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潭스님강설 金剛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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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現起請分 第二

선현기청분 제이

 

時에 長老須菩提 在大衆中하시다가 卽從座起하사 偏袒右肩하시며

시    장로수보리 재대중중              즉종좌기        편단우견        

 

右膝着地하시고 合掌恭敬하시와 而白佛言하사대 希有世尊하 如來

우슬착지           합장공경          이백불언           희유세존    여래

 

善護念諸菩薩하시며 善付囑諸菩薩하시나니 世尊하 善男子善女人이

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             세존     선남자선여인  

 

發阿耨多羅三邈三菩提心하니는 應云何住며 云何降伏其心하리잇고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             

 

佛言하시되 善哉善哉라 須菩提야 如汝所說하야 如來 善護念諸菩薩하며

불언           선재선재    수보리    여래소설       여래  선호념제보살

 

 善付囑諸菩薩하나니 汝今諦聽하라 當爲汝說하리라 善男子

 선부촉제보살           여금제청        당위여설          선남자

 

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邈三菩提心하니는 應如是住하며 如是降伏

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응여시주       여시항복

 

其心이니라 唯然世尊하 願樂欲聞하노이다

기심          유연세존     원요욕문            

 

제2 선현보살이 법문을 청하다(선현기청분)

그때 대중 가운데 계시던 장로 수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 어깨를 벗어 메고 오른 무릎을 땅에 꿇고 합장하여 공경하며 부처님께 사뢰었다.

“거룩하시옵니다. 세존이시어,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펴 주시고 잘 당부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어떻게 그 마음을 지녀야 하오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겠아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갸륵하고 갸륵하도다. 수보리야, 너의 말과 같이 여래가 모든 보살을 잘 보살피고 잘 당부하느니라. 너희가 이제 자세히 들으라. 너를 위하여 말해 주리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이는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지니고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 받을 것이니라.”

  

Section Ⅱ.Subhuti makes a request

Now in the midst of the assembly was the venerable Subhuti. Forthwith he arose,

uncovered his right shoulder, knelt upon his right knee, and, respectfully raising his hands

with palms joined, addressed buddha thus : world-honoured one, it is most precious

How mindful the tathagata is of all the bodhisattvas, protecting and instructing them so well!

world-honoured one, if good men and good women seek the consummation of incomparable

enlightenment, by what criteria should they abide and how should they control their thoughts?

Buddha said : very good, subhuti! just as you say, the tathagatha is ever-mindful of all the

bodhisattvas, protecting and instructing them well. Now listen and take my words to heart:

i will declare to you by what criteria good men and good women seeking the consummation

of incomparable enlightenment should abide, and how they should control their thoughts.

Said subhti : pray, do, world-honoured one. With joyful anticipation we long to hear.

 

[科 解]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은 선현(善現)이 법을 청한 대문(大文)이란 뜻입니다. 선현(善現)이란 수보리(須菩提) 존자를 가리키는데 금강경은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묻고 부처님께서 대답하신 내용이므로 수보리존자가 많이 나옵니다. 부처님 설법 가운데 제일 어려운 법문(法門)인 공(空)의 진리, 곧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지나서 구공(俱空)의 경지인 실상반야(實相般若)를 가장 잘 체득(體得)하고 있기 때문에 해공제일(解空第一) 수보리라고 합니다. 아공(我空)은 우리가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몸뚱이를 <나>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나>가 아니라 이것은 공하여 없는 것(空無)이란 진리를 체득한 것을 말하며, 법공(法空)은 물질적 현상이나 객관을 대상으로 한 상대적 정신작용은 다 인연으로 모인 거짓 존재로서 만유(萬有)의 본체가 본래 공무(空無)한 것이란 진리를 말 하며, 구공(俱空)은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다 초월하여 공했다는 생각까지도 없어져서 비로소 마음자리의 본성(本性)에 계합한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공의 진리를 잘 깨달았다고 해서 해공제일(解空第一) 또는 혜명수보리(慧命須菩提)라고 하는데, <수보리>란 말은 본래 인도의 고대어(古代語)입니다. 그 말이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한 가지 뜻을 따라 번역하게 되면 나머지 두 가지 뜻은 묻혀 버리게 되므로 인도 말 그대로 <수보리. 수보리>하고 부릅니다. 세 가지 뜻은 선현(善現). 선길(善吉). 공생(空生)이니 출생할 때에 창고. 상자. 그릇들이 텅 비어서 공의 도리를 잘 알 상서를 보였었고, 그 뒤 상보는 이(相師)가 <오직 착하고 오직 길할 것이다>고 예언(豫言)했으므로 그렇게 이름 했던 것입니다.

