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潭스님강설 金剛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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妙行無住分 第四

묘행무주분 제사 

 

復次須菩提야 菩薩이 於法에 應無所住하야 行於布施니

부차수보리    보살    어법    응무소주        행어보시

  

所謂不住色布施며 不住聲香味觸法布施니라 須菩提야 菩薩이

소위부주색보시    부주성향미촉법보시       수보리     보살

  

應如是布施하되 不住於相이니 何以故오 若菩薩이

응여시보시       부주어상        하이고    약보살

 

 不住相布施하면 其福德을 不可思量이니라 須菩提야

부주상보시       기복덕    불가사량           수보리

  

於意云何오 東方虛空을 可思量不아 不也니이라 世尊하

어의운하    동방허공     가사량부    불야          세존

 

須菩提야 南西北方四維上下虛空을 可思量不아 不也니이다

수보리    남서북방사유상하허공     가사량부    불야

  

世尊하 須菩提야 菩薩의 無住相布施福德도 亦復如是하야

세존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복덕     역부여시

  

不可思量이니라 須菩提야 菩薩이 但應如所敎住니라

불가사량           수보리    보살    단응여소교주

  

제4 머무름 없이 행하라(묘행무주분)

   “또 수보리야, 보살은 온갖 법에 끄달리지 말고 보시를 할 것이니, 빛이나 모양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하며,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촉감이나 이치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마땅히 이렇게 보시하지만 현상에 머물지 말 것이니 왜 그러냐 하면 보살이 만일 현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생각으로 다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쪽. 서쪽. 북쪽과 네 간방과 아래위 허공을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가르친 그대로 머물지니라.”

  

Section IV. Even the most beneficent practices are relative

 

Furthermore, Subhuti, in the practice of charity a bodhisattva should be detached.

That is to say, he should practise charity without regard to appearances; without regard to

sound, odour, touch, flavour or any quality. subhuti,

thus should the bodhisattva practise charity without attachment. Wherefore?

in such a case his merit is incalculable.

Subhuti, what do you think? can you measure all the space extending eastward?

No, world-honoured one, i cannot. Then can you, Subhuti, measure all the space extending

southward, westward, northward, or in any other direction, including nadir and zenith?

No, world-honoured one, I cannot.

Well, Subhuti, equally incalculable is the merit of the bodhisattva who practises

charity without any attachment to appearances. subhuti, bodhisattvas should persevere

one-pointedly in this instruction.

  

[科 解]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이란 불교의 오묘한 법으로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묘행(妙行)은 수행(修行)한다는 말이고, 무주는 마음을 닦을 때 어떤 조건 어떤 법에도 머물러서 집착하고 걸리는 데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일체의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곧 대승의 진리인데 세 번째로 묘행 무주의 도리를 말한다고 해서 제 사분(第四分)이라 한 것인데 그 내용의 요의(要義)를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을 깨쳐서 성불(成佛)하고서야 비로소 생사를 초월한 것이 아니고 깨치기 전부터 마음은 안 죽는 것이고 천당지옥(天堂地獄)의 윤회(輪廻)를 하고 돌아다니며 인과응보(因果應報)로 갖가지 몸뚱이를 받아서 깨끗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온갖 것이 다 되기도 했지만 이 마음만은 문둥이도 아니고 재주 있는 것도 아니고 질량(質量)의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일체의 현상계(現象界)에 걸릴 것도 없고 아무런 조건도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학문(學問). 지식(知識). 돈. 권력(權力). 육체생활(肉體生活) 등에 얽매어 아무리 애써서 죽도록 해봐도 죽음 앞에 다다르면 다 헛것입니다. 온 세계 권력을 가지고 세계 돈 다 모아 봐도, 또 도서관(圖書館)의 지식 다 알아봐도 제일 큰 인생문제(人生問題)인 죽음만은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루 밥 세 그릇 때문에 “밥 못 먹으면 죽는다. 육체가 죽으면 내가 죽는다.”고 착각(錯覺)을 하여 가지고 “하루 밥 세 그릇 가운데 한 그릇이라도 못 먹으면 영원히 못 먹는다 죽은 뒤에라도 찾아서 먹어야 한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보살은 이런 마음을 다 쉬라는 것입니다. 세 그릇 먹든 거 두 그릇 먹고 나머지 한 그릇 배고픈 사람 주자, 배고픈 사람 배를 채워 주었으니 복이 되고 육체가 내가 아니고 마음. 생명, 이것을 찾아 우주에 자유해 보자, 그래서 생사(生死)도 없어지고 의식주(衣食住)도 필요 없는 사람이 되어 오직 남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걸 가지면 이익 되고 저걸 버리면 손해가 클 테니 절대로 그렇게 할 이유는 없다.”하는 등의 망상을 버리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망상을 지니기 때문에 소위 업(業)이란 게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살은 보고 듣는 거 꼭 기억할 필요도 없습니다. 무심(無心)이 되어 생각이 없으면 하루 종일 다녀도 남과 싸우거나 장난을 하거나 하나도 마음에 남지를 않습니다. 어제 내가 저물도록 얘기해 놓고도 오늘 만나면 또 모릅니다. 그러니 그게 재미있는 일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업(業)이 녹는 것입니다.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첫 구절(句節)에 나오는 응무소주 행어보시(應無所住行於布施)란 말은 비록 팔만사천계율(八萬四千戒律)을 다 지키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고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하지만 그런 모든 걸 다 마음에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농사를 뼈 빠지게 짓더라도 그 농사지어 뭘하겠다는 생각 버리고 그냥 농사만 지어라 장사를 해도 이 돈 벌어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 없이 아무 잡념(雜念) 없이 뼈빠지게 하라, 그래서 아껴 먹고 남는 것은 없는 사람에게 몽땅 다 베풀어 줘라” 그런 뜻입니다. 이런 보살의 보시하는 마음씨와 그 공덕(功德)을 말씀한 것이 이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입니다.

