 무상을 관하는 것이란, 이미 자재함을 얻어 가라앉거나 들뜨는 일이 없게 되었으므로 ‘모든 법은 무상하여 찰나찰나 생멸하니 즐거워할 것도 없다’고 관할 수 있는 것이다. 열셋째, 흩어져 무너짐을 관하는 것이란 ‘이 몸은 오래지 않아 흩어져 무너지고 닳아 없어지는 법으로서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관하는 것이다. 열넷째, 욕망에서 벗어남을 관하는 것이란, 이 몸은 오직 고통의 근본일 뿐이므로 마음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욕망을 벗어난다고 한다. 열다섯째, 멸함을 관하는 것이란, 이 마음은 머물다 사라지고 갖가지 허물과 근심이 많으므로 머무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열여섯째, 버림을 관하는 것이란 ‘이러한 모든 법이 다 허물과 근심이다’라고 관하는 것이다. 따라서 버림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열여섯 가지 법은 반드시 여러 단계 선의 여덟 가지 관법과 서로 관련지어 차례로 대치해야 한다. 왜 그런가? 첫째와 둘째 호흡이 드나듦을 아는 것은 호흡을 세는 법을 대치하고, 셋째 호흡의 길고 짧음을 아는 것은 욕계정을 대치하고, 넷째 호흡이 몸에 두루 퍼짐을 아는 것은 미도지정을 대치하고, 다섯째 모든 몸의 작용을 없애는 것은 초선의 각지覺支를 대치하고, 여섯째 기쁨을 느끼는 것은 초선의 희지喜支를 대치하고, 일곱째 마음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초선의 낙지樂支를 대치하고, 여덟째 온갖 마음의 작용을 느끼는 것은 초선의 일심지一心支를 대치하고, 아홉째 기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제2선의 내정지內淨支와 희지喜支를 대치하고, 열째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제2선의 일심지를 대치하고, 열한째 마음이 해탈에 머무는 것은 제3선의 낙지를 대치하고, 열두째 무상을 관함은 제4선인 부동정不動定을 대치하고, 열셋째 흩어져 버림을 관함은 공처정을 대치하고, 열넷째 욕망으로부터 벗어남을 관하는 것은 식처정을 대치하고, 열다섯째 멸함을 관하는 것은 불용처정을 대치하고, 열여섯째 버림을 관하는 것은 비상비비상처정을 대치하기 때문이다.”22)
첫째와 둘째, 호흡의 드나듦을 아는 것은 호흡 세는 법을 대치할 수 있다. 수행자가 호흡을 조절하여 그것이 면면히 이어지게 되었다면

한마음이 호흡을 의지하며 따르기에 숨을 들이쉴 때 그 숨이 코에서 배꼽까지 이르는 것을 알고, 숨을 내쉴 때 그 숨이 배꼽에서 코에 이르는 것을 안다. 이와 같이 한마음으로 호흡을 관조하며 의지해 따르고 산란함이 없게 된다. 다시 호흡의 거칠고 미세하고 가볍고 무겁고 껄끄럽고 매끄럽고 차갑고 따뜻한 상태를 안다. 저 호흡을 세는 법은 그저 어두운 마음으로 호흡을 세기만 하고 관하는 행법이 없으므로 애착·아견·자만 등의 허물이 생기는 경우가 많이 있지만 지금 호흡을 따를 때에는 곧 이 호흡이 무상함을 알게 된다. 목숨(命)은 호흡에 의지하므로 호흡을 목숨으로 삼는다. 한번 내쉰 숨이 돌아오지 않으면 목숨 또한 따라서 떠나는 것이다. 호흡이 이미 무상하고 목숨 또한 견고하지 않으므로 애착·아견·자만 등이 저절로 생기지 않게 된다. 또 수행자가 한마음으로 호흡에 의지하여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하고서 선정에 들어가기 때문에 ‘애착이기도 하다(亦愛)’고 하며, 무상을 깨닫기 때문에 ‘다스림이기도 하다(亦策)’고 한다. 선정과 상응하기 때문에 ‘유루이기도 하다(亦有漏)’고 하고, 관행으로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무루이기도 하다(亦無漏)’고 한다.
또한 호흡을 셀 때에는 어둡고 우매한 마음으로 세기 때문에 비추어 깨닫는 바가 없다. 따라서 선정을 증득할 때에도 마음에 보이는 것이 없다. 그러나 지금 호흡을 따르는 법은 곧 밝은 마음으로 호흡을 관조하는 것이므로 선정을 증득할 때 마음의 눈이 밝게 열려 몸의 서른여섯 가지 물질을 보고 애착·아견·자만을 깨뜨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호흡을 세는 법보다 특별히 뛰어난 점이다.
셋째, 호흡의 장단을 아는 것은 욕계정을 대치하는 것이다. 욕계정에 들었을 때에는 선정의 마음이 밝고 깨끗하나 도무지 호흡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선정에서는 들어오는 숨이 긴 것과 나가는 숨이 짧은 것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마음이 이미 안에 고요하게 자리해 숨이 마음을 따라 들어오므로 들이쉬면 곧 긴 것을 알고, 마음이 밖을 반연하지 않으므로 내쉬면 곧 짧은 것을 안다.
또한 마음이 세밀하면 호흡도 세밀해지고 호흡이 세밀하면 숨을 들이쉴 때 코로부터 배꼽에 이르는 것이 미세하고 느리며 길어진다. 숨을 내쉴 때도 배꼽에서 코에까지 이르는 것이 미세하고 길어진다. 마음이 거칠면 호흡도 거칠어지고, 호흡이 거칠면 곧 숨이 들고 나는 것이 아주 급하고 짧아진다.

