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을 불러들인 ‘여우사냥’1903년 일본에서 노윤명과 함께 우범선을 살해한 고영근은 조선 조정으로 보낸 서한에서 우범선을 ‘국모를 시해하고 그 몸을 소각한’ 대역죄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당시 현장을 지켜본 여러 사람의 증언을 종합한 결론이었다.일본에 있는 우범선의 묘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박물관에는 ‘여우사냥’ 당일의 행적이
기록된 노트가 전시되어 있다.기록자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다.이 노트의 기록은 낭인그룹 중 하나인 <흑룡회>가 1933년에 발간한 「동아 선각지사 기전」
집필에도 인용되었다.‘우범선이 곤녕전에 도착하니 민비는 이미 칼에 찔려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우범선은 훈련대 하사관에게 민비의 시신을 이불에 말아 새끼줄로 묶게 한 뒤 건물 밖 녹원으로 옮겨 휘발유를 끼얹어 태우도록 시켰다.하사관은 타다 남은 뼈를 연못에 갖다 버렸다.’다시 ‘여우사냥’ 당일로 돌아가 1895년 10월 8일 오전 9시, 총소리에 놀란 군중 수만
명이 광화문 앞에 운집해 있었다.낭인들이 피 묻은 칼을 시위하듯 흔들며 왁자지껄 광화문을 빠져나오고 있었으나 군중들은
공포에 질려 쳐다보기만 했다.웨베르 러시아 공사와 알렌 미국 공사가 고종을 알현하기 위해 경복궁에 도착했을 때는
막 신임내각이 발표되고 있었다.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이범진, 군부대신 안경수 등 친러․친미파 인사들이 해임되고궁내부대신 이재면, 군부대신 조희연,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법부․학부 겸임대신 서광범 등
친일파가 대거 임명되었다.고종이 미우라 일본공사의 요구를 100% 수용한 인선이었다.이때까지 이완용은 친러파였다.미우라의 저지로 마냥 기다리다가 러시아와 미국 공사가 고종을 알현한 것은 정오가 지나서였다.그 사이 두 공사는 민비를 호위하던 미국 퇴역장성 등으로부터 전말을 보고받았다.고종의 좌우에는 미우라와 대원군이 버티고 서 있었다. 고종은 그때까지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해 용안은 창백했고 눈동자는 이리저리 겉돌고 있었다.드라마 「명성황후」에서 고종 역을 맡은 탤런트 이진우는 당시 고종의 표정을 참으로 실감나게
연기했었다.미국 공사 알렌은 고종 알현을 마치고 공사관에 돌아오자마자 사건의 전말을 워싱턴에 긴급
타전했다.이틀 뒤인 10월 10일, 미우라의 강압에 의해 고종은 민비를 ‘그 몸을 피해 나타나지 아니하는 죄’
를 뒤집어씌워 폐위했다.허수아비 고종은 범인들 스스로 ‘고금의 역사상 미증유의 흉악사건’이라 자처한 마당에 왕비를
도망자로 몰아 폐한 것이다.한편, 경복궁을 나온 미우라가 일본공사관에 도착하자 우치다 영사가 찾아왔다.우치다가 ‘각하, 큰일 아닙니까?’고 하자 미우라는 태연하게 ‘괜찮아.
이로써 조선은 드디어 우리 것이 되었네.’ 했다.“각하. 조선에 있는 일본인 대부분은 각하를 비롯하여 일본 관원 다수가 이번 일에 관련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이 일이 외국인들에게 알려지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관련 당사자들에게 굳게 함구령을 내릴 참일세. 재판에 나가더라도 말일세.”이때 웨베르 러시아 공사를 필두로 재경 외국사절 일행이 일본공사관으로 찾아와 일본의 조선 내정
간섭을 항의했다.“조선훈련대 일부 병사들이 훈련대 해산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킨 것입니다.우리는 조선 국왕의 요청에 따라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경복궁에 갔을 뿐입니다.”그럴 듯한 미우라의 답변에 사절 일행은 아무 소득 없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우치다 영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미우라가 이등방문 총리에게 전말을 보고한 것은 사건 엿새 뒤인