이 수보리존자께서 대중가운데 계시다가 일어나셔서 금강반야의 법문을 청하셨으므로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이라 한 것입니다.

 

原 文 時 長老 須菩提 在 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着地 合掌恭敬而白 佛言

解 義 수보리존자(須菩提尊者)는 없는 것도 없고 없는 것 없다는 것도 없는 공(空)의 진리를 제일 잘 알아듣는 제자이므로 10대 제자 가운데 해공제일(解空第一)이십니다. 그래서 공의 진리인 금강경은 수보리존자가 먼저 발기해서 법을 청합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대중과 함께 공양을 마치시고 발을 씻고 자리에 앉아서 정진하실 시간이 됐습니다. 수보리께서 대중 가운데 계시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웃옷을 벗어 메어 어께를 드러내고 공경한 뜻으로 합장을 합니다(合掌恭敬). 우리는 가사를 입을 때 도포 입듯 막 입는데 그러나 인도의 승려나 달마대사(達磨大師)는 그대로 뒤집어써서 입습니다. 날이 좀 추우면 가사를 위에서부터 뒤집어쓰고 덜 추우면 양 어깨를 걸쳐서 입습니다. 부처님이나 국왕 대신을 만나러 갈 때는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도록 입는데 왼쪽 어깨는 그대로 걸쳐 입고 오른쪽 어깨만 드러냅니다. 이것을 편단우견(偏袒右肩)이라 합니다. 그리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고 왼쪽 무릎을 세웁니다(右膝着地). 또 열 손가락을 모아 가지고 합장하고 지극히 공경하는 마음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옛날에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불경에 이백불언(而白佛言)이 자주 나오니까 이것을 우습게 새긴 일화가 있습니다. 백불언(白佛言)을 <흰 부처님>이 말씀했다고 새기면서 부처님도 흰 부처. 누런 부처가 있다고 해석한 우스운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而白佛言> 이것은 부처님께 어떤 말을 묻든지 대답할 때를 가리킵니다.

 

原 文 稀有世尊 如來 善護念 諸菩薩 善付囑 諸菩薩

解 義 희유세존(稀有世尊)이라 한 희유는 드물다, 거룩하다, 그런 뜻입니다. “거룩하십니다. 희유하십니다. 여래(如來)께서는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이 잘못 될까, 힘이 들까 보살님들을 잘 보살피십니다.”

부모가 어린 자식이 다칠까 어떨까 보살피는 것을 호념(護念)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여행을 간다든지 소풍을 간다든지 하면 “어디 가서 다치지 않을까. 혹은 돈이 모자라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을 마음대로 사먹지 못하지나 않나.”하고 애태우며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가짐을 호념(護念)이라 합니다. 보살(菩薩)은 아직 부처가 되기 전 모든 중생을 위해 고행(苦行)과 만행(萬行)을 닦는 이들이므로 어려운 수련(修鍊)에 부딪쳤을 때, 또는 마음을 더욱 완전하게 깨쳐 나감에 있어 힘에 겨워 너무 벅차지나 않나 하고 보살피는 부처님의 마음을 말합니다.

선부촉제보살(善付囑諸菩薩)이란 부처님께서 보살들에게 “이런 것은 하지 말고 이런 일은 이렇게 하라”하고 구체적(具體的)으로 수행요체(修行要諦)를 가르쳐 주시는 당부를 말합니다. 보살의 만행도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호념과 부촉(付囑)아래 더욱 가속도로 성취되어 갑니다.

 

原 文 世尊 善男子 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解 義 선남자 선여인은(善男子善女人)은 거룩한 남자, 거룩한 여인들이 인생이 무엇인가를 똑바로 알려고 발심(發心)해 들어서는 사람들, 그런 남자와 그런 여인들을 가리킵니다. 마음을 깨친 반야의 지혜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했는데 이것을 번역하면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 됩니다.

아(阿)는 무(無) 없다는 뜻이고 뇩다라(耨多羅)는 상(上) 최고란 뜻이며 삼(三)은 정(正), 바르다, 틀림없다는 뜻이며 먁(藐)은 두루하다(邊), 전 우주에 꽉 찼다, 보편타당하다는 뜻이니, 진리는 있는 데 없는 데가 있어서는 안 된다, 두루 꽉 차 있어야 하며 불공평하게 어디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며 삼보리의 삼은 역시 정(正), 바르다는 뜻이고 보리(菩提)는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란 깨닫는 마음이 생겼다, 보리심을 발했다, 또 더 줄이면 발심(發心)했다는 말이 됩니다. 마음이 <참 나>라는 불법의 원리에 대해 조금도 의심 없는 사람, 생사에 얽매이지 않고 부동하게 실천하는 것을 발심이라 합니다.