또한 호흡이 짧기 때문에 마음이 세밀하다는 것을 알고 호흡이 길기 때문에 마음이 거칠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마음이 이미 더욱 고요해졌다면 내쉬는 숨은 배꼽에서 시작해 가슴에 이르러 끝나고, 들이쉬는 숨은 코로부터 목구멍에 이르러 끝난다. 이것은 마음이 고요하기 때문에 호흡이 짧은 것이다. 마음이 거칠면 (내쉬는) 숨이 배꼽에서 코에 이르는 것을 느끼며 그 길은 멀고도 길다. 이것은 곧 마음이 거칠기 때문에 호흡이 긴 것이다.
또한 (호흡이) 짧은 가운데 길다고 느끼면 곧 선정이 세밀한 것이고, (호흡이) 긴 가운데 짧다고 느끼면 선정이 거친 것이다. 왜냐하면 호흡이 코에서부터 가슴에 이르러 끝날 경우에는 행로는 비록 짧지만 그 움직임은 미세하고 느려서 오랜 시간이 걸려야 배꼽에 다다른다. 이것은 지나간 거리는 짧지만 시간이 길게 걸리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거칠면 코에서 배꼽에 이르는 길이 비록 멀지만 그 움직임이 거칠어 금방 되돌아 나온다. 이것은 지나간 거리는 길지만 시간이 짧게 걸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관할 때 곧 무상함을 알게 되고, 마음의 생멸이 일정치 않은 것을 말미암아 능히 욕계정을 깨트리게 된다.
넷째, 호흡이 온몸에 두루 퍼지는 것을 알아 미도지정을 대치한다. 근본선의 미도지정에서는 몸의 모습이 허공처럼 없어지는 것만 느낄 뿐, 몸과 호흡이 있는지 없는지는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 특승에서는 미도지정을 일으켰을 때에도 다 없어진 듯이 선정에 들어가서 구름이나 그림자처럼 몸이 점점 나타남을 느낀다. 또한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 온몸의 털구멍까지 두루 퍼지는 것을 깨닫고, 숨이 들이쉬어도 쌓이지 않고 내쉬어도 흩어짐이 없이 무상하게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본다. 또 몸은 공空이고 가假23)로서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또한 생멸하며 찰나도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세 가지24)가 화합해 선정이 생기지만 세 가지가 이미 공하므로 선정은 의지할 곳이 없다. 공을 아는 것 또한 공해 선정 가운데서 집착하지 않으면 곧 근본 미도지정을 타파하니, 애착하고 가책한다는 뜻이 이미 그 가운데 있다.
다섯째, 몸의 모든 작용을 제거하는 것은 초선정의 각지覺支와 관지觀支를 대치한다.

수행자가 호흡이 몸에 두루 퍼지는 것을 깨달아 초선을 일으키게 되면 마음의 눈이 활짝 열려 냄새나고 더러우며 혐오스러운 몸의 서른여섯 가지 물질을 보게 된다. 이때 서른여섯 가지 물질은 모두 사대四大로 말미암아 존재하기에 하나하나가 다 아我가 아니고 하나하나가 다 내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것이 곧 욕계의 몸을 없애는 것이다. 다시 욕계의 몸에서 색계의 사대를 구한다면 그것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안에서부터 나오는 것인가, 중간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만약 (색계의 사대가) 없다면 어떻게 색계의 촉감을 느끼며, 만약 있다면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이와 같이 관할 때에 끝내 얻을 수 없으니, 이것이 곧 초선의 몸을 제거하는 것이다. (몸의 모든 작용을 제거한다고 할 때의) ‘작용(行)’이란 곧 관지觀支이다. 몸이 제거되면 작용 또한 따라서 멸한다.
여섯째, 기쁨을 느끼고, 일곱째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초선의 희지와 낙지를 대치한다. 이 선정은 곧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도 그 성품이 공함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집착하지도 않아 어떤 허물과 죄도 없다. 그러므로 느낀다(受)고 한다.
여덟째, 모든 마음의 작용을 받아들이는 것은 초선의 일심지를 대치한다. 각 등의 사지25)를 움직이는 작용(動行)이라 하고, 일심지를 움직이지 않는 작용(不動行)이라 한다. 근본선에서 일심으로 들어갈 때는 마음에 애착이 생기지만, 이 선정에서는 이 일심이 헛되고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 곧 취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바르게 삼매에 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마음의 작용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아홉째, 마음으로 기쁨을 짓는 것은 제2선의 내정지와 희지를 대치한다. 제2선의 희지는 지혜로 비추어 깨닫는 작용이 없으나 지금 여기에서는 이 기쁨을 관찰하여 곧 헛된 것임을 알고 애착을 일으키지 않는다. 따라서 마음으로 기쁨을 짓는다고 한다.
열째, 마음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은 제2선의 일심지를 대치한다. 앞에서 마음으로 기쁨을 일으키는 것이 비록 바르기는 하지만 동요되는 허물이 없지 않다. 따라서 기쁨의 성품이 끝내 공적함을 돌이켜 관찰한다. 그러면 선정심이 산란하지 않고 기쁨을 따라 동요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마음으로 거두어들인다고 한다.

열한째, 마음이 해탈에 머무는 것은 제3선의 낙지를 대치한다. 제3선에는 온몸에 두루 퍼지는 즐거움이 있어 범부가 이를 얻으면 대부분 애착을 일으켜 그것에 묶여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제 관하는 지혜로써 분석하여 타파하면, 온몸에 두루 퍼지는 즐거움을 증득할 때 “이 즐거움은 인연으로 생겨났으므로 공하고 자성이 없으며 헛되고 진실하지 못하다.”고 안다. 이렇게 즐거움을 관하여 집착하지 않으면 마음이 자재하게 된다. 따라서 마음으로 해탈한다고 한다.
열두째, 무상을 관하는 것은 제4선인 부동정을 대치한다. 제4선을 부동정이라 하는데, 범부가 이를 얻으면 대부분 이것이 영원하다는 생각을 내어 애착하고 취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이제 이 선정도 세 가지 모습26)으로 변천하는 것임을 관하여, 이것이 파괴되며 불안한 모습임을 안다. 그러므로 무상을 관찰한다고 한다.
열셋째, 나가서 흩어짐을 관하는 것은 공처정을 대치한다. 나가서 흩어진다는 것은 색을 벗어나서 마음이 허공을 의지해 소멸하고 흩어져 자재함으로써 색법에 구속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나가서 흩어진다고 한다. 범부는 이 선정을 얻을 때 이것이 진실한 공이며 안온함이라 여겨 마음에 집착을 일으킨다. 지금 ‘나가서 흩어짐을 관찰한다’고 하는 것은, 수행자가 처음 허공처정에 들어갔을 때 곧바로 “사온27)이 화합해 있을 뿐 실제로는 자성이 없어 취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마음은 이미 사라졌고, 미래의 마음은 아직 이르지 않았으며, 현재의 마음은 머물지 않으니, 곧 마음은 세 가지 모습으로 변천하는 것이다. 또 공은 앎이 없는 법이니, 마음이나 공에서 얻을 곳이 없다. 따라서 마음에 애착이 없다. 이를 나가서 흩어짐을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열넷째, 욕망으로부터 벗어남을 관하는 것은 식처정을 대치한다. 무릇 애착이 있으면 모두 욕망이라 한다. 식처정에서는 바깥 법을 여의고 안의 법을 반연하며 공을 여의고 식을 반연하지만 역시 욕망에 대한 집착임을 면치 못한다. 지금 이 선정에서는 이를 능히 관하여 타파한다.
열다섯째, 멸함을 관하는 것은 무소유처정을 대치한다. 불용처정은