  

原文 復次須菩提 菩薩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解義 부처님께서 수보리 에게 거듭 말씀하시기를 “또 다시 수보리야 보살은 어떤 법에든지 머무른 바 없이 보시를 행하라.(復次 須菩提 菩薩於法 應無所住 應無所住 行於布施)” 하심은 아무 조건 없이 남을 위해 내 것을 주고 아무 생각 없이 남에게 무엇이든지 도와주고 기분 내지 말고 사회봉사(社會奉仕)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했다 해도 말이 안되고 안했다 해도 말이 안되고 그저 중생을 위해서 노력한 것뿐입니다. 중생(衆生)을 위해 무엇을 했다고 해서 잘 했다는 서투른 생각을 할 수도 없으니 자연히 대자대비(大慈大悲)한 성인(聖人)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법(於法)이라 함은 모든 법이란 뜻이니 언제 어디서나 어느 경우 어떤 환경에서 어느 누구에게나 그런 말입니다. 남자 건 여 자건 노인이건 젊은이건 한국사람 외국 사람을 가릴 것 없이 다 잘 살게 해 주고 바른 길로 걸어가게 해 주고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 한 방울만 떠 주어도 은혜(恩惠)를 베풀어주었다 하여 공치사(功致辭)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자기 굴레에다가 뒤집어 씌워서 구속을 하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에 본래 있으니까 나를 준 것이지 네 것을 주었느냐.” 하고 감정적(感情的)으로 말을 해도 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러니저러니 하고 시비(是非)가 분분(紛紛)해집니다. 그래서 생사번뇌(生死煩惱)가 질펀하게 벌어져서 고통(苦痛)의 세계가 됩니다. 그러니 무신경(無神經)이 되어서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면서 남을 도와주기도 하고 남에게 받기도 하고 해야 합니다.

  보시(布施)에 대해서 시수물삼륜(施受物三輪)이란 말이 그것입니다. 이 삼륜(三輪)이 공적(空寂)하고 청정(淸淨)해야 합니다. 출가(出家)해서 처음 절에 들어가면 이것부터 배웁니다. 곧 수레는 여기 있는 물건을 저쪽으로 옮기는 도구(道具)로서 세 가지 바퀴는 첫째 시륜(施輪). 수륜(受輪). 물륜(物輪)의 셋입니다. 시륜(施輪)은 남에게 무엇을 주는 것을 뜻하고 수륜(受輪)은 주는 물건 받는 것을 뜻하고 물륜(物輪)은 주는 사람이 있고 받는 사람이 있으면 주고받는 돈이나 밥이나 물건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물건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본래 면목(本來面目)이 공적(空寂)하고 청정(淸淨)함을 알아서 주고받는 자리가 없는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주는 사람이 있고 받는 사람이 있으면 빚 갚을 사람이 생기고 빚 받을 사람이 생깁니다. 땅 위에 공공연(公公然)히 있는 물건을 도둑질해서 이쪽 물건을 저쪽으로 옮긴 것뿐이니, 주는 생각 없이 주어야 완전한 인간이 됩니다. 내 것을 남에게 주었거니 하고 생각하면 이것이 지옥 갈 시초(始初)가 되는 것입니다. 받는 사람도 아무 게한테 무엇을 받았으니 큰 빚을 졌구나 하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보다 더 급한 사람 있으면 생각 없이 또 주기도 합니다. 은혜를 졌다 해서 고맙다 감사하다는 생각으로 받으면 이 사람은 물건을 받을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받아야 수륜이 청정한 것입니다(受輪淸淨).

