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비(1851~1895)의 초상.
시해 당시 44세였지만 외모가 20대 같은 동안이라 낭인들이 찾아내기 어려웠다고 전해진다>

내가 조선의 국모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인 거주지인 진고개의 한 요정에서는 기생을 곁들인 질펀한

주연(酒宴)이 무르익고 있었다.
손님은 ‘여우사냥’에 나설 낭인들이었다.
술이 거나해진 낭인들은 구니모토의 지령에 따라 서너 명씩 조를 짜서 경복궁을 향해

진군해갔다.
같은 시각 남산 아래 <한성신보>사에 집결해 있던 낭인 30여 명은 용산을 거쳐 마포의

대원군 별장으로 향했다.
일본 병기창과 경찰서가 있는 용산에서는 몇 명의 일본 사복경찰이 일행에 합류했다.
별장에 당도한 낭인들은 기습으로 대원군을 감시하던 10여 명의 조선 순검을 포박하여

창고에 가둔 뒤 대원군을 깨웠다.
대원군은 거사의 취지를 백성들에게 알리는 고유문(告諭文) 초안을 재가한 뒤 오전 3시,

가마에 올랐다.
박은식(1859~1925)은 1915년에 편찬한 「한국통사」에서 당시 대원군의 매국적 행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대원군은 일본의 요구에 응해 저들의 꼭두각시가 되니, 춘추시대 조순이 왕을 주살한

것과 다를 바 없다…’


박은식은 1925년, 이승만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에 오른 인물이다.

일본 낭인들이 남대문에 이르러 합류하기로 한 일본군 수비대를 기다리는 동안 대원군은

낭인 두목 오카모도를 불러 주문했다.
“나의 입궐을 방해하는 무리는 모조리 베시오.
그리고 이완용, 이범진, 이경직, 안경수 같은 대신들도 모조리 베어버리시오.”
모두가 며느리 민비와 권력 다툼을 벌일 때 민비 편에 선 인물들로 대원군의 사감(私感)이

깃든 요청이었다.
그러나 오카모도는 쓰다달다 대답이 없었다.
약속시간이 지나도 수비대가 나타나지 않자 일행은 서대문 한성부청으로 옮겨 우범선이

이끄는 훈련대 제2대대와 합류했다.
길이 어긋나 도착이 늦어진 일본군 수비대 등이 모두 합류한 건 5시 30분경이었다.
일행은 대오를 지어 구보로 경복궁으로 향했다.
낭인 50여명-일본 경찰 10여명-일본 수비대-훈련대 제2대대-대원군 가마-일본 수비대

1개 대대-훈련대 제1대대 순이었다.
진고개에서 출동한 낭인별동대가 대원군의 가마 양 옆에서 호위했다.
일본군 수비대가 준비해온 사다리를 타고 담벼락을 넘어가자 조선 순검과 병사들은 들고

있던 총검을 던지고 다투어 도망갔다.

5시 50분,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광화문이 활짝 열렸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조선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1개 중대를 인솔하고 달려왔을 때는

역도들이 광화문을 거의 통과한 뒤였다.
“연대장이 여기 있다. 조선훈련대 장병들은 함부로 궁궐을 범하지 말고 내 명을 따르라!”
홍계훈의 호통에 역도에 가담했던 훈련대원들이 잠시 술렁였다.
일본군 장교가 홍계훈을 향해 총을 발사했고, 홍계훈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홍계훈이 쓰러지자 그가 이끌고 온 훈련대가 역도들을 향해 총격을 했지만 중과부적,

10분도 안 되어 전사자를 남긴 채 뿔뿔이 도망갔다.
홍계훈이 광화문 정면에 버티고 서서 수많은 낭인들을 죽이는 TV 속의 통쾌한 장면은 허망한

시청자를 위한 위안쯤으로 쳐두자.
홍계훈의 보고를 받고 함께 달려왔던 군부대신 안경수는 낭인들의 거점인 <한성신보>사로

도망쳤다.

역도들은 고종과 민비가 거처하는 건청궁으로 직행했다.
저항은 전혀 없었다.
일국의 왕궁이 한 줌의 역도들에게 무방비로 유린당하는 참담한 현장이었다.
대원군은 일본군 수비대 1개 소대의 호위를 받으며 강녕전에서 기다렸다.
역도들이 건청궁 뜰에 집결하자 오카모토가 외쳤다.
“여우를 찾아내어 베어버려라!”
건청궁은 이내 난장판이 되었다.
호위군사들은 눈에 띄는 대로 살해되었다.
속옷 차림의 궁녀들이 맨발로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아우성을 쳤다.
그 가운데는 피투성이가 된 세자(훗날 순종)빈도 있었다.
세자빈은 이 일로 홧병을 얻어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1904년 11월, 32세로 요절한다.
그러나 TV 드라마 「명성황후」에서처럼 민비가 ‘내가 조선의 국모다’ 하며 낭인들에게

호통을 치는 극적인 장면 역시 연출되지 못했다.