무위법의 경계를 반연하므로 마음이 무위와 상응한다. 따라서 범부가 이를 얻으면 버릴 수가 없다. 지금 “멸함을 관찰한다.”고 한 것은 이 선정을 얻었을 때 식이 조금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 식이 비록 적긴 하지만 역시 수·상·행·식의 사온이 화합한 무상하고 무아인 법이니 물들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
열여섯째, 포기하고 버림을 관하는 것은 비상비비상처정을 대치한다. 초선으로부터 각 단계의 선정에서 두루 버리긴 했지만 비상비비상처정에 이르러 유와 무를 모두 버리니, 이것은 버림 가운데서도 가장 지극한 것이다. 범부가 이를 얻으면 열반이라 여겨 버리지를 못한다. 지금 이 선정에 들었을 때에는 그 법 역시 무상·고·공·무아로서 진정한 열반이 아니라고 관할 수 있다. 따라서 포기하고 버림을 관찰한다고 한다.
근기가 날카로운 이라면 꼭 열여섯 가지를 다 닦을 필요는 없다. 즉 호흡을 따르는 법에서도 무상을 잘 깨달아 곧장 큰 깨달음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두세 가지를 얻기도 하고 네다섯 가지를 얻기도 하는데, 이는 사람의 근기에 달렸다. 그러므로 특승이라고 한다.


제20장 통명관通明觀
통명관通明觀이란 호흡·색·마음의 세 가지를 통틀어 관하여 마음의 눈을 밝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통명이라고 한다. 또한 육통六通과 삼명三明을 속히 얻는 것을 말한다. 육통은 천안통天眼通·천이통天耳通·타심통他心通·숙명통宿命通·신경통身境通·누진통漏盡通이고, 삼명은 생사지명生死智明·숙명지명宿命智明·누진지명漏盡智明이다. 이 선정을 단박에 성취하고 점진적으로 성취하는 차이는 사람의 근기에 달렸다. 비록 수행계위의 순서는 없지만 지금은 선문의 순서에 따라 먼저 초선에 의거한 통명관의 모습을 밝힌다. 초선의 오지는 곧 각覺·관觀·희喜·안安·정定이다. 『대집경大集經』28)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무엇을 각이라 하는가? 여심如心·각覺·대각大覺·사유思惟·대사유大思惟·심성을 관함(觀於心性)을 각이라 한다. 무엇을 관이라 하는가? 심행心行·대행大行·변행徧行·수의隨意를 관찰하는 것을 관이라 한다. 무엇을 희라 하는가?

여진실지如眞實知·대지大知·마음이 움직일 때 마음에 이는 것(心動至心)을 희라 한다. 무엇을 안이라 하는가? 심안心安·신안身安·수안受安·즐거운 감촉을 느낌(受於樂觸)을 안이라 한다. 무엇을 정이라 하는가? 심주心住·대주大住·대상에 동요되지 않음(不亂於緣)·잘못되지 않음(不謬)·전도되는 일이 없음(無有顚倒)을 정이라 한다.”
이것이 오지의 뜻을 풀이한 것이다.
여심如心이란 곧 초선의 미도지정이다. 수행자가 처음 마음을 안정시킬 때부터 호흡·색·마음 세 가지가 모두 분별이 없다고 관하는 것이다. 세 가지를 관함에 있어 먼저 반드시 호흡을 관찰해야 한다. 마음을 가다듬고 고요히 앉아 호흡을 조절하고 온몸에 들고 나는 호흡의 모습을 한마음으로 잘 관찰한다. 만약 지혜와 마음이 밝고 예리하다면, 숨이 들어와도 쌓이지 않고 숨이 나가도 흩어짐이 없으며 들어와도 지나간 곳이 없고 나가도 자취가 없어 허공에 부는 바람처럼 성품이 없다는 것을 곧바로 깨닫는다. 이것을 호흡이 마음과 같음을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호흡은 몸을 의지하고 몸을 떠나서는 호흡도 없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면 곧 한마음으로 몸의 색이 여여함을 잘 관찰해야 한다. 이제 이렇게 관찰한다.
“이 색신은 본래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전생의 망상이 인연이 되어 금세의 사대四大를 불러온 것이다. 이 사대로 이루어진 색이 허공을 둘러싼 것을 몸이라고 부르지만 머리 등 여섯 부분29)과 서른여섯 가지 물질, 사대四大와 사미四微30) 어느 하나도 몸이 아니다.”
이때 마음의 분별이 없어지고 곧 색의 여여함을 통달하게 된다.
다음은 마음의 여여함을 관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관한다.
“마음이 있기 때문에 몸의 색이 있어 오가고 움직인다. 만약 이러한 마음이 없다면 색이 무엇을 인하여 생기고 또 누가 분별하겠는가? 다시 관찰해 보면, 이 마음은 인연을 바탕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신속하게 생겼다 사라지기에 머무는 자리를 볼 수 없고, 또한 형체도 없다. 단지 이름만 있을 뿐이나 이름 또한 공하다.”
이것이 곧 마음의 여여함을 통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관할 때 (호흡·색·마음) 세 가지의 성품의 차이를 찾을 수 없으니, 이것을 여심如心이라고 한다.
호흡을 관할 때 이미 호흡을 얻을 수 없었다면, 몸과 마음 역시 공적함을 곧바로 통달하게 된다. 왜냐하면 세 가지 법은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 가지가 이미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일체법 역시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세 가지가 화합하여 음陰·입入·계界와 온갖 고통과 번뇌를 일으키고, 선행과 악행의 업으로 다섯 갈래의 세계를 오가며 쉼 없이 윤회하기 때문이다. 만약 세 가지가 본래부터 자성이 없음을 깨달으면 일체 모든 법이 그 자리에서 공적하다. 이것을 여심을 관하여 수행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관할 때 그 마음은 저절로 진여에 머물게 되고, 다 없어진 듯이 밝고 깨끗해진다. 이를 욕계정欲界定이라 한다. 이 선정을 얻고 나서 마음이 진여에 의지하고 진여와 상응하여 진여법으로 마음을 유지하면 마음이 안정되어 동요하지 않게 되며, 몸·호흡·마음 세 가지 법의 차이가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고 허공처럼 한결같게 된다. 따라서 여심이라고 하니, 이것이 곧 통명관의 미도지정이다.
각覺과 대각大覺을 설명하겠다. 각이란 초선에서 감촉이 생기는 모양을 지각知覺하는 것이다. 대각이란 활연히 마음의 눈이 밝게 열려 (호흡·몸·마음) 세 가지를 밝게 보는 것이니, 이것을 대각이라 한다. 또한 각은 세간世間의 모습을 지각하는 것이고, 대각은 출세간의 모습을 지각하는 것이다.
세간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근본세간根本世間이니, 한 생애 동안의 정보正報31)인 오음五陰이 그것이다. 둘째는 의세간義世間이니, 근본법과 그 외 일체법의 뜻과 이치의 상호관계를 아는 것이다. 셋째는 사세간事世間이니, 오신통32)이 생겼을 때 일체중생의 종류 및 세간의 현상을 모두 보는 것이다.
출세간出世間 역시 세간과 상대하여 세 가지로 나뉜다. 초선이 일어날 때 이 몸이 공하고 성근 것과 모든 모공으로 두루 호흡하는 것, 그리고 서른여섯 물질털·머리카락·손발톱·이빨·표피·진피·힘줄·살·뼈·골수·지라·콩팥·심장·간·허파·작은창자·큰창자·위·태의·쓸개·대변·소변·때·땀·눈물·콧물·침·고름·피·핏줄·누렇고 흰 가래·멍·비계·기름·뇌·막 등을 말한다. 이 서른여섯 가지 중 열 가지는 몸 밖의 물질이고, 스물여섯 가지는 몸 안의 물질이다. 또 스물두 가지는 지대地大에 속하는 물질이고, 열네 가지는 수대水大에 속하는 물질이며, 따뜻하고 뜨거운 것은 화대火大, 움직이고 바뀌는 것은 풍대風大이다.을 활연히 보게 되어 분명하게 깨닫는다. 이 사대를 관찰해 보면 마치 네 마리의 뱀이 한 상자에 있는 것과 같이 그 성질이 각각 다르다. 수행자는 이를 보고 나서 마음으로 크게 놀라게 된다. 이 서른여섯 물질은 사대가 임시로 화합한 것으로 더럽고 혐오스럽다고 볼 뿐만 아니라,