  천지(天地)에 공공연하게 있는 땅을 마음대로 금을 그어 놓고 압록강(鴨綠江) 이쪽은 중국 땅이니 못 온다 하여 국경(國境)을 만들고, 물건은 아무개 것이라고 소유권(所有權)을 인정하며, 농사를 지어 추수(秋收)해 자기 집 곳간에 쌓아 두고는 이것은 내 것이니 아무도 가져가지 말라 합니다. 이런 것이 다 잘못이고 중생살이입니다. 그러지 말고 입 있는 사람 배고픈 사람 다 오라고 해서 농사를 지어야 바로 하는 농사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가장 잘못된 근본 생각이고 생사를 윤회(輪廻)하게 된 근본 착각(錯覺)입니다. 나를 내 세워서 소유권(所有權) 행사를 하려하고 끝없는 욕심(慾心)을 내어 점령(占領)하려는 착각(錯覺)이 삼차전쟁(三次戰爭)을 일으키려는 근본망상(根本妄想)입니다. 천지(天地)에 공공연히 있는 청정한 물건을 아무 윤리(倫理)도 도덕(道德)도 없이 대포알이 한 개만 더 있어도 먼저 기습해서 점령하려고 하니 모두가 도둑의 심보입니다.

  그러므로 삼륜(三輪)이 청정(淸淨)한 도리를 잘 배워서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상 없는 무상(無相) 무소주(無所住)로 아무 생각 없이 청정한 마음으로 청정하게 살자는 것입니다. 첫째 나부터 내 가정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한 나절 일해 주고 밥만 한 그릇 달라고 하면 누구든지 다 시킬 겁니다. 옷은 쓰레기통에서 주어 깨끗이 빨아 꿰매 입을 요량(料量)하면 됩니다. 이것은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응무소주행어보시(應無所住行於布施)를 배우는 태도입니다.

 

原文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解義 남을 위해서 보시(布施)하는 데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지식을 가지고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지식보시(知識布施)이고 돈이나 재물(財物)을 보시하는 재보시(財布施), 어려움을 당했을 때, 외로울 때, 도와주는 무외시(無畏施)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보시를 함에 있어서 아무데도 머무름 없이 조건 없이 불교의 올바른 진리를 가르쳐 주는 법보시(法布施), 재물로 남을 구제해 주는 재보시(財布施), 외로움 두려움을 보살펴 주는 무외시(無畏施) 등의 보시를 하라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눈으로 보아서 보기 좋은 것은 좋다고 집착하고, 더럽고 거칠면 싫다고 미워하여 좋아하는데 집착하든지 싫은데 집착하든지 합니다. 미인(美人)은 좋아하고 추녀(醜女)는 싫어하며 집도 크고 아름답게 지었으면 좋다고 집착하고 모양 없이 지은 초가삼간(草家三間)은 추하여 싫다는 생각에 집착됩니다. 이와 같이 눈을 통해서 집착될 수 있는 객관(客觀). 시각(視覺)의 대상(對象)으로 받아들이는 물질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여 부주색보시(不住色布施)라 한 것입니다. 여기서 쓰는 빛색자(色)는 빛깔이나 물질의 모양 등 눈으로 볼 수 있는 일체의 객관을 뜻하는 글자이니 부주색(不住色)이란 말은 곧 눈에 끄달리지 말고 보시하라는 것입니다. 귀에 들리는 소리(聲)나 코로 맡는 향기(香)나 혀로 아는 맛(味)이나 몸으로 아는 촉감(觸)이나 어떤 사상. 지식. 도덕. 윤리. 신앙. 종교 등의 법(法)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래를 잘하고 성악(聲樂)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나는 성대(聲帶)가 좋다 학급에서는 내가 제일이다.”하는 자존심(自尊心). 아만심(我慢心)을 가지고 남에게 노래를 들려주려면 잘 안 됩니다. 또 말을 잘한다고 해서 청중(聽衆)을 무시(無視)하고 강연(講演)을 해도 그것은 안 됩니다. 더구나 불법(佛法)을 설명하는 법사로서 “나 같은 법사 또 있을 수가 있나, 나 말고는 법사가 또 없지” 이런 생각을 한다면 이 사람은 큰 탈입니다. 아상(我相)이 꽉 차서 앞서 있기 때문입니다. 저 밑에 마당가에서나 설법을 하는 사람이지 방안에서 올바른 설법은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목소리가 좋다든지 말을 잘 한다든지 하는 등의 소리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不住聲布施).