민비의 최후는 당시 주한 영국 영사였던 힐리어(Walter Hillier)에 의해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는 당시 경복궁에 머물던 궁녀와 내관, 조선의 직함을 가지고 일하던 영국인과 미국인

등의 진술을 종합하여 이 보고서를 작성했다.
10~40년이 흐른 뒤 각각 자서전을 낸 낭인들이나 일본 군인들의 기록도 여럿 있지만,

이 기록이 가장 객관적이어서 자료로 택했다.
<건청궁에 침입한 민간복장의 일본인들은 왕과 왕세자를 구금한 뒤 일부가 왕비의 침실로

향했다. 궁내부대신 이경직의 급보를 받은 왕비가 막 달아나 숨으려던 순간이었다.
이경직은 두 팔을 벌려 왕비를 보호하려 했다.
일본인 하나가 칼을 내리쳐 이경직의 두 팔을 자른 뒤 왕 앞으로 끌고가 난도질을 하여

죽이는 한편, 사진을 들고 왕비를 찾던 다른 일본인은 이경직이 보호하려던 여인이 왕비임을

직감하고 여러 차례 찔러 죽였다.
이때 왕비와 용모가 비슷한 궁녀도 여럿 자살되었다.
일본인들은 왕비의 옷을 벗긴 뒤 칼로 신체 일부를 도려내는 등 차마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시신을 유린했다.
일본인들이 물러나자 일인들과 함께 난입했던 조선군들이 왕비의 시신을 이불에 말아 녹원

으로 끌고간 뒤 휘발유를 부어 불태웠다.>

그러나 민비를 살해한 낭인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낭인들은 서로 자신이 죽였다고 공을 내세웠고 일본 군경은 국제관계를 고려하여 발뺌을

했기 때문이었다.
여주 명성황후 생가 기념관에는 민비를 죽였다는 낭인 ‘도 가쓰야키’의 일본도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된 바 없다.
일본도에는 ‘一瞬電光刺老狐 - 단숨에 늙은 여우를 베었다’라는 문구가 자랑처럼 새겨져

있어 왜놈들의 광기를 대변해준다.

‘여우사냥’이 끝난 직후인 1895년 10월 8일 오전 7시, 일본공사 미우라는 경복궁으로 향했다.
고종은 안면이 창백한 채 그때까지 벌벌 떨고 서 있었다.
미우라가 조선말로 안부를 물었으나 고종은 대답조차 할 경황이 없었다.
지근에서 왕비가 죽고 알몸이 되어 낭인들에게 유린당한 뒤 불태워진 처지였으니 정신이

있었겠는가.
그때 대원군이 앞으로 나와 미우라에게 9배(拜)를 올렸다.
신하가 황제에게 올리는 최고의 예였다.
권력을 되찾아준 은인이라고는 하지만 75세의 최고 권력자가 49세의 일개 외국 외교관에게

올리는 예 치고는 너무나 굴욕적이었다.
대원군에게서 일말의 우국충정이라도 찾아보고자 했던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대원군은 한낱 정동영이요 박지원이요 손학규였다.

미우라에게 9배를 올렸다는 기록 덕분에 故 유주현 선생의 역작 「대원군」을 교재로

대원군과 민비의 관계를 짚어보려던 계획을 바꾸어
동네 서점에 이수광 작 「명성황후」를 주문해놨다.
민비의 눈으로 대원군을 바라보려 함이다.
대원군은 안동김씨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다니며 자신을 철저히 낮추어
결국 자식을 왕위에 올린 깊은 지략이 있었고 경복궁 복원이라는 역사적 위업을 남겼지만,

미우라에게 9배를 올렸다는 얘기를 읽고 나서 너무나 치욕스러워 내 머릿속의 역사사전에서

걸레로 벅벅 지워버렸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명성황후 복수기」의 저자 이종각의 기록이 철저한 고증을 거쳤을

것이라는 믿음에서다.
월탄 박종화 선생과 함께 문체가 유려하신 유주현 선생의 글을 다시 읽어보려던 당초의

기대가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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