“이렇게 발심을 해서 모든 것이 환각임을 확실히 깨닫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선남자 선여인이 내 생각 내 마음을 어떻게 가져야 하며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고 무슨 말을 안 해야겠습니까. 내 마음 가운데 죽 끓듯이 일어나는 이 번뇌, 나만 살겠다는 욕심, 이 욕심이 우주에 가득차서 남이야 죽건 말건 내 육신이 내라 하여 끝없이 짓는 죄와 번뇌를 어떻게 하여야 없앨 수 있겠습니까. 이 번뇌의 마음을 쉬는 방법이 무엇이옵니까.”하고 수보리존자가 부처님께 피눈물 나는 호소를 했고 청법(請法)을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을 하신 부처님의 말씀은 여러 가지로 반복되어 있습니다.

 

原 文 佛言 善哉善哉 須菩提 如汝所設 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解 義 부처님은 수보리존자의 물음을 칭찬하시고 “네 말대로 여래는 모든 보살을 잘 호념해 주시고 우리 마음을 알뜰히 생각해 주느니라. 어디가 다칠까 하여 행여나 계를 파(破)할까 하여 모든 보살들에게 할 일 안 할 일을 분명히 구별해 주시고 이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고 이런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말라 하고 가르쳐 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승려들은 계도(戒刀)를 가지고 다닙니다. 본의(本意)아니게 계를 파하게 될 때는 자결(自決)이라도 해야 합니다. 가령 여승이 어떤 산중에서 혼자 공부하다 강제로 겁탈(劫奪)당하게 될 때는 파계(破戒) 당하기 전에 할복(割腹)해 죽어 버려야 합니다.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를 정도면 괜찮지만 내가 겁탈을 당하면서 흥미를 알게 되는 정도이거든 동맥(動脈)만 끊으면 됩니다. 이런 때 쓰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칼이 계도입니다. 계를 살리기 위해, 육신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계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참 자기를 지키고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찾기 위해 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참 나>를 완성하기 위해 <거짓 나>를 서슴없이 버리기로 발심한 이 에게는 당연합니다.

 

原 文 汝今諦請 當爲汝說 善男子 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 如是住 如是降伏其心

解 義 수보리야, 너와 여기 있는 천 이백 대중들은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해 보아라. 마땅히 해야 할 일, 예컨대 2백 50계를 받을 때는 마땅히 해야 할 당위성(當爲性)이 있는 것이니, 인간을 동물로 보지만 짐승과 다른 것은 법 도덕을 안 지키면 안 된다는 것 입니다. 선남자. 선여인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켜 발심한 사람은 참으로 똑바른 소견(所見)이 난 사람이니, “이와 같이 살고 이와 같이 생각하고 이와 같이 마음을 항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이와 같이>란 말을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의 <마음> 그대로 살라는 뜻이니 <이와 같이 살라>는 이것으로써 금강경은 여기서 일단 다 설명된 것입니다.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이 된 것입니다. 금강경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상권, 하권으로 나누어졌고 이십 일 년 동안 반야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육백부 반야경 가운데 보면 인왕반야(仁王般若)니 금강반야(金剛般若)니 반야심경(般若心經)등 방대한 경전이 있으나 그 구체적인 설명방법은 다르긴 하지만 결론적인 핵심은 <여시주 여시항복기심>하라는 여기에 귀결(歸結)됩니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도 되풀이해서 설명한 것이고 육백부 모든 반야경에서도 되풀이한 것입니다.

<여시주 여시항복기심>하라는 부처님의 말씀에 수보리 존자는 말할 수 없이 기뻐합니다.

 

原 文 唯然世尊 願樂欲聞

解 義 세존이시여, 원컨대 기꺼이 듣고자 합니다.” 해공제일인 수보리존자는 반야제경(般若諸經)의 요의를 가장 잘 알고 계신 어른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이 말씀을 곧 알아들으시고 부처님께 말씀합니다. “기꺼이 듣겠아오니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이렇게 시작해서 법문이 나온 것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심한 사람은 어떻게 그 마음 가운데 쓸데없는 번뇌망상을 항복받겠습니까. 육체가 <나>라는 이 마음을 뿌리 채 뽑아서 잠재의식조차 다 없어지도록 수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하는 이 물음에 대한 부처님의 이차적인 법문을 목마르게 재촉하는 뜻에서 “기꺼이 듣고자 하오니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한 것입니다. 또 결국 말하자면 우리가 옳은 불법을 알고 그대로만 살아 나가면 그것이 곧 한량없는 복을 짓는 것이 되는데, 고해(苦海)에 빠진 중생을 건지려면 복이 많아야 되기 때문에 보살의 복 짓는 수행법을 자주 말씀하십니다.