  또 의복(衣服)을 한다던가, 아들을 처녀한테 장가를 보낸다던가, 자기 딸을 어떤 총각한테 시집보낸다던가 하는 것을 다 보시(布施)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좋은 촉(觸)을 수용(受用)하도록 해 준다는 뜻입니다(不住觸布施). 또 일체 만법(萬法)을 다 설명해서 세상 지식을 다 알고 불법도 다 알아 이런 것을 다 이해시켜 주지만 그 진리가 꼭 이런 것이라는 결정적인 고집(固執)을 버리고 그런 생각에 머물지 말고 가르쳐 주고 보시해 주라는 것입니다(不住法布施).

 

原文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解義 부주색보시(不住色布施), 부주성향미촉법보시(不住聲香味觸法布施)를 해석할 때 “색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하라” “성향미촉법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하라”고 새기는 경우와 “색에 머물러서 보시하지 말라” “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보시하지 말라”고 풀이 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처음의 해석은 “보시하라”는 뜻이 있지만 뒤의 해석은 “보시하지 말라”는 뜻이 되므로 뒤의 해석에 따르면 중생을 제도하지 말라는 것으로 되고 불법도 전할 자비심이 없는 독성나한(獨聖羅漢)이 되어 소승불교(小乘佛敎)에 가깝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 따라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증득(證得)할 수 없게 되고 완전히 불과(不果)를 증득하지 못 하게 됩니다. 색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고 해석해야 대승불교(大乘佛敎)로 되고 잘했다는 생각, 고맙다는 생각까지 버리고 설명하는 동시에 “발심(發心)하라, 일일이 활동하라, 생사가 곧 열반이고 열반이 곧 생사인 대승심(大乘心)을 가지고 대승행(大乘行)을 하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결정적 앞에서처럼 새기면 소승이고 뒤의 해석대로 새기면 대승이 된다고 잘라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새기든지 뜻은 바로 생각할 수도 있으니, “색에 머물러서 보시하지 말라”는 말도 곧 “색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하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므로 지나치게 고집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뜻을 바로 이해해야 하므로 “색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고 새겨야 합니다.

  그것은 다음의 경문(經文)을 계속해서 새겨 봄으로서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수보리야, 보살은 빽빽이(마땅히) 이렇게 보시하고 상에 머물지 말라(수菩提菩薩應如是布施不住於相)” “이와 같이 보시하고 상에 머물지 말라”한 말씀이 분명히 있으니 앞의 구절도(句節)도 <보시하라>는 뜻으로 긍정적(肯定的)인 해석을 해야 할 것입니다.

 

原文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解義 왜 그러냐 하면 만일 보살이(若菩薩) 상에 머물지 않고, 객관의 현상에 대해 아무 욕심이 없이 집착하지 않고 남을 위해 도와주고 보시하면(不住相布施), 그 복과 덕이 한량없이 많기 때문이니라(其福德不可思量) 하셨는데, 가령 농사(農事)를 짓되 추수(秋收)를 해서 내 곳간에만 쌓아 두지 말고 누구든지 배고픈 사람 있으면 먼저 먹으라고 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하면 마침내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 없어지고 정말 무심도인(無心道人)이 되어 버립니다.

  금강경이 상하권(上下卷) 두 권인데 이 금강경만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경보는 힘이 생겨서 다른 경전(經典)을 볼 때에도 다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 경보는 눈이 열렸다고 하여 경안(經眼)이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 사는 방법을 알게 되고 장가들면 신랑 노릇 잘 할 수 있고 시집가도 요조숙녀가 될 수 있습니다. 나라에는 충신(忠臣)이 되고 부모에게는 효도하게 됩니다. 금강경의 도리로 무심하게 아무 생각 없이 상대를 위해서 봉사했기 때문이고 나 없는 마음으로 인아산(人我山)을 부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무심(無心)으로 했기 때문에 그 복덕이 한량없어서 헤아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몸뚱이가 내가 아니므로 이 한 몸을 다 바쳐서 하나뿐 아니라 열 백 천의 몸을 희생해서라도 남을 위해 보시할 수 있고, 생각 없이 하므로 상대의 뜻에 맞추어서 남을 가장 잘 위하는 방법으로 온 정성을 다 해서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금강경의 말씀을 해설해 주고 육신이 내가 아니고 마음을 깨달아 부처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해 온갖 보살행(菩薩行)을 할뿐이므로 그 복덕이 한량없다고 한 것입니다.

