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학동기 남성원님이 동기홈피에,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6권의 첫머리부터 136쪽까지 기술한경복궁을 4회에 걸쳐 요약 해설한 것이 있어 경복궁 둘러보기의차원에서 여기에 발췌하여 올린다.

[1]

경복궁은 1395년에 축조되었고 자금성은 1420년에 완공되었다.

경복궁이 오히려 형님이니 자금성을 본떠 만든 게 아니라는 얘기다.

자금성은 24만 평, 경복궁은 14만 평이니 규모 면에서도 10분의 1이 아니라 5분의 3이다.

경복궁은 하다못해 내전 담장도 화사한 붉은 벽돌로 쌓고 십장생을 비롯한 아름다운 무늬장식이 새겨져

있지만 자금성은 미적 장식이 생략된 견고한 성곽이다.

경복궁의 규모가 자금성보다 작은 이유도 분명하다.

황궁은 5門3朝, 왕궁은 3문3조로 축조하는 관례에 따랐기 때문이었다.

즉 정문에서 정전에 이르기까지 황궁은 5개, 왕궁은 3개의 대문을 거치도록 되어 있었다.

중국을 상국으로 모시는 당시 아시아 주변국의 정치질서였다.

정전의 月臺도 황궁은 5단, 왕궁은 3단이었으니 건축물의 외형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경복궁은 각종 수목이 울창하여 다람쥐와 새들까지 어우러 노니는 풍요로운 삶의 터전인 반면,

자금성은 나무 한 그루 없는 살벌한 권력투쟁 공간이다.

자객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일체의 수목을 배제했던 것이다.

외형보다 중요한 근본적인 차이점은 관례의 제약을 받지 않는 건축철학이다.

자금성이 주변국에 위압감을 주기 위해 허허벌판에 광대하게 축조된 허세라면,

경복궁은 풍수지리학적 배치에 자연과 세심한 조화까지 아우른 미학의 진수다.

조선은 건국과 함께 새 도읍지와 새 궁터를 찾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계룡산과 한양을 두고 무학대사․정도전․하륜 등 당대의 실세들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결국 하륜의 국토균형론이 태조의 마음을 움직여 한양이 새 도읍지로 결정되었다.

충청도로 수도를 분할한 600여년 뒤의 노무현, 박근혜보다 합리적인 신하요 임금이었다.

궁터는 북악산을 진산으로 좌청룡에 낙산, 우백호에 인왕산을 앉히는 위치에 결정되었다. 바로 경복궁의 坐向이다.

궁 내외 어느 위치에서나 눈에 띄는 북악산․낙산․인왕산은 경복궁의 배경이요 정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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