모자람이 없는 지혜, 어떤 것을 물어도, 어떤 학자가 어떤 사상 어떤 진리를 물어도, 어느 철인 어느 종교인이 어떤 진리를 물어도 그것을 다 풀어 주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은 다 네가 꿈꾼 이야기고 네 소식이 아니다. 그것을 잘 알아듣도록 설명하려면 그 준비를 갖추어야 되는데, 그것은 남을 일러 주는 것보다 우선 내가 완전히 의심이 없어져야 되기 때문에 보살들의 마음가짐, 번뇌 항복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로 되풀이되어 나오게 된 것입니다.

 

[說義]

⑴ 조건 없는 마음의 생활

진리는 하나지 둘일 수 없습니다. 우주의 핵심(核心)이 하나지 둘일 수 없으니 따라서 그것은 허공일 수도 진공일 수도 없고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물질도 허공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인 핵심을 어디로부터 어디로 찾아가느냐. 허공으로 아무리 끝까지 간다해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물질을 아무리 살펴봐도 거기서 생명은 안 나옵니다. 그러면 어디서 찾느냐. 지금 말하고 말 듣고 앉아 있는 이 <생명>. <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이 말이 이론에 맞나 안맞나 생각하는 그 생각의 주체, 그 주체를 찾아 캐어 들어가 보면 거기에 너도 나도 아니고 남녀도 선악도 아닌 것이 살아서 분명히 주고받고 얘기할 줄 알고 일체의 주체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부처님. 하느님. 공자님. 여기 가면 다 만납니다. 길은 이 길 하나뿐입니다. 객관세계에는 아무리 찾아 봐도 진리는 찾을 수 없고 진리가 될 수 있는 사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부처님은 아무 생각 없이 남과 얘기하고 음식을 잡수셔도, 누가 무엇을 물어도 사실대로 받아들입니다. 아무 조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기분에 따라 싸우고 이해에 끌려 남과 통할 수 없습니다. 제일 가까운 내외 사이에도 통하지 않는데 누구와 통할 수 있습니까. 모든 생각을 초월 했을 때, 아무 생각도 없을 때, 또는 그 이상 더 신선할 수 없을 때, 모든 죄악도 복도 초월했을 때, 기분을 떠난 때, 이때가 정말 참 자기이니 이 때야 비로소 서로 이해가 되고 모든 것이 다 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오고가고 밥 얻으러 나가고 공양 자시고 하는 것이 다 마음 그대로의 인생 전체이며 더 설명할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진지 다 잡수시고 큰 가사 벗어 걸고 선상(禪床)에 올라 앉으셨다.”하는 거기까지 법문 다 했다 하지만 밥 얻으러 나가는 거나 바리때 챙기는 거나 다 불법이고 인생 전체가 거기서 다 나옵니다. 한 생각 한 행동이 전부 생명 전체 그대로고 불법 전체가 생명전체이어서 진실한 인간인 부처님은 일거일동이 조작이 없는 본래 마음자리 그대로의 발로(發露)입니다. 또 생사를 자유하여 의식주(衣食住)도 필요 없으니 어떤 조건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습니다. 아무 근심 걱정 없고 모든 것을 초월해 있으니 오직 깨끗한 마음으로 마음을 대할 수 있는 이는 부처님 밖에는 없습니다. 중생은 모두 조건이 있습니다. 나한테 이가 되나 해가 되나, 시집을 가도 장가를 가도 안심이 안 되고 돈을 모으면 모을수록 권리가 높아지면 질수록 위험과 괴로움이 더 많아 집니다. 이것을 초월 하려면 일체가 공한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⑵일체의 핵심은 공한 것

공한 것까지 공한 것을 공이라 하는데 이것도 그냥 공이라 하면 알기 어렵지만 내가 항상 말하는 <마음>. <나>를 찾아 가면 됩니다. <나>라고 하는 이것도 하나의 생각인데 이 생각의 주체가 무엇인가. 그것이 곧 우리가 말하는 마음 불성(佛性)자리. 열반 자리이고 이것이 하루도 천번 만번 생각을 냅니다. 나라는 생각부터 내어 가지고 모든 조건을 내세웁니다.