다섯 가지 더러움(五種不淨)에 대한 생각도 알게 된다. 첫째, 열 가지 바깥 물질의 더러움을 본다.33) 둘째, 자기 몸 안의 스물여섯 가지 물질의 더러움을 보는데, 이것이 자성의 더러움(自性不淨)이다. 셋째, 이 몸이 부모의 정액과 피가 화합하여 몸이 된 것임을 스스로 알게 되니, 이것이 종자의 더러움(種子不淨)이다. 넷째, 이 몸이 태 안에 있을 때 생장生臟과 숙장熟臟 두 장기 사이에 있었음을 알게 되니, 이것이 태어난 곳의 더러움(生處不淨)이다. 다섯째, 이 몸이 죽은 뒤에는 썩어 문드러져 악취를 풍길 것임을 알게 되니, 이것이 최후의 더러움(究竟不淨)이다. 이 몸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더러운 것으로 이루어져 즐길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매우 혐오스러운 것임을 알아야만 한다. 나는 지난날 이 더러운 몸에 집착하여 갖가지 악업을 지으면서 무량겁을 지내다가 지금 비로소 깨닫고 보니 슬픔과 기쁨이 교대로 몰려든다.
또 선정 가운데 심식이 온갖 대상을 반연하여 찰나찰나 멈추지 않고, 모든 마음작용이 연달아 일어나 생각하는 것이 서로 다르고 또한 한 가지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 다음에 삼매가 점점 깊어지면 오장 안에서 호흡하는 모양이 각기 다름을 지각하게 된다. 푸르고 누렇고 붉고 흰 것 등으로 장기마다 각기 색깔이 다르고, 빠져나와 모공에 이른다.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갈 때도 색깔이 역시 다르다.
또 이 몸의 피부와 막이 각각 99겹으로 되어 있고, 크고 작은 뼈가 360개이며, 나아가 골수가 각기 98겹으로 되어 있고, 뼈와 살 사이에 각종 벌레가 있어 머리가 네 개인 것, 입이 네 개인 것, 꼬리가 아흔아홉 개인 것 등으로 각각 모양이 다른 것을 보게 된다. 나아가 이 벌레들이 들고 나며 오가는 것과 소리와 언어까지도 모두 다 지각하게 된다.
뇌에는 네 부분이 있고, 오장은 연꽃처럼 조각조각이 서로를 덮고 있으며, 몸의 구멍은 비고 성글어 안팎이 서로 통한다. 또 몸 안의 모든 핏줄을 지각하게 된다. 심장의 핏줄이 중심이 되고, 심장의 핏줄로부터 네 개의 큰 핏줄이 생겨나며, 네 개의 큰 핏줄에서 각각 열 개의 핏줄이 갈라지고, 그 하나하나가 또 아홉 개의 핏줄을 갖춰 모두 404개의 핏줄을 이룬다. 이 핏줄에는 모두 바람의 기운이 있어 피의 흐름이 서로 뒤섞이며, 또한 모든 핏줄에는 미세한 벌레들이 혈관에 붙어살고 있다.

