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소총 제608- 어리석은 체하며 속이다 (知奸飾愚)

 

옛날에 한 상번 향군(上番鄕軍)1)이 있었는데,

매우 교활하고 사기 행각을 일삼아 이 자에게 속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1)상번 향군(上番鄕軍) : 시골관아 소속 군인이 서울 각 부처에서 일정 기간 근무하고 내려가던 제도에 따라 차출되어 올라온 군인.


하루는 이 사람이 쉬는 날,

서울 거리를 거닐다가 닭 파는 가게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수닭 한 마리가 유달리 크고 털 색깔과 아롱진 무늬가 특이하여

다른 닭들과는 완연히 달랐다.

이에 향군이 그것을 보는 순간,

기발한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는 것이었다.

'옳거니! 저 닭을 이용하여 서울 사람 좀 등쳐먹어야겠다.'

이와 같이 작정한 향군은 가까이 다가서서,

그 닭을 쓰다듬고 만지며 감탄을 연발하다가 닭 주인에게 물었다.

"이것이 닭은 아닌 것 같은데 무엇인지요?

일찍이 시골에선 못 보던 것으로 매우 기이하게 생겼습니다."

닭 주인이 이 말을 들으니,

시골에서 올라온 향군으로 어벙하고 어리석은 산골 사람처럼 보여

속으로 웃으면서,

"아, 그건 봉(鳳)이라는 것입니다, 매우 진귀한 동물이지요."
하고 슬쩍 속여 대답을 했다.

이에 향군은 일부러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혀를 내두르며 놀라는 체 하면서 그 닭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내 일찍이 봉황이란 이름만 들어보았지

아직까지 그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지금에서야 보는구려.

주인장 이 봉을 나에게 팔지 않겠습니까?

내 집안의 보물로 삼고자 합니다."

"아, 사시겠다고요? 아끼는 것이긴 하지만 그럽지요."

그래서 값을 물으니 닭 주인은 20냥이라 했고,

향군은 크게 기뻐하는 체하며 선뜻 20냥을 건네주었다.

향군은 그것을 붉은 비단 보자기에 싸서

옻칠을 한 좋은 상자에 담아 형조판서 집을 찾아간 뒤,

대문에서 두 손으로 높이 받들고 들어갔다.

 

마침 판서가 마루에 앉아 있기에,

향군은 뜰 아래 꿇어앉아 아뢰었다.

"판서대감!

소인이 마침 봉 한 마리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들으니, 봉은 나라의 상서러움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기에,

소인의 정성을 전하께 바치고자 하옵니다.

원하옵건대, 판서대감께서 전하께 진상하시면

큰 은총을 내리실 것으로 생각되옵나이다."

"뭐라고! 봉이라 했느냐? 어디 가져와 보려무나."

곧 판서는 사람을 시켜 열어 보라 하니,

봉이 아니라 한 마리의 닭이었다.

이에 판서는 목소리를 높여 향군을 꾸짖었다.
 

"이 놈아! 이것은 봉이 아니라 닭이니라.

네 어느 안전이라고 그 같은 망언으로 장난을 하느냐?

죄를 면치 못하리라."

"옛! 닭이라고요? 그러시면 판서대감!

소인이 이것을 비싸게 샀사오니,

그 값을 변상 받게 조처해 주옵소서."

"뭐라고? 누구에게서 얼마를 주고 샀단 말이냐?"

"예, 아뢰옵니다. 종루 거리에서 어떤 사람이 

봉이라고 하면서 값은 50냥이라고 하기에,

소인이 돈을 아끼지 않고 그대로 주고 샀사옵니다.

정말로 이것이 닭이라고 한다면 소인을 속인 죄가 무거울뿐더러,

50냥이나 받은 것 또한 도적과 다름없지 않사옵니까?

서울 사람들의 맹랑한 짓이 이와 같사오니,

엄벌을 내리시어 50냥을 돌려받게 해주시옵소서."

향군은 이렇게 엄살을 떨면서 흐느끼며 호소하는 것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던 형조판서는 아랫사람에게

속히 그 닭가게 주인을 잡아오라고 명했다.

얼마 후 닭을 팔았던 자가 끌려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네가 이 닭을 봉이라고 속여 저 향군에게 팔았느냐?"

"예, 그렇사옵니다. 하도 사고 싶어 하기에 팔았습니다."

닭 가게 주인이 그렇다고 순순히 시인하기에,

판서는 다시 엄하게 꾸짖었다.

"듣거라, 닭을 가지고 봉이라 속여 50냥이나 받았으니,

이는 밝은 대낮에 도적질한 것과 다름없지 않느냐?"

이에 닭 주인은 어이가 없었다.

"저 사람이 이 닭을 보고 너무나 칭찬을 하고 기이하게 여기면서 묻기에,

그 우둔함이 우습게 보여 소인이 장난삼아 봉이라고 한 것이옵니다.

게다가 값을 물어 역시 웃으면서 20냥이라고 대답하였사옵니다.

그러니까 저 사람이 곧바로 20냥을 내고 사가기에,

소인은 속으로 너무 우스워 하면서도 받아 두고는,

잘못된 사실을 알고 물리러 오면

다시 돌려주려고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그러하오니 소인이 고의로 속여 이 같은 행동을 한 것은 아니옵니다."

이 말을 듣더니,

향군은 소리 내어 통곡을 하면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소인이 정말 50냥을 주고 샀거늘 저 사람이 20냥이라고 하니,

생떼를 써서 남의 돈 30냥을 빼앗으려는 술책을 부리고 있사옵니다.

하늘 아래 이런 원통한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입니까?

판서대감께서는 엄하게 문초하시어,

무식한 시골 사람으로 하여금

큰 재물을 손해 보는 일이 없게 해주시옵기를 바라옵나이다."

형조판서는 한참 동안 두 사람을 내려다보다가 엄명했다.

"상인은 들어라!

너희 장사꾼들은 평소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여

백주 대낮에 부당하게 재물을 빼앗는 일이 허다하였거늘,

지금 또 변명으로 농간을 부리려고 하니 어찌 되겠느냐?

닭 한 마리의 값이 7.8냥에 지나지 않는데

네 입으로 20냥을 불렀다 했으니,

이 또한 도적질이 아니고 무엇이더냐?

이로 미루어 보면 저 사람이 50냥을 주었다는 말도

거짓이라 할 수 없거늘,

너는 민심을 어지럽힌 죄로 엄벌을 면치 못할 것이니라."

그러자 닭 가게 주인은 더 이상 변명해 봐야

소용없을 것으로 알고,

고개를 숙인 채 크게 한숨을 쉬면서 아뢰었다.

"판서대감!

소인이 잠시 농담을 한다는 것이 그만 저 사람을 속인 셈이 되어

이 지경에 이르렀사오니, 달리 변명할 말이 없사옵니다. 헤아려 주시옵소서."

이에 형조판서는 닭 가게 주인에게 곤장 50대를 내리고

50냥을 변상하라고 판결하니,

향군은 잠깐 사이에 돈 30냥을 벌고는 백배 사례하고 물러갔다.

이와 같이 교활한 사람의 지독한 농간은 법으로서도 가려내기 어려운 일이니,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혀를 차면서 두려워했더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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