“육체는 하루에 밥 세 그릇 잘 먹어야겠다, 맛있는 것을 먹어야겠다.” 이것이 온갖 사고와 번뇌를 다 일으키고 저만 잘 살기 위한 사고방식. 육체를 나라 하여 35억 인류가 내 밥 세 그릇에 방해를 한다면 35억이 다 나의 적이 됩니다. 가령 이 조계사(曹溪寺) 법당(法堂)에 어떤 사고(事故)가 나서 무너지게 됐다든지 불이 났다든지 하여 그대로 있다간 당장 죽게 되었다면 서로 먼저 나가려고 앞에 있는 사람을 밟아 버리고 뛰어 나가려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육체를 나로 하여 사는 한 그 생활은 모두 뱃속에 독사가 들어 앉아 있는 무서운 생활입니다. 배가 고프면 정든 남편이라도 버려야 할 판입니다. 배고픈 남편 옆에 있으면 죽는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육체가 나라는 생각이 붙어서 육체아(肉體我)가 생기고 사상아(思想我). 지식아(知識我), 예술아(藝術我)라는 제2의 가짜 나가 생깁니다. 그래서 이 생각이 근본이 되어 나는 예술이 좋다, 나는 정치가 좋다, 나는 술이, 나는 아편이 좋다, 술 안먹는 사람과는 말도 안하겠다, 이래가지고 온통 저 좋아하는 것만 좋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의 주체. 모든 생각의 실상인 <나>는 의식주도 권리도 돈도 필요 없고 생사(生死) 그것도 나에게 아무 상관없습니다. 지식도 허공도 아닌 여기에 들어서 보면 만사가 다 이것에 통해 있고 모를 것이 없고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진아(眞我)라 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가아가 진아고 진아가 가아행세를 합니다. 이것이 들어서 착각을 했고 육체를 <나>라 하여 육체 이놈을 앞세우고 이놈 살리겠다고 하루 밥 세 그릇 먹이고선 온갖 전쟁을 다 해야 합니다. “힘이 진리다, 철두철미하게 싸워 이기는 것이 행복이다, 다른 사람 입에 들어간 음식이 내 입에 들어 갈 때 행복하다, 무엇을 하든지 싸워 이기는 것이 행복이다” 이 같은 착각을 하고 있는 이상 남북통일 아니라 세계통일을 해 봐도 저만 살려는 독사가 되어 싸움만 하게 됩니다.

 

⑶ 산것과 죽은 것

모든 것을 초월한 이것이 진아 행세도 하고 가아 행세도 하는데 우주의 핵심이 이것이고 다른 것이 아닙니다.

가령 우주를 나누면 죽은 것 한쪽과 산 것 한쪽으로 구별됩니다. 여하튼 어떻게 살아있든 산 것은 산 것이다. 지금 말하고 말을 듣는 자리는 산 것이며, 무정물(無情物)인 돌. 막대기는 들을 줄도 생각을 낼 줄도 모르는 죽은 것입니다. 죽은 것 가운데는 있는 물질과 없는 진공(眞空) 허공이 있습니다. 에너지 자체도 죽은 것이며 생명이 없습니다. 과학이다, 철학이다, 종교다, 하는 등의 문화는 살아 있는 생명세계의 산물(産物)입니다. 물질계가 죽은 것이고 진공. 허공이 무생명체(無生命體)이고 그러므로 산 것은 있는 물질도 없는 허공도 아닐 터이니, 유무(有無)를 초월한 비유비무(非有非無)의 본질입니다. 본래 생길 수도, 없어질 수도 없는데 진공마저 초월한 이 마음자리는 모든 것을 초월 했고 그러니 영원히 살아 있으며, 대 자유하며, 절대 평등한 것입니다. 인류문화가 오천년이 아니라 앞으로 오억만 년을 진보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생각으로부터 나는 것일 뿐 생각 외 주체인 <나>. 생명 자체의 주인공을 밝힌 것은 아닙니다. <나>라는 말은 네가 아니란 뜻으로 상대적인 일체를 부정합니다. 선도 악도 아니고 남성도 여성도 아닙니다. 따라서 모든 것 이전이고 동시에 일체를 초월한 것이 <나>라는 뜻으로 됩니다. <나>는 오직 <나>일뿐 나에게는 무슨 조건을 붙일 수 없는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한 것이며 영원히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⑷ 우주(宇宙)는 오직 이것의 발로(發露)