原文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南西北方 四維上下虛空 可思

       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菩薩 無住相 布施

       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解義 부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하는 보시의 공덕이 얼마나 큰가를 말씀하시기 위해 허공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그래서 “동쪽의 허공이 얼마나 되겠느냐. 허공의 끝이 있겠느냐(東方虛空 可思量不)”하고 수보리존자에게 물으셨던 것이다. 허공은 제일 큰 공간(空間)이어서 그 크기가 무한대(無限大)입니다. 끝이 없고 시작이 없는 무한(無限)이니 동쪽의 허공도 무한이고 서쪽의 허공도, 남쪽의 허공도, 북쪽의 허공도 무한입니다. 동남. 서남. 동북. 서북의 간방(間方)도 그렇고 상하(上下) 아래위의 공간도 무한하여 끝이 간 데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사방팔방만을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이렇게 평면적인 공간세계만을 말하지 않고 방위(方位)를 말할 때에도 입체적으로 생각하여 동서남북의 사방과 4간방(間方)에다 상하방(上下方)을 합하여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말합니다. 경문(經文)에 남서북방사유상하(南西北方四維上下)라고 한 말들이 곧 그 말씀인데 사유(四維)는 네 간방을 가리킨 말입니다. 허공의 크기가 본래 한계(限界)가 없는 것이므로 얼마나 큰지를 비교할 수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각이 끊어져서 무심으로 하는 도심(道心)은 헤아릴 수 없고, <나라는 생각(我相)>. <남이라는 생각(人相)>. <중생이라는 생각(衆生相)>. <오래 산다는 생각(壽者相)>이 없어져서 머무는 것 없는 마음으로 아무 조건 없이 중생을 위해 보시하는 공덕은 무한대(無限大)의 허공처럼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한 것입니다.

 

原文 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解義 부처님께서 이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의 결론으로 “보살은 다만 가르쳐 준 그대로 머무르라(菩薩但應如所敎住)”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수보리존자께서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에서 처음에 부처님께 법문(法門)을 청(請)하여 여쭈어 볼 때 “어떻게 마음을 머무르며(云何應住) 어떻게 마음을 항복해야 하나이까(云何降伏其心)”한 물음에 대한 마지막 대답이십니다.

  부처님의 경전(經典)에는 언제든지 나중 물은 것을 먼저 말씀하시고 먼저 물은 것은 뒤에 대답하십니다. 마치 회의(會議)하는 규칙(規則)에 개의(改議). 재개의(再改議)가 나오며 재개의, 개의를 결정하고 제일 먼저 문제를 낸 동의(動議)는 맨 나중에 결정하는 논리(論理)와 같습니다. 이 금강경에서도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을 나중 물었으므로 잘난 체하는 아상(我相)과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없애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마음을 항복하는 것이라고 먼저 말씀하시고 나서, 운하주(云何住)에 대한 말씀을 대답하셨습니다. 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없애지 않고는 마음을 바로 가지고 바로 머무는 일(住)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항복기심(降伏其心)을 먼저 말씀하시고 운하주(云何住)를 나중에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열 가지든 백 가지든 끝에서부터 차례대로 말씀해 주셨으며, 49년 동안 이순서(順序)를 어기신 적이 없습니다.

  제삼장 대승정종뿐(大乘正宗分)에서는 먼저 마음을 항복 받는 방법으로서 중생심(衆生心)을 가지고 내가 잘하거니 하는 생각 아예 하지 말고 설법(說法)을 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사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에서 마음을 머무르는 법을 말씀하시기를, “보시를 하되 삼륜(三輪)이 청정(淸淨)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주하는 방법이 “주하지 말고 하라”는 것이고 또 만일 “주하지 않는데 주한다”, 그러면 그것 역시 주하는데 떨어진 것이 됩니다. 마음을 주한다 함은 우리말로 마음먹는다는 소리인데 “이렇게 마음을 먹어라”하는 말도 마음먹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곧 열반을 향해서 보시를 꾸준히 행하라, “내가 본래 부처이니 부처의 행동을 그대로 흉내 내라”는 것입니다.