10월 14일이었다.열강의 항의와 국제적인 비난이 고조되자 일본 정부는 할 수 없이 진상조사에 나섰다.주한 일본 경찰이 주모자 11명을 조사했지만 경찰 또한 ‘여우사냥’에 개입한 터라 조사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진실을 알고 있는 열강은 당연히 이 조사를 불신했다.일본은 외교적으로 고립상태에 빠졌다.이등방문 총리는 10월 17일 미우라 공사를 해임하고 후임에 고무라 외무부 정무국장을 임명하는 한편,미우라를 필두로 사건 관련자 56명을 일본으로 소환했다.일본에 도착한 일행 중 미우라 등 민간인 48명은 히로시마감옥에, 군인 8명은 군 감옥에 수감되었다.이들은 이듬해 1월에 열린 공판에서 증거 불충분이라는 미명하에 전원 석방되었다.이때 일본은 민비의 서거에 조의를 표하기 위해 전 공사 이노우에를 파견했는데,인사차 들른 이노우에에게 육군대신 오야마는 ‘여우를 사냥하고 곰(러시아)을 불러들였으니 얼마나
바보인가!’하고 질타했다.국제적인 압력이 가중되자 일본은 10월 25일 조선에 주둔 중인 일본군을 철수하고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포했다.10월 30일에는 일본이 장악하고 있던 훈련대를 해산하고 친위대 1개 연대와 진위대(지방) 1개 연대를
창설했다.현재의 소령을 연대장으로 한 이 두 연대가 19세기 말 공식적인 조선 병력의 전부였다.지방 관아마다 소수의 군졸들이 소속되어 있기는 했지만 조선에는 이들을 국방에 동원할 법령도 조직도
연락망도 없었다.훈련대가 해산되던 날 우범선은 한 일본인 집으로 숨어들었다가 나중에 일본으로 망명했다.11월 26일에는 민비를 복위시키고 대원군은 스스로 은퇴했다.12월 1일에는 민비가 시해된 사실을 공식 선포하고 국장을 반포했다.김홍집 내각은 군부협판 이주희, 훈련대 부위 윤석우․박선 등 3명을 민비 시해의 주범으로 몰아 12월
30일 처형했다.박선은 우범선의 지시로 타다 남은 민비의 시신을 연못에 버린 불경죄로 처형되었다.이 와중에 친러․친미파 정객들이 시위대 장병을 동원하여 고종 탈취를 기도했다가 실패했는데,철군을 공언하고도 그때까지 미적거리고 있던 일본은 물실호기, 열강이 조선의 내정에 개입했다며
철군계획을 취소했다.참으로 개떡 같은 조선의 국운이었다.1896년 1월 20일 감옥에서 풀려난 미우라가 기차를 타고 도쿄로 올라갈 때, 각 역에는 수많은 군중이
몰려나와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도쿄역에서는 왜왕의 명을 받은 시종이 나와 미우라를 맞이했다.“폐하께 심려를 끼쳐 대단히 죄송하네.”“아닙니다. 폐하께서는 ‘해야 할 때는 해야 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지금 찾아온 것은 ‘여우사냥’에 이용한 대원군에게 특별한 약속을 했는지를 알아오라는 분부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대원군과는 약속이고 뭐고 없다. 은거상태에 있던 그가 스스로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이다.
아무 약속도 없었다고 전하라.”
< 끝 > - 이후에도 이종각의 「명성황후 복수기」는 300여쪽이 더 진행된다.
고종의 아관파천과 환궁, 대한제국 선포, 명성황후 추존, 을사늑약 체결 등 조선의 최후가
가파르게 펼쳐진다.
그리고 자객 고영근이 일본에서 민비 시해범 우범선을 추격하여 살해하는 과정도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미 밝혔듯이 역사는 다 아는 사실이요 고영근의 복수극에는 나 자신이 큰 흥미를 못
느껴 읽지도 않고 덮었다. 대신 「여우사냥」을 쓰면서 새로 생긴 관심에서 주문해놓은 이수광의 「명성황후」를 학수
고대하고 있다. 지금까지 조선의 아픈 역사를 곱씹으면서 나는 단종, 사육신, 사도세자만 생각했었다. 巫家에서 단종의 송비를 최고 영험을 가진 귀신으로 모신다는 얘기도 했었다. 왜 민비를 떠올리지 못했을까? 남편을 비명에 잃은 송비의 처지에는 의분을 느끼면서 왜 직접 당신의 목숨을 잃은 민비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았을까? 더구나 막가파 같은 왜국의 낭인들에게 개처럼 비천하게 목숨을 잃고 시신이 능욕까지 당한
가장 억울한 죽음을. 사도세자의 죽음이 조선을 통틀어 가장 억울하다면 민비의 죽음은 가장 참혹하다. 사도세자는 죽자마자 시호를 받고 세자의 예로 장례가 치러졌지만, 민비는 남편 고종에 의해 행방불명 선포와 함께 폐위되었다. 어느 모로 보나 그러려니 지나칠 사건이 아니다. 지금껏 이를 간과한 민망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명성황후」를 정독하고자 한다. 사랑방에 올려 공유하게 될지는 그 이후에 생각해보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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