<나> 이전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주가 다 <나> 이전에는 없습니다. 현상계의 모든 것은 생각의 발로이며 환상일 뿐 다 실제가 아닙니다. 이 마음은 본래 평등하고 자유롭고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현상세계에서 완전한 것을 생각해 볼 수 없습니다. 이 <마음>은 신령하고 산 생명이며 우주의 본체이므로 있는 것 없는 것을 다 창조해 냅니다. 그 증거가 바로 꿈에서 꿈인 줄 모르는 그것입니다. 꿈에 꿈인 줄 모르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생시의 현실과 꿈이 백퍼센트 같기 때문입니다. 마누라. 남편. 아들. 딸 다 똑같고 산천초목(山川草木)이 다 똑 같다는 것입니다. 꿈속에서 꿈인 줄 모르는 둘째 이유는 꿈 자체가 내 기억 내 주관이 객관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며, 이 주관과 객관은 둘이 아니고 고정된 자리가 없는 때문입니다. 설탕은 달고 소금은 짜다는 그 자기 주관이 꿈속의 객관으로 나타난 것이니 주관과 객관은 본래 거리가 없습니다. 생각의 본체인 내가 이렇게 서서 얘기를 하고 얘기 듣고 있었고 이것을 내 놓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거짓말이고 천당 가나 지옥 가나 단지 육체를 나라고 하는 착각 때문에 좀 분주했을 뿐이지, 그러나 분주 했다고 해서 마음의 본체가 달라진 건 또 아닙니다. 이것은 사상도 지식도 신앙도 아니니 질량(質量)을 초월한 것이므로 에너지도 아닙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 세상의 정신, 물질 온갖 것 가운데 마음자리, 불성자리인 <참 나>가 제일이어야 합니다.

 

⑸ 이것만이 현대의 구세주

마음을 깨치면 전 우주에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고(全知), 모든 근심걱정 다 떨어내고 일체를 다 포기하여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즐거움을 얻습니다(全能). 그래서 모르는 세상을 바로 깨우쳐 주고 중생을 바른 길로 이끌어 누구에게나 모든 고통을 해탈할 수 있는 환한 길이 있음을 일러 주고 개발해 주자는 것입니다. 이 보살정신(菩薩精神)을 현대의 젊은이에게 하루빨리 가르쳐 주지 않고는 진정한 의미의 청소년선도(靑少年善導) 내지 참다운 인간 교육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직 육체가 나인 줄 알고 물질문명에서 참다운 자아(自我)를 찾으려 하는 것은 마치 파초(芭蕉)의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벗겨도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뿐이며 그러한 인간사회는 아무 실상(實相)이 없기 때문입니다.

 

⑹ 발심한 이의 마음가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한 발심을 한 사람은 누가 죽여도 죽지 않고 매를 때려도 가만히 맞고 있을 뿐 대항이 없지만 안 죽습니다. 일본에 백은선사(白隱禪師)라는 거룩한 스님이 있는데 지금 한국에도 그보다 더 거룩한 노장이 살아 계십니다.