 

[說義]

(1) 처음부터 끝까지 여시의 숙제

  금강경에는 처음부터 마지막 끝까지 <여시>(如是)가 자주 나옵니다. 이 “여시”가 어떤<여시>인가. 누구든지 자신 있으면 내가 묻기 전이라도 얘기하십시오. 경산림(經山林)을 다 마칠 때까지 이 여시(如是)가 숙제(宿題)가 될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참말로 깨칠는지도 모릅니다. 뉴우톤이 사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류 인력(萬有引力)의 원리를 발견(發見)하듯이 법문 듣고 오고가고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깨칠 수도 있습니다. 옛날 스님들 깨친 얘기를 들어보면 닭 우는소리를 듣고 깨치고, 물 내려가는 소리 듣고 깨치고, 복숭아꽃이 활짝 펴지는 것을 보고 깨치고, 사람들 싸우는 소리를 듣고 깨치기도 하고 상여 나가는데 상주(喪主)가 “아이고”하고 우는소리 듣다가 깨치기도 합니다.

  이 “여시”에 금강경의 내용 전체가 들어 있는데 이것을 숙제로 해서 똑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뉴우톤처럼 자나 깨나 오거나 가거나 법문을 들을 때나 식사(食事)를 할 때나 이 숙제만 가지고 있으면 홀연히 깨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이런 “여시”를 완전히 대답할 수 있는 분들이 몇 분 계십니다. 우리가 잘 모르고 다같이 눈 둘 있고 코 하나 있고 하니 평범한 사람인 줄 알고 있지만 설사 우리가 그 분이 도인(道人)인 줄 모르고 산다 하더라도 이런 분이 우리나라에 계신 것만 해도 우리한테는 큰 은혜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용심(用心)이나 행동이 나만도 못하다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보살(菩薩)이라 한 말은 보리(菩提)와 살타(薩埵)가 합해진 말인데 보리 곧 깨달음은 깨달음이고 밑에 살타 곧 중생은 아직 중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니 용심이 이러니 행동이 저러니 하고 함부로 말하다가는 까딱 잘못하면 큰 죄를 짓기 쉽습니다. 견성(見性)을 해서 깨달았다 해도 중생 놀음하던 버릇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것을 당장 떼어 낼 수는 없습니다.

  이번의 금강경 산림 가운데 정말 깨쳐서 <여시>에 대한 도리를 아는 사람이 생기고 경을 알고 대답할 사람이 생기면 참으로 경사(慶事)지만 그렇게는 못된다 하더라도 알음알이의 분별로라도 알 수 있는 데까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경을 혼자서만 보는 것보다는 남하고 이렇게 저렇게 토론(討論)을 하고 같이 연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강원(講院)에서도 나 혼자서는 밤새도록 보고 새벽에 보고 아침에 보고 낮에 보고 해도 이해가 잘 안되다가도 서로 토론을 하는 가운데 정신이 번쩍 나서 풀리어집니다. 그것은 일종의 오기(傲氣)로서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주의(注意)를 집중하는 바람에 정신이 통일되어 알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정신을 희미하게 가지니까 그렇지 정신을 일념으로 통일하여 마음자리에 가깝게 접근하면 <여시>의 지혜가 열리게 마련입니다.

 

(2) 견성해도 대승행 닦아야

  그래서 반야경(般若經)의 실상반야(實相般若), 곧 아공(我空), 법공(法空), 구공(俱空)을 깨달았으면 그런 다음에는 보시(布施)를 하라, 그리고 육바라밀을 다 행하라, 하는 것은 실상 반야만 지키고 있으면 그것은 소승(小乘)의 나한(羅漢) 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를 처음부터 제대로 배운 사람은 초견성(初見性)을 해서 반야가 열렸다 해도 이런 잘못은 없습니다.

  요새 참선(參禪)하는 수좌(首座)들이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은 하지 않고 참선 하나만 제일이라고 해서 복을 짓지 않고 중생제도(衆生濟度)할 줄도 모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경지(境地)에 들어가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 된 것인 줄로 알고 공(空)에 떨어질 것을 염려(念慮)하여 육조대사께서도 나무라신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아공(我空). 법공(法空). 구공(俱空)의 경지를 체득(體得)했으면 그때부터는 오로지 중생의 제도를 위해 전념(專念)하라는 것입니다.