이와 같이 이 몸은 파초처럼 안팎으로 알맹이가 없음을 지각한다. 또한 마음의 작용이 대상을 따라 일어날 때 모두 수·상·행·식의 네 가지 마음으로 차별됨을 관찰한다. 또한 호흡이 잘 조화되어 파란색도 노란색도 빨간색도 흰색도 아닌 유리그릇처럼 한 모양으로 같아지는 것을 본다. 또한 호흡의 출입도 생멸이 무상하여 모두 공적함을 본다. 또한 몸의 형상이 신진대사로 늘 새롭게 바뀌는 것을 본다. 왜냐하면 음식은 밖의 사대로서 이것이 배 속에 들어와 몸의 자양분이 될 때 새로운 사대가 생기고 옛 몸은 따라서 소멸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초목에 새잎이 나면 옛 잎은 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몸의 형상이 무상하여 늘 새롭게 나고 없어지며 공하여 자성이 없으므로 색은 얻을 수 없는 것을 지각해 알아차린다. 또 한 생각이 생길 때 60찰나의 생멸이 있을 정도로 바뀌고 달라짐이 신속하다. 이렇게 공하여 자성이 없으므로 마음도 얻을 수 없다.
다시 호흡이 여덟 가지 모습으로 변천함을 지각한다. 여덟 가지 모습이란 나고(生), 머물고(住), 변하고(異), 소멸하는 것(滅)과 나게 하고(生生), 머물게 하고(住住), 변하게 하고(異異), 소멸하게 하는 것(滅滅)이다. 호흡이란 바람이다. 풍대만 이런 게 아니라 사대가 모두 이렇다.
이처럼 색과 호흡과 마음 세 법을 분별해 보면 임시로 붙인 이름은 다르지만 실제의 법은 체가 같으므로 ‘같다(如)’고 말한다. 똑같이 무상하게 생멸함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으므로 ‘같다’고 하고, 생멸은 곧 공과 다르지 않으므로 ‘같다’고 한다. 색·호흡·마음 세 법의 낱낱의 차별상을 지각하는 것을 각覺이라 하고, 그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체가 같은 것을 대각大覺이라 한다. 무상하게 생멸함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은 것을 대각이라 하고, 모든 상은 본래 공적하여 다르지 않은 것을 대각이라 한다.
사유思惟와 대사유大思惟를 설명하겠다. 처음 마음이 참과 거짓의 모습을 지각해 알아차리는 것을 각과 대각이라 하고, 뒤의 마음이 거듭 사려해 관찰하는 것을 사유와 대사유라 한다. 각에 대비되는 것이 사유이고 대각에 대비되는 것이 대사유이니, 앞의 설명을 비추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의 성품을 관찰한다(觀於心性)는 것은 곧 사유의 주체인 마음을 돌이켜 관찰하는 것이다. 지금 관찰하고 있는 이 마음은 마음을 관찰함에서 생긴 것인가, 마음을 관찰함에서 생긴 것이 아닌가? 두 가지 모두 성립할 수 없으니, 마음도 끝내 공적함을 알아야 한다.
심행과 대행을 관찰하는 것(觀心行大行)을 설명하겠다. 성문인聲聞人은 사제四諦를 대행大行이라고 한다. 즉 마음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무명을 깨닫지 못해 온갖 결박과 업을 짓는 것을 집제라고 한다. 집제를 인연으로 미래의 명색名色과 괴로운 과보를 반드시 초래하는 것을 고제라고 한다. 마음의 성품을 관하면 계율·선정·지혜를 모두 갖추고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34)을 실천하게 되므로 도제라고 한다. 바른 도가 있으면 현재에서는 번뇌가 생기지 않고 미래의 괴로운 과보 역시 소멸하므로 멸제라고 한다. 연각인緣覺人은 십이인연으로 대행을 삼는다. 보살인菩薩人은 곧 생멸이 없는 바른 도와 바른 관에 들어가 적정유리삼매寂定瑠璃三昧를 증득한다.
변행徧行이란, 관찰하는 도가 조금씩 예리해지면 각종 대상을 두루 섭렵하며 사제를 관찰하고 열여섯 가지 관법(十六行觀)35)을 낼 수 있다. 따라서 변행이라 한다.
수의隨意를 설명하겠다. 변행은 선정에 들었을 때는 온갖 대상을 볼 수 있지만 선정에서 나오면 관찰되지 않는다. 그러나 수의는 선정에 들어가건 나오건 간에 일체법에 대한 관찰이 작의作意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를 수의라 한다.
희지喜支에서의 여진실지如眞實知와 대지大知를 설명하겠다. 앞에서 설명한 마음의 성품과 사제의 진리에 대한 관찰에 의거하여 관을 행하고 진리를 살피면 대상 안에 머무르다가 관에 부합해 알게 된다. 따라서 진실지라고 한다. 만일 확 트이듯이 깨달음이 열려 이치에 부합해 알게 되면 마음에 법희法喜가 생긴다. 따라서 대지라고 한다.
마음이 움직일 때 마음에 이르는 것(心動至心)을 설명하겠다. 법희를 얻고 나면 마음이 동요하게 되는데 만일 이 기쁨을 좇는다면 전도되고 만다.

이제 이 마음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곧 기쁨의 성품을 얻게 된다. 따라서 ‘마음에 이른다’고 한다.
신안身安이란 무엇인가? 몸의 성품을 깨달아 몸으로 짓는 업에 동요되지 않으면 곧 몸이 안정된다.
심안心安이란 무엇인가? 마음의 성품을 깨닫기 때문에 마음으로 짓는 업에 동요되지 않으면 곧 마음이 즐거워진다. 따라서 마음의 안정이라 한다.
수안受安이란 무엇인가? 관찰하는 주체인 마음을 수受라 한다. 수가 곧 수가 아님을 알아 모든 수를 끊어 버리기 때문에 느낌이 안정된다.
즐거운 감촉을 느낌(受於樂觸)이란, 세간과 출세간 두 가지의 즐거운 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즐거움을 느낀다고 한다.
심주心住와 대주大住를 설명하겠다. 세간의 선정법에 머물러 마음을 산만하지 않게 유지하는 것을 ‘머묾(住)’이라고 하고, 진여의 선정법에 머물러 마음을 산만하지 않게 유지하는 것을 ‘크게 머묾(大住)’이라고 한다.
대상에 동요되지 않음(不亂於緣)이란, 비록 한마음에 머무르고 있지만 세간의 모습을 분별하며 어지럽지 않은 것이다.
잘못되지 않음(不謬)이란, 진여를 확실히 깨달아 망령된 취착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잘못되지 않는다’고 한다.
전도되지 않음(不顚倒)을 설명하겠다. 만일 마음이 세간의 모습만 편벽되게 취하면 곧 있다는 견해를 따르게 되어 해탈을 얻지 못한다. 반대로 편벽되게 진여의 모습만 취하면 공이라는 견해를 따르게 되어 세간의 인과를 파괴하고 선한 법을 닦지 않게 되니, 이는 참으로 두려워해야 한다. 이제 참과 거짓을 잘 통달하여 이 양극단을 여의면 이것을 ‘전도되지 않음’이라 한다. 또 이승인二乘人은 이 마음을 얻어 네 가지 전도를 깨뜨리면 ‘전도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보살은 이 마음을 얻어 여덟 가지 전도를 깨뜨려야 ‘전도되지 않았다’고 한다. 괴로움을 즐거움이라 계탁하고, 무상한 것을 영원하다고 계탁하며, 무아를 아라고 계탁하고, 더러운 것을 깨끗하다고 계탁하는 것을 범부의 네 가지 전도라 한다. 영원한 것을 무상하다고 계탁하고, 즐거움을 괴로움이라 계탁하고, 아를 무아라 계탁하고, 깨끗한 것을 더럽다고 계탁하는 것을 이승의 네 가지 전도라 한다. 합해서 모두 여덟 가지 전도이다.