지리산(智異山)에 법계토굴(法界土窟)이 있는데 거기 올라가 보면 전주시내 불이 환하게 내려다보이는 곳입니다. 본래 이곳에는 선방(禪房)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백 년 전에 공부하는 두 스님들이 이 절에 와서 있게 됐습니다. 두 스님들이 동냥을 해서 양식을 준비해 가지고는 절에 일찍 올라가서 다음해 삼월까지 땔 나무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노장(老丈) 두 분이 지리산 꼭대기에서 공부를 하는데 동지섣달 한참 추운 어떤 날 오후 힘센 장정 네 명이 와 가지고 “너희들이 며칠 전에 돈 5백냥 가져온 일이 있지”하고 위협을 합니다. 그래서 한 스님이 나가서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 일이 없습니다.”“다 알고 왔다. 내 눈으로 봤는데 무슨 잔소리냐. 돈을 지고 이리 들어오는 것을 봤다. 생명이 아깝거든 돈을 내놔라.” “돈 그까짓 것 있다가 없어지는 것인데 있으면 내놓지 사실 없으니까 못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노장을 끌고 나가 타작하는 식으로 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스님은 사실상 장사입니다. 힘으로 따지면 이 네 사람 아니라 열 네 사람이라도 쓰러뜨릴 힘이 있지만 잠자코 얻어맞기만 합니다. 맞다가 맞다가 하도 맞아서 나중에는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노장이 가만히 생각하니 살아나서 공부를 해야 할 것인데 이 도둑놈한테 맞아 죽게 생겼으니 큰 걱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약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인과(因果)를 믿고 있다. 모든 것이 다 인과로 오는 것이니 목숨을 바쳐 그 빚을 갚자, 세상이 좋아한다고 환영하지 말고 어떤 역경(逆境)에 처하더라도 거기 반발(反撥)하지 말자, 누가 어떤 곤란한 죽음을 준다 해도 대항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내자, 우리가 아득한 전생을 돌이켜 보면 부모도 잡아먹고 자식도 잡아먹고 죄란 죄는 다 지었을 것이니 그 죄로 말하면 몇 천만겁 곤란한 <죽음>을 당해도 마땅할 것이다. 누가 어떠한 어려움을 준다 해도 하나도 대항 말자”하는 약속이었습니다. 다른 한 노장이 때려 주지 못하게 거들어 주면 되고 그 노장 혼자라도 안 맞으려면 안 맞을 수 있지만 한 노장은 방에 가만히 앉아서 자기 공부만 하고 있습니다. 한 노장이 맞다 맞다 원체 다급하니, “이사람 이것을 어찌할까”하고 물었습니다. 방에 앉아서 공부만 하던 그 노장이 하는 말이, “이 사람아 인과를 믿게, 공부하는 마음 움직이지 말아. 정각(正覺)에서 움직이지 말아. 네가 그 사람 죽여 놓으면 그 사람한테 천번 만번 죽음을 당해, 그러니 아무 소리 말고 달게 맞아 죽게나.” 그럽니다. 그래서 이 노장님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맞아 죽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돈이 없는 것을 달라고 그랬음을 알게 된 도둑들은 그냥 돌아갔습니다. 방에서 혼자 공부하던 노장님은 소변을 보러 나갔다가 쓰러져 있는 노장을 일으켜 안고 방에 들어가서 참선하는 것같이 가부좌를 틀어 앉혀 놓고는 “이 사람아 금생에 인연은 그것뿐이야. 자네는 빚을 다 갚고 갔네, 나는 빚을 못 갚았으니 자네보다도 나는 더한 업을 지었는지 아나, 아무것 괘념하지 말고 화두(話頭:참선하는 공부)나 잘하게.”하면서 윗목에 앉혀놓고 자기는 아랫목에 앉아 공부를 합니다. 아무리 겨울이라도 송장을 들여 놓았으니 썩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창자 썩는 소리가 꿀꿀 납니다. 그러니 하는 말이 “아 그 사람 참선이나 하지, 그까짓 일 가지고 뭘 마음이 상해 그러나.” 이렇게 나무라고는 돌아앉아서 또 공부만 합니다. 이렇게 자꾸 경고를 하면서 공부를 하다가 나중에는 화장하고 혼자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참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맞는 사람은 맞아 죽을 각오(覺悟)를 하고 죽었지만 그것을 보고도 친구의 참된 공부를 위해 조금도 마음이 움직임이 없었다는 것은 본래의 발심(發心)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발심한 사람의 수행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이의 마음가짐입니다. 육체생활(肉體生活) 때문에 한 생각이라도 까딱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과를 믿고 불법을 믿는다면, 저녁에 남자가 집에 안 들어온다고 남편 못살게 굴면 안 됩니다. 내가 전생에 나쁜 일을 많이 해서 남편이 저러는 것이니 머리 깎고 중 된 요량만 하고 꿀꺽 참고서 남편에게 전보다 더 잘해 줘야 합니다. 마누라가 또 잘못 되어 남편이 벌어준 돈 갖고 하룻밤 안 들어와도 왜 어디 갔었느냐고 야단만 하지 말고 잘 보살펴 주고 받아 주어야 이것이 참 불교식입니다. 이 세상일을 불평하고 원망하다 보면 탐진치(貪瞋痴)만 늘 뿐이지 일 초도 마음 편할 도리가 없습니다. 원망하기로 말하면 원망이 이 허공에 꽉 찰 것입니다. 이래가지고야 무슨 염불이나 참선이 되고 복 닦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원망하는 마음뿐인데 무슨 복이 됩니까. 백일기도 천일기도 만일기도 해도 죄가 사하지 않습니다. 남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천지가 꽉 차서 아무것도 안 됩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잠깐 생각하는 것이라도 전 세계로 퍼지고 우주에 가득 찹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라디오, 텔레비전의 원리와 같아서 지금 말하는 이것도 전 우주에 가득 찹니다. 그리고 잠깐 생각하는 것이 죄거나 복이거나 선악 차이 없이 우주 전체에 영향을 주고 인과를 가져옵니다. 가령 짐승이라도 몽둥이로 매질을 하든지, 다리를 분질러 놓든지, 또는 바위나 나무 같은 무정물(無情物)이라도 함부로 하면 나중에 어느 때엔가 어느 곳에서 그 나무나 돌맹이에 다리를 다치거나 합니다. 이렇게 인과라는 것은 필연적(必然的)인 것입니다. 그러니 무정을 천대하면 무정이 오고, 유정을 해치면 유정의 인과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 내 그림자이기 때문이고 내 환각(幻覺)으로 있는 바윗돌이기 때문입니다. 사물(事物)과 인과관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일거일동은 이것이 그대로 원인이 되어 고스란히 그 결과인 보(報)를 다 당해야 하고 빚을 다 갚아서 저쪽 원수들 완전히 풀어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항상 빚 갚을 생각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작정하면 이 사람은 그 날부터 아주 행복해지고 마음이 편해져서 잠도 잘 오고 소화도 잘 됩니다. 이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마음가짐입니다..

