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 속 부여사

고구려의 첫 도읍지로 알려진 오녀산성. 우뚝 솟아 만주벌판을 지키던 오녀산성에는 주몽의 꿈이 담겨 있다. 현재 중국 고고학 10대 유적지고 선정돼 있다.

현재 사학계는 부여를 어떻게 볼까

학계는 부여를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기원후 494년까지 북만주 땅에 있던 예맥족 계통 국가로 인식한다. 비록 연맹체 국가에 머물렀지만 역사상 고조선에 이어 두 번째로 국가체제도 마련한 것으로 본다. 물론 무려 700여 년간 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던 우리의 고대사라는 데는 의견이 일치한다. 송호정 한국교원대 교수는 “이들은 일찍부터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송눈과 송요 평원을 개척했고 서단산 문화라는 수준 높은 문화를 영위했다”고 밝혔다.

국명의 유래는 사슴이나 평야에서 왔다는 설로 압축되지만 영역에 관해선 명확한 기록이 없고 사서마다 차이가 있다. 다만 ‘진서’ 부여전에선 ‘남으로 선비와 접하며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고 기술돼 있다. 이를 두고 송 교수는 “시간 흐름에 따라 영역에 일련의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고 유추했다. 발전단계도 초기부여-동부여-졸본부여(주몽집단)로 해석된다.

부여족의 기원에 대해선 동이족이 동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부가 발해만 일대 장춘, 농안 지방으로 이동해 건국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건국신화에 따라 북방계통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도 본다. 이는 시조 동명이 스스로를 망인(亡人)이라 부른 데서도 엿볼 수 있다. 특히 부여는 고구려와 달리 중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삼국지’에선 부여국 4개 지방을 ‘사출도’로 표현했는데 이는 도읍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통하는 길을 의미하기도 했다. 송 교수는 “고구려, 백제, 발해가 그 정신적 자산을 부여에서 찾을 만큼 고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밝혀 부여사의 의미를 강조했다.

김종서 박사가 주장하는 3~5세기 말의 부여, 백제, 고구려 영역도. 한사군이 한반도를 벗어나 요서지역에 위치한 데다 백제가 중국 본토 일부를 차지한 것으로 묘사됐다. 사진 아래는 고교 국사교과서에 실린 역사지도. <참역사문화회 제공>

무관심에 가까운 역사적 빈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임기환 서울교대 교수는 “문헌이 매우 부족해 고고학적 발굴을 바탕으로 설명해야 하지만 대부분 중국 영토 내에 자리해 어려운 상황”이라며 “국내 연구자도 10여 명에 그친다”고 설명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각종 이설도 대두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참역사문화연구회의 김종서 박사가 주장하는 ‘1000년 왕국 부여설’. 현재 알려진 부여사는 중국과 일본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됐다는 주장이다. 그는 부여를 한나라와 대등한 관계를 설정한 뒤 조공까지 받은 대제국으로 묘사하며, 부여가 하북성 북부, 요녕성 북부, 내몽고, 동몽고, 동시베리아의 광활한 지역을 지배했다고 주장한다.


참역사문화연구회 ‘1000년 왕국설’

김 박사는 이같은 주장의 근거로 중국 전국시대(기원전 453~기원전 221)의 지리위치와 각 지역 특산물 등을 기록한 ‘사기’ ‘화식열전’을 꼽는다. 이 책은 연나라 북쪽에 부여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부여의 건국 시점도 최소 기원전 221년 이전으로 끌어올려진다.

한나라 황제가 부여왕이 죽었을 때 보냈다는 옥으로 만든 수의 옥갑. <참역사문화회 제공>

그는 또 “연나라는 하북성 중부, 남부지방을 영토로 한 국가이므로 연나라 북쪽의 부여는 하북성 북부, 요녕성 서북부, 내몽고, 동몽고 지방에 있었다”며 “부여 북쪽에는 어떤 국가도 없으므로 그 강역은 시베리아 동부지방에 까지 미쳤을 것”이라고 밝혔다.

부여도 해모수왕이 건국한 북부여, 동명왕(주몽과 다른 인물로 해석)이 북부여 땅에 건국한 부여, 동명왕에게 북부여 땅을 빼앗긴 해부루왕이 동부 연해주로 이동해 건국한 동부여, 주몽이 동부여에서 탈출해 고구려 건국의 기초를 다진 졸본부여, 백제 성왕이 538년 백제에서 국호를 바꾼 남부여까지 다양하다는 것이다.

특히 한나라의 대부여 조공설에 대해선 옥갑(玉匣)을 예로 들었다. 옥갑은 중국 전한(前漢:기원전 206~서기 8년) 시절 황제와 제후왕을 매장할 때 쓴 2498편의 옥편을 가공해 만든 수의. 이 옥갑을 황제가 미리 만들어 현도군 창고에 보관하다가 부여 왕이 서거하면 곧바로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이 단초가 됐다. 삼국시대 역사서인 ‘삼국지’의 이 기록을 들어 금은보화 등의 조공도 뒤따랐을 것으로 유추한다.

그는 또 수학적 위치고증방법을 고안해 한사군이 알려진 것과 달리 한반도 역외에 존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요서지역 해안도시인 진시시(錦西市) 소황띠(小荒地)라는 고대성곽에서 출토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와 <승>(丞) 자 봉니.

<<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다.클릭참조>>

<<“동북아시아 호령한 고구려는 중국도 인정한 흉노의 왕...클릭참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