수행자가 처음 초선을 얻어 근본세간根本世間의 모습을 보고 나면 이로 인해 그 뜻을 알게 되니, 이를 의세간義世間이라 한다. 이때 삼매 가운데서 마음과 지혜가 밝고 예리해져 몸 안의 사대와 오음이 어떤 인연으로 존재하게 되었는지 자세히 관찰한다. 그러면 이 몸은 모두 전생에 오계五戒36)를 닦은 업력이 중음中陰37)에서도 단멸되지 않고 유지되다가 부모가 교합할 때 업력이 식識으로 변화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즉 크기가 작은 콩알만 한 부모의 정혈 두 방울을 자신의 소유라 여겨 식이 그 가운데 의탁하는 것이다. 이때 곧바로 신근身根·명근命根·식심識心의 세 가지 법이 모두 갖춰진다. 식 안에는 오식五識38)의 성품이 갖춰져 있는데 이레마다 한 번씩 변화하면서 점차 자라 모든 법이 다 갖춰지게 된다. 이에 간장은 혼魂을 간직하고, 폐장은 백魄을 간직하고, 신장은 의지(志)를 간직하고, 심장은 신神을 간직하고, 비장은 뜻(意)을 간직한다. 사대가 화합하여 오행五行이 성취되면 뼈로 기틀을 잡고, 골수로 기름칠을 하고, 힘줄로 봉합하고, 핏줄로 관통하고, 피로 윤택하게 하고, 살로 감싸고, 피부로 덮는다. 이러한 인연으로 곧 머리·몸·손·발의 여섯 신체 부위가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근본세간과 의세간이다. 또 이 몸은 관찰하면 하늘과 땅을 본뜬 것이니, 만법을 구족하여 외부 사물과 서로 연관되어 있다. (초선의) 오지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수행자는 초선에서 육신통六神通을 얻어 세상사를 손바닥 위의 물건처럼 또렷이 보게 되니, 이것이 사세간事世間이다. 상근기인 사람은 복덕과 지혜의 힘 때문에 다섯 신통을 얻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이치가 있다. 첫째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고, 둘째는 수행하여 얻는 것이다. 저절로 생긴다는 것은, 색계의 사대가 청정하게 만든 색을 얻어 천안이 성취되면 이 청정한 색의 심안心眼으로 시방 모든 색의 일과 형상을 투철하게 보게 되는 것이다. 천이통·타심통·숙명통·신족통 역시 이와 같다.

수행하여 다섯 신통을 얻는다는 것은, 전일한 마음으로 선정에 들어 몸이 완전히 공한 것을 보아 색의 형상을 멀리 여의면 곧 신족통을 얻게 되는 것이다. 나머지 신통도 이와 같다. 이처럼 점차 사선四禪과 사공처四空處에 이르는 것을 모두 통명선通明禪이라 부른다.