  우주의 일체 중생을 하나도 남김없이 제도하라. 제도를 하되 실상반야(實相般若)가 천당(天堂) 사람도 되고 태생(胎生). 난생(卵生)도 되고 지옥(地獄)도 되고 한 것이니, 그 사람을 근본적(根本的)으로 내가 고쳤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르쳐 지도(指導)했다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그런 것 느끼지 말고 저건 내가 제도한 중생이거니 저건 내 신도(信徒)거니 내 제자(弟子)거니 그런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법문(法門)을 듣고 배우는 중생들에게도 듣고 배운 건 다 알고 나면 잊어버리고 들을 줄 아는 그것도 깨치도록 해서 지도를 받았거니 배웠다 거니 하는 아상. 인상이 없어지도록 지도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시(布施)하고 계행(戒行)도 잘 지키고 인욕(忍辱)도 하여 남이 뭐라고 욕(辱)을 보이더라도 다 참아서 참았다는 생각까지 없이 참으라는 것입니다. 남이 욕한다고 야단 치고 보복(報復)하고 칭찬해 준다고 좋아하고 이러다 보면 번뇌(煩惱)의 생사심(生死心)만 늘지 언제 보리(菩提)를 성취(成就)합니까. 그래서 육바라밀(六波羅蜜)이 근본이지만 반야를 깨친 다음에는 그래서 나의 업보(業報). 망상(妄想)을 쉬고 녹이는 데는 인욕(忍辱)이 중심이 됩니다. 남이 칭찬을 해도 들은 체 만 체할 것도 없고 남이 욕을 하고 때려서 반죽음이 되었어도 “왜 그러냐”고 한마디 따질 것도 없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이 마음자리는 어제도 이 모양이고 오늘도 이 모양이고 내일도 이 모양이고 여려 천만 년 전에도 지옥에 갔을 때나, 천당에 갔을 때나, 성불(成佛)한 뒤나 똑 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다른 건 모두 다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생겨나고 하는 갈팡질팡하는 허망무상(虛妄無常)한 존재이지만 이 마음자리는 중생이나 부처나 다 같은 여여부동(如如不動)한 자리이기 때문에 온 중생이 두루 다 평등한 것이므로 내가 깨우쳐 준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부처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중생이 본래부터 부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정말 따르는 사람이라면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내가 부처 되는 방법이고 번뇌를 해탈하는 방법인 줄 알아야 하고 당장 천하태평객(天下泰平客)이 되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거나 실패를 했다 성공을 했다.” 그런 것이 없는 생활입니다.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현실(現實)은 마음에서 생긴 꿈이니 이런 식으로 알고 내일부터라도 흉내 내어 살아 봅시다. 오늘 저녁부터라도 당장 그렇게 하겠다고 결정하면 잠을 못 자고 밥을 못 먹어도 능률이 더 나고 근심 걱정이라곤 하나도 없어집니다. 이제는 죽고 살고 흥망성쇠(興亡盛衰). 시간세계(時間世界)를 다 초월(超越)해서 망각(忘却)했기 때문입니다. 공포증(恐怖症)이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있고 욕심이 앞서 있으면 자기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정구장(庭球場) 앞을 지나치던 정구선수가 친구의 권유(勸誘)로 아무 부담 없이 잠깐 쳐보려는 생각으로 몇 번 친 것이 선수 생활 십년 동안에 한 번도 쳐 본 일이 없는 아주 훌륭한 볼을 칩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꼭 이기겠다는 욕심이나 지면 큰 일 이라는 공포심이 없이 아무 생각 없는 무심(無心)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부처가 정구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무심(無心)한 근본 자성 자리에 합하기만 하면 이런 묘한 기술(技術)이 나옵니다. 권투나 축구나 검도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기술을 연습한다는 것도 알고 보면 본래 만능(萬能)하던 마음자리가 안심(安心)이 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심만 되면 세계 최고의 기술이 나옵니다. 글씨를 쓰는 것도 잘 써야 되겠다는 공포증(恐怖症) 때문에 잘 안 써집니다. 왕희지(王羲之) 같은 이도 어느 날 친구의 연회(宴會)에 초대되어 만취(滿醉)하여 돌아와서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한 줄 썼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깨어 보니 자기로서는 십년 백년이 걸려도 쓸 수 없는 명필(名筆)이 있어서 “어느 신선(神仙)이 와서 나를 깨우쳐 주려고 써 놓은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며칠 뒤에야 자기가 취중(醉中)에 썼다는 것이 기억(記憶)이 됐는데 늙어 죽을 때까지 그 글씨의 십분의 일도 따라 갈 수가 없었다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글씨도 무심하면 자연히 명필이 되고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 조건 없이, 어디에고 이끌림 없이, 남을 위한다는 생각 없이(應無所住) 남을 도와주고 보시를 행한다면(行於布施) 큰 보람으로 전지전능(全知全能)한 능력을 내어 큰 공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에 머무름 없이 부주상으로 보시(不住相布施)하면 그 복덕이 한량없이 많아서 생각으로는 헤아려 볼 수 없는 무한대한 복덕을 얻게 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3) 불입문자 교외별전의 자리

