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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은 ‘3門3朝’ 관례에 따라 광화문-흥례문-근정문을 차례로 거쳐 근정전에 이르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권역은 나라의 위엄을 상징하는 정연하고 엄숙한 공간이다.
왜놈들은 조선을 병탄(倂呑)하자마자 우선 이 왕궁의 위엄부터 해체했다.
광화문을 뜯어다 경복궁 동쪽 구석에 앉혀놓고 흥례문과 근정문은 아예 헐어버렸다.
그리고는 발칙하게도 근정전을 가로막고 그 앞에다 총독부 건물을 세웠다.
500년 유구한 역사적 전통과 부조화를 이루는 서양식 석조건물이었다.
모두가 조선의 맥을 차단하여 이땅을 영구히 지배하려는 악의적인 계산에서였다.
이 야만적인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한 김영삼 대통령의 용단은 길이 역사에 남아야 한다.
이후 경복궁을 복원하여 마지막으로 광화문을 제자리에 앉혔지만,
광화문-흥례문-근정문 사이에 있던 수많은 전각들은 다 살리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쓰임새가 없기 때문에 비워두는 게 훨씬 유용하다는 판단에서다.
전각들이 헐려나간 자리에는 세월이 키워놓은 각종 수목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고궁의 미감을 더해주고 있다.
거대한 건물 안에 집무와 생활과 연회 공간이 배치되어 있는 서양의 여러 왕궁은 물론 경복궁과 가장 유사한 중국의 자금성과도 달리, 경복궁은 용도를 달리하는 공간들이 담장으로 분리되어 대소 출입문을 통해 은밀히 소통되는 아기자기한 궁궐이다.
그래서 서양의 국왕들도 경복궁을 돌아보고 나면 그 지혜롭고 여유 있는 공간배치에 경탄해 마지않는 것이다.
경복궁은 태조 3년(1394년) 8월 태조가 직접 좌향을 결정한 뒤 9월 신도(新都)궁궐조성도감을 설치했으며, 12월 종묘 터닦이 공사를 시작으로 겨우 10개월 만인 다음해 9월에 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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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이란 명칭 역시 중국 고전 「詩經」에서 따왔다.
근정전 서쪽 경회루는 연못에 두둥실 떠 있는 유쾌한 연회공간이다.
경회루에서는 요즘도 외국 주요 인사들을 상대로 한 국가적 연회를 벌이는데,
우리의 역사적 전통과 선조들의 문화수준을 알리는 효과적인 장소가 아닌가 한다.
근정전은 임금 즉위, 문무백관 조하(朝賀), 외국 사신 접견 등 국가 주요 의식을 행하던 곳으로 가장 큰 목조건물이다.
근정전을 볼 때는 차례로 광화문-흥례문-근정문을 거쳐 배경으로 다가오는 북악산과 인왕산의 변화를 살피는 게 제격이다.
공식행사에 참여하는 신하와 외국 사신들이 들어오던 행로다.
근정전을 관람할 때는 월대 남쪽 양 모서리에 앉아 있는 석견(石犬)도 놓치지 않는 게 좋다.
암수 한 쌍이 각각 다른 곳을 쳐다보는 해학적인 구도도 재미있지만,
어미가 안고 있는 새끼에게 별난 사명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미는 남쪽 왜구를 경계하여 짖고 있으며, 어미가 늙으면 새끼더러 대신 왜구를 경계하라는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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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전 월대의 석견처럼 궁궐 구석구석에 새겨져 있는 짐승들을 서수(瑞獸)라 하는데,
이 상스러운 짐승들은 지붕에도, 난간에도, 석대 아래도 골고루 배치되어 있다.
경복궁 서수의 으뜸은 영제교 양편 호안석축에 새겨놓은 네 마리의 천록(天鹿)이다.
영제교는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를 흐르는 금천(禁川) 위에 설치되어 있는 다리다.
금천은 궁궐에 잡귀의 범접을 금하고 풍수를 보완하기 위해 끌어들인 물길이다.
천록은 임금의 성정(聖政)이 두루 펼쳐지면 나타난다는 전설 속의 신령스러운 동물이다.
네 마리의 천록은 매우 생동감 있는 자세로 뚫어져라 물길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각각 익살맞고 독특한 표정을 띠고 있다.
그 중 한 마리는 마치 ‘메롱’ 하는 것처럼 혓바닥을 쏙 내밀고 있다.
‘천록 /경복궁’은 아래 주소창에서 소개한 바 있다.
http://blog.paran.com/kydong/44896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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