 

⑺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세 단계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라는 말을 줄이면 발보리리심(發菩提心)하라는 넉 자로 되고 이것을 더 줄이면 발심(發心)하라는 두 자로 됩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보리도 다 깨달은 마음자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범부중생이라도 이런 법문을 듣고 “내 마음자리가 본래 생사가 없는 이렇게 위대한 존재였구나, 나도 마음을 어서 깨쳐서 생사를 해탈해야겠고 본래 내가 부처인 자리를 찾아야겠구나.”하고 결심을 했다면 이것도 중생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것입니다. 또 수행을 해서 마음이 밝아지므로 육체가 내가 아니라는 원리를 깨닫고 주관 객관이 떨어져서 실상반야가 오롯이 드러나면 이것이 아무 생각 없는 적멸(寂滅)의 본심(本心)자리를 깨달은 것이니 역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것이며 중간 발심인데 이것이 곧 견성(見性)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은 첫째 마음을 어떻게 가지고 마음을 어디다 두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아무리 견성을 해서 마음을 가지고 두는 법을 알았다 하더라도 다생겁(多生劫), 무량겁(無量劫)으로 남을 못살게 하고 나만 잘 살겠다고 욕심으로 살던 버릇 때문에 8만4천 번뇌가 죽 끓듯이 하므로 이것을 완전히 항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체득합니다. 그러니 처음에는 중생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한 발심을 했고 그 다음에는 아공. 법공. 구공의 3공을 체득해서 공리(空理)를 증득하게 되면 이것도 역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체득한 것이고 참으로 발심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무량겁래(無量劫來)로 오던 여습(餘習)이 제8장식(第八藏識)으로 남아 있어서 그 뿌리까지 다 녹아 없어져서 정말 자기 정신이 완전하게 드러나게 되는데 차차차차 공부가 될수록 아는 것도 많아지고 신통도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허공도 녹고 진공까지도 녹아서 근본무명(根本無明)이 다 녹아 없어지면 완전한 부처님의 불과(佛果)를 성취하게 되는데 그러면 열반이 생사고, 생사가 곧 열반이고 만법(萬法)하고 나하고 둘이 아닌 그때는 정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완전히 체득한 때입니다.

 

⑻ 먼저 올바른 발심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면 그렇겠다, 내 마음이 본래 부처라하는 것을 똑 바로 알고 들어가야 갑니다. 그러니 먼저 정신(正信) 성취가 되어야 합니다. 아직 내가 법을 체득하지 않았지만 그럴 수 있겠다고 믿는 것이 신심인데 그 신심에 사신(邪信)이 있고 정신(正信)이 있습니다. 사신은 지금 우리가 어느 곳을 향해서 견성성불한다고 하는 건지 그것도 모르고 그냥 하는 것, 무엇을 하는 것인지 방향 없이 마구잡이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눈 먼 장님이라도 눈 밝은 사람이 앞장 서 가지고 끌고 가면 그건 틀림없이 제대로 가는 겁니다. 그렇지만 만약 그런 선지식을 만나지 못한 채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이 참선하고 견성할 거라고 아무나 따라다니면서 하다가 보면 대개 미친 사람이 되거나 도깨비 되거나 하다가 중간에 도로 불교비방이나 하고 그럽니다. 신통조화나 하나 얻어 볼까, 도통이나 해서 견성하고 선지식이나 한번 되어볼까. 선지식이 되면 신도들한테 절도 받고 공양도 좀 받으려고 하는 욕심입니다. 이런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발심이니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남이 한다니까 해보는 것이고 한번 해 봐서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본전이다 하는 생각, 이건 다 사신(邪信)입니다. 그렇더라도 옳은 선지식을 만나 의지해 놓으면 괜찮습니다. 끝까지 믿고 이렇게 들어가면 그이가 경전이요 바로 부처님이니까 그이가 지도하는 대로 하면 글자 하나 몰라도 됩니다. 글자를 몰라도 된다는 소리는 글을 잘 아는 선지식 공부를 잘하시는 큰스님이 내내 팔만대장경이니까 그이한테 직접 가서 법문 듣는 것이 역시 경보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무식한 영웅은 있을 수 없고 모르고는 천하없어도 남의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겁니다. 모르는 사람이 또 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지혜가 근본인데 그러므로 먼저 발심(發心)을 똑바로 해야 하고 가는 길, 견성해서 부처 되는 길을 먼저 알고서 참선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조(五祖)스님, 삼조(三祖)스님께서도 다 이 “금강반야바라밀경”<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는 법으로 지도 하셨고 금강경에 의지 하도록 법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다음 장에서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발심하는 법을 차례대로 자세히 말씀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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