  그러면 머무른 데 없이 보시를 행한다(應無所住 行於布施)함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시하는 것을 뜻하는가. 앞에서도 말한바 있는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버리는 생활. 육체 생활을 정리해서 하루 종일 나만을 위해 살던 생활을 남을 위해서 사는 생활로 차차 돌리고 탐욕만을 위해 살던 생활을 정리해서 참을 위해서 사는 생활로 돌리며 오직 남만을 위해서 사는 보살행을 하라는 말입니다. 보살행은 본래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이라고 하여 위로는 부처님의 보리. 열반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뜻이니 보리라 함은 생사도 열반도 없고 시간도 공간도 남자도 여자도 부처도 중생도 초월하여 초월한 그것까지 없는 자리를 깨달은 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보리를 깨쳐서 무심한 마음으로 오직 남을 위해 봉사하는 생활을 보살행이라 합니다.

  내가 마음이라고 하는 이 마음은 생각도 아니고 생각 아닌 것도 아니고 또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몇 시간 얘기를 계속해도 피로가 안 오는 자리를 말합니다. 이 마음은 글이나 지식으로 분별해서 알아질 수 없는 자리이므로 “불입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도리라 합니다. 말이나 문자를 가지고 설명할 수 없으므로 석가세존께서 가섭존자(迦葉尊者)에게 이심전심의 법으로 전법하셨으므로 교 밖에 따로 전했다 하여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합니다. 또 이 자리는 말이나 글로 가르치는 것은 오히려 간접적인 방편에 불과하므로 마음을 직접 가르쳐서 그 본성을 깨우치게 함으로 응무소주(應無所住)해서 이생기심(而生其心)하는 도리로 성불하게 하는 법이 바로 선종(禪宗)입니다.

  그래서 대선사(大禪師)에게 법문을 청할 때나 주요한 의식을 할 때면 늘 이런 게송(偈頌)을 외웁니다 “아유일권경 불인지묵성 개권무일자 상방대광명(我有一卷經 不因紙墨成 開卷無一字 常放大光明) 나에게 한 권의 경전이 있으니 사람마다 다 이 경전이 있지만 그러나 이 경전은 종이나 먹으로 쓴 글씨거나 인쇄 제본해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므로 펴 봐야 한 글자도 없다. 이렇게 종이나 먹으로 된 책이 아니어서 한 글자도 없는 이런 경전이 나에게 한 권이 있는데 상방대광면(常放大光明)”이라, 항상 큰 광명을 발하여 전 우주를 환히 비추고 있다. 이것이 곧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금강경의 믿음으로 보면 반야(般若)고 내가 항상 말하는 마음입니다. 이 반야. 마음을 얻어서 중생제도를 위해 필요할 때면 손이고 발이고 눈이고 목숨이고를 돌보지 않고 다 보시하는데 지기를 희생했다는 생각도 중생이 구제됐다는 생각도 없이 하는 것이 보살행입니다. 이것이 “응무소주”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4) 부처님의 설법순서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는 제자들이 대개 청법을 해 오는데 무엇은 어떻게 해야 하고 그 뜻은 무엇인지 한 가지 두 가지 세 가지 때로는 열 가지 백 가지로 여쭈어 옵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처음 물은 것부터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맨 나중에 물은 것부터 먼저 한 문제 한 문제 설명해 주십니다.

  금강경도 제2절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에서 수보리존자가 먼저 “어떻게 마음을 머무르오며(應云何住)”를 여쭈었고 나중에 “마음을 어떻게 항복하겠사옵니까(云何降伏其心)”하고 두 가지를 여쭈었는데,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제3 대승정종분에서 나중에 여쭈어 온 “마음 항복 받는 법”을 먼저 말씀하셨고 먼저 여쭈어 온 “마음 머무는 법”에 대해서는 제4 묘행무주분에서 나중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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