  1. 1)선바라밀 : 육바라밀의 하나로 온전하게는 선나바라밀禪那波羅蜜(ⓢdhyāna-pāramitā)이라 하며, 정도定度·정도피안定到彼岸으로 의역하기도 한다. 또한 선바라밀禪波羅蜜·정바라밀定波羅蜜·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정려바라밀靜慮波羅蜜이라고도 한다.
  2. 2)아나파나阿那波那(ⓢāna-apāna) : 안나반나安那般那 또는 줄여서 안반安般이라고도 한다. 오정심관五停心觀의 하나로서 선관禪觀의 기초적 수행법이다. 안반은 안나반나安那般那(ⓢānāpāna)로서 안나安那(ⓢāna)는 입식入息이고, 반나般那 즉 안반나安般那(ⓢapāna)는 출식出息을 가리키는 말로서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 또는 수식數息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출입식으로 선정禪定을 일으키는 것을 안반념安般念이라 한다. 이것은 요컨대 호흡을 중심으로 점차 그 관찰의 범위를 확대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 안나반나安那般那의 호흡법에 관하여 그 수행 방법과 효능에 대해 설한 것이 『安般守意經』이다. 본 경전은 『佛說大安般守意經』, 『安般守意經』, 『大安般經』, 『安般經』, 『守意經』이라고도 불린다. 후한後漢시대 안세고安世高의 역으로 안반, 즉 오정심관 가운데 특히 수식관數息觀에 중점을 두고 있다. 안나(出息)와 반나(入息)를 관찰함으로써 마음의 산란함을 방지하는 방법으로 수식數息·상수相隨·지止·관觀·환還·정淨 등 여섯 가지로 상세하게 상·하 2권에 걸쳐서 설하고 있다. 그런데 경설에 약간의 혼잡한 점이 보이는 것은 본 경전의 후서後序를 붙인 곳에 경문과 주를 합해 설명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3. 3)자성선自性禪 내지 청정정선淸淨淨禪 : 보살이 닦는 최고의 선인 구종대선九種大禪을 말한다. 자성선自性禪·일체선一切禪·난선難禪·일체문선一切門禪·선인선善人禪·일체행선一切行禪·제번뇌선除煩惱禪·차세타세선此世他世禪·청정정선淸淨淨禪 등의 아홉 가지이다.
  4. 4)가라라歌邏羅(ⓢkalala) : 갈랄람羯剌藍·갈라람羯邏藍이라고도 한다. 태내胎內 5위位의 하나로 수정되고 7일까지의 상태이다. 미음처럼 끈끈하고 약간 굳은 상태를 말한다.
  5. 5)인상人相·아상我相·중생상衆生相 : 여기에 수자상壽者相을 더해 흔히 사상四相이라 한다. 인연의 화합일 뿐인 인간에 대해 실체나 자아가 있다고 여기는 잘못된 견해의 총칭이다.
  6. 6)서른여섯 가지 물질 :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물질을 특성에 따라 36종으로 분류한 것으로 제20장 통명관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분류한 물질은 경론마다 약간의 차이가 보인다.
  7. 7)네 가지 뒤바뀐 생각(四顚倒) : 일체의 세간법은 무상하고, 고통스러우며, 주체가 없고, 더러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영원하고, 즐거우며, 주체가 있고, 깨끗하다고 보는 잘못된 견해를 말한다.
  8. 8)각覺과 염念 : 호흡에 대한 지각과 사념처를 말한다.
  9. 9)욕계보신欲界報身 : 숙세에 지은 업의 과보로 받은 욕계의 몸을 욕계보신이라 한다. 지금의 이 선정에서는 아직 욕계보신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욕계정이라고 부른다는 뜻이다.
  10. 10)일반적으로 초선정 이후부터 진정한 선정의 개념으로 간주한다. 보다 명확하게는 색계의 선정을 선이라 하고 무색계의 선정을 정이라 한다.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이런 점에서 욕계의 선정은 진정한 선정이 아니다.
  11. 11)『大智度論』 권17(T25, 185c)에 “성인은 버릴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버리기 어려워라, 만약 즐거움이 환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면 움직이지 않음을 보고 크게 편안하리라. (聖人得能捨。餘人捨爲難。若能知樂患。見不動大安。)”라고 하였고, 『釋禪波羅蜜次第法門』 권5, 「釋禪波羅蜜修證」 제7의 1(T46, 515a)에서도 이를 인용하고 있다.
  12. 12)사수捨受 : 삼수三受 또는 오수五受의 하나로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라고 한다. 몸과 마음에 고통도 즐거움도 느끼지 않는 일종의 감각 작용이다.
  13. 13)다섯 갈래 세계(五道) : 지옥·축생·아귀·수라·인간·천상의 육도六道에서 천상 또는 아수라 세계를 제외한 중생세계 전체를 오도라 총칭한다.
  14. 14)세 가지 마음 : 앞서 설명한 자심慈心·희심喜心·비심悲心을 말한다.
  15. 15)범왕梵王(ⓢBrahma) : 몰라함마沒羅含摩·범마梵摩라고 하며 범천왕梵天王·대범천왕大梵天王이라고도 한다. 색계 초선천의 왕으로서 별명을 시기尸棄·세주世主 등이라 한다. 인도 신화에서는 겁초劫初에 광음천에서 내려와 만물을 창조했다고도 하며, 혹은 비쉬누의 배꼽에서 나온 천 잎 연꽃 가운데서 태어나 일체 만물의 근원이 되었다고도 한다. 불교에서는 제석과 함께 정법을 옹호하는 신神으로 여긴다.
  16. 16)『大智度論』 권17(T25, 186c)에 “이때에는 무량무변한 공을 관찰할 수 있는데, 이 관찰을 얻고 난 후에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없어 그 마음에 계속 늘어난다.(是時能觀無量無邊空。得此觀已。無苦無樂。其心轉增。)”고 하였고, 『釋禪波羅蜜次第法門』 권6, 「釋禪波羅蜜修證」 제7의 1(T46, 521a)에 “대승에서는 ‘허공처정을 얻으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그 마음이 점차 늘어난다’라고 하였다.(摩訶衍云。得虛空處定。不苦不樂其心轉增。)”고 하였다.
  17. 17)유루이면서 무루라는 뜻 : 선정은 기쁨(喜)과 즐거움(樂)이 온몸에 생겨 애착하게 하므로 유루법이고, 지혜는 이런 애착의 허물을 가책하므로 무루법이다. 육묘문은 선정과 지혜를 다 갖췄으므로 유루이면서 무루이고, 세간이면서 출세간에 속하는 수행법이라 한다.
  18. 18)공삼매空三昧 : 모든 법은 인연이 화합하여 생긴 것으로서 거기엔 어떤 주체도 실체도 없음을 관하는 삼매이다. 공삼매·무상삼매·무원삼매를 흔히 삼삼매三三昧 또는 삼해탈문三解脫門이라 한다.
  19. 19)무상삼매無相三昧 : 모든 법이 공이므로 남자나 여자, 같다거나 다르다는 등 차별되는 모습이 있을 수 없음을 관하는 삼매이다.
  20. 20)무작삼매無作三昧 : 무원삼매無願三昧라고 한다. 일체법에 차별상이 없으므로 얻을 것도, 지을 것도, 바랄 것도 없다고 관하는 삼매이다.
  21. 21)대치對治 : 병의 증세에 따라 방법을 달리해 치유하듯 문제점이나 오류가 있을 때 이를 보완하고 치유하는 것이다.
  22. 22)여기까지 십육특승의 작용에 대한 몇 가지 학설을 소개하였다. 다음부터는 십육특승에 대한 천태 대사의 설명이다.
  23. 23)공空이고 가假 : 모든 법은 끊임없이 생멸변화하며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공’이라 한다, 그렇다고 완전히 전무한 것이 아니라 임시적이나마 이름과 형상을 가지고 현상적으로 차별되므로 이를 ‘가’라 한다.
  24. 24)세 가지 : 호흡과 색과 마음을 뜻한다.
  25. 25)각 등의 사지 : 각覺·관觀·희喜·낙樂을 말한다.
  26. 26)세 가지 모습(三相) : 생기고(生) 변화하고(異) 없어지는(滅) 유위법의 변천상을 말한다. 여기에 머묾(住)을 더해 흔히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사상四相이라 한다.
  27. 27)사온 : 수受·상想·행行·식識을 말한다.
  28. 28)『大方等大集經』 권22(T13, 161a).
  29. 29)여섯 부분 : 머리와 몸통 그리고 두 팔, 두 다리를 말한다.
  30. 30)사미四微 : 사진四塵이라고도 한다. 지·수·화·풍 사대와 함께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로서 색色·향香·미味·촉觸을 말한다.
  31. 31)정보正報 : 과거에 지은 업이 인연이 되어 현세에 받는 과보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람이나 짐승 또는 천인 등 유정有情의 몸이니 이를 정보라 하고, 또 하나는 유정이 의지하고 살아가는 환경, 즉 기세간器世間이니 이를 의보依報라 한다.
  32. 32)오신통五神通 : 오통五通·오신변五神變이라고도 한다. 5종의 불가사의하고 자재한 작용으로서 멀리 있는 사물이나 미래의 일을 볼 수 있는 천안통天眼通, 먼 곳의 소리나 짐승과 귀신 등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천이통天耳通, 자신과 남의 전생을 알 수 있는 숙명통宿命通,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타심통他心通,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장애 없이 마음대로 가고 몸을 신비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신족통神足通을 말한다.
  33. 33)『釋禪波羅蜜次第法門』에서는 이것을 자상부정自相不淨이라 하였다.
  34. 34)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 :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삼십칠보리분법三十七菩提分法이라고도 한다. 열반의 이상경理想境에 나아가기 위해 닦는 도행道行을 총칭한 것이다. 사념처四念處·사정근四正勤·사여의족四如意足·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분七覺分·팔정도분八正道分을 말한다.
  35. 35)열여섯 가지 관법(十六行觀) : 십육행상十六行相이라고도 한다. 사제四諦를 관할 때 각각 네 가지로 다르게 관하는 총 열여섯 가지의 관법을 말한다. 고제苦諦에서는 무상無常·고苦·공空·무아無我를 관하고, 집제集諦에서는 인因·집集·생生·연緣을 관하며, 멸제滅諦에서는 멸滅·정靜·묘妙·이離를 관하고, 도제道諦에서는 도道·여如·행行·출出을 관한다.
  36. 36)오계五戒 : 불제자가 지키는 불살생不殺生·불투도不偸盜·불사음不邪淫·불망어不妄語·불음주不飮酒의 다섯 가지 금계이다. 여기서는 계율 전체를 가리키는 포괄적 의미로 쓰였다.
  37. 37)중음中陰 : 중유中有(ⓢantarā-bhava)라고도 한다. 윤회전생할 때에 이 생을 끝내고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의 중간 존재를 말한다. 극히 선하거나 극히 악한 업을 지은 사람은 죽자마자 곧장 다음 생을 받으므로 중음이 없으나, 보통 사람들은 49일 이내에 다음 생의 과보가 결정된다고 한다.
  38. 38)오식五識(ⓢpañca-vijñāna) : 오식신五識身이라고도 한다.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의 오경五境을 인식하는 5종의 심식인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말한다.

 

 

 

붓다 오도송 [悟道頌] 

 김용옥 / 아래 동영상 시각바 48:32

 

나는 모든 것을 이겼고 모든 것을 알았다.

나는 일체의 제법(諸法)에 물들여지지 않았고 모든 것을 버렸다.

갈애 [渴愛]가 다하고 해탈을 얻었다.

스스로 깨달았으니 누구를 스승으로 칭하랴?

나에게 스승이 없다. 나와 비견할 자도 없다.

천신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 나와 같은 자는 없다.

어떤 자도 나와 동등하지 못하다.

