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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人一快事六首效香山體
늙은이의 한 가지 즐거움들에 관한 시 여섯 수를 향산(香山, 白居易)의 시체(詩體)를 본받아 짓다
1.[머리카락이 빠져 손질할 일 없음]
2.[치아 빠져 치통이 사라짐]
3.[눈이 어두워지니 경치나 구경]
4.[귀가 어두워지니 시비할 일 없음]
5.[나는 조선인, 조선시를 쓴다]
ㅡ한시의 형식에 다소 벗어나더라도 의미 전달에 초점을 둔다
老人一快事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縱筆寫狂詞 붓 가는 대로 미친 말을 마구 씀일세
競病不必拘 경병을 굳이 구애할 것이 없고
推敲不必遲 퇴고도 꼭 오래 할 것이 없어라
興到卽運意 흥이 나면 곧 이리저리 생각하고
意到卽寫之생각이 이르면 곧 써내려 가되
我是朝鮮人 나는 바로 조선 사람인지라
甘作朝鮮詩 조선시 짓기를 달게 여길 뿐일세
卿當用卿法 누구나 자기 법을 쓰는 것인데
迂哉議者誰 오활하다 비난할 자 그 누구리오
區區格與律 그 구구한 시격이며 시율을
遠人何得知 먼 데 사람이 어찌 알 수 있으랴
6.[바둑은 강자와의 대국을 기피하고 약자와만 상대함.]
https://www.youtube.com/watch?v=FslnyVcxXS4
https://www.youtube.com/watch?v=Tm-WmxEyV6U
https://www.youtube.com/watch?v=S9I5p6Auzrw
https://www.youtube.com/watch?v=ZU_N6cPmG0U
https://www.youtube.com/watch?v=jNHK1bPSB8A
만덕산 백련사 (전각 이름)
해탈문 (전각 이름)
백제불교에는 미륵신앙이 강하다.
일주문 지나 사천왕 전각 대신 코끼리를 탄 문수보살을 만나는데 전각이름도 금강문이 일반적이나 여긴 해탈문이라 썼다.
동백숲 진입로는 연등이 동백꽃을 대신했다.
한 판에 '대웅보전'이라 쓰지 않고, '대웅'과 '보전' 두 장의 나무판을 쓴 것이 특이하다. 명필 이광사의 글씨.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4587
명부전에는 지장보살과 심판관 10왕 모심, 문지기 두 장수는 없었다.
오른쪽 호랑이를 거느린 분은 단군할배, 한국신화의 수용
위 벽면 그림은 심우도
탐진치를 벗어나 자아 찾기를 불교에서는 잃어버린 소를 찾아 환희하는 모습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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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강포九江浦, 중국에 고려청자를 이송하던 포구임. 서해로 이어짐.
https://blog.naver.com/lsdcjm/222343427189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22070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백련사에 대한 사적은 1432년(세종 13) 윤회(尹淮)가 저술한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와 정약용(丁若鏞)의 『만덕사지(萬德寺誌)』 등에 나타나 있다.
만덕산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만덕사(萬德寺)라고도 하였다. 이 절은 839년(문성왕 1) 무염(無染)이 창건하였으며, 중요한 수도도량으로 면모를 달리한 것은 1211년(희종 7) 요세(了世)가 크게 중창한 뒤부터이다.
요세는 천태종계(天台宗系)의 승려로서 고승 지눌(知訥)과 깊은 친분 속에서 지눌과 함께 송광사에 머물다가, 1208년에 천태종의 묘의(妙義)를 얻었고, 강진에 살고 있던 최표(崔彪)와 최홍(崔弘)·이인천(李仁闡) 등의 권유로 만덕산에 자리를 잡고 그의 제자 원영(元營)으로 하여금 가람 80칸을 짓게 하였다.
이 역사(役事)는 1211년부터 1232년(고종 19)까지 21년 만에 완공되었으며, 당시 목백(牧伯)이 지극한 정성으로 재물을 보시(布施)하였다고 한다. 절이 완공되자 요세는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개설하고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 결사(結社)를 맺었다. 이것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수선사(修禪社)와 쌍벽을 이루었던 백련사결사(白蓮社結社)이다.
그 뒤 이 절에서는 120년 동안을 이어 고려의 8국사(國師)를 배출하였다. 고려 말에는 강진지방이 세 차례의 왜구침입을 받았을 때 이 절도 함께 폐허화되었다. 조선 세종 때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보호를 받아 주지 행호(行乎)가 불타버린 가람을 복원하였다. 그 뒤 효종 때 3차 중수를 하였으며, 그때 탑과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조계종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하여 종세(宗勢)를 키우고 있을 때, 이 절은 천태사상에 입각한 결사도량(結社道場)을 개설하여 침체한 불교중흥을 꾀한 중심지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외세의 잦은 침입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절 주위에 성을 쌓았는데, 이 성을 행호토성(行乎土城)이라고 한다. 현재의 절 또한 그때 쌓은 토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시왕전(十王殿)·나한전(羅漢殿)·만경루(萬景樓)·칠성각·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써 각 추녀마다 네 개의 활주(活柱)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으며, 전면 두 개의 주두(柱頭)는 용두(龍頭)로 장식한 다포집 건물이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불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만경루는 규모가 큰 누각으로 강진만 일대의 바다를 환히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 밖의 사중유적(寺中遺蹟)으로는 만덕산 백련사사적비와 원묘국사중진탑(圓妙國師中眞塔)이 있다. 사적비의 거북은 앉은 키가 높은 편이고 용의 눈이 험상궂게 생긴 귀부(龜趺) 위에 비신(碑身)이 있으며, 그 위에 옥개석(屋蓋石) 모양을 한 가첨석(加檐石)이 놓여 있다. 중진탑은 방형의 지대석(地臺石)인 위에 연화문(蓮花文)의 중대석(中臺石)이 있으며, 상대석에도 무늬가 있으나 잘 보이지 않는다.
고복형(鼓腹形)의 옥신(屋身)에는 두 줄의 주렴문이 조각되어 있고, 옥개석의 낙수면은 완만하며, 상륜부에는 노반(露盤)·복발(覆鉢)·보주(寶珠)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절 주위에는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백련사의 동백림과 정약용이 신유사옥 때 강진으로 귀양와서 조선의 실학을 집대성하고 차를 끊여 마시던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백련사를 가리켜 ‘남쪽바다에 임해 있고 골짜기 가득히 송백이 울창하여 동백 또한 곁들여서 수목이 싱싱하게 푸른 모습이 사계절을 통해 한결같은 절경’이라고 한만큼, 주위의 경관 또한 아름답다.
무여스님, 백련사(전남 강진)
https://www.youtube.com/watch?v=I-1lpc9m0W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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