나는 이 세상에서 존경받아야 할 사람이다.

나는 無上의 스승이다.

나는 홀로 모든 것을 바르게 깨달아 청정하고 적정한 경지에 이르렀다.

나는 법륜을 굴리기 위해 카시의 도성으로 간다.

어두운 이 세상에 불멸의 북을 울리기 위해.

 

제09강 숫다니파타

https://www.youtube.com/watch?v=6SUVZHE-W94&t=1465s 

 

과거 부처님들의 가르침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모든 악을 짓지 않고, 중생의 善(公共의 이익)을 봉행하고, 자기 마음을 스스로 깨끗이 한다.

이것이 여러 부처님들의 가르침이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7141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고려후기 승려 혜심이 선사들이 남긴 공안(公案)에 대한 후인들의 염·송 등의 착어를 모아 1226년에 간행한 불교 공안집.

고려후기 승려 혜심이 선사들이 남긴 공안에 대한 후인들의 염·송 등의 착어를 모아 1226년에 간행한 불교서. 공안집.

30권으로 구성된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은 보조지눌(普照知訥)의 제자이자 조계산 수선사(修禪社) 제2세인 진각혜심이 편집한 공안집이다. 내용적으로는 당대(唐代)를 주로 해서 북송(北宋)대까지의 선승들에 관한 공안과 그것에 대한 후인의 염(拈)·송(頌: 운문에 의한 비평) 등 착어(著語: 공안에 붙이는 짤막한 평)를 모아서, 공안의 주인공인 조사들을 석가모니로부터 시작되는 선종의 전등(傳燈) 순서에 따라 배열한 것이다. 공안의 숫자는 1472칙에 미칠 정도로 방대하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4587

 

화두(話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공안(公案)·고칙(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의 ‘화(話)’는 말이라는 뜻이고, ‘두(頭)’는 머리, 즉 앞서 간다는 뜻이다.

따라서 화두는 말보다 앞서 가는 것, 언어 이전의 소식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참된 도를 밝힌 말 이전의 서두, 언어 이전의 소식이 화두이며, 언어 이전의 내 마음을 스스로 잡는 방법을 일러 화두법(話頭法)이라고 한다.

공안이라고 할 때의 ‘공(公)’은 ‘공중(公衆), 누구든지’라는 뜻이고, ‘안(案)’은 방안이라는 뜻이다. 누구든지 이대로만 하면 성불할 수 있는 방안이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불교 선종(禪宗)의 조사들이 만들어 낸 화두의 종류로는 1,700여 종류가 있다.

이 가운데 우리 나라 참선수행자들이 널리 채택하여 참구한 화두는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狗子無佛性)’, ‘이 무엇고?(是甚麽)’,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 ‘삼 서근(麻三斤)’, ‘마른 똥막대기(乾尿橛)’ 등이다.

‘구자무불성’은 무자화두(無字話頭)라고도 하는데, 우리 나라의 고승들이 이 화두를 참구하고 가장 많이 도를 깨달았다고 한다. 한 승려가 조주(趙州)스님을 찾아가서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를 물었을 때 “무(無)”라고 답하여 이 화두가 생겨났다. 부처님은 일체 중생에게 틀림없이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조주스님은 왜 없다고 하였는가를 의심하는 것이 무자화두법이다.

‘이 무엇고?’ 화두는 이 몸을 움직이게 하는 참된 주인공이 무엇인가를 의심하는 것으로, 무자화두 다음으로 널리 채택되었다. 또한, ‘뜰 앞의 잣나무’는 어떤 승려가 조주스님에게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祖師西來意)이 무엇인가?” 하고 물었을 때 답한 말이다. ‘삼 서근’은 “어떤 것이 부처인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운문종(雲門宗)의 수초선사(守初禪師)가 답한 말이며, ‘마른 똥막대기’는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는 물음에 대하여 문언선사(文偃禪師)가 답한 말이다.

 

https://www.krm.or.kr/krmts/search/detailView.html?dbGubun=SD&category=Report&m201_id=10002416&local_id=10009667 

 

선문염송염송설화회본(禪門拈頌拈頌說話會本)의 번역주석

(1). 연구의 결과 ① 원고 분량 : 약37000매(각주, 해제, 인명사전, 상세목차 포함) ② 편집 차례 : 표지, 일러두기, 목차, 번역문(원문 첨부), 인명사전, 해제, 상세목차(책의 성격상 색인은 상세목차

www.krm.or.kr

  • 본 연구는 국학고전연구의 번역(飜譯)․주석(註釋) 분야이다. 본 연구는 3년간 370,000,000원을 지원받아 연구책임자 1인, 공동연구자 3인, 연구보조원 박사과정 4인, 석사과정 6인이 참여한 소형과제이다.
    본 연구에서 번역․주석한 텍스트는 한국 선불교(禪佛敎)에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 꼽히는 <선문염송(禪門拈頌)>과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의 회본(會本)이다. 진각국사 혜심(慧諶)이 편찬한 <선문염송>은 옛 화두(話頭) 1463칙(則)과 이에 대한 여러 선사들의 염(拈)․송(頌)․상당거화(上堂擧話) 등 중요한 말들을 모아서 30권으로 집성한 것이다. <염송설화>는 혜심의 제자인 각운(覺雲)이 <선문염송>의 화두 1463칙과 염․송․상당거화 전체를 빠뜨림 없이 모두 주석한 완전한 주석서로서, <선문염송>과 마찬가지로 30권 5책이다. 역주에 사용한 텍스트의 판본은 동국대학교에서 간행한 <한국불교전서> 제5책 <선문염송염송설화회본(禪門拈頌拈頌說話會本)>인데, 이 회본(會本)은 고려대장경 보유판 <선문염송집>과 1686년 간행한 묘향산(妙香山) 선정암(禪定庵) 판 <선문염송설화>(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를 합친 것이다.
    본 연구에서의 번역은 <선문염송염송설화회본> 30권 전체를 빠짐 없이 번역하고, 번역문 아래에는 원문을 첨부하여 대조독이 가능하도록 하였으며, 가능한 상세한 주석을 붙여서 이해를 도왔고, 마지막에는 텍스트에 대한 해제(解題)와 등장하는 인물의 인명사전을 첨부하였다. 각권 앞에는 상세한 목차를 두어서 찾아보기의 기능도 겸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인용문을 번역하는 경우 어디까지가 인용문인지를 그 인용된 원문을 찾아서 확인하는 작업을 함으로써 기존 번역의 많은 오류를 바로 잡았다. 번역문(각주, 해제, 인명사전, 상세목차 포함)의 총 분량은 약37,000매이다.
 
 
 

한문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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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門拈頌 拈頌說話會本卷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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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門拈頌 拈頌說話會本卷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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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門拈頌 拈頌